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76. 여름이 없는 해(3)
지유는 크게 놀랐다.
“어머, 어머. 진짜 그 사람이 너보고 중국 가라고 했어? 이런 몹쓸 노릇이 있나!”
“아니, 시준은 날래고 중국말 잘하고 총포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들 보내라고 했지. 그런데 어차피 누굴 찾아도 내가 제일 나아. 중국말은 나도 좀 하고, 무엇보다 정치국에서 나선 얘길 했잖아? 선생님(정약용)과 시준을 빼면 그때 연경에서 그 아라사 노장군(베니그센)을 만난 사람은 나밖에 없어.”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유다.
행운과 근성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공화국이 중국을 거쳐 러시아와 접촉한다 하더라도, 레온티 베니그센을 바로 만날 수 있을지는 당연히 불확실하다.
정치국은 현재 차르가 베니그센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니, 베니그센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확실한 보장이 있었다면 시준은 중국에 누굴 보내는 대신 러시아가 다가오는 쪽으로 유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랑은 그런 이유를 대서라도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내가 신분을 알린 이상 안 좋은 소문이 돌지도 모르고, 그러면 너도 편치 않겠지.”
그것도 사실 완전히 들어맞는 핑계는 아니다.
안 좋은 소문은 기랑이 공식적으로 남자였을 때도 돌았다. 이로써 모든 일은 기랑이 아니라 시준 쪽에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 나는 괜찮아. 기랑아. 그런 일로 그 위험한 데에 여자가…….”
“내가 여자인 거 알았던 사람은 시준이나 너, 혹은 선생님이 처음이 아니야. 알고도 욕보이려 하지 않은 사람으로는 처음이지만……. 어쨌든 그때마다 때로는 도망치고 때로는 총질에 칼질까지 하면서 그럭저럭 잘 지켜 왔어. 너무 걱정하지 마.”
기랑은 어슴푸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진짜 이유를 말했다.
“게다가 나도, 더 있다가는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지유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하다가 밝게 웃었다.
“하긴,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자기는 전혀 모르는 채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단다. 툭하면 꼬리치는 시준이 나쁘지. 옛날에도 그것 때문에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내가 단속할게. 다시 생각해 봐. 응?”
기랑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돈이야 너희가 훨씬 더 많으니까……. 많이 고민해서 이걸 가져왔어.”
지유가 그것을 보니 명주(明珠, 옥구슬)라는 두 글자였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이심전심이라. 기랑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지유는 알아챌 수 있었다.
“부녀회장 동지(김부용)의 시로구나.”
김부용은 어린 기생 시절 옥구슬 천 말[明珠一千斛]을 유리 쟁반에 쏟아진 선약(仙藥)에 비유하여 작시했다.
세인들은 이 시에 얽힌 여러 낭만적 이야기를 떠들어댔으나 김부용 본인이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한 적은 없다.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기랑은 차분하게 말했다.
“맞아. 나도 부녀회장 동지에게 들은 적이 있어. 이름으로 좋을 것 같아서. 이 아이가 네 몸을 낫게 하는 명약이 되어 효도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먼저 울음을 터뜨린 것은, 말을 하지 못하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류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감지하던 아기였다.
지유는 아기를 따라 하듯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친구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그리고 너무 고마워.”
“고마워하지 마. 나중엔 날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아냐. 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를 원망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이름을 지어 줬으니 너도 이 아이의 어미야.”
기랑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몸조리 잘해. 중국에 좋은 약이라도 있으면 가져올게.”
지유는 다시 한번 기랑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
임칙서가 승리에 취하지 않고 곧바로 다시 서진을 결정한 것은 영민한 판단이었다.
대청은 그의 연설처럼 진짜 ‘앞으로 패배만 남았을’ 만큼 약하지 않았다.
현재 청 정부의 상황은 아편 전쟁이나 태평천국 시기와 비교했을 때 명백한 안정기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는 지금 유럽에서 정시준이 펼치는 금융 사업에 흥분하여 시준과의 진지한 교우를 고려하고 있지만, 그 정도는 황금군주의 유산에 비하면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유대 자본의 규모도 물론 적지는 않다. 시장의 인도자쯤은 될지 모른다.
하지만 대청의 군주는 시장의 초월자다.
도광제가 물려받은 가경제의 무한금고는 그야말로 무한의 광채를 뿜어냈다.
일전 무능한 부찰복장안 때와 달리 그건 그럭저럭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 도광제의 제국이 꿈꾸는 빛의 길[道光]은 번쩍번쩍 빛났다.
공화국에게 다행인 점은, 도광제가 영국에 ‘전함 100척’ 같은 주문을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도광제에게 당장 필요한 건 해군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 또한 바보가 아니므로 고려라면 모를까 청에게는 함부로 전함을 팔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민심을 보았을 때 전함과 조선소처럼 너무 잘 보이는 외교를 행했다가는 내부 반발도 만만찮을 터였다. 영국과 친하면 인류 문명에서 좋은 소리 듣기 힘들다.
그래서 도광제는 금군과 만몽팔기를 대대적으로 늘리고 정비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과거로의 회귀로 보였다.
도광제는 옛날 옹정제 시절의 포고를 다시 발했다.
“지금 내외가 문예(文藝)만을 숭상하여, 팔기의 자제가 조금 영리하면 모두 독서만 하고 무(武)는 가벼이 여긴다. 학문에 힘써도 어찌 강남의 한인에 미치겠느냐. 왜 자신의 장기를 버리고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익히느냐? 앞으로는 모두가 선조의 본습(本習)을 지키는 데 힘쓰고 조금이라도 의심하여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Manju i doro’, 즉 만주인의 기상, 나약하지 않은 사내다움을 뜻하는 이 말은 다시 한번 도광 연간의 국시가 되었다.
게다가 이 포고는 봉금지 설정의 근거가 되었던 옹정제 당시와는 표현만 비슷하지 뉘앙스가 다른 것이었다.
옹정제도 거론했던 ‘너희가 공부해 봐야 어찌 강남의 한인에 미치겠느냐’라는 표현은, 원래 제국에는 각자 종족에 따라 맡겨진 역할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더 무시무시한 뜻으로 바뀌었다.
도광제는 만주 팔기와 몽골 팔기를 우대하고 한인 팔기나 녹영은 방기하거나 유지비 절약을 위해 해체했다. 오히려 유력한 한인 군대의 지휘관은 트집을 잡혀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현명한 판단이다. 반란이 나라의 제1현안인 상황에서 막대한 숫자의 군대는 오히려 불안 요소다. 통제 가능한 규모의 충성 보장된 정예군이 이상적이다.
거기에 도광제는 티베트에도 군대를 주둔시켰다. 말은 네팔에서 준동하는 동인도 회사에 대한 경계라 하지만 라싸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불온한 움직임을 막으려는 시도임은 누구의 눈에도 잘 보였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혁명에는 반동이 따르는 법. 이는 중화 혁명당이 외치는 오족공화에 대한 여진의 반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동이되 세계 최강의 군주 대청 황제의 반동이다.
도광제의 신호는 명백했다.
‘지금부터 한족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 나머지는 부화뇌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중국군은 어느 왕조건 상관없이 자국민 상대 한정으로 세계 최강이다. ‘중국’이란 원래 대륙 내의 배틀 로열에서 결정된 최강자가 수여받는 이름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강소, 절강에서는 엄청난 수의 난민이 발생했다. 만몽 팔기는 그 뒤를 쫓아가며 마음껏 죽이고 능욕하고 약탈했다. 장강 일대가 피로 물들고 강물에 반사된 불꽃은 하늘을 찔렀다.
팔기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더 믿을 수 없는 녹영 대신, 도광제는 2선급 지원 보병부대를 만들기로 했다.
막대한 은을 바쳐 연성한 도광제의 새 군대는 지방의[鄕] 용사들[勇]이라 하여 향용이란 이름을 얻었다.
유의할 점은 이 향용이 도광제의 사재로 고용한 군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국가 정규군이 아닌 황제 개인의 사병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정부 구조로 봤을 때, 이는 말도 안 되는 횡포였다. 그러나 도광제에게는 전가의 보도가 있었다.
이미 가경제가 죽자마자 도광제를 견제할 만한 신하 파벌은 다 쓸려갔다. 혹시 기존 충성파라 할지라도 도광제의 정책에 감히 딴지를 걸었다가는 그대로 ‘선황 암살범의 도당’이 되었다.
이 짓이 너무 많이 반복되어, 이젠 도광제 자신마저도 제 애비를 그들이 죽였다고 믿어버릴 지경이었다.
무자비한 대륙의 고문 끝에 자기가 그 역적패당이노라 불어버린 ‘간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고통과 출혈 때문에 의식이 몽롱해진 끝에 자기가 정말 그랬다고 믿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그것이 진실이었다. 도광제의 빛나는 길에는 거짓의 오물 따위가 묻지 않았다.
게다가 향용의 이점은 하나 더 있었다.
그들은 이름 그대로 지방 출신이다. 황제의 은을 받고 동포의 피를 바치기로 맹세한 향용 지휘관들은 직례의 만주 권귀를 견제할 뿐만 아니라 각지의 소식을 전달하고 지방관을 감시하는 역할도 해 주었다.
조선 강철군주가 이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삽질을 했는지 생각하면 저승에서 땅을 칠 일이다. 결국 그의 문제는 조선의 다른 모든 군주처럼 그저 돈뿐이었다.
위구르인과 한인을 의도적으로 섞어 배치한 향용은 다시 태세를 정비하고 매섭게 중화 혁명당을 추격했다. 임칙서의 예상대로 염군과 혁명당은 각지에서 또 패퇴하기 시작했다.
대장정은 태풍 앞의 가랑잎처럼 위태하게 떠밀려갔다.
그러나 태풍 앞의 가랑잎이 그러하듯, 그들은 휩쓸리되 찢어지지 않고 밀려나되 가라앉지 않았다.
염군이 포함된 중화 혁명당의 대장정은 끝내 완전 붕괴를 면한 채 한중(漢中)에 들어섰다.
날짜로 치면 가을이 깊었다고 할 수 있으나 지치고 주린 중화 혁명당과 학살을 피해 도망 온 백성들에게는 변화가 얼른 느껴지지 않았다.
북미와 유럽의 재앙에는 비할 바 아니라 해도 올해 여름이 상당히 서늘했던 것은 여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칙서는 희망을 가졌다.
정시준의 예언대로 올해 날씨는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봤을 때 정시준의 인도에 따라 온 이 사천행에도 이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정신의 먹이를 던져 주어 굶주림을 충족시켰다면, 이제 육체의 굶주림을 해소할 차례다.
정시준의 이치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맞아떨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사람은 보름만 안 먹으면 죽는다.
그들에게는 돈과 곡식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화약과 총포도.
그는 만약 몇 년 전 북경이었다면 보자마자 호통을 쳤을 차림의 송주령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떤 기이한 야수의 뱃속에 삼켜졌다가, 안에서 그놈의 숨통을 끊고 막 뛰쳐나온 듯한 꼴이었다.
원래 옷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덧댄 가죽의 꼬라지는 엉망진창이었다.
이 시대에 절대 드러나면 안 되는 곳인 팔다리에도 군데군데 맨살이 보일 정도다. 그러나 송주령은 찔렸을 때 치명적인 부분만 가리면 된다는 태도였다.
가죽도 좋은 것을 무두질해 쓴 게 아니라 당장 옷감도 부족하니 겸사겸사 사냥 김에 벗긴 것이다.
그래서 그 가죽의 털은 여러 짐승이 혼합되어 있었고, 지금 그녀의 머리칼과 비슷할 정도로 지저분하게 뻗쳐 있었다.
그러나 임칙서는 그 차림에 대해서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는 그보다 더한 꼴이었으니까.
오히려 지친 심신을 다스리려 평안도 담배를 빼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임칙서는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이 한중에 들어온 뜻은 위원 동지께서 잘 아시겠지요?”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모두 준비되었소. 더 꾸물거려 봐야 지부(知府, 행정구역인 府의 책임자)가 대비할 시간을 주는 것밖에 안 되겠지. 사람들이 지치기는 했겠지만 바로 들이칩시다.”
원래 역사라면 가경 치세 말기인 이때, 한중에는 한 가지 사소한 행정 처리가 있었다.
이 시기 청은 사천과 한중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장강 하류 개발도 그렇고,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가경제는 토목 사업을 통한 조국 근대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분지로 둘러싸인 한중에는 국고가 부족할 때 중앙에서 급히 지원할 수단이 부족했다. 북경까지 오간다면 그 운송료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클 게 뻔했다.
그래서 가경제는 어디서 본 위대한 영도자 같은 해결책을 내었다. 당시 지원 요청에 대해 사상무장과 자력갱생을 부르짖으며, 일단 옆 동네에서 돈을 좀 옮겨 두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한중에는 2년 전 여기로 옮겨진 옆 고을 봉상부(鳳翔府)의 은 수천 냥을 더해 일만이 넘는 은이 잠자고 있다.
이 한중부의 지부를 하고 있는 엄여익(嚴如熤)은 분명히 유능한 관료였고, 가경과 도광 연간 신뢰받았던 신하이기도 했다. 지형이 험하고 중앙의 지원이 어려운 이곳에서 그는 10년 이상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
허나 그런 것이 죽창을 막아 주지는 않았다.
이쪽의 군대는 거의 없었다. 도광제가 제국 병력의 대부분을 재편하면서 일부는 티베트와 위구르 쪽으로 옮겨가고 나머지는 반란 진압에 투입되거나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비척대며 몰려든 굶주린 난민과 중화 혁명당은 마치 좀비처럼 한중부를 덮쳤다. 먹을 게 거기밖에 없으니 그들은 앞사람이 총칼 맞고 쓰러져도 다시 텅 빈 눈으로 그 뒤를 채웠다.
아무리 엄여익이 현명해도 이처럼 교과서적인 아포칼립스 상태에서는 별다른 수가 없다.
그는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한중이 들어오기 어렵다는 소리는 나가기도 어렵다는 소리다.
사방이 막다른 곳에서 좀비에게 포위당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수도 없는 영화에서 증명되어 있다.
결국 엄여익은 한중부의 수많은 관리들과 함께 매달렸다. 그리고 중화 혁명당의 얼굴에는 실로 오랜만에 기름기가 돌게 되었다.
“우리 중화 혁명당의 충실한 벗인 정시준 동지의 조언대로, 우리의 길은 서쪽에 있었다!”
“중화 혁명 만세!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의 태산북두(泰山北斗) 정시준 만세!”
하나의 중국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하나의 중국을 위한 고려인민공화국의 행보 또한 거침이 없었다.
정치국이 검토한 보고에 따라,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명료한 강령(綱領, thesis)을 도출했다.
첫째, 공화국은 모든 종류의 압제와 전제를 단호히 반대한다. 이 ‘단호한 반대’란, 인민의 모든 무력을 총동원한 혁명의 수호를 뜻한다.
둘째, 사해동포의 엄숙한 대의에 따라 혁명에 찬동하는 자는 신분과 국가를 불문하고 모두 공화국 인민의 혁명 동지다.
셋째, 모든 인민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의 일을 자기가 결정할 생지당권이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공화국은 영국에게 지난 천진 조약 이상으로 중국에 간섭하거나 양민을 학살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중국의 미래는 중국 인민이 결정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싶은 뻔한 얘기다.
그러나 테제는 안티테제를 발현시키며, 정(正) 뒤에는 반(反)이 숨어 있는 법. 이런 ‘공식 선언’뒤에 숨겨진 의미는 영민한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중국 공사 조지 스턴튼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는 주 고려 영국 전권공사대리 토마스 매닝이 보낸 보고를 받고 혀를 찼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거래 제안이로군. 황제는 우리가 얌전히만 있어 준다면 반가워할 테고, 너무 기쁜 나머지 고려에 대한 침공이나 여타 위협을 중단할 수도 있겠지.”
“중국과의 거래가 있었을까요?”
공사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저명한 모험가 바실 홀(Basil Hall) 선장이었다.
스턴튼은 종이를 탁자에 던지고 몸을 젖혔다.
“알 수 없네. 중국 황제의 입장에서 공화국은 존재 그 자체가 그에 대한 모욕이야. 과연 거래가 가능했을지는…….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와의 거래 아니겠나? 중국 내 반란분자를 지원할 테니 모른 척해달라는 얘기야, 이건.”
시준은 안전 지향적인 성격이다.
시준에게 자기 (주식의) 명운을 걸었던 윌리엄 자딘은 서운할지 모르겠으나, 시준은 언제 배신하고 불어버릴지 모르는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 하나에 국가의 명운을 걸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영국에도 일단 비공식적이고 암시적으로나마 알려 두는 조치는 필요했다. 만약 영국이 격렬하게 반응한다면 계획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바실 홀 역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승낙하실 겁니까?”
“우리가 안 도와준다 해서 중국이 그 정도로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아. 암허스트 남작처럼 뻑적지근하게 설치는 건 사양이지만 가만히 있는 정도라면 나쁘지 않지. 우리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으니까. 자네도 자바에서 보고 왔잖나?”
3년 전 자바를 탐험하고, 이제부터 동아시아를 탐사하여 조선에 대해서도 책을 저술할 예정인 바실 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덜란드인은 자바에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빨아먹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로서는 독 오른 그놈들과 충돌하느니 말레이를 지켜내기만 해도 성공입니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동남아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프랑스 혁명군과 나폴레옹 때문에 이중으로 쑥밭이 된 네덜란드는 돈이 급하게 필요했다. 말레이시아는 그렇다 쳐도 자바 이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탐보라 화산 때문에 생존 위기에 직면한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집단농장에 몰아넣어 커피와 설탕을 재배했다.
19세기 중엽 네덜란드 국부의 3할을 지탱하여, 성공한 플랜테이션 노예 농업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될 강제경작제[cultuurstelse]가 이것이다.
엄청난 수의 인간이 폭력과 굶주림 아래 죽어갔다. 벨기에가 콩고에서 했던 짓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둘이 한 나라였던 이유가 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100년 뒤 나치가 네덜란드에 베푼 것은 더없이 온화한 선정이다. 『안네의 일기』에 침 뱉을 수 있는 자를 대어 보자면 인도네시아인은 반드시 첫손에 꼽힐 것이다.
네덜란드로서는 놓쳐서는 안 되는 고기인 셈이다. 그래서 현재 황금의 17세기 시절 영광을 다 털어먹고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도 영국에 양보하지 않고 있었다.
스탬포드 래플스 경이 애써보겠지만 지금은 나폴레옹이 파괴한 유럽의 질서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흐름이 한창이다. 갑자기 군대를 증강시켜 네덜란드를 친다든가 하는 짓은 군사나 재정보다는 ‘분위기’ 문제 때문에 무리다.
“쯧. 남색가 황제에게 엉덩이나 대주고 있던 놈들을 해방시킨 게 누군데 은혜도 모르고 짖어대기는. 아무튼 우리 군사력의 투사가 상당히 제한되는 이상 괜히 밑천 드러내지 말고 그늘에서 쉬는 사자의 품격을 드러내는 것도 좋아.”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 이자들의 첫째 강령을 보게. 정시준이란 자는 만만치 않아. 얼핏 보면 국가를 결사 수호하겠다는 공허한 구호로 보이지만 사실 반대야. 나도 정시준이 제안한 거래를 보고 알았지만……. 이건 외국을 침공하겠다는 소리일세. 프랑스 혁명군처럼.”
바실 홀은 크게 놀랐다.
“예? 설마 그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을?”
“그럴 리가 있나. 다비드(다윗)가 돌팔매도 없이 맨손으로 골리앗에게 덤비는 꼴이지. 다른 곳일세. 정시준은 우리에게 군사력을 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제안했어. 그리고 여기에서 자네 역할이 중요해.”
바실 홀 선장 역시 그러리라 짐작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중국 공사가 뭐 할 짓이 없어서 민간인을 불러 외교 사안을 줄줄이 떠들었겠는가.
항해는 위험과 재정 부담이 많이 따르는 일이다. 그에게는 후원자가 필요했다. 그것이 현지의 유력자이며 동원할 재부도 많은 중국 공사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그래서 바실 홀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
공화국이 살기 위해선 중화 혁명당을 지원해야 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영국과 전면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모순의 해결은 쉽지 않았다.
결론은 나 있었다. 이 고민을 시작한 올해 여름, 삼화부 면포 공창을 시찰 나간 시준이 문득 고개를 돌려 할 일 없이 정박해 있는 프리깃 4척을 본 순간 이미 할 일은 정해졌다.
시준이 지난 반년간 천착한 것은 그 목표를 이루고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여러 준비였다.
기랑이 고총련의 정예와 함께 떠나고(안타깝게도 길명이는 빠졌다) 중화 혁명당이 한중과 사천에 입성하며, 도광제가 살인 속도보다 출생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은 강남 인민의 크릴새우 작전에 경악하는 것 말고도 이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혁명력 6년(1816년) 초겨울이 되었다.
시준은 반년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비볐다.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의 선언은 그 충격에 비해 약간 나른하게까지 들렸다.
“모든 위원이 찬성하신다면 상임위원회의 이름으로 승인하지요. 무력위원회는 인민의 명령을 혁명무력부에 전달하시오. 명년 봄을 기해 일본을 공격……. 아니, 고통받는 유구의 인민을 해방하도록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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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작중 언급된, 김부용이 어릴 때 지었다던 시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밝은 구슬 천 말을 [明珠一千斛]
유리 쟁반에 부어낸다[遞量琉璃盤].
하나하나 동글동글[箇箇團圓樣]
물 신선의 묘약이라[水仙九轉丹].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데, 이때 평안 감사 하던 김이양(金履陽)은 이 시를 기억하고 어린 기생이었던 김부용을 잘 봐달라며 그쪽 수령으로 가는 제자에게 당부했으며, 김부용은 그것에 감복하여 김이양을 사모했다고 하지요.
결국 김부용의 적극적 구애로 (김이양의 제자인 수령을 졸라 끝내 그를 만나서) 둘은 연인이 된다고 하는데… 당시 김이양은 75세, 김부용은 16세라 좀 너무한다고 생각했는지 이 전설의 창작자도 그 나이차에 대해 변명하는 시를 둘이 주고받는 장면을 넣습니다.
이걸 왜 전설이라고 하느냐면, 조선왕조실록에 김이양의 평안 감사 부임 기록이 없어서입니다. 다만 함경 감사는 했고, 나중에는 예조 판서도 하는 고관이긴 합니다.
또한 시에서 언급된 ‘구전단’은 돌과 쇠를 녹여 눌러 만든다는 묘약으로, 이걸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합니다(확실히 이승은 떠날 것 같긴 합니다).
2. 한중 지역에 얽힌 본문의 사례는 ‘청실록’에 따르면 실제 1814년 있었던 일입니다. 가경제가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그 시대의 일반적인 행정 처리기는 합니다. 다만 엄여익의 경우, 이때 이 지역의 책임자 비슷하긴 했지만 지사 벼슬을 공식적으로 받았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이때 이 동네가 많이 개발된 것도 사실입니다. 명청대 중국의 사천 지방 개발에 대해서 많은 논문을 낸 국내 연구자로는 이준갑 교수가 있으니 참조해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3. 탐보라 화산 직후 본전 뽑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가해진 네덜란드의 강제노동과 착취는 주민이 차라리 영국령 말레이로 도망갈 정도로(!) 가혹했으며, 당연히 여러 민중봉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네덜란드 주장으로는 자국 지식인들이 양심상 반대해서 곧 강제경작제가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주장으로는’요.)
이슬람 신앙으로 무장한 현지인의 저항은 조직적이고 강력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왕자’ 디포네고로가 특히 위협적인 지도자였는데, 네덜란드는 협상을 제안한 다음 나온 디포네고로를 체포하지요. 20세기 초의 아체 독립 전쟁 때도 네덜란드는 내부인을 포섭하여 지도자를 독살하는 등 별의별 비열한 수단을 다 써서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조금 후 사이좋게 ‘나치’ 당하게 되죠.
4. 헤겔의 변증법으로 알려진 용어인 테제-안티테제-진테제는 헤겔 본인이 아니라 나중에 그의 철학을 분석한 사람들이 붙인 용어라 지금은 아직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것이 ‘정치적 강령’의 의미로 변용되는 것은 더욱 나중이고요.
5. 바실 홀은 실제로 이때 동아시아에 왔던 탐험가입니다. 원래는 로드 암허스트와 같이 오지요. 이 사람에 대해서는 내일 화에서 약간 더 해설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