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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31화 (231/284)

231화

77. 폭풍과 가랑비(1)

일개중국이라든지 오족공화와 전혀 상관없는데도 뜬금없이 공화국의 목표가 된 류큐는 상당히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우선 그들은 아직 사쓰마의 지배하에 있다.

암허스트는 기꺼이 일본 전체와 싸워 가며 류큐를 빼앗을 용의가 있었지만, 중국에서 하도 많은 일이 터져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중 잘려서 돌아갔다.

그리고 신임 공사 조지 스턴튼은 류큐 정복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 계획의 실행자가 될 예정이었던 존 메이틀랜드 소장도 귀국했기 때문에 영국군의 최전선은 여전히 대만이었다.

류큐의 쇼코(尚灝) 왕은 여러모로 같은 시기 재위한 이공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즉위 초기에 매우 의욕적이었고, 기근과 재난을 많이 겪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해보지만 잘 안 되어서 낙담하고 정치에 관심을 잃은 것 등이 그렇다.

그는 무려 26명의 첩을 거느리고 사치와 방탕에 빠졌다. 중국의 고대 제왕에 비하면 소박하다 하겠으나 여기는 무한의 자원이 솟아나는 대륙이 아니라 기근과 환경 파괴, 수탈 등으로 거덜이 난 자그마한 섬 류큐였다.

허나 저 북쪽의 전설적 정력군주 왕건을 흉내 내기엔 그의 남자력이 조금 모자랐다(왕건은 부인이 29명이다). 그는 결국 권좌에서 강제로 은퇴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쇼코 왕은 다시 한번 의욕을 되살렸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이 일대는 세 가지 세력이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영국에게 두드려 맞고 전투 의지를 잃은 사쓰마, 당장 일본 전체와 상대할 의지까지는 없는 영국, 그리고 그냥 뭐든 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청국이 그것이다.

여기에 고려가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오히려 좀 지나친 편이라 쇼코 왕은 그들을 주의했다. 그의 직업은 왕인데, 정시준은 이 시대 누구보다 더 많은 왕을 사로잡은 전문 사냥꾼이다.

어쨌든 고려는 그가 바라는 ‘균형과 절제’와는 여러 의미로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 사정을 고려한 끝에, 쇼코 왕은 원래 역사와 180도 다른 결정을 내렸다.

1816년,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및 류큐 일대를 조사하던 탐험가 바실 홀을 비밀리에 긴밀하게 맞이한 것이다.

심지어 이는 류큐의 최고 유력가 삼사관(三司官)도 모르는 일이었다.

쇼코 왕의 예상대로 바실 홀은 그저 측량이나 하러 온 탐험가가 아니었다. 그는 스턴튼이 보낸 일종의 비공식 사절이었다.

그는 그 우울해 보이는 얼굴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표정을 지었다. 길게 설득하지 않아도 쇼코 왕이 원하는 것은 스턴튼이 원하는 것과 일치했다.

“국왕 폐하의 뜻이 저희 극동아시아 동맹국들과 같다니 매우 기쁩니다. 말씀하시는 것은 일종의 중립국(neutral country)이겠지요.”

쇼코 왕은 서양 오랑캐를 친견하는 굴욕도 감수한 상태였다. 하긴 왜구 해적 떼의 일개 동네 칼잡이 대장에게도 고개 숙인 류큐가 더 무슨 자존심이 남아 있을까.

왕은 작당모의하듯 낮게 말했다.

“그렇다. 이전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부터 황제가 더 이상 번신을 보호하지 않음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이기리스(영국)는 그대의 말에 따르면 병화를 일으키기보다 무역을 원한다고 했다. 맞는가?”

“물론입니다. 우리 국왕 폐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정의를 집행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쓰마에게 폭정을 그만두고 퇴거하기를 권고한 것이지요. 저 야만한 자들이 말을 듣지 않아 다소의 불행한 충돌이 일어나기는 했습니다만, 폭력은 결코 영국의 본의가 아닙니다.”

쇼코는 그 개소리를 감명 깊게 들어 주는 척했다. 왕 노릇도 때로 이처럼 더럽다. 군주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은 명심해야 마땅하다.

“그런가. 저 시마즈 가문이 더 이상의 노략질을 그만두고 떠난다면, 우리는 이기리스와 거래를 트고 여러 나라가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지혜로운 노인의 위를 자처하겠다.”

“훌륭하신 결단입니다. 폐하. 영국은 류큐 왕국의 결정을 존중하며, 주권과 영토를 보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영국이나 사쓰마나 똑같은 놈들이다. 당연히 사쓰마가 물러가자마자 영국이 은근슬쩍 눌러앉고 같은 짓을 할 게 뻔했다.

평소였다면 바실 홀이 아니라 중국 공사 조지 스턴튼이 와서 사탕발림을 한다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류큐의 법전을 완비했다는 쇼코 왕의 현명함은 여기에서 빛났다.

지금도 왕은 영국인을 믿지 않은 것이다.

다만 영국이 어쩔 수 없이 자기 말을 지키게 만들 하나의 변수가 있을 뿐이다. 쇼코는 그것을 꺼내 들었다.

“조선……. 근래 옛 이름을 회복하여 고려라 칭하는 그곳에서도 무역을 청하였다. 우리는 오로지 사해 동포와 우호를 맺는 것 말고 다른 뜻이 없는지라, 이기리스에 장사를 허한다면 당연히 고려에도 허할 생각이다.”

바실 홀은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도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줄 알고 왔지만, 이렇게 되면 영국이 혼자 집어삼키기가 좀 귀찮아진다.

그러나 이미 중국 공사와 고려 공사대리, 그리고 공화국 의장이 협의한 사안이다. 전령에 불과한 그의 권한으로 뒤집을 수는 없었다.

***

영국과 고려의 합의 자체는 간단하다. 그러나 이면의 사정은 약간 복잡했다.

조지 스턴튼은 현 총리 젠킨슨의 정책을 답습했다.

현재의 영국은 있던 식민지도 날리는 판이다. 게다가 전쟁하느라 빚도 많으며, 야수의 심장 왕 첸 때문에 전쟁에서 이겼는데도 금융 시장의 회복이 늦춰졌다.

아시아에서 더 이상의 확장주의적 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물론 20세기 후반 대영제국의 몰락과는 다르다.

영국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체제를 완비하고 19세기 중반부터 파괴적인 대 인류 종속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일시적 웅크림일 뿐이다.

어쨌든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잠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스턴튼이나 젠킨슨이 무슨 인격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들 역시 영국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결정은 그저 논리적 사고의 결과다.

최종적으로 영국이 류큐를 식민지화하려면 그 안의 타국 세력을 내쫓아야 한다(슬프지만 류큐 자체의 세력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헌데 고려와 분쟁을 일으키는 선택지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영국은 친구가 적다. 동아시아에서는 더욱 그렇다.

만약 고려와도 싸울 기색을 보이면, 고려는 즉각 청에 무릎 꿇고 청이 영국과 걱정 없이 맞서는 틈을 타 영국의 뒤를 찌를 것이다.

그것은 극동 영국 세력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준도 그러한 예측과 입장에 전폭적으로 찬성이었다.

스턴튼이 바실 홀에게 말했던 ‘거래’는 바로 이것이었다.

시준은 영국과 고려가 사이좋게 류큐와 평화적 무역을 권고하며 그 대가로 류큐에 독립과 안전 보장을 주자는 사업을 제안했다.

영국은 일본과 직접 충돌 없이 원하던 개항을 이루고, 고려는 영국의 묵인을 얻어 대중국 공작에 매진한다.

스턴튼 역시 받아들였다. 결국 류큐의 고려-영국 동시 수교를 조건으로 한 류큐 중립국화 구상은 이미 오래전 그려질 수 있었다.

시준이 만상 시절 홍경래를 상대로 발휘한 특기가 다시 펼쳐진 셈이다.

맞서 싸울 수 없다면 엮어야 한다.

영국도 ‘되도록’ 중국의 정권 전복을 용인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난관에 더해 류큐에서의 갈등까지 감당해야 하는 데다, 고려가 류큐를 미끼로 일본과 연합해 영국에 칼끝을 돌릴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되도록’의 허용 범위는 이미 예전에 넘어선다.

결국 영국은 러시아가 정말 심각하게 남하하지 않는 이상에야 방해하지 못한다. 그동안 시준이 열심히 밑작업을 쳐서 중화 혁명당으로 하여금 개항장의 보장을 그대로 승계하도록 한다면 영국이 나설 이유는 정말 없어진다.

그리고 공화국이 봉건 왕조의 목표가 될 이유도 없어진다. 봉건 왕조가 사라질 테니까.

‘하나의 중국’을 달성한 중화 혁명당이 실제 중화인민공화국처럼 마음을 바꿔 한반도에 이빨을 드러내는 사태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우선 고려와 비교도 못 하게 광대한 중국 혁명이 시준의 생전에 완수가 될지도 의문이거니와, 중화 혁명당이 그런 한가한 욕심을 부리도록 내버려 둘 러시아가 아니다.

러시아인의 확장적 행보는 21세기에도 그 방법론에서 나치를 충실히 본받으며 계속되고 있다. 타타르 후손이라 그런지 자꾸 몽골 제국 재현하려 드는 러시아가 중국을 가만 내버려 둘 리 만무하다. 거기는 원래 타타르 땅이었다.

무엇보다 임칙서가 그 모든 사항을 극복하고 군사적 모험을 결심한다 해도, 고려보다는 당연히 영국 개항장이 먼저 목표가 된다.

타국에 대한 추가 정복보다는 실지(失地)에 대한 회복이 우선되는 것은 당연하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사람들을 설득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영국-고려, 어쩌면 러시아까지 포함된 연합군의 대중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시준은 그것까지 ‘밑작업’ 중에 충분히 임칙서에게 암시할 생각이었다.

정약용이 없다 해도 공화국 외사통호부에는 임상옥과 박득출, 그리고 김시택이라는 세 명의 훌륭한 부부장이 있다.

제1기 정부 5년간, 그들은 얼렁뚱땅 임명된 코드인사에서 숙련된 외교 책임자로 성숙해 있었다. 이런 현기증 나는 구상이라 할지라도 실무를 충분히 수행 가능하다.

이 반년간 시준이 외교 분야에서 준비한 일을 요약하자면 이 정도였다.

***

그러나 그런 치밀함을 모르는 바실 홀은 즉흥적인 딴생각을 슬며시 떠올렸다.

혹시 여기에서 자신이 아시아 정세의 키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자네 역할이 중요’하다던 스턴튼의 기대에 초과 부응하여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탐험가의 마음을 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실 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물론 폐하의 결정은 폐하의 정당한 주권이십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국왕 폐하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의 감정은 씻을 수 없는 우려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우려라니?”

“지금까지 무지한 신민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의 무분별한 난입을 거절해 왔던 폐하의 정책을 생각하면, 글쎄요. 류큐의 군신과 마찬가지로 군주와 신, 그리고 그들이 가르친 정의에 존경을 바칠 줄 아는 우리 영국인이라면 모를까…… 왕의 다리에 이어 목까지 베어버린 반왕 정시준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영국도, 프랑스도 그러했고 지금 고려도 그렇지만 공화국을 운운하는 자들이란 결국 반란분자. 국왕 살해자(King Slayer)들입니다. 게다가 그 난폭한 사상을 역병처럼 퍼뜨리지요.”

쇼코 왕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그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가 영국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비열한 폭력배나 교활한 사기꾼으로 정평이 난 자가 누군가를 욕했다고 해 보자. 보통은 그 누군가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진 않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그 누군가가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바실 홀의 실수가 딱 그랬다.

쇼코 왕은 헌신적 충고를 기쁘게 고심해보겠노라고 대답하고 바실 홀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고려인민공화국이 정말로 믿을 만한 자들이라 확신했다.

바실 홀은 충분히 지적인 저술가이며 존경받을 만한 경력의 탐험가였다. 허나 그런 그에게도 이 실수는 불가항력에 속하는 것이었다.

원래 영국에 도덕이란 게 없는 건 사실인 데다, 여기에서도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열심히 영국을 씹어대고 있고, 지난 몇 년간 암허스트 남작이 그 험담의 진실성을 더할 나위 없이 증명했으니 말이다. 이건 이미 일개 비공식 사절 한 명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쨌든 류큐 중립국화라는 영국의 의지는 전달했다. 바실 홀은 개인적인 아쉬움만 제외하면 실패도, 손해도 보지 않았다.

사실 여기에서 치명적인 것은 쇼코 왕의 실수다.

시준이 역사에 조금 더 관심이 깊었다면 지금 쇼코 왕이 하는 짓이 누구와 비슷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라에는 힘이 하나도 없고, 앞으로 생길 전망도 없다.

그렇다면 주위의 강대국을 끌어들여 그들끼리 견제하게 하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자기 위로성 망상도 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이이제이(以夷制夷) 네 글자를 사서에 전한 학자들의 죄가 크다.

이 전망이 비현실적인 이유를 늘어놓자면 끝이 없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러한 견제 구도는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강대국의 수뇌부보다 자국의 수뇌가 더 똑똑하다는 전제하에서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백 년 뒤의 외교천재 고종도, 그리고 지금 백 년 앞서 비슷한 착상을 해낸 선구자 쇼코 왕도 그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증명되었다. 폭풍 같다기보다는 가랑비 같은 방식으로.

***

영국과 고려는 이러한 거래에 양자 만족했다.

문제는 중요한 거래 당사자(라고 스스로 생각할) 사쓰마에게 아무도 안 물어봤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화국이 반동에게 보내는 질문은 총칼뿐이다. 중국 공사의 예측대로 시준이 강령 첫 번째에 ‘인민의 모든 무력’을 운운한 것은 이런 이유다.

류큐를 친다. 다시 말해, 혁명의 이름으로 압제자 사쓰마를 공격한다.

명년 봄이라는 전투 개시 시점도 의도된 것이다.

그때는 1년을 채운 영국 해군이 돌아간다. 이미 수병은 점진적으로 교체된 뒤고, 장교급도 이제 태반이 극동함대로 자리를 옮기거나 본국에 귀환했다. 영국은 일본에게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 뻔뻔하게 오리발 내밀 수 있을 터이다.

이제 혁명해군은 머리에 볏짚 묶고 능란한 영어로 내 엉덩이나 핥으라고 외치며 조운선 털던 해적 집단이 아니다.

2기 공화국의 혁명해군은 수없는 교역과 항해 경험을 통해 충분히 훈련된 수병이었다. 베트남을 제외하고 이 해역에서 가장 훈련도가 높은 근대 해군이라 해도 좋다.

혁명력 7년(1817년) 봄이 되자, 시준은 꺼슬꺼슬한 턱을 문지르면서 혁명해군 별기함대의 첫 출정을 바라보았다.

이제 제법 아비를 알아보고 손까지 흔드는 명주의 모습이 아직도 망막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준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영길리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다고 하여도, 이 정도의 정예함이라니 대단하구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군사에 대해 전혀 모르던 시준도 주석 경력 7년쯤 되자 해군의 움직임에 대해 약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정식 수교국으로의 파견이었기에, 작년 이강회와 함께 온 영국 해군 장교들도 내키지 않는 대로 군사 고문단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물론 영국인이 어떤 놈들인데 공짜는 아니다. 공사대리 토마스 매닝은 류큐 문제에서 영국이 한발 양보하는 대신 사쓰마와의 결전은 고려 단독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기습이라기보다 이미 둘 다 알고 있던 사실의 확인이다. 시준도 영국 상대로 뜯어내기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조선 인민 해방전쟁 이후 제대로 된 전쟁을 해 본 적 없는 혁명군에는 실전 경험도 필요하다.

혁명군 또한 그런 총사령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유와 실천 전부에서, 혁명에 전복(顚覆, subversion)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혁명군은 임진년의 침략을 ‘그대로 뒤집는다’는 개념에 완전히 흥분했다.

원래 조선인인 고려 사람들은 200년 전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와 달리 이제 아무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을 향한 드높은 열의는 공화국 해병대 1영대장 김덕춘으로 하여금 뜨겁게 부르짖도록 만들었다.

“이미 인민이 반동의 정치하에 있는 데다, 그 왕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왜구 앞에 엎드려 있으니 이는 실로 두 겹의 반동입니다. 언제나 강하시고 언제나 이기시는 경애하는 주석 동지께서 걸출한 신념과 의지, 배짱으로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혁명을 승승장구에로 이끄시기에 성스러운 전 세계 동시 혁명의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시준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이 별기함대의 원정 총제독을 맡은 이강회가 주의를 주었다(시준은 말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 시점은 적절한 것이었다).

“동지의 뜻은 매우 드높으나, 혁명에는 삼가는 자세 또한 필요한 법. 우리의 적은 살마주의 해적이지 유구 왕이 아닐세.

내가 영길리에서 들은 좋은 말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하였던바 지금은 바로 뱀이 될 때! 우리는 일단 유구 인민을 돕는 거야. 거기 가서도 함부로 떠들면 쓸데없는 싸움이 또 생겨. 비둘기처럼 순정한 혁명의 나래를 펼 때도 곧 올 걸세.”

혁명군이 혁명을 전파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한다. 프랑스 혁명군이 앞뒤 없이 날뛰다가 전 유럽에게 두들겨 맞지 않았는가.

혁명의 본의대로, 유구 혁명은 어디까지나 유구의 인민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중국 혁명과 마찬가지다.

사쓰마 압제자를 깨뜨린 혁명군이 슈리 성에 가서 왕조를 뒤집어엎고 신위를 태우지는 않는다. 그건 영국이나 유구와 맺은 약속을 배반하는 일이므로.

다만 유구 사람들이 혁명군을 통해 주석 동지의 탁월한 예술영도가 빗발치는 것을 보고 혁명의 격정에 못 이길 수는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때부터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수평한 유구의 내부사안’인데 어떻게 고려가 연관되겠는가?

허나 그 전까지는 삼가야 한다. 김덕춘도 이해하고 입을 다물었다.

시준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짐짓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제독 동지의 말씀대로 당면에 있는 적은 도진(시마즈)씨의 가병, 저 사쓰마의 군대요. 밥 먹고 칼만 휘두르는 왜인은 예전부터 특히 사납고 강포하기로 이름났으니 부디 귀중한 혁명군의 목숨이 많이 꺾이지 않도록 하여 주시오. 그것만이 나의 바람이오.”

이강회가 자신 있는 태도로 주석에게 읍했다.

“저 반동의 시절에도 우리나라의 수군은 왜구와 싸워 이기지 못함이 없었습니다. 혁명으로 일신한 이 대함거선이라면 어찌 해적 무리를 걱정하겠습니까? 주석 동지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고 우리의 승전보를 기다려 주십시오!”

공포의 군주 세종과 파동함수의 파괴자 이순신. 열도를 떨게 한 두 거인의 이름은 시준뿐만 아니라 거기 나와 있는 모든 혁명간부 및 장병을 안심시켰다.

시준은 이강회의 손을 굳게 잡았다.

“제독 동지를 믿겠소.”

시준은 현생에서 특별히 일본에 대해 무슨 원한이 있지는 않다. 사쓰마는 알 바 아니지만 조슈는 좋은 사업 파트너이기도 했으니까.

특히 이미 결정권자들이 고려의 명약을 장복하고 있는 조슈는 만약 막부 차원에서 이 일에 대응할 경우 그 여론을 견제해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모리 후사아키의 주머니로 사라진 막대한 금은과 아편이 그 결정에 큰 기여를 했음은 특기할 필요가 없다. 모리 가문은 지난 몇 년의 착실한 무역으로 일본 전역에 약재를 유통시키며 많은 돈을 벌었고 그 일등공신 후사아키는 이제 영주도 무시할 수 없는 발언권자였다.

이게 시준이 영국과 달리 일본 전체와 싸울 걱정을 조금 던 이유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사쓰마 본토만 침공하지 않으면 막부가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전생의 기억도 가지고 있으므로, 시준이 일본 전체에 우호적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특별히 선제 침공의 죄책감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시준이 영일동맹에 대해 잘 모르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걸 알았다면 시준의 대일본 외교정책은 가일층 강경해졌을 테니까.

고려도 그 비난에 해당된다는 지적은 시준을 당황하게 하지 못한다.

현재 고려의 아시아 공식 입장은 어디까지나 ‘영길리 해적의 힘에 눌려 억지로 동맹을 맺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이 공작은 매우 쉬웠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인류의 영원한 두 가지 수치, 영국과 나치에 모두 붙어먹고 그 사악한 점만 골라 배운 놈들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미래 영일동맹을 모르는 시준의 짧은 지식만 가지고도 일본을 영국과 동렬에 놓기에는 충분하다.

황국 신민에게 정상적인 윤리 구조를 주입하는 데에는 방사선 요법이 최고다. 실제 임상사례가 이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허나 이는 다른 치료가 그렇듯 꾸준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시준이 알고 있는 것처럼 치료 후 100년도 지나지 않아 병증이 재발하게 된다.

누군가가 1945년 일본에 원자탄이 2개가 아니라 20개쯤 떨어졌어야 한다는 과격한 의견을 피력한다 하더라도 시준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시준에게 20개의 원자폭탄은 없다.

그러나 20척의 함대는 있었다.

시준은 마지막으로 떠나는 배를 바라보았다.

돛은 말할 것도 없이 타오르는 붉은색이지만 선체에는 방수를 위해 다른 유럽 선박처럼 검은 타르 칠이 되어 있었다.

검은 배가 항상 그렇듯, 그것은 일본에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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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쇼코 왕에 대한 대부분의 사항은 작중과 비슷합니다. 작중 ‘삼사관도 모르게’라고 나왔는데, 원 역사에서 쇼코 왕에게 정신병 판정 때리고 끌어내리는 게 이 삼사관입니다. 류큐판 ‘삼정승’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조선의 것보다 훨씬 강한 유력자들이었습니다.

류큐의 왕권이 그다지 강한 편은 아니라서 삼사관과 왕의 친족들이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꽤 있었죠. 그 사실에서 쇼코 왕이 삼사관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작중 전개는 그것을 반영한 것입니다.

2. 바실 홀도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의 궤적을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1816년 그는 조선 서부 해안과 중국 등을 측량하며 류큐도 방문하죠. 동아시아 방문 3년 전엔 자바를 탐험하고(지난 화에 나왔죠), 돌아가는 길에는 (자기 아버지 지인인) 나폴레옹도 인터뷰하는 등 상당히 정력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바실 홀은 이 항해 과정에서 유럽 최초로 조선에 대한 서적을 낸 사람 중 하나로, 책 이름은 <한국 서해안과 일본해의 대(大)류큐 섬에 대한 발견의 항해(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in the Japan Sea)>입니다.

그러나 원 역사의 쇼코 왕은 네덜란드와 영국이 보낸 교역 요청을 전부 거절하던 상황이라 그냥 방문객으로만 왔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게, 그때는 사쓰마와 막부에 이중 복속되고 청에도 조공하던 처지라 받아들이는 순간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3. 중립국 개념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대충 이때부터 영구한 중립국이라는 개념이 근대적 의미에서 확립된 것으로 봅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위스가 부여받은 지위가 대표적이지요.

4. 검은 배가 일본에 간다는 말은 짐작하시는 것처럼 쿠로후네 사건에서 따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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