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23화 (223/284)

223화

75. 주석 동지의 기묘한 선거(1)

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원래 충분한 교양을 쌓은 상류 귀족으로서 절대 난폭하거나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대한 국가 부채와 불안한 국내외 사정, 그로 인한 여러 경기 침체 요인을 숨긴 채 ‘드디어 나폴레옹을 조졌다!’ 분위기 하나로 밀고 가야 하는 현재 영국의 입장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전 유럽에 이름난 명사인 네이선 로스차일드 앞에서도 거의 깡패 같은 협박을 주저하지 않았다.

“보시오. 로스차일드 씨. 내가 허풍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겠지. 그 미친 약장수들은 말이 안 통할 것 같아서 먼저 여기로 왔소. 당신이 더 많이 채권을 갖고 있기도 하고. 간단히 말하겠소. 당장 매도를 멈추시오.”

로스차일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예언자 정시준의 계시가 이미 있었는데 이따위 속세의 참견은 가당치도 않다.

“영국 정부가 그것을 나에게 강제할 권한이 있소?”

사실 잘못된 질문이다. 영국인에게 정당한 권한 여부를 묻는다면 영국인은 항상 총칼로 대답해 왔다.

그래서 이젠 아무도 그런 걸 묻지 않는다. 스튜어트 또한 어이없어했다.

“알 만한 분이 그러시는군. 이봐요. 당신의 금화가 총알을 막아 줄 수 있을 것 같은가? 금융이란 결국 정부와 군대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면 순식간에 흩어질 무력한 양떼에 불과하오!”

스튜어트의 신경질은, 말 그대로 신경질적인 과장 반응이긴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나폴레옹 때문에 영국이 쏟아부은 전쟁 비용은 12년간 16억 5천만 파운드 이상. 이 중 5억 파운드 가까이가 채권으로 조달되었다. 영국의 명목 부채는 통계에 따라서는 무려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원래 역사의 워털루 전투 직후 수백만 파운드, 다시 말해 총 전쟁국채의 1% 이상을 사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비밀주의 때문에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원래 갖고 있던 것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원래 역사보다도 상당히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말할 것도 없이 ‘왕 첸 더 라이온하트’의 공이다.

로스차일드에 비할 수야 없지만 시준도 이전부터 강철군주 인감도장으로 영국 국채를 사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근래의 이강회는 말 그대로 야수(사자)와 같은 매수세를 보여줬다.

많은 영국 신사들도 똑같이 야수(침팬지)가 되어 그 뒤를 따랐다. 리처드도 저승에서 흐뭇해할 것이다.

전쟁이 끝난다고 전비가 필요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국 정부도 그때는 좋아라하며 채권을 더 찍어냈다.

이들 전부가 갑자기 국채를 죄다 팔아버린다면 – 폭락하면 분명히 자기들도 손해일 텐데 왜 그러려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그 후폭풍은 크다.

아직 금융 시장이 원시적이라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적다. 나라가 망한다고까지는 못 한다.

그러나 최소한 런던의 금융가와 그에 연계된 귀족 및 자본가 사회에는 대규모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영국의 일부가 아니다. 전부다.

지금의 영국에서 귀족과 자본가 외의 인간, 그러니까 하층 노동자와 농민은 총알받이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들짐승에 가까웠지 국가 정책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스튜어트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국가가 대혼란에 빠진다는 것과 동치였다.

“영국 전쟁국채가 저 머저리 프랑스 놈들의 휴지조각(혁명기 당시 발행했다 실패한 아시냐(Assignat) 채권을 말한다)처럼 런던 한가운데에서 불태워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면, 내 명예를 걸고 그 땔감 중에 당신이 들어갈 거라 맹세하지.”

스튜어트의 기세는 흉흉했으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로스차일드가, 그리고 유대인이 이런 핍박에 한두 번 당해보는 건 아니다.

“나폴레옹과 싸울 때는 제발 국채 좀 사달라고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아주 기가 막히는군. 돈 빌릴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라[an angel in borrowing, a devil in repaying]. 그래서 군대를 끌고 와 나를 죽여서 채권 매도를 막겠다고? 그럼 런던 증권거래소에 다음 날부터 누가 올 것 같은가? 그런 정부를 누가 믿겠느냐는 말이오!”

“영국 정부가 무슨 해적인 줄 아시오? 그런 단순무식한 생각까지는 안 하지.”

거짓말이다. 그런 단순무식한 생각도 했다. 해적 맞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자산은 국채만이 아니오. 필요하다면 우리는 로스차일드의 영국 내 자산에 대해 ‘조사’를 실시할 수 있소. 유대인이 밀수나 탈세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걸.”

그 밀수 상당 부분은 대륙 봉쇄령을 뚫기 위한 영국 정부의 협조 요청, 사실상은 지시 사항이었고 탈세 역시 그에 대한 대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스튜어트의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명불허전 영국이었다.

따라서 그런 논리적 반박은 어리석은 짓이다. 네이선 로스차일드 역시 이 시대에 어울리는 자신의 카드를 꺼냈다.

“당신이 고려 담배를 너무 해서 맛이 간 게 아니라면 내 형제들이 누구인지는 기억할 텐데. 외무장관이 이런 소릴 하는 시점에서 이미 당신의 본분을 망각한 것 같지만, 이제라도 내가 바깥일을 좀 깨우쳐 주겠소. 프랑스와 싸우느라 빚더미가 된 영국 정부가 이젠 오스트리아와도 싸우고 싶은가?”

메테르니히 후작의 후원자 살로몬 로스차일드의 이름에도 스튜어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과연 독일인이 유대인을 위해 나서 줄지 내기하는 것도 난 괜찮아. 하지만 당신도 괜찮은지는 모르겠군.”

두 사람은 로스차일드 저택의 응접실에서 서로를 쏘아보았다.

어느새 둘 사이의 대립은 벼랑 끝으로 치닫는 치킨 게임이 되어 있었다. 이쯤에서 분위기를 완화시켜 줄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면 둘 모두 손해만 보게 된다.

당연히 두 사람 다 원하지 않는 사태다. 저잣거리에서 자꾸 걷었던 소매 다시 걷기만 하며 욕설이나 퍼붓는 두 깡패처럼 이들도 누군가의 중재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구원을 바라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 법이다.

로스차일드는 정약용과 이강회, 그리고 윌리엄 자딘이 불쑥 들어섰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왕 첸 패밀리는 이미 로스차일드와 유대 민족의 운명을 공유하는 한 가족이므로 언제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대단히 놀랐다.

“공사 각하? 그, 그리고 당신들은…….”

마치 데이비드 스콧에 처음 올랐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정약용은 속세를 초월한 태도로 표표히 걸어와 태연히 앉았다. 누가 보면 자리를 권한 줄 알 지경이었다.

정약용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농상진흥부장 동지. 이제 아시겠소? 비록 수평도에 어긋나 방법은 잘못되었으나 옛 성현들이 어찌하여 모리배를 항상 천하게 여겼는지 말이오. 사람이 리(利)만 탐하고 숭상하게 되면 이처럼 끝내 인민의 근본인 국가가 말류인 돈에 휘둘리는 날이 오고 말기 때문일지니! 이득을 얻는 일 역시 다른 업과 높고 낮음 없이 완전히 수평해야 하오.”

“과연 수평도가 고려 땅에서 태어난 이유를 알겠습니다. 정학(正學)이 궁극으로 나아간 이후에 자라는 것이 바로 수평도이니 정학 없이는 수평도도 없는지라. 공자가 동방에 가 살고 싶다고 한 본뜻도 바로 이것이었군요. 외사통호부장 동지의 말씀대로 혁명은 유(儒)에도 또한 그 조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동지의 학문이 안회(顏回)에 부끄럽지 않소.”

네이선 로스차일드와 로버트 스튜어트가 조선말을 모르는 것이 다행이었다. 알았다면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테니까(윌리엄 자딘은 이미 반쯤 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약용이 영어로 용건을 말하자 최소한 로버트 스튜어트는 진짜 쓰러질 뻔했다.

***

고려인민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이 시대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농업이다. 그리고 고려가 세계에 자랑하는 특산품인 약재 또한 땅에서 자란다.

둘 다 겨울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겨울의 공화국은 숨 가쁜 혁명의 질주에도 불구하고 한가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업주들이 원수로 여기는 퇴근 이후 시간도 업무와 완전히 무관한 시간이 아니듯, 겨울은 내년의 농사를 준비하기 위한 필수적 간극이다.

농사를 1년이라도 지어 본 사람은 알지만 겨울의 농촌이 한가하다는 소리는 ‘농번기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다.

배수로를 파고, 보리밭을 밟아 추위에 해 입지 않게 하며 새끼를 꼬고 지붕을 간다.

소가 일 안 한다고 먹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니, 귀중한 소 춥고 주리지 않게 볏짚 넉넉히 넣고 쇠죽도 매일 쑤어야 한다.

의주감자를 절대 얼어 터지지 않게 잘 갈무리하는 것은 물론이다. 초봄 굶주림에 허덕일 때 아껴 먹을 겨울 무 심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국에서 강조한 사업만 이 정도니 나머지 사소한 일은 다 일일이 늘어놓기도 어렵다.

각지 농상위원회는 수도 없는 사업에 앞장섰다. 꽹과리가 울리고 붉은 기가 나부꼈다.

“나오시오! 나오시오! 동지섣달 춥다고 방구들만 지고 있을 셈인가! 공탄 화기(연탄가스)는 몸에 안 좋으니 나와서 몸을 덥히시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진인 화둔법을 부려 놓고 일했다.

물론 이런 조별과제가 다 그렇듯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핑계 대어 안 나오는 자도 있고, 콩 한 줌 쓱 집어 자기 소매에 넣는 자도 있었다.

시준이 아는 공산국가라면 엄중한 인민의 비판이 이루어질 일이다.

하지만 공화국의 스타일은 좀 달랐다. 그런 잡스러운 꼬마 반동 따윈 농상위원회가 나설 것도 없었다.

조선인 중 혼자 사는 사람이나 핵가족은 거의 없다. 혁명의 고삐는 가정에서부터 가장 먼저 잡혔다. 그런 자들은 집안 어른에게 몇 대 맞고 나서 공화국의 국시 중 하나를 깨달았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손이 느리거나 가족이 적다거나, 혹은 몸이 불편하여 이웃에게 면구스러운 자들은 새참에 콩깍지 하나라도 더 내어놓았다. 인정 많은 조선 사람들은 성의만 있으면 대범하게 눈감아주었다.

그조차 형편상 못 한다 하더라도 큰 관계는 없다.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위한 것이 바로 혁명 아닌가.

농상위원회도 그자에게 괘씸한 의도만 없으면 배급되는 곡식을 깎는다거나 하는 치사한 짓은 안 했다.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멍청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이 과연 감성을 어리석다 조롱할 만큼 영민했던가?

이성의 패배는 자영농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는 그저 친구 많으면 좋다는 수준의 말이 아니다. 관계가 없으면 물질이 충족되더라도 생존이 어렵다는 뜻이다.

우스운 노릇이지만 자영농 중에서는 바로 옆 상조농장에서 부족한 대로 서로 돕고 사는 사람들을 동경하는 축이 생겼다.

아직 공화국 토지의 상당 부분은 자영농의 것이다. 그들은 상조농장 옆에서 자기 논밭 일구느라 농상위원회에서는 책이나 받아온다든지 ‘농상혁명지도사업’ 정도에만 참여한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 얼굴 볼 때면, 상조농장에 소속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왁자하게 떠들었다.

올해 의주감자 수확이 약간 덜 혁명적이네, 주석 동지의 계시가 내년엔 틀림없이 맞을 것이네 하는 얘기부터 해서 농장 강아지가 제 천품대로 그 거대한 영길리 토끼를 쫓으려다가 거꾸로 황천 갈 뻔했다는 둥 생기가 넘쳤다.

심지어 상조농장의 고질적인 병폐인 게으름뱅이가 일 안 하려다가 엉덩이 걷어차이는 – 프랑스군에게 배운 것이다 – 꼴마저 부러웠다. 열흘에 한 번 하는 ‘혁명경연’에 그들도 참여하고 싶었다(하마터면 ‘생활총화’가 될 뻔했지만 다행히 시준이 자제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만으로 당장 자영농 위치를 포기하진 않는다.

허나 흉년이 계속되자, 약간만 힘에 부쳐도 즉각 상조농장으로 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흐름에 공동체적 감성이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하다.

대부분의 공화국 사람들은 어차피 개인의 부라는 것을 가져 본 적 없다. 그들은 시준과 혁명정부가 내어준 더없는 안심 쪽에 더 관심이 있었다.

‘어어 이거 이러다 소련 된다’는 시준의 초조함 속에서 공화국의 국유지는 폭증했다.

내가 죽는다 해도 자식은 인민위원회가 책임진다. 옛날 ‘성군’처럼 콩 몇 말 내려주고 끝이 아니라 정말 자식을 농장에서 먹이고 야학에서 글을 가르치며 교양위원회에서 혼인도 주선한다.

그래서 그들은 범람하여 파괴되는 제방에 용감하게 뛰어들어 보수했다. 인민이 앞장서 나날이 창조하는 혁명전설이 월간 대혁명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정도로 빠르게 갱신되었다.

혁명군의 모집에도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양자역학의 조선군은 이제 잊힌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최속군주의 위대한 첨단 학문이 소실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옆 나라 문화대혁명이 그랬듯 원래 혁명 과정에서 로스트 테크놀로지의 발생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예전에는 수자리 도망쳐도 모두가 이해하고 심지어 도와주기까지 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그런 ‘조국의 배신자’는 가족, 친구, 이웃 모두가 흰자위를 드러내고 쳐다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공화국의 집단 총력전 경제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삐걱거림만 내면서 굴러갔다.

사람이란 건 냉소주의자의 편견과는 달리 모두 그렇게 악착같이 자기 이득만 찾기가 오히려 더 힘든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부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민들은 그것을 스스로 찾아 가졌다.

그렇다 보니 이 공화국의 주석인 정시준 역시 게으름을 부리기 힘들었다.

시준은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비유해 본다면 대한민국 국군 말년병장의 노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나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태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시준이 안 나가니까 사실상 김창시가 주재하고 있다. 정부 일 또한, 정약전이 총괄보고하는 사안을 거의 그대로 도장만 찍었다.

결재 쉬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이제초가 정시준 동상 건립 안을 끼워 넣었다가 가차없이 기각당한 일은 있었다.

혁명재판소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여기까지 끌려왔다면, 이광로가 활약한 그때처럼 결과는 결정된 거나 다름없다.

애초에 법도 없는데 무슨 섬세한 판결을 하겠는가. 판결도 대부분 아오지 아니면 혁명작두라 이서구 선에서 충분히 감당이 됐다.

그나마 신경 쓴 게 혁명군이다. 시준은 혁명의 전위대장 홍총각에게 신설 총참모장(總參謀長) 직위를 수여하여 혁명군 총사령을 대행할 수 있도록 했다.

누가 봐도 홍총각이 참모 안 같다는 점은 중요치 않다. 이번에도 공화국 사람들 좋아할 법한 이름을 고른 시준의 배려였다.

참모본부도 없는 총참모장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공화국 정부에서 웃기지 않은 게 없다. 어차피 일 떠넘기려는 수작이니 총참모장이건 인민무력상이건 관계없다.

그 이후 시준이 직접 지시한 건 허리와 다리 안 망가지게 혁명걸음을 좀 상식적인 수준에서 조절하라는 정도였다.

홍총각은 초조했다. 저번 열병식 때의 연이은 실수로 주석이 혁명군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착각한 것이다.

시준은 허수아비 부하를 만드는 막후 정치에 관심이 없다. 따라서 홍총각이 가진 명문적 권한은 실제와 일치하여, 말 그대로 전 혁명군에 걸친 것이었다.

그래서 시준은 정말 최후, 일보 직전의 순간에서야 홍총각이 계획한 삼수갑산 동계훈련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핫팩 하나 없는 것들이 뭘 믿고 겨울 삼수갑산에 들어간다는 건지, 시준은 자기가 익히 안다고 생각했던 조선인의 상남자스러움에 공포마저 느꼈다.

하마터면 혁명군이 전멸할 뻔했다. 나름대로 무반 출신인 부참모장(副參謀長) 백윤구조차 안 막았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그런 여러 가지 사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다. 상하이 갔을 때부터 시준이 계획했던 권력 분산이양은 지금 실현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준의 생각에는 그랬다.

시준은 ‘순조로운’ 퇴위 밑작업에 용기를 얻었다. 자기가 워싱턴을 뛰어넘어 미래 세계 모든 독재자의 브레이크가 될 시금석을 마련하고 있다는 확신은 소시민 정시준의 가슴마저 벅차게 했다.

힘을 얻은 시준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설이 다가오자, 시준은 이제 배가 많이 불러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지유에게 ‘곧 조용히 우리끼리 살 수 있다’라고 격려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출석했다.

김창시는 시준 없이는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상임위원회에서 민주주의의 쓴맛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준을 열렬히 환영했다.

“아니, 위원장 동지. 그간 도대체 얼마나 분주하셨기에 나오지도 못하셨습니까?”

“평준위원장 동지 이하 다른 위원들께서 잘해 주시고 있으니 안심하고 맡긴 것이지요.”

김창시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으나 시준은 그를 매몰차게 무시했다. 그러고는 가져온 안건을 꺼내 들었다.

“총선거…… 준비위원회요?”

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제 사월이 되면 제1기 중앙인민회의 대의원과 공화국 주석의 임기가 끝납니다. 제2기 중앙인민회의를 구성하여 다음 대의원과 주석, 그리고 간부들이 인민의 명령을 받아야 하오. 이번에는 평안도에서 선거하고 또 보궐선거를 하는 권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일제 총선거가 있어야 하니 미리부터 준비위원회를 꾸리자는 것이외다.”

시준은 예상되는 여러 반대에 대한 논리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시준의 기대와 달리 김창시와 상임위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시준의 뜻을 ‘이해했다.’

“과연 수평도의 근본을 어기지 않는 위원장 동지의 준비가 치밀하오이다. 석 달 남았으니 조금 서둘러야 하겠군요. 그런데 대의원들이 많이 바뀌면 당장 새 일을 잘 몰라 허둥댈 것인데…….”

시준은 여기에서 김창시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어야 했다. 김창시는 대의원이 바뀐다고 했지 주석, 혹은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바뀐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준은 그의 전공 분야인 인수인계 행정에 집중해 버렸다.

“지당하신 말씀이오. 허나 대의원 중에는 또 선거되는 분도 있을 테고…….”

안타깝게도 김창시는 여기에서 확신하고 말았지만 시준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말했다.

“사월에 선거하고 나서 한 달 정도 시간을 두어 천천히 사업을 이어받고 문건을 훑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소? 중앙인민회의와 국무당(정부) 공히 시간이 필요할 것이외다.”

시준의 계산 결과, 이강회나 정약용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제하에 – 그렇지 않다면 미래 계획은 짤 의미가 없다 – 이강회가 돈 싣고 영국에서 돌아오는 때가 그때쯤이다.

그러면 시준은 거기에서 자신과 서상의 몫을 나눠 받고, 이 과정에서 정부기능을 사용했으므로 가경제와 달리 가난한 공화국 정부에도 지분을 떼 준다.

필요하다면 추가로 (빌려)주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하여 다음 정부가 자기를 못 건드리게 한 뒤 따뜻한 남녘에 지유와 내려가면 된다.

‘기랑이도 데려가야겠다. 다음 주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남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내가 없는 상태에서 들키면 골치 아파.’

자기만의 행복회로를 불태우고 있는 시준은 김창시의 대답을 좀 늦게 들었다.

“그럼 오월이군요. 적당한 것 같소이다.”

시준은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김창시는 별다른 이견 없이 상임위원회 위원들의 뜻을 물었다.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평준위원회 위원장이 동의한 건인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만장일치로 총선거 준비위원회가 통과되었다.

시준은 너무 쉽게 전개되는 이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화국 사람들이 이토록 정상적인 민주시민이 되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곧 해답을 찾았다.

‘김창시가 나 없는 사이 상임위원회를 포섭했군! 다음 위원장 자리를 노리는 건가. 좋아. 잘 하고 있어. 난 당신 응원해!’

공화국 야당 역할을 하던 김창시라면 충분히 2대 상임위원장을 맡을 재목이다. 전통적 상인 쪽에 기울어 있기는 해도 뜻이 삿된 사람이 아니니 별문제는 없으리라.

시준도 의욕적으로 2대 총선거 준비에 달라붙었다.

정약용이 로버트 스튜어트에게 제안했던 거래가 무엇인지, 그로 인해 두세 달 뒤 영국에서 이강회가 가져올 것이 무엇인지, 또 최종적으로 그게 자신의 은퇴 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

작가의 말

1. 아시냐 채권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돈이 필요했던 자코뱅 정부가 발행한 채권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 신뢰성을 잃고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이는 자코뱅 몰락의 한 단초가 되고… 나폴레옹은 이것을 광장에서 불태우는 퍼포먼스로 시민의 지지를 얻었죠.

2. 주식 시장에서 쓰인 말은 아니긴 하지만, 침팬지 자체는 이때 유럽에도 잘 알려진 동물이었습니다.

3. 총참모장은 북한의 군 직위이며, 한국의 참모총장과는 대응…하는 것 같지만 거기 권력 구조상 약간 위치가 다릅니다. 군령권의 최고 행사자라기보단 군권을 나눠 가진 몇 명의 유력 당원 중 하나라고 할까요. 따라서 작중의 총참모장은 북한과 관련이 없습니다.

총참모장 말고도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국방상(구 인민무력부장), 군 감찰과 인사, 기획 담당인 총정치국장과 당 군정지도부장, 내부 치안군을 맡는 사회안전상(사회안전군, 그러니까 옛 인민내무군의 총수), 핵무기 등 전략병기와 군수산업 쪽의 당 군수공업부장 등등 21세기의 북한 군부는 (아마도 쿠데타 억제를 위한) 분권이 상당히 관찰되는 상태입니다. 저 직위 사이에는 순환적 이동도 드물지 않은 편이고요.

실제 전투력보다는 일단 유일 지도자 아래에서 서로 견제하며 반란 막는 것에 체제의 중점이 있다. 근데 인재풀이 거기서 거기라 하던 놈들이 이거저거 돌려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보셨죠? 예. 조선군과 비슷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