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14화 (214/284)

214화

70. 돈이 복사가 된다고(2)

물론 시준은 이강회가 로스차일드를 상대로 이런 블러핑을 날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의 세가 21세기까지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들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에 상장조차 안 되어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영국 은행을 유학 중에 이용해 본 시준도 로스차일드 같은 건 볼 일이 없었다.

허나 유럽에 동료를 보내면서 걱정이 안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시준은 전생에 역사와 안 친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머리를 쥐어짰다.

상당한 자기 학대 끝에 시준은 몇 가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대부분 짜깁기 대량생산 유투브 채널에서도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시준은 자기가 아는 유럽의 현 정세, 그리고 그것에서 추론한 척하고 베낀 미래의 대략적 정세를 이강회에게 일러주었다.

대강 ‘지금은 이러이러하니, 그로 미루어 보건대 앞으로는 아마…….’ 하는 식이었다.

아무리 역사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시준이라도, 유럽에서 겉핥기 유학이나마 했던 만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그 전후 사정까지 모를 리는 없다. 유대인이 예전부터 금융 자본가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도 안다(왜 그랬는지까지는 모른다).

그래서 이강회 역시 유대인이 지금 나라가 없으나, 2천 년 넘게 억척스레 유지한 그 근성과 자금으로 끝내 나중에는 나라를 세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들은 상태였다.

다만 여기에서 언제나 공화국이 그렇듯 사소한 오해가 있었다.

자기가 미래인이라고 밝힐 수는 없다. 그게 비밀이어서가 아니라, 그랬다간 주위 사람들이 주석을 정신 질환자로 판정할 테니까.

그래서 시준은 마치 유대인들이 국가 건설 목적으로 자금을 모은다는 것처럼 얘기했다.

인과관계를 초자연적 현상 없이 설명하려면 그렇게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 얘기야 솔직히 지나가는 수준이어서 대충 얘기하고 넘어간 탓도 컸다.

시준이 강조한 것은 당분간 지속될 빈 체제와 식민지 성애자 나폴레옹 3세, 그 뒤 프로이센의 굴기 등이었지 (시준의 기준에서) 아시아 정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유대인 이슈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강회는 시준의 이야기 전부를 한 글자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박지원이 청나라 선비들과 몰래 나눈 필담을 전부 외워 책으로 내는 만행을 벌인 것처럼, 이것이 조선 선비의 암기력이다.

그래서 이강회는 자딘에게 로스차일드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듣자마자 이 대화를 구상할 수 있었다.

이강회는 자신 있게 말했다.

“주석 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활(豪猾, 교활한 권세가)의 무리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동지! 그 폭군이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부정하게 핍박하는 여러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자네들은 곧 천주(天主)에게서 명 받았다는 그 약속의 땅에 돌아갈 수 있다.”

이강회는 유대인들의 갈망이 어느 정도인지 사실 모른다. 그래서 부담 없이 정시준을 열혈 시오니스트로 변신시켜 버렸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비명을 지를 것처럼 보였다.

“나, 나폴레옹의 패배도 그렇고. 당신들이 그런 미래의 일을 어떻게 장담한단 말인가!”

말은 그랬지만, 제발 그것을 부정해 달라는 간구가 얼굴에 드러났다.

이강회는 그것을 만족시켜 주기로 했다.

“이 믿음이 적은 자여. 길리시단의 가르침은 자네들이 본류(本流)라지. 너희들의 주(Lord)가 그렇게 약속하였고, 먼 나라의 친구가 다시 그것이 옳다고 격려하거늘 어찌하여 의심하는가?”

***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이런 껍데기 같은 말에 흔들린다고 해서, 그러고도 네가 일류의 금융가냐고 비웃어서는 안 된다.

2천여 년간 유대인이 당해 온 서러움은 잠시 접어 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게 나라도 없는 게 까불어!’

‘아니야! 야훼께서 약속하셨어!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내려주실 거라구!’

‘뭐어? 바보야. 젖과 꿀이 아니라 투르크인과 아라비아인의 오줌이나 흐르겠지! 그것도 모르냐?’

그 말을 듣고 책상에 엎드려 우는 유대인에게는 칼날과 총탄과 독가스가 날아들었다.

유대인을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간 재림하지 않았다. 유럽인은 아마 재림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계속해서 유대인을 증오하고 갈취하고 살해할 핑계가 유지될 테니까.

하지만 이 동방의 신비한 약술사는 방금 그것을 부정했다.

클럽을 나온 로스차일드는 생각에 잠긴 채 지팡이로 땅을 툭툭 쳤다.

그의 고용인과 마부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얘기가 잘 안 되셨습니까?”

“아니다. 가자.”

어차피 오늘 한 얘기는 사업과는 관계없다.

두 투자자가 친목을 위해 만나 교우를 다진 것뿐이고, 요약하자면 이강회의 말도 그냥 덕담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승패가 확정되는 그때 합심하여 돈을 쓸어오자는 얘기 자체는 이미 윌리엄 자딘의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강회가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우는 데 협조할 테니 고려인민공화국에 투자를’ 어쩌고 등으로 허황된 소리를 했다면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냉철한 사업가인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그런 싸구려 감동으로 자신의 진로를 바꾸지 않는다. 정시준이 동방에서 이름 좀 날린다 하더라도 그에게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 줄 힘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이강회는 아무것도 새로 요구하지 않았다. 당장의 동업도 좋지만 그보다는 ‘모처럼 만났는데 일 말고 다른 얘기나 하자’는 투로 한담을 꺼냈을 뿐이다.

그 사실은 네이선 로스차일드에게 안심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2천 년간 그 어떤 유럽인도 유대인에게 선사하기 거부한 감정이다.

유럽의 왕후장상은 돈이 필요할 때만 유대인을 대접했다. 그러면서도 샤일록에게 돈을 빌려야 했던 안토니오처럼 은근히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뜻대로 안 되면 그냥 강도처럼 찔러 죽이거나 이주시키고 빼앗아 갔다.

그러나 저자들은 아무 조건 없는 호의를 주었다.

아마도 바빌론 유수 이후 인류 최초로.

물론 호의뿐이지 다른 무언가가 따라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그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다. 돈이라면 그에게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있다.

외국에 보낸 대표단에게 약방 장사나 시켜야 할 정도로 궁핍하면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그 당당함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모두가 고귀해진 단계. 왕의 품격을 가진 자[君子]인가.’

돈이 걸려 있지 않기에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마음 놓고 감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는 마차 안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성을 다시 채워야 할 시간이다.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정시준의 수단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방의 유력자와 우호를 쌓고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으니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성과다.’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네이선은 망상의 해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차가운 현재의 바다에 닻을 던졌다.

‘우선 지금은 그자가 말한 대로…… 큰 뜻을 위한 돈을 벌어 두어야겠군.’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유력한 정치인에게 그러했듯 정시준과도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네이선은 일단 거기까지만 생각해 두기로 했다.

***

현실적으로 현재의 고려인민공화국에게는 유럽 역사에 영향을 끼칠 만한 역량이 없다.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심경도 인상적인 경험이었을 뿐, 그가 무슨 지금 당장 떨치고 일어나 유대 혁명을 일으킬 원동력까지는 되지 못했다.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았으니 대응이 바뀔 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치는 나폴레옹에게도 적용되었다.

그해 6월, 벨기에 부근 워털루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공화국과 정시준이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굳이 하나 말해 본다면 영국군의 사기를 약간 올려 준 정도일 것이다.

“저 ‘서쪽의 황제’를 오늘 알렉산드르에게서 빼앗아 오도록 하자!”

제2기병여단장 윌리엄 폰손비(William Ponsonby) 경은 지위가 부여하는 책임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점잖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병사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폰손비가 바라는 대로 사납게 외쳐대었다.

“잉글랜드 사내의 맛을 보면 타타르족 따위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침대에서 평화 조약을 애걸하도록 만들어 주자!”

이 정도는 온건한 편이었다. 나폴레옹 황제에 대한 오만가지 성적 조롱이 경쟁적으로 뒤따랐다. 격분이 군대로 전환될 수 있다면 나폴레옹은 이 순간 수양제보다 우월해졌다.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했다고 판단되자 폰손비 경은 그 끔찍한 고함을 중단시키고 전투에 임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프랑스 제3창기병연대, 제4창기병연대 및 흉갑기병사단은 역사대로 연합군에게 돌격했으며 연합군은 아까 한 장담이 무색하게도 괴멸에 몰렸다. 어째 원래 역사보다 더 창질에 감정이 실린 것도 같았다.

폰손비 여단장 역시, 프랑스 기병이 내민 창 앞에 수치스럽게도 군도를 내던지고 항복을 청해야 했다. 눈치 없는 스코츠 그레이(Scots Grays) 연대가 소리소리 지르며 그를 구하러 달려오는 바람에 곧바로 찔려 죽었지만.

전쟁이란 게 다 그렇듯, 1815년의 워털루도 예리한 칼끝의 아슬아슬한 대결이라기보다는 눈 가리고 마구 휘두르는 몽둥이끼리의 난장판이었다.

방향치의 삽질, 오해되고 뒤엉키는 명령, 아직은 무전기가 없어서였다고 핑계 대는 것이 가능한 통한의 불찰이 양군 가리지 않고 빈발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잠깐잠깐 드물게 빛나던 용맹한 희생과 영웅적인 분투 끝에 전투는 끝났다.

나폴레옹은 패배했다. 그의 제국은 두 번째로 사라졌다.

그러나 다른 자들의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전장 근처를 어정거리던 수상한 사람들 몇몇이 곧 재빨리 영불 해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로스차일드의 정보망이 잘 알려져 있다는 의미는, 뒤집어 말하면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도 쉽다는 의미다.

그리고 원래 역사와 달리 로스차일드는 이강회를 만났다. 이 만남은 화이트스 클럽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으나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그 ‘왕 첸’은 윌리엄 자딘을 내세워 영국 국채를 매입했던 반왕 정시준의 동료였다.

주식은 로스차일드나 정시준만 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웬 뜨내기가 갑자기 프랑스 장교의 복장을 하고 나타나, 부르봉 왕가가 복권되었다며 고래고래 고함쳐서 주가를 조작했던 대사기 사건이 바로 작년이다(1년만 기다렸어도 그들이 사기 혐의로 체포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증권거래소의 신사들 중 특히 음험한 몇몇이 모여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유대인 놈은 유럽 전역에 간첩을 심어 두고 있소. 군인들이 보고서를 쓸 시간이면, 그 정보는 먼저 그에게 열 번은 닿고도 남을 거요.”

“그러면 그자는 채권 가격을 사실상 마음대로 기만할 수 있겠군. 아마 화이트스 클럽에서 그 정시준의 부하들과도 동맹했겠지? 그자들이 먼저 채권을 대량으로 매입하는 바람에 그 동맹 없이는 가격을 많이 떨어뜨리지 못할 테니.”

“그것을 어떻게 막으면 좋을까?”

“간단해. 우리가 그자의 염탐꾼을 중간에 낚아채자고.”

“그 교활한 유대인이 가진 길은 하나가 아니야. 다 막기는 힘들어.”

“맞아. 하지만 단 한 군데에서만은 경로를 예측할 수 있지.”

이번의 일은 속도가 생명. 반드시 벨기에와 잉글랜드를 최단으로 가로지르는 통상 항행로를 쓸 것이다.

물론 로스차일드는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제물포에 비견될 덴마크 해안의 갯벌에서 사람이 직접 보트를 끌어대며 밀수를 한 근성의 혈족이다.

허나 이번에는 밀수가 아니므로 그렇게 우회해서 사람 없는 곳으로 상륙할 이유가 없다. 시간만 더 걸릴 뿐이다.

로스차일드의 정보꾼이 누구이건 간에 그들이 상륙할 곳은 가장 빠른 마부와 접선할 수 있는 대도시, 런던이다.

로스차일드만은 못해도 이 증권거래소 회원들 또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한 자들이다.

곧 누군가는 입항과 선박 정보를 알아보고, 누군가는 솜씨 좋은 ‘해결사’들을 고용했으며 누군가는 경찰이나 항구 관리들의 눈과 입을 막았다.

로스차일드가 고용한 사람들은 ‘해결사’들의 잔혹한 린치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충성심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아는 게 없어서였다.

고문하다 지친 해결사들은 정보꾼을 죽이고 짐을 뒤졌지만 나온 것은 이디시어 암호로 된 편지뿐이었다.

런던의 신사들도 그것을 읽을 수는 없었다. 유대인 암호해석가를 찾기에는 시간도 모자랐다. 아쉽긴 했지만, 로스차일드가 제때 소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초조함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비둘기로 보고되는 평소 동향은 받아 보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승패 결과는 오로지 그만 알아야 했기에 인편으로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전서구란 게 원래 열 마리 보내서 한 마리 도착하면 된다는 식으로 날려 보내는 물건이라 비밀에는 쓰기 적합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다른 유대인 협조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는 증권거래소에 갈 수도 없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윌리엄 자딘, 그리고 중요한 날이라 직접 온 – 자딘이 배신하는지 감시하기 위한 – 이강회 및 문순득과 거래소 밖에서 회동했다.

“무슨 사고가 난 것 같소. 이대로라면 국채로 큰 이익을 내는 것은 어렵게 되었소이다. 전쟁 보고서를 최대한 빨리 입수해서…….”

이강회는 혀를 찼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모르나 본데, 지금 그리 대책 없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전황이 아니오. 프랑스군의 상태가 좀 안 좋다 하더라도 영국인, 프로이센인, 작센인 등등을 되는대로 긁어모아 만든 연합군은 더 안 좋소! 그 전부가 이미 나폴레옹에게 무릎 꿇었던 패배자들이란 말이외다. 분명 낮까지는 프랑스군이 고위 장교를 몇이나 죽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어요!”

문순득은 탄식했다. 그러나 그 탄식은 네이선 로스차일드에게 동감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믿음이 적은 자여…….”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돌아버리기 직전, 이강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자잘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뭐요?”

“지금 말할 것은 단 세 가지다.”

이강회는 그러면서 손등을 로스차일드 쪽으로 향한 채 손가락을 폈다. 마치 유럽인 같은 제스처였다.

“주석 동지의 광명영도(光明領導)는 태양과 같아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이것이 제 일이다.”

엄지손가락 하나를 접은 이강회는 다시 말했다.

“주석 동지께서는 옛 사적과 빛나는 예지에 비추어 패왕 나파륜이 반드시 오늘 패배하리라 예견하셨다. 이것이 제 이다.”

이강회는 다시 검지를 접었다. 중지만 남긴 이강회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까닥였다. 절대 고의는 아니고 서양 풍습을 잘 몰라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달려가서 예전 그대의 말대로 어음을 팔아 값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제 삼이다. 이게 끝이다. 다른 군소리는 모두 쓸데가 없다.”

네이선은 궐련을 입에 문 채 가운뎃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이강회 앞에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 나는 그런 도박에 찬성할 수…….”

“마음대로 하라. 우리는 간다. 그대가 만약 따라오지 않는다면 뒤에는 후회해도 늦을 뿐이다.”

이 세계 유수의 대도시 중에서도 핵심인 ‘진정한 런던’, 즉 시티오브런던의 음침한 거리에서 이강회의 도포 자락이 휘날렸다.

“핍박의 틈바구니에서 2천 년이나 교의를 지켰다는 자들이 어찌 이리 의심이 많은가.”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멀어지는 세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수행원들이 주인을 대신하여 공화국 패거리에게 화를 내는 것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자신도 잊고 있을 정도로 숨기고 있었으나 유대 민족의 궁극적 목표는 이스라엘의 재건이다.

그것은 신이 그 선민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다시 말해 망상과 허황된 전설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신봉하지 않는 유대인은 없다.

마치 지금 저들이 반왕 정시준을 무조건적으로 신앙하는 것처럼.

불합리를 현실에 체현하려 하는 자가, 합리를 그 수단으로 삼을 것인가?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왕 첸 패밀리’가 윌리엄 자딘과 함께 들어와, (거느린 고용인이 많지 않아서) 조금씩 채권을 매도할 때까지만 해도 신사들은 괴이쩍은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네이선이 들어서서 그들의 ‘비밀 눈짓’으로 신호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막대한 사용인들이 일제히 영국 채권을 팔자, 이제 회원들은 자기가 사태를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경로로 소식을 입수했는가?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어떻게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 네이선 로스차일드와 ‘왕 첸’은 자신 있게 채권을 팔아대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곧 나폴레옹의 승리와 영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거품을 물고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날 영국 전쟁국채는 액면가의 5%까지 떨어졌다. 이 사나이의 시장 런던 증권거래소는 나약한 겁쟁이들의 서킷 브레이커 따윈 취급하지 않는다. 이기면 돈방석이요 지면 템즈강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날 거짓말처럼 거의 모두 매수되었다.

사들인 자는 물론 네이선 로스차일드와 윌리엄 자딘이었다.

아직 웰링턴의 승전 보고서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채가 매수된 시점에서 증권거래소 회원은 전쟁의 향방을 깨달았다.

그들은 미친 듯이 로스차일드의 ‘다른 경로’를 찾아보았다. 자기 패거리 중 누가 ‘실수’했는지 밝혀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번엔 당했지만 다음에는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건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로스차일드의 연락망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회원들은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반왕의 예언이 맞았다는 말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왜, 이참에  델포이 신탁이라도 받아 오지? 어차피 전쟁은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야. 절반을 찍어 맞췄을 뿐이라고!’

‘아니. 로스차일드가 없었다면 그 말도 옳아. 하지만 네이선이 설마 너보다 멍청해서 그것을 믿고 그 막대한 돈을 투자했겠냐? 분명 그의 예언에는 강퍅하고 깐깐한 유대인도 돌아서게 할 뭔가가 있는 거야!’

19세기는 이성이 크게 발달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종 강령술이나 영매, 오컬트가 판을 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부 호기심을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네이선 로스차일드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로스차일드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나는 정시준의 대리인을 따라 했을 뿐이다. 유력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자를 참고해서 투자하는 것은 기본 아닌가.”

잘 둘러대면서도 동시에 다른 증권거래소 회원의 행태까지 비꼬는 말이었다. 논리적 귀결로 회원들은 다시 윌리엄 자딘에게 질문하였으나, 자딘의 옆에 있던 이강회의 대답은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모든 것은 우리 주석 동지께서 미리 다 예견하신 바다.”

베이커 스트리트에는 이제 병의 치료보다 다른 용건으로 방문하는 손님이 늘게 되었다.

신사 체면상 거기까지 와서 뭐 하나라도 사 가지 않을 리는 없었기에, 곧 ‘공화국 영국 견문사’의 재정은 꽤나 풍족해졌다. 이강회도 사람다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다른 얘기지만, 영국 국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당연히 로드 암허스트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기 돈이 복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없었다. 모르니까.

게다가 동양의 앞선 양자물리학에 전율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암허스트가 역사에 무지한 것이 탈이었다. 애초에 정시준의 출신 국가가 어디인가.

조선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유례를 찾기 힘든 전격의 제왕 최속군주의 나라이며, 그의 좌우를 호종하던 양자 거품의 군대 조선군의 나라다.

만약 선조에게 지금과 같은 호조건, 그러니까 도망칠 광대한 대륙이 있고 쫓는 군대는 다 모아도 천여 명에 불과한 조건이 갖추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는 한쪽 발로 뛰어도 적이 자신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중국 내전이 형태를 갖춰 가는 동안, 암허스트는 도저히 시준을 잡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영국군은 실수를 하게 되었다.

========================

작가의 말

1. 윌리엄 폰손비의 전사와 그 과정 등, 워털루 전투의 경과는 역사와 같습니다. 이때 프랑스군이 휘청거렸던 것은 사실이나, 작중 로스차일드의 말처럼 동맹군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았기 때문에 당대인이 확신을 가지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웰링턴은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고요.

2. 서킷 브레이커는 미국에서 1987년, 한국에서는 1998년 최초 도입됩니다. 의외로 늦죠.

3. 중지를 내밀어 모욕을 표시하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던 제스처입니다. 또한 별도로, 영국에서는 그에 더해 중지와 검지로 v자를 그리는 것도 모욕이라고 하며 이는 장궁 사수의 손가락을 자른 백년전쟁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이쪽은 근거가 빈약해서 그런 얘기도 있다는 정도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