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72. 물러나는 파도(3)
일찍이 영국의 사절로 왔던 매카트니 자작에게 건륭제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땅은 광대하고 물산은 넓으므로[地大物博], 응당 있어야 할 것은 전부 있다[應有盡有]. 너희 오랑캐의 하찮은 물산은 필요가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시대를 읽지 못한 말이라 생각한다. 영국이 오랑캐라는 것만 동의할 뿐이다.
그러나 건륭제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다. 건륭제의 말은 담백한 사실이었다.
중국엔 정말로 모든 것이 있었다. 돈 빨아먹으려다 돈이 빨린 영국은 척수반사적으로 아편을 꺼내 들어야 했다.
그리고 현재, 나라 전체가 혼란하다 할지라도 그 자원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돈 때문에 군사력을 강화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태평천국의 난 때 서양 무기건 대포 공장이건 강철 군함이건 막 지르던 청나라 대신들의 배짱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재정이 충분하다는 거지 결과가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중화인민공화국도 세계 경제대국 2위지만 축구 전력은 오호십육국의 참상이지 않은가. 세상엔 돈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고상한 진리의 재증명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낫다. 이는 평생 돈 모으기에 열심이었던 고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한푼 두푼 비자금을 모아 우주전함을 사서 일본을 박살내고자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의 방해와 지능의 저조가 일으킨 시너지 효과 끝에, 그에게 돌아온 건 물 위에 떠 있다는 면에서만 군함과 같은 고철이었다.
물론 전직 지혜의 왕인 도광제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대국 체면이 있지 어디 그래서야 되겠는가.
게다가 그는 조선 역대 왕의 재산을 다 합쳐도 안 될 선친의 무한금고까지 물려받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셈이다.
그래서 도광제도 이제 본격적으로 국내 정리에 나섰다.
영국과 공화국을 일순간에 조용히 시킨, 그야말로 연금술이라고밖에 불러 줄 수 없는 그의 업적을 널리 선전해 인심을 얻은 이상 지금 밀어붙여야 했다.
“짐이 특별히 정황기(正黃旗) 중 뛰어나다는 자를 살피니, 모두가 연로하여 활 당기고 말 타기에 부족하다. 걷는 군사로 하여금 총을 쏘아 보게 하여도 그저 평상(平常, 보통)에 지나지 않아 팔기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상삼기의 체면이 없다. 게다가 기총(旗摠)과 도통(都統) 등의 정수(額數)와 실제가 전혀 맞지 않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찰의(察議)하여 아뢰도록 하라.”
팔기 중 가장 규모가 큰 정황기가 대표로 두들겨 맞기는 하였으나, 이는 팔기 전체에 대한 강기숙정이다.
모든 팔기의 최고위인 양황기한테는 왜 그 지위에 걸맞은 책임을 부여하지 않느냐고 묻는 눈치 없는 놈은 없다. 양황기는 황제의 가족이니까.
도광제가 무슨 옆 나라 강철군주급의 개혁을 하려는 건 아니다.
원래 상사 바뀌면 기강 잡는 건 으레 있는 일이다. 잠깐만 조심하면 알아서 또 좋은 시절이 온다. 천하는 그렇게 돌고 도는 법이다.
허나 바람 불 때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 내우외환이 준동하는 현재, 황제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잠통이건 모반이건 마음대로 죄를 씌울 수 있다.
기주(旗主)며 장수들은 소중히 길러 색색으로 칠했던 손톱을 눈물 머금고 깎아냈다.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창칼도 황급히 꺼내어 닦았다(대부분은 그런다고 회복될 게 아니라서 새로 사야 했다).
동시에 도광제는 아버지 돈을 조금 풀어 영국 무기도 대량으로 사들였다.
현 중국 공사 조지 스턴튼 역시 반란군 진압은 못 도와줘도 장사는 환영이라는 입장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영국 경제도 많이 망가졌기에, 스턴튼은 의회도 좋아할 거라 확신하고 인도의 무기를 많이 끌어왔다. 이건 조약상 ‘신민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서 거리낌도 없었다.
그런 조치만으로도 청군은 꽤 정예해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도광제는 이 ‘정예한 청군’이 팔리교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잘 안다. 반란군은 물론이고 장차 영길리국까지 쫓아내기 위해서는 더 많고 믿을 만한 군대가 있어야 했다.
도광제는 역사보다 1년 일찍 화영(和瑛)을 병부상서로 임용하며 군기처에 들였다.
화영 자신의 능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몽골 양황기의 수위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도광제는 화영을 통해 내몽골 마흔여덟 개 부락의 병력을 끌어왔다.
주로 동부와 남부에서 시작된 중화 혁명당의 반란은 아직 서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바로 그래서 정약용이 오족공화의 기치를 내세운 것이긴 하나, 혁명이 기치만으로 끝날 일이라면 정시준을 숭배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몽골은 시준이 주창한 수평도와 혁명 정신보다 한층 더 진보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지구를 강타할 기후 변화를 천 년 일찍 내다보고 지혜로운 정책으로 탄소 배출량을 격감시킨 녹색전사 칭기즈 칸이 바로 그들의 시조다.
수평 혁명은 아무리 잘 쳐 줘도 근대(modern)의 사상. 그러나 에코이즘은 탈근대(post modern)의 미래지향적 가치다. 시대의 최첨단 몽골족에게 수평도는 그리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섯 개 종족이 왜 어울려 평등해져야 하는가? 그냥 다 죽이면 되지 않을까?’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평등해지면 한정된 어머니 대지의 자원을 나눠야 하지만 다 죽이면 지구도 보호하고 재물도 들어오니 이야말로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모인 만몽(滿蒙) 팔기는 (청나라 기준에서) 막강했다. 그들은 대운하를 따라 남진하며 ‘반란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폭발적으로 확장했던 중화 혁명당은 대타격을 받게 되었다.
***
중화 혁명당의 남두육성 제2성 임칙서는 강녕부(난징)에서 전달된 한 장의 무명천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거기에는 급히 휘갈긴 듯한 적갈색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하나의 중국 만세!’
천 위에 흩날린 얼룩 같은 방울 자욱을 보지 않더라도, 이 글씨가 피로 쓰였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강녕부에서는 이 최후의 절규 외에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임칙서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강녕부가 함락되었다면, 송강부(상하이) 일대도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반동 황제는 필시 서쪽에서부터 천천히 몰아붙여 우리를 바다로 쓸어 넣으려 들 테지!”
본래 팔괘교 시절부터 임청을 따라다닌 오래된 동료이고, 지금은 임칙서 등 신흥 중화혁명당의 기세에 밀렸지만 아직 당당히 남두육성의 제4성을 맡고 있는 전직 돌팔이 의원 서안국(徐安國)이 물었다.
“후천조사(임청)의 계시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소?”
임칙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 구시대의 유물을 아직도 추종한다는 말인가.
남두성은 이미 졌다. 마약 때문에 그 좋아하는 여자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되어(아편은 성욕도 소멸시킨다) 할 줄 아는 일이 이제 담뱃대 빠는 것밖에 없다.
애초에 그릇이 안 되는 용렬한 자. 혁명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이비 교주가 임청이 가진 역량의 끝이었다. 임칙서는 준엄하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당 중앙위원회의 재가가 필요할 뿐이오.”
주위에 모여 앉아 있던 ‘중화혁명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서안국은 그중 천리교 출신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공포를 느꼈다.
중화혁명당은 남조선혁명당의 사적을 많이 참고했다. 다만 평양의 혁명막부 정치국에서 통일된 지시가 내려오던 남조선혁명당과 달리 중화 혁명당은 정해진 수뇌부가 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임칙서는 천리교 바깥에서도 널리 유력자를 모아 ‘중화혁명당 중앙위원회’를 창설했다.
이것은 천리교와 별개의, 그리고 더 상위의 세력이라 임청은 이제 명실상부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물론 임칙서였다. 이제 남두육성은 천리교 안의 기치일 뿐이다.
그러나 임칙서가 남두육성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니다. 아직 중화 혁명당의 중심 세력 중 하나인 천리교를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남두성은 이제 져버렸으나, 여전히 찬연히 빛나고 있는 북두성의 위엄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임칙서는 중앙위원회 앞에 편지를 하나 꺼내 놓았다.
“고려인민공화국 주석 정시준의 서한이오. 본 위원장이 지금부터 이것을 낭독하겠소.”
사람들은 모두 침을 삼키고 그것을 들었다.
<악랄한 반동세력의 엄혹한 말살책동 속에서 견인불발의 의지로 혁명을 수행해 나가는 중화 혁명당 동지들과 그들이 선거한 중앙위원회 위원장 임칙서 동지에게, 수평한 고려인민공화국과 나는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냅니다.
……
혁명의 투쟁에서 인민 자신의 긍지야말로 그것을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추동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허나 지금, 유례없이 간고한 고개가 우리의 앞에 닥쳤습니다. 투쟁에 나서는 문제를 덮어두지 말고 이치에 맞게 따져 호분누석(毫分縷析, 분석)할 때입니다.
……
홍문의 연회에서 갈데없이 외롭던 유방은 한중에서 사백 년 왕업의 터를 닦았고, 의지가지없이 천하를 떠돌던 유비는 입촉하여 황제를 칭했습니다. 한갓 반동의 제왕이 이럴진대, 어찌 혁명의 동지들이 그 정도 고난을 수행하지 못하겠습니까?
……
태산을 돌아가는 황하는 산에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끝내 바위를 깨고 흙을 밀어내어 산을 감쌀 뿐입니다.
잠시만 날카로운 창끝을 피하고 활로를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궁지의 험산이나 사막, 대하에 있더라도 공화국은 동지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수평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는 여정이 아무리 곤고하더라도 동지가 있으니, 백절불굴의 투쟁기세에 새로운 용기와 활력을 더합시다.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 만세!>
임칙서는 마지막 구절을 읽기 전 고개를 들었다. 그는 비장한 기세로 덧붙였다.
“혁명력 5년 8월 1일.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및 대고려인민공화국 주석 정시준.”
모든 위원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임칙서를 바라보았다.
***
우선, 이 친서는 절대 정시준이 21세기 어느 나라에서 베껴온 게 아니다. 외사통호부가 작성한 공화국의 외교문서다.
시준은 이미 공화국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왔음을 통감하고 체념했다. 괜히 문구 고친다고 시간 낭비하는 짓은 도움이 안 된다.
‘어차피 내년이면 이 노릇도 끝이니까…….’
하지만 내년에 바로 중화혁명당이 소멸해 버리는 상황은 시준으로서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은 자신의 권한을 활용하여 이번에 최대한의 지원을 해 주었다.
2대 주석은 더 이상 중화혁명당을 지원하기도 어렵다. 중국 공사가 바뀌면서 6개 개항장의 밀매에 단속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조지 스턴튼은 무기 밀매 금지의 조약을 지켜 도광제로부터 신뢰를 얻고자 했다. 물론 아편은 애초에 조약에 금지 언급 자체가 없으니 그냥 팔아도 된다.
도광제의 기강 확립에 잠깐 숨죽이는 청 관리들처럼, 동인도 회사를 비롯해 아시아 구석구석에서 활동하는 거간꾼과 잠매상도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자딘도 영국 가 있다 보니 대규모 밀거래선을 다시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은 공사가 아직 업무를 파악하고 있는 동안 최후의 밀수선을 상하이로 파견했다.
친서에 뜬금없이 유비나 유방을 끌어댄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공화국도 먹고살기 빠듯한 지경인 데다 선마저 끊겼으니 무리한 지원은 곤란했다.
그래서 서쪽으로 숨어들어 보라 조언한 것이다. 만약 중화혁명당이 상하이나 광저우에서 죽기살기로 버티며 ‘우린 고려만 믿는다!’는 식으로 나오면 공화국도 상당히 입장 난처해진다.
다시 말해 시준은 정말 서부 탈출이 중화혁명당에게 옳은 전략인지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면피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고려에 있는 시준이 정말 중화혁명당의 앞길에 대해 명확한 방안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자주자존(自主自存) 없이 수평이란 한낱 광언에 불과하다. 그건 중화혁명당 스스로 정해야 할 사안이다. 시준의 제안이 옳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고, 그르다고 생각하면 거부하면 된다.
‘설마 내 말을 그대로 따를 만큼 줏대가 없지는 않겠지. 자기들이 알아서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거야. 난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 정도가 시준의 생각이었다.
***
그러나 임칙서는 과연 혁명에 어울리는 강대한 의지의 사나이였다.
원래 역사에서 수십 년 뒤 세계의 병폐 영국을 상대로 홀로 맞서 정의를 집행한 그 의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신을 다 읽은 임칙서는 그것을 손에 쥔 채 탁자를 내리쳤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모두 죽을 뿐. 우리는 고려인민공화국 주석 정시준의 계책을 따라 서진(西進)해야 하오. 어쩌면 수만 리를 걸어야 할지 모르고, 어쩌면 수만 명의 동지들이 죽을지도 모르지만 이 혁명의 대장정(大長征)을 완수하지 못하면 중화의 인민에게 더 이상 하나가 될 길은 없소.”
서안국이 뭐라고 말하려 하였지만 임칙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것을 막았다.
서안국 역시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초 치면 관군 이전에 동료들에게 죽는다.
무대가 준비되자 임칙서는 이제 완전한 지도자의 풍모로 선언했다.
“본 위원장은 혁명당 중앙위원회 앞에 발의하리다. 강소, 절강, 광동, 복건의 동지를 즉시 모으고 멀리 강북 산동과 직례에 흩어진 동지들에게도 전하시오. 우마가 있는 자는 달려서, 발이 달린 자는 걸어서, 배를 탄 자는 저어서. 중화혁명당은 사천(四川)과 섬서(陝西)에 다시 모여 오족공화의 깃발을 재차 세울 것이오!”
***
화산 폭발은 별로 큰 관심 대상도 되지 않을 정도의 혼란과 분쟁 끝에, 각지의 군주와 우두머리들은 잠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파도가 더 큰 쇄도를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나는 듯한 고요함이었다.
공화국 역시 그 조짐을 모르지 않았다. 시준과 동료들 또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혁명에 필수적으로 몰아닥칠 반동의 파도를 대비하기 위한 방파제는 바로 자랑스러운 인민의 군대, 혁명군이다.
혁명군에는 계급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직책만 있을 뿐이다. 수평도는 그 도리를 천하에 가장 선봉으로 내보이는 혁명군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되어야 했다.
하지만 상하가 없다는 것과 분별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혁명군에도 지휘관과 병사는 있으며, 군정과 군령권 역시 분리되어 있다.
군정 담당자야 의심할 바 없이 국무당 혁명무력부장 차형기다.
그러나 정상국가라면 군정의 하위에 있어야 하는 군령권 쪽이 좀 애매하다.
보통은 군 총사령관이 국방부 장관, 그러니까 여기서는 혁명무력부장쯤 되는 사람의 통제 하에서 군사 작전을 실행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혁명군에게 군사적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최고위 인사는 혁명군 총사령 정시준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나 명목상으로나 주석은 혁명무력부장보다 상위의 명령체계다.
혼자 다 해먹으니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행사에서 혁명군을 지휘하는 자는 정시준이 아니었다. 시준이 상하이에 갔을 때 군령권을 대행시켰던 2영대장 홍총각이었다.
조제프 푸셰를 비롯한 다른 모든 간부들처럼 차형기와 홍총각 역시 주석 부재 시의 성과를 자랑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에게는 다른 간부들과 대별되는 이점이 있었다. 바로 2만에 가까운 혁명군이었다.
그래서 혁명군의 성과 발표 형태는 다른 모든 간부들이 질투할 만큼 웅장한 모양으로 시작되었다.
천여 명의 고르고 고른 혁명군 정예를 집결시킨 홍총각은 우마차 위에 약간 높은 누각을 두고 그 위에 서 있었다.
우마차가 느리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기도 하고, 비틀거리면 망신이기 때문에 누각에 구멍을 내고 다리를 넣어 묶은 채였다.
깃발이 올라가자 우마차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여러 가지 의미로 초죽음이 된 시커먼 얼굴의 정시준과, 그 옆에 서 있는 혁명부력부장 차형기가 일단 우마차의 목표였다.
우마차가 국무당 간부들의 앞에 섰다. 시준은 웃거나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서 정말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홍총각은 더없이 진지했다. 5년 전만 해도 평안도 신디케이트 히트맨이었던 사람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덩치만큼이나 웅혼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려인민공화국 국무당 혁명무력부장 동지! 혁명군 전위대장 홍총각이 정치국 앞에 말씀 올립니다! 열병부대들은 혁명력 5년 추석 열병식을 위한 검열 준비태세를 완수하였습니다!”
나팔이 요란하게 울리는 동안 시준은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자기가 영국 애들 처음 묻어버릴 당시 임시로 붙여준 별명이었던 전위대장이 이젠 정식 지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시준의 옆에서 홍총각의 것과 비슷한 우마차를 타고 있던 차형기는 그대로 홍총각을 따라 나아갔다.
어떻게 저렇게 서 있을까 싶을 정도로 꼿꼿하게 도열한 혁명군은 일제히 왼쪽을 바라본 채 총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초보적 제식 훈련의 경험이 있는 시준은 그들이 턱을 드는 각도까지 일치시켰음을 알고 진저리를 쳤다.
우마차가 부대 앞에 도착하자 차형기가 손을 치켜들었다.
“동지들, 안녕하십니까!”
“부장동지, 안녕하십니까!”
천여 명의 우레 같은 목소리가 화답했다. 차형기는 거기에 질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대 고려인민공화국 만세!”
“만세!”
그 일치된 함성은 이제 열병 준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검열’을 마친 차형기는 그대로 돌아와 정시준의 앞에 섰다.
하지만 그가 시준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중앙인민회의 무력위원회 위원장 동지! 열병 준비가 완수되었습니다!”
혁명군은 인민의 군대이고, 인민을 대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앙인민회의이기 때문이다.
주석 자리는 엄밀히 말해 중앙인민회의가 임명한 최고경영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일차로 보고를 받은 것은, 중앙인민회의 무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전 철산 부사 이장겸이었다.
그는 의주 부윤 조흥진, 용천 부사 허명, 선천 부사 김익순 등과 함께 가장 일찍 시준의 편에 붙은 조선 출신 고관 중 하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앙인민회의에서도 무력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상임위원의 일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이장겸의 직위가 그저 바지사장인 것은 아니다.
전선에서 창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뒤에서 혁명군의 예산을 편성하고 승인하는 일이 그의 직임이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이장겸은 위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위엄이 있었는지 원래 역사에서 홍경래에게 쾌속 항복한 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장겸은 절도 있게 돌아섰다. 그러고는 5년 전만 해도 옆 동네의 상인 아이에 불과했던 사람에게 군례를 올렸다.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동지! 무력위원회에서 혁명력 5년 추석맞이 열병식 개시의 허락을 구하고자 하오이다! 용맹한 혁명군의 기세는 만방에 떨칠 것입니다. 혁명 만세!”
시준은 여기서 어울려 대답해 주면 자기 안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이 끝장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준은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주위에 있는 동료들의 열망에 찬 눈빛도 부담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저 앞에서 천여 명의 시선이 오직 자기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준은 결국 오늘도 또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했다.
“시작하시오, 혁명 만세!”
평양성 성문도 가를 것 같은 함성이 대동강 강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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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고종 군함 얘기는 양무호입니다. 고종의 소비 일화가 좀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 사기 체험담 같은 게 많기는 하지만 이건 단순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니고, 일본이 강제로 쓰레기를 비싼 값에 떠넘긴 것에 가깝습니다.
그나마 당시 대한제국 예산은 고종 맘대로가 아니라 대신과 외국 고문관들의 입김이 강해서 국가예산으로는 지불도 어려웠죠. 양무호 구입 대금도 내탕금으로 치렀다고 합니다.
2. 호분누석은 잘개 쪼개어 일일이 세어 본다는 뜻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 말을 줄이면 우리가 흔히 아는 ‘분석’이라는 한자어가 됩니다.
3. 현재 부르는 내몽골/외몽골은 청대에 정립된 것입니다. 청나라 기준 가까운 쪽이 내몽골, 먼 쪽이 외몽골이죠.
청은 한족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상당히 우대했는데, 대표적으로는 대대로 황제의 부마 중 몽골 왕족 출신이 많았습니다. 당대 조선 사람들이 ‘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몽고 48부’ 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4. 견인불발(堅忍不拔)은 굳게 참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는 잘 쓰는 단어가 아니지만 같은 말 쓰는 다른 동네에선 많이 사용합니다.
5. 작중에서는 우마차가 나오긴 했지만, 우마차를 지프차로 바꿔서 생각하시면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저렇게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병식을 비상식적으로 대규모의 면적에서 개최하는 (중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