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18화 (218/284)
  • 218화

    72. 물러나는 파도(2)

    화산이 터졌으니 연기가 햇빛을 가릴 것이라는 시준의 말은 별것 아닌 추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국 회의에서 시준이 말한 지식은 워털루 전투 국채 변동 따위보다 훨씬 경이적인 것이다.

    화산 폭발이 ‘주변’에 재해라는 사실이야 고대부터 모두가 알고 있다. 보면 알 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그것이 지구 대기권에 미치는 거시적 영향 같은 초월적 지식은 전문 과학자들도 닿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대포 쏘고 공장 돌리니까 마치 대단히 과학적인 것 같지만, 지금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며 고생물학의 창시자라는 조르주 퀴비에가 ‘내가 땅 파서 뼈를 보니까 아무래도 노아의 홍수는 여러 번 일어난 것 같아’ 정도의 소리나 하는 수준이다.

    1816~17년의 유럽에서는 헐벗고 굶주린 어린아이들이 툭 튀어나온 배와 퀭한 눈으로 구걸을 다니며, 사람과 짐승이 음식물 쓰레기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대는 참상이 펼쳐졌다. 그러나 아무도 화산이 원인인 줄은 알지 못했다.

    설사 유럽 과학자 중에 회귀자가 있어 그것을 적극 알렸다 하더라도 당대 유럽에서 딱히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정부는 없다.

    ‘빈곤과 기아는 전적으로 개인이 노력하지 않은 탓이다.’

    그게 바로 가난한 적도, 굶주린 적도 없는 자들의 공통적 인식이었다.

    이는 딱히 어디랄 것도 없이 당대 전 유럽 공통이다(나중에는 ‘서구화’된 모든 나라들의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인간쓰레기 업계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것은 역시 이번에도 영국이다.

    ‘빈민들은 자꾸 새끼 까서 밥 축내지 말고 성욕과 식욕을 봉인하든지 아니면 싹 뒈져라’라고 외치는 성공회 암흑사제 토마스 로버트 멜서스가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그의 학문에, 영국은 멜서스의 동인도 회사 대학 교수 초빙을 주저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애덤 스미스가 ‘도덕’ 교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유럽의 찬란한 과학이다.

    100년 뒤 미국이 장애인 모아서 강제 불임 수술을 시키거나 자살을 종용하고, 히틀러가 그 제도를 약간 수선해서 그대로 따라했던 게 무슨 지도자 한두 사람이 미쳐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구미 사람은 그게 옳다고 여겼다. 착각하기 쉽지만 미국 대통령이나 독일 총통이나 둘 다 민주주의적 절차로 선출된 지도자이며, 민주주의란 국민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제도다.

    그러니 내년 농사 망할 것이라는 신의 계시가 빛기둥과 함께 내려왔다 해도 유럽 정치인들이 어떤 조치를 취할 리는 절대로 없다.

    그들은 계몽된 문명인이니까.

    ***

    이에 비해 정시준은 실제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고 화산이 불러오는 재해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과학자와 정치인이 분리된 것보다 많은 이점을 가진다.

    다만 시준 역시 안타깝게도 그렇게 깊은 지식은 없다. 시준이 정치국 회의에서 한 얘기는 그저 ‘내년에도 흉년이 들지 모르니 곡식 비축을 늘려 두자’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정치국 회의가 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혀 다른 의미의 선언으로 바뀌었다.

    ‘경애하는 정시준 주석 동지께서 내년에도 반드시 흉년이 들 것이라 교시하셨다!’

    평안도부터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지시’에 따라, 각 인민위원회 위원들은 창고와 밭두렁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했다.

    모든 혁명간부들은 예전부터 주석 동지의 혁명사적을 심도 있게 학습했다. 그래서 시준이 ‘평안도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차용했던 어디 다른 공화국의 거센 단어 선정과 어투도 이미 익숙했다.

    따라서 흔히 ‘정 진인의 패기변설’이라 불리는 고려식 웅변술을 마스터한 간부들은 아주 많았다. 그들의 열창이 공화국 곳곳에서 간헐천처럼 터져 나왔다.

    “제1기 제103차 국무당 정치국 회의가 제시한 알곡산성의 깃발을 무조건 점령하기 위해서는, 상조농장의 각 포전(圃田, 구획을 나눠놓은 경작지)부터 강위력한 결사 항전의 녹각으로 다져야 하오! 여장과 농상위원회 위원들은 백절불굴의 각오를 다시금 떨치시오!”

    “지금 우리가 일궈내는 곡식이 임금에게 바치는 세곡이오? 양반 벼슬아치들의 배를 불리는 쌀자루요? 바로 수평한 인민 스스로의 것이오. 세상에 자기 것을 돌보는 데 게으른 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인민창고의 곡식을 헐하게 축내거나 함부로 훼상하는 자는 바로 인민창고가 자기 것이 아니라 말한 셈이며, 따라서 이는 스스로 공화국 인민이 아니라 반동이라 자인한 것이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인민의 분노가 강철로 제련된 혁명작두뿐!”

    “이번에도 흉년이니 이만큼만 하면 되겠지. 혹은 흉년이라서 이 정도밖에 안 되네 하는 따위의 날씨며 사정 타발은 반혁명적인 처사! 우리는 더 이상 하늘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외다!”

    마치 공화국의 토지가 전부 국유화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공화국을 북한으로 만들 수 없다는 시준의 의지 때문에 전면 토지개혁은 여전히 보류 상태였다.

    삼남에서 반동의 토지를 분배받은 구 남조선혁명당이나 통일전쟁 호응자들이 약간 있을 뿐이다. 경자유전의 원칙은 대체로 지켜졌지만 자영농의 토지를 몰수 후 재분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이은 흉년은 시준의 의지와 상관없이 토지개혁과 비슷한 효과를 불러왔다.

    차라리 이 아무것도 안 나오는 땅을 상조농장에 팔아버리고 입회하여 안정적으로 먹고살려는 사람이 줄을 잇게 된 것이다.

    실제 생산량이야 상조농장이라고 더 많을 리는 없다.

    그러나 자투리땅에 틈틈이 재배하는 평안도 담배와 양귀비꽃을 정치국에서 많은 곡식으로 바꿔 주기 때문에 마치 거기 가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 같은 착시가 벌어졌다.

    그래서 이번의 알곡 증산투쟁(지유가 명명했다)은 전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조농장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다만 머리에 붉은 띠 매고 주먹을 부르쥔다고 해서 벼에 낟알이 더 실하게 매달리는 건 아니다.

    결론적으로 각지 인민들의 활동은 누수 곡식의 보전과 대체 식량 확보에 집중되었다.

    쥐나 곤충이 틈입하지 못하게 지은 새 창고가 여기저기 건립되었다. 시멘트로 바닥을 돋우고, 벌레가 싫어하는 목재의 지식이 배포되었다. 물론 이러고 남은 시멘트는 곡식을 횡령하던 일부 위원회 간부를 풍어(豐漁) 기원 제물로 쓰는 데에도 절찬리 사용되었다.

    곡식뿐만이 아니었다. 가뭄을 대비해 그간 축조해 놓았던 저수지와 못은 개구리밥이 뒤덮었다. 개구리밥은 놔두면 알아서 잘 크고, 단백질과 지방 함량이 높아 사료로 쓰기 적합하다.

    특히 닭이 이걸 좋아하는데, 사람도 닭을 매우 좋아한다. 지금 단천 은광에서 땅 파고 있는 김조순 정도만 빼면 조선 사람들의 닭고기 애호에 예외는 많지 않다.

    아직 현대식 품종 개량과 대규모 양계장이 등장할 때는 아니지만, 정치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살이 잘 찌기로 유명한 화이트 폴리머스 록 치킨(White Plymouth Rock chicken) 품종을 수입했다.

    에뮤에 이어 호주에 두 번째로 패배를 안겨줄 동물인 토끼도 같이 들여왔다. 호주에서는 폭탄에 세균병기까지 동원해서 말살해야 했던 짐승이지만 조선에서는 제발 그 정도로 불어나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이런 신문물의 도입에서 으레 부딪치게 되는 사람들의 거부감, 그로 인한 느린 전파는 다행히 공화국이 겪지 않아도 되었다.

    우선, 조선 사람들이 마주치는 농촌 계몽 사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근대 사람 대부분의 직업이 농사라고 하지만, 정보 전파와 교육이 느린 그 시대에는 잘못된 농사법으로 매년 농사를 망치면서도 남은 거나 주워 먹으며 원래 벼가 이따위 열매밖에 안 맺는 줄 알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이는 마찬가지로 농업국가였던 조선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상공업 진흥이고 뭐고 이때는 쌀이 복사가 되는 농사야말로 가장 확실한 돈벌이 수단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인 사람이 바로 공포군주 세종이다.

    그의 원대한 정복사업을 위해서는 많은 군량미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어디 여진족 꼴 나고 싶어서 왕명을 거스르겠는가. 세종의 농촌 계몽은 파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백성에게 제대로 농사법 안 가르친 수령이나 배우고도 따라 하지 않는 백성은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맛볼 각오를 해야 했다.

    결과는 훌륭했다. 여말에 비해 세종 이후의 농업 생산성은 종자 대비 수확으로 따졌을 때 3배에서 40배. 세종이 가진 공포의 군대가 남북으로 출정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이 충실한 치중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농업 신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 어느 정도 익숙했다.

    그리고 그 토양 위에서, 강압적 공포정치 대신 인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할 계획이 실행되었다. 수평도를 국시로 내세우는 고려인민공화국이 300년 전의 구식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그 선봉을 맡은 자들은 바로 야학 학생들이었다.

    이제 야학은 이름과 달리 더 이상 밤에만 공부하지 않는다. 그간 인민들의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1년, 영특한 소질이 있다면 몇 달 만에 대강 언서와 산술 및 기초적인 사무를 뗄 수 있다. 5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동네 위원회 서기 자리부터 평양과 계룡의 중앙 간부 자리까지도 진출했다.

    20세기 대한민국 사람들도, 옆집 개똥이가 학교인지 무엇인지 간다고 꿈지럭대더니 어느 날 면서기로 거드름 피우는 것을 보자마자 소 팔아서 자식 대학 보내곤 했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야학은 무료라는 점이 중요했다.

    ‘애새끼 일 시켜야지,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얼어죽을 학교야’라는 전통적 인식은 차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아직 일부 지역이기는 하나 일종의 종일반까지 개설되었을 정도다.

    교양권과부 야학과장 이서구는 옛 조선과 현 공화국의 농촌 계몽 방법을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지휘는 효율적이었다.

    학교 자체에도 21세기 북한처럼 토끼장과 닭장이 설치되었다. 절대로 시준이 지시한 건 아니고, 인민의 피땀으로 공짜 공부하고 있으니 나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며 궐기한 학생들의 제안이었다. 학생들은 앉아 밥 먹을 시간에 주먹밥 싸갖고 다니며 산에서 풀을 뜯어왔다.

    학생들은 포전에 나가 인민과 같이 일하며 땀 흘리는 것은 물론, 조제프 푸셰의 의도대로 상조농장 위원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정치장교 역할까지 똑똑히 해내었다.

    포천 출신의 이광로(李光老, 화서 이항로의 초명)는 그중에서도 경기 일대에서 알아주는 새 세대 혁명의 기수였다.

    세 살 때 천자문을, 여섯 살 때 십구사략을 읽었다는 이 천재는 열일곱 살에 강철군주의 초시에 합격한다. 그리고 나라 돌아가는 꼴에 격분해서 대과 응시를 때려치우는 것까지 역사와 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 이광로는 혁명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정약용이 옆 동네 사람이라 건너 건너 인연이 있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당대의 권귀들에게 너무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합격시켜 줄 테니 우리 패거리에 들어와서 같이 잘해 보자.’

    글 읽은 선비로서는 할 수 없는 비열한 제안에 이광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과거를 그만두고 얼마 뒤 총선거 소식을 접한 이광로는 당장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주석 동지께서 총선거 때 했던 연설대로, 군주도 귀천도 없었던 요순과 그 이전 시대는 하우가 아무 공적도 노고도 없는 자식들에게 공짜로 왕위를 넘기면서 망가졌다.

    애초부터 맨 위가 모순되었기 때문에, 그 모순을 메우려 덕지덕지 붙여 놓은 과거니 천거니 하는 제도는 결국 이렇게 흙탕물처럼 더러워질 수밖에 없다.

    역시 옛날처럼 해야 한다.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 일의 중요성을 알고 그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소년 이광로의 눈에는 정시준의 혁명이 말 그대로 고대의 이상, ‘하늘이 낼 때 천함이 없었던’ 시대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민 모두가 수평하므로, 더러운 탐관오리들의 실태를 알면서도 권세에 눌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란 이제 있을 수 없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치국 회의에서는 주석 동지마저도 하나의 위원으로서, 때로 면박을 받기도 하고 – 서기 김회용의 회의록을 먹어치우는 말소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준의 지리산 전략은 이미 소문이 났다 – 때로 빛나는 예지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인민을 위해 일한다.

    왕이 자비롭게 언로를 열어준다 하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거드름 따위가 아니다. 단순히 모두가 주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이광로는 스스로가 국가의 주인으로서 국가를 좀먹는 자들을 처단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자기 창고는 자기가 지켜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는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로 결심하고 야학에 들어갔으며, 얼마 안 가 두각을 나타냈다.

    젊은 나이에 군(郡) 위원회 서기 자리까지 선출되었으나 이광로의 바람은 그런 직위가 아니었다. 이광로는 곧 주석 동지의 흉년 계시를 듣고 주저 없이 지위를 버린 뒤 상조농장에 뛰어들었다.

    포천군 제12상조농장 간부들에게는 딱히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여장 동지. 군 인민위원회 문건에는 쉰 석의 소출이라 되어 있는데, 분조원(分組員)에게 들은 소출을 모두 합하면 일흔 석이니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스무 석은 어디로 갔소?”

    “그, 그건 아무래도 중간에 쥐가 쏠아댈 수도 있고, 나르고 묶고 털다 보면 새는 곡식이 있게 마련이라 으레 그렇게 해 왔소이다.”

    “어떻게 하면 장정 쉰은 있어야 지고 갈 스무 석의 곡식이 그러면서 빠진단 말이오? 안 되겠소. 이거 아무래도 여장 동지와 다른 위원들의 집을 인민의 이름으로 조사해 봐야 하겠소!”

    지금껏 잘 꾸려 오던 관례가 있는데, 외부인이 이렇게 입바른 소리 하며 끼어드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여장과 횡령품 나눠 먹던 위원들이 여장의 눈짓에 따라 이광로를 둘러싸자, 여장은 한껏 기세를 높여 이광로에게 삿대질을 했다.

    “야,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이 잘난 척이야? 다 그렇게 먹고사는 거지! 어딜 새파랗게 어린놈이 글줄이나 배웠다고 나서, 나서길?”

    다른 자들도 한마디씩 했다.

    “가만히 있으면 저에게도 어련히 알아서 떨어질까. 도무지 배운 보람이 없는 놈이구먼.”

    “네놈이 이러고도 포천 바닥에서 발붙일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미래 위정척사파의 거두 앞에서는 가소로운 위협일 뿐이다.

    이광로는 벽력처럼 외쳤다.

    “반동이다! 전위대!”

    혁명의 전위대장 홍총각의 이름을 탐내는 자는 많았다. 학교, 농장, 광산, 공창마다 전위대라는 이름의 반동 처리반이 탄생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 포천 제12상조농장에도 전위대가 있었다. 허나 여장과 위원이 반동인데 전위대가 어떻게 혁명적일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농장 전위대는 이광로가 부른 포천군 야학 전위대의 싱싱함을 당해내지 못했다.

    “으억! 컥! 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인민위원회에는 내…….”

    여장은 멍석에 말려 두들겨 맞으면서도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이광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네가 하는 짓이, 이름만 인민을 내세웠지 옛 반동의 무리와 다른 게 무엇이냐!”

    그들은 모두 심각하게 붓고 부러진 채로 묶여 끌려갔다. 이광로는 당당하게 군 인민위원회에 찾아가 인민의 재판을 요구했다.

    여장의 말대로 인민위원회에는 여장 편을 드는 자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이광로는 은근한 유혹, 비열한 압박,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나태 중 그 어느 쪽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주석 동지의 천리안이 보고 계시는데, 동지들이 당장 작은 일은 무사하겠지만 장차는 어떨 것 같소?”

    이광로는 의미 그대로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장 편을 들던 위원들은 이광로가 정약용을 통해 직소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광로의 세세한 문서 증거 탓에 대부분의 위원은 여장에게 등 돌린 지 오래인지라 더 우기기도 쉽지 않았다.

    곧 이 일은 정치국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주목한 것은 공화국에서 자기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정치장교 네트워크의 확대를 꿈꾸던 조제프 푸셰, 아니 선전선동부장 복요섭이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시범 케이스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주석 동지께서 제정하신 정치장교의 효용은 조선 인민 해방전쟁 때 입증되었소. 이제 이 건으로 학생들의 정치적 효용도 입증된 셈이오. 이들을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이라 이름하고 앞으로 혁명의 최전선에서 더욱 많이 활약하게 해야 합니다.”

    정시준은 반대했다. 분명히 반대했다.

    그러나 어쨌든 본인의 주장대로 정치국 위원은 수평하다.

    왜인지 몰라도 이런 일에는 주석 동지의 뜻마저 존중하지 않는 정치국 위원들에 의해, ‘정치지도원’의 첫 성과는 성대하게 기념되었다.

    여장과 횡령범은 강철군주와 같은 죄목인 인민의 적으로서 같은 혁명작두에서 처형되는 영광을 누렸다. 공화국 전체의 낟알 한 톨이라도 놓치지 않는 주석 동지의 천리안이 눈에서 빛을 뿜어내는 시준의 그림으로 월간 대혁명에 실렸음은 물론이다.

    ***

    그렇게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시준이었지만, 사람들이 슬슬 추석 얼마나 남았나 세어 보기 시작했을 무렵 시준에게도 좋은 소식이 왔다.

    “그 새끼가 짤렸다고!”

    전생에서, 업무 계속 펑크 내어 과장도 일 맡기기를 포기하게 해 놓은 채 매일 6시까지 유투브나 보다가 밖에서 술 먹고 11시에 들어와 초과근무 찍던 선배에게 그토록 일어나길 바랐던 일이 지금 중국 공사 윌리엄 암허스트에게 일어났다.

    반년 전 토마스 반스의 원고로 촉발된 중국 공사 교체 건이 도착한 것이다.

    시준은 기뻐서 날뛰었다. 토마스 반스에게 은화와 마약 쥐여 주고 기사 쓰게 한 보람이 있었다.

    새로 누가 왔는지는 몰라도, 어차피 어느 조직이건 신참은 바보다. 잘 구워삶으면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암허스트는 크게 아쉬워했지만 결국 승복했다.

    로드 암허스트가 무슨 중국 개척에 인생을 건 사람도 아니고, 지금 물러나야 6개 개항장의 개항이라는 성과만 가지고 귀환할 수 있다. 아직 그는 젊고 영국 정계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상태가 지속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암허스트가 만약 1년만 더 중국 공사를 했다면 반드시 개항장 중 한두 개는 잃었을 것이기에 그 판단은 현명했다.

    반면 새로 공사가 된 조지 토마스 스턴튼(George Thomas Staunton)과 ‘고려인민공화국 공사대리’로 같이 온 토마스 매닝(Thomas Manning)은 개떡 같은 전임자 뒤를 이은 후임자의 기분을 정확히 느꼈다.

    그 두 사람은 이름난 중국학자이며 아시아 사정과 문화에 정통하다. 그래서 윌리엄 암허스트가 요 몇 년간 어떤 개판을 쳐 놨는지도 빠른 시간 내에 파악 가능했다.

    토마스 매닝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 새끼 돌아가는 배에 폭탄이라도 설치하는 건 어떨까요?”

    “아주 매력적인 생각이야. 그 의견을 따르고 싶어지는군. 하지만 그는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와 무시할 수 없는 친분이 있어. 지금은 건드리기 힘드네.”

    스턴튼 역시 이를 갈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의 결론 자체는 암허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지 국가들이 모조리 영국을 적대하는 이상 우선은 그나마 원수 안 진 고려인민공화국을 영국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조지 스턴튼은 도광제와 협의하여 영국은 절대 반란군과 연관될 생각이 없고, 적어도 당장은 청을 도와 반란군을 진압할 여유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도광제도 좋아서 발작하며 이 휴전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쪽을 마무리 짓자 이번에는 토마스 매닝이 자기 임지, 그러니까 평양으로 갈 배편을 준비했다.

    동인도 회사는 기꺼이 편의를 봐 주었다. 그들은 ‘공사대리 각하’에 대한 예우로 거선 데이비드 스콧을 동원하여 삼화부에 매닝을 데려다 놓았다.

    그다음 항해는 이미 정해져 있다. 데이비드 스콧은 예정대로 폐선 처리를 위해 세인트헬레나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배 움직이는 비용이 얼만데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장사할 물건은 물론, 동인도 회사가 이 쾌거를 이루어 준 런던 정치인들에게 보답할 뇌물과 시준이 이강회에게 보내는 귀환 지시까지 얹어 배는 든든했다.

    데이비드 스콧의 선장 존 로크는 모자를 벗었다.

    “이 배의 마지막 항해에 저명한 학자이신 각하를 모셨던 것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입니다.”

    “뭘, 나는 그저 공사 대리일 뿐이오. 지금부터 런던으로 갈 분이 더 신분이 높겠지.”

    매닝은 겸손하게 대답하며 ‘런던으로 갈 분’ 쪽으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에 마주 대표자를 보내겠다는 것으로 보아 공화국은 영국에 우호적인 것 같았다.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신비한 아시아인의 표정은 헤아리기 어려웠으나 매닝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본래 조영수호통상장정에서 정한 공사 거류지는 런던이 아니라 캘커타였지만, 지금 이 나라는 조선이 아니다. 그리고 조약대로라면 토마스 매닝 역시 장자도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됐다.

    그래서 매닝 역시 공화국 대표의 런던행에 동의하는 보고서를 써 주었다. 이것으로 영국도 공화국에 충분히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낸 셈이다. 영국이 공식적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공화국을 승인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 주영 고려 공사 각하.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매닝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서양식 예법에 익숙한 외사통호부장 정약용 역시 마주 웃으며 토마스 매닝의 손을 잡아 주었다.

    ========================

    작가의 말

    1.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기근은 근원지인 동남아 일대를 제외하면 주로 유럽과 미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실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지요(무사히 넘어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겠군요.

    2. 바닥을 시멘트 등으로 돋우고 방충용 나무와 유리를 주재료로 집을 짓는 방식은 20세기 후반~21세기 들어 (특히 시골의) 단독주택을 짓는 데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현대는 집을 세기 단위로 쓰는 시대도 아니어서(재개발 해야죠) 굳이 철근 콘크리트가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다 싸고, 빠르고, 쥐와 벌레를 방지하는 등 여러 부가 효과도 있어서 많이 정착했죠.

    3. 최익현의 스승으로 유명한 화서 이항로의 원래 이름은 작중처럼 이광로입니다. 철종 즉위 후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의 이름을 피휘해서 개명한 거라 작중에는 초명을 그대로 쓰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시준과 비슷한 나이이겠군요.

    4. 정치지도원은 북한에서 정치장교를 이르는 다른 말입니다. 다시 말해 거기서는 두 개가 같은 직위를 지칭하나, 작중에서는 군인과 민간인을 이르는 다른 말로 분리된 셈이죠.

    5. 고려인민공화국과 북한은 물론 전혀 상관이 없지만, 작중 나온 정치지도원과 비슷하게 대학생을 각 생산단위에 넣어 영하고 MZ한 발상과 정치적 감시의 일석이조를 이루어 보자는 의도의 정책은 현존합니다. 그쪽에서는 ‘3대혁명소조’라고 하는데 작중과 비슷한 종류의 마찰도 꽤 일어납니다. 일단 현장에선 싫어할 수밖에 없지요.

    6. 조지 토마스 스턴튼은 작중 맨 처음 등장했던 매카트니 자작의 부관, 조지 레오나드 스턴튼의 아들입니다. 부자가 나란히 동양 전문가였지요. 실제 역사에서도 작중 시점과 별 차이 안 나는 1816년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중국에 방문합니다.

    윌리엄 암허스트가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이자 작중 시점에서 작년 공작 작위 받은 아서 웰즐리와 친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 역사의 암허스트는 나중에 인도와 버마에서 (작중 중국에서처럼) 잘못된 호전적 판단으로 무력 충돌을 일으켜 거하게 말아먹는데, 이때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암허스트를 보호해 준 사람 중 하나가 웰링턴 공작입니다.

    7. 가축 품종의 특색과 원시적 개량은 고대부터 있었지만(조선에도 돼지 품종이 지역별로 있었습니다), 닭의 품종 개량이 과학적으로 시도된 때는 20세기 초, 빨리 잡아도 미국 가금류 협회가 품종 표준을 발표한 19세기 후반기에 가서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때는 작중 언급된 미국 단종법(1909년 제정) 등을 통한 인간의 품종 개량이 시도된 때이기도 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