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27화 (227/284)

227화

75. 주석 동지의 기묘한 선거(5)

대프랑스 제국 육군 의무총감이었던 도미니크 장 라레는 찻잔을 들었다.

그는 그레테 자작과 함께 귀환하지 않은 몇몇 프랑스인 중 하나였다. 도미니크는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던 사람이었으며, 나폴레옹이 몰락한(다행히 정약용이 일으킨 두 번째 몰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지금은 프랑스에 돌아갈 유인이 많이 희박해졌다.

그래서 그는 차후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공화국에 머무른 채, 의서를 저술하고 동양 의학을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긴 유럽에 그대로 있었다면 원래 역사처럼 블뤼허에 의해 체포당하는 고초를 겪었을 테니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공화국의 입장에서도 그러했다.

다른 전문서적도 그렇듯, 의서 또한 언어를 안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준도 못 읽어서 헤매는 네덜란드나 프랑스의 의학 서적을 해독하는 데에 그는 큰 도움이 되었다.

도미니크가 말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의장 각하. 검진을 해 보면 좋겠지만 지금 이야기만 들어서는 산욕열 같은 증상은 없는 모양이군요. 아기도 건강하고요. 그런데 왜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멀리 있지도 않았는데요.”

시준은 도미니크와 만나기 전 거의 한나절 동안이나 날카로운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의 말을 잘 듣지 못했다.

도미니크가 시준을 한 번 더 부르고 나서야 시준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 말했다.

“아, 그래요. 당신을 왜 안 불렀냐고.”

그야 당연하다. 이때 유럽 의사에게 산모를 맡기는 짓은 형법에서 말하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세균 그런 거 이전에 그냥 찝찝해서라도 씻을 만한데, 19세기 유럽 의사들은 끝까지 그런 ‘미신적 행동’을 거부했다. 그들의 꿋꿋한 더러움은 거의 선비적 절개의 수준. 그야말로 신념형 비위생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 더러우니까 꺼져’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준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성 관념에서 남자가 여인의 몸을 볼 수 없다는 말로 둘러대었다.

엄연히 사실이다. 남자 의원에게 몸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은 아직도 많았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관념이 있는지라 도미니크 역시 납득했다.

“이해합니다. 긴장과 공포는, 비록 비이성적인 것이라 해도 환자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지요. 이 건에는 제가 관여하지 않는 편이 낫겠군요. 다만 요즘 분주해서 환자를 못 봐 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구 내의원 출신 의사들이 지금 도미니크에게 유럽 최신 해부학을 배우고 있어서 그도 바빴다.

사람 다리를 17초 만에 절단하는 쾌검 도미니크의 신기는 단순히 완력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다. 근육과 관절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무식하게 마구 내리찍어서야 도끼로 힘껏 쳐도 잘 안 잘리는 게 대형 포유류의 다리다.

시준은 결국 도미니크의 진짜 용건, 그러니까 ‘반혁명분자의 시체’를 ‘실습용 교재’로 제공하는 일을 허락했다. 도미니크는 출산 시의 산모가 유의해야 할 사항과 진부한 축하를 몇 마디 늘어놓은 뒤 수업하러 돌아갔다.

시준은 길게 늘어져서 천정을 쳐다보았다. 피곤했지만, 집이 아니라서 그런지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이번에 산파 역할을 맡아 준 사람은 용인 인민위원회 위원장 유희의 모친인 사주당 이씨였다.

지역 인민위원장쯤 되는 사람의 가족 정보는 정치국에도 당연히 접수된다.

시준은 그때 사주당 이씨가 태교와 산모 관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지유가 임신한 뒤로는 ‘남조선혁명당 혁명영웅에 대한 예우’ 어쩌고 하며 ‘어머니를 평양에 모셔서 편히 살도록’ 권했다.

인민이 시준에게 독재자 하라고 계속 떠미는 이유가 있다. 권력 주면 잘 쓰니까.

어쨌든 사주당은 그 후 종종 왔다 갔다 하며 지유를 봐 주었다. 다음 인민위원장 재선에 실패하면 어머니의 안락한 평양 생활도 끝난다고 여긴 유희는 선거운동에 용맹정진 중이었다.

지유가 처음 진통이 왔을 때, 전생에서도 겪어 보지 않은 일에 이성이 날아간 시준은 일단 금화부터 내던지고 봤지만 소질개는 영민하게 그녀를 데리고 왔다.

사주당은 침착하게 끓는 물을 대령하고 차분히 아기를 받았다. 그러고는 계속 정신 나가 떠드는 시준에게 전통적 어머니의 위엄을 담아 호통까지 쳤다.

“주석 동지의 영민하신 천품은 다 어디로 갔소? 음양의 대체는 제가끔 그렇게 되도록 예전부터 이루어진 것이라. 가장이 점잖지 못하게 야단을 하면 그냥 지나갈 횡액조차 잔치판이 났구나 하며 비집고 들어오는 법이외다. 사내가 자꾸 규방에 들락거리지 말고 어서 나가 있으시지요!”

시준은 그 말을 따랐다. 그래서 지금은 집에 엄중히 금줄을 쳐 놓고, 사주당을 비롯해 수발들 사람 두세 명만 남긴 채 시준마저 나와 있는 상태였다.

사주당이 제재한 것처럼, 조선의 전통적 풍조에서 남자가 부인에게 공개적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별난 행태였다. 사람들은 좀 의아해했다.

허나 남의 얘기 좋아하는 어떤 의주 사람이 일러준 사연을 듣자 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 동지는 친모를 산병으로 잃은 가슴 아픈 과거가 있는 것이다.

정치국에서도 주석 부부를 존중하여 당분간 출근 압박은 그만두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시준은 일종의 출산휴가를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휴가는 휴가인데…….’

집에서 나와 버린 시준은 갈 데가 없었다.

주석당? 사무실로 휴가 가는 사람도 있는가? 그렇다고 휴가답게 평양 밖으로 나간다면 여러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시준이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약한 몸에 초산을 치른 지유는 출혈과 체력 소모 때문에 아직도 까무룩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시준도 친구는 있다. 이강회나 정약용의 집 정도면 괜찮을 것이다. 이 시대에 친구의 집에 며칠 머무르는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 부담스러운 무례가 아니다.

그런데 정약용의 경우 현재 집주인이 없다. 이강회의 경우는, 사냥감이 알아서 덫에 들어왔다고 환호작약하며 시준을 끌고 갈 게 뻔했다.

1함대 제독이자 농상진흥부장이기도 한 이강회는 그가 실어온 짐 때문에 이중으로 바빴다.

영국 배의 유지와 배치에 대한 과업은 물론, 대량의 면포 기기와 그 설치 및 역설계 역시 만만찮은 사업이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시점이고 시준은 분명히 고양이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지금 기랑의 집에 와 있었다.

평양에 제법 큰 집 갖고 있던 기랑은 뚱한 표정으로 문간방을 내어주었다(그녀의 출세도 시준 못지않다 할 수 있다).

시준은 여전히 기랑이 화가 나 있다고 여겨 투덜거렸다.

“밥은 주냐?”

“너 급가(휴가)라며. 나도 마찬가지야. 알아서 갖다 먹어. 아니다. 묵는 대신 내 밥 해줘야겠어.”

급양과장의 추상같은 근로기준 엄수에 시준은 할 말을 잃었다.

밥맛도 없어진 시준은 그렇게 도미니크와 멀건 차만 한 잔 마시고 난 뒤 드러누워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기랑이 들어왔다. 그녀는 늦봄 온돌 위의 현대인이 취할 법한 꼬라지를 보고 도끼눈을 떴다.

“옷 안 입어?”

시준의 반응은 여러 가지 의미로 기랑을 실망시켰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더운데 그럼 어쩌란 말이냐?”

“올해는 봄 같지도 않게 서늘한데 무슨 소리야? 너도 올해 냉해 올 거라 예지했다면서?”

“너까지 예지니 뭐니 하면 어떡하냐. 아궁이에 군불을 때니까 그렇지. 그리고 어릴 때 볼 거 다 봤는데 뭘 새삼…….”

기랑은 황급히 몸을 가리는 동작을 취했다. 물론 시준은 기랑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나, 난 보여준 적 없거든?”

“네가 봤다는 게지. 그렇게 내외할 거면 사내 혼자 있는 방 문은 왜 벌컥벌컥 여냐? 너도 점점 지유 닮아간다. 걔가 옛날에 그랬지.”

“내쫓는다?”

시준은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더부살이 서러움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주섬주섬 저고리를 주워 입었다. 5년 만에 처음 받는 휴가 때 잘 쉬어 두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결과는 자연인의 무력함이었다.

기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했다.

“복공이 아무리 당선이 뻔해도 유세 한 번은 나와야 되지 않느냐고 자꾸 보채는데.”

“그 새…… 아니, 그 동지는 무슨 헛소리야? 난 후보로 녹명(錄名, 등록) 한 적 없어.”

기랑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시준을 내려다보았다.

“복공이 했어. 네 도장 주석당에 있잖아.”

“그 서랍장 열쇠는 너랑 나만 갖고 있지 않냐?”

“내가 줬어.”

한참 동안 배신자와 배신자를 성토하던 시준은 기랑이 귀를 후비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

애초에 시준이 패배할 게임이었다. 세상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시준은 이제 구질구질한 노릇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천정을 향해 거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더 방도가 없음을 인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옷매무새를 다듬던 시준은 문득 기랑을 돌아보고 말했다.

“너도 내가 계속 이 짓 하기를 바라냐?”

기랑은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 말을 잘 안 해서 그렇지 그녀는 어눌하거나 어리석지 않다. 유부남 주제에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니는 – 어느 정도는 자각한다는 게 가장 괘씸하다 – 시준에게 몇 번씩이나 놀아날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시준을 똑바로 바라본 채 되물었다.

“너는 내가 계속 이 짓 하기를 바라니?”

시준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기랑을 마주 보았다. 기랑은 돌아서서 곧 자기 볼일 보러 가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시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나서고 있을 때, 부엌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던 기랑은 아궁이에 부집게를 쿡 쑤셔 박으며 중얼거렸다.

“나쁜 놈.”

기랑은 다 타서 빼내었던 하얀 연탄재를 걷어찼다. 재가 눈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녀는 눈가를 손으로 거칠게 비볐다.

***

탐보라 화산의 폭발과 그에 이어진 대기근은 확실히 참혹했다.

그러나 그게 어째서 현대에 널리 연구되었는가를 묻는다면, 1차 세계대전 직후 지식인들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던 이유와 비슷하다.

백인들이 주로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화산이 불러오는 찬비와 여름 서리는 미국과 서유럽을 강타했다.

밀이나 감자는 그렇지 않아도 강우량 증가와 냉해에 취약한 작물이다. 수없는 빈민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으며 사회 체계가 무너진 골목을 다시 전염병이 휩쓸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아시아는 좀 달랐다. 냉해가 있긴 했지만 1816~17년 일본의 작황은 평년 수준이고, 조선에도 찬비로 인해 농사를 망친 지역이 일부 있을 뿐이다.

그 전의 흉년에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강우량이 많으면 좋은 쌀의 특성도 있고, 21세기 기준으로도 인류가 밝혀내지 못한 지구 대기 대순환 시스템에 얽힌 요인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확실한 건 탐보라 화산의 후폭풍이 ‘인류 전체의 재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백인의 재해라면 모를까.

조선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시대 가장 극심한 흉년은 오히려 화산 폭발의 영향 이전, 1814년과 1815년의 ‘갑을대기근(甲乙大飢饉)’이었다.

이 기간 정치국은 비장해 두었던 구 조선 왕국의 환곡을 정신없이 풀어야 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조선은 1809년부터 이어진 7년 흉년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때 엄청난 환곡을 소비한다.

그나마 그간 무지막지한 환곡 비축을 자랑하던 조선이니만큼 나라가 망하지 않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호구의 붕괴라고 보는 쪽이 상식적이겠지만, 통계에 따라서는 300만이 아사했다고도 추산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상흔이 치유되지 않았던 1816년의 춘궁기엔 ‘영길리국이 빚 대신 내어준’ 곡식이 풀렸다.

그 양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효과는 컸다.

사람이 꼭 시간 순서로 정보를 접수하는 건 아니다. 삼화에서 그 인상적인 대박거선을 목격한 자들의 입소문이 퍼지자, 모든 인민은 상황을 간편하게 정리했다.

지난 2년간의 곡식 방출도 모두 주석 동지의 덕이라 믿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 기랑의 말대로 사람들은 올해 늦봄과 초여름이 예년에 비해 약간 시원한 것 같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농사꾼이 대부분인 공화국 인민의 전문성일 수도 있고, 일종의 확증편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확실히 후자에 속했다.

4월이 되자 다시 한번 우당탕탕 총선거를 마치고 2기 중앙인민회의를 성공적으로 구성한 인민들은 하늘에서 기이하도록 찬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석 동지의 예언이 맞았어!”

“이, 이것이 계룡산 300년의 도통함인가!”

시준이 불출마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예언과 관계없이 ‘불민한 2대 주석’에 대한 초자연적 경고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특히 시준은 그런 소문 퍼뜨릴 놈이 누구인지 당장 남쪽을 지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준이 출마 ‘당했기에’ 이는 주석의 신묘함을 강조하는 사건이 되었다. 주석이 미리 예언했지 않은가.

시준은 천만 단위의 인구가 이토록 유연하게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에 화도 못 낼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공화국에서 예언의 영향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았다. 모두가 예상하던 결과를 강화시켰을 뿐이다.

시준이 주석 자리 받는 대신 그것만은 다시 안 하려고 몸부림치던 ‘국가의 정식 대표’, 즉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까지 다시 맡아야 하는 그 명백한 운명 말이다.

시준은 끝까지 김창시를 밀었으나 반대표는 그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김창시도 자기 자신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 2기에도 평준위원회 위원장이 된 김창시의 겸허한 ‘대국적 결단’은 큰 칭송을 받았다.

곧이어 거행된 헌법 투표에서 <경애하는 주석 정시준 동지의 신묘한 영도로 제정된 공화국 헌법에 모두다 찬성 투표하자!> 라는 현수막을 봤을 땐 허핍한 웃음밖에 안 나왔다.

혁명의 심장 평양과 혁명의 단전 계룡 사람들은 투표장에서 월간 대혁명 기자들이 요청하는 인터뷰를 기꺼이 수락했다.

그들은 특히 ‘초대 주석은 예외’ 조항이 반드시 지켜져야 함을 피끓는 목소리로 강조했다.

정시준과 동료들의 신산귀모가 뒤얽힌 기묘한 2대 선거는 항상 그렇듯이 시준의 패배로 끝났다.

뒤집어 말하면 인민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다.

제2기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고려인민공화국 2대 주석 정시준은 그 당연한 의무대로 제2기 제1차 정치국 회의를 주재했다.

시준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인수인계 기간의 생략을 선언했다.

어차피 자기가 해야 한다면, 괜히 국무당 간부를 대거 교체하여 쓸데없이 관리자 일만 늘리는 변태 짓거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주석 동지의 쓸데없는 위기 초래에도 불구하고 천신만고 끝에 자리 지켜낸 정치국 간부들은 시준 없는 데서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며 잔을 부딪쳤다.

그러나 각 지역 인민위원회와 전문위원회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1기 때 많았던 수령 출신들이 꽤 탈락했다. 인민들이 기존의 권위에 더 이상 존경을 바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조흥진, 김익순, 허명, 이장겸 같은 혁명 초기 합류자는 자리를 유지했으나 그 외의 사람들은 안일하게 선거에 임했다가 떨어지는 자가 많았다.

그냥 집에 가면 내일부터 상조농장에서 괭이 잡아야 한다. 그들은 급히 줄을 대어 국무당의 계장(係長) 정도로 편입되는 수모조차 감수했다. 지난 5년간 인정 베풀어 둔 중앙인민회의 대의원 중 재선자들이 사정 봐준 게 주효했다.

전문위원회의 경우 이제 존재의미가 희미해진 노비당이 형평사(衡平社)로 이름을 바꿔 빈부격차의 말소와 사회적 인식 개선을 내세웠다.

이들은 부녀회와 미륵사 등 기존에 천대받던, 그리고 아직도 완전히 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계층과 연정 비슷한 것도 계획하는 듯했다.

공화국의 이익단체라 하면 고총련을 빼놓을 수 없다.

시준의 입장에서 가장 큰 변화는 기랑이 그간의 바지사장 노릇을 탈피한 것이다.

그녀는 정식으로 고려총포사연결회의 회장으로서 중앙인민회의에 진출했다.

자기 일 때려칠 생각 때문에 기랑의 준비를 전혀 몰랐던 시준은 어이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연설도 해야 하고, 여러 발의할 게 많은데 어쩌려고? 오래 말하다 보면 반드시 들킬 거다.”

기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 짐작하고 있는 사람 많을걸. 그리고 나도 이제 결심했어. 전에 말한 대로 계속 이 짓 하지는 않을 거야.”

시준은 기랑이 이제 자기 정체를 밝히겠다는 소릴 듣고 말도 못 하게 놀랐다. 삼화에서 이강회의 함대를 봤을 때보다 더한 경악이었다.

“제, 제정신이야?”

“부녀회 회장(김부용)도 있고, 미륵사 부회장도 무당이야. 다들 중앙인민회의에 나와서 멀쩡히 연설하고 남자들과 얘기도 해. 내가 왜 못 해?”

그녀가 그만둔다는 ‘이 짓’이란 단순히 남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기랑은 더 이상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여서까지 시준의 옆에 있는 데에 한계를 느꼈다.

대의원이 되면 급양과장 노릇도 못 하기에 지금까지 주저했지만, 이제는 기랑도 깨달았다.

애초에 그것은 그녀가 신분을 속였기에 무난하게 유지되던 자리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랑은 그저 시준의 부하 직원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

삼칠일이 지나고 나서 기랑이 급양과장 명목으로 지유에게 찾아갔을 때, 지유가 아기를 안고 행복해하던 모습을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많이 초췌해지고 지쳤어도 지유는 확실히 웃고 있었다.

기랑이 전통적 여성관에 경도된 사람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성 정체성이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것도 아니다. 그녀의 남장은 그저 생계와 안전상 필요했을 뿐이다.

그녀에게도 다른 모든 사람처럼 욕구가 있고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혁명은 모든 종류의 억압을 부정하고 타파한다.

‘나는 왜 숨어 살아야 해? 나는 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안 돼?’

그래서 기랑은 이제 안전한 거리 대신 위험한 접근을 택했다.

이대로라면 지유가 없는 영역에서 시준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면 지유와 같은 영역에 서야 한다.

“후임 과장은 소질개가 좋을 것 같아. 뭐, 네 뜻대로 하면 되겠지. 그럼 나는 짐 챙겨서 가볼게.”

기랑이 그간 해온 고민과 결정을 알 도리 없는 시준은 기랑이 정말 주석당 집무실을 나설 때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시준도 기랑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시준은 그것을 현대식 연애 감정의 토대 위에서 파악했고, ‘자기가 이토록 절개를 지켰으니’ 이제는 그녀도 슬슬 질렸을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랑이 알면 총 갖고 오겠지만 시준의 인식은 21세기식으로 말했을 때 ‘옛날 썸 타던 여사친’ 정도였다.

그래서 시준의 추리는 단순했다. 지유에게 자식이 태어났으니 이제 기랑도 포기하고 다른 남자 찾으려나 하는 정도였다.

시준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머릿속에서 그 고민을 치워 버렸다. 생각할수록 지유에게 뭔가 죄를 짓는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미루는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경우는 대체로 많지 않다.

***

이렇듯 시준의 ‘예언’은 공화국에서는 별달리 의외의 결과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탐보라 대기근이 정면으로 덮친 지역인 유럽에서는 조금 달랐다.

전 리투아니아 총독 레온티 베니그센은 일상적인 편지를 읽다가 급히 안경을 끌어왔다. 조금 더 잘 볼 필요가 있었다.

베니그센은 옛날 시준과 함께 중국 수도에서 대 활극을 펼쳐 반란군을 훌륭히 진압했던 그 러시아의 영웅이다.

그 뒤로는 몽골족을 충동질해 대중국 견제의 임무를 수행하다 나폴레옹 때문에 급히 돌아갔다. ‘조국전쟁’의 막바지에서 그는 남부럽지 않은 활약을 했다.

많은 군사적 영광을 거머쥔 베니그센은 현재 익숙한 하노버에 돌아와 쉬고 있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눈도 예전 같지 않아 편지 읽는 일도 짜증 났지만 귀족의 의무를 게을리할 수도 없다.

영국의 지인에게 온 편지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다시 글을 찬찬히 살핀 베니그센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시준. 역시 그 소년……. 아니, 이제 청년인가. 내 생각대로 그자에게는 뭔가 있어. 이 편지로 보건대 임페라토르가 나를 다시 모스크바로 부른 이유도 반드시 시준과 관련이 있겠군.”

베니그센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늙은 몸은 예상보다 가볍게 움직였다.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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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사주당 이씨는 남조선혁명당 봉기 파트에서 나왔었지요. 그때 설명된 대로 태교신서의 저자입니다.

또한 도미니크의 요청은 기이한 것이 아닌 게, 이때 유럽은 시체를 의료용으로 해부하는 일이 일상적이었고 심지어 영리 목적의 공개 해부쇼도 활발하게 행해졌습니다.

막 태동하던 전기 지식을 써서 시체에 전류를 흘려 갈바니 반사를 일으키는 컨텐츠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쯤 출판된 메리 셸리의 명작 프랑켄슈타인의 연출도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탐보라 기근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분위기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2. 1809년 처음 흉년 언급이 있었을 때 탕왕 이야기와 함께 그때와 같은 7년 흉년이란 얘기가 있었지요. 실제로 1815년을 끝으로 조선의 심각한 흉년과 환곡의 대량 방출은 약간 완화됩니다. 1816년에도 냉해와 장마가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요.

분명 유럽보다 동남아시아에 가까웠던 동아시아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없진 않지만)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이설이 있습니다. 다만 작중 나온 대로 작물의 차이와 지구 대기대순환 문제가 주원인으로 지목됩니다. 게다가 이때 러시아는 오히려 밀이 풍작이었습니다.

3. 레온티 베니그센 오랜만에 나왔네요. 이 사람은 작중 내용대로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죽을 때까지 하노버에 거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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