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20화 (220/284)

220화

73. 그들의 축제

독재국가의 열병식은, 독재자들이 그 노릇에 중독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수백 수천 명의 인간들이 오로지 자기 하나만을 위해 극도로 통제된 움직임을 보이는 광경은 인세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물론, 그런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이니까 독재자를 하는 것이기는 하다.

다행히 시준은 아직 그런 변태의 영역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경애하는 정시준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중앙인민회의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사수하자! 사수하자!”

그래서 시준은 저따위 말을 외치는 병사들에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준과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비슷한 위치에 있는 어떤 대원수급의 철갑 지방으로 얼굴을 두르지 않은 이상 어렵다. 그건 정말이지 맨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다만 저 짓을 하기 위해 든 노고를 생각하면 – 자기 없을 때 이런 짓이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 차마 아주 외면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못 할 노릇이다.

그래서 시준은 옆에서 자기에게 속삭이는 혁명무력부 부부장 남공철의 설명을 아주 진지하게 듣는 척했다. 그러면 ‘불가피하게’ 혁명군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나오는 것이 매경은 동지가 인솔하는 혁명군 기병종대(騎兵縱隊)올시다. 영길리 기창(騎槍, 랜스)과 짧은 양총(브라운 배스 플린트락 카빈)을 잘 쓰도록 조련되었지요.”

전생에서는 말도 그냥 사람처럼 마우스 찍으면 가는 줄 아는 시준이었으나 이번 생에서는 그도 말을 많이 타 봤다. 그래서 저들의 엄정한 대열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아니, 말이 어째 저렇게 얌전하오? 게다가 덩치도 하나같이 덜썩 크고 갈기와 꼬리가 매우 풍성한 것이 아무래도 외국의 말인 것 같구려.”

남공철은 짐짓 싸구려라는 듯이 대충 차고 간 명품 시계를 회사 사람이 알아봐 주었을 때의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보셨습니다. 저것은 영길리에서 들여온 명마인데, 이름을 안달루시아라고 하며 서반아(西班牙, 스페인)에서 나는 귀한 종자로 서양에서도 왕후장상이 탄다고 합니다. 날렵하기 그지없어 한 길을 훌쩍 뛰어넘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다던가요. 동인도양행(동인도회사)에서 제법 값을 헐하게 주어서 가져올 수 있었지요.”

물론 안달루시아 말이 얼만데 동인도 회사가 그걸 싸게 줬을 리는 없다.

다른 나라의 혈통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생아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그것만 해도 조선에서는 훌륭한 군마다. 안달루시아 종은 총포와 창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과 ‘댄스마저 가능한’ 기동력으로 이름이 높다.

시준이 혹시 말에 더 관심이 있었다면, 경주마의 대명사이자 속도의 상징 그 자체인 서러브레드 종은 어디 없는지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준은 전생에 도시인이었고, 도시인이 대개 그렇듯 진짜 말보다 말 귀 달린 미소녀를 더 많이 봤다.

서러브레드 같은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어차피 서러브레드는 오직 인간의 욕심만을 위해 개조되어 인내심이 빈약하고 병이 잦은 종이라 군마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시준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기병종대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마침 매경은과 기병대가 멋지게 기창을 치켜들었다가 우아하게 회수하면서 주석 동지에게 혁명 기병의 엄정한 군기를 과시하고 있었다.

“어, 어흠. 과연 매우 늠름하오. 내가 마침 중국에서 포도아 사람에게 선물 받은 건장한 백마와 좋은 서양검이 하나씩 있으니, 전장에 나가지 않는 나보다는 용맹한 혁명군에게 주어 쓰도록 하는 편이 옳겠소.”

아직도 이 열병식이 ‘군대의 기강 점검을 위한 업무’라고 하고 싶은 시준의 필사적인 사족이었다.

그러나 그 사족에 남공철은 매우 감동했다.

“옛 반동의 조선이 무반(武班)을 우대하지 않아 근래의 전쟁에서 장수와 사졸이 모래처럼 흩어진 것인데, 주석 동지께서 수평도를 엄정히 떨치니 이는 고금에 없었던 사적입니다.”

훈훈한 분위기에서 열병식은 계속되었다. 말과 검 뺏기고 (유럽 가서 쓸데없는 소리 못 하도록) 평양 모처에 ‘정중히 초청’되어 있는 전 마카오 총독 루카스 알바렝가만 빼고 다 훈훈했다.

훈훈함이 좀 지나쳐 뜨거워진 남공철이 눈앞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저기를 보십시오. 주석 동지!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없는 금성철벽. 천겹만겹의 무쇠방벽이 되어 주석 동지를 목숨 바쳐 호위할 1영대와 주석결사옹위대 장병들의 위엄찬 행진입니다!”

“과, 과연 그렇구려.”

“아니, 고개를 그렇게 다른 데로 돌리시면 보실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잠깐 기침이…….”

정상인이라면 그 숫자의 사람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며 부자연스럽게 걷는 그 모습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독재자에겐 최고의 광경이었다.

다리는 더할 나위 없는 혁명걸음의 모범. 허리부터 아래만이 움직이고 상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설마 이 짓을 하기 위해서 공사한 건 아니겠지만, 어느새 영길리회(파커 시멘트)가 매끈하게 발린 대동문 앞 광장은 병사들의 발소리를 경쾌하게 되튕겼다.

그 강인한 팔과 손에 들린 것은 영국제 브라운 배스 머스킷과 거기 꽂힌 총검이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반사되는 빛은 신기할 지경이었다. 강중유 같은 건 영국군도 못 가진 시대이지만 혁명군은 동백기름과 수건, 그리고 근성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 노고가 곳곳에서 드러나 보였기에 시준은 양심상 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끝내 병사들을 보다가 손을 들어 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시준의 기대 반 걱정 반과 달리 병사들은 절제 없이 폭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연습한 대로 행동했다.

두 걸음 걷고 ‘만세!’를 외친다. 길게 끌면서도 절도를 잃지 않은 함성은 다시 두 걸음을 걸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재차 함성이 터져 나온다.

정확한 박자에 의해 발걸음은 결코 느려지거나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구령 또한 끊기지 않았다.

그 사이로 주위를 둘러싼 평양 부민들의 환호가 섞여들었다.

농번기라 민간인들은 바쁘고, 이 열병식은 혁명무력부가 주석에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해서 딱히 인민을 대량 동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구경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붉은 머릿수건을 벗거나 때로 저고리를 벗어 흔들고 있었다.

“혁명군 만세!”

“인민의 군사 만세!”

시준은 경이롭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는 시준도 잘 알다시피, 이 시대의 군대는 현대와 다르다.

동아시아부터 유럽까지 이때의 군대란 모두가 불길한 외부인이고 잔인한 약탈자이며 공포와 경원의 대상이다.

자국군이건 외국군이건 동일하다. 군대와 도적의 차이는 제복의 착용 여부밖에 없다. 메뚜기 같은 병사들의 행진 앞에서는 곡식을 파묻고 딸아이를 벽장에 숨기며 문을 닫아걸어야 한다.

지금 시대에 이토록 자부심 있는 군과 군에 환호하는 인민의 조합은 드물다. 아마 프랑스 혁명 초창기의 혁명군 정도만이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스스로 이렇게 변화했다. 프랑스인들이 그러했듯, 단 10년도 되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준은 정신을 차렸다.

‘잠깐, 나도 홀리면 안 돼!’

시준은 자기 뺨을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광로의 사례에서 드러나지만 시준과 동료, 그리고 인민들이 만든 공화국에도 분명 많은 모순과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행사는 마치 마약을 주입하듯 그런 어둠을 잊게 한다.

‘이러니까 21세기 그쪽 총비서동지가 툭하면 열병식을 하지…….’

자기 탐욕이 삶의 목적인 자는 재력가나 범죄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권력자는 되기 힘들다.

권력자는 그 무엇보다 ‘정당함’, 그것도 남들이 주는 정당함을 탐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 역사의 위대한 야심가와 군주들은 모두 궁극의 관심종자들이다.

그리고 열병식 같은 종류의 일은 이처럼 ‘많은 사람에 의해 지지되는 정당함’을 극단적으로 체현하는 표상이다.

그래서 때로 군사 독재국가의 열병식은 권력자가 헐떡거리며 찾는 헤로인 주사기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북한이 그렇듯이.

시준은 이성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먼저 생각난 것은 병사들의 고생 문제였다.

군 체력 유지를 위해서도 이 열병식은 금지시키거나, 최소한 구성을 바꿔야 한다.

저 혁명걸음은 보기에 너무 멋져 보이기 때문에 혁명군이 포기하지 않았지만, 북한이 그러하듯 열병식 빡세게 몇 번 하고 나면 더 이상 그자들은 군대라 부를 수 없다.

전투는커녕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망가진다. 북한만도 못한 의료체계를 가진 지금의 공화국에서라면 결코 감내하고 싶지 않은 피해다.

시준은 그런 의사를 혁명무력부 부부장 남공철에게 전달했다. 남공철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피로해하거나 쓰러지는 병사가 나왔습니다.”

“그럼 그만두게 했어야지요!”

“예? 군사의 본분이란, 겨울 삭풍 아래 순무를 씹으면서도 언제든 인민의 명령만 있다면 서슬 푸른 비수가 되어 반동의 급소를 무자비하게 꿰어 찌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법. 어찌 그 정도를 가지고 조련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시준은 배운 놈이 더하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속으로 욕설을 씹어뱉었다.

다음에는 전 병력을 모아 혁명체조나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이 짓은 금지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적어도 2, 3년에 한 번만 하든가.

그런 결심을 모르는 남공철은 병사의 몸에 문제가 없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석 동지. 인민에 대한 사랑 넘치는 그 자애로움은 실로 만인의 우러름을 받을 만하나, 혁명군의 열의는 드높고 신체는 강건합니다. 자, 이제 포군이 오기 전의 다음 순서는 맨손으로 목판과 기왓장을 쪼개는 정찰총국 동지들의…….”

“하지 마!”

시준은 비명처럼 외쳤다. 남공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준은 다시 떠올렸다. 그는 전생의 경험으로 잘 안다.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려면 그 행사에서 보이는 것보다 몇 배, 몇십 배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준은,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평소에는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격파 시범까지 구경하고 말았다.

자기 말고는 아마 현대인이 없을 텐데 대체 누가 이따위 짓을 생각해 냈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시준의 그런 생각은 어차피 현대인의 조상이 과거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의문이다.

원래 혁명 하다 보면 다 비슷하게 된다. 그것이 인터내셔널이니까.

정찰총국장 방우준이 대장으로서 부하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나섰다가 어딜 잘못 쳤는지 손목을 부여잡고 실려 나가자 시준의 얼굴에는 더욱 우울함이 깊어졌다. 급히 안 그런 척 가린다고 가렸지만 시준의 시력은 보통 사람보다 많이 좋다.

그 우울함은 마지막 순서로 혁명군 포군이 3킬로그램포와 주체신기전을 끌고 나왔을 때가 되어서야 약간 가셨다.

그레테 자작과 프랑스 수병 없이는 대포 쓰지도 못했던 시절의 혁명군이 아니다. 거기 있는 것은 공화국 사람뿐이었다.

혁명군의 자존심 때문에 외국군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게 아니다. 이제 그들은 공화국에 없다.

사실 조제프 푸셰는 안간힘을 다해 그들을 붙잡아 두려 했다.

그러나 푸셰보다 더 정통 왕당파에 가까운 그레테 자작은 더 이상 조선에 있을 이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공화국에 정착하지 않은 프랑스 수병들도 고향이 보고 싶었다. 6년에 가까운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레테 자작은 나폴레옹이 망한 이상 푸셰가 가진 오트란토 공으로서의 작위나 나폴레옹이 부여한 대(對)조선 외교사절 임무(이걸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은 그레테 자작 정도다)도 무효이고, 따라서 조제프 푸셰에게는 자신을 강제할 권한이 없음을 정중하게 선언했다.

그러고는 수병들을 인솔하여 유럽으로 떠났다. 정약용이 타고 간 그 배편이었다.

푸셰는 배신자라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그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프랑스인 중에서도, 고려인 중에서도 없었다.

하지만 그레테 자작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는 공화국에서 보호와 복지를 제공받는 대가로 혁명군에 충실히 봉사했다. 자작이 없었으면 혁명해군 함대와 혁명군 포병은 영국인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는 정도의 기술밖에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혁명군은 포의 제조부터 운용과 관리까지, 근대식 포군의 거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조선 사람들의 독자적인 기술도 포함되었다.

“화산(火山) 준비!”

시준은 흠칫했다.

‘화산이라고?’

하지만 지금 말하는 화산은 시준이 걱정하고 있는 저 남쪽의 그 화산이 아니었다.

일찍이 조선 초의 군주들이 일본 사신 올 때 보여주며 ‘느이 집엔 이거 없지?’ 하던 화산붕(火山棚). 다시 말해 불꽃놀이였다. 한양군 함락 이후 그런 것을 납품하는 장인도 인민의 품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서양식 시계도 복대(중대)당 하나는 줄 수 있을 정도로 들어와 있어서 그런지, 열병식의 시간 조절은 정확했다. 괜히 중간에 격파 시범을 넣은 게 아니었던 셈이다.

모자부터 바지까지 온통 정시준 부적을 정밀하게 꿰매 붙이고 나온 병사 한 명이 비장한 얼굴로 발화철을 켰다.

그 병사는 처절하게 고함질렀다.

“공화국 만세!”

시준에게는 거의 전혀 다른 말로 들릴 지경이었다. 폭탄 조끼 두르고 뇌관을 손에 든 채 “알라 후 아크바르!”라고 외치면 비슷한 분위기가 날 것 같았다.

시준은 거의 단상에서 도망칠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주체신기전은 터지지 않았다.

거기에서 발사된 큰 원통은 공중으로 발랄하게 흩뿌려지며 오색의 불꽃을 피워냈다.

시준은 그것을 바라보며 조선 초 군주들과 비슷한 염려를 떠올렸다. 이미 초탈한 시준의 표정은 그윽하기까지 했다.

‘저거 대체 화약값이 얼마지……?’

아무리 지금 공화국이 인도 초석을 수입해도 만만한 가격은 아닐 터였다. 차라리 그것으로 쌀을 몇 가마나 살 수 있었을까.

시준이 그렇게 끙끙 앓는 동안, 이제 마지막 순서라 곁에 돌아와 있던 혁명무력부장 차형기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저곳을 보십시오, 주석 동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든 시준은, 그러나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행주산성에서 프랑스군의 도움과 시준의 재주를 보태 완성해내었던 기구였다.

눈썰미 좋은 조선 사람들은 시준이 따로 기술 개발을 지시하지 않아도 그 방법을 이미 익혔다. 그때처럼 자그마한 기구가 어두워진 평양성 위로 떠올랐다.

상승하는 기구 주위에서는 여전히 폭죽이 터지고 있었기에, 그 기구는 불꽃 사이를 헤엄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보였다.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비상이었다. 시준마저도 입을 벌린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잘못 발사된 주체신기전 폭죽 하나가 기구를 정통으로 명중시켰다.

기구 안에는 당연히 발화물질이 있다. 그리고 기구를 이루는 것은 천연 섬유다(나일론이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기구는 잠시 비틀거리더니 하늘에서 유성처럼 불타올랐다.

시준은 옆에서 짐승의 포효 같은 애통한 절규를 듣고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홍총각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저 물건을 싼 주머니에 총괄서결부 서기국장 동지(김정희)의 필체를 빌려 아름다운 말을 적어 두었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주석 동지. 마지막에 정말로 송구하오이다!”

시준의 눈에도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어두워서가 아니라 너무 밝게 타오르고 있어서. 하지만 어차피 무슨 말이 적혀 있을지는 뻔하다. 시준은 그저 피식 웃었다.

“그걸로 되었소. 멋지지 않소?”

정치국 간부들은 아쉬워했지만 시준은 그대로 단상 난간에 몸을 내밀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이나 구경할 수 있었던 이 사치스러운 축제에 환호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터진 저 큰 불꽃은 불꽃놀이의 클라이맥스로 인식되어 더욱 큰 환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래. 이걸로 됐지.’

정시준과 유쾌한 인민들의 혁명은 이렇게 되어야 제맛이다.

시준은 주위 간부들을 일일이 격려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약간의 사고는 있었지만 혁명군은 초기와 비교도 안 되게 정예해졌다.

이제 그들은 기세 하나 믿고 싸우던 반군이 아니다. 인민이 인정하고 단련시킨 국가의 정규군이다. 군사에 대해 잘 모르는 시준도 혁명군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다면, 이런 멋진 불꽃놀이를 아내와 친구들 대신 직장 동료들과 관람했다는 점 정도였다.

시준은 집에서 저것을 보고 있을 지유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동인도 회사가 중국에서 영국으로 갈 때 이용하는 통상 항로는 ‘케이프 루트(Cape Route)’라고 불린다. 이름대로 아프리카 최남단의 케이프타운, 그러니까 희망봉 부근을 경유하는 길이다.

세계지도만 펼쳐놓고 보자면 해적을 피하고 속도를 올리기 위해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차피 동인도 회사보다 더한 해적은 영국 해군밖에 없거니와, 그런 짓을 하기엔 바람이 안 좋다.

물론 길이 없는 건 아니다. 유럽에서 동쪽으로 항해할 때는 케이프타운에서 바로 동진하여 ‘울부짖는 남위 40도대(Roaring Forties)’ 항로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불가피하지 않고서야 굳이 그러려는 선장은 적다. 그 미친 듯한 바람은 확실하게 선박을 밀어주지만, 좌회전 시점을 놓치면 그대로 남태평양에서 굶어 죽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방향이 반대다. 그래서 고려인민공화국 외사통호부장 정약용은 마드라스에 기항하여 이국의 풍경을 즐길 수도 있었다.

청회색으로 넘실거리는 인도의 바다는 다른 모든 곳의 바다처럼 짭조름한 냄새로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여기에서만은 다른 냄새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경쟁하고 있었기에 대해의 자부심도 약간 퇴색했다.

마드라스에서 거래되는 막대한 향신료 때문에, 정약용은 독초가 아닌가 의심할 만큼 강렬한 향이 항구를 배회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오가는 시커먼 피부의 사람들이 뿜어대는 열기와 땀 냄새도 섞여 있는 듯했다.

이 거대한 항구에 기항한 선박들은 문순득의 여행담에서도 나오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배에 달려 있는 큰 돛이 바람을 받아 펄럭이며 그러한 냄새들을 부채처럼 뒤섞었다.

그런 머리 핑핑 도는 자극 속에서 왁자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고함, 욕설이 치달렸다. 심지어 어디에서는 드잡이질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 압도적 생경함의 반주는 퍽 시끄러웠다.

정약용은 그런 속세를 뒤로하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글공부 경박하게 한 선비라면 시(詩) 한 수가 나올 법하다 하겠으나…… 이백과 두보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여기서는 먹을 갈 수 없으리. 이곳에서는 그들의 시도 한낱 퀴퀴한 종이에 비린내 나는 붓자욱이로다.”

정약용은 자기가 거칠고 모호하게 느낀 생동감과 이질감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 감상에 빠져 있는 정약용의 곁에 그레테 자작이 다가왔다. 대프랑스 전쟁이 끝나 그도 마음 놓고 영국인 사이를 활보할 수 있었다.

“이런, 각하. 들으셨습니까? 나폴레옹 황제가 엘바 섬을 탈출해서 재기를 꿈꾸다가 다시 패배하여 사로잡혔다더군요.”

정약용은 그 일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준이 그러리라 예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채권 익절은 시준이 부여한 최우선 목표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정말 들어맞을 줄이야…….’

정약용은 부채를 들어 능숙하게 경악을 감추었다. 그러고는 그레테 자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황제가 유배된 곳이 바로 우리가 들를 기항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이라고 합니다. 저는 옛 주군에 대한 경의로써 한번 그의 거처를 방문할 생각입니다만, 각하께서는 정부의 공식 외교 담당자이니 조심스러우실 수 있겠죠. 그래서 협의를 하기 위해 말씀드렸습니다.”

정약용의 일행이 사사로이 나폴레옹을 방문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대영 외교에 차질을 줄지 모른다. 그레테 자작의 말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정약용은 그레테 자작이 하지 않은 말까지 알 수 있었다.

정약용은 부채 뒤에서 남모르는 미소를 지었다.

적지 않은 나이와 학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에서 구성된 문장은 상당히 짧고 경박한 것이었다.

‘이놈 봐라?’

========================

작가의 말

1. ‘종대’는 여기에서 부대 편제가 아니고, 4열 종대 할 때와 같이 그냥 줄지어 가는 부대라는 뜻입니다.

2. 안달루시아 종마가 ‘춤을 춘다’는 말은 유럽에서 상류층의 유희로 선보였던 ‘오트 에콜르(haute école, 고급 승마술)’를 말합니다. 뒷다리로만 선 채 뛰기도 하고, 조각상처럼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기도 하는 등 여러 기예가 있는데 그 중 절정은 카프리올르(Capriole)라고 부르는 형태입니다.

이는 말로 하여금 공중으로 뛰어올라 앞다리를 접고 뒷다리를 쭉 편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페가수스를 연상케 하는’ 곡예이고 당대에도 ‘가장 뛰어난 말’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찬사를 받았습니다.

3. 조선 시대에 화산이라고 하면 볼케이노가 아니라 주로 화산붕, 혹은 화산대라 부르는 불꽃놀이를 의미했습니다. 명절에 왕실에서 유희 목적으로 하기도 하고, 조선 초 화약의 지식을 아직 모르던 일본이나 여진 사신이 오면 가끔 보여줬죠. 일본 사신이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무래도 즐긴 것 같습니다.

반면 중국 사신이 왔을 때는, ‘우리나라의 포 쏘는 법이 중국보다 맹렬하니’ 중국이 비법을 내놓으라고 할까봐 두려워 일부러 하지 않았던 적도 있습니다.

4. 파나마나 수에즈 운하가 없고, 남아메리카 남단 항로는 목제 범선으로는 너무 빡셌기에 이 시대의 유럽-아시아 항로는 아프리카 해안을 빙 돌아 경유하는 쪽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던 이유이기도 하지요. 케이프타운은 그 방면에서 최고 요충지 중 하나로서 해적, 국가, 상인 가릴 것 없이 여기를 지나야 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