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25화 (225/284)

225화

75. 주석 동지의 기묘한 선거(3)

김익순의 ‘특단의 조치’ 덕분에, 이제 총선거에는 최소 100명의 인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정예만이 남게 되었다.

그 정예 중 한 명은 경상도 예안부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야순이었다.

전설적 노비 채굴자 이퇴계의 후손이며, 그 혈통이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처신으로 전쟁 직후의 반동 숙청을 비껴갔던 그 사람이다.

그런 만큼 이야순은 시준이 상상도 하지 못한 창의적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

이야순은 날카로운 눈의 야학 학생 몇 명을 불러다 앉혀 놓고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의 지체로서는 꿈에서도 떠올리지 않았을 일이었다.

“자.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고 앉아서 오해를 좀 풀어 보자는 것일세. 내 얘기를 들어 보니 학생 동지들이 인민위원장의 재선(再選)은 안 된다고 했다면서?”

“인망 높은 군 인민위원장 동지께는 송구하나, 영구 투쟁 지속 혁명의 기치를 실현하려면 기화(奇貨) 또한 수평하게 있어야 하오이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항상 새것으로 갈아야 하는 게 수평도 아니겠소이까.”

“허허. 그래, 그래. 옳은 말이지. 하지만 아직 내가 이 예안을 위해 못다 한 일이 많아서 이번에도 출마하는 주책을 부렸네그려. 나는 신라국이 반동의 압제에서 해방된 후에 취임한지라 5년을 채우지도 못했으니까. 동지들도 알겠지? 그저 내가 나쁜 뜻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면 되네.”

그러면서 이야순은 이 흉년에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주안상을 연방 권하였다.

“잔이 비었군. 더 들게. 자네도 어서 비우고. 팔 떨어지겠어. 안주도 든든히 자시고. 학교나 상조농장엔 고기가 흔치 않을 게야.”

“크흠. 저희도 괜히 척지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지요. 저희 학생들에게는 오직 혁명의 한뜻밖에 없음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아무렴, 어련하겠는가.”

넙죽넙죽 주는 술 받아먹은 야학 학생들은 이야순의 융숭한 대접 아래 그날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별로 쓸 일 없는 인민패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들이 이야순 대신 후보로 밀어주려던 예안부 야학 학생회장(學生會長)에게 넣을 패를 찾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그 교활한 늙은이가!”

학생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누군가는 당장 가서 도로 받아오자고 했으나, 다른 사람이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 봐야 다른 사람들은 술잔 받고 패 내주었다고 생각할 게 아니야? 인민패를 까닭 없이 남에게 빌려주면 닷새는 노동교화를 받아야 하는데. 일이야 한다 쳐도 우리가 혁명의 기수로서 그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찌 되겠는가?”

결국 그들은 이야순이 ‘야학마저 자신들을 지지했다’고 떠드는 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부르짖던 혁명의 강철대오는 막걸리 몇 잔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야순은 사려 깊은 축이었다.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들끼리나마 이야순을 비난할 수 있게 하여 그들의 도덕적 자존심을 세워줬으니 말이다.

많은 동네에서는 그냥 대놓고 인민패 장사가 이루어졌다.

선거관리법 위반 걱정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런 법이 없으니까. 공화국 법은 인민의 판결을 받기 전까진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총선거 준비위원회가 ‘뇌물이 오가는 반혁명적 부정 선거’에 대해서 엄한 응징이 있으리라는 포고를 계속 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무엇이 부정 선거인지에 대한 엄밀한 정의도 없는 데다 적발할 만한 계량과 관측 수단도 부재했다.

그냥 동네 사람들에게 밥이며 술 대접할 수 있는 거고, 동네 사람들이 투표장 가서는 제 마음 가는 대로 패 던질 뿐인데 어디가 부정이라는 말인가? 대접을 투표에 고려할지는 전적으로 투표권자의 몫이다.

오히려 공화국 사람들은 기존의 인식대로 후보자들이 마땅히 ‘생지당권의 큰 권리를 가진 인민에게 인사를 와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공자 역시 ‘강의 신청하려면 육포라도 가져와야지? 청빈? 나는 땅 파서 장사하니?’라 하지 않았던가.

반동조차 과거 합격하면 면신례를 한다는데, 모든 수령을 손끝으로 임명하는 이 총선거의 인민이 설마 반동 조정의 선배 관리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공화국 인민들의 주인 의식이 이와 같다. 5년 만에 그들은 명실상부 권력자가 되었다.

청렴 선거를 목표로 한 후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버르장머리없는’ 세태는 햇살 앞의 이슬처럼 사라졌다.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재산 가진 유력자들이다. 그렇다 보니 공화국에서는 부의 재분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실현되었다.

모든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재선을 노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남양도호부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옥의 경우 나이가 많아 이제 ‘담배’ 농사에만 전념하고 은퇴하리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래서 인망 높은 후보가 빠지게 된 남양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음 인민위원장을 위한 각축이 벌어졌다.

이옥과 같이 남조선혁명당의 일제 총궐기 불꽃을 밝힌 동지였던 봉달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혁명적이라지만 봉달이도 어쩔 수 없는 조선 남자다. 부인 덕개에게 더 이상 들병장수 노릇은 그만 시키고 싶었다. 혁명당 노릇으로 땅 조금 받은 것도 상조농장에 팔아버린 뒤다.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무슨 막대한 치부를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라고 해도(욕심이 없거나 시스템이 정교해서가 아니다. 그냥 공화국에 딱히 착취할 돈이 없어서 그렇다) 인민의 공복(公僕)인 만큼 먹고 살 만한 곡식은 나라에서 우선적으로 나온다.

그러면 더 이상 젓갈 지고 다니느라 집 안 비워도 되고, 덕개도 부녀회 위원 일이나 하면서 편하게 살 수 있다. 어쩌면 남편 뒷배로 부녀회에서 자리가 오를지도 모른다.

저 계룡산 혁명열사릉 아래의 열사 김유근마저 인정할 혁명의 순정남 봉달이는 곧 기민한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자. 칠득이. 이게 뭔지 아나. 영길리 신발일세. 만져 봐. 빳빳한 가죽신이라는 말이야.”

“우와. 진짜네. 이걸 어디서 구했어?”

칠득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영국제 신발을 만져 보았다.

가죽을 바닥에 겹겹이 겹쳐 만든 그 신발은 영국에서 몇 실링에 팔리는 노동자용이었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가 조선에 유통할 때는 훨씬 비쌌다. 그리고 봉달이는 그 비싼 가격을 다시 몇 배로 튀겨서 말했다.

“이 사람. 그걸 아무나 알면 내가 이리 유세하며 내보이겠나. 이런 귀한 것을 가져와서 인민에게 배부하는 수완이야말로 인민의 대표에게 걸맞은 것이거든!”

“인민에게 배부? 그럼 나한테도 한 켤레 떨어지나?”

“그렇고말고. 칠득이 자네, 아니, 남양부 교양위원회 위원 이칠득 동지. 동지 집에 인민패 있는 사람이 남녀 합해 여섯 명이지 않나. 아버지가 명하면 자식들이 군소리할 턱이 없지!”

칠득이는 어깨를 폈다. 그는 대책 없이 식구만 많아 찢어지게 가난한 – 그래서 혼인도 못 시켜 집에 성인 남녀가 드글드글하기까지 한 – 남양 바닥 박흥보 칠득이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남양도호부 교양위원회 위원 이칠득이었다.

칠득이는 교양위원다운 교양을 발휘했다.

“그럼 우리 집 식구들 인민패만 가져다주면 이 신발은 내 것이란 말이렷다?”

“말귀 빨라 좋구먼. 똑똑한 교양위원 동지이니만큼 총선거 때도 마찬가지로 내게 패를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쯤이야 익히 알겠지?”

“어허. 동지는 준비위원회의 포고를 못 들으셨소?”

봉달이는 교양위원회 위원의 날카로운 지적에 이마를 딱 치고 미소지었다.

“용서하게. 내가 그만 나라 걱정을 참지 못하고 말일세. 선거 나오려는 사람들이 지금 인민위원장 동지(이옥) 인품의 반도 못 따라가잖느냐고. 거, 이번에 벼른다는 저 상조농장 3여장 김삼룡 동지는 농장의 부인들과 안 좋은 소문도 있고…….”

뇌물에다가 흑색선전까지 충실하니 누구도 조선 사람들에게 정치 소양이 없다 깔보지 못할 것이다. 봉달이의 열변은 이어졌다.

“동지는 내가 이 근처 도부꾼(보부상)들 꽉 잡고 있는 것 알지? 이 신발이 어디서 났겠나. 삼화부가 여기서 멀다 해도 내 말 한마디면 뭐든지 구해 올 수 있다는 거야. 내가 누군가. 왕년에 주석 동지와 함께 용맹히 한양군 성벽을 넘어 반동 김조순을 깨뜨린 혁명동지 아닌가!”

그러므로 자기가 나서면 남양에서 기르는 ‘평안도 담배’를 훨씬 좋은 값에 팔 수 있다느니, 그것으로 인민들에게 장차 이런 신발쯤이야 한 켤레씩 다 안겨 줄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이 이어졌다.

칠득이는 그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영국이건 조선이건, 이 시대의 일반인에게 가죽 등 내구성 있는 재료로 된 신발이란 현대인의 스마트폰 같은 것이다.

생각보다 고가이며, 없으면 나갈 수가 없고(스마트폰처럼, 급하면 없이도 나가기는 한다), 보통 한 사람에 하나씩만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칠득이의 기쁨도 작을 리 없었다.

칠득이는 봉달이에게 꼭 인민패 갖다 주마고 약속한 뒤 신발을 받아 집에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는 이미 인민패가 하나도 없었다.

대신 마당에 새로운 시설물이 탄생해 있었다. 칠득이는 부인이 내보인 토끼장이며 닭장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부인은 기쁜 듯이 말했다.

“당신 없는 사이 상조농장에서 그 3여장, 알지요? 김삼룡 동지가 사람들 데리고 왔었소. 인민패로 자신을 지지해 주면 토끼 암수와 영길리 씨암탉을 준다고 해서 냉큼 내주었지요. 식구 많은 게 웬수 같았는데 이제야 그 덕을 보네.”

“그, 그래서 다 줬어? 내 것도?”

“그럼요. 고맙다고 이렇게 울짱도 야무지게 지어 주지 않았겠소? 세상에, 저 돼지만 한 영길리 토끼 좀 보소. 짐승이야 인민패 덕이라고 해도 이 장은 내가 부녀회 나가면서 김삼룡 동지와 친해 둔 덕이라오. 그런데 그게 무슨 신발이오?”

칠득이는 신발을 툭 떨어뜨렸다. 봉달이에게 신발을 돌려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

시준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각지 잠룡들의 화려한 경쟁 끝에 3월 말이 되어 후보 등록이 마무리되자, 시준의 준비도 마무리되었다.

시준은 여태까지 자기를 엿먹인 동료들의 행태에서 쓸 만한 개념을 학습했다.

‘만인의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못 박아버려야 한다. 그래야 지금까지처럼 내 뜻이 왜곡되거나 정반대로 해석될 염려가 없다.’

그래서 시준은 이번에 행사를 하나 마련하기로 했다.

그는 이번에 평양부 인민위원회에 출마하는 – 이제 가능하다 – 조제프 푸셰를 불렀다.

“여명(黎明)이는 무탈하게 잘 있소?”

푸셰는 자기 양자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혁명이 밝아온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준은 남의 자식 성명에 가타부타 참견하지는 않았다.

시준의 의심대로 21세기 북쪽 공화국에서 심심찮게 쓰이는 이름이기는 하나 모르는 게 약이다. 하긴 효명이나 여명이나 밝다는 뜻은 비슷하다.

“그럼요. 주석 동지의 염려 덕에 잘 있소이다. 이제 학교에도 가서 혁명사상을 익숙히 하고 있지요.”

“그거 다행이구려. 그런데…… 이번 총선거 관련해서 내가 삼화부 항구에서 조촐한 연설과 행사를 하나 하고자 하오. 그 일에 선전선동부장 동지의 도움이 꼭 필요해서 불렀소이다.”

푸셰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그게 탈이었다. 그는 교활한 표정으로 웃었다.

“흐음. 그렇군요. 안 그래도 늦은 감이 있지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이래서 시준이 푸셰를 부른 것이다.

남에게 자기 지혜를 자랑하기 좋아하는 푸셰라면 시준에게 자세히 캐묻지 않고 ‘주석 동지의 출마 연설’을 위한 자리를 잘 마련해 줄 것이다.

그리고 시준은 그 기대를 정면으로 배신할 생각이었다.

조제프 푸셰를 배신할 수 있었던 인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시준은 서둘러 나가는 푸셰보다 훨씬 더 깊숙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당한 일을 생각하면, 동료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할 죄책감 따윈 전혀 없었다.

푸셰가 사라지자 시준은 기랑을 불렀다. 이제 퇴근할까 하던 참이었는지라 기랑은 이것저것 급양과장의 잡동사니를 챙긴 채로 들어왔다.

시준은 그런 기랑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밤새 남아 있어야겠어.”

“왜?”

“오늘 밤엔 네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 말고 너만.”

기랑은 눈을 크게 떴다. 우물우물 대답한 그녀는 집무실을 나와 문에 기대었다. 그러고는 숨을 크게 내쉬며 가슴을 내리눌렀다.

***

며칠 뒤, 후보 등록 마지막 날 시준은 항구의 짠바람을 음미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영원한 인민의 영도자, 영원한 주석 정시준 동지 만세!>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 완수까지 다른 주석은 없다>  등등의 현수막과 팻말에도 더 이상 혈압이 오르지 않았다.

‘마치 보직 이동하기 하루 전 들어온 민원 보는 기분이군.’

다시 말해 완전 남의 일이었다.

그리고 시준은 지금부터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시준이 굳이 평양 앞 대신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이곳은 공화국 최대의 항구이며, 외국과의 무역도 성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국내 해운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만약 평양성 안에서 이런 선언을 했다가는 열성적인 정치국 간부들에 의해 차단될 게 뻔하다. 시준의 절절한 의사는 성문을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사방이 트여 있고 소문이 가장 빠르게 퍼질 이곳에서 돌이킬 수 없이 확정해야 했다.

아무래도 푸셰가 준비한 듯한 합창단은 아까부터 “위대한 정시준 동지! 우리는 당신밖에 모른다!” 따위의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시준은 손을 들어 사람들의 열창을 중단시켰다.

그러고는 들었던 손을 옆으로 힘차게 뿌렸다.

아무도 시준의 글씨인 줄 모르는 악필의 현수막이 쫙 펼쳐졌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기랑과 둘이서 밤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전(前) 주석 정시준은 2대 총선거 불출마를 인민 앞에 선언합니다>

사람들은 현수막 읽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환호부터 했다.

본래 메시지 따윈 중요하지 않다. 메신저만이 중요하다. 시준도 뭘 잘못 썼나 하고 현수막을 돌아볼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 현수막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곧 몇몇 사람들은 눈치를 채었다. ‘출마’라는 글자 앞에 뭔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게 붙어 있었다.

수군거리는 사람은 적었다. 대부분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랑은 그야말로 벌레 씹은 표정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이게 다 네 잘못 아니냐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는 더했다. 기랑은 원망을 담아 시준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허나 시준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깔때기 모양의 확성기를 들었다.

옛날 첫 평양인민대회 때와 같은 방식의 전성관은 빈틈없이, 그리고 영국 해군이 도와준 더 정교한 방식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존경하는 혁명 동지 여러분. 저는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시준의 장황한 연설은, 단지 장황하다뿐이지 내용이야 뻔했다.

‘솔직히 나도 안다. 나가면 당선될 수 있다. 그러나 선례를 남기면 다른 누군가도 나처럼 2연임, 3연임을 하려 들 테고 그러면 그건 새로운 왕을 키우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대강은 시준이 항상 말하고 생각해 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시준의 말을 항상 오해해 오던 공화국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소란 떨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 틈을 타 시준은 못을 박듯 단언했다.

“제가 혁명을 일으킨 뜻이 삿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저와 모든 동료들의 명예를 위해, 무엇보다 공화국의 영구한 수평을 위해! 저는 2대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준은 조금 더 솔직한 소망도 밝혔다.

시준은 몸이 약한 부인의 해산과 육아 때문에라도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일을 밖에서 얘기하는 것은 아무리 개명된 공화국이라도 수치에 속하는 짓이었지만, 시준은 자기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허나 진실과 수용 가능성은 통상 반비례한다. 공적인 이유든 사적인 이유든 여기 모여 있는 사람 중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람들이 정신을 좀 차리자, 삼화부 항구는 다시 끔찍한 소동에 빠져들었다.

시준의 정치적 지위에 자신의 안위도 달려 있는 정치국 간부들은 벌써 여러 차례나 연단에 진입하려 했다. ‘하하. 놀라셨죠? 주석 동지의 깜짝 공연이었습니다!’ 하며 시준을 끌어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주석 동지에 대한 접근을 불허하는 주석결사옹위대 장병들 때문은 아니다. 그들 또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말도 못 하게 경악하며 시준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돌파는 쉬웠을 것이다.

허나 빈틈없는 시준은 ‘목소리가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기처럼 엄청나게 높은 연단을 요구했다. 어디서 급히 사다리를 갖고 오지 않고서야 시준이 있는 곳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것을 간파한 정약전은 으르렁대며 조제프 푸셰의 멱살을 잡았다. 진짜 잡았다.

“이거 네놈 짓이지! 정치국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잖아!”

푸셰의 기나긴 배신 인생 중 오늘처럼 억울한 날은 없었다. 나폴레옹에게 쫓겨날 때도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아, 아니, 나, 나는 진짜 몰라! 그저 주석 동지의 명령대로…….”

“웃기지 마!”

그렇게 드잡이질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아스라이 울리는 주석 동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준은 밑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만큼이나 열정적인 몸짓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저의 결심은 저 바다에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해도정출 정 진인의 소문을 떠올리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거기 있는 것은 언제나처럼 매여 있는 여러 척의 선박뿐이었다.

“저는 인민이 부여한 모든 직위를 반납합니다. 모든 인민들이 부족한 저를 잊을 정도로 현명한 사람을 뽑아주길 바랍니다. 그때가 되면 저는 장차 바다에 나가, 아직 수평 혁명이 닿지 않은 외국에서 공화국을 돕고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분투할 생각입니다.”

국내 소란이 좀 가라앉으면 돈 들고 외국으로 튀겠다는 소리였다.

당분간은 처자식 때문에 국내에 있어야 하겠지만 만일의 경우 3대나 4대쯤의 주석이 시준을 불안 요소로 느낄 수 있다.

가능하다면 외국에도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전생의 제3세계 독재자들도 비슷한 발상을 했으니 독창적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그런 음험한 속셈을 모르는 인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버리지 말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특히 조제프 푸셰가 과연 프랑스인답게 가장 열정적이었다. 마침 바다도 눈앞이겠다, 일이 잘못되면 이 자리에서 정약전의 대독에 들어갈 게 뻔했다.

시준은 이세계에서 자신의 목표가 처음으로 성취되어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는 거의 도취되어 팔을 벌렸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비록 큰 바다를 격하고 있으나, 그때가 되어도 저의 마음은 항상 여기 혁명 동지들과 함께……!”

그때였다.

바다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데다 시력도 남보다 좋은 시준의 눈에 가장 먼저 띄었다.

지금 그딴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른 사람들처럼, 시준도 처음엔 그게 삼화 앞바다를 쉴 새 없이 오가는 고기잡이배나 무역선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고기잡이배라기에는 너무 컸고, 무역선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찬성뿐만 아니라 반대에도 호응이 필요하다. 주석이 말하다 말고 멍하니 있자 주석의 모든 선언을 격렬히 부정하던 혁명 동지들도 그것을 멈추고 주석과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개중 가장 강력한 이성을 갖고 있던 정약전의 행동이 가장 빨랐다. 그는 급히 연단 아래로 달려와 고개를 꺾어 들고 힘껏 외쳤다.

“주석 동지. 일단 내려오십시오! 영길리 배 같습니다. 혹시 저들이 갑자기 침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국은 영국이니만큼 아주 괜한 걱정은 아니다.

허나 그보다는 일단 주석의 기행을 끝내자는 취지가 강한 발언이었다.

공화국의 첩보망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만약 저 정도의 대규모 무장 선단이 중국에서 출발했다면 그 전에 동인도 회사의 첩자나 오가는 상인들이 알려 왔어야 한다.

게다가 시준은 뭔가 다른 종류의 의혹을 느꼈다.

그는 동아시아에 있는 모든 영국 해군 군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꽤 커진 그 배 중에는 시준이 아는 배가 없었다.

시준은 그가 기다리던, 하지만 지금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시준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그 대규모 선단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선단에서 흘려내듯 출발시킨 나룻배 하나가 항구로 꾸준히 다가오는 것은 조금 늦게 보았다.

시준은 거기에서 거부할 수 없는 종류의 확신을 받았다.

저 배와 삼화 항구의 거리는 시준의 행복에 비례했다.

그 거리가 줄어들수록 시준의 은퇴 가능성도 줄어들고 있었다.

“잠깐, 저건…….”

시준은 연단에서 서둘러 내려가려 했다. 저 배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올라올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은 시준도 바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시준이 다리 부러질 각오 하고 뛰어내릴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나룻배는 항구에 닿았다. 모든 사람이 그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내린 사람은 농상진흥부장 이강회였다.

정치국 간부들은 오랜만에 만난 동료에게 반가움을 표할 생각도 잊고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강회는 모인 사람들을 쓱 둘러보더니 금세 시준이 있는 곳을 발견했다. 당연하다. 우뚝 솟은 그 연단의 크기는 못 보기가 오히려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연단을 향해 길게 읍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공화국 만세! 인민 앞에 자랑스럽게 보고 올립니다. 영길리국에서 열여섯 척의 대박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주석 동지의 명을 완수한 기쁨 한량없소이다!”

“내가 언제 그랬어?”

시준의 처절한 맞고함을 전혀 듣지 못한 채, 이강회는 뱃속에서 중후한 성량을 토해내었다. 씩씩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저 배에 실린 것은 모두 영길리국이 빚 대신 내어준 곡식과 돈이오이다! 경애하는 주석 정시준 동지의 신묘한 예지로써, 이제 공화국 인민이 흉년에 배곯을 일은 다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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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이야순과 봉달이 모두 오랜만에 나왔군요. 여명은 (한자 병기를 잘 안 해서) 그 여명이라는 뜻인지는 불분명하나, 실제로 북한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이름입니다. 성이 여씨고 이름이 명인 사람도 있습니다.

2. 작중 초중반 인민대회 때도 나왔지만 이때는 아직 전기가 없으므로 확성 수단은 전성관과 깔때기 등 모두 아날로그입니다. 그리고 시준처럼 높은 데에서 소리치는 것도 의외로 큰 도움이 되지요.

3. 당연하지만 이강회의 선언은 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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