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74. 희만 선생의 기묘한 모험(2)
그레테 자작은 몇 명의 믿을 만한 수병들과 함께 나폴레옹의 임시 거처 주변에 잠복했다.
나폴레옹이 평생을 보낼 롱우드 하우스에 그를 처박는 건 뒤에 올 허드슨 로우 총독이다. 그래서 그곳은 아직 한창 보수공사 중이었다.
귀양 죄인 따위를 위해 총독 관저를 대대적으로 개조해 주는 사실에서 영국인의 따스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아직 체계가 정립되지 않아 어수선한 때라 시도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이 ‘산책’을 나오게 되면, 같이 있을 영국 병사를 제압하고 그를 ‘납치’한다.
그다음엔 화물로 위장해 데이비드 스콧에 싣는다. 나폴레옹 황제는 그의 비장하고 창의적인 서신에서 황제 체면에 술통에 들어가겠다는 고난도 감수했다.
문제는 데이비드 스콧이 영국에 가는 길이라는 건데, 그 문제는 나폴레옹이 적당히 늙은 선원으로 변장하면 해결된다.
황제 자신이 자인하였듯이, 공화국의 정보 오염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얼굴을 ‘그 책 그림’으로 알고 있어서 어차피 못 알아본다.
물론 그레테 자작은 그따위 계획이 성공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작전 계획이었다면 제출한 놈을 총살시켰을 만큼 구멍 숭숭 뚫린 우책이다. 나폴레옹도 다급하다 보니 맛이 간 것인가 싶었다.
따라서 더 현실적인 자신의 계획을 발동할 차례였다.
나폴레옹은 ‘납치’되겠지만 그건 정말 납치다. 그레테 자작은 멍청한 정약용과 나폴레옹을 비웃으며 곧바로 콕번 제독에게 직행할 테니 말이다.
자작 일행은 영국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프랑스로 복귀한다.
반면 정약용과 고려 사람들은 영국에게 억류, 심하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고려와 영국의 공식 외교 따위는 그 자리에서 파탄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감시와 억압도 말도 안 되게 심해질 터. 새 국왕 루이는 이제 나폴레옹이 또 올까 봐 잠을 설칠 필요가 없다.
조선 사람 말마따나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은 자작의 말년은 부귀가 보장될 것이다.
그런 장대하고도 정교한 전략을 말단 수병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자작은 단순히 부사관의 역할을 맡아 전의를 불어넣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라. 영국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는 거다. 우리 손으로 황제를 구출한다. 너희들은 영웅이 될 거다.”
수병들은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 채 칼과 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폴레옹이 나타났다.
동시에, 산책길 감시를 위해 동행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의 영국군 또한 나타났다.
그레테 자작과 영국군이 나폴레옹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본 꼴이었다. 위대한 황제의 얼굴은 그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창백해졌다.
얼마 전 그 멧돼지 같은 블뤼허가 엄니를 뽐내며 돌격해 올 때보다 더 뚜렷한 좌절감이 그의 표정에 떠올랐다.
그 순간 그레테 자작과 나폴레옹은 같은 나라의 군신다운 감정의 일치를 이루었다.
‘좆 됐다.’
느닷없이 출현한 영국군은 척 봐도 이쪽을 포착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레테 자작이 머리에 얹은 수풀을 헤치고 벌떡 일어났을 때는,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영국 해군 수병이 이미 이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제 구출의 열의에 불타던 프랑스 수병들은 죽기로 저항했다.
그래서 모두 죽었다.
그러나 그레테 자작은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도망쳤다.
그래서 그 혼자만은 살아남아 체포되었다.
***
콕번 제독 앞에 끌려온 그레테 자작은 그 옆에서 제독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약용을 보자마자 모든 사태를 깨달았다.
정약용은 천한 하층민 수병이나 쓸 법한 영어를 쓰고 있었다. 점잖은 자리에서 절대 할 수 없는 거친 표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연발되었다.
허나 콕번 제독은 그런 사소한 일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약용이 무언가 말하자, 제독은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백악관을 불살라 버릴 때의 그 광소 같았다.
콕번은 몽똘롱 후작 샤를이 두고 갔던 금 담뱃갑을 정약용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정약용도 감사히 그것을 받았다.
그레테 자작은 노기로 수염을 떨며 외쳤다.
“너, 더러운 배신자!”
자작에게로 고개를 돌린 정약용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을 뿐이었다. 조선 사람이 미안할 때 하는 제스처이지만 그레테 자작에게는 참을 수 없는 조롱으로 보였다.
콕번 제독이 엄중하게 말했다.
“영국과 고려 양국의 변하지 않는 신의성실을 바탕으로 하여,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습격 계획을 미리 알려준 공화국 외교장관에게 더 이상 무례를 저질렀다가는 재판에서 죄목이 추가될 것이다. 하긴 이 명백한 증거만으로도 교수형을 면치 못할 테니 더 두려울 것도 없겠군!”
콕번 제독이 흔드는 것은 그 담뱃갑에 들어 있던 나폴레옹의 친필 밀서였다.
담뱃갑을 보지 않고도 간파했던 정약용의 지혜에 놀라느라 문서를 즉시 태울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 그레테 자작의 치명적 실수였다.
이 상황에서 ‘나는 사실 이중간첩으로 활동하여 저놈의 탈출 시도를 막으려 했던 것이오!’라고 외치는 일 따위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결국 김조순이 그러했고 암허스트가 그러했듯, 그레테 자작이 공화국에게 따라가지 못했던 부분은 바로 속도였다.
아무리 혁명으로 천지가 뒤집혔어도 조선이 최속군주의 나라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교섭’하러 가자마자 그레테 자작의 계획을 전부 불어버린 정약용의 스피드는 얕은 계책으로 군주에게 알랑대려는 반동 따위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었다.
그레테 자작이 아득한 심경으로 둘러보니 그 옆에는 몽똘롱 후작 샤를도 묶여 있었다.
그 역시 음란소설이나 써갈기는 야만인들을 믿은 게 잘못되었다며 이를 가는 중이었다.
애초에 그 야만인의 역할을 자기가 맡을 생각이었기에, 그레테 자작은 샤를 트리스탕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웃고 있는 정약용에게는 비공감을 넘어 증오심만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 외로운 섬 세인트헬레나에서도 가장 외로워졌다.
나폴레옹 황제 역시 나는 진짜로 그냥 산책만 하려고 했고 쪽지는 모르는 일이라 강변하고 있어서 더 그러했다.
***
결론을 내려 보자면, 조제프 푸셰가 같은 처지에 있었을 경우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그레테 자작은 공화국의 외교적 입장을 더 잘 생각해 봤어야 했다.
공화국으로서는 프랑스와 연결하는 일이 전혀 이득 될 게 없다. 푸셰는 이미 프랑스 사람이 아니다시피 하고, 아직 나폴레옹 3세 시절도 아니라 아시아에 무슨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임상옥이 말했듯 프랑스는 지금 대충 망했다.
반면 인류의 해악 영국은 바로 문 앞에서 지옥의 악취를 풍기고 있다. 게다가 동인도 회사는 공화국 경제에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다. 어디의 비위를 맞춰야 하겠는가?
물론 독단적인 것은 아니다.
시준은 이강회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약용에게 정세 예측을 풀어놓았다.
앞으로 당분간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등 다른 열강이 할거하는 시대가 온다.
시준도 나폴레옹 3세가 언제 즉위하는지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프랑스가 당분간은 힘을 못 쓰리라는 결과는 자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빈 체제’라는 말이 교과서에 실려 있을 리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정약용도 처음에는 시준의 분석을 전적으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시준이 가진 학문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 시준 자신도 그리 섭섭하진 않을 것이다.
정약용은 가능하다면 이번 여행길에서 서양 열국의 힘을 가늠해 보고, 영국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외교 경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상식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그레테 자작이 마드라스에서 말을 걸었던 그 순간, 정약용은 마음을 바꿔먹었다.
‘정시준이 예측한 대로 정확히’ 나폴레옹의 탈출과 패배가 전달되고 나자 정약용은 즉시 시준의 예측을 전제로 활동할 것을 결의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프랑스를 미련 없이 버린 것이다.
본래 모든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는 어느 여자에게도 진지한 연애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모두를 취하려 들다가는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법. 정약용은 그 점을 알고 있었고, 공화국의 외교 책임자로서 철저하게 영국을 선택했다.
그 결과로 정약용과 외사통호부 직원들은 ‘데이비드 스콧 같은 위험한 폐선’이 아니라 영국 정식 군함 HMS 벨레로폰에 타고 있었다. 콕번 제독은 이들에게 유럽 타국의 전권대사와 동일한 수준의 의전을 베풀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정약용은 흡족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옛날 주석 동지와 내가 학문을 논하던 시절, 나는 패왕 나파륜이 10년도 못 가서 패망할 것이라 했지. 그러고 보니 올해가 그때로부터 딱 10년이로구먼. 사제의 심모원려가 이토록 일치하다니 가르친 보람을 느끼게 하는구나. 학문을 중도에 폐하지만 않았어도 대성하였을 것을…….”
그 조선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조선인들은 모두 영국에서 할 일의 준비에 바빴기에 정약용에게 대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약용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세인트헬레나에서 받은 금 담뱃갑에서 콕번 제독이 선물한 유럽식 담배를 꺼냈다. 익숙하지 않은 파이프에 그것을 채워 본 정약용은 해풍에 맞서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정약용은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뱃전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패왕 항우가 해하에서 오강을 건너 강동 자제를 다시 이끌고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천하의 선비들이 궁금해했지만, 이제 나는 서양의 패왕인 그대를 보고 알게 됐소.
다시 돌아왔더라도 인심과 천리를 잃었으니 어찌 대성하였을까. 항우는 이미 그것을 알고 스스로의 목을 찔렀지만, 그대는 여전히 어리석은 소치를 고집하는구려.
여러모로 서초패왕에 비하면 부족한 사내로다. 내가 그대를 돕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야. 차라리 그냥 나를 돌려보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시준이 그대를 보고 일컬어 반드시 또 패배한다 했던 것은 지모 있는 말이었소.”
정약용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는 프랑스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의 시대는 끝났소이다. 코르시카 사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 언행에 담긴 최후의 경의가 담배 연기와 함께 남쪽으로 흩뿌려졌다.
***
시준이 강철군주에게 베푼 것과 같은 대접을 받은 나폴레옹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관계없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의 분노는 대서양을 건널 수 없다.
반면 벨레로폰은 무사히 대서양을 건넜다. 정약용은 서력으로 새해가 되기 전 런던에 도착했다.
주 런던 고려인민공화국 특명전권공사를 맞이하기 위한 영국 정부의 안내는 그다지 흠결이 없었다.
우중충한 런던의 겨울 날씨 속에서 정약용은 시준의 ‘신임장’을 전달하고 섭정인 웨일스 공 조지도 만나보았다.
외사통호부 직원들은 어떻게 왕 이름이 4대 연속 좆이냐며 수군거렸지만 영국인들은 듣지 못했다.
정약용의 경우는 그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기에 딱히 조지 왕 4명에 대해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강 공무를 정리하고 한담을 나누는 티타임이 되자, 정약용은 왕 이름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올해 초쯤 여기 먼저 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강회와 문순득이 객사한 게 아니라면 당연히 나와 봤어야 한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약용을 상대하고 있던 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가 대답했다.
“왕 첸 패밀리를 말씀하시나 보군. 그들은 아마 소식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소. 베이커 가는 이미 그들을 만나보려는 사람으로 바글바글하지. 누가 알려주려 해도 아무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걸. 우리로서도 그가 공식 사절이 아닌 만큼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진 않았고 말이오.”
본래 아시아인을 직접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요즘 꽤 중요해진 고려인민공화국의 위치 때문에 외무장관으로서 할 수 없이 나온 처지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우울한 것이 그 처지 때문은 아니다. 스튜어트에게는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일이 많았다.
갈가리 찢어지는 영국을 붙들어 현재 연합왕국의 초석을 놓았던 선견지명의 정치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동포들에게 ‘가톨릭과 아일랜드인을 기만한’ 배신자의 혐의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허나 이 사람이 없었으면 영국이 주도하는 대불동맹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나폴레옹 전후 뒤처리에서도 메테르니히만큼이나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람만큼 많은 공헌을 세우고도 많은 비난을 받은 19세기 영국 정치인도 드물다.
그가 명성 높은 저술가 토마스 무어에 의해 가혹한 조롱을 당한 끝에 7년 뒤 자살한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정약용은 그저 스튜어트의 대답에만 놀랐다.
“아니, 그들이 대체 무엇을 했기에? 왕 첸은 또 누구요?”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요? 글쎄, 묻는다면 대답하지. 내 보기에 아무래도 동방의 예언자 정시준은 이 땅에 그의 사도를 보내 새로운 이교라도 전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끔찍한 싸움만 해도 차고 넘치니, 제발 그런 거 끌고 오지 말라는 게 내 부탁이오.”
로버트 스튜어트의 빈정거림은 정약용에게 좀 다른 형태의 유머로써 전달되었다.
정약용은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고 웃었다. 아마 글방 열어 경전이라도 가르치는 일을 호도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스튜어트는 블랙 유머를 말할 때의 영국인이 그렇듯이 전혀 웃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후 사람의 벽을 뚫고 베이커 가를 방문한 정약용은 스튜어트의 말이 냉담한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이강회는 이 상황을 어디서 봤다고 생각했다.
그때와는 주인공이 다르지만, 옛날 옛적 그의 사형이 이상한 책 써서 팔아먹을 때 정약용은 이렇게 제자들을 꿇어앉혀 두었다.
“굉보(이강회)야.”
“예. 부장 동지…… 아니, 선생님.”
“네가 자장(子張)이 공자에게 ‘열 개 왕조 뒤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아느냐.”
이 분위기에서 이강회가 ‘그깟 반동의 경전이 제 알 바입니까?’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혁명은 이제 5년밖에 안 지난 일이다.
그는 영국에서 신흥종교 교주 노릇 하는 동안 다 잊어버린 논어의 내용을 머릿속에 불러오느라 진땀을 뺐다. 문순득과 오리엔탈 파이터즈도 전부 도망쳐 버려서 그를 도와줄 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강회는 수재였다. 그는 곧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상나라가 하나라의 것을 고칠 수 없었고, 주나라가 상나라의 것을 고칠 수 없었으니, 예(禮)의 근본은 만세불변하는 것이라. 십세가 아닌 백세가 지난 뒤에도 주나라의 치세를 다시 융성케 한다면 바로 알 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이로써 지나간 사적을 배우면 곧 앞으로의 일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지 귀신에 묻고 방울을 흔드는 하찮은 도참이나 술수로는 미칠 바 아닌 것입니다.”
정약용은 제자의 학문에 만족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공부를 익숙히 하였구나. 그런데 지금 이건 무엇이냐?”
이강회는 침묵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정약용은 주위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하나하나 주워들었다.
“이 부적은……. 그래, 공화국에서도 팔고 있으니까 그건 넘어가자. 내가 밖에서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길흉을 물으면 무슨 무당처럼 한바탕 춤을 추다가 이 상자에 손을 넣어 쪽지를 뽑아 주던데, 이게 지금 주석 동지의 계시라고 하는 것이냐? 이 간판은 또 뭐냐? ‘백발백중의 신통한 주가 예상’? 그 채권인지 주식인지 하는 것의 값이 얼마나 뛸지 아무렇게나 말해 주고 돈을 받은 게냐?”
이강회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무렇게나가 아닙니다. 제자가 이 주식이라는 것의 이치를 가만히 살피면, 그 값이 오르내리는 데엔 풍흉도 후박(厚薄)도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얼마나 사는지만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산 어음(주식)이 좋다고 뽑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덩달아 사므로, 나중에 보면 참말 값이 뜁니다.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정약용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강회는 황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는 모두 사형, 아니 주석 동지의 예지를 따랐을 뿐입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주석 동지의 예견에 의해 나파륜을 계교에 빠뜨리신 게 아닙니까?”
정약용은 끝내 바닥을 탕 쳤다.
“시준이 여기에서 점집 하라고 하더냐? 내가 아까 자장의 일을 괜히 물은 줄 아느냐! 네가 술술 지껄인 대로 시준은 서초패왕의 지난 사적과 서양국의 지금 사세에 비추어 백세 뒤의 앞날을 말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제자에게 가르친 경지다. 너는 네 말과도 완전히 반대로 하고 있지 않느냐! 이게 요참이나 술수보다 무엇이 낫다는 말이야!”
이강회는 최후의 항전을 시도했다.
“혀, 혁명의 본뜻은 그런 반동의 책으로는…….”
“반동의 책이라는 표만 붙여 놓으면 다 끝이라는 말이냐. 그건 반동으로 몰아붙여 자기 원한 있는 자를 죽여 대던 반혁명분자들과 무엇이 달라! 시준이 총선거 때 요순의 치세를 말했음을 기억해라. 진정코 지혜로운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다. 그들이 가진 높은 뜻을, 단지 그때는 혁명이나 수평도라 부르지 않았을 뿐이야!”
단칼에 진압당했다. 역사보다 일찍 유학 공부를 그만두고 혁명에 투신한 이강회가 정약용을 학문으로 이겨보겠다는 발상이 좀 무리수였긴 했다.
이강회가 사죄하자 정약용의 말투가 좀 부드러워졌다.
“우리 유생들이 해야 하는 일은 옛 성현들이 남겨 놓은 혁명의 조각을 모아들이는 것이다. 비록 그때는 시준과 같은 사람이 태어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반동의 주구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현명하였음은 변하지 않아.
혁명은 앞으로 영구하듯 과거에도 영구했으며 항상 물처럼 흘러 왔다. 옛날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처럼 놓쳐서는 안 되느니라. 너는 앞으로 명심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때쯤 해서 문순득과 오리엔탈 파이터즈가 돌아왔다.
실실 웃으면서 손에 뭔가를 들고 오는 것이, (이제 그들 입맛에도 좀 익숙해진) 런던 노점상 특제 산업혁명 세트로 정약용의 마음을 풀어보려는 것 같았다.
물론 정약용은 불쾌할 뿐이었다. 장어 젤리의 놀라운 비주얼에 정신이 확 든 정약용은 곧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떠올렸다.
정약용은 의관을 정제하는 척하며 문순득이 내미는 컵을 무시했다.
“그래. 농상진흥부장 동지. 그건 그렇고, 나는 아까 말하던 채권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 주석 동지의 전갈을 가지고 왔소.”
이강회는 스승의 태세 전환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그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외사통호부장 동지?”
“주석 동지는 붉고 푸른 두 개의 비단 주머니를 내게 주었소.”
옆에서 문순득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 주석 동지의 지모가 마치 제갈량과 같지 않습니까!”
문순득은 요점을 정확히 짚었다.
이건 정약용 앞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하는 식으로 없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시준의 꼼수였다. 삼국지의 해악이 이토록 크다.
정약용은 그 주머니를 꺼내어 들었다.
“패왕이 두 번째로 패배할 경우는 붉은 주머니를, 그렇지 않다면 푸른 주머니를 펼치라 하였는데 이번에는 붉은 것만 보면 되겠군. 어디 보자……. 역시. 팔아버리고 금은으로 바꿔서 오라는구려. 하긴 영고성쇠라. 한없이 오를 수만은 없겠지.”
“그게 끝입니까? 더 오를 것 같은데…….”
“어허. 주석 동지의 지시를 거스를 참인가? 지시는 뒤에 더 있지만 이건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동지가 돌아가면 내가 맡겠소. 일단은 급히 그 전쟁채권인지 뭔지를 팔도록 합시다.”
“그, 그럼 주석 동지가 맹방으로 삼기로 한 유다 사람의 대표와 얘기를 하고 오겠습니다. 우리는 그와 공수(攻守)를 같이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네이선 로스차일드도 이때는 반쯤 맛이 간 상태였다.
왕 첸 점집과 합작한 끝에 영국 전쟁채권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주식에서 조작에 가까운 이득을 보고 있으니 맛이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문명 서구인이니까.
네이선은 정시준의 새로운 지시가 들어왔다는 말에 반색했다. 그리고 그것이 매도 지시라는 말에는 더욱 좋아했다.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간 심장이 찌그러지는 줄 알았는데, 이제 팔 때가 됐지! 오오, 이스라엘의 주님이시여. 당신의 선민과 그 친우들에게 내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시준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이강회와 로스차일드가 영국 전쟁채권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는 점이었다.
숫자로는 감이 잘 안 온다. 간단히 말해, 두 사람이 시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경우 영국 정부는 전쟁에서 이겼는데도 국가 신용도가 폭락하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증권거래소에 드리우는 검은 기운을 영국 정부가 일찍 감지한 것은 다행이었다.
로버트 스튜어트 외무장관은 평소의 우울한 태도를 버리고 거품을 물며 뛰쳐나왔다.
그는 가장 빠른 마차를 대령시켰다. 맹포한 외침이 달리는 마차 안에서 새어 나왔다.
“반왕 정시준! 다리 절단자! 네 왕의 다리를 자른 것처럼 영국 경제의 정강이를 부러뜨려 꺾으려고 전권공사를 보낸 것이냐!”
***
평양에도 소담스럽게 쌓이는 눈송이를 창밖에 둔 채, 시준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지유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지유는 엷게 웃었다.
“뱃속에서 아이가 발을 굴렀던 것 같구나. 그렇게 배에 귀를 대고 있으니 민망하지 않곘니. 아버지더러 그만 떨어지라고 한 모양이다.”
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아니라 누군가 자기 이름을, 상당한 악감정을 담아서 부른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여기에서 그런 소릴 할 필요가 있겠는가?
시준은 지유의 말이 맞다고 하기로 하고 마주 웃었다.
“그래,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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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작품 초반, 시준이 처음 정약용의 제자로 들어가서 프랑스 정세에 대해 설명할 때 정약용은 나폴레옹이 10년밖에 못 갈 것이라 했지요. 그때 시준은 소 뒷발에 쥐 잡았는가 해서 놀랐고요. 정약용의 말은 그때를 회상한 것입니다.
2. 정약용과 이강회가 나눈 대화에서 인용된 논어는 위정편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