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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08화 (208/284)
  • 209화

    68. 임기 마지막 해(1)

    남두성권을 고강하게 수련한 천리교의 정예들은 그야말로 입체적인 돌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한 길을 훌쩍 뛰어올라 담장을 넘거나 벽을 박차면서 달려들었다. 모두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게 과연 강남에 권왕이 있다는 소문이 헛되지 않았다.

    “이, 이놈들은 대체 뭐냐!”

    천리교도는 드물게 총이나 박도, 대부분은 죽창, 그도 없으면 그냥 맨손으로 관병을 덮쳤다.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현령 때문에 기세가 꺾인 관병들은 무기가 있다 해도 다 쓸데가 없었다.

    그들이 비실비실 내지르는 창검은 무림 고수들의 단련된 손에 가볍게 젖혀졌다. 이것이 바로 권법에서 말하는 유(柔)의 극성에 달한 이치다.

    그리고 바로 매서운 붕권(崩拳, 중단 찌르기)이 작렬하니 무림인이 아닌 관군은 하릴없이 고꾸라졌다. 망루가 쓰러지고 횃불이 넘어지며 사방에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양놈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배들은 죽어라!”

    “그런 소릴 지껄이는 네놈 손의 양총은 뭐냐? 으, 으아악! 자, 잠깐!”

    “이 진회(秦檜)와 같은 놈이 말이 많구나!”

    천리교가 양적과 결탁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서양인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오묘한 투로의 이치에 따라 관군은 속속 쓰러져 갔다.

    물론 이 요충지 청포현이 그저 그런 시골 동네 관청은 아니다. 불쌍한 현령은 이제 그만 잊어버려 주더라도 이렇게 끝날 만큼 약하지 않다.

    예부터 관부 무림 상호불가침의 절대적 규약이 (주로 무림인만 주장하는 형태로) 지켜져 온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은 북두신권(北斗新拳)의 계승자가 있어서 기세를 탔지만, 본래는 무림이 관군을 이길 수 없는 까닭이다.

    정신 차린 몇 명의 군사가 총을 쏘아대자 아무리 수련 많이 한 권법가라도 별수는 없었다. 그들은 미처 호신강기를 익히지 못한 불찰을 후회하며 피를 뿌렸다.

    그 간극을 기랑이 열심히 메워 주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간 그간의 수많은 봉기처럼 실패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봉기는 이제까지와는 다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중국’을 향한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네 글자를 깨우쳐 준 ‘북두의 정시준’과 그의 지혜로운 혁명 동지들이 함께한다.

    그중 김시택과 기랑이 천리교와 직접 접촉해서 이 봉기를 도왔다면, 정약용은 동인도 회사 상관에 머무르며 천리교 따윈 난생처음 들어봤다는 태도를 고수하는 중이었다. 같이 안 간 이유가 있다.

    그러면서 동인도 회사에서 뇌물 주고 수집한 강소성 고관들의 정보를 슬쩍슬쩍 같이 공유했다. 정약용의 언변에 넘어간 직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중요한 내용을 다 불어 버렸다.

    그 정보를 정약용이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거의 천 명은 되어 보이는 백성들이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현청을 뒤에서 들이치는 명백한 결과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기랑조차 1개 영대에 필적하는 인간이 갑자기 모래에서 솟아나듯 튀어나오는 데에는 할 말을 잃었다. 여하튼 대륙은 뭘 해도 단위부터 다르기 때문에 대륙이다.

    기랑과 같이 나와 있던 남두육성 제2성 임칙서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됐어!”

    그리고 그 외침에 동의하듯 거대한 함성이 메아리쳤다.

    “우와아아아!”

    “탐관오리를 전부 패 죽여라!”

    잠깐 돌아왔던 관군의 희망이 힘없이 스러져 버렸다.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들은 이 일대의 매립 및 준설 공사 때문에 분노한 유민들이었다.

    청은 19세기 초 장기간에 걸쳐 장강 하류, 그러니까 이 상하이 근처를 개발했다.

    땅을 매립하여 농지를 만들고 제방을 건설해 범람을 제어하는 등 실로 모범적인 치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개발의 중심지 중 하나가 지금 이곳 청포현이다.

    (청나라에서 쓴) 기록에 따르면 가경제는 이때의 준설 공사에 ‘관헌들이 절대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모든 것을 인민의 것으로 넘겨주고 또 중간에서 장부 만들어 공사비를 (부풀려) 상환받는 붓장난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 공사에 30만 냥에 가까운 은이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금군주의 자비를 칭송할 일이다.

    ‘경영을 백성에게 맡겼다’는 뜻은 공사 노동력의 원천이 전부 인근 주민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매사에 불만만 많아서는 안 된다. 한 200년쯤 뒤 어디의 당 중앙위원회가 바로 이 상하이에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하면 지극한 선정인 것이다.

    그건 다 좋았다. 그런데 회오리와 닭튀김 때문에 역사가 비틀리면서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최고의 선군 가경제가 그 일을 마무리하기 전 불가피하게 열하로 몽진했고, 그만 거기서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강남 곳곳에서 일어나는 소요와 황제의 급사, 무엇보다 영국의 행패 때문에 상하이에 미치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주변 관리들 중에서는 영국과 결탁한 사람도 있고 혹은 영국에 저항한 사람도 있었다. 극과 극처럼 보이는 두 부류에는 의외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제방이나 강턱에 보수할 곳이 생겼다며 돈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황제가 금지했을 터인 장부가 마술처럼 나타났다.

    공사는 언제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여기서는 조선 갑질군주 이산의 말이 옳다. 그런 국가의 대계는 어리석은 백성 따위가 ‘무엄하게 이러쿵저러쿵 떠들’ 일이 아니다.

    청포현 사람들은 삽시간에 피폐해져 갔다. 영국이 털고 현령이 뺏고 순무가 앗아가니 뭐 남아나는 게 없었다.

    착취를 당할 때 당하더라도 한 놈에게 당하던 시절이 나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역시 하나가 좋다. 하나의 중국이야말로 추구해야 할 바다.

    그래서 현민들은 봉기했다. 정약용은 절대로 지역 유지들을 쑤석거린다거나 관군이 영국에 대항하러 여기의 물자를 징발할 거라거나 하는 헛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다.

    공화국 외사통호부장은 교활한 협잡꾼이 아니라 점잖은 선비이며, 공식적으로 지금 평양에서 정치국 회의에 참가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근거 없는 모함이 가당하겠는가.

    천리교는 기꺼이 붉은 깃발을 흔들어 형제의 합류를 축하했다.

    상하이의 유서 깊은 요충 중 하나인 청포현은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싸울 땐 왠지 안 보이던 김시택은 밤이 되어서야 현청에 어슬렁어슬렁 기어들어 왔다.

    그는 기랑이 마치 자기를 알아보고 인사했다는 듯이 기운차게 말했다.

    “대공일세! 정말이지 나도 진작 참가하여 한양 때 가락을 발휘해 주석불을 던지려 했는데, 워낙 뒤에서 할 일이 많아 다 마치고 왔더니 대사는 모두 끝났지 뭔가.”

    기랑은 김시택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깨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녀는 김시택이 뭘 하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김시택은 기랑의 무표정을 보고 더 변명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진짜라니까. 봄치고는 좀 늦었지만, 곧 주석 동지가 여기로 오신다고 하네. 주석 동지 앞에서 자랑스럽게 성과를 보고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 아니겠는가. 싸우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란 말씀이야. 이게 내가 다…….”

    김시택은 자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신을 낚아채 달려 나가는 기랑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청포현 습격은 상하이에 대한 청 정부의 통제력 상실에 있어서 신호탄이라기보다 종지부에 가까웠다.

    강소성 송강부(松江府)가 정식 명칭인 이 일대의 여러 현은 청포현 함락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표면상으로는 천리교도,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시준이 신뢰하는 공화국의 정예들이 힘을 합치자 주석이 와도 될 만한 ‘기반’은 금세 마련되었다.

    임칙서와 정약용의 길지 않은 논의 끝에 각지 인민위원회가 즉시 설치되고 반동의 심판이 이루어졌다.

    정시준과 짝을 이루는 남두성의 화신이며, 사실 자기가 정시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천리교의 최고 지도자 임청은 고려의 체제가 그대로 이식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었다. 관군이 재정비해 쳐들어오기 전에 내부를 단속해야 하는데,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임청이 아편 빨고 구상한 종교국가 따위를 세울 수는 없었다.

    남두성 임청이 북두성 시준과 다른 점은 많지만,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경험이다. 임청은 시준처럼 전생과 현생에 걸쳐 다년간의 행정 경험이 없었다. 그가 시준보다 낫다고 주장할 만한 건 엽색 경력밖에 없다.

    구체적 방법론은커녕 일관된 원칙조차 없는데 어떻게 실무적으로 사용한다는 말인가. 그보다는 ‘이미 시험해 보아 증험이 있는’ 공화국의 방법을 들여오는 것이 마땅했다.

    중화가 번국에게 배우는 일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말하는 반동 따윈 다 죽었거나 죽을 예정이다.

    만국은 수평하며, 중국과 조선은 더 이상 예전처럼 천자 아래 묶인 한 천하가 아니라 다른 나라다.

    하나의 중국이란 말은 곧 뒤집어 보면 중국 밖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제 아시아 국가의 상하 관계는, 적어도 이 상하이에선 완전히 파괴되었다. 톈진 조약 때의 조선 독립은 영국의 힘에 의한 외압에 불과했을 뿐이라 중국인들은 납득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중국 인민 스스로가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임청의 고집은 명분과 실리 양쪽에서 스스로의 입지를 깎아 먹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임청의 주정을 묵묵히 들어 주던 임칙서는 그에게 아편 몇 줌을 안겨 주고(정약용이 줬다) 나와서 다른 동지들에게 말했다.

    “후천조사께서는 지금 용태가 안 좋으시니 내게 말하고 처결하라.”

    제2성 임칙서는 잠깐 남두성의 별빛을 가리기로 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정약용 또한 이제 진짜 천리교의 실세가 누군지 깨달은 뒤였기에 임청과는 만나지도 않았다.

    현령과 이속 및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간접적으로 관청과 연계가 있거나 왠지 있는 것 같은 사람들까지 신속하게 처형되었다.

    조선에 비해 너무 가파르고 거칠게 진행되어서 송강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붉은 천을 빨리 구해와야 할 지경이었다.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부드러운’ 혁명에 우월감을 느낄 무지스러운 학살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현재 세계의 최신 유행으로는 이쪽이 정상이고 공화국이 비정상이다.

    모자에 마로니에 나뭇잎 붙이는 것을 깜박하고 외출한 파리 시민이 길거리에서 맞아 죽던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제프 푸셰가 봤다면 고향을 아련하게 떠올리며 평안함에 젖어 들었을 것이다.

    정약용도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 역시 이것이 도저히 씻지 못할 과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도 18세기 태생이며 푸셰와 거의 동년배다. 시준보다는 그쪽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불가능한 이상에 매달리는 대신 차선책을 선택했다.

    “주석 동지께서 오시면 사람들은 칼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오직 혁명의 대의에 감복하여 단결할 것이다. 예정을 급하게 앞당겨야 하겠다.”

    정약용이 그답지 않게 서두르는 데에는 인도적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시준이 지친왕에게 화전양면전술을 부린 건 부자의 갈등 상황을 파악해서가 아니라, 시준이 아는 청의 최고 권력자가 지친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준은 여전히 ‘가경제는 사실상 태상황이고 실권자는 지친왕’ 수준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지친왕이 생각했던 것처럼 공화국이 무슨 대(對)가경제 동맹을 위해 지친왕과 은밀히 접촉한 건 아니었다.

    그건 그냥 이득제가 무슨 말을 떠들지 몰라 던져둔 포석이었을 뿐이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칠보 궤짝도 그저 조선 특산품으로서의 선물이지, 조선 금쪽왕자를 기억하라는 부추김일 턱이 없다.

    시준 덕에 금지된 지식을 깨우쳐 황위를 계승하고, 그 보답으로 지금 이득제 일당을 다 체포해 모가지 날려버린 지친왕의 지혜는 방향을 약간 잘못 잡은 셈이다.

    그러나 현재 공화국 정부는 가경제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정약용으로서는 ‘정상적으로 황위를 계승할’ 지친왕이 신속하게 남쪽으로 토벌군을 파견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지친왕은 그러지 못한다. 얼어붙은 왕좌에서 시린 칼을 들고, 불타는 석탄을 대륙에 강림시켜 황위를 계승하는 중인 지친왕은 사실 아직 그의 군단을 일으킬 수 없었다.

    가경제가 죽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청은 황제가 다스리던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각 지방 총독 및 조정 고위 관직,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여러 중간 감시자 및 관리자들을 지친왕파로 교체시키는 작업은 극히 예민하고 섬세해야 했다.

    그 작업이 너무나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여기 난장판의 책임자인 강소 순무조차 상하이에 별로 관심을 못 가질 지경이었다. 중앙의 잠룡이 되느냐 영원히 잊히느냐가 걸렸는데 지금 시골 지역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허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정약용은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북경 정부가 강소 순무에게 정식으로 명령을 내려 토벌군을 일으키면, 아니, 그 전에 순무가 자체적으로 가진 군사권만 전력으로 발동해도 천리교는 오래 버티기 힘들다.

    그 전에 시준이 와서 용기를 북돋고, ‘조선에서 했던 것처럼’ 인민의 격분을 파도처럼 일으켜 형세를 뒤집어야 했다.

    그게 말처럼 쉽겠느냐는 반박은 정약용에게 통하지 않았다. 조선에서의 혁명은 합리적 가능성이 있어서 벌인 일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성공했다. 정시준만 있으면 할 수 있다.

    상하이의 영국 개항장을 천리교 점령지가 완전히 둘러싸는 형국이 되어, 당장은 청나라의 시야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이 확보되자 정약용은 급히 평양에 연락을 취했다.

    기랑이 김시택에게 빼앗은 서신에서 읽을 수 있었던 정황을 설명하자면 대강 그 정도였다.

    ***

    서력으로 따져서 1815년 4월, 이때는 아직 런던에 도착하지 못한 이강회가 바다에서 인간 몸에 있는 모든 토사물의 총량을 시험하고 있을 때쯤 시준은 약속대로 상하이에 상륙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라는 공화국의 이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주석 스스로의 손에 의해 실현되고 있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기존 지배계층은 자기가 말하는 이념을 스스로는 거의 지키지 않았다.

    효도를 말하며 아비를 유폐하고, 우애를 떠들면서 형제를 베었다. 자비를 숭상한다던 왕이 조카 목을 조르거나 손자를 귀애한다면서 그 부친을 굶겨 죽이는 행태가 당연하다는 듯 만연했다.

    꼭 조선만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조선이 그걸 어디서 배워 왔겠는가. 예부터 번국의 제도는 중화에서 내려 준다는 기본적 사실쯤이야 상하이 백성들도 다 안다.

    그러나 주석 정시준은 말 그대로 자기 몸으로써 규범을 만들었다[以身作則].

    정시준의 방문은 당연히 비밀 중의 비밀. 대규모 환영 행사 같은 것은 꿈도 못 꾼다. 대놓고 붉은 깃발을 흔든다거나 시준을 위해 외친다거나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시준의 ‘용기’는 인상적으로 평가되었다.

    알음알음 퍼진 소문과 선동은 꽤 많은 구경꾼을 슬금슬금 모이게 했다. 상하이의 천리교도들은 그저 우연히, 혹은 다른 볼일이 있어 항구에 온 척하며 힐끔힐끔 그쪽을 보고 있었다.

    곁눈질로 봐서 시준의 피로한 모습은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북두성이 지상에 강림한 듯한 광채를 마주했다고 느꼈다.

    월간 대혁명을 달달 외울 정도인 임칙서는 거기 수도 없이 나왔던 초상화 때문에 정시준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임칙서는 자신이 북두성에서 퍼지는 압도적 기운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을 삼켰다.

    ‘저것이…… 정시준인가!’

    정말로 상관은 없지만, 시준이 나루터에 발을 디뎠을 바로 그때 약 4,300킬로미터 남쪽의 숨바와라는 섬에서도 ‘어떤 사건’이 시작되었다.

    북두의 강림이니 하는 호들갑스러운 임칙서의 표현은 사실 상하이가 아니라 그쪽에서 사용되어야 했다.

    파괴력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기록된 인류사 최대의 화산 폭발이라든가, 주먹도끼와 핵무기를 동등하게 취급할 만한 압도적 에너지라든가, 직간접적으로 다 셀 수도 없는 대규모 광범위의 인명피해 같은 정보는 줄줄이 늘어놔도 잘 와 닿지 않는다.

    국가의 형태를 한 재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조차 이 앞에서는 약간 겸손해져야 할 정도다(많이 겸손할 필요까진 없다). 불칸의 진노라는 베수비오 화산 따윈 여기에 비하면 고즈넉한 전원 풍경에 불과하다.

    영국이나 폼페이는 역사이지만, 이것은 신화의 영역이었다.

    후대에 탐보라(Tambora), 그러니까 ‘사라졌다’는 뜻의 현지어 이름으로 알려진 그 4천 미터짜리 거대한 산은, 사악한 고대 신의 단말마에 의해 산산조각나 말 그대로 ‘사라졌다’.

    허나 시준을 포함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전 지구적 재앙이긴 하나 아무리 그래도 4천 킬로미터 바깥에서 바로 알 정도는 아니다(내년쯤 알게 된다).

    주석결사옹위대 병사들과 함께 평범한 장사꾼의 차림으로 내린 시준은, 구경꾼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오랜만이다. 기다렸어?”

    배가 언제 도착할지는 알고 있었을 테니, 자기가 하선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느냐는 여상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기랑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금 다른 의미로 말했다.

    “……기다렸어.”

    시준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기랑의 어깨를 툭 쳤다. 기랑의 성별을 들키지 않게 해 주기 위한 배려였지만 기랑은 움찔했다.

    “수고 많았다. 이제 원한다면 평양으로 돌아가도 돼. 고총련 일 봐야 하겠지?”

    “괜찮아. 더 있다가 같이 돌아갈래.”

    시준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시준은 비스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을 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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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청실록’ 등에 근거하면 작중 시점, 그러니까 19세기 초의 장강 하류 일대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준설, 매립, 제방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청실록이 조선왕조실록처럼 자세한 건 아니고 해서 완전히 파악하긴 힘든데, 일단 작중에 나온 수치와 인용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관부무림불가침이라 합니다만, 옛날 홍콩 영화 중에는 정치적 사건에 대항하여 싸우는 권법가들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옛날 무협지도 그랬던 것 같군요. 원래 무협지나 SF는 정치 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게 많기는 하지요.)

    일단 작중 배경인 19세기도 중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대인 만큼 많은 영화가 나왔습니다. 특히 아편 전쟁 때 영국(마교)과 싸우는 대협(정파)들의 이야기가 인기가 있어서 중국 본토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희한하게도 홍콩에서도 나왔죠.

    일례로 80년대에 나온 ‘남권왕’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액션씬이 지금 봐도 좋습니다. 예고편 정도는 유투브에 있더군요), 저도 상영될 때 본 게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국에서 폭넓은 창작의 자유를 허용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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