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72. 물러나는 파도(1)
‘화신이 거꾸러지니 가경이 배부르다[和珅跌倒 嘉慶吃飽)’.
청대 공공연히 돌던 이 말은 가경제 초에 이루어졌던 권신 대숙청이 어떤 목적으로 시행되었는지 말해준다.
물론 관부의 벼슬아치가 멱살 잡고 물어보면 ‘헤헤. 그건 악독한 권신 화신이 마땅한 주벌을 받아서 지금 가경 연간의 백성들이 은혜를 누린다는 말입죠.’ 하고 대답할 수 있을 테니 이로써 청나라 사람들의 유머 감각도 알 수 있는 경구라 할 것이다.
가경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관리들을 통제했다. 허나 건륭제 시절 해이해졌던 기강을 다잡았다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애초부터 목적은 기강 확립이 아니라 돈을 우려내는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모든 사람이, 심지어 가경제 자신도 이것이 강기숙정이라 믿었지만 결과로 본다면 명백하다.
부정부패로는 화신과 자웅을 겨룰 만했던 부찰복장안은 화신 숙청 때도 무사했다. 황제의 친족이니까.
지방 관리의 경우 거의 교정되지 않아 백성들의 처지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 지방 관리들을 조사하는 비용과 그들에게 우려낼 돈을 비교해 보면 수지타산이 안 맞았으니까.
그러나 가경제의 개인 자산이 전쟁 때문에 줄어들자 얘기가 달라졌다. 그는 다시 죄를 창조했다.
유리한 전쟁에서 패배해 귀한 장병의 목숨을 날려먹은 간신 부찰복장안은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원래 역사와 달리 부찰복장안도 패전의 책임을 덮어씌워 죽여 버림으로써, 가경제는 거의 화신에 도전해 볼 만한 부를 축적했던 부찰복장안의 재산마저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암허스트가 휘두른 망국팔조로 청은 가난해졌지만 가경제는 훨씬 부유해졌다.
이것이 바로 황금군주의 예술통치였다. 로스차일드의 돈놀이 따위는 기술로 보나 성과로 보나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허나 항상 미래를 내다보는 황금의 군주가 어찌 자기 혼자서만 먹으려고 그러했겠는가.
가경제가 열 번을 되살아난다 하더라도 다 쓰지도 못할 돈은 마땅히 후손의 번영을 위한 것이다.
지혜의 왕은 선친의 깊은 뜻을 이미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황후 뉴호록씨와 협의하여, 그 아들들을 친왕으로 봉하기로 약속하고 부친의 무한금고를 상속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직 계사(系嗣)가 공의로써 논의되지는 못했으나, 지극한 애통함 속에서도 궁내의 잡용을 보살피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고 쥐나 좀 같은 무리가 황장(皇莊, 황제의 개인 전답. 여기서는 황제의 사재)을 쏠아대는 일도 마땅히 막아야 한다. 지친왕이 그 지극히 높은 신분과 형제 중 장자의 직무로써 이를 맡아야 할 것이다.”
황태자로서 나라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장자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한다는 말이었다.
어디까지나 황실 내부의 일로 못박는 황후의 선언에 신하들도 일단은 침묵했다.
침묵하지 않을 만큼 절개가 있는 신하는 반드시 선황의 암살범일 것이므로 이미 죽은 지 오래이기에 역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자금성은 조용했다.
그렇게 지친왕은 일단 대금고의 주인이 되었다.
가경제가 쪼잔하다고 욕을 처먹은 이유 중 하나는 세금을 안 뗐기 때문이다.
대청의 두 자리 햇수 예산에 달하는 화신의 재산, 그리고 그에 필적하는 부찰복장안의 재산이라는 2연속 복권 당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 환원의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지혜의 왕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리는 없다. 상속세라기에는 많이 적긴 하여도 어쨌든 지친왕은 금고를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은사를 베풀었다.
어째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한 길가의 빈민들보다는 딱히 돈이 더 필요 없을 것 같은 조정 고관들에게 많이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충성스러운 신민이라면 그런 불평을 해선 안 된다.
다 높으신 분이 잘되어야 백성들도 그 긍정적 효과를 받아먹고 사는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수평도인지 뭔지 하는 빨간 놈들의 도당이 틀림없다.
은괴를 대가로 한 지친왕의 연금술이 유감없이 펼쳐졌다. 그러자 신하들의 마음속에서는 갑자기 밝은 시야와 우국충정이 연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의 화급한 사세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영길리가 침노하고 번국은 떨어져 나가며 사방팔방에서 사교의 반란군이 들고일어나는 작금의 누란지위에서, 국가의 지도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신하들은 지혜의 왕이 깨우쳐 주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감하고 왕 앞에 사죄했다. 그러고는 어서 제위에 오르기를 힘써 간하였다.
충신의 간언은 듣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현군이니까.
가경 20년(1815년) 음력 유월, 지친왕은 이제부터 시간을 칭할 새로운 이름을 신민들에게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도광(道光). 황제의 지혜는 대청의 앞날을 말 그대로 빛의 길처럼 밝힐 것이었다.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한 도광제의 웅대한 심모원려는 이미 다 완비되어 있었다. 그의 길은 우선 동쪽을 가리켰다.
***
시준은 마치 들끓는 냄비의 뚜껑을 닫는 것처럼 약간 빠르게 말했다.
“여러 정치국 위원 동지들은 본인과 동일하게 모두 수평한 인민의 위임을 받았소. 따라서 동지들께서 처결하신 대소사에 대해서 내 자세히 묻거나 하지는 않으리다. 나는 여러분의 윗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고려인민공화국 제1기 제103차 국무당 정치국 회의에서, 시준의 모두발언은 위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주석 동지가 없어져, 해도 달도 별도 사라진 컴컴한 공화국에서 자기들이 어떤 견마지로를 다했는지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저쪽에서 무슨 모형 같은 것도 준비한 듯한 조제프 푸셰는 절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점진적 권력 이양을 목표로 하는 시준의 정책상 이 시점부터는 하나둘씩 손을 떼어야 했다.
그래서 시준은 푸셰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급한 소식들만 동지들과 함께 논의하도록 합시다. 우선……. 중국에서 들어온 게 있다고요?”
“예. 주석 동지.”
평양에 돌아오자마자 그간 쌓인 업무를 급히 정리해야 했던 정약용이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경에서는 일전 주석 동지께서 황제에게 전하신 간찰의 답을 보내 왔소이다.”
정약용은 주어와 동사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이는 외교 책임자로서 기이한 일이었다.
조(詔)라거나 칙(勅)이라는 말은 물론 내리다[賜], 가르치다[喩], (임금이) 뜻하다[旨] 등등 황제가 다른 인간에게 쓸 수 있는 모든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이는 반동이 머리 위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혁명적 태도일 수도 있지만, 시준이 앞서 지친왕을 찔러 얻어내려 했던 ‘간보기’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시준은 과거 지친왕에게 연탄과 칠보 궤짝 등등 여러 선물을 보냈다. 시준이 중국 가 있을 동안 청이 공화국의 태도를 가늠하느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끔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순수한 뜻을 오해한 지친왕이 사상 초유의 패륜 연성진을 그리기는 했으나 그게 시준의 탓은 아니다.
어쨌든 그때 시준이 보낸 간찰의 서식은 소신교위가 왕에게 바치는 게 아니라 ‘친구’인 지친왕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의 형식이었다.
원래는 전쟁을 각오해야 할 일이다. 시준이 (영국 믿고) 화전양면전술을 구사하며 일종의 간을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젠 도광제가 된 지친왕의 맛은, 시준이 만족할 정도로는 짭짤하게 돌아왔다.
“황제는 성경 장군을 통해 자문(외교문서)을 보낸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자(字)를 써서 천진의 우리 배에 주어 보냈소이다. 이는 그가 주석 동지의 의중을 헤아렸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지친왕은 시준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고 공화국이 황제 앞에 엎드릴 수 없는 입장 또한 감안하고 있었다.
황제 명의의 공식 외교문서는 아니지만 – 그건 청 황조보고 자살하라는 소리다 – 애신각라 면녕의 개인 명의로 ‘정시준의 서신을 받았음’이라는 뜻을 우회 표시한 것이 그 증거다.
이 정도만 되어도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그 전례가 없을 만큼 세련된 근대 외교의 적응이다.
도광제가 그간 영국에 수도 없이 얻어맞고 수치를 당한 경험은 큰 도움이 되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이보다 어울리는 경우도 달리 없었으리라.
도광제가 공화국과 버성기지 않고 싶다는 뜻은 다른 ‘답례품’에서 더 강력하게 드러났다.
정약용이 주저하며 덧붙였다.
“여러 물목이 있지만 그것들은 일전 보내신 물건의 값을 치른다는 정도의 대단찮은 것들이고…… 예전 심양으로 달아났던 옛 훈련대장 이득제와 황해 수사 오문상 등 이십여 명의 목이 있는 것이 괴이쩍어 삼가 주석 동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이다.”
극히 경직적으로 통제된 조선과 청의 외교 사이에서 가장 빈발하였던 사안 중 하나를 꼽아 보자면 간민, 그러니까 범법자나 도망자의 수색 및 처리다.
이럴 때는 가능하다면 생포해 돌려보내고 상대국에 사법 처리를 맡기는 것이 관례였다. 전직 조선국 예조 참판이었던 정약용이 여기의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정약용은 기뻐하는 대신 근심하는 것이다.
생포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을 터. 이는 도광제가 공화국 상대로 그저 호구 노릇만 할 생각까지는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시준으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도광제의 심정이 보일 것 같았다.
‘이 정도까지 양보했으니 제발 건드리지 말아 달라?’
이쪽도 좋다. 압록강 전선에서 청의 대군과 맞부딪치는 악몽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준은 그저 온건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의 인생에는 공무원 경력만큼이나 긴 평안도 신디케이트의 지분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지분은 실시간으로 확장 중이었다.
‘뭔가 좀 미심쩍은데……. 너무 저자세인 거 아냐? 이 새끼 뭔가 쫄리는 거 있나? 더 뽑아먹을 게 없을까?’
그 모리배의 감은 정확했다.
도광제는 시준이 자신의 패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는 의심 중이었다. 그가 부친의 가마에 연탄을 집어넣은 계기가 시준의 ‘은근한 권유’이니 그런 의심은 자연스럽다.
허나 시준은 그 사실을 모른다. 시준이 알았다면 벌써 도광제만을 위한 특집 월간 대혁명이 북경에 송달되었을 것이다. 표지에 황위를 계승하는 지친왕의 아름다운 모습이 풀 컬러로 찍혀 있음은 물론이다.
‘이게 전 중국에 좍 퍼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네가 죽인 애비 유산을 얼마간 갈라서 성의를 보여라. 같이 좀 먹고살자.’
그런 역사에 남을 저질 협박 역시 안타깝게도 불가능했다.
시준은 일단 도광제가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화전양면전술로서는 성공한 축에 든다. 그리고 어차피 중화 혁명당과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공화국으로서는 이 이상 청이 더 친해 보자고 해도 곤란하다. 하긴 청도 당분간 공화국을 외면하고 싶을 테니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
중국 쪽 논의가 그렇게 끝나자, 일본 담당 외사통호부 부부장 임상옥이 손을 들었다.
“장주(조슈)의 매매는 순탄합니다. ‘약재’는 무탈하게 쌀과 콩으로 바꿔 오고 있습니다. 다만, 장주에서는 우리가 판 총을 살마(사쓰마)에 되파는 낌새가 보였습니다.”
사쓰마는 지금 영국 때문에 사활을 걸고 군비 확충 중이니 그럴 만도 하다. 류큐를 잃으면 사쓰마도 망한다.
시준은 류큐의 설탕에 대해 조금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의 공화국이 바깥의 물산이나 영토를 탐낼 계제는 아니다.
“알겠소. 장주 사람들이 총을 어떻게 쓰건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그저 내년에는 흉년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려.”
“아, 그것에 관해서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정치국 후보위원 주제에 주석 동지와 너무 오래 얘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의 눈총이 몇 개 쏟아지자 임상옥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시준은 발언을 허락했다.
“말씀해 보시오.”
“지금 영길리 가 있는 위씨(윌리엄 자딘)를 통해 조와(자바)와 매매하던 약재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곳에는 영길리에서 온 래플스라는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보낸 인편으로 희한한 소식이 들어왔다 합니다. 이제 불랑국이 반쯤 망했다 보니 화란(네덜란드) 사람들도 기를 좀 펴서 장기(나가사키)로도 배가 왔기로 저도 어떻게 얻어볼 수 있었지요.”
엘바 섬 얘기까지는 공화국에서도 알고 있다. 프랑스가 대충 망했다는 소리(사실)에 눈살을 찌푸리던 푸셰가 끼어들어 아는 척을 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부총독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스로군. 군재가 있고 민첩한 동남아시아의 전문가지. 허나 작년쯤 영국과 네덜란드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가르는 바람에 처지가 애매해져서 요즘은 여기저기 손 벌리러 뛰어다니고 있을 텐데.”
“그런가 보오이다. 그런데 이자가 어느 날 큰 포 놓는 소리를 듣고 나가 보았더니, 짐작했던 적도나 해적은 없고 그저 물기 없는 하늘만 우레처럼 진동했다 하오이다. 주석 동지께서 중국에 가셨던 그때쯤이었습니다.”
시준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들어맞았다.
“알아본 바 그건 바로 산이 통째로 쪼개지며 불기둥이 솟구치는 괴변이었다 합니다. 연기는 보이는 하늘 전부를 덮고 산이 있는 큰 섬은 죄 흐르는 돌과 쌓이는 유황에 덮여 쥐새끼 하나 안 남았다지요. 그 소리가 무려 육백 마일—”
아직 불경함을 완전히 못 버린 임상옥은, 옆에서 푸셰가 또 두꺼운 책을 집어 들자 얼른 말을 바꿨다.
“—이 아니고 일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들려올 정도였다 하니 가히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하겠습니다. 비록 반동의 글이긴 하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책에 천재지변은 곧 농사와 관계된다 하므로 정치국 앞에 말씀 올립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처럼 과학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그런 반동의 재이설을 가볍게 논파하려 했다.
하늘의 진노라니,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전혀 혁명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준이 그 말을 진지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시준도 탐보라 화산이라는 이름은 모른다.
그러나 시준이 전생을 마쳤을 때는 기후 변화가 세계 초미의 관심사이던 시절이었다.
화산 폭발이 야기하는 일광 차단, 그에 이어지는 대규모 식량 위기는 인간이 뿜어내는 산업의 화산과 흔히 비교되곤 했다.
그래서 일전 시준이 사임 생각할 때 화산과 냉해가 머릿속에 한 번 스친 것이다. 그때 시준이 생각한 화산은 백두산 정도였지만.
허나 이세계 용사의 지식은 거기까지. 일반인인 시준이 탐보라 화산 자체의 구체적인 영향력까지 자세히 알 리는 없다.
결과적으로 시준의 대답은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 두자’ 정도가 되었다.
“으음……. 실로 큰일이구려. 연기는 위로 끝없이 솟구친 다음에 널리 퍼지지요. 다행히 지금은 하늘에 그런 것이 보이지 않으나 내년쯤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조차 연기가 해를 가릴 수도 있소. 냉해가 올 수도 있으니 창고를 더욱 든든히 채워 놔야 하겠소.”
임상옥의 비과학적 태도를 비웃던 모든 사람들은 그제야 화산 폭발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임상옥은 이 차별 대우가 좀 억울하기까지 했다.
정치국 회의가 종료되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국무당을 나선 시준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주석이 또 북두의 권능으로 천문을 조종하여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을 위한 원대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여겼으나 시준의 심상은 한 가지뿐이었다.
‘화산까지 터진 이상 진짜 반드시 튀어야겠다.’
그러려면 이강회가 런던에서 돈을 싸들고 와야 한다. 시준은 아직 평양에 있는 토마스 반스를 돌려보내는 김에 다시 배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워털루 전투가 끝났다면, 볼 것 없이 채권 팔아치우고 돌아오라 할 생각이었다. 시준은 회의장에 복귀하지 않은 채 그대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
당연하지만 이강회와 윌리엄 자딘이 일일이 시준의 지시를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채권 처분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시준에게 보장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자율권을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주석의 예지는 더할 나위 없이 증명되었다. 틀림없이 패왕은 몰락했고 채권은 급등했다.
신이 이미 지상에 계신데, 어찌하여 한갓 인간의 판단을 따를 것인가?
두 사람은 왕 첸 약방에서 벌어들이는 얼마 안 되는 수입까지 다 털어 넣고 있는 참이었다. 채권 가격은 과연 끝도 모르고 올랐다.
아직 믿음이 약간 부족한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그, 당신들이 사니까 나도 같이 사기는 했는데 이거 정말 정시준의 뜻이 맞지요? 이것도 그가 예견한 것이겠지요?”
어느새 뭔가 위험한 인간이 되어 있는 것 같은 윌리엄 자딘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로스차일드 씨. 우리는 다른 연락이 올 때까지 처음의 지시를 고수하면 그만입니다. 나의 친구 시준이 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사는 겁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아직 의심하십니까?”
“아니, 멀다 보니까 제때 여기 지시를 못 전할 수도 있잖소.”
“당신은 아직도 시간과 거리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계시는군요! 정시준에게 시간과 공간은 전혀 관계없는 문제입니다. 그는 이미 시간을 앞서서 나폴레옹의 탈출을 예견했고, 공간을 앞서서 우리를 여기 파견했습니다. 부디 앞뒤와 전후를 초월해서 바라보십시오!”
개소리가 정교해진다고 해서 그 개소리가 옳은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화자가 미쳐가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될 수 있다.
임칙서의 예에서 보듯 이는 지능과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로스차일드 역시 그 말에 미혹되었다.
지금, 바로 지금도 실제로 가격이 오르고 있지 않은가.
냉철한 사람이 본다면 지금 채권 시장의 큰손 두 세력이 미친 듯이 매수를 하니 값이 오르는 거야 당연하다는 지적을 할 것이다.
21세기에 매일같이 증명되듯, 회사의 가치 따윈 주가와 아무 상관없다.
‘큰손’이 가리키기만 한다면 그 어떤 부실기업도 다음날로 상한가를 친다. 대놓고 하면 주가 조작이 되므로 SNS 같은 데서 어떤 강아지가 귀엽다는 식으로 트집 안 잡히게 흘리는 것이 부자의 비법이다.
그건 21세기 뉴욕뿐만 아니라 19세기 런던도 마찬가지다. 덧붙이자면 이 시대에는 좀 대놓고 해도 된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멍청이들은 왕 첸과 로스차일드를 따라 지각없이 매수할 테니 채권 가격이 오르겠지. 그러면 내가 사 둬야겠다.’
물론 런던 증권거래소 회원 중에는 멍청이가 없다.
하지만 회원 모두가 동일하게 현명한 판단을 하는 바람에 매수는 계속되었고, 채권 값은 정시준의 이름값과 함께 치솟았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그나마 가장 정상인에 가까울 네이선 로스차일드조차 이 사태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냉정한 사람은 주식을 하지 않고, 주식을 했다면 더 이상 냉정할 수 없는 법이다.
거기에 더하여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머릿속에서는 정신적 방어기제가 작동되고 있었다.
이게 틀렸다면 영국 로스차일드는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무너진다고 하면 과장이지만 뼈아픈 손해가 되는 것은 분명했다.
이건 맞아야 했다. 정시준은 옳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설마 정시준이 마지막 예언자는 아니겠지만, 유대 민족의 부흥을 위해 손 내민 의인에게는 역시 야훼의 은총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네이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매수에 참여했다.
주식이든 뭐든 값이 급격하게 오르면, 초반에 사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일찌감치 팔아치우는 편이 통상 이득이다. 익절은 항상 옳다는 격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장 건강이 악화되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팔아버린 여러 투자자들 때문에 약간의 가격 하락도 있었지만, 왕 첸 패밀리와 로스차일드 패밀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채권을 또 매수했다.
따라서 가격은 다시 올랐다.
이미 채권은 액면가의 1.5배 이상 치솟았다. 최저가와 비교하면 30배다.
이들의 간담은 마치 강철로 이루어진 듯했다.
이 꼴을 보고 있던 모든 영국 신사들의 머리에는 그들의 교양에 어울리는 한 가지 사적이 떠올랐다.
영국에는, 마치 지금 저 무모한 이방인들을 방불케 하는 위대한 왕이 있었다.
어떤 공포에도 굴복하기 거부하고 정면으로 맞서 쳐부수던 리처드의 대담함은 그야말로 백수의 왕 사자와 같았다.
지금까지는 증권거래소 회원 중 누구도 동양인이나 유대인 따위가 리처드에 비교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오늘 그들은 그 생각을 바꿔야 했다.
후줄근한 모자의 신사 하나가 멍하니 이강회를 바라보며 탄식을 흘렸다.
“야수의 심장[Lion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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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동아시아의 엄근진한 조정 분위기와 달리, 중국이건 조선이건 군신간에 뇌물이 오가는 일은 흔했습니다. 권력의 중추가 그곳인데 뇌물이 없을 수가 없지요. 기록상 ‘존경하여 바쳤다’ ‘은혜로 하사했다’ 등으로 표현해서 눈에 안 띌 뿐입니다.
사정이 급하면 아주 노골적으로 뿌리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명나라 경태제가 (선황이자 형인 정통제의 자식 대신)자기 자식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신하들에게 엄청난 은을 뿌려 통과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결국엔 다들 아시다시피 탈문의 변으로 나가리가 되지만...
2.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스는 작중 초반 아주 잠깐 언급되었죠. 이 시점에는 자바 섬 인근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가장 가까이서 탐보라 화산 폭발을 기록한 사람 중 하나이며, 나중에 돌아와서 싱가포르를 개척합니다.
3. 라이온하트는 리처드의 별명이죠. 보통은 사자심왕(獅子心王)이라 번역하고 작중 번역은 자의적 의역입니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더 직관적인 ‘사자왕’ 리처드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목적한 뜻은 비슷하나 굳이 말하자면 원어는 사자처럼 ‘강하다’기 보다는 사자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용감하다’ 쪽입니다.
실제로 리처드는 어느 쪽도 위화감 없는 전사였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 직업이 왕이었다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