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75. 주석 동지의 기묘한 선거(4)
시준이 영국 채권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무슨 일급비밀은 아니었다.
정약용이나 이강회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했고, 그러면 다른 정치국 간부들도 모를 수가 없다. 자본도 서상의 돈을 상당 부분 끌어다 쓴 데다 배를 보내기 위한 영국과의 조율 과정은 국가 사무였으니 국무당 간부라면 모르는 쪽이 오히려 태업이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이강회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조제프 푸셰였다.
푸셰는 그제야 배달된 사다리를 걸치고 연단에 올라갔다.
나이 환갑에 가깝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왕성함이었다. 그 강맹한 기세는 마치 공성전 때 적의 성벽에 가장 처음 오르는 병사와 같았다.
시준이 그 기세와 양심의 가책에 잠깐 찔끔하는 동안, 푸셰는 시준을 노려보는 절차도 생략하고 확성기를 빼앗아 들었다.
“이제 모두 알았을 것이오!”
그가 왕년에 날렸던 프랑스 혁명기 때, 연설 못하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힘들었다.
다른 노련한 웅변가가 파리 어디에서 자기를 죽이라며 떠들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시대였기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반드시 그것을 논파할 변론을 어디에서든지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변론에 있어 정교한 논리나 화려한 수사는 부차적인 것이다.
이미 고대 그리스 때부터 알려져 있었듯 누가 말하는가(에토스)가 가장 중요하고, 듣는 사람의 감정에 동조하는가(파토스)가 그 다음이며, 그 말이 앞뒤 맞고 이치에 합당한가(로고스)는 가장 하위의 요소다.
반동 중의 반동, 반혁명의 수괴 이공의 자식마저 혁명으로 보듬어 안은 인자한 선비 복요섭 동지라면 그 인격으로 봤을 때 에토스의 면에서 일단 모자람이 없다.
그리고 푸셰가 이미 능숙한 조선말에 실어 보낸 교묘한 억양과 강세는, 혁명기를 견뎌낸 프랑스인만이 할 수 있는 기술로 인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말 자체의 논리다. 그런데 푸셰는 고려인민공화국의 선전선동부장이다.
그는 순식간에 짜낼 수 있다. 옳은 논리가 아니라 필요한 논리를.
“이제 모두 알았을 것이오. 주석이 없으면 공화국이 어떻게 되는지!”
푸셰는 의도적으로 한 호흡 쉬었다.
“저 장대한 배들은 틀림없는 영국의 전함. 그것이 여남은 척이라면 중국 같은 큰 나라에서도 감히 꿈꾸지 못하는 전력이오. 인민의 수평함을 창칼로 지킨 여러분은 모두 아시리라 믿소. 평등이란 힘이 없으면 공허한 것! 나라의 수평함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리고 주석 동지께서는, 그 이치를 그저 말뿐인 외침이 아니라 바로 저것, 힘 그 자체가 모양을 갖춰 나온 듯한 바다의 요새로써 보여주신 것이오.”
프리깃이 작은 배는 아니지만 바다의 요새라니, 영국 함장들도 좀 부끄러워할 과장이다. 하지만 아직도 꿋꿋하게 여명이 엄마 되찾아주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푸셰는 원래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는 먼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다시 말해 정시준이 ‘가진’ 군사력을 능숙하게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그러고는 곧 그에 대한 위협을 부추겼다.
다만 위협의 원천은 시준의 존재가 아니다. 시준의 부재였다.
이렇게 하면 시준에 대한 경외는 유지한 채 시준에 대한 경계는 다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나는 인민 여러분에게 묻겠소. 주석 동지께서 불출마한다면, 그 뒤에 누가 이와 같은 위업을 이룰 것인가? 아니, 저것을 지켜낼 수나 있는가? 주석 동지가 없다면 이 강대한 힘은 하염없이 흩어져 하찮은 도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그들은 감히 주석 동지가 가져온 혁명의 대성과를 훔쳐다 자기가 인민에게 나누어주었노라 거드럭댈 것이오! 동지들은 그것을 용납하겠소?”
사람들은 각자 부정의 외침을 발했다. 허나 너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기에 그것은 “으아아아!” 비슷한 괴성으로만 들렸다.
하지만 푸셰는 오랜 경험으로 자기 말이 먹혔음을 알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피로감과 함께 깔때기를 내렸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는 푸셰의 의도를 알아챈 정약전도 따라서 올라왔다. 시준은 노인네 둘이 왜 이렇게 힘이 좋은가 하고 불가사의한 기분을 느꼈다.
정약전은 푸셰에게서 깔때기를 빼앗았다.
“방금 복요섭 동지가 말씀한 바와 같소. 인민들이여! 나 정치국 위원 정약전이 말합니다.”
이제 공화국 사람들은,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칭 시에 자나 호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 것을 짓는 일은 반동이 주로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기에 주석 동지께서 지금 불출마를 선언하신 것이오. 아버지가 자식들과 상좌를 두고 싸우는가? 지금 모두가 보고 있지 않소? 주석의 예지는 너무나 멀고 주석의 지혜는 너무나 깊소. 마치 아이가 어른의 헤아림을 따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른이 어찌 아이와 한 표의 패쪽을 다투어 자리를 경쟁하리?”
수평도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것이 평등사상에 어긋난다며 반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평도는 모든 사람의 차이를 무시한 강제 평탄화가 아니다.
사람은 서로 다르며, 그 다름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누구도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버지가 처자식을 마음대로 폭행해도 처벌받지 않았던 반동의 구습은 수평도를 실천하는 공화국에 없다.
그러나 지금도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고 자녀가 부모를 따르는 것은 같다.
앞뒤만 있고 상하가 없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정약전은 그것을 간결하고 명백하게 거론한 뒤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밥그릇을 두고 악장치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웃으며 자기 밥을 내어주듯이, 주석 동지께서는 인민에게 이런 거대한 선물을 주시고서 물러나려 하신 것이오!”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정약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푸셰가 다시 확성기를 받았다.
시준은 참 잘 논다고 생각했다. 중인 환시리에 두 노인을 두들겨 팰 수도 없으니 참으로 분통이 터졌다.
푸셰가 말했다.
“따라서 우리 수평한 인민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오. 우리는 영구히 어린아이가 되겠는가? 아니면 당당히 인민패를 받은 성숙한 인민으로서 주석 동지에게 합당한 예우를 갖추어, 오로지 우리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우리의 명예를 떳떳이 증명하겠는가?”
푸셰가 인민패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명백했다. 이 정도까지 해 줬는데 못 알아들으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세계 유일의 국민, 고려인민공화국 인민의 자격이 없다.
인민들은 마치 한 사람처럼 소매나 품속에서 나무패를 꺼냈다. 아득한 고대 강후(絳侯) 주발(周勃)이 여씨 척족을 처단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뜻을 물었을 때 일제히 왼쪽 어깨를 벗어부친[左袒] 병사들의 기세도 이에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내 인민패는 오로지 주석 동지만의 것이오!”
“당신이! 가리킨! 오직 한길로! 천 만이 폭풍 쳐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석을 살해하려는 게 아닌가 싶은 나무패 투척이 연단 위로 이어졌다(실제로 푸셰와 정약전은 몇 개 맞고 비틀거렸다).
시준은 멍하니 서서 폭풍처럼 치솟는 인민패를 바라보았다.
봄이 끝나가는 계절인데도 풍경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상하게 뚜렷한 하나가 시준에게 다가왔다.
기랑은 자기 인민패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시준의 앞섶을 확 끌어당겼다.
“어……?”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있던 시준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기랑은 입술을 앙다물고 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던 그녀는 인민패를 시준의 품속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기랑은 조용히, 하지만 주위의 어떤 환성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말했다.
“네 마음대로는 안 될 줄 알아.”
시준은 왈칵 화를 내려 했다. 여태까지 내 마음대로 된 게 하나라도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시준은 그러지 못했다.
기랑의 표정은 득의양양한 미소나 시준에 대한 조롱이 아니었다.
시준은 기랑이 왜 화가 난 것 같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노해야 하는 건 이토록 세상에 농락당하는 자신이 아닌가?
하지만 기랑은 부연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날렵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이제 인민 모두가 무시하기로 합의한 아까 그 현수막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낀 채였다.
***
혁명무력부는 까무러치게 좋아하며 혁명해군의 재편에 들어갔다.
이강회와 차형기는 노력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영국 수병과 함장이 거의 그대로 있는 영국 배들을 그대로 혁명해군의 지휘체계하에 넣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이들은 1함대와 2함대에 이은 ‘혁명해군 별기함대(別技艦隊)’로 편성되었다.
당장의 전력 증가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장기적 계획이었다.
주석 동지가 어차피 5개년 계획 또 만들어 올 테니 군대는 군대대로 확장하면 된다.
시준이 충격을 받고 무단결근을 하는 동안, 총괄서결국장 정약전의 대리 주재로 삼화부의 조선소(造船所) 건설 논의가 확정되었다.
“지금은 삼화에만 짓지만 혁명은 항상 연속 투쟁을 근간으로 삼는 법. 장차 주석 동지의 영도에 따라 삼포, 나주, 덕원부(德源府, 원산) 등 바닷가 큰 고을에는 어김없이 전 대해 동시 혁명의 동음이 높이 울려 퍼질 것이오!”
재정 부담은 문제가 안 됐다. 또 영길리에서 주석이 무슨 조화를 부려 돈 가져오면 되지 않는가.
이강회의 말에 따르면 영길리국의 (왜 졌는지 모르는) ‘빚’은 아직도 많이 남아 정약용의 관리하에 있다 한다. 조선식 빚에 익숙한 정치국 위원들은 희희낙락했다.
“아마 일 년에 3할은 이자를 받을 수 있을 터. 그럼 금세 몇 배로 불어나겠구려. 서양인들이 이리 장리를 겁대가리 없이 쓰니 다들 돈이 많아 보이지!”
“아니, 그쪽 이자는 3푼 정도 된다 하더이다.”
“뭐야? 아니, 이런 괘씸한 놈들이 있나. 남의 돈을 그리 공짜나 다름없이 쓰려는 고약한 심보라니!”
그런 과정을 거쳐 고려 사람들은 ‘조언을 주러’ 온 영국 해군을 상당히 고압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정치국에서 조선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잖았어! 빨리 사람 보내지 못해?”
이미 많은 인민들은 그들을 ‘빚 대신 팔려온 놈들’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를 그렇게 싸게 쳐 주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영국 해군은 반발했다. 이대로 고려인지 뭔지를 정복해 보자는 의견마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각의 결정을 아는 함장들은 그 흐름을 제지했다. 그들은 장교들을 모아놓고 오해할 수 없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냥 야만인들이 기세 올라 떠드는 것에 불과하다. 토마스 매닝 공사대리와 얘기 끝냈어. 지휘부는 이성적이야. 사고 치지 말고 대충 상대해 줘.”
“왜 그래야 합니까?”
“만약 여기에서 전 공사 암허스트 남작처럼 날뛰었다가는 로스차일드가 영국 경제를 뒤흔들 거다. 경제가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인데 나중에 은퇴해서 편한 저택 생활 하고 싶으면 좀 참아. 야수의 심장 왕 첸 때문에 돈 잃고 노숙하는 놈들에게 화풀이로 런던 길거리에서 총 맞기 싫으면.”
그 명령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영국을 그간 많이 상대해 본 공화국 수뇌부는 원만하게 협상을 진행해 갔다. 주 고려 특명전권공사대리 토마스 매닝의 역할도 컸다.
영국 정부가 특별히 기술 사절단을 파견한 건 아니지만, 고급 장교들은 당연히 군 기술을 숙지하고 있다. 현대와 같이 이 시대의 장교도 수학, 화학, 기하학 등을 필수적으로 익혔다.
거기에 민간 기술자라면 동인도 회사도 있고, 자체적으로 함선을 제조하던 경강상인의 가락도 무시할 수 없다. 이래저래 공화국 최초의 근대 조선소 계획은 박차를 더해갔다.
지유는 자기 집 뒤에 지어지고 있는 튼튼한, 매우 튼튼한 창고를 쳐다보았다.
엄청나게 불어난 가산의 ‘물리적 부피’ 때문에 신축되는 건물이었다. 물론 부피로 재니까 그렇고 액수로 따지면 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증가다.
이강회가 그 대선단을 마치 인민 앞에 전부 바치는 것처럼 선언하긴 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의주 희만당 동창의 우정이 그리 파멸적이지는 않다.
시준의 몫은 착실하게 금은으로 챙겨왔다. 다만 서상에 돌려줘야 할 몫은 전부 귀금속으로 채우기 힘들어 곡식과 기계, 무기, 의복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다시 바꾸느라 품 들일 일이 없으니까.
막대한 금은이 한꺼번에 풀리는 일을 막아 인플레이션을 완화시키는 것은 덤이다.
모든 일이 잘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유가 그곳을 바라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남편이 제 예상대로 돈을 그리 많이 벌어왔으니 시준도 그것을 보고 좀 기뻐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유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시준은 그곳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지유는 방구석에서 세상을 부정하고 있는 시준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얘기 들어 보니 조선소를 짓는다느니 영길리 사람들 묵을 데 마련한다느니 하며 사람들 모두가 분주하던데, 정치국에 안 나가 봐도 돼?”
“안 가. 나 이제 주석 아니야. 후보 등록은 다 끝났다고.”
지유는 되도 않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시준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니고, 부인마저 그렇게 말하면 시준이 상심할까 봐서다.
지유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 주석이 뽑힐 때까지는 주석이잖아?”
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물론이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라고 여겼던 기랑마저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소가 어쩌고 하는 것으로 봐서 동료들은 자기 없이도 충분히 나라를 돌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쯤 되면 괴롭히려고 이런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세상이 자신을 방해한다면 행동으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지유야. 힘들겠지만 우리 그냥 짐 싸가지고 남쪽으로…… 아니, 외국으로 도망가 버릴까?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겠어.”
지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 지유는 언제 해산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길게 대화하는 것도 솔직히 힘들지만 그녀가 시준을 사랑하기에 애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석의 무단결근 사태에도 불구하고 당장 사람들이 집에 안 쳐들어오는 것은 시준의 결정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부녀회 부회장에 대한 존중과 임산부에 대한 전통적 금기 탓이 더 컸다.
즉, 시준의 집 주변에는 이미 주석 언제 나오나 하고 기웃대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깔려 있다. 도망쳐 봐야 평양부를 벗어나기도 전에 잡힌다.
하지만 지유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떠올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묻어두었다.
대신 그녀는 낯선 발음으로 시준을 불렀다.
이제 가족이라 할 수 있는 가까운 몇몇만이 알고 있는 시준의 옛 이름. 정약용을 만나기도 이전 지유와 의주 살았을 적 두 사람이 공유하던 그 이름이었다.
시준은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고개를 퍼뜩 들었다.
지유 역시 일어나는 사람처럼 어깨와 목을 폈다.
실제로 지유가 혼자 일어난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그녀가 가공의 동작으로 일어서서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옛날 네가 비누인지 뭔지 만들었다가 나한테 야단맞으니까 행랑채 있던 완순이나 갖다 준다고 했을 때, 내가 성내면서 빼앗았던 것 기억나니?”
시준은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따지고 보면 10여 년 정도밖에 안 된 일인데 그간 너무 많았던 풍파 때문에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너는 몰랐겠지만 장주님 댁에 이래저래 얹혀살던 계집아이들이 다 너를 두고 한두 번씩은 쑥덕대었어. 그래서 화가 났던 게지. 아마 내가 다른 데로 시집갔다면 너를 맞이할 아이도 있었을 거야.”
“그, 그래?”
지유는 시준의 ‘아, 인기 있었는데 아쉽다’는 표정을 무시해 주었다.
승자의 여유, 정실의 품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준이 갑자기 홱 돌아서 집을 떠난다 해도, 그녀가 잘 아는 울타리가 하나 더 시준을 둘러싸고 있다. 걱정하지 않는다.
시준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라는, 다시 말해 진짜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증오와 회한에 잠겨 있지는 않은 상태라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반가웠다.
그래서 지유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게 네가 인물이 빼어나다거나 해서는 아니야. 그땐 그저 유숙하는 아이였을 뿐이라 장래를 볼 것도 없었고. 하지만 너는 그때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어. 어린아이들이라도 그것을 어렴풋이 알았을 테지.”
“달랐다고?”
“그래. 똑똑하고 날랜 아이라면 어느 집에나 한둘은 있잖니. 우리 소질개도 그렇고. 신기할 건 없어. 하지만 너는 뭐라고 해야 할까. 반지빠르다기보다는 넉넉했다고 해야 할까?”
지유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려니까 어렵네. 하여튼 너는 위태하게 대어들다가 낭패를 보지도 않고, 제 잘난 것 믿고 쥐알봉수처럼 머리 굴리다가 다른 사람에게 당하거나 비웃음을 사지도 않았어. 말하자면 아이 같지가 않았지. 대담한 일을 할 때도 앞뒤 없이 처치하는 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손대면 일이 성사될지 알고 있는 듯했어. 마치…… 전에 한 번 평생을 살아본 사람처럼.”
시준은 뜨끔했다. 다행히 지유는 시준의 정체를 파헤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그리 마음 놓게 해 주는 사람에게 여인은 끌린단다. 어머? 입꼬리 올라간다? 어쨌든 너는 입으로야 한 몸 편하게 살고 싶다 노래를 부르지만 실상은 그렇게 작은 사람이 아니었어.
꼬마 서장관 하던 때, 만상을 맡아 이끌던 때, 그리고 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던 때 너는 장주님, 식구들, 나나 기랑이, 그리고 종당에는 인민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야.”
시준은 놀란 얼굴로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는 같이 메뚜기 잡아먹던 친구에서 어린 날의 연인으로, 다시 그의 원숙한 부인으로 변모했다. 그 변화는 이 짧은 대화 안에서 순식간에, 그러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말해 봐. 홍경래에게 나와 식구들이 잡혀갔을 때 왜 군사를 일으켰지? 잊어버리고 엎드렸다면 네가 바라는 대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뒤라도 마찬가지야. 나도 알아. 지금 은갱에 있는 김조순은 아마 너를 자기편으로 하고 싶었을 테지. 그럴 수 있었어. 하지만 넌 거절했잖아.”
“그것은…….”
그 뒤는 지유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준은 인정해야 했다.
시준의 인생은 사실, 그에게 이상을 갈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바쳐진 것이었다.
시준이 역사의 물굽이를 지도할 영웅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시준 역시 다른 사람과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사회적 생물로서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외로움을 탄다는 표현은 사실과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다. 물을 다 증발시키지 않는 이상 소금물에서 소금만 빼낼 수 없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사람들은 시준에게 자신의 소망을 투영했다. 굴복하고 싶지 않다. 학대받고 싶지 않다. 부정한 힘 앞에 무릎 꿇은 채 내 존엄을 남에게 위탁하고 싶지 않다!
시준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너희들의 힘을 빌려다오. 내가 너희의 앞에서 깃발을 들 테니, 내 뒤에서 창을 들어다오. 그러면 우리는 함께 원하는 것을 이루리라.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렇게 융합된 양자를 돈 몇 푼 들고 탈주해 분리시키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소망이었다.
부부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지유는 시준이 그 점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중간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말했다.
“나도 그런 너를 보고 힘을 냈어. 자손을 기르고, 병마를 이기고, 중간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걸을 거야. 내가 이전에 썼던 글처럼 이 모든 건 죽을 때까지의 투쟁이야.”
시준은 지유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영구혁명론을 상기하고 미소지었다. 지유도 따라서 웃었다.
“너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같이 싸워줬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사랑하는 너였으니까.”
시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마치 일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계속 반쯤 누운 채 앉아 있었던 지유를 향해 다가갔다.
지유가 그러했듯, 시준도 지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시준은 반드시 네 말대로 하겠다는 둥의 장황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시준은 짧게 말했다.
“고마워.”
지유도 무언가 입을 열어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유의 인상이 거짓말처럼 확 찌푸려졌다.
그 순간, 시준은 마치 세상이 한꺼번에 구겨지는 기분이었다.
“어디가 아파?”
“배, 배가…….”
지유가 대답할 것도 없이 시준은 당장 깨달았다. 지금 자기가 일하기 싫다고 징징댈 때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출근해 있었다면 평소 지유를 돌봐주던 사용인들이 당장 조처했을 텐데, 요즘 분위기가 이상해서 – 시준이 이상하게 만들어서 – 방에는 둘밖에 없었다.
시준은 몸이 두 쪽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여기 남아서 지유를 안심시키고 싶은 자신과, 당장 조치를 위해 뛰쳐나가야 하는 자신 중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도저히 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민도 사치였다. 시준은 장지문을 미닫이문이 아니라 여닫이문처럼 열려다가 거의 부숴버렸다. 그는 그게 부자연스럽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무나 와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근처에 어정거리던 소질개가 달려왔다. 시준은 스페인 달러 금화를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어 던져주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평양에서 가장 능숙한 산파를 불러오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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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악장치다’라는 말은 악쓰면서 서로 싸우거나 떼쓰는 것을 말합니다.
2. 조선의 대부업과 단순 비교하긴 좀 힘들긴 하나, 나폴레옹 전쟁기 영국 전쟁국채의 지급 이자는 3~3.5%정도였습니다.
유럽은 기독교 전통적으로 이자를 받는 대부업 자체를 사악하게 봤고(그래서 유대인이 함) 차츰 금융이 발달해 이를 허용한 뒤에도 여러 나라에서 고리대금업에 엄격한 통제를 가했습니다. 영국은 16세기 중반부터 장장 300년간 이자를 5% 이하로 규제했죠.
이게 폐지된 것은 19세기 중반기입니다. 이러한 이자 제한은 ‘자유 경제’의 이름하에 학문적으로 공격받게 되죠. 작중 시점에서 그런 주장이 슬슬 나올 시기인데... 대표적 유명인으로는 제레미 벤담이 있습니다.
반면 조선은 사채든, 국가의 대부든 이자율이 무자비하게 높은 편이었습니다. 정책이나 왕에 따라 자주 바뀌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 기준으로 연 30~50% 정도의 서울역 절망의 탑 싸대기를 후려칠 고리가 ‘그나마 법정 이율’이었죠.
대명률에는 이 대부업에 관련된 조항도 많습니다. 얼마 못 갚으면 몇 대 패라든지...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장리’라고 부르는 이자놀이가 본격적 사회 문제로 대두하자 숙종 대에 연 2할의 ‘가벼운’ 이자로 제한하려고 명을 반포하거나 아예 돈 빌려준 첫 해는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지킨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거죠.
3. 지유가 얘기한 어린 시절 일은 작중 극초반부에 나왔었지요. 저도 그립네요. 하하.
4. 주발이 유방 사후 권력을 전횡하던 여씨 일족을 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킬 때, 병사들이 어깨를 드러내어 동조했다는 고사는 ‘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좌단’, 그러니까 왼쪽 어깨를 벗어부치는 동작이 이때 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그 전부터 ‘긍정과 찬성을 뜻하는 표현’이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주발이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를 벗고, 여씨를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어라’라고 한 말은 애초부터 함의가 명확한 거죠.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지금부터 여씨를 모두 죽일 거다. 불만 있는 놈은 (같이 죽여줄 테니) 3보 앞으로.’ 정도가 되겠군요.
병사들이 찬성한 것도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