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66. 1815년(1)
당시의 교통망으로 극동아시아에서 유럽 간 소식이 전달되기까지는, 아주 빠를 경우 감자 파종에서 수확과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여유를 두어 4개월 정도로 잡으면 그럭저럭 큰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선박과 선원과 선주, 해상보험사, 그리고 중간의 여러 거간꾼이 각자 원만하게 지내기 위한 업계 상례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지만, 사람이란 게 절박하면 증기선이나 철도 없어도 다 하게 되어 있다. 그건 위대한 최속군주가 몸소 증명했다.
특히 유통망의 ‘소유주’가 중대한 사안이라고 결정했다면, 그 소식은 보통의 상식을 훨씬 넘어서 빠르게 가 닿을 수 있다.
이를테면 ‘주중 영국 공사가 개인적이고 군사적인 야심으로 동맹국의 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대형 고발 같은 것이 그렇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문명의 싹’을 틔우려는 그 동맹국의 맹아를 짓밟는 일은 동인도 회사로 하여금 ‘사감 없는 공적이고 윤리적인’ 의분을 일으키게 했다. 그들은 명실상부 ‘명예 회사’ 였으니까.
따라서 이 충격적인 소식은 많은 쾌속선박을 가진 동인도 회사가 한시바삐 런던의 신사들에게 알려야겠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참에서 말 바꿔 타듯 배를 바꿔가며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송부된 그 원고는 그 해 봄보다 먼저 유럽에 도착했다.
1815년 2월 하순, 토마스 반스의 장문 원고가 런던에 입항했다.
(푸셰의 정시준 평전과 월간 대혁명도 입항했다.)
물론 중국 공사에 대한 모함과 영국의 해외 정책에 대한 격렬한 비난을 즉시 보도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존 월터는 또다시 런던 브리지 위에서 감옥 생활을 만끽해야 할 것이다. 이때 신문 검열은 기본 사항이었다.
따라서 그 흥미로운 고발은 먼저 정계의 높으신 분들에게 들어갔다.
나폴레옹을 엘바에 처박은 후에는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릴 여유도 생겼기에, 이 동방의 반왕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 신경 쓰는 호사가도 런던에 꽤 있었다.
지금 영국군 대령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닐 캠벨(Neil Campbell)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많은 군사적 성공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름 앞에 경(Sir)이 붙는 것도 바로 올해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캠벨 대령은 어떤 의미에서 정시준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정시준처럼 그 역시 군주를 압송해서 섬이라는 감옥에 가두었다. 비할 데 없는 용맹으로 프랑스군을 수차례 깨뜨렸으며, 그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나폴레옹을 엘바로 호송한 사람이 바로 캠벨 대령이다.
물론 캠벨은 ‘문명인’이기 때문에 아시아의 반왕 정시준처럼 나폴레옹의 다리를 자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준 때문에 캠벨의 보기 드문 타이틀, 그러니까 황제의 구속자라는 캐릭터가 아주 약간이나마 희미해지는 것도 분명했다.
캠벨 대령은 그 복잡한 감정을 영국식으로 표현했다.
“동방의 반왕이 군주의 다리를 베면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범하는 배덕감을 느꼈을지 궁금하군. 보나파르트 역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매력적인 신사였지. 감히 말하건대 그와 환담한 몇 시간은 내 인생의 다른 어떤 몇 시간보다 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정도네.”
영국인은 프랑스를 싫어했을 뿐, 나폴레옹이라는 개인 자체는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영국인은 ‘황제에 대한 경의’를 유지했다. 나폴레옹을 만난 모두가 ‘그 멋진 남자’의 ‘유쾌하고 인자한 미소’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엘바 탈출 전후로 나폴레옹과 접촉한 영국인 다수의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이 무슨 최음약이라도 뿌린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다.
명색이 호송자 겸 감시자였던 캠벨 대령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는 이때 표면적으로 나폴레옹과 불편한 관계였다.
엘바의 영주 나폴레옹은 갑자기 그를 식사에 초대하지 않았으며, 캠벨 대령은 ‘이 경멸스러운 모욕’에 대한 적절한 처신으로 나폴레옹을 방문하는 횟수를 크게 줄였다.
마치 탈출해 보라는 듯이.
나폴레옹의 엘바 탈출을 영국이 방조 혹은 지원했다는 주장과, 그건 나폴레옹이 동맹국을 이간질하기 위해 퍼뜨린 역정보라는 주장은 현대까지도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캠벨 대령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면 어느 것이 맞는지는 당대에도 불분명했던 듯하다.
캠벨 대령에게 원고를 갖다 준 사람인 더 타임스의 사장, 존 월터 2세는 예의 있게 그것을 모른 척해 주었다.
발빠른 언론인인 월터는 대프랑스 동맹이 벌써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영국이 ‘프랑스와’ 비밀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상대하려 한다는 조짐도 알아채고 있었다.
그는 대령의 언외언을 짐짓 전혀 못 알아들은 척하고 유럽 밖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것 또한 영국인의 사교술이다.
“나폴레옹이 그의 경찰장관 조제프 푸셰를 이미 몇 년 전부터 조선에 파견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혹시 나폴레옹이 극동아시아로 달아나 재기를 꾀할 수도 있으니, 그 식인귀(Ogre)의 감시자인 대령에게 알리는 것은 대령의 친구인 나의 의무겠지요.”
“농담이겠지? 그는 유럽의 황제였고, 유럽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 그가 내쫓기면서도 위엄을 움켜잡으며 루이(루이 18세)에게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궁전의 침대를 거론하며 ‘시트 정도만 갈아 둬라. 곧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던가요. 하긴 그 정도 기개도 없으면 나폴레옹에게 엉망진창 짓밟힌 독일인들이 어디 밤잠이나 자겠습니까.”
존 월터의 대답에 낄낄대는 웃음이 섞였다.
그는 경박한 태도를 주의 깊게 유지하면서, 캠벨 대령에게 뭔가를 캐내기 위한 돌을 조심스럽게 던져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바이올렛 꽃이 필 때 돌아오겠다고도 했는데, 곧 그럴 계절이 되었군요.”
캠벨 대령은 비슷한 연배의 지인인 월터의 속임수에 살짝 넘어가 주었다. 그는 의미 깊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정말 그 계절이 되었지?”
존 월터는 파이프 연기 사이로 캠벨 대령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러나 대령은 더 이상 월터에게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았다.
“어쨌든 조제프 푸셰가 동아시아의 유력자 하나를 붙들고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는 거라면 로드 암허스트는 진작 그를 죽였을 걸세. 그렇지 않았던 것을 보니 이건 진짜로군. 꽤 흥미로워.”
“그렇지요? 철학도 계몽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다 건너뛰고 혁명이라니, 아무리 프랑스인이 있었다고 해도 희한합니다. 오트란토 공의 교활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아요. 로드 암허스트조차 정시준은 다루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로드 암허스트의 이름이 나오자 캠벨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이건 내 사견이네만, 중국에서의 잔학 행위는 별다른 스캔들이 못 될 걸세. 그러면 인도군 사령관들은 한 달에 한 번씩 갈렸어야 할걸? 그러나 만약 남작이 동인도 회사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면, 의회로서도 굳이 그를 동아시아에 억지로 붙들지는 않을 거야. 아직은 왕국에 회사가 필요해. 중국 공사와 그…… 코리아(고려) 공사라면, 글쎄, 다른 ‘원만한’ 적임자도 많지 않겠나?”
존 월터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정보를 잡아냈다. 캠벨 대령이 로드 암허스트의 향후 처우를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정계의 중심과 끈이 닿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대령이 자신에게 일부의 정보를 제공하는 호의를 보여주었다는 것.
그렇다면 월터 역시 호의로 보답해야 한다. 더 타임스의 보도는 영국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로드 암허스트 개인의 일탈을 비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캠벨 대령은 존 월터가 내민 여러 사본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엘바에 가 보는 것도 좋겠군. 이 책을 전해 주면, 시골에서 지루해하고 있는 ‘황제 폐하’께 심심파적이라도 되지 않겠나.”
존 월터는 아마 지금쯤 한창 탈출극 준비할 나폴레옹이 절대 무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뭐든 걸 수 있었다.
허나 그런 의사는 말이나 표정 어느 쪽으로도 내보이지 않았다. 월터는 그저 웃으면서 대령과 작별했다.
***
“우오오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드는 저 멧돼지 같은 노란 털의 짐승을 보면서, 시준은 왜 조선인들이 유럽인을 가리켜 ‘바다에서 온 귀신새끼[洋鬼子]’라고 부르는지 실감했다.
시준은 왼발로 땅을 힘차게 디뎠다. 그러고는 오른발을 휘둘렀다.
목표는 저자가 몰고 오는 공이 아니다. 저자의 무게가 실리는 다리다.
그대로 걷어차 버리면 시준의 발도 무사하기 힘들다. 어쨌든 이 시대에는 첨단 소재 축구화가 없다. 이런 거 하면서 부상 걱정하는 인간은 공화국 전체를 뒤져도 시준 혼자뿐이긴 하지만.
그래서 시준은 자기 오른발이 상대에게 닿기 직전 속도를 극적으로 줄였다.
그리고 시준의 발등이 상대의 정강이에 부드럽게 얹히자, 시준은 허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걸린 힘을 일시에 폭발시켰다.
20대 초중반, 육체의 절정기를 맞는 시준의 체구는 유럽에 가도 척탄병으로 뽑힐 수 있을 정도다. 시준의 주변에 그보다 큰 사람은 홍총각뿐이다.
게다가 체격에 비해 힘도 셌다. 토마스 반스는 공중을 거의 한 바퀴 완전히 돌고 나서 땅에 쓰러졌다.
반칙이 아니다. 이는 케임브리지 출신 (자칭) 풋볼 마스터 토마스 반스가 보증한 정통 영국식 규칙이다.
따라서 시준은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공을 몰고 나아가서 걷어찼다.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의 명 골키퍼는 절대 공을 놓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시준의 공이 뻗어가는 방향을 즉시 포착했고, 그래서 그 반대쪽으로 뛰었다.
하도 폭력적 반칙이 많아서 도입된 ‘심판’이 손을 번쩍 들었다.
뭔가 자기 역할을 착각했는지 혼례 집사(사회자)처럼 예복을 갖춰 입고 나와 뛰어다니느라 꽤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목소리 하나는 우렁찼다.
“평안도 패 득점이오!”
이제초가 때를 놓치지 않고 흔드는 깃발에 맞춰,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응원단이 북을 두드리며 고함질렀다.
정시준의 초상화가 21세기 프로팀 서포터즈 부럽잖을 일사불란함으로 펄럭였다.
“와아아! 주석 동지 만세!”
시준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세레모니를 펼치는 대신 쓸쓸하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겨울 하늘이 참 맑았다.
상하이에서 돌아와서 잘 놀고먹다가 축구 한다는 소리 듣고 갑자기 거품 물며 뛰어든 토마스 반스의 눈치 없음만 제외한다면, 이번 설날을 기념하여 실시된 제2회 주석기 체육대회도 성황리에 끝을 보고 있었다.
윌리엄 자딘이 절뚝대며 다가와 시준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예선전 때 홍총각에게 들이받히는 바람에 뒤의 경기를 못 나오게 된 참이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유감이 없어 보였다. 이 시대의 ‘경기’라면 그 정도 위험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자딘의 목소리는 우호적이었다.
“공화국 정부는 이제 완전히 안정을 찾은 듯합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딘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시준은 이제야말로 자신이 은퇴할 정당성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공화국은 이제 수상쩍은 종교나 광기가 아니라 보편적 정부가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나라로 비춰지는 것이다.
‘외국인도 그리 볼 정도면 이제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군.’
그래서 시준도 웃으면서 수건을 받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러고 나면 자유롭게 당신 회사와 사업할 수 있을 텐데.”
당연하게도 자딘은, 내년에 있을 2번째 총선거에서 자신을 물심양면 밀어주면 다음 임기 때 더 많은 이권을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에 약속하겠다는 정치적 야합으로 이해했다.
그런 종류의 야합은 영국인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딘은 의장이 좋아한다고 들은 ‘얼음 넣은 커피’까지 내밀었다.
“그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각하.”
시준은 별 생각 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윌리엄 자딘은 이 동업 관계가 더욱 공고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딘의 말대로 이 행사는 공화국이 조선 전역을 안정적으로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었다. 시준이 싫어도 나온 이유가 있다(다만 씨름만은 절대 다시 출전하지 않았다).
각지 인민위원회는 체육대회 핑계로 일종의 약식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말 그대로 약식이긴 하지만, (인두세인 군포가 없어서) 사람들이 조사에 잘 협조한 만큼 조선 왕국보다는 만족할 수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공화국이 현재의 임시 총력 공동생산 체제를 버리고 정식 국가체제, 그러니까 세금의 창설로 이행할 밑준비가 된다.
지금은 누가 부유하고 가난하고를 따지기 이전에, 줄초상 안 나려면 창고 밑바닥 쥐가 쏠아버린 곡식까지 다 쓸어 담아 삶아 먹어야 할 판이라 세금 부과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왜 조별과제 내가 열심히 했는데 쟤가 점수 받느냐는 유서 깊은 항의도 아직은 없었다.
자기가 눈치 빠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조농장에서 게으름 피우다가 분배되는 곡식만 가져가는 일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통은 분조원들에 의해 멍석에 말리는 선에서 해결되고 그 이상의 문제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원래 품앗이 같은 공동 노동을 많이 해 봐서 집단농장에도 그 지혜를 유연하게 적용할 줄 알았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사유 재산권이란 개념 자체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아 그것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크지 않았다. 시준은 이래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초기에는’ 괄목할 만한 발전상을 이룩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쨌든 장기적으로는 공정하게 세금을 걷을 토대를 마련해 줘야 했다. 꼭 국고 때문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존재를 계속 인민에게 확인시켜 준다는 면에서도 세금은 필요했다. 조세 제도의 정립과 함께 사유 재산제도 확립될 것이다.
그리고 단기적인 목적도 있었다.
이번의 조사는 인민위원회의 눈길에서 누락되어 있던 ‘수상한 녀석들’을 걸러낼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방우정이 지휘하는 국가보위총국은 이번에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지역 대표 선수를 뽑으려면 당연히 지역 장정들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장정들은 운동선수도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반동의 사병도 될 수 있다.
혁명 직후의 혼란에 편승하여 여기저기 도망쳐 신분을 바꾸고 숨어 있던 반동이 속속 적발되었다. 심지어 체구 장대하여 반동에게 병사로 포섭되었다가, 같은 이유로 고을 대표 씨름선수로 뽑힌 사례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 자들은 경흥부 아오지 탄광을 비롯한 각종 노동교화소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석탄도 석탄인데, 정치국에서 최우선 혁명과업 중 하나로 결의한 평양부-한양군-단전성의 도로 개보수에도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 제2회 주석기 체육대회는 그냥 시준이 고통받으라고 개최한 행사가 아닌 것이다.
그간 혁명정부가 진행해 온 여러 사업을 최종적으로 보완하고 미래의 대비도 갖춰 두는 일종의 작은 전환점이다.
따라서 윌리엄 자딘의 평가는 꽤 정확한 것이었다. 그 뒤가 다 어긋나버렸다는 게 문제지만.
목적이 있던 행사인 만큼 예기치 못한 사고는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시준이 씨름한다고 중인 환시리에 옷 벗고 나오지 않을까 하여 나와 봤던 지유도 안심하고 들어갔다. 기랑이 중국 가 있어서 이번에는 김부용과 함께였다.
그러자 시준 역시 대충 더운물 끓여서 끼얹고 다시 주석당에 들어와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조촐하게 럼주에 보리개떡이나마 차려서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을 해야 했다.
일이 많지만 회식에도 빠질 수가 없어서, 체할 것 같은 술 먹고 사무실 복귀해 다시 야근하던 전생이 생각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시준은 분노해서 휘갈겨 쓰던 서류를 다시 보고 한숨을 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막 쓰면 안 된다. 게다가 시준의 별로 훌륭하지 못한 필체로는 더욱 그렇다.
시준은 주석결사옹위대를 불러 나가서 김정희 좀 잡아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작년까지라면 김정희는 대서소나 운영하던 민간인이다. 따라서 주석이 시키는 일 하러 대기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올해 들어 총괄서결부의 서기국장(書記局長)으로 특채되었다. 이러면 얘기가 다르다.
집에서 잘 자고 있던 김정희는 주석결사옹위대 청년들이 봉창을 뜯어낼 것 같은 기세로 쳐들어오자 크게 놀랐다.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타나자 시준은 당연하다는 듯이 ‘주석 친필 서신’의 대필을 떠넘겼다.
김정희는 혁명정부에서도 정사장 써 던지고 표표히 고향 돌아가면 사람들이 기개 있는 선비로 인정해 줄지 고민했다.
그러나 기개 있는 선비라고 해서 인민위원회에서 보리쌀 한 자루 더 주는 건 아니라는 게 조선 왕국과 고려인민공화국의 차이였다.
김정희는 비슷한 고민 하는 많은 공무원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다. 즉, 이 안정적 직장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김정희의 무수한 갈등을 전혀 모르는 시준은, 야근시키는 상사가 으레 그렇듯 고마움 따위 눈곱만큼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필체로 써 주시오.”
“예? 아, 그렇군요. 연경에 보내시려는 것이군요.”
김정희는 다 포기하고 시준의 개발새발 글씨를 – 김정희에겐 그렇게 보였다 – 죽 훑어보았다.
수신인의 신분이 좀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내용이야 공화국이 항상 하던 장사 얘기였다.
그리고 김정희는 이제 혁명정부의 간부였기에 그 신분에 위축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달관한 태도로 앉아 먹을 갈기 시작했다.
***
시준이 공화국의 외교 전술로 삼은 것 중 하나는 모호함이다.
상대방에게 자신이 적대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잘 모르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것을 위해 시준은 상대가 정색하고 기분 나쁠 것 같으면 우호적 손길을 내밀고, 상대가 우리에게 아쉬운 게 있는 것 같으면 강경하게 나가 많은 것을 얻어냈다.
화전양면전술이라는 간단한 이름 두고 왜 그렇게 길게 설명하느냐고 말하면 시준은 화를 벌컥 낼 것이다. 맹세코 시준은 그런 국제 깡패들의 외교 수법 따위 본받지 않았다.
북한이나 고려나 국제적 약자라는 점에선 같으니 대응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 합리화는 시준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득제가 넘어가서 무슨 말을 했을지 모르는 청나라, 그중에서도 지친왕에게 시준이 갑자기 ‘화목한 교우’와 ‘옛 우정’을 나불거린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이 다 잊어버리긴 했지만 지친왕은 그 이름대로 지혜의 왕이다. 반란 진압과 영국과의 조약 과정에서 찬란히 빛난 그의 지혜는 아직 쇠하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에서 정시준과의 소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
현재 아버지 가경제는 지친왕에게 양위를 하지 않고 있다. 자기가 정권을 쥐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친왕을 소환하지도 않고 있다. 권한은 쥐고 싶지만 책임은 지기 싫고, 게다가 잘못하면 지친왕이 이판사판으로 북경의 행정력을 장악한 다음 패륜을 저지를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이런 소강과 긴장 상태에서, 시준이 내민 손길은 가경제에 대항하는 동맹의 제의로 해석되기 충분했다.
물론 면녕이 이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일 수야 없다.
그래서 시준이 보낸 제안도 형식적으로는 (개항장인 천진이 아니라) 북경에 들여보내는 고려 상인단의 출입 허가 요청이었다. 저 영길리인은 믿을 수 없으니 오래된 우정이 있는 우리와 잘 지내보자는 얘기였다.
허나 사사로운 옛정에 얽매이지 않기에 면녕이 지혜의 왕인 것이다. 그가 보기에도 개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속셈이지……?’
예전 같으면 오랑캐 장사치가 이런 서신을 지친왕에게 보낸 것만 해도 효수가 마땅한 죄다.
그러나 요새 하도 굴욕의 생활화를 겪어서 그런지 이 정도는 신사적으로 보였다. 가스라이팅이 이렇게 무섭다.
그래서 지친왕은 차가운 왕좌에서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딱히 시준의 숨겨진 뜻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해진 면녕은 일단 시준이 견본 겸 예물로 보낸 상품이나 구경해 보자고 관헌들을 불렀다.
물건의 구색은 그럭저럭 갖춰 놓았으나, 지친왕은 무한의 창고를 가진 황금군주 가경제의 아들이다. 왕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은 딱히 없었다.
성의 없이 대충 물목을 훑던 지친왕의 시선은 문득 낯선 품목에 가 닿았다.
“이 공탄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개 어매(御煤, 청 황실에서 썼던 난방용 고급 석탄)의 하품(下品)입니다. 고려국에서 이것이 많이 나는데, 빻아다가 벽돌을 만들 듯 개어서 나르고 때기 편리하게 한다 합니다.”
이름이 달라서 몰랐을 뿐 석탄은 중국에도 옛날부터 알려진 개념이었다. 흥미를 잃은 지친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려 할 때, 대답한 신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왕의 안위를 고려하는 지극한 충성심 때문이다.
“이는 쓰기에 편하지만 구들이 갈라진 곳이나 아궁이가 허술한 곳에서 태우면 사람을 자는 듯이 죽이는 독기가 스며나오는 바, 반드시 바람이 통하는 넓은 곳에서만 쓰라는 고려 사람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대왕께서 친히 보실 물건은 못 됩니다.”
그 순간 면녕의 눈에는 지혜의 왕다운 심원한 영감이 반짝 스쳐 지나갔다.
‘자는 듯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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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오늘도 약간 기네요.
1. 닐 캠벨 대령과 나폴레옹의 관계, 엘바 탈출 전후의 상황 등은 시준 관련만 빼고 실제 역사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작중 인용 형식으로 표현된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도 모두 당대의 군인, 정치가, 학자들이 한 말입니다(다만 캠벨은 이 시점에선 그렇게 권력 핵심부라고 할 수 없었고, 더 타임스 사장 존 월터와 친구라는 것도 창작입니다).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합니다.
2. 석탄은 중국에서도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자금성은 지하에 길을 파 석탄과 숯을 때 구들장을 데우곤 했는데, 이때 쓴 석탄은 녕하(중국 북서쪽 지방)의 최고급품으로서 연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