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70. 돈이 복사가 된다고(1)
저녁 늦게야 베이커 스트리트로 돌아온 이강회는 문순득의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군부대에서 선물로 받은 권총을 빙글빙글 돌렸다.
앞으로 나올 시준의 소설을 공급하기로 하고 얻어온 것이었다.
입으로는 대(對)프랑스, 대러시아 정훈 교재 및 병사들 사기 진작용이니 뭐니 하였지만 몸은 솔직한 것을 이강회도 알기에, 고위 장교들에게는 특별히 풀컬러 신작을 먼저 (비싸게) 주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기뻐하며 이강회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문순득은 제발 실내에서 총 휘두르지 말라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나 이강회는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호, 그렇소? 그자가 주석 동지께서 말씀하신 그 어험(어음. 여기서는 채권) 사는 일에 관심하였다고?”
“예. 부장 동지를 찾는 것 같기에, 지금 없다고 둘러대었지요.”
어차피 그 일은 문순득이 자딘과 진행하는 것이어서 이강회는 불러 봐야 피상적인 사항 이상은 모른다. 그러나 문순득은 뭔가 있을 것 같은 낌새를 피워 상대가 자신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강회는 문순득의 대응에 만족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그래, 지금 어디 있소? 죽이지는 않았겠지?”
“예?”
“흠씬 패서 묶어다가 광에 처넣었을 거 아니오? 얘길 좀 해봐야겠소.”
문순득은 자신에게 거는 농상진흥부장의 기대에 당황했다. 이강회는 그런 무뢰배일지 몰라도 자기는 본래 순박한 어부일 뿐이다.
“아, 아니올시다. 그냥 얌전히 돌려보냈지요. 만약 그자가 우릴 봤다면 필시 장시(여기서는 증권거래소)의 회원인지 뭔지 하는 명패를 갖추었을 터. 이 도읍에 이름이 알려진 유지일 텐데 함부로 건드릴 수야 있겠습니까?”
문순득은 아쉬워하는 이강회에게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대신 오시면 이 서찰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이강회는 요 며칠 보고 다닌 것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서 별로 안 읽고 싶은 것 같았다. 이강회는 그건 담당자인 당신이 하라는 표정으로 서신을 툭 치기만 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영길리말 공부하느라 써 놓은 책이 있었지. 영길리 사람들이 패관을 좋아하던데 그거나 어서 다시 만들어서…….”
그 책 팔아먹은 문순득은 뜨끔했다. 그는 다급한 동작으로 네이선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자는 필시 주석 동지의 어험 매입에 큰 실마리가 될 무언가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슬쩍 봤더니 지팡이 테두리는 금장(金裝)이요, 옷감은 부드러우면서 번쩍거리는 데다 쓴 애체(안경)도 은 사슬을 늘어뜨린 것이 보통 부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소이다.”
“아까는 대머리에다 갈라진 턱이 욕심 사납고, 교활한 매부리코에 흰자위 많은 눈깔이 영 모리배 같아 보인다면서?”
“모리배니까 돈을 어지간히 악착같이 모았겠습니까. 아무튼 이것부터 읽어 보십쇼. 부장 동지도 이제 나이가 몇인데 그런 비역질 책이나 계속 보셔서야 어디 나중에 자식에게 얼굴이나 들겠소이까?”
이강회는 문순득이 자신의 사생활에 왜 시비를 거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선공후사라는 말 자체는 옳았다. 그래서 그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서신을 펴 보았다.
***
런던의 증권 거래는 전통적으로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8~19세기쯤 오면 커피하우스에서 모두 전담하던 친목, 음주, 거래가 각각 따로 분업화 및 전문화의 길을 걷는다(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셋을 한 군데에서 소화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오래된 전통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이작 뉴턴에게조차 돈이 복사가 된다는 계산을 산출하게 하여 눈 뒤집고 뛰어들었다가 막대한 재산을 잃게 한 남해 거품 사건도 커피하우스에서 모의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모의’에도 이 장소는 꽤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윌리엄 자딘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어째 얼굴이 좋지 않으시군요. 로스차일드 씨. 제가 온 것이 불만이십니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표정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은 이미 그의 말로 표현되고 있었다.
“아시아인의 예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베이커 스트리트까지 찾아간 데 대한 성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소. 당신은 대리인에 불과하지 않소?”
자딘은 여기에서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건 영국 신사가 아니다. 영국 신사란, 이 모욕을 기억해 두었다가 상대가 가장 취약할 때 갚아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딘은 미소를 지었다.
“흐음. 당신은 정시준과 그가 보낸 사람들이 이 투자를 결정했다고 믿는 겁니까?”
“나를 속이려 하지 마시오. 자딘 박사. 그야 다른 멍청이들은 모두 박사가 아시아인 신흥 참주를 매끄러운 혀로 속여 재산을 후려온 줄로 알겠지. 그걸 간파한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허나 그렇지 않아. 나는 증권거래소 회원 모두의 표정을 보고 있었소. 당신은 그 투자를 확신하지 않았어. 그건 반왕 정시준의 결정이야. 당신은 그것에 따랐을 뿐이고.”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들, 아니, 사실이군요. 제가 모두에게 명백하게 밝힌 대로 저는 정시준의 뜻을 대행하는 투자 전권 대리인이니까요.
로스차일드 씨. 당신이 어떤 생각을 가졌건, 공화국 사람들의 거처를 직접 찾아가는 일은 신사로서 해선 안 될 무례함이었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셨어야지요.”
로스차일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시준은 나폴레옹이 가까운 시일 내에 패망하리라고 보는 거요?”
“글쎄요. 전 당신이 말한 대로 대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투자자의 심중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로스차일드는 한 번만 더 참기로 했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박사. 우리는 돈을 다루는 사람이고, 시간은 곧 금이오. 당신들 영국인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우리 독일 사람은 시간 낭비를 안 좋아해.”
자딘은 ‘넌 유대인 아니냐?’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겸손하게 로스차일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생각대로 로스차일드는 거의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나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웠소. 그리고 베이커 스트리트에 다녀오고 나서 또 한두 가지로 좁힐 수 있었지. 그러기 위해 그들을 직접 봐야 했소.”
“그게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난 당신과 달리 눙치는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말해 드리지. 내가 궁금했던 것은 정시준이 왕의 다리를 자른 그 광기로 도박을 하는 것인가 여부였소.
그러나 정시준이 보낸 사람들은 장기적인 거점 마련을 위해 웃기는 약방 경영에나 매진하고, 그 우두머리는 기술 수입 시찰이나 다닐 뿐이었소. 이게 뭘 뜻하는지 아시오? 적어도 그들은 정시준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요.”
“정시준이 그가 신뢰하는 가장 충실한 동료들을 골라 보낸 건 맞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신뢰받는다는 것과 신뢰한다는 건 다른 문제요. 당신과 달리 그들은 의혹조차 갖지 않고 있었소. 나폴레옹이 전세를 뒤집게 되면 그들은 먼 런던에서 알거지가 되어 객사할 텐데도.”
‘그리고 나도 알거지가 되겠지.’ 자딘은 그 말 또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는 정시준이 나폴레옹이 엘바를 탈출하기 전부터 나폴레옹의 복귀와 패배를, 의심할 수 없는 근거로 예견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오. 이건 매우, 매우 이상한 일이야. 왜 이상한지 물어보고 싶겠지? 물어보시오.”
“왜죠?”
“나폴레옹이 돌아올 거라 그렇게 호언장담하였으니 그 말을 믿을 수는 있소. 아시아에서 예측했다는 것이 놀랍지만 유럽의 고위층에서는 어느 정도는 내다보던 일이었고.
그러나 그렇게 황제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그다음 수순은 승리를 예상해야 해. 나폴레옹의 전적을 생각해 보면 무리한 예상도 아니오. 하지만 정시준의 베팅은 패배였소.”
자딘은 이쯤에서 찔러 보기로 했다.
“그 예측이 옳아 보이지 않는다면, 어째서 편지에 그런 제안을 하셨지요? 동업자가 되면 정시준이 가진 근거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까?”
자딘은 로스차일드가 잠깐 움찔할 때까지만 기다렸다. 그러고는 그가 입을 열기 직전 빠르게 말했다.
“당신 제안은 이렇죠. 나폴레옹의 패배가 확정되면 당신과 손잡고 일제히 채권을 매도한다. 그렇게 되면 주가는 폭락. 다시 사들인 다음 큰 이득을 본다. 물론 나폴레옹이 승리할 경우 이 반대가 되겠고. 전제는 당신이 누구보다 빠르게 나폴레옹의 승패를 알아야 한다는 건데……. 그거야 당신이라면 어렵잖은 일이겠지요.”
로스차일드가 구축한 정보망은 이미 런던의 투자가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워털루 전투 직후 그가 증권거래소에 나타났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본 것이다.
그물망 같은 성과제 마부 시스템은 물론 비둘기와 쾌속선까지 동원하는 꼼꼼함, 대륙 봉쇄령도 뚫고 밀수를 감행하는 실행력과 대담함, 자기 근본을 잊지 않고 이디시어 암호를 활용하는 냉소적 음침함 등 좋은 상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 속도와 정확성은 군대조차 능가한다. 그래서 실제로 영국군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군수물자의 수송을 맡긴다.
로스차일드의 진짜 힘은 이처럼 튼튼한 기반에 있다.
번득이는 도박성과 재치로 단숨에 큰돈을 버는 일 따위 삼류 도박사나 관심을 가질 일이다.
돈놀이로 유명하다지만, 로스차일드가(家)는 금융에 치우쳐 실물경제를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엄청난 규모의 광산과 면직물 산업이 그들의 막대한 자금 융통력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견실한 사업가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동업을 제안한 이유도 장기적인 것이었다.
“정시준이 얼마나 부호인지는 모르오만 아시아 국가의 재부가 뻔하지. 그는 결코 그 돈을 그냥 잃어도 될 만큼 넉넉하지 않아. 부하들 사는 꼴을 보면 알 수 있소. 그런데 그는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을 갖고, 예금이라고 해도 그렇게 믿고 부을 수는 없을 만큼 재산을 투자했소. 난 그 수단이 알고 싶은 거요.”
자딘은 ‘그 새끼 작두 타는 거 같던데?’라는 식으로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로스차일드는 그 대답을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 같았다.
그래서 자딘은 정중히 말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 없거니와 저도 모릅니다.”
“흥.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렇다면 동업 제안은? 정시준과 나라면 둘이서 충분히 전쟁국채의 가격을 좌지우지할 수 있소. 분명히 말하건대 이건 내가 양보하는 거요. 나 혼자 이득을 봐도 돼. 그러나 합심하는 편이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제안하는 것이오.”
자딘은 고민에 잠겼다.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의 최후가 영광일지 파멸일지 누구보다 빠르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전쟁 후의 주가는 사실상 로스차일드의 마음대로나 마찬가지다.
이 대화를 사방에 떠들어서 폭락을 막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 번째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적대해도 되는 집단이 아니다. 무슨 프리메이슨이나 장미십자기사단이 렙틸리언을 불러내려 육망성을 그리면서 저주해서가 아니라 훨씬 현실적인 이유로 그렇다.
솔직히 말해 로스차일드에게 채권 야바위 따위 성공 안 해도 그만이다.
눈앞의 이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런던에 설립한 NM 부자(父子)은행이 영국에 빌려주고 동맹군에 유통을 도와준 자금의 이자와 수수료만 해도 그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많은 수익을 보장할 테니까.
게다가 유럽에 흩어진 그의 형제 중 살로몬 로스차일드는 미래 유럽을 사실상 결정할 메테르니히 후작의 후원자다.
시준이 설사 머릿속에 나노머신 같은 게 있어서 미래 지식을 정확하게 안다고 해도 상대할 수준이 아니다.
자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전통적 기독교인이고, 더하여 상계에서 유대인과 경쟁하던 스코틀랜드 사람답게 유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파트너인 동인도 회사와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내에서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시종일관 시퉁하게 군 이유도 그것이다).
허나 친구는 아니더라도 적이 되면 더욱 곤란하다. 자딘에게는 그가 유대인의 황금 쇠사슬에 묶였을 때 판사로 변장해서 광기의 인종차별 판결을 내려 줄, 여러 의미로 굉장한 여자친구 같은 게 없다.
두 번째는 로스차일드의 제안이 정말로 시준에게, 그리고 자딘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자딘이 사들인 국채 가격은, 물론 낮긴 하지만 ‘나폴레옹 승리 소식’이 알려진 이후에 당연히 찾아올 폭락가보다는 높다.
만약 로스차일드의 말대로 하면 더 낮은 가격으로 구매해 (시준이 예상한)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이건 유대인이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유혹이다.
로스차일드가 말했다.
“당신 혼자 결정할 수 없다면 정시준의 ‘진짜 대리인’과 논의해도 좋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다음에는 그 신사 왕 첸을 소개시켜 주면 고맙겠소. 나도 더 책임 있는 자와 바로 얘기하고 싶으니.”
이강회나 문순득이 아시아인이라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과연 인종차별 오랫동안 당해 온 유대인다운 공정함이었다. 물론 유대인의 경우 다른 모든 족속을 공정하게 천민으로 보는 것에 가깝지만.
자딘은 결심한 듯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로스차일드 씨. 그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로스차일드는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딘이 한마디를 덧붙이자 그의 만족감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당신에게 빚을 지고 싶진 않군요. 정시준의 수단은 제가 모르지만, 대신 정식으로 그 신사, 사교계에서 왕 첸이라고 불리는 고려인민공화국 농업 및 의류 장관[農桑振興部長] 이강회를 소개시켜 드리죠. 나는 정시준의 친우이기도 하니 그와도 서면으로 연통을 주선할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을 다시 봐야겠군. 내 무례를 사과하며, 당신의 신용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오.”
“영광입니다.”
***
이강회는 조금 여유 있는 태도로 의관을 정제한 채 나왔다.
그가 윌리엄 자딘을 공식 대리인이라는 핑계로 대신 보낸 것은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 자딘은 상대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기 위해 파견한 일종의 정찰병이었다. 먼 타향에서는 당연하기까지 한 경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런던 최고의 클럽이라는 화이트스 클럽(white‘s club)에서 만났다. 역사가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곳에는 다른 고만고만한 사교 클럽과 다르게 최고의 요리사와 별도의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후자였다(이강회에겐 전자도 필요했다). 이강회가 로스차일드의 면전에서 해병 영어를 떠들어 그를 당황시키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윌리엄 자딘이 통역 겸 소개로 자리했다.
21세기까지도 백인 남자가 아니면 받지 않는 곳이니 19세기에 여기에서 아시아인과 유대인이 만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허나 히틀러가 그들보다 더 인종차별을 잘할 자신이 없어서 멸절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게 학계의 정설인 프랑스인조차, 21세기에는 온갖 고급 브랜드 본사에서 붉은 카펫 깔아 가며 아랍인과 중국인을 모신다.
돈이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다.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이름 하나로 ‘왕 첸(이강회는 이것을 영국에서의 자기 호 삼기로 결심했다)’은 클럽에 무사 가입되었다.
클럽의 주인인 알반리(Alvanley) 남작 윌리엄 아덴 대위는 오히려 이강회에게 정시준 역시 명예 회원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다고 제의했다. 이강회는 주석 동지의 이름이 오랑캐 주막 명부에 적히는 것을 탐탁잖게 여겼지만 자딘이 냉큼 나서서 그것을 수락했다.
이미 실제적 사항은 논의된 지 오래. 둘은 최고 책임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품위 있고 실속 없는 대화만을 나누었다는 뜻이다.
그러던 중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먼저 용건을 꺼내었다.
“고려 공화국 의장 각하의 선견지명은 나도 꼭 배우고 싶소. 이미 들으셨겠지만, 전 유럽에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 나폴레옹의 패배는 확신하지 못하겠거든.”
‘이건 좀 먹을 만하네’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강회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비틀어진 소매를 다시 정돈했다. 이강회가 자신을 존중한다는 제스처를 보이자 로스차일드는 이어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의장 각하께서는 나폴레옹의 경찰장관 조제프 푸셰를 측근으로 두고 있지. 동인도 회사와도 긴밀한 연결이 있다고 아오. 그렇다면 이 두 나라의 군사 상층부와 어떠한 연결이 있는 것이오?
일국의 지도자와 비교하기는 부끄럽지만, 나도 인맥이라면 어디에서 뒤처지지는 않소. 우리가 이번 일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협력한다면 향후의 사업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이강회는 통역을 다 듣고도 빙긋 웃을 뿐이었다. 로스차일드는 동양인을 진작 많이 만나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들의 비언어적 표현을 다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조선인이 웃고 나서 좋은 얘기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강회는 천천히 말했다.
“밤은 짧고 술은 많은데, 할 이야기는 고작 푼돈을 긁어들이려는 모리배의 상담(商談)뿐인가?”
자딘은 통역을 멈추고 이강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강회는 그치지 않았다.
“만민이 수평하여 사농공상의 높고 낮음이 없지만, 그건 모두가 같이 고귀해졌다는 뜻이지 모두가 같이 빈천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돈을 모으는 일은 고상한 대의로써, 그리고 대의를 위해 이루어져야만 옳다 할 수 있는 법이지.”
로스차일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이강회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대의란 무엇이오?”
“다른 대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주석 동지께서는 이미 이 일을 내다보시고 서양 열국의 앞날을 내게 교시하시었다.”
이것이 로스차일드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는 유럽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었다. 로스차일드는 침을 삼켰다.
“내가 그대에게 도(道)와 륜(倫)을 가르치노라.”
이강회는 그렇게 말하며 나이프를 들어 가볍게 접시를 쳤다. 쨍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로스차일드는 마치 집시 무당의 주술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강회는 정말 윤리를 이야기했다.
“삼강의 으뜸은 군위신강이요, 이는 만민 수평의 공화국에서도 임금이 나라와 인민으로 바뀌었을 뿐 같다. 예부터 충신열사의 뜻은, 비록 반동일지라도 드높기로는 매한가지였다. 왜 그런가 하면, 공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치열하더라도 봉공(奉公)의 한마음은 같기 때문이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릴…….”
“경애하는 주석 동지의 교시처럼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왜 그렇겠는가? 무언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돈 만지는 장사꾼에게는 멍청해 보이는가? 허나 그 교시가 혁명적 환성을 받은 까닭은, 사람들이 마음속에서부터 그러고 싶어 했기 때문일세.”
이강회는 마치 조선 청주를 따르는 동작으로 로스차일드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물론 이 일은 호스트, 혹은 지금은 없지만 안주인(mistress)의 몫이라 꽤나 이색적인 일탈이다.
하지만 그런 비범한 행동은 이강회에게 오히려 탈속(脫俗)적 신뢰성을 더해 주었다.
자기 잔도 채운 이강회는 그것을 들어 올렸다.
“우리 살이 길어야 얼마나 되나. 견주어 아침이슬에 다름없을 뿐[人生幾何 譬如朝露]. 하지만 큰 강도 결국에는 풀잎에 맺힌 이슬에서 시작한 것이지. 삶을 불태워 혁명의 봉화를 올린 여러 열사들과 우리 주석 동지, 그리고 부족한 나처럼 모든 사람은 힘을 합쳐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네.
그 돈 모아서 저승에 싸가지고 갈 건가? 서양인들은 금을 먹고 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결국 돈이란 방편이야. 더 큰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방편. 돈만 있어도 된다면 주석 동지께서는 혁명을 일으키지도 않았어.”
“더 큰 무언가?”
로스차일드의 시선이 겨냥하는 곳은 이제 신비한 예언가와 싸구려 약장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강회는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남을 믿게 하기 전 자기부터 스스로를 뻔뻔하게 믿는 것이 사기의 근본이다. 다 사형에게 배운 거다.
“그래. 더 큰 무언가 말일세. 이를테면…….”
이강회는 은근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100년 뒤 유대인의 선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영국 로스차일드의 현재 수장,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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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조선 시대에는 채권의 진위 확인을 위해 지그재그로 잘라 둔 다음 나중에 맞춰 확인했습니다. 어험(魚驗)은 이 모양이 물고기 비늘 같다 하여 붙여진 말이며, 이 말이 변형되어 어음이 됩니다.
2. 로스차일드의 주가 후리기 썰은 여러 가지 이유로 후대에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본문에 나온 대로 (분명 이득은 봤겠지만) 그렇게까지 극적인 짓을 해야 할 만큼 로스차일드가 모험 투자가는 아니었다는 거죠. 당대 로스차일드는 유럽의 금융과 제조업에서 이미 강자의 입장이었으니까요. 나치가 ‘돈놀이꾼 유대인’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를 극적으로 과장, 혹은 창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3. 화이트스 클럽은 지금도 있으며, 영국의 남성 왕족들은 태어나자마자 가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영국 왕 찰스도 여기에서 총각파티를 한 다음 결혼했지요. 다만 ‘신사만을 위한 클럽’이라는 게 시대착오적이다 보니 비난도 많이 받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남녀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자진 탈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작중 시점인 19세기 초에는 고급 사교클럽의 위치를 굳힌 상태지만… 원래 처음 생길 때는 술 마시고 도박하는 데였습니다(그땐 그게 고급이었습니다). 회원들도 하나같이 방탕해서 ‘영국 귀족 절반의 골칫거리’라고 일컬어졌을 정도. 지금은 안 그런 척하고 입 씻은 결과지요.
4. 작중 판사로 변장한 여자친구 얘기는 짐작하셨다시피 ‘베니스의 상인’입니다. 이강회가 인용한 시는 조조의 ‘단가행’입니다.
5. 이스라엘 건국은 사실상 영국이 결정한 일이고, 영국의 정책 결정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별히 음모론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19세기 초중반부터 로스차일드는 작중 나온 이유로 유럽 정계에 여러 정치경제적 연줄이 많았지요. 그러니까 세계를 뒤에서 막후 조종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심플하게 강력한 재벌가문이었습니다.
명사 집단이자 민족 대표자이긴 해도, 영국 정부가 로스차일드에게 조종당하는 입장이라고는 할 수 없죠. 그렇다면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인/유대인/오스만 투르크/프랑스에게 중복해서 팔아먹고 거래 목적물을 얻어내는 4중계약을 하진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