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06화 (206/284)
  • 207화

    66. 1815년(2)

    우선 먼저 주지해야 할 사실은, 가경제가 연탄을 보고 ‘오오 이세계 굉장해!’ 하면서 쓰다가 가스 중독으로 죽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정보 확산이나 일반화가 잘 안 되어서 그렇지 연탄가스의 위험성 자체는 이 시대 사람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산화탄소니 헤모글로빈이니 하는 거야 모른다. 그러나 ‘더럽고 냄새나는 화기(火氣)’가 사람을 자면서 죽게 한다는 경험칙은 식자층, 특히 수수께끼의 변사사건을 자주 마주치는 수사기관 관계자에게는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사고가 원래 역사에서도 가장 많이 발생하던 곳이 (조금 후기의) 평안도다. 추우니까.

    19세기 초에도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래서 화둔법 제2장(안전난로) 또한 시준의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이 쓰고 있었다. 주석 동지의 현묘한 도술은 그 위명이 날로 높아져만 갔다.

    조선보다 훨씬 일찍 석탄을 난방에 쓰던 청에서도 당연히 안다. 따라서 지친왕의 영감은 잊어버린 사실을 떠올린 것이지 신문물의 발견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섣부르게 행동하면 안 된다.

    현재 지친왕은 북경에 유치한 수준의 친위세력을 구축해 놓았을 뿐이다.

    그나마 가경제가 열하에서 오랫동안 안 돌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만약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 ‘세력’은 짚검불처럼 흩어진다.

    지친왕에게 기회는 단 한 번. 그 한 번의 기회를 타고 가장 깊숙하게 찌르지 않으면 그는 죽는다.

    더 안전하고 정교한 방법을 생각해 보기에는 상황이 너무 다급하다.

    지친왕은 아직 가경제에게 명확한 항복의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다.

    가경제가 평소 사방에 자랑하던 높은 덕과 충만한 인내심도 거의 바닥났다.

    그리고 가경제가 더 참아야 할 만큼 지친왕이 만주 상삼기를 비롯한 청의 고위 계층을 확실히 장악한 것도 아니다.

    가경제 입장에서도 지친왕을 갑자기 적대하는 건 좀 부담스럽지만,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지친왕과는 처지가 다르다.

    가경제는 모든 정치적 불문율을 무시하고 아들에게 왕작 반납과 근신을 명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지친왕은 크게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하나는 왕작과 함께 모가지도 반납하는 것이요, 나머지 하나는 될 대로 돼라 외치면서 북경을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둘 다 지혜로운 사람이 함부로 할 일은 못 된다.

    팔기가 조선인들을 사로잡는 데에 실패했을 때, 지친왕은 영국과 손을 잡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곧 기각되었다. 그러면 가경제는 아들을 매국노로 몰아붙일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될 테니까.

    종합적으로 봤을 때, 지친왕이 살고 싶다면 아버지에게서 황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시준이 예물로 보낸 물건 중 지친왕의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큼지막한 칠보 궤짝이었다.

    물론 시준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지친왕은 이것을 시준의 암시라고 생각했다.

    조선인에게 저 나무 상자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지친왕은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다중우주의 갈피를 헤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지친왕의 머리에서 치밀하기 짝이 없는 대 전략이 직조되기 시작했다.

    ***

    열하의 가경제는 아들이 보낸 항복 선언에 기분이 좋았다.

    다소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좌우의 신하들이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탓이리라.

    아들 키우는 아버지는 다들 반항기를 겪는 법. 부친의 훈도를 오랫동안 못 받다 보면 자기가 스스로 뭐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차기 황제의 눈에 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주위의 간신들이 아첨을 한다면 더욱 그렇다.

    더 경험 많은 연장자로서 가경제는 그쯤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는 아들이 사죄의 의미로 보낸 측근 내관 상영귀를 자비롭게 맞이했다. 주군을 잘못 모신 죄로 나중에 죽이긴 할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자비를 보여줄 수 있었다.

    상영귀는 오랜 경력의 내관답게 그런 마음쯤 이미 알고 왔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한 치의 실례도 없이 황제의 장수를 축원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번에 싣고 온 보잘것없는 물목은 이번에 고려에서 들어온 공물인데, 변방 사람들이 경내의 여러 사체와 예의를 잘 몰라서 북경에 보낸 듯합니다. 따라서 왕이 마땅히 황상께 진상하러 피서산장(열하 별궁)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아랫사람’이 자신에게 바친 것을 그대로 올려 보낸다. 봉건 사회의 정수이며 세련된 동양식 굴복의 예법이었다.

    가경제는 만족했다. 이제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뒤주를 찾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공물’에 연탄이 있던 건 아니다. 재벌가도 차에 기름 넣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거기 휘발유 선물세트 보내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황제 앞에 내보인 것은 시준이 보낸 물건 중에서도 각종 사치품이었다. 그중에는 요즘 가경제가 애용하는 평안도 담배도 있었다.

    아편은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고 도저히 끊지 못하게 하여 끝내 말라 죽게 만들기 때문에 지혜로운 가경제는 그 독한 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삼등초(서초. 평안도 담배)는 달랐다.

    약효야 좀 떨어져도 그만큼 순했다. 아편처럼 갑자기 토하거나, 헐떡거리거나, 피부가 퍼레지며 쓰러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말을 들어 봐도, 아쉬워서 손이 가기는 하지만 잠깐 안 피우려면 얼마든지 안 피울 수 있다는 모양이다. 고려인민공화국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의 약은 역시 신묘했다.

    가경제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조선 ‘지방’을 다시 정복하면, 이 약을 특산품으로 삼아 아편을 밀어내고 청나라 백성을 구원할 원대한 구상이었다.

    아편의 무서운 습관성을 생각하면 그냥 금지만 해선 안 된다. 실제로 지금까지 실패하지 않았는가. 상아 젓가락과 옥 술잔[象著玉杯]을 빼앗거든 나무젓가락과 흙 그릇이라도 줘야 하는 법. 실로 성인의 치도였다.

    그러려면 자기가 친히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군주는 신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득제 등을 받아들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냥 청군이 압록강을 넘으면, 물론 영길리국이 그걸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북경에서 깽판을 칠 수는 있다.

    열하에 있는 가경제가 무슨 알 바냐고 생각되겠지만, 황금군주의 무한 대금고가 거기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조선 사람’이 조선을 수복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득제도 미쳤다고 아무 생각 없이 망명한 게 아니다. 이득제 역시 청이 자기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점, 그러려면 형식상으로라도 자신에게 군사를 내어줘야 한다는 점을 믿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가경제는 상영귀를 융숭히 대접하고, ‘지친왕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북경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상영귀의 말에 따르면 지친왕은 홑옷 차림으로 무릎 꿇고 있다 한다. 아들이 이 추운 이른 봄에 북경 성문 밖까지 나와서 황제가 오실 때까지 대죄하겠다는데 아비로서 안 갈 수는 없다.

    치기 어린 반항이고, 호들갑스러운 사죄라고 가경제는 생각했다. 평안도의 신묘한 약 덕인지 가경제는 한껏 관대하고 느긋한 기분에 잠겼다.

    ‘이것이 젊음인가.’

    대강 그것이 가경제의 기분이었다. 이 일이 잘 마무리되고 자신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나면, 안심하고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줘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아들 역시 제위를 기꺼이 계승할 생각이었다. 이런 황제를 수정해 준 뒤에.

    오랜만의 황제 귀환이 워낙 대사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들떠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래서 상영귀의 은밀한 손길에 의해 구멍 뚫린 화로 하나가 가경제의 마차에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본 몇몇 사람도 전혀 주의하지 않고 잊어버렸다. 날씨가 쌀쌀하고, 가경제가 계속하여 평안도 담배를 태우니 향로나 화로가 오가는 것은 그냥 일상적인 일이었다. 평안도 담배의 단점은 냄새가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다.

    청의 난방은 조선처럼 구들장을 널리 쓰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금속제 화로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손으로 잡고 있을 수 있을 만큼 정교한 금속 손난로도 있었는데, 이는 빈(嬪)이상만 쓸 수 있었다. 땔감의 양도 엄격히 차등이 있어서 아랫것은 그냥 추우라는 식이었다. 왜 황후 자리 올라가기 위해 그 끔찍한 궁중암투가 벌어졌는지 잘 이해할 수 있다.

    청나라가 돈이 없어 그런 게 아니다. 상병 이하는 깔깔이 입고 다닐 수 없다는 한국 일부 군부대의 창의적 규칙이 군대에 옷이 없어 정해진 건 아니지 않는가(그래도 청나라는 한국군과 달리 법적으로도 근거 있는 차별이긴 하다).

    그것이 상하의 엄정한 ‘질서’다. 아랫사람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윗사람으로 하여금 이 자리에 내가 ‘노력해서 올라온’ 보람을 느끼게 해 줄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황제 전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금은으로 아름답게 새겨진 고급 장식은 물론, 위에 덮인 격자 철망까지 구석구석 매우 꼼꼼했다.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간판 걸고 있는 블룸즈베리 이집트 전당포의 장물아비들이 하나같이 탐낼 만한 품질이었다.

    따라서 안에 ‘고려의 저질 석탄’이 들어가 있다 한들, 작정하고 의심하여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상영귀는 그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마차에 화로를 넣은 상영귀는 황제가 이제 누구와 말할 상태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려의 약초’에 ‘영길리 약’도 조금 섞은 것이 주효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친왕의 약은 아니다.

    상영귀는 물러나와 짐짓 큰 소리로 주위 사람들을 내몰았다.

    “봄이라 하나 아직 이르고, 북방의 날씨는 엄혹하다. 너희는 황상의 가마에 비단을 덮고 창을 잘 닫아라. 먼 길 가시는 옥체가 만에 하나라도 상해서는 안 되느니라.”

    백번 옳고 또 옳은 말이었다. 게다가 상영귀는 본래 내관 중에서도 높은 직책. 이 잠깐의 정치적 혼란이 정리되면 지금 열하에서 온 내관들도 그를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상영귀의 말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래서 가경제의 최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

    일찍이 시준이 이요헌의 처우를 두고 망설일 때, 현 선전선동부장 조제프 푸셰는 시준에게 눈앞의 인재에 아까워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존경받는 대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를 단호하게 처치했다. 과학자는 또 뽑으면 된다.

    아쉬운 것은 시준이 라부아지에가 누군지 잘 몰랐다는 것이다. 시준 같은 보통의 한국인은 뉴턴(와! 사과나무!)과 아인슈타인(와! 원자폭탄!) 정도만 알면 인생에 아무 지장 없을 만큼 과학사에 충분한 교양을 갖춘 것이다.

    하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시준 또한 나도 그거 안다며 반가워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명성을 떨칠 만큼 유명한 법칙을 남겼으니, 라부아지에의 일생도 그가 탐욕스럽게 긁어모은 황금 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지 모른다.

    어쨌든 그 법칙은 이번에도 작용했다.

    한 명의 황제가 죽은 바로 그때, 다른 한 명의 황제가 부활했다.

    엘바를 탈출한 나폴레옹은 거침없이 북상하여 튈르리 궁에 입성했다.

    라부아지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서쪽의 프랑스는 동쪽의 조선과 쌍벽을 이루는 과학 선진국이다.

    루이 18세가 보낸 수만 명의 토벌군은 조선군마저 감탄할 위상 도약을 보여주며 나폴레옹 쪽으로 진영을 위치 이동했다.

    동쪽에 ‘도주’의 조선군이 있다면 서쪽에는 ‘항복’의 프랑스군이 있다. 용호상박이란 바로 이것을 이름이다.

    몇만 명 정도야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반세기 뒤에는 20만 대군이 반년 만에, 한 세기 뒤에는 그 몇 배가 단 6주 만에 독일로 도약하는 수준까지 발달하게 된다. 19~20세기의 과학 발전 속도는 이토록 눈부신 것이었다.

    부르봉 왕가는 침착하게 외국으로 튀었다. 처음 해 보는 일도 아니라서 다들 짐을 능숙하게 쌌다. 이제야 최속군주의 경지에 약간은 다가섰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대로 바이올렛 꽃이 만발할 무렵 파리에 돌아온 나폴레옹의 위업은 그야말로 소설 같았다.

    엘바에서 캠벨 대령이 (비밀 서류를 끼우는 위장용으로) 건네준 몇 권의 ‘중국 책’을 읽은 뒤로 소설 얘기하면 화내는 것 같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이 대사건에서 누구의 일기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 소식은 당연히 전 유럽에 벼락같은 속도로 퍼졌다.

    그리고 런던 증권가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팔아! 매도하라고!”

    “지금 시가에 팔면 저희 망합니다!”

    “이런 개 같은, 그 아시아 소설마냥 알렉산드르에게 엉망진창 범해지기나 할 프랑스 새끼가!”

    “어, 자네는 그쪽을 지지하나? 나는 반대가 더…….”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주둥이들 닥쳐, 좀! 회원 제명당하고 싶어?”

    장기적으로 봤을 때,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치솟았던 물가와 박살 났던 주가는 연속적으로 회복된다.

    1815년의 엘바 탈출 덕분에 요동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일이다. 프랑스 혁명기부터 휘청대던 유럽의 경제는 나폴레옹의 전성기를 그 최저점으로 찍은 뒤 안정세로 돌아선다.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역사의 분기점이라기보다 일종의 해프닝. 불과 석 달의 ‘소란’이었을 뿐이다.

    돌아온 나폴레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도 아니었다. PTSD 발작을 일으키는 다른 유럽 국가들 상대로, ‘실례합니다만 지금 불타고 계십니다’ 운운하며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고 평화 협정을 맺으려는 눈물의 항문쇼가 나폴레옹의 첫 업무였다.

    나폴레옹이 돌아왔지, 러시아에서 산화한 대육군이 돌아온 게 아니니 당연한 판단이다. 대세는 이미 끝나 있었다.

    나폴레옹에게 금방 붙어버린 루이의 토벌군은 바로 그래서 쓸모가 없었다. 다음 전쟁에 그들이 프로이센이나 영국 쪽으로 또 위치 이동해 버릴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로써 본다면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제국의 성세를 다시 이룩했을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냉정하고 현명한 관찰자라면 여기에서 패닉 셀은 지양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냉정한 사람은 주식 같은 거 안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사람들로만 가득하게 된 이 런던 증권가는 아주 후끈후끈했다.

    다행히 이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줄 구원자가 하나 있었다.

    지금 이 존경받는 ‘증권거래소 회원’들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한 신사 주위로 몰려들었다.

    “자딘 박사. 우리가 가진 전쟁국채(War bonds)를 구매해 준다면 수수료 없이 바로 직거래하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소. 훨씬 싸게 사실 수 있겠지.”

    “내가 거래소 사무국 명단에 게재되지 않은 민완 중개인을 아는데…….”

    당당히 나붙어 있는 증권거래소 규칙을 개뼈다귀만큼도 존중하지 않는 다급한 제안이 쏟아졌다.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의 사장이며, 동인도 회사에게 공인받은 아시아 무역상이고 반왕 정시준의 친구이기도 한 윌리엄 자딘은 반스의 원고보다 두 달쯤 늦게 런던에 돌아와 있었다.

    설날 주석기 체육대회가 끝나자마자 출발했으니 이것도 엄청나게 빠르게 온 것이다. 그리고 자딘은 정말 적절한 때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자딘은 관대하게 말했다.

    “수완 있는 신사분들과 거래하는 것은 나의 명예지요. 다만 문제는 자본에 한도가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요즘 런던 사교계의 화제인 반왕 정시준이 나를 후원하고 있소. 다만 규칙이 좀…….”

    런던 증권거래소의 중요한 규정 중 하나는 ‘특별한 사유 없이는 외국인이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준은 이를 위해 ‘왕’인 이공을 자기 신원 보증인으로 세운 다음 자딘에게 대리인을 맡겼지만 이미 죽은 강철군주는 더 이상 시준을 보증해 줄 수 없다.

    회원들은 규정이란 거래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 악마도 도망칠 시장에서는 마땅히 유연함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리 절단자 정시준이라면 극동의 공화주의자라는 혁명가 아닌가? 더 타임스의 보도에서 분명 읽은 적이 있어.”

    “그렇다면 아시아인이라 할지라도 신사들의 사교에 참여할 자격이 있지. 무엇보다 자딘 박사가 보증하는 사람 아닌가!”

    “나는 그가 기독교도라는 소문도 들은 것 같은데.”

    “자네도? 나도 마찬가지로 들었네! 그렇다면 그는 우리의 형제야!”

    “잠깐, 그런데 그 평전을 쓴 조제프 푸셰가 붙었다면 국교회 신자나 청교도가 아닐 테잖아. 가톨릭이라면 좀…….”

    “야, 누가 저 눈치 없는 새끼 좀 끌어내.”

    제멋대로 굴러가는 설정 추가 끝에, 회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식이라면 무릇 형제를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국경이니 인종이니 하는 하찮은 사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짓은 신사의 명예에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일이었다. 그런 건 전제 군주 좋아하는 대륙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부당한 인종 차별을 시정하지 않으면 증권거래소를 불태워 버릴 것 같은 회원들의 ‘권유’에 결국 위원회도 설복되었다.

    정시준은 ‘기꺼이 나선’ 열 명의 기존 회원들을 신원 보증인으로 세운 다음 정식으로 국채를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정시준은 런던 증권거래소의 정식 회원이며, 윌리엄 자딘은 그 대리인이다.

    그리고 국채를 사들여 줄 수 있다는 자딘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아무리 공화국이 돈이 없네, 시준이 재산을 보전해야 하네 해도 개인 혹은 (아직 원시적인) 기업 투자자 따위와 일국을 뒤흔든 신디케이트 두목 겸 국가 지도자가 그 규모에서 비교될 수는 없다.

    아시아의 재산 가치가 유럽보다 많이 낮다는 것을 감안해도, 언제든 주석 자리 탈주할 생각 만반이었던 시준이 가진 대부분의 재산은 세계 어딜 가나 가치 높은 귀금속류다.

    자딘은 충분히 신사들을 만족시킬 만큼 주식을 사들였다. 물론 시준과 자신도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 값을 후려친 채였다.

    환생 이후로는 런던에 와 본 적도 없는 정시준은 일약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다.

    더 타임스에는 정시준에 대한 문의가 갑자기 쏟아졌다. 신사들은 다투어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와 코리아 뭐시기 공화국의 앞날을 축복했다.

    물론 다들 뒤에서는 다행히 호구 놈들 잘 잡았다며 슬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어디 동양의 부유한 군주가 문명인의 게임에 끼어 보고 싶어 한 모양인데 그들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자딘이 거래소를 나서자, 그가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인도인’이 옆에서 물었다.

    “이제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가?”

    인도 하인치고는 말버릇이 고약했지만 자딘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지금 이 ‘인도인 수행원’은 혁명해군 2함대 제독 문순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자딘은 말투 따윌 탓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횡설수설했다.

    “오, 이런. 난 정말 몰랐어. 의장은 대체 어떻게 나폴레옹의 탈출을 예견했지? 주여, 나는 본래 점 따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의장의 말대로 안 할 수가 없잖아. 다 샀어, 의장의 돈뿐만 아니라 내 돈도 다 갖다 처박았다고! 만약 올해 나폴레옹이 파멸하지 않으면 내가 파멸하는 거야!”

    문순득은 머리에 쓴 이 이상한 천모자(터번)가 좀 거슬렸다. 그는 그걸 풀어내려다 여기에서는 좀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순득은 들어 올렸던 손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거 말 많네. 올해까지라고? 그러면 길어야 반년 좀 넘게 기다리면 되겠네그려.”

    “당신은 정말 아무 걱정도 되지 않소? 나폴레옹이 올해 안에 거꾸러질 것 같으냐는 말이오? 제기랄, 내가 지금 누구한테 뭘 묻고 있는 거야. 우린 프랑스군의 움직임이나 영국 정부의 대응도 알아볼 새도 없이 런던에 바로 달려와야 했다는 말이오!”

    문순득은 다른 혁명해군과 달리 이제 정말 영어를 잘 한다. 하지만 흥분한 자딘의 다다다 내쏘는 주절거림은 영국인도 다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문순득은 그럴 때 조선 사람이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난 다 알아들었지만 네 말은 별것이 아니다’라는 표정을 만면에 지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진인께서 말씀하신 것 중 여태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게 있나? 거 뭐라더라. 자네들 길리시단 말로……. 아, 그래. ‘믿음이 부족한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는 것인가[thou of little faith, wherefore didst thou doubt]’? 마음 탁 놓고 기다리면 그저 다 잘 될 걸세.”

    동양인의 능숙한 킹 제임스 성경 인용을 듣자 자딘은 냉정을 되찾았다. 어처구니가 날아간 데 대한 영혼의 긴급 조치였다.

    문순득은 그런 자딘을 내버려 둔 채 제 고향처럼 휘적휘적 런던 거리로 걸어 나갔다. 하긴 필리핀까지 표류하고도 살아 돌아온 사람인데 표류도 아닌 런던 항해 따위 문순득의 배짱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시크교도는 뭔데 저리 시크하냐는 표정으로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문순득은 오히려 그들을 마주 구경하듯 빤히 건너다보았다. 런던에서 발휘되는 공화국 시민의 기개가 이와 같았다.

    영국인들도 헛기침을 하며 가던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시크교도는 다들 무술의 달인이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자딘 역시 헛웃음을 짓고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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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상아 젓가락과 옥 술잔이란 주왕의 사치를 말합니다(당시 중국엔 코끼리가 살았습니다).

    그리고 전개와는 별 관계없지만, 휘발유 선물세트 얘기 나온 김에… 재벌가에서 쓸 비싼 고급차는 휘발유도 하이옥탄 가솔린을 써서 기름부터가 다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불붙이면 활활 타기는 마찬가지죠.

    2. 영조의 과학 실험을 청에서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를 리는 없었다고 봅니다.

    3. 대영 박물관은 이때 공개 이후 5, 60년 정도 된 ‘젊은’ 박물관이겠군요. 처음부터 이집트 (약탈) 유물 전시 목적으로 시작된 박물관이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장물아비들의 전당포가 맞습니다. 블룸즈베리는 런던에서 대영박물관이 있는 거리의 이름입니다.

    4. 반세기 뒤의 20만 대군 항복은 보불전쟁, 한 세기 뒤는 잘 아시는 그 ‘6주’입니다.

    5. 이때 주식시장은 현대보다 좀 원시적이라, 사기업보다는 주로 국채가 거래 품목이었습니다. 옵션이라든지 초보적 파생상품의 거래가 활발해지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된 이후입니다.

    6. 중개인의 역할, 직원의 명단 공개 등 작중 서술된 19세기 초 증권거래소의 규칙은 대부분 사실이나, 시준이 왕 혹은 열 명을 보증인으로 세운다고 해서 회원이 될 수 있던 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한 회원들의 권한은 서로의 소개로 (내국인을) 입회시키거나, 75%의 찬성으로 누군가를 제명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말이죠.

    7. 나폴레옹의 엘바 탈출 이후 영국의 전쟁국채는 (당연히) 하락, 워털루 전투 이후 급등합니다. 다만 작중 나폴레옹 전쟁기를 전후한 유럽 경제 서술은 주식보다는 주로 물가를 기준으로 서술되었습니다.

    물가란 게 심리를 반영해서 그런지, 1815년의 탐보라 화산 폭발 이후 16~17년 심각한 곡물 부족과 전염병 사태가 있었는데도 19세기 초 물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적어도 의류, 식생활, 목재 등 일부 품목에서는) 화산보단 나폴레옹 전쟁인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자료는 N. J. Silverling의 원고 입니다.

    8. 터번은 시크교도의 상징 같은 물건이죠. 현재도 영국군의 시크교도 부대는 터번 착용과 수염이 허용됩니다. 영국군이 왜 이 부대를 유지하고 있느냐면, 구르카 연대와 비슷한 경우인데 시크교도는 교리상으로 육식과 운동을 장려하기 때문입니다. 인도 본토에서도 군 요직에 많이 진출해 있습니다. 다만 시크하다라는 말은 원래 독일어가 어원이며, 이때는 그런 뜻으로 쓰이지도 않았고, 시크교와는 당연히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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