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29화 (229/284)

229화

76. 여름이 없는 해(2)

대장정이란 그 이름대로 긴 행렬이다.

여러 ‘해방구’는 불꽃처럼 피어났다가 다시 관군에 의해 짓밟혀 꺼졌다. 그러나 혁명의 빛은 명멸하면서도 끊임없이, 길게 이어졌다.

그래서 임칙서도 어찌어찌 광저우에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광저우의 구 포르투갈 마카오 총독부를 은근슬쩍 차지하고 장사꾼인 척 앉아 있던 정찰총국 요원들은 그것을 즉시 평양으로 보냈다.

“이대로 중화 혁명당이 짓밟히면, 반동 여진의 황제는 반드시 다시 고려를 신속(臣屬)시키려 할 것이오이다. 어떻게든 도와야 합니다.”

정약용이 없어서 그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중국 담당 외사통호부 부부장 김시택의 보고가 끝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석 동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석 동지는 이 골치 아픈 사태에 대응할 원대한 전략을 구상하는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치국 위원 모두는 자신들보다 수십 수 앞을 내다볼 것이 분명한 주석의 그 장대한 시야에 숙연해졌다.

주석은 분명 지금 그의 시선이 가 닿는 평양 성내보다 훨씬 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으리라. 연속 투쟁과 연속 혁명의 끝없는 실타래를 주석은 그 눈 아래 틀어쥐고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준이 지금 귀여워 미치겠는 딸 생각 하느라고 정치국 회의는 듣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자리의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시준은 나른하고 기분 좋은 근심에 젖어 있었다.

집에 복귀한 이후, 지유가 시준의 행보에 대해 뭐라고 한 적은 있다.

그러나 시준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했기에 그것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기랑은 안채에 있었고 자기는 문간방에 있었으니 걸어서도 이삼십 보는 떨어지지 않았는가.

시준의 생각에 기랑이 지유에게 와서 얘기하면서 무언가 사실관계를 왜곡한 탓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시준이 기랑을 경원시하지는 않는다.

살아온 세월이 보기보다 많은 시준은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딱히 악의나 계획 없이도, 사람은 거의 모두 자기 유리한 쪽으로만 진술한다.

기랑이라고 특별히 다를 리는 없다. 시준은 친구의 그런 철없는 실수쯤 너그럽게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유도 시준의 몹쓸 악덕보다는 기랑의 사회 도전 쪽을 더 걱정하는 것 같아서 큰 문제는 안 됐다. 두 초보 부모는 그런 일을 금세 잊어버릴 정도로 바빴다.

삼칠일이 지났음에도 시준은 아기에 대한 외부인의 접근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서양인이 더럽다고 하지만 시준이 보기에는 조선인도 거기서 거기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럽은 최신 의학에 근거해서 더럽고 이쪽은 그냥 더럽다는 정도다.

허나 지유에게 혼자 아기를 돌볼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시준 또한 같이 며칠간 밤잠도 못 자며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19세기나 21세기나 신생아가 2시간에 한 번씩 깨는 것은 같다).

그러나 시준은 선천적 한계로 아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다. 부녀의 승강이는 서로를 지치게 할 뿐이었다.

또 이세계 용사 병에 걸린 시준은 그의 서바이벌 지식을 활용하여 요새 시험 중인 ‘주사기’를 변용해 수동 유축기를 만들어 보려 했으나, 정 자기가 힘들면 유모를 불러올 테니 쓸데없는 짓 말라는 지유의 권고에 얌전히 따라야 했다.

그렇게 소득 없이 잠만 못 잔 시준은 지금 꽤나 피곤했다. 그러니 정치국 회의 같은 게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다.

잠시 시준을 살피던 정약전이 어떤 의심을 하기 시작했을 때, 시준이 무심코 말했다.

“걱정이군.”

정약전은 자신의 의심을 후회하며 재빨리 말했다.

“그렇습니다. 결국 청국에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필요한데, 중국에 맞상대할 나라는 세상에서 영길리국뿐이라. 그에 관해서 외사통호부 부부장 박득출 동지가 정치국 앞에 보고드릴 것이 있다 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준도 마치 자기가 걱정한 게 그 일이 맞다는 듯이 위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득출은 과거 임상옥의 재봉장으로서 시준의 ‘의주바지’ 사업에 지대한 역할을 했고, 이후로 서울 오죽당을 이끌었던 그 사람이다.

오죽당이 해산된 현재는 정약전의 말대로 영국 담당 외사통호부 부부장이었다. 정약용 부재 시 영국 상대할 사람이 필요했던 시준은 중국 가기 전 박득출을 발탁했다.

물론 그저 코드인사는 아니다. 박득출은 서상 구성원 중에서도 영국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다.

박득출의 호언에 따르면, 그는 캐나다호의 파크 선장과 어릴 때 헤어진 친척 간인 것이다.

파크 선장도 당시 임상옥이 설파한 조선의 도덕에 깊이 동감했다. 죄수에게 양털 보온복이 웬 말인가. 등 따습고 배불러서야 무슨 반성을 하고 무슨 속죄를 하겠는가 말이다.

그 양털은 동인도 회사와 자신의 음성적 수익 창출을 위해 선량한 고려 인민에게 돌아가야 마땅했다. 공화국 인민들은 그 덕에 따뜻한 혁명모자로 엄혹한 북방의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거래처는 공식 무역항인 삼화가 아니라 옛 개항장인 장자도였다. 절대 밀거래라서는 아니고 자칫 잘못하면 반동이 혁명의 행보를 모함할까 봐서다.

장자도는 (개항 이전에 그러했듯) 배덕의 섬이 되었다. 파크 선장뿐만 아니라,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독점권에 기생하거나 혹은 회피하면서 밀수와 음성적 중개를 도맡던 서양 상인들이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그런 박득출은 이번에도 소인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거래를 하나 들고 왔다.

“일전에 왜 그, 신라에서 평양으로 잡아 왔던 화랑인가 하는 곱상하게 생긴 녀석들 있지 않았습니까. 아직 전향서(轉向書)를 쓰지 않은 몇몇이 여전히 옥에 갇혀 있는데…….”

신라 정복 당시의 이상한 소문 때문에, 전향서를 정조 포기 각서로 확신하고 차라리 날 죽이라며 드러눕는 몇몇이 있기는 했다. 시준은 고의적으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사건을 곧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요?”

“영길리 사람들이 그자들을 노비로 팔아 주면 값을 잘 쳐주겠다 하던데요.”

도덕적 거부감 이전에 앞뒤가 맞지 않았다. 시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영길리국은 노비 장사를 안 하는데?”

영국이 아무리 인류의 대적이라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할 수는 없다(바꿔 말하면 시준이 지금껏 겪은 다른 것들은 사실이다). 영국은 분명히 몇 년 전 노예무역을 완전 폐지했다.

물론 노예무역을 폐지했다는 거지 노예제를 폐지했다는 것은 아니다. 비합법 노예 상인 역시 여전히 있었지만, 이 주변에는 노예의 대량 공급처와 수요처가 둘 다 별로 없다.

박득출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영길리 수병은 왜놈들처럼 비역질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영길리 해군에서 일꾼, 거기 말로는 거기 말로는 뽀이(boy. 여기에서는 배의 허드렛일을 하는 고용인을 의미)라고 하던가요. 아무튼 사람 쓰는 것으로 위장하여 들여보내면 구문(수수료)을 아주 비싸게 주겠다 하오이다.”

시준은 진지하게 듣고 있던 자기를 저주하며 잇소리를 내었다.

“누가 그따위 미친 소릴……. 아니, 본 위원은 거부 의견이오. 대체 어떤 놈이야? 영길리 해군의 군율에 그 짓은 분명히 군법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는데, 아마 군관(장교)은 아닐 테고?”

영국 해군 수병의 최고 인기 베스트셀러인 전우애 소설의 저자가 지껄일 소리는 아니지만, 그에 관련된 정확한 사실을 아는 자는 의외로 많지 않다.

시준의 뻔뻔함에 기가 찬 이강회가 뭐라고 입을 열자 푸셰가 그의 발을 꽉 밟았다. 이강회는 윽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박득출은 잽싸게 태세를 전환했다.

“하하, 물론 저도 그런 인륜에 어긋나는 일은 당연히 거절했지요. 인민에게 위임받은 국무당 정치국의 일원으로서 어찌 인민을 팔아넘길 수 있겠습니까.”

시준을 포함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저 새끼, 팔기로 약속했었구나.’ 하긴 나중에 위에서 불허했다고 하면 되니까 뒷일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태세 전환의 달인 박득출은 다시 한번 유연하게 대화를 꺾었다.

“본 후보위원이 말씀드리고자 하였던 것은 바로 그 일을 생각해낸 자올시다. 군관이나 병사는 아니고, 흔도사단(인도)에서 장사하다 온 사람입지요. 지금 위씨(윌리엄 자딘)가 외사통호부장 동지를 따라 서양 가 있어 조선약방(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 쪽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데, 이자는 말하는 게 대담하고 손이 빨라 몰래 중국에 들어가는 일도 어렵잖을 듯싶어 천거하고자 합니다.”

그자의 이름은 제임스 메디선(James Matheson)이라 했다.

원래 역사라면 자딘과 동등한 동업자 관계이나 지금은 회사 이름처럼 조선, 다시 말해 공화국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이 사람은 바로 아래 대행자쯤 되었다.

그 인선은 나쁘지 않았다. 동인도 회사도 지금은 공화국을 도와줄 수 없다.

새 중국 공사 스턴튼은 중국 정부에 우호적이다. 그들의 목표인 개항은 청 정부에서 얻어낸 거고, 청이 없으면 개항도 없어질 테니 말이다. 암허스트가 또라이라서 그렇지 원래 이쪽이 정상이다.

따라서 공화국이 반란군을 돕는 일은 영국에 알려져선 안 된다.

지금까지 공화국은 영국에도 이득이 될 만한 일은 영국 정부와, 그리고 영국에는 별로 이득이 안 되지만 장사꾼들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안은 동인도 회사와 처리해 왔다.

이 미묘한 이중 합작의 결과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전자의 대표적 성과가 조선 독립이요, 후자의 가장 큰 결실은 로드 암허스트의 실직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지금 반란군을 지원하는 일처럼 공화국에는 이득이 되고 영국에는 해가 되는 사안도 꽤 있다.

동인도 회사가 아무리 필요하면 본국과도 반목한다지만 그래 봐야 양지의 회사이고 양지에 있다면 공권력을 거스를 수 없다. 수십 년 뒤 인도를 거하게 말아먹자 동인도 회사도 끽소리 못하고 폐지됐다.

공화국에는 필요한 때 쓸 더 으슥한 곳의 칼날이 필요했다.

바로 이런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그 대가를 받던 곳이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다.

시준이 윌리엄 자딘에게 주식 리딩방 부방장 자리를 내어준 것은 그가 호구라서가 아닌 것이다.

지금 자딘은 없지만, 그의 조직 자체는 아랫사람들이 대행하며 아시아에 남아 있다. 자딘 정도로 유연하게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다면 반가운 일이다.

위원들과 그런저런 검토를 마친 시준은 찝찝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다만 본 위원이 약간의 말을 더하자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대사를 “알겠다. 이제부터 교시를 내리겠다.”쯤으로 알아들었기에 그 안간힘을 다한 민주주의 코스프레는 시준만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아까 동지들께서도 동의하셨듯,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약간의 총포와 먹을 것을 전해주는 정도가 끝이오. 중화 혁명당의 대장정은 서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공화국에서 크게 돕기가 힘듭니다. 다른 나라의 힘도 빌어야 하오.”

“영길리 말고 여기에 다른 강대한 나라가 있습니까?”

정약전이 고개를 갸웃하자 시준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나선이오. 과거 나는 외사통호부장 동지와 함께 연경에서 나선 사람들과 투합한 적이 있소이다. 그자들 또한 공화국의 편이라고 말하기는 힘드나, 그때 몽고 마흔여덟 개 부락을 충동질하여 여진 황제에 맞선 반란을 사주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오.”

정약전을 비롯한 위원들은 탄성을 질렀다. 중국 바로 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국인데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들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게 위원들이 멍청해서는 아니다.

현재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건너 중국에 뭔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단이 별로 없으니 떠올리기 어려웠던 것도 자연스럽다.

지도를 보면 러시아와 중국이 국경으로 갈라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두 나라를 가르는 것은 그런 ‘선’이 아니다. 광활한 공간 그 자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엄혹한 냉대 황무지와(타이가 수림에는 먹을 게 별로 없다) 살을 에는 강추위, 혹독한 굶주림뿐이다. 심심하지 않도록 시베리아 호랑이나 불곰 같은 것도 좀 있다.

그래서 러시아가 이 주변 사세에 끼어들 대상으로는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오히려 정치국 위원들이 (시준의 천기누설에 의해) 아시아 일대의 지리를 상당히 잘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준은 미래의 러시아 국경선을 안다. 근성의 러시아인들은 분명 미래의 어느 시점 블라디보스토까지 철도를 깔았다.

19세기 러시아의 동진 역사까지 말하라고 하면 ‘어떤 왕이 거기 공사관으로 튀었던 것 같은데…….’ 정도 이상으로는 아는 게 없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여러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야. 어떤 방식으로든 러시아는 이번 세기 안에 동아시아에 손을 뻗는다.’

마침 중국으로 간첩단 꾸려 보내려던 알렉산드르가 들었다면 정시준의 신비한 예지에 다시 한 번 놀랐을 것이다.

연도나 전후 관계를 줄줄 외우지 못해도 된다.

이 정도 정보만 알아도 그건 국가 지도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된다. 결국 정보의 가치는 활용하는 사람에 달려 있다.

시준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나선이 중국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오. 그렇다면 몇몇 현명하고 날랜 동지들이 그 영길리 사람과 함께 중국에 깊숙이 들어가, 사천에서 중화 혁명당이 자리 잡는 동안 신강 이북에서 나선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외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 주석 동지의 안목이 역시 매우 넓소이다.”

잠시의 찬양 시간이 지나가고 나자 시준은 머리를 짚었다.

“어쨌든, 혁명 동지를 물심양면 지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이 우리 공화국에 도움이 된다면 더욱 좋겠지.”

시준의 말이 가리키는 것은 일전 영국에서 실어온 금은이었다.

그냥 뿌리자니 명목이 없고, 인플레이션도 걱정이다. 무엇보다 혁명은 원래 취향이 아니고 공산주의도 두려워하는 시준은 사람들이 ‘주석 동지가 돈을 복사하는데 내가 왜 일을 해?’ 상태에 빠질까 봐 저어되었다.

그래서 그 돈은 몇몇 공공사업에만 제한적으로 투입하는 중이었다. 시준은 어디까지나 공공사업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어투로 말했다.

“국무당에서 간여하여 만들었다는 게 들키면 안 되기도 하니, 이번에 보내주는 화약이며 총알, 총포 등속은 고려총포사연결회에서 사들이는 것으로 합시다. 정찰총국 요원 몇몇을 제외하면 보내는 사람도 총포사 사람들을 쓰는 게 옳겠소. 총포사에선 그 금은을 다시 곡식으로 바꾸느라 공화국에서 사용할 터이니 이로써 물화가 돌고 도는 이치를 실현할 수 있소.”

시준이 굳이 경제 효과에 대해 얘기 안 해도, 남인 사상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국무당에서 그 정도를 모를 사람은 없다. 그래서 시준의 말은 구차스런 변명 비슷한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네 사정 다 안다는 듯 예의 바르게 주석을 외면한 채 해당 안건을 통과시켰다.

기왕 나랏일 처리하는 김에, 요즘 화가 난 듯한 기랑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인 시준은 사람들의 뻔한 오해에도 치솟는 화를 삭이기만 했다. 안건은 통과되어야 하니까.

***

기랑이 신분을 밝히고 고총련 회장으로서 총선거에 나갔을 때 놀란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기랑의 주변 사람 중에서는 딱 두 명만 놀랐다.

하나는 물론 (여자라서 놀란 건 아니지만) 시준이고, 나머지 하나는 고총련 태천군 대표 길명이다.

길명이 또한 간신히 포기한 성적 지향성을 다시 되돌리느라 심대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지만, 시준 역시 다른 이유에서 거의 비슷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다들 어느 정도 눈치 챘으면서 입 다물고 있었다는 거냐?’

심지어 유학자이고 기랑의 직속상관이었던 주석보필국장 서유구조차 딴청을 피웠다.

‘예부터 남장이나 여장을 하는 자는 음양의 조화를 어지럽힌다 하여 엄벌하였지 않소? 내가 그걸 주장하는 게 아니라, 급양과장 동지가 백안시당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주석 동지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건 반동의 소치입니다. 인민이 수평한데, 남장을 하건 여장을 하건 사자탈을 뒤집어쓰건 그것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 꾀한 게 아니고서야 모두 ‘자유’입니다. 급양과장 동지는 누구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는 혁명영웅이고 총포와 시석 앞에서 주석을 보필한 오래된 동지인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석이 데리고 있는 속셈이 뻔한 것 같아서 다들 모른 척했다는 얘기다.

시준은 이런 놈들이 있으니까 기랑이 아직도 갈팡질팡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잘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서유구를 주석보필국장 자리에서 교체해 버렸다.

사감 때문만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국무당 중 주석의 최측근이고, 부장급이 아니면서도 정치국 위원의 일좌를 차지하는 주석보필국장은 당연히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많다.

다른 자리는 몰라도 여기는 때마다 갈아 줘야 했다. 최고 통치자의 비서실장은 가장 부패와 전횡에 취약한 자리 중 하나다.

시준은, 비록 삿된 뜻은 아니라 하나 자기도 모르게 정보를 차단한 서유구의 심계에 섬뜩함마저 느꼈다.

게다가 서유구의 재능도 행정업무에만 썩히기는 아까웠다.

전생의 시준은 임원경제지나 실학자 서유구의 이름을 몰랐지만 현생의 시준은 요 5년 동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준은 서유구의 천품을 활용한다는 의미로 그를 공장영선부장에 임했다. 원래 공장영선부장 이집두는 병이 들어 – 원래 역사에서도 이제 수명이 4년밖에 안 남았다 – 자리를 고사하고 요양하는 상태여서 잡음은 없었다.

엄연히 승진이라 서유구도 좋아했다. 그가 친구들에게 승진턱 돌리며 ‘이게 다 급양과장 동지를 자기가 5년간 잘 보호한 덕분’이라 떠들며 다니고 나서야 시준은 자기 실수를 깨달았지만 말이다.

***

이제 기랑은 국무당 소속이 아니라 중앙인민회의 소속이기에, 총괄서결부에서 그녀에게 정치국 결정을 보고해 주었다.

2기부터 시작된 ‘초대 주석만 빼고 겸직 금지’ 조항 때문에 국무당과 중앙인민회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 주던 많은 인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혹은 둘 중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21세기 한국 정부 부처의 기획조정실이나 국회담당관, 혹은 국회의 사무처처럼 따로 연락을 맡는 부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 역할이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다년간의 행정 경험을 거친 국무당 전부가 동의했다. 그러나 새로 부서를 만들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블랙기업이 대부분 그렇듯 ‘별로 할 일 없는 것 같은’ 총괄서결부 서기국이 이 임무를 맡았다.

서기국장 김정희는 3기 때는 자기도 그냥 선거 나가리라 결심했다.

그에게는 밝혀지면 안 될 주석 동지의 치명적 오점이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어디 전문위원회 한자리는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기랑은 이상하게 비장한 김정희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전언은 잘 들었다.

그러고는 지유를 찾아갔다.

시준과 지유의 딸은 아직 이름을 받지 않았다.

왕실이나 지체 높은 반가 정도가 아니고서야 조선 시대에 신생아에게, 그것도 여자아이에게 이름을 짓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냥 주위에서 대충 부르던 언년(어린년)이니, (아들이 아니라서) ‘서운’이니 ‘분해’니 하는 말이 그대로 이름이 되는 식이었다.

물론 수평한 공화국에서 그런 반동의 구습은 타파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성명학에 일가견 있다 자부하는 미륵사 사람들이 작명에 대한 조언을 경쟁적으로 건네러 방문하는 중이었다. 절대 이 기회에 주석에게 얼굴 알리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러나 지유는 그 조언 중 어느 것도 아직 접수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좀 여유 생기거든 같이 천천히 이름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기랑은 아직 이름이 없는 친구들의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낯을 가리거나 할 때는 아니라, 아기는 그 나이 특유의 초점은 없지만 흐리지는 않은 눈으로 말똥말똥 제 어미를 보는 중이었다.

지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네게 미안하기는 했나 보구나. 잘됐지 뭐야. 크기로야 용천부나 삼화 공창이 크지만 개수로는 고총련이 총포 공창을 가장 많이 갖고 있지 않니. 시준이 실어온 돈이 있으니 값도 섭섭잖게 쳐 주겠다, 얘.”

“사실은 그 돈 때문에 왔어.”

지유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기랑은 용건을 말했다.

“국무당에서 총포 대금을 주면, 각도 공창에 자재값이나 장인들 노임 치르는 것 말고 나머지 이익은 회원들끼리 배분하게 돼. 회장이 가장 많이 받지. 그렇게 나눠먹다 보니 액수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적잖은 돈이야. 그걸 네가 맡아 줬으면 해.”

“내가?”

기랑은 잠시 지유를 보았다. 그러고는 힘들게 입을 뗐다.

“그래. 이제 난 중국으로 갈 거야. 아까 말한 일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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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육로에 국경이 없는 우리나라는 잘 상상이 안 되지만, 러시아의 엄청난 국경은 근대까지도 그걸 다 막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20세기 초까지도 극동 러-중-일 국경에 살던 유목민이나 수렵부족은 볼일 있으면 별다른 제한 없이 왔다갔다 했습니다(물론 도회지까지 들어와서 뻘짓하다가 들키는 경우는 있음). 표석으로 여기가 국경입네 하고 표시만 한 정도.

2. 오늘은 별달리 해설할 게 없으니, 여러 용어가 나와서 혼란스러우실 공화국 정치체제에 대해 간략히 말해보겠습니다.

일단 고려를 대표하는 것은 중앙인민회의입니다. 대의원은 각 지역구 대표인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일종의 비례대표인 전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이루어져 있죠. 그러니까 국회의원이 지자체장도 하는 구조라고 보시면 되겠군요.

이 중앙인민회의 대의원들이 회기가 아닌 때에 상시 근무하며 일할 대표로 구성한 것이 상임위원회입니다. 그리고 이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이 고려의 ‘공식 국가원수’입니다. 선거로 뽑히는 최고위직이니까요.

(같은 원리로 북한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국가 원수‘였는’데, 이건 지금도 있기는 하나 ‘정부와 국회의 대표’일 뿐 ‘공식 국가원수’ 자리는 아닙니다. 본래 ‘조선노동당 대표’일 뿐이었던 김정일이 국방위원회를, 그리고 김정은이 국무위원회를 은근슬쩍 만들고 거기 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의전서열 1위 자리도 가져갔습니다. 시준은 그런 작업질 없이 그냥 자기가 다 해먹는 중.)

이 상임위원회에서 임명한 주석이 고려인민공화국 행정부인 국무당의 수령입니다. 국무당은 우리가 말하는 ‘정부’와 뜻이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주석은 선출직이 아니죠.

또 이 국무당의 여러 부서 고위급 간부(대부분 장관, 그러니까 부장급)가 모여서 논의하는 회의체가 정치국입니다. 이들이 정치국 ‘위원’이고, 그 아래 부부장이나 국장급은 부장 궐위시 대행하기에 ‘후보위원’입니다.

다시 말해 작중에서의 정치국은 정당기구가 아니라 정부기구인 거지요. 대한민국의 국무회의와 역할이 비슷합니다. 이것이 북한이나 소련의 정치국, 그러니까 ‘당 정치국’과 다른 점입니다(강조).

최고인민회의 휘하에 정부기구가 있고(북한은 입법부 휘하에 행정부가 있음), 그 정부가 최고인민회의에서 다수당인(야당도 있긴 함) 조선노동당의 통제를 받는 북한과 다르게 고려는 엄연히 입법부 겸 지방자치기구와 행정부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정당도 없고요. 다만 수장이 같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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