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69. 별이 빛나는 밤에(2)
최선을 다해 정시준을 연기하는 정찰총국과 해병대 요원들은 거침없는 기적을 창조해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창조했다.
합비(合肥)에 나가 있던 공화국 해병대 제1영대장 김덕춘은 마치 이제초처럼 꾸미고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계룡산에서 닦은 300년 도력을 보여주마! 나 정시준이 기도를 올리면 바로 저곳에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기도에 꼭 필요한 의식인 깃발이 정해진 신호대로 흔들리자, 좀 떨어진 곳에 있던 해병대원들은 시시덕대며 불을 붙였다.
합비성의 청 관군은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창고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넋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반면 변발 사나이들은 용기가 치솟아 올랐다. (해병대가 십인지맹의 위탁판매 의뢰를 받고 중국 갖고 와서 팔아먹은) 이 정시준 부적만 있으면 총알이 다 피해갈 것 같았다.
정성이 부족한 몇 명만 빼면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다. 관군은 손이 떨려 총을 제대로 쏘지 못했으니까.
강남에 있는 녹영병과 팔기는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하도 여러 곳에서 난리가 나서 그 대군도 이리저리 이동하느라 정작 필요한 데에 투입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현지에서 알아서 판단하면 오히려 나았으련만, 함부로 나설 수 없는 황제 교체기의 민감한 시기와 청의 정교한 통치 시스템은 사이 안 좋은 친구 두 명의 이인삼각처럼 발이 엉키며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천리교-백련교 연합 봉기는 각지에서 연전연승했다.
허나 모든 일이 그렇게 잘 돌아가기만 할 수는 없다.
승리만큼이나 패배도 많았고, 청군은 그 특기를 발휘하여 ‘반역향’ 전체를 대학살로 청소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이고 뭐고 관심 없었던 백성마저 살기 위해 혁명으로 투신하게 했지만, 청 당국의 입장은 ‘그러면 그놈들도 다 죽이면 된다’ 정도였다.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이 먼저 저 압제자에게 겁먹느냐, 아니면 압제자가 굴복하느냐의 생사결이었다.
이제 천리교만의 혁명도 아니고, 임청을 제쳐버릴 야망을 가지기 시작한 임칙서의 사정도 있고 해서 정약용은 저 영광의 이름 남조선혁명당에서 따와 그들에게 새 간판을 선사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공화국의 동지인 중화혁명당이었다.
김덕춘의 역할도 사실 정시준의 메소드 연기는 아니었다.
김덕춘은 전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동지들의 피해가 적을 때 재빨리 수습해서 철수해야 했다. 그리고 그 역할에 불리하면 달아나는 것이 특기인 수적 출신 김덕춘보다 적합한 자는 없었다.
계룡산의 계시를 받는 척하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김덕춘은 곧 좌우를 둘러보았다.
“으음! 아직 별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구나. 안타깝지만 동지들! 여기서 물러나 때를 기다린다!”
별빛의 인도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진격 명령은 거부자가 많아도 후퇴 명령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곧 합비 관군은 반란군이 모두 도망치고 쑥대밭이 된 성을 망연히 둘러보았다.
***
루카스 조제 데 알바렝가(Lucas José de Alvarenga)는 꽤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브라질 태생 포르투갈인으로서 마카오 총독으로 부임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을 포르투갈의 평등주의 실천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이제 유럽 본토 포르투갈은 볼장 다 봤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지 여부에 따라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알바렝가 총독은, 어느 쪽인가 하면 낙관주의자에 가까운 편이었다.
이 젊고 야심 찬 총독이 부임했을 때는 나폴레옹이 엘바에 있었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박살 내버린 포르투갈도 재기의 꿈을 꿀 수 있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간 거지꼴로 살고 있던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을 격려함과 동시에, 중국 상대로 조심스러운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다만 알바렝가의 의욕과는 별개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여기는 더 이상 포르투갈 땅이 아니다.
몇 년 전, 매우 파워풀한 제독 윌리엄 드루리가 마카오를 점령했다가 조선 개항을 조건으로 중국에 돌려주었기 때문에 이곳은 공식적으로 청 정부의 영토다.
포르투갈로서는 강도가 칼 들고 빼앗아간 자기 집 물건을 남에게 중고 거래하며 서로 돈독한 별점을 과시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횡포를 인정할 수 없는 포르투갈은 묵묵히 총독을 보냈다. 물론 총독은 마카오를 다스리진 못했지만 쫓겨나지도 않으면서 근근이 밥 벌어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렇게는 더 못 살겠다며 뛰쳐나올 때가 바로 총독의 임기 만료였다. 그렇게 총독은 마치 정부가 정상인 것처럼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나 알바렝가는 달랐다. 그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알바렝가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영국의 불법적 침공으로 인한 원인 무효’ 주장을 유세했다.
“장물을 사고파는 것이 유효한 거래입니까? 아니지요. 영국군이 정규 전쟁도 아닌 현장 제독의 독단으로 깡패처럼 점거한 이 땅은, 돌려주려면 중국 황제 폐하가 아니라 우리 국왕 폐하께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알바렝가의 주장에는 교묘한 전제가 깔려 있다.
역사가 비틀리기 전이라 할지라도 마카오는 ‘공식 포르투갈 영토’가 아니었다. 그저 그 보잘것없는 섬에 눌러앉은 포르투갈인들을 청 정부가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공식적으로 확보한 때는, 청이 영국에 두들겨 맞고 빈사 상태가 되자 “어? 사실 호구였나? 우리도 한번?” 하며 슬쩍 압박하는 반세기 뒤다. 그 판단은 정확했고 마카오는 1999년까지 포르투갈 영토가 된다.
그리고 알바렝가의 생각에는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바렝가는 청이 휘청대는 틈을 타서 이곳을 되찾고, 그와 동시에 공식적인 포르투갈의 영토로 만들고 싶었다.
마카오에 어슬렁대는 영국인들의 눈치는 좀 봤지만 그의 주장 자체는 일관되었고 언변은 화려했다.
문제는 광저우를 비롯한 광동 일대의 지방관들이 그 열변을 숙고하고 북경에 주청을 올리는 미친 짓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똥오줌 못 가리고 아무 말이나 위에 건의하다가 성기가 되고 말았던 여러 사례는 사서에 밝게 나와 있다.
이 거대제국 대청에서 알바렝가가 만나볼 고위 관리쯤 되면 그 악랄한 중국식 과거를 통과하고도 많은 경험을 쌓은 최고 인재다. 사서에 능숙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은 아주 민감한 사세.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시범 케이스 되기 딱 좋다.
어떤 자는 능숙하게 어물쩍 넘어가고 어떤 자는 아예 만남을 회피했지만, 대부분은 화를 내며 알바렝가를 쫓아냈다.
그러나 알바렝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시정할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서도 유럽을 향한 중립적이고 선량한 창구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중국 전토를 유린하는 저 영국인을 믿을 겁니까, 남색가 황제 아래의 전쟁광 프랑스인을 믿을 겁니까? 우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아시아에서 동양과 통교하여 우의를 쌓았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지방관들은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알바렝가가 내미는 뇌물은 더더욱 감동적으로 받아 넣었다.
그리고 동양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알바렝가는 분통을 터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노력이 보답받을 때가 왔다.
알바렝가는 갑자기 자신에게 무리 지어 달려오는 관리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부분은 광저우와 그 인근의 지방관이나 무역 감독자들. 그 전에 알바렝가가 자주 찾아다녔으나 잘 만나 주지도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가솔을 이끌거나 짐을 짊어진 채 알바렝가에게 헐떡대며 달려왔다. 그러고는 터뜨리듯이 말했다.
“포도아(葡萄牙, 포르투갈)든 백랄서이(伯剌西爾, 브라질)든 어디든 좋으니 제발 배편을 마련해 주게! 돈! 돈이 필요한가? 자네들 서양인은 돈이라면 뭐든지 해 준다지. 여기 말굽은을 한 보따리는 줌세!”
알바렝가는 하느님께 맹세코 이처럼 적극적인 중국인의 해양 진출 시도를 처음 보았다.
“자, 잠깐. 여러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그러나 아무도 천천히 말할 생각이 없었기에, 알바렝가는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중국어의 폭풍 속에 휘말려야 했다. 그가 사태를 파악한 것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알바렝가는 크게 놀랐다.
“광저우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고요!”
광저우만이 아니다. 지금 이 관리들이 익숙한 심산유곡이나 대나무 숲이 아니라 ‘바다’로 달아나려는 이유가 있다.
이 봉기는 상식적 공간을 따라 퍼지지 않았다.
오족공화 봉기가 상하이에서 시작되었으니, 강남의 관리들이 설사 전혀 막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단 강소, 안휘, 절강을 휩쓸고 복건을 거쳐 광동으로 내려와야 한다. 물론 청나라가 그 정도로 호구는 아니라서 그 도중 막히거나 막대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지금 강남 여러 군데에서, 소문에 따라서는 강북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2차 홍건적의 난’이 터지고 있었다.
도망갈 데가 없어 보였다.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이라더니 정말 동시에 난리가 난 것 같았다. 따라서 세계 바깥, 바다로밖에 탈출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알바렝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럴 리가 없다. 중국이 얼마나 넓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마 대부분은 민중봉기 세력이 자기 위세를 과장하기 위해 퍼뜨린 얘기일 터. 동시다발이라고 해도 주요 인구 밀집지역 몇 군데 정도일 거야.’
시준이 들었으면 뜨끔했을 분석이었다. 알바렝가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 ‘포르투갈 마카오 총독부’가 여러분을 보호해 드리지요. 우선 총독 관저에 계시면 제가 폭도와 협상하겠습니다. 감히 이곳을 들이치지는 못할 겁니다.”
만약 서양인도 가리지 않고 휩쓸 것이었으면 진작 영국 개항장 중 하나와 충돌하여 영국군에 의해 싹 쓸렸을 테니까 말이다. 일견 무질서하게 때려부수는 폭도처럼 보여도 그 지휘부는 이성적이라는 증거다.
그래서 알바렝가는 전혀 겁내지 않았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관리들과 함께 ‘총독부 관저’, 그러니까 원래 관저는 뺏기고 겨우 사들인 2층짜리 허름한 중국식 개조 술집에 들어갔다.
물론 알바렝가는 배편을 알아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간 그가 열심히 다닐 때는 모른 척하다가 저 아쉬우니까 찾아와 구원을 애걸하는 이 역겨운 놈들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약의 경우 협상 재료가 될 수 있다.
그 대신, 알바렝가는 총독의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칼을 찬 채 나섰다.
어떤 고난에도 팔지 않았던 총독의 백마를 탄 채였다. 그야말로 위풍당당했다.
광저우가 쑥밭이 되었다는 얘기가 사실인지, 얼마 안 가 마카오에도 붉은 옷이나 붉은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일견해도 천은 넘어 보였다.
알바렝가는 그 앞을 막아섰다. 그 용기 하나만으로도 그는 총독 자리에 모자람이 없다 할 것이다.
“멈추시오! 이곳은 포르투갈과 브라질 및 알가브르 연합 왕국의 고귀하신 국왕, 마리아(마리아 1세)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요. 여왕을 대리하여 이곳을 책임진 마카오의 총독으로서 명예롭고 평화로운 회담을 요구하오!”
알바렝가가 외친 말은 프랑스어였다. 중국어도 이제 웬만큼은 하지만, 저들 듣기에 웃기게 들리는 중국어라면 위엄이 살지 않는다. 게다가 외교는 상대방의 말을 알아도 국제 공용어를 쓰는 게 기본이다.
알바렝가의 비범한 차림새가 좀 먹혔는지, 사람들은 당장 총을 쏘거나 돌을 던지는 대신 웅성대며 멈춰섰다. 알바렝가는 뿌듯했다.
잠시 후 어떤 젊은 남자가 그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알바렝가만큼이나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영국 대표부에서 나왔소?”
“내 말을 잘 듣지 못한 모양이군. 나는 포르투갈의 마카오 총독 루카스 데 알바렝가요!”
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의 정시준은 진짜 그 시준이었다.
알바렝가의 생각대로 영국군과 충돌하면 혁명이고 나발이고 다 망할 게 분명했기에, 적어도 영국 개항장 근처에서의 봉기는 모두 시준이 직접 지휘했다.
특히 이 동네, 광저우와 마카오는 영국 개항장이 두 개나 붙어있다시피 한 곳이다. 폭탄을 두 개 끌어안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시준도 신경을 많이 썼다.
여기서 장사하는 동인도 회사도 시준이 보여주는 우정에 만족했다. 그래서 ‘정시준이요? 글쎄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천하를 쥐락펴락하던데요?’라고 왼고개를 꼬며 메이틀랜드 소장의 속을 뒤집어 놓는 중이었다.
그런데 웬 포르투갈이란 말인가?
시준이 그간 수집한 국제 정보로는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점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벌써 한참 전 강철군주의 개항 당시에 쫓겨났다.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조선 개항이 가능했던 것 아니었는가.
그리고 전생의 지식을 동원해 봐도 시준이 아는 포르투갈의 정보는 거의 없었다.
보통 한국인은 포르투갈에 대해 축구 이상의 정보는 잘 모른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말이 같다는 정도까지 알면 인문역사에 대해 상당한 교양이 있다고 해도 좋다. 둘 다 축구가 특기이기는 하다.
해외 경험 좀 있다는 시준의 지식도 오십보백보였다.
‘거 마카오에서 카지노 운영하다가 21세기에는 고기 잡아 먹고사는 애들 아냐?’
대항해시대의 기수로서 교황이 승인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지배자였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들었으면 피를 토할 것이다.
어쨌든 시준은 최소한 마카오와 포르투갈이 연관이 있다는 정도는 안다.
그래서 알바렝가는 목숨을 건졌다.
그냥 죽이면 안 되냐는 임칙서의 의견을 제지한 시준은 알바렝가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정말 영국과는 관련이 없소? 아니면 프랑스는?”
알바렝가는 노하여 말했다.
“일전의 조약으로 영국 개항장이 여기 있다는 것은 아나, 그 뻔뻔한 강탈은 인정할 수 없소. 이곳은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포르투갈의 정당한 속령이오.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지. 나는 우리 여왕 폐하 외에는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여기에 서 있소.”
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놈이 어떻게 되건 영국이나 프랑스가 도와줄 리는 없다는 의미다.
알바렝가는 시준이 기가 죽은 줄 알고 의기양양하여 다시 외쳤다.
“악독한 부패 관리가 바로 그대들의 목표라고 들었소. 그들은 내가 ‘체포’하여 총독 관저에 연금해 두었소이다. 우리 포르투갈은 선량한 중국인의 적이 아니오. 대표자가 와서 협상하길 바라겠소.”
알바렝가는 여기에서 중국 측 대표자와 포르투갈 총독부 간의 문서 협정을 남길 계획이었다.
협정의 내용 따윈 중요하지 않다. 대표자가 마카오의 대표를 포르투갈이라 인정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하다.
나중에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청 황제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문제인데, 그래서 알바렝가는 불가피한 상황이 닥치지 않는 이상 중국 고관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언변으로 이들의 연금 상태를 유지하고 나중에 청이 이긴다면 ‘이들을 보호’했다고 입을 털 생각이었다. 그리하면 청으로부터도 마카오를 공식 인정받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도무지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시준마저도 감동했는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알바렝가의 화려한 검은 시준의 허리에 매달리고 알바렝가의 백마는 시준이 타고 있게 되었다.
임칙서는 이제야 북두성다운 풍모가 갖춰졌다며 찬탄을 보내었다.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서 월간 대혁명의 그림을 총괄하는 화가 김득신(金得臣)도 마찬가지였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유럽 화풍을 새로 배운 사람답게, 김득신은 민첩하게 손을 놀려 시준의 위엄찬 모습을 스케치했다. 시준은 그만두라고 말하는 대신 그림이 잘 나오게 허리를 펴는 자신에게 경악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총독의 예복마저 다 뺏긴 채 눈두덩이 많이 부어 있는 알바렝가가 줄에 묶여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물론 불평할 수는 없다. 그가 ‘보호’했던 많은 고관들은 모가지만 따라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준은 중화혁명당원들이 본격적으로 흥분하여 영국 조계지에 뛰어드는 불상사를 일으키기 전에 천리교도들을 통제해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광저우도 단속은 해 두었으나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말년에 일 참 빡세다고 시준은 투덜거렸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걷지 않고 말에 오르니 몸은 좀 편한 것 같았다.
***
이때 런던 베이커 스트리트의 왕 첸, 아니 이강회가 운영하는 약방은 성업 중이었다.
이강회 자신은 윌리엄 자딘의 소개를 받아 공장을 다니거나, 존 월터의 소개를 받아 영국군을 방문하는 등 공적 업무로 바빠서 여기는 거의 문순득이 운영했다.
문순득이 의학의 뭘 아느냐는 반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약재의 대국 조선 사람을 깔봐서는 안 된다. 서양 오랑캐 따위에게 가르칠 만한 약학 지식 정도는 충분히 탑재되어 있다.
“허어, 밤에 도무지 고개를 들지 못해 집안에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그럴 나이가 되기는 됐소이다. 자, 이 음탕한 숫양의 이파리[음양곽, 淫羊藿]가 어떻소? 남자한테 참 좋은데, 더 말하기는 내 좀 민망하구먼. 다만 고려에서나 나는 거라 좀 비싼 게 흠이지요.”
이름만 들어도 뭔가 금지된 이단 집회 가운데의 커다란 뿔 가진 산양 신상(神像) 같은 게 떠오른다. 동방의 신비한 마법적 효과가 가득할 것 같은 풀이다.
눈이 퀭한 신사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은화를 지불하고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를 소중히 싸 갔다.
다른 손님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아파서 못 견디겠다고? 그야 그런 걸 매일 처먹으니 배가 아플 수밖에. 뭐 다른 건 없고, 정 견디기 힘들면 여기 주석 동지의, 그걸 영길리 말로 뭐라 하지? 아, 마법적 권능(Magical Power)이 담긴 마비산(모르핀)이 있소. 이건 진짜 우리도 맘대로 못 쓰는 약으로…….”
“여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묘약? 글쎄올시다. 그건 『수호전(水滸傳)』에도 나왔지만 얼굴, 돈, 여가, 크기, 참을성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면 어려운 일인데. 뭐……. 사정은 알겠소. 여기 사향을 좀 드릴 테니 비단 주머니에 싸 가지고 여자를 만나시오. 내 보기에 당신들 영길리인은 냄새가 심해서 여인들이 도망가는 거요.”
“책? 오, 영길리에도 책을 찾는 선비가 있었군! 뭐요? 아, 그 비역질 책의 신간이 없냐고? 그런 건 없지. 주석 동지는 맹세코 그런 음란한 패관을 쓰지 않았어! 어……. 그거 금이오? 그러면 얘기가 좀 다르지. 이쪽으로 오시오. 이건 진짜 비밀이오. 여기 주인어른(이강회)이 영길리 말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기 보려고 번역한 게 어디 있을 건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문순득은 지친 표정으로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맞이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문순득에게 상대 신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조용히 관찰할 뿐이었다. 그러던 신사는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 본 적이 있소. 아시아인의 얼굴은 구별하기 어렵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분명 그때 증권거래소에서 자딘 박사와 함께 있었어. 시크교도가 아니었나 보군요?”
영국인이 들었다면 독일어 억양이 희미하게 섞였다는 것으로 알았겠지만, 문순득은 그저 공화국 시민의 감으로 수상함을 감지했다.
문순득은 웃었다. 우스울 일이 없는데 웃는다는 것은 조선 사람이 짓는 경계의 표정이다.
그러면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책상 정리를 하듯 무심하게 줄을 당겼다. 곧 문밖에서 정찰총국 오리엔탈 파이터즈의 인기척이 들리자 문순득은 한결 안심하고 등을 뒤로 젖혔다.
“약방 손님이 아니로구먼. 그러는 댁은 뉘신지?”
조선 사람이 이렇게 묻는 뜻은 네 용건과 신분, 그러니까 힘을 밝히라는 의미다.
그러나 서양인에게는 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상대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라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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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포르투갈은 국내 사정으로 산업화가 정체되었던 면도 있고, 그 외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고집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지금 경기가 썩 좋진 않습니다. 유럽에서도 하위권이며, 한국은 오래전에 포르투갈을 앞섰지요. 그렇다 보니 시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포르투갈의 음차 포도아는 그 과일 포도가 맞습니다. 당대 포르투갈은 이미 강대국이라고 하긴 내리막길을 걸은 지 한참 된 터라, 19세기말 청에서도 그 이름을 웃기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2. 1494년, 유럽 바깥의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포르투갈-에스파냐 분쟁이 일어나자 교황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중재를 통해 지구를 반으로 갈라 줍니다.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는 에스파냐의 것, 나머지는 전부 포르투갈의 것. 물론 저들끼리 맺은 조약이라 유럽에서조차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가톨릭 교도들 패기 쩐다는 소리밖에 안 나오겠지만, 그리고 포르투갈의 경우 직접 지배한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의외로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작중 초반 언급되었던 포르투갈의 아시아 선교 독점권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3. 김득신은 이 시대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으로, 도화서의 정규 관원이었고 첨절제사까지 한 무관이기도 했습니다. 김홍도를 이은 풍속화의 대가라고 평가됩니다. 알바렝가 총독도 이때 마카오 총독 한 실존 인물입니다만, 브라질 태생의 마카오 총독이 그 하나만은 아닙니다.
4. 수호지에는 저 말이 진짜 나옵니다. 중국사대기서 중 수호전, 금병매 두 개에 이름을 올린 전무후무의 남자 서문경에게 뚜쟁이 왕씨 할멈이 하는 대사지요. 21세기 로맨스 소설과 14세기 군담소설의 700년 간극에도 불구하고 선호 기준 자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나 봅니다.
5. 음양곽=삼지구엽초입니다. 왜 이름이 음양곽인가 하면 쓰촨성의 음양(淫羊)이라는 동물이 이걸 뜯어먹고 하루에 백 번 (중략) 하는 것을 보고 약초 삼은 거라 작중 서술된 효능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양이 뭔 동물인지도 확실치 않고요(학명의 중요성). 사실 한국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약초입니다.
6.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독일식으로 읽으면 나탄 마이어 로트실트. 유명한 워털루 주가조작(?) 사건의 주인공 맞습니다. 다만 그 사건이 과연 실존했는지, 실존했더라도 그렇게 많은 이득을 얻었는지는 논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