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04화 (204/284)

205화

65. 하나의 중국(2)

시준도 만약 군대나 관청이 상대였다면 주석결사옹위대를 차출하지, 결코 기랑 혼자 딸려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밀항에 군대 실어 보내기도 어렵거니와, 시준은 기랑 하나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시준과 기랑 같은 신디케이트 출신들은 깡패의 생리에 대해 잘 안다.

그들은 싸우는 일 자체는 전문도 아니고 대비도 안 되어 있다. 싸우겠다고 위협하는 일에 전문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자들과 그들의 장기로 붙어서는 안 된다.

네가 어디 통이네, 내가 누구 형님을 아네 하고 언성을 높이며 대거리하는 짓이나 벌이고 있다가는 반드시 진다.

불가피하게 싸워야 한다면 그냥 처음부터 총칼을 쑤셔 박아야 이길 수 있다. 그래서 기랑은 그렇게 했다.

한 가지 시준이 우려하는 점은 기랑이 가진 ‘불가피함’의 기준이 보통 사람보다 많이 낮다는 건데, 사람은 누구나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친구란 서로의 단점을 감싸 주는 존재다. 시준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간 기랑에게 얻어터지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석이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제지하지 못했다.

상하이에서 잘살고 있다가 날벼락 맞은 천리교 하부 조직원들은 벗의 과오를 교정하지 않는 시준의 교우 습관을 난폭하게 지적할 것이나, 어차피 너무 늦은 일이었다.

깡패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것은 기랑이 두 자루의 권총을 연달아 쏘아서 가장 덩치 큰 두 명의 무릎을 뻐개버린 뒤였다.

김시택은 급하게 외쳤다.

“죽이면 안 돼!”

은근슬쩍 말을 깔아 자존심 세우는 김시택은 조마조마했다. 이 폭력 탓에 긴장한 것이 아니라 기랑의 반응이 두려워서 긴장한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기랑은 그런 것에 반응할 정도로 김시택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알아.”

분노는 상당한 관심의 소산이다. 그래서 기랑 역시 지금 김시택이나 눈앞의 깡패들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평양에서 자신을 ‘내친’ 누군가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기랑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내쳤다는 표현이 떠오른 것에 놀랐다.

그것은 기랑이 평생 지켜온 삶의 태도와 배치되는 일이었다.

능동적으로 원했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에 가깝지만, 어쨌든 조선의 전통적 성별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조선의 여인들처럼 한 남자에 의해 소유되고 또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시준과의 관계에서, 기랑은 자기도 모르게 학습된 개념을 상기했다.

전범국 사람들이 좋아할 다음절어로 설명하자면 주위에 의해 형성된 자아와 스스로가 추구하는 자아의 충돌이다(이렇게 말하면 꽤 심각한 사태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 나이 때 이성에게 홀린 사람의 전형적 흑역사 정도일 뿐이긴 하다).

그런 혼란스러움과는 별개로, 기랑의 몸 자체는 유연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무릎 아래는 후벼 파였을 때 가장 아픈 부위 중 하나다. 얼마나 아프냐면 다른 장비가 없을 때 즉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고문으로 쓰일 정도다.

슬개골이 총알 맞아 박살 난 남자들의 벌린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기도 전, 기랑은 비수를 뽑아 들고 또 한 명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기랑은 무기를 쓴 뒤 그것에 대해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단발만 나가는 권총은 말할 것도 없고, 방금 꽂은 칼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을 찔러 본 기랑은 통증과 긴장으로 위축된 인간의 근육이 칼날을 붙드는 강도를 잘 알았다.

기랑은 칼을 놓고 물 흐르듯 몸을 돌린 다음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몽둥이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회심의 기습이라 여겼던 사내가 주춤하자 기랑은 즉시 추진력을 해방하여 튕겨 올랐다.

빡! 준비 동작이고 뭐고 없는 일직선의 박치기가 작렬했다. 기랑이 쓰고 있는 혁명모자 안쪽에는 만약을 대비해 단단한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그것은 마지막 놈의 턱을 부수어 놓았다.

“끄어어…….”

김시택이 기랑의 언어 예절을 탓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맨 처음 김시택을 상대한 대장을 제외하면 이제 모두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김시택을 여유 있게 요리하려던 대장은 순식간에 천지가 뒤집힌 기분이었다.

그가 이 핑핑 도는 광경에서 현실을 깨닫는 데에는 지금 막 이마에 와 닿은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도움이 되었다.

기랑이 마지막으로 약간 짧은 듯한 조총을 등에서 뽑아, 번개처럼 반 바퀴 돌려서 그의 머리에 들이댄 것이다.

시준이 카빈인지 뭔지 하며 줬던 것 같은데 기랑에게는 이름보다는 그 편리한 용도가 더 중요했다.

대장은 아까와 달리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중국어 잘하는 김시택도 못 알아들을 어버버 소리만을 반복하는 동안, 주점 위층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두시오!”

기랑은 멍청하게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눈썹을 찡그렸을 뿐이다.

그녀는 임청의 목소리를 안다. 이것은 그 색마 임청의 찌들어 빠진 음색이 아니었다.

‘애초에 여기 없었던 건가?’

기랑은 만약 다시 임청을 찾아 이 짓을 계속해야 한다면 그냥 평양에 돌아가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시준의 앞에서…….

‘소리라도 빽 질러야겠다.’

기랑을 아는 모든 사람이 경악할 만큼 온건한 항의 방법이었다. 물론 기랑은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기랑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내려온 것은 임청이 아니었다.

그런 약과 병에 찌든 뒷골목 양아치가 아니라 척 보아도 공부 많이 했을 것 같은 백면서생이었다.

김시택이 보기에는 처음으로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식인종 부락에서 문명인을 만난 선교사의 표정을 만면에 지어 보였다.

그 서생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이들 역시 미약하게나마 후천조사의 가르침을 받아 남두성권(南斗星拳)을 연마한 자들이건만 이렇게 맥없이 쓰러질 줄이야……. 그 신묘한 무공을 보아하니 북두의 계승자, 정시준이 보낸 사람들이겠구려.”

김시택은 아까보다 더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미쳐도 보통 미친놈들이 아닌 것 같았다.

이제까지 동아시아에서 이 구역의 미친놈 자리를 당당히 고수하던 공화국 사람으로서는 굴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백면서생은 주먹이 아닌 혀로 김시택을 붙들었다.

“나는 성을 임씨로 쓰고 보잘것없는 속세의 이름은 칙서라고 하오. 그대들이 찾고 있는 후천조사의 의동생으로서 남두육성(南斗六星)의 제2성을 맡고 있소.”

돌아서려던 김시택은 멈칫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분명 오기 전에는 무생부모인지 뭔지 하는 미륵불 비슷한 것을 추종한다 들었건만,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도사의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정만 놓고 보면 십인지맹 제일번도(第一番刀) 이제초마저 질투할 정도였다.

한참 뒤에야 김시택의 머릿속에서 임칙서의 대사가 간신히 인간의 말로 번역되었다.

이를테면 그가 지금 천리교의 제2인자라는 뜻이었다.

김시택은 이런 혼탁한 광기의 세상에 뛰어든 자신을 후회하며 다시 돌아서서 읍했다.

“본인은 말씀대로 우리 공화국의 주석 정시준의 사자요. 방금의 일은 저들이 급작스레 덤벼 와서 어쩔 수 없이 응전한 것으로, 손속에는 사정을 두었으니 관대하게 넘어가 주길 바라겠소.”

김시택은 그러면서 기랑에게 거칠게 손짓했다. 기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총을 내렸다.

임칙서는 쓰러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현대였다면 평생 노임만큼의 보상금을 받아야 할 심각한 중상이다.

그러나 임칙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은 불꽃과도 같은 것. 불은 남을 다치게 하기 쉽지요. 대인은 대범해야 하는 법이라. 우선 들어오시겠소?”

***

노가다도 배운 놈이 잘한다는 말이 있다.

사이비 종교도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하다.

의외이지만 21세기에도 사이비 종교가 최우선적으로 노리는 대상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불만 많은 지식인 계급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아 보자면 그들은 한 번 옳다고 확신한 뒤에는 자기 생각을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지적 능력으로 뒷받침되니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 잘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사이비’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대신 가진 지식을 활용하여 스스로 쉴 새 없이 방어 논리를 내면화하며, 이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광신도가 된다.

임칙서가 바로 그랬다.

따지고 보면 얼마 전의 임칙서가 처한 상황은 단순하다. 아까의 김시택과 비슷한 과정 끝에 위기에 몰렸지만 다행히 관대한 사람을 만났을 뿐이다.

청 정부에 불만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체제 내부에서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그래서 임칙서가 관리의 길을 밟고 있던 것 아니었는가.

임청 같은 미치광이 반란자가 술 한 잔 사주고 위로했다 해서 그에게 동조할 이유까지는 전혀 없다.

하지만 임칙서는 그날 술김에 나누었던 대화를 도저히 부정하지 못했다.

배울 만큼 배운 지식인인 자신이 그저 깡패놈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떠들어댄 것이어서는 안 됐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임칙서 자신은 처음부터 청을 뒤집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다음부터 임칙서는 누구보다 열렬한 천리교의 추종자가 되었다.

천리교의 교리는 공화국의 수평도를 받아들여 임칙서의 손에서 처음부터 재탄생했다.

임칙서가 종교에 빠졌어도 지능까지 저하된 건 아니다. 임칙서는 면밀하게 논리를 취사선택했다.

별로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불교적 색채를 지우고, 천리교에서도 중요한 키워드였던 ‘승리’ 두 글자를 확대하면서 도교 신앙을 결합한 것이 그 예다.

당연히 그 목적은 천리교의 유일한 동맹이 되어줄 옆 동네 조선의 정시준을 위해서다. 시준에게 위통을 일으킨 북두신권과 남두성권의 계승자 프로파간다는 바로 임칙서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칙서는 김시택 앞에서 너덜너덜한 월간 대혁명 몇 권을 펴놓은 채 역설했다.

“수평도의 가르침은 물이 흐르는 것이고, 물은 전후좌우가 있을 뿐 상하가 없지요. 그렇다면 그 물의 전위에 서서 인도하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옛날 상고의 시절, 군주도 대인도 없었을 때의 현인들은 별을 보고 앞날을 가늠하며 달을 보고 농사를 가르쳤소.”

김시택은 몇 번이나 “아, 그렇군요. 그런데…….” 라거나 “오늘 온 건 월간 대혁명 가지고 담론하자는 게 아니고…….” 라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임칙서는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소. 천문이라 함은 얼핏 보면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니 수평도에 어긋난다는 게지? 허나 기실 서양인의 지구론(地球論)을 보자면 하늘은 물을 감싸는 것이지 물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외다. 여기에서 바로 정시준 진인과 우리 후천조사가 별빛으로 인민을 인도한다는 말을 이끌어 낼 수 있소.”

잠시 동안 김시택은 이 말을 복공에게 들려주면 참 좋아하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임칙서를 선전선동부에 영입하고 싶어할 터였다.

임칙서는 멍한 김시택의 표정을 보다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니,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군. 인민을 인도하는 게 아니오. 수평한 사람 사이에 그런 건 있을 수 없지. 인민들이 별빛을 보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외다.”

김시택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방향의 대화를 하자고 결심했다.

“참으로 고아한 식견이올시다. 영길리국이 침노하고 인민이 폭군에게 고통받는 이 사세에 있어 동지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인민을 구하는 데 앞장설 혁명의 기수가 될 수 있겠지요.”

김시택은 의도적으로 ‘영길리국’과 ‘동지’, 그리고 ‘혁명’이라는 단어를 한 문장 안에 주의해서 배치했다. 제발 저놈이 자기 암시를 알아듣기 바라면서 말이다.

임칙서는 김시택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화국 또한 영길리국과 진심으로 교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구려. 우리도 그렇소. 혁명에는 때로 권도 역시 필요한 법. 저 폭군을 타도하기 위해 영길리국의 기계와 주즙(舟楫, 선박)은 꼭 필요한 것이었소.”

“바로 우리 주석 동지의 뜻과 같소이다. 영길리국은 왜적과 동류라. 조상 대대로 생업이 강도질이었으니, 우리가 강성할 때는 함께할 수 있어도 우리가 빈약할 때는 가장 먼저 배반할 자들이란 것이 주석 동지의 교시였소.”

따라서 공화국이 ‘강성’해지고 그래서 영국이 등에 먼저 칼을 꽂지 않는다면 굳이 영국과 싸울 이유도 없다. 김시택이 전해 주는 시준의 말은 그런 함의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임칙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대적은 우선 청 정부다.

“허나 지금은 우선 폭군을 끌어내리는 것이 급하오. 혹시 공화국은 당장 영길리와 싸울 생각이시오?”

그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김시택은 이제 여유를 되찾고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영길리국은 당장은 병화를 일으키지 않을 거요. 우리 정치국은 중국의 호걸 동지들이 그간 먼저 수평 혁명을 일으킨 뒤 공화국과 손잡기를 바라고 있소.”

시준의 여론 작전도 있고,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올해 회광반조를 보이며 사고를 한 번 치기 때문에 시준은 당장 영국이 움직이진 않을 거라 전망했다.

“이제 공화국의 반동이 모두 평정된 바, 주석 동지께서는 그분이 먹고 입는 것을 줄여서라도 서쪽의 동지들에게 보낼 총포와 약재의 수급을 혁명적으로 늘릴 생각이시오. 영길리국도 당장 돈에 눈이 멀어 총포를 팔고 있으니만큼 우리가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의심하지는 못할 테지요.”

임칙서의 지능 자체는 멀쩡하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서를 보면, 대개 중국에 군웅이 할거하여 여러 갈래로 쪼개어질 때 해동은 성세를 누렸지. 내 이제 와서 번국이니 천조니 하여 수평도를 욕되게 할 생각은 없지만, 과연 공화국 인민들이 진정 수평 혁명의 성공만을 바라는 거요?”

지금 중국을 반으로 쪼개 자기에게 신경 못 쓰게 하고 이득을 취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이는 중국을 상대하려는 주변 나라들이 가장 처음 떠올릴 전략이기도 했다. 솔직히 중국은 반칙에 해당할 정도로 컸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래서 시준은 이 질문도 예상하고 있었다. 김시택은 엄숙하게 옷깃을 바로 하고 말했다.

“동지께서는 지모가 깊으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만약 중국이 옛 초한(楚漢)이나 십국(十國)처럼 갈라진다면 영길리국은 어떻게 나오겠소? 그들이 항상 원하는 것은 오로지 돈뿐인데, 그런 난장판에서 어찌 장사가 되겠느냐는 말이오.

자연히 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것이며, 그리되면 영길리의 대박이 포구를 향할 곳은 바로 공화국이오. 혁명이 일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 노릴 만하다 여길 테고, 또 일본국과 다르게 항시 저들 배가 드나들던 삼화부와 여러 포구가 있으니까요. 조금만 앞일을 내다보면 그런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외다.”

임칙서는 약간 놀란 얼굴로 김시택을 바라보았다. 김시택은 기세를 몰아쳐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임칙서와 그 주위에 있던 부하 몇 명이 김시택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김시택은 손을 꺼내는 대신 입을 열었다.

“공화국은 중국의 수평한 인민이 뽑은 오로지 하나의 나라가 폭군을 쫓아내고 혁명 과업을 수행하기 바라오.

옛날 명나라처럼 여진족을 한족이 북벌하는 것도 아니요, 새 군웅이 일어서서 어차피 반동이기는 매한가지인 왕조를 새로 세우는 일 따윈 더더욱 아니오이다. 여진족과 한족, 몽고족이나 회회인은 모두가 수평하오.

오로지 하나의 인민만이 있고, 하나의 폭군은 사라질 뿐. 하나[一]! 그것이 중국 수평 혁명에서 가장 앞에 내세워야 할 깃발이오.”

말을 마친 김시택은 꽤 고급으로 보이는 자문지(외교문서용의 두꺼운 종이)를 꺼내 내려놓았다.

“이것은 주석 동지의 친필이며, 정치국의 뜻이오. 이만큼 말했으니 우리의 진심을 아시리라 믿소. 만약 인민 앞에 한 이 맹세를 어긴다면, 헛된 하늘의 벌 따위가 아니라 인민의 벌을 받아 망할 것이외다.”

임칙서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김시택이 꺼내 놓은 종이를 쳐다보았다. 한자가 자기 글자인 만큼 그들은 그 글이 대단한 명필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하다. 그건 저 유명한 명필 김정희의 글씨니까.

학문 깊지 못한 시준이 바깥에 체면 세우기 위해 김정희에게 대필 시키고 자기 글씨라고 사기 친 지도 오래됐다.

쌀에 술에 돈까지 많이 주니까 김정희가 참는 거다. 나중에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김정희는 저 역사에 빛날 추사체(秋史體) 이전에 시준 전용의 주석체(主席體)를 먼저 개발해야 했다.

김시택의 옆에서 떡이나 집어먹던 기랑은, 예상치 못하게 엄습하는 시준의 사기 행각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물론 그녀가 갑자기 볼을 불룩하게 하고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그 짧은 글이 주는 심상은 강렬했다.

<一個中國[하나의 중국]>

그 네 글자는 여기의 천리교도들을 얼어붙게 했다.

분열을 원하지 않느냐는 임칙서의 의심을 꿰뚫는 듯한 한 마디. 공화국은 중국 인민이 하나 됨을 원할 뿐이라는 준엄한 질책이었다.

이는 진시황이 칠국을 혼일한 이래 중국 인민에게 항상 새겨져 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중국이 하나를 숭상함은 영국이 아편을 숭상함과 같다. 이 순간 자리의 모든 중국인은 유전자 속에 잠들어 있던 그 숭고한 단어를 각성했다.

중국의 오래된 가치를 그간 오랑캐라 깔보았던 해동에서 깨우쳐 주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것이…… 혁명?’

그러나 그러한 이성적 분석보다 더 선행하는 것이 있었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중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두에게 엄청난 감동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참 떨어진 자금성 천안문이 갑자기 눈앞에 떠올랐다. 만약 그들이 여자라서 시집을 가야 한다면 이 말을 창안해 낸 사람에게 가야 할 것 같을 정도의 감동이었다.

임칙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의 실언을 사죄하겠소. 공화국 동지들의 혁명 과업에 상서로운 남두성의 축복이 있기를!”

“공화국은 결코 동지를 버리지 않소이다. 곧 주석 동지께서도 격려하러 오실 것이오. 온 세상이 붉은 깃발로 뒤덮이는 그날까지…….”

두 사람은 굳게 손을 맞잡았다. 둘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 만세!”

========================

작가의 말

1. (지금 아마도 생각하실) 사람을 대포에 넣어 쏘는 권법을 구사하는 남두성권은 남두聖拳이고, 작중의 남두성권은 남두星拳입니다. 전에 한 번 나왔지만 중국의 민중 종교결사는 창봉권술과 권법 단련을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조선은 주로 북두칠성 쪽에 제를 많이 지냈고(그래서 현대 한국인에게는 북두칠성이 남두육성보다 익숙하지요), 남두 쪽은 고려 때까지는 초제를 바쳤으나 그 이후로는 많이 줄어들거나 없어진 듯 합니다.

2. 기랑의 갈등과 관련하여... 여성 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작성한 여행기인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해당 서적은 교과서에도 일부 내용이 예문으로 인용된 책이니 아마 많은 독자분들이 아실 겁니다.

비숍이 조선에 와서 조선 여인들의 부자유스러운 처지에 대해 개탄하자, 조선 여인들은 ‘우리는 당신들의 남편이 당신들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어째서 여자 혼자 여행을 하게 내버려 두느냐)’고 대답하지요.

어떤 가치관이 옳은가 하는 일차원적인 문제보다는(다른 사람을 억압하면 안 된다는 거야 누구나 아니까요), 선교사나 서구 상류층이 보내던 계몽주의적 시선에 대해 ‘비문명인’들은 거꾸로 ‘문명인’들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답이라고 봅니다.

3. 2015년 중국에서는 <시집가려면 시다다 같은 남자를 만나라>라는 시진핑 찬양 노래가 올라왔습니다. 가사 내용은 거의 제목의 반복입니다.

시다다는 시진핑의 애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능형 안티 아닌가 싶을 정도의 흑역사 같은 내용 때문에 얼마 안 가 관영 언론이나 인터넷에서도 삭제했죠.

4. ‘하나의 중국’ 원칙은 시진핑이 만든 건 물론 아니고 장제스-마오쩌둥 시절부터… 아니, 거슬러 올라가보면 더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념이죠. 연구자에 따라 관점은 다양합니다만, 작중 서술이나 동양인의 일반적 인식과 달리 서구의 연구자 중에서는 (한국에서는 좀 비중이 적은) 수나라 때 ‘하나의 중국’ 개념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5. 기랑이 마지막에 든 총은 (조총이 아니고) 브라운 배스 플린트락 카빈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던 패턴입니다. 작중 공화국의 제식(?) 소총은 영국에서 수입하거나 베낀 브라운 배스죠.

청나라에도 마상총이라고 해서 카빈 개념이 있긴 했는데, 상대가 군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이다 보니 조총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