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67. 어서 와, 영국은 처음이지?
시준이 문순득과 여러 ‘인도인’을 영국에 파견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물론 윌리엄 자딘의 감시다. 아무리 그가 지금까지 시준을 많이 도와줬다 하더라도 그는 영국인. 믿을 수 없다.
사람을 출생으로 차별해서는 안 되겠지만, 자딘이 그 배덕의 유전자를 극복할 만큼 혁명정신으로 교화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만약 자딘이 시준의 피 같은 돈을 들고 배반할 경우, 즉시 ‘담가’ 버리기 위한 정찰총국 팀이 동행했다. 배에 실린 그들의 짐에는 고려산 시멘트도 있었다.
시멘트와 함께 대독에 잘 버무려서 (바다에) 묻는 행위는 누가 봐도 김장이랑 비슷하다.
그래서 담가버린다는 은어가 공화국의 편리한 갈등 해결책을 뜻하는 단어로써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물론 호위나 기타 여러 힘쓰는 일도 겸한다.
시준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 주석답게 관대함을 갖추고 있으므로 반동 김조순마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전직 평안도 신디케이트 두목답게 자기 돈 떼먹은 새끼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그래 본 적도 없다.
만약 자딘이 ‘자의적 투자’나 그로 인한 ‘용납할 수 없는 손실’, 혹은 ‘뻔뻔한 횡령’을 저지를 경우 템즈강에는 또 불법 투기가 자행될 것이었다.
어차피 이때의 템즈강이란 게 물이 반이고 쓰레기가 반이다. 강이라기보다 생화학 병기에 가까워서 사람 시체 하나 따윈 표시도 나지 않는다.
허나 이런 말을 자딘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일행의 두 번째 목적은 시준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이유, 그러니까 영국 선박 기술의 수입과 해군 및 여러 공장, 광산, 기계류의 견학이었다.
공화국 시민들은 다른 나라 법을 별로 지킨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반동이 만든 것이니까.
그래서 다소 헷갈릴 수는 있겠지만, 이번은 밀항이 아니다. 합법 입항이다.
영국 세관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 뜬금없는 문순득의 시크교도 차림도 교활한 밀항의 수단이 아니라 영국인들이 놀라 길거리에서 쓸데없는 마찰이 일어나지 않기 위한 편의상의 변장일 뿐이다. 그들은 고려국 시민으로서 정식 입항했다.
이미 음지와 양지 모두에서 시준 관련 서적들이 유명한 데다, 동인도 회사 고위직인 존 레디나 의학 박사 윌리엄 자딘, 언론인 토마스 반스 등 쟁쟁한 신사들의 소개가 있어 입항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영국과 아직 외교관계가 없고, 시준도 굳이 영국에 먼저 매달린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외교 사절’이 아닌 ‘방문객’의 위치였다.
그러면 여기서 문순득이 결코 유쾌해하지는 않을 의문이 떠오른다.
비록 공화국의 고위직이고 항해 경험도 풍부하며 영어도 잘한다 하나, 외교에 관해 실무적이나 학문적 지식이 없는 문순득이 영국에서 과연 임무를 잘 해낼 수 있는가? 아니, 사고를 치지나 않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런던의 어느 셋방에 있었다. 반스의 편지를 받은 존 월터가 내어준 것이었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방 내어주는 것은 조선 사람에게 고마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자기 집처럼 당당하게 들어간 문순득은 이상한 침상(침대)에 큰 대자로 뻗어 있는 인간을 보고 혀를 찼다. 아직도 일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선말로 조용히 말했다.
“농상진흥부장 동지. 할 일 많으니까 그만 일어나시지요. 나이도 젊은 분이 언제까지 그렇게 엄살 부리며 퍼질러 계실 겁니까?”
이강회는 끔찍한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런던까지의 쾌속 뱃길은 이강회의 영혼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원래부터 강건한 뱃사람인 문순득이나, 방우준이 고르고 고를 만큼 영민하고 단련된 정찰총국 요원들은 버틸 만했지만 이강회는 그냥 선비다.
본래는 외국에 관심 많은 정약용이 여기 오고 싶어 했다. 이강회도 사실 내심으로는 그러길 바랐다. 아들이 이제 아장아장 걷는데 외국에 멀리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국 회의에서 영국 가는 얘기가 나왔을 당시 이강회는 어떤 방식으로도 눈에 띄지 않은 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미 나이가 많아 잘못하면 진짜 바다에서 객사할지도 모르는 데다가, 공식적 외교 관계도 없는 영국에 외교장관이 개인적으로 가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수다.
그래서 시준은 이강회를 바라보았다. 절대 옛날 사제라 만만해서는 아니고 외양 항해와 외교라는 분야를 둘 다 아는 사람이 그밖에 없어서였다.
한동안 그 시선을 모른 척하던 이강회는 자기도 명목상 정약용과 동렬인 정치국 위원이며 같은 부장 아니냐고 항의했다.
시준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 말씀을 지금 중국 계신 스승님께 전해도 되겠소?”
동지가 아니고 스승. 그 말을 이해한 이강회는 눈물을 삼키고 물러나왔다. 수평도는 무슨 얼어죽을 수평도냐며 울먹대는 그의 말은 부인만이 듣고 위로해 줄 뿐이었다.
***
이강회는 문순득이 몇 번 더 재촉하고 나서야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나도 여기서 놀고 있었던 게 아니오. 함대제독 동지.”
문순득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이강회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이 방 내어준 그자가 여기저기 떠든 모양이오. 동지가 그 의원(윌리엄 자딘)과 나가자마자 양귀자 한 떼거리가 들이닥쳤소이다. 앞다투어 내 모자를 만지고 저고리를 뒤집어 보며 심지어 수염을 잡아당기는 자도 있었소. 세상에, 냄새는 또 어찌나 그리 고약한지.
그러면서 이 말 저 말 제멋대로 떠들며 물어보는데 그 대답 해주느라 한나절을 다 보냈지 뭐요. 부채에 몇 글자 써주니까 그제야 호들갑스럽게 탄성 지르며 좋아서 돌아가더군.”
존 월터의 작전이 먹혀 런던의 호사가들이 몰려든 모양이었다.
조선 사람도 서양인을 처음 보면 그렇게 했을 것이기에 문순득은 그게 딱히 윤리적으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합리적으로는 나빴다. 그들의 임무 중에는 남에게 말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간첩 흉내를 낼 필요까진 없으나 이렇게 동네방네 조리돌림 당하면 일하기가 불편하다.
“정찰총국의 동지들은 뭘 했습니까? 막지를 않고.”
“내가 잠깐 뭐 군것질이라도 할 거 사오라고 보낸 차에 사달이 난 거요. 속이 메스꺼워서 밥을 먹지 못하겠거든. 음식이라고 주는 건 무슨 개밥 같고.”
“그렇기는 하오이다. 정말 맛이 없더군요. 저는 멀리 나가는 뱃놈들이나 그런 걸 처먹는 줄 알았지, 세상에 그들의 도읍이라는 이 왕성에서도 그럴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이까.”
“식(食)은 음양오행의 기운을 다스리는 것이니 예부터 장과 국과 밥과 반찬의 법도를 엄밀하게 정한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는 법. 이러니 영길리 놈들이 패악한 사유를 충분히 알겠소.”
둘이서 그렇게 열심히 영국을 씹는 동안, 나갔던 정찰총국 사람들이 돌아왔다. 이강회는 그들이 들고 온 나무 컵 몇 개를 보고 짜증을 냈다.
“그런 것밖에 없었나?”
“부장 동지.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우리 여비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소이다. 명하신다면 뒤에서 푹 찌르고 털어올 수는 있는뎁쇼. 여긴 ‘사업’하기 괜찮아 보이는 뒷골목이 많더라고요.”
수평도가 일상화되었다 보니 혁명정부의 상하관계도 반동 시절의 그것과는 달랐다. 정찰총국 요원들은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강회의 앞에 놓인 것은 뭔지 모를 물컹거리는 토사물 같은 것(뜨거운 장어 한 컵이다)과 소 여물통에서 떠왔나 싶은 걸쭉한 콩죽(완두콩 수프다)이었다.
전 세계 최선진 국가 영국이 자랑하는 명물, 산업혁명 모닝 세트다.
19세기 도시 영국인 대부분은 새벽 3~4시쯤 해서 이런 거 한 컵 후룩 마시고 나가 16시간 이상 공장에서 일했다. 영국 노동자 대부분이 성인이 되기도 전에 폐인이 돼 버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라면 두 컵 합쳐 1페니짜리 서민용 세트지만, 지금은 영국도 산업화가 덜 된 데다 전쟁 중이라 훨씬 비쌌다. 국채가 대박 치기 전에는 사람다운 음식을 먹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강회는 죽지 못해 산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며 그것을 억지로 퍼 넣었다. 같이 사 온 튀긴 감자나 고기 파이가 그나마 먹을 만했다.
그들은 식사의 맛을 잊기 위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돈이 좀 생기면 여기서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되겠소. 그 존인지 좆인지 하는 놈은 영길리왕이 이방의 손님에게 충분히 은사를 내릴 거라 했지만, 지금 이 동네 풍습을 보니 글러먹은 것 같아.”
“그런데 뭘 할까요?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역시 ‘가져온 물건’으로 장사를 해야 하나?”
“내가 아까 들어보니 저들은 월간 대혁명을 본 모양인지 고려의 약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군. 기계나 면포 따위는 여기가 훨씬 많으니 약을 팔아야지요.”
이강회는 그러면서 찐 굴에 손을 뻗었다. 소금만 친 거라 오히려 먹을 만했다.
“그렇게 여기에서 기회를 보다가, 패왕 나파륜이 패배하거든 돈을 쓸어 담아 다른 나라도 돌아보는 거요. 복공의 서신도 전해 줘야 하고.”
“아까 위씨(윌리엄 자딘)는 나파륜이 지리라는 주석 동지의 교시를 의심하는 모양이더이다.”
이강회의 반응은 대체로 문순득과 같았다.
“하, 어리석은 양귀자 놈들. 주석 동지의 교시가 빗나갈 리 없잖소. 패왕 항우가 자기 패망은 하늘의 뜻이지 저의 모자람은 아니라고 외치며 해하에서 홀로 달려 나가 장수와 군사 수백 명을 베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우가 끝내 기업을 새로 일으켰던가?
여기 서양에서도 사방의 제후들이 초나라 노래를 불러대고 있으니[四面楚歌] 지금 나파륜은 쫓아낸 황후(조제핀)를 그리며 이별의 시나 읊어야 할 판이오[覇王別姬]. 불과 얼마간의 망나니 칼춤일 뿐. 모든 것이 이치에 맞소.”
문순득은 이강회의 엄정한 고증에 감동했다. 과연 희만 선생의 제자였다. 문순득은 윌리엄 자딘을 다시 만나면 이 말을 들려주기 위해 이강회의 설명을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이강회가 다시 말했다.
“이 먹을거리는 길가의 수레와 노점에서 사온 거라 했던가?”
“그렇소이다. 부장 동지.”
“그러면 대강 연경의 풍습과 비슷하군. 우리도 약장수 판이나 벌리세. 연경이나 한성과 같다면 아마 자릿세 뜯으러 몇 놈 올 텐데……. 그건 동지들 데리고 평안도에서 하던 대로 처결하면 되네. 너무 눈에 띄지는 말고…… 내가 여기의 사족(신사 계층)들 만나러 다닐 거니 그때 그네들과 얘기해서 해결을 보지.”
정찰총국 요원들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천하, 아니 세계의 이치는 한 가지였다. 상한 굴 먹은 이강회가 지독한 배탈을 앓은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미쳐버린 아버지 대신 섭정을 하고 있던 웨일스 공은 이 이방인들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런던에는 별의별 아시아 나라 사람들이 많이 온다.
물론 그 아래에서는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현재 영국의 총리, 리버풀 백작 로버트 뱅크스 젠킨슨(Robert Banks Jenkinson)은 보수당원으로서의 견실함과 진보적 노예 폐지론자의 대담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영국이 마주한 군사적 난관을 착실하게 극복하고 노조 가입 금지 법률을 최초로 폐지했다.
물론 아메리카 식민지의 최종적 상실이나 막대한 국가 부채 등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젠킨슨이 연합왕국 성립 이후 최장 기간 재임의 수상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젠킨슨은 이번에도 양자의 장점을 취하는 중도적 태도를 보였다.
암허스트의 군사적 팽창 발상을 모험주의자의 소치로 여기고 그를 소환하는 데에는 젠킨슨도 찬성했다. 그러나 고려인민공화국과의 외교 수립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코리아라는 나라가 인상적인 것은 이해하지만, 중국 공사와 동급의 전권공사를 꼭 파견해야 하나?”
다른 각료들 역시 의견이 분분했다.
“극동아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면 나쁘지 않습니다. 로드 암허스트의 정책 때문에 다른 나라는 영국에 적대할 겁니다.”
“적대하라지. 그냥 다 함대로 쓸어버리면 안 되오? 저 반역자들의 웃기는 궁전(백악관)을 태웠듯이 빼앗을 건 다 빼앗고 불살라 버리자고. 아시아인 상대로 외교란 우리 속만 버리는 일이잖소.”
“부활한 나폴레옹은 어쩌고요? 하긴 그 점에선 아시아인의 방법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진작 죽여 버렸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이보쇼. 가끔 그런 착각이 들기는 하지만, 프랑스인은 중국인이 아니야. 황제의 목을 매달았다가는 전 유럽이 끔찍한 소요에 휘말렸을 거요!”
“논의가 빗나가는 것 같군요. 어쨌든 고려인민공화국이 크롬웰처럼 영국 왕실에 적대하는 것도 아니니, 그들이 공화주의를 하건 추장을 뽑건 상관은 없습니다. 물망에 오를 몇 사람을 알아보는 건 나쁘지 않죠.”
“절충해 봅시다. 아직 정식 사절이 온 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총리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권공사는 좀 그렇고……. 서기관급 한 사람을 공사 대리로 임명하는 게 어떻소?”
암허스트에게 소환 명령을 보내고 여러 인수인계를 처리하려면 1년도 짧다. 먼 미래의 한가한 논의는 그쯤에서 끝났다.
그것 말고도 영국에는 현안이 너무 많았다. 곧 모든 사람은 나폴레옹의 처리나 각지에서 기계를 파괴해대고 있는 하층민들의 소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직은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의 외교 관례가 정립되지 않았다. 게다가 고려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기에 ‘국가의 손님’이 아니라 ‘야만인 여행자’에 가깝다.
이건 공사의 파견 같은 외교관계 수립 여부와는 상관없는 문제다.
실제 역사의 19세기 영국도 중국에 외교부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편 전쟁 당시 (국가를 대표하는 흠차대신이었던) 임칙서의 서신을 빅토리아가 펴 본 건 아니다.
그때 영국이 야기하는 인류의 수치를 준엄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꾸짖은 임칙서의 글이 배달되었다면, 아시아인을 쥐어짠 고혈 속에서 텀벙거리며 남편과 즐겁게 애정 드라마 찍고 있었던 빅토리아마저 모골이 송연했을 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국은 중국인의 서신 따윌 왕에게 전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임칙서가 대청의 흠차대신이건 남두육성의 제2성이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시준이 ‘서양 견문사’랍시고 보내며 생각한 해군 견학이나 공장 시찰은 정부가 해 줄 일이 아니었다. 그건 더 타임스나 윌리엄 자딘 등 개인적 인맥을 통해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그런 점은 오히려 이강회가 잘 알았다. 이강회가 익숙한 조선 정부 시스템에서도 정부가 외국인에게 그런 식으로 따라다니며 보살펴 주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강회도 영길리 왕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기대도 안 했다. 오히려 그쪽이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그저 웨일스 공이 체면상 내어준 여비를 즐겁게 받아가고, 그걸 밑천 삼아 더 타임스 명의로 런던 교외의 허름한 집을 사들인 다음 약방 준비를 할 뿐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존 월터가 집을 구입해 고려 여행객의 거처로 내어준다’는 식이어서 문제될 건 하나도 없었다.
양지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음지는 좀 달랐다.
이강회의 예측대로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 너희 지금 누구 허락받고 장사하느냐며 찾아온 자들이 몇 명 있었다. 이들이 낯선 외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배짱이었다.
정찰총국 요원들은 런던 뒷골목 신사들의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사실 그들이 영어를 이강회나 문순득만큼 잘하진 못하지만 표정만 보고도 다 알 만했다.
‘아이고, 이거 우리가 이 동네 풍습을 몰랐네그려. 무슨 말인지 다 아네. 알아서 잘 챙겨 드리지. 자네 이름도 좆인가? 잠깐 저쪽에서 조용히 얘기하려나?’
신사들은 이 조그만 야만인들이 의외로 말귀를 알아듣는다며 좋다고 따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좀 으슥한 데 들어서자마자 우뚝 멈춰서야 했다. 그야 갑자기 등에 칼날이 쑤셔 박히면 그럴 수밖에 없다.
정찰총국 요원들은 푸셰가 처음 구성할 때부터 엄격히 ‘혁명정신’을 심사했으니만큼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다들 평안도 신디케이트 시절부터 시준이 데리고 있던 충성스러운 청년들이다. 그래서 이 먼 이방에서도 ‘건드리면 안 되는 분’과 ‘담가도 문제없는 놈’을 잘 구별했다.
지금 찾아온 놈들은 후자였다. 영국은 아시아인이 얼마나 죽든 신경 쓰지 않았듯이 자기 나라 하층민 따위가 얼마나 죽는가도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의 죽음은 경찰의 수사 대상조차 아니다.
건달 중 눈치 빠른 놈들은 찔리기 전에 저항해 보았지만 북두의 계승자인 정시준 직속 요원들의 상대는 아니었다.
원래 신비한 오리엔탈 미스틱 마샬 아츠는 영국에서도 좀 먹어 준다. 오죽하면 미래 이 나라 작가 로널드 녹스가 추리 소설에 중국인 내보내지 말라고 일갈하였겠는가. 등장하기만 하면 닌자처럼 모든 인물을 한순간에 처치할 수 있는 게 중국인의 무술이다.
템즈강의 수면이 아주 약간 높아진 뒤에, 의원집은 순조롭게 문을 열었다.
그곳은 폭발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런던 시가지에서도 꽤 최근에 설계된 교외 거리여서 경찰이나 정치가들의 이목을 그다지 끌지는 않았다. 소문 좋아하는 호사가들이나 가끔 찾아들기 적당했다.
이 약방의 실체는 모호하고, 그래서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국 견문 임무의 자금 조달 방편일 뿐이라 동네방네 떠들 일도 아니었거니와 효성 깊은 조선 사람들은 본래 부모가 지어준 본명(휘)을 아무 데나 가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이강회 한 사람만 해도 운곡이니 유암이니 하는 자신의 호는 물론, 근본도 없는 즉석 창작 명자를 여러 가지 돌려가며 대었다.
헷갈리기 시작한 영국인들은 그냥 대충 중국인 같으니 중국스러운 이름을 붙여 주자고 합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베이커 스트리트의 왕 첸 약방’은 런던 사교계에 은밀하게 소문나기 시작했다.
***
시준이 자딘의 배에 약을 같이 실어준 건, 돈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니 영국 가서 적당히 생필품으로 교환하거나 소소히 팔아 여비 하라는 의미였지 본격적으로 의주 만상 짓거리 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혁명 동지들은 무슨 일을 시키건 혁명적으로 그 이상의 결과를 뽑아냈다.
지친왕이 부황의 죽음에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따라가겠다고 난리를 치고, 신하들은 ‘진짜 죽으면 재밌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의례적으로 말리는 동안 강남에서도 시준의 친구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황제가 죽은 탓에 북경 조정의 관심은 온통 열하에 쏠려 있었다.
상영귀는 지친왕의 손에 의해 진작 용의선상에서 빠졌지만 군주의 급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면밀한 조사가 있어야 했다.
인두와 곤장과 칼날 아래 가지각색 ‘진실한 자백’이 창조되었다.
‘범인’ 모두가 가경제에게 충성을 바치던 측근들이라는 점은 수상한 일이 아니다.
지혜의 왕이 지목하였다면 다 이유가 있다. 혹시 반대파 숙청 아니냐고 묻는 녀석은 황제 시해범의 도당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하나의 중국’아래 모든 인민이 수평하다고 여기는 천리교의 경우 그깟 황제가 뒈지든 말든 아무런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현재 북경의 긴장은 강남에선 기회일 뿐이었다.
탕!
이제부터 현청을 들이치겠다는 분위기가 별로 숨김없이 조성되자 병사들을 이끌고 나와 봤던 청포현(青浦縣) 현령은, 끔찍한 비명과 함께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에게 종말을 선고한 것은 상하이에서 온 명포수. 북두의 계승자 정시준의 무예를 그대로 전해 받았다고 소문난 기랑의 총알이었다.
기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총을 내렸다.
원래 머리를 날리려 했는데 거리가 멀어 빗나가 버렸다. 카빈이 숨기기엔 좋은데 총신이 짧아 명중률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현령이 처절하게 땅바닥을 뒹구는 모습은 오히려 일격에 살해당하는 참상보다 더 관병의 기세를 꺾었다.
그리고 기랑의 뒤에서 때를 놓치지 않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
북두에게 질 수 없는 남두성권의 용맹한 권술가들이 기랑의 좌우로 갈라지며 현청으로 돌진했다. 기경팔맥의 공력을 능숙하게 집중하기 위한 정신통일의 기합이 메아리쳤다.
“끼야아아압!”
그들은 마치 새 떼처럼 날아올랐다. 백여 개나 되는 변발이 폭풍처럼 나부꼈다. 관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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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운곡 이강회의 인생 후반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1833년경 아들을 본 것은 맞습니다. 이강회가 1789년생인 것을 생각할 때 (그게 장자라면) 상당히 늦죠. 그나마 나중에 양자를 들이는 것을 보면 일찍 죽은 듯 합니다.
작중에서는 원 역사처럼 스승이 귀양 가고 관직에 뜻을 접는 풍파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에(대신 다른 풍파를 겪었지만), 일전 한 번 나온 대로 이미 혼인하여 자식도 있게 되었습니다.
2. 20세기 초 영국 작가 로널드 녹스는 유명한 ‘추리소설의 10계’를 제시하며, 수수께끼의 중국인을 등장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마술이나 초능력으로 이야기를 해결해선 안 된다는 얘기였죠.
당대 영국인이 보는 ‘동양’의 이미지가 대강 그랬고, 영국인이 ‘전통’ 어지간해서 안 고치는 만큼 사실 지금도 별로 안 달라졌습니다.
3.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베이커 스트리트는 18세기 중반에 처음 설계되었고, 윌리엄 베이커라는 사람이 설계해서 베이커 스트리트입니다.
산업화로 인해 확장되는 런던 외곽 지역 중 하나였죠. 이곳은 19세기 후반쯤 가면 고급 주택가로 발전하며(셜록 홈즈는 가난한 하숙생이 아닙니다) 지금은 홈즈 관련 관광객을 노리는 상점가가 많습니다.
4. 청포현은 상하이 바로 옆의 현이며, 때에 따라서는 상하이에서 관할하기도 했지만 이 시절에는 강소 순무의 관할입니다. 다음 화에서도 이어서 언급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