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64. 싹 틔우는 씨앗(3)
그간 심어 놓은 싹은 꼭 협잡질만이 아니었다.
혁명을 진행하면서 시준이 가장 심각하게 느꼈던 결핍은 열기다.
제철과 제강 같은 고급 산업까지 끌어댈 필요도 없다. 군대와 가옥의 난방부터 시작하여 역병전쟁 때의 콘시럽 추출, ‘약재’ 제조, 수출용 가짜 중국 도자기 생산, 고된 노동 후의 서초 한 개비까지 불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라곤 없었다.
그 모든 국면에서 땔감은 곡식과 함께 항상 아쉬운 것이었다. 혁명의 열기라면 물론 충만했지만 물리적 열기가 부족했다.
19세기쯤 오면 조선의 산림 황폐화는 심각한 수준에 들어선다.
마찬가지 일을 비슷하게 겪었던 영국이 걸었던 길을 고려 역시 걸어야 하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북한 지역에 무연탄이 많이 묻혀 있다는 정도는 초등학교 때 배운다. 전생에서 속세의 때가 많이 묻은 시준도 『사회과부도』 수준의 지식이야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무연탄이 뭔지 가르쳐주는 초등학교가 드물다는 건데, 시준이 복지 혜택으로 받은 서바이벌 지식은 그가 어릴 때 눈사람 만드느라 굴리고 놀았던 구공탄의 재료가 바로 무연탄이라는 사실을 숙지하게 해 주었다. 난방은 생존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시준이 만상 시절 동인도 회사와 처음 접촉하고 평안도에 과도정부를 세웠을 때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탐광인 것이다.
물론 그 전부터 조선에 알려져 있던 운산과 단천 등 금은광 역시 같이 탐사했다.
영국인이니만큼, 구한말에 하던 대로 귀금속이 나오는 광산을 실수인 척 숨기고 자기들이 몰래 파서 가져가려 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수인 척 갱도를 폭파해서 몇몇을 생매장시키자 곧 그런 뻔뻔한 잠채는 없어지게 되었다.
시준이 처음 광산업을 시작하여 수령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 조선에서 잠채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영국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할 수 있었다.
첨단 광업 기술 같은 거 몰라도 대충 눈치와 낯짝만 보면 전생까지 꿰뚫어 보는 게 조선 사람이다. 고려와 영국의 협업은 그런 식으로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다만 운산 금광은 19세기 초 기술로는 대박이라고 하기 힘들다.
다른 곳도 현재 영국이 19세기 후반처럼 광부와 자본가를 직접 파견할 여건은 안 되었다. 공화국이 금은보화로 잔치를 하기에는 일렀다.
어차피 그것들은 후순위다. 귀금속이 없어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온기가 없으면 하룻밤 만에 사망할 수도 있다. 겨울이 닥쳐오면 금은이고 나발이고 나무와 석탄이 가장 급했다. 특히 이 북방에서는 더욱 그렇다.
처음 평양인민대회 열 때까지만 해도 그냥 석탄 덩어리를 통에 담아 불 지피는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 심어 놓았던 싹도 고개를 들었다.
정약용과 외사통호부 간부들이 토마스 반스와 함께 ‘중국에서의 사업’ 준비를 하는 동안, 시준은 주석 취임 이후 처음으로 함경도를 직접 방문했다.
***
시준의 목적지는 전생에서 시준이 이름을 정확하게 아는 북한의 유일한 탄광이었다.
일반인인 시준이 알고 있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여기는 한반도의 그 어떤 탄광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질과 양의 석탄이 산출되는 곳이다.
대한민국 사람은 ‘아오지 탄광’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아오지보(阿吾地堡)가 바로 그 이름이었다.
조선에서는 육진(六鎭)의 경흥부 소속이다. 공포군주 세종이 일찍이 여기의 여진족을 쓸어버린 것은 후손들을 위한 전략자원을 열등한 이종족 따위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선견지명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시준도 이곳을 자원의 산출지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고통의 산출지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오지 탄광도 탄광은 탄광이다.
몇 년 전 처음 탐색을 시작할 당시, 그 사실을 떠올린 시준은 탐사에 슬쩍 숟가락 얹어 이곳을 지목했다.
“내가 가만히 산세를 보니 경흥부 아오지성 인근에 탄이 많이 묻혀 있을 것 같소이다. 마침 옛 육진의 성도 있고 하니 여기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 보면 어떻소?”
당시는 아직 공화국은커녕 혁명막부도 제대로 성립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동인도 회사가 탐사 결과를 알려온 것도 혁명전쟁을 결심할 즈음이나 되어서였다.
석탄 채광의 경험이 가장 많을 영국도 탐사 기술은 그래봐야 19세기 초 수준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석탄이 묻혀 있는 것 같다는 보고가 공표되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정 진인의 놀라운 신통력을 경외했다.
“정 진인의 관심법은 산과 바위도 꿰뚫는데, 하물며 사람의 한 치도 안 되는 가슴속이야 어련하겠는가? 모두 알아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시준은 한동안 자기가 2초 이상 쳐다보면 급히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봐야 했다.
어쨌든 그 후로 탄광은 초보적이나마 개발되었다.
정치국 위원들과 지주의 처리방안을 논의할 때 아오지 얘기가 나왔던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아무리 조선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어도 그 변방까지 자원해서 모이겠다는 유민까지는 별로 없어서, 그때쯤에는 이미 반동분자 집합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정식으로 ‘경흥부 노동교화소’의 이름을 단 채, 각지에서 밀려드는 반동의 피땀을 인민의 따스한 온기로 바꿔내는 혁명의 산실이 되었다.
***
시준은 자기가 아오지 탄광을 19세기에 재현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의식적으로 삭제했다. 정신건강은 소중한 것이다.
대신 그는 자기가 세종대왕을 본받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종대왕이라 하면 한국인 누구도 이의를 감히 제기할 수 없는 성군이자 명군이 아닌가. 적어도 시준이 배운 바로는 그러했다.
그리고 이곳을 개척할 때의 세종은,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공포의 군주 그 자체였다.
세종은 이 극변의 땅에서도 버틸 만한 부자들을 잡아다가 북변에 집안째로 처박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정말 장정 많고 부유한 집을 골라서 잡아갔다.
잡혀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해동의 요순이라더니 정말 도덕이 청동기 시대로 회귀한 것인가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면 그놈을 받아 준 사람까지 같이 도로 묶어서 보냈다. 하삼도 사람들은 사군육진 안 가려고 자기 팔을 자르거나 아들을 때려죽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세종의 그 업적은 바로 지금 공화국 혁명정부가 하는 일과 거의 비슷했다.
부자는 거의 반동이었으니까.
따라서 시준은 현재, 전생에 매일 회사 출근하면서 보던 광화문 앞 세종대왕 동상의 위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공포로 신민을 지배하던 세종과 달리 시준의 경우 명백히 혁명에 반하는 범죄자를 수용하고 있으니 세종보다 인자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텅 빈 눈의 반동분자들은 그저 버력을 나르고, 곡괭이를 찍으며, 돌과 석탄을 열심히 분류할 뿐이었다.
그 대부분이 평생 험한 일은 안 해본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모두 훌륭한 노동자였다.
개중 작아서 상품성이 없는 조각들은 따로 모아 큰 욕조 같은 절구에서 빻고 있었다. 오늘 시준이 ‘현지지도’ 할 분야는 바로 이쪽이었다.
세종이 한 일이면 대충 옳으니 나도 옳다고 최면 걸고 있는 시준에게는 이 모든 인권단체가 격노할 참상이 보람찬 노동의 현장으로 보였다.
“이제 모두가 소임을 능숙히 하는 것 같구려.”
슬슬 맛이 가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임기 얼마 안 남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허나 시준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공화국 인민이다. 그래서 공장영선부장 이집두(李集斗)는 전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주석 동지의 교시는 품을 크게 줄이는 방법입니다. 물레길(컨베이어 벨트)이 곳곳에 배비되어 있어 사람이 일일이 들고 나를 필요가 없으니 그저 서서 골라내면 됩니다. 새삼 능숙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바, 반동으로서는 그 죄에 비해 노고가 없는 셈입니다.”
이집두는, 처음에 이름 들었을 때는 시준도 영국 간첩인가 하고 의심했지만, 조선식으로 음차된 아랍인 이름이 아니다.
원래 역사에서 공조 판서를 하는 고관이다. 수령 시절에는 각종 세밀한 데이터를 근거로 폐단의 수정안을 제시할 정도의 실용적 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집두가 정치국 위원의 자리까지 오르는 것에는 그의 업무 능력보다 태세 전환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강철군주는 가 닿을 수 없는 미래의 순조가 정약용을 풀어주라는 명령서를 보냈을 때,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그것을 막자 당시 판의금부사였던 이집두는 면밀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한다.
조정의 중론이 해배(解配)에 반대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으니 왕의 명령서를 중간에 뭉개고 안 보낸 것이다.
당대 신하들이 왕을 깔보는 바가 이와 같았다. 정말이지 강철군주의 각성도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아무튼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집두는 사세를 재빨리 읽는 자였으며, 따라서 혁명에도 재빨리 합류했다.
원체 군주 따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진보적 인사다 보니 공화정도 대충 취향에 맞출 수 있었다.
원 역사에서 이 해배 무산 사건은 정약전이 끝내 동생을 만나지 못하고 죽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지금은 혁명이 일어나 그런 비극이 없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서 이집두는 아는 사이였던 남공철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고 남공철도 부담 없이 추천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상소를 올린 장본인인 강준흠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가 정약용의 해배를 꾸준히 막아왔던 건 혁명 이전부터 있었던 사실이다.
강준흠은 정약용의 정치적 보호자라고 할 수 있던 채제공도 무작스럽게 물어뜯었으며, 정약용의 아들 학연이 강준흠에게 뭣 좀 가져다 바쳐야 하지 않겠냐고 말할 정도로 정약용 박해의 중심인물이었다.
결과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정약용이 용서해 주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정약용과 친하고 싶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정치다.
강준흠은 지금 이집두가 말한 ‘물레길’, 즉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연자방아 비슷한 물건에 묶여 그것을 밀고 있었다. 당대 손꼽히는 문장가의 비참한 최후였다.
이래서 조직 생활, 특히 공직 커리어에서는 열 명의 친구를 만드는 일보다 한 명의 원수를 안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다.
***
경흥부 노동교화소의 물레길은 100% 인력 작동이었다.
지금 전기가 있을 리 없고, 증기기관은 컨베이어 벨트 정도 돌리기엔 아까운 물건이다. 소나 말 역시 농사짓기에도 귀하신 몸이라 숨통에 해로운 탄가루 먹이며 부리는 건 상상도 못 한다.
불탑 한 번 돌면 한 생의 공덕을 쌓듯, 물레길이 한 바퀴 돌면 반동의 죄가 그만큼 지워진다는 구호가 붉은 글씨로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강준흠은 ‘높으신 분’이 온 것을 보니 혹시 정치 지형의 변화가 있나 싶어서 그나마 아는 얼굴인 이집두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물론 조선국 공조 판서가 아니라 공화국 국무당 정치국 위원인 이집두는 그런 괘씸한 반동 놈 따위 전생에서도 모른다.
이집두는 옛 동료 강준흠을 석탄 한 덩어리만도 못하게 외면하고 주석을 안내했다.
“큰 탄은 영길리인에게 내다 팔거나 큰 가마에 쓰되, 작은 것이나 남는 탄가루는 흙에 개어 구우면 역시 어디서나 땔 수 있는 공탄(孔炭, 연탄)이 나오니 그 무엇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 어찌 혁명적 예지가 아니겠습니까?”
시준은 여기서도 접촉 표면적을 늘리기 위해 현대 연탄처럼 구멍을 뚫었다. 그렇다 보니 원 역사에서 이것이 발명된 일본과 같은 이유로 ‘연꽃탄’이라 부르는 사람도 많았다.
시준이나 공화국의 기술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아오지 탄광의 석탄이 워낙 품질이 좋기 때문에, 이 연꽃탄도 인민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시준은 현대인의 양심을 발휘하여 한 마디 강조했다.
“이 땅에서 캐는 탄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지만 태우게 되면 독기가 스며나오는 게 흠이오. 집안에서 쓰려면 필히 구들을 잘 막아야 하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잘 될 리가 없다는 것은 시준도 알았다.
이 시대 사람들은 가스 중독 같은 사소한 위험에 잘 신경을 안 쓴다.
연탄 때다 재수 없으면 가스 중독에 걸릴 수 있다. 그런데 불을 안 때면 확실하게 죽는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겠는가?
누군가 전근대인의 미개함을 탄한다면 고개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를 보게 하라.
원래 안전을 확보하고 나서 실현되는 기술 같은 건 없다.
기술의 안전 확보 시도는 기술이 발명되었을 때가 아니라 사고가 났을 때, 그리고 그 사고 수습 비용이 안전 확보 비용보다 높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시준은 조금 더 양심이 있다고 할 것이다.
시준은 평양에서부터 시범적으로 연탄 사용을 장려했다. 원전은 다 지방에 몰아넣고 거긴 사람 안 사는 척 하고 있는 현대 국가들과는 달랐다.
그러면서 되도록 집 안 아궁이에 때지 말고 인민대회 때처럼 굴뚝 달린 개별 난로를 쓰도록 권했다. 정 때야겠으면 장지문을 자주 열라는 홍보도 함께였다.
아무도 말 안 듣겠지만 거기서부터는 어쩔 수 없다. 시준은 정말 노력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진인 화둔법 제2장이라 광고한 안전 난로가 좀 퍼지길 바랄 뿐이었다.
노동교화소의 현지지도는 오래잖아 끝났다.
주석 동지가 왔는데 아무것도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교화소에서는 일하는 사람에게 특식으로 옥수수죽을 한 그릇씩 나누어주었다.
그러고는 ‘주석 동지의 은혜에 감격하여 교화된 반동’들과 나란히 서서 기념 스케치도 마쳤다. 이집두는 선전선동부 직원에게 끝까지 따라붙어 자기 얼굴이 똑똑히 안 그려졌다고 계속 잔소리를 해 댔다.
함경도에서 훈련, 그러니까 맹수 사냥 중인 혁명군 영대를 치하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시준은 평양에 귀환했다.
그러고 나서 시준이 만난 사람은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의 사장 윌리엄 자딘이었다.
“의장 각하께서 발명하신 그 물건은 영국 해군에서도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무를 계속 조달하기는 힘든데 이건 나르기 편한 데다 화력도 좋으니까요. 본격적 석탄 채굴이 아직 조선에서만 되고 있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거 고마운 일이오.”
“말씀하신 대로 특허를 신청하는 서류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난방, 조리용 신형 석탄 가공품’이라고나 할까요. 그와 관련해서 명의 빌리는 대가로 제게 특허료 중 2할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시준은 자딘과 마주 앉은 채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 이 밀매꾼이 대체 뭘 더 요구하려나 해서였다.
그러나 자딘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건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신 저와 기술을 공유하여 동업하시지요. 저도 언제까지 거간꾼으로 살 수는 없으니, 자본을 투자하여 이득을 나누는 대가로 이 ‘구멍탄’ 제조 주식회사를 조선에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시준은 입술을 뒤틀었다.
“당신은 그 공장을 영국에도 물론 만들겠지요? 특허료 지불 안 해도 되니 좋은 장사로군요.”
“하하. 역시 각하는 당할 수 없군요. 예.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쪽 회사에서 생기는 이득은 각하께 많은 지분을 양보하겠습니다.”
어차피 윌리엄 자딘은 연탄 제조기술을 이미 알고 있다. 특허 서류 만든 게 그인데 모를 수가 없다.
그런 자딘이 굳이 이러한 동업을 요청하는 건 시준에게 보내는 우호적 제스처다.
특허 제도가 있다뿐이지, 당시 서구에서는 돈만 된다면 아무도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소송당할 때 당하더라도 일단 베껴 팔고 봤다.
울며 겨자 먹기로 특허법 지킨 것은 공개될 수밖에 없는 공공분야인 정부나 군대 정도다. 19세기 사람이 오늘만 사는 건 동서양이 모두 같았다.
그런 맥락에서 자딘의 행보는 이 시대 기준으로 양심의 극치다.
한마디로 시준에게 자신의 신용을 과시한 것이다.
자딘은 최근 급등한 영국 국채와 동인도 회사 주식을 보고 시준이 감각 있는 사업 파트너라고 – 아픈 배를 움켜쥐고 – 인정했다.
시준이 아직 주식을 팔지 않는 게 의아했지만, 그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부활한다거나 하는 끔찍한 사태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자딘도 조선에 안정적 거점을 마련해 두고 시준과 더 해체 곤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중 하나가 이 연탄 회사인 셈이다.
그런 만큼, 시준의 다음 부탁도 자딘으로서는 선선히 들어줄 수 있었다.
“그 사업 제안을 수락하겠소. 박사.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내 ‘친구로서의 부탁’ 또한 들어줄 수 있겠지요?”
“상하이에 혁명정부 외교장관(정약용) 일행과 그…… 토마스 반스라는 신문 기자를 데려다주는 것 말이지요? 물론입니다. 뭐가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깔끔하게 처리하지요.”
시준은 자딘과 오랜 교유가 있다. 그래서 ‘깔끔하게 처리’한다는 그 말을 믿었다.
윌리엄 자딘은 로드 암허스트 휘하 영국 해군의 감시를 피해 토마스 반스를 상하이에 데려다줄 것이며, 암허스트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동인도 회사와 접촉하도록 해 줄 것이다.
더하여 정약용과 외사통호부 간부들을 상하이 뒷골목의 천리교도들과 접선시키는 것까지 모두 ‘깔끔하게’ 처리할 것이 분명했다.
내년에 시준이 중국에 가 보려면 외사통호부와 정찰총국이 먼저 사전 작업을 해 줘야 했다.
그리고 공화국과 외국의 비공식 접촉에서 자딘은 여전히 중요했다. 공화국이 영국 해군을 이용한 만큼, 영국 해군도 공화국에 많은 ‘프렌드’를 갖고 있어 이런 일에는 심지어 자국민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준 입장에서도 자딘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할 수 있었다.
시준은 그 자리에서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와 서도상고총협동회(서상)의 석탄회사 설립 계약을 체결했다.
자딘이 의장의 화통함에 감탄하는 동안 시준은 조달청 없어서 그런지 계약이 참 편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조선과 자바를 오가는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의 배 한 척이 평범하게 삼화부를 떠났다.
========================
작가의 말
1. 북한에는 아오지 말고도 탄광이 많습니다. 당연히 1차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석탄 채굴인데, 힘든 일이다 보니 주로 범죄자나 동요계층이 투입되는 것입니다.
‘청년돌격대’ 이름 붙은 조직은 그런 형벌 노동자 조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청년만 있는 건 아니고 돌격도 딱히 안 하지만... 그 동네 이름 붙이는 방식이 오로지 가오 한 가지에 집중되기 때문에 이름은 근위여단인데 실제로는 총 한 자루 없는 그냥 건설부대라거나 하는 데가 좀 있습니다.
2. 아오지 탄광의 매장 추정량은 1945년 발표자료에 의하면 약 150억 톤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남한 최대의 탄광인 삼척탄광이 약 2억 톤 정도입니다.
그런데 발표 시점을 보면 알 수 있듯 출처가 일제라서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일제와 별로 다를 것 없는 북한 출처의 우라늄 매장량도 상당히 부풀려졌다는 이야기가 많죠.
다만 아오지 탄광의 석탄이 매우 많으며, 품질도 좋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여러 주식회사가 세워졌죠.
3. 조선 초에도 공 있는 신하들에게 ‘이탄’ 이라는 물건을 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체계적이진 않더라도 지표의 석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세종이 석탄 차지하려고 여진족을 공격한 건 아닙니다. 세종은 원래 여진족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문종은 대 여진 필살기인 오위진법을 창안한 사람이며, 동생 세조도 모련위 여진을 선제공격해 쓸어버렸죠. 부친의 뜻을 이어받은 효자들입니다.
4. 본문 내용대로 세종이 처음 시동 건 변방 사민은, 처음에는 부유한 호구를 그냥 잡아가는 방식이 주가 되었습니다. 이를 늑령사변(勒令徙邊)이라 합니다.
사변 피하기 위해 팔을 자른 일은 세종 19년이고, 아들을 때려죽이려 한 일은 세종은 아니고 성종 15년의 기사에 기록되어 있지요.
정확히는 아들을 죽이는 데에는 실패했는데, 자세히 말하자면 이수생이라는 사람이 아들이 소변 보는 데에 뒤에서 몰래 다가가서 몽둥이로 마구 때렸으나 죽지를 않습니다. 이수생은 처벌로 그 피하려던 사변으로 끌려가고, 아들은 이혼한 부인에게 보내져 다행히 화를 면하지요.
5. 세종 당시에도 흔히 전가사변(全家徙邊)으로 알려진 범죄자의 유배성 이주가 없던 건 아니나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아무 죄 없는 사람 잡아갔죠.
범죄자의 북변 이주가 주류로 된 것은 세종보다는 그 이후입니다. 어떻게든 사변하려고 하다 보니 중범죄는 물론이고 오만가지 잡범에도 일률적으로 사변이 동원되었습니다. 세금 체납해도 사변, 군역 대신 서 줘도 사변... 거의 스탈린 시절 시베리아 유배급으로 남발된 듯 합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정식법의 근간인 대명률 등에는 없는 처벌이어서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고, 중중 대 조목을 절감하고 영조 대에 사실상 폐지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범죄자가 잔뜩 간 양계는 다른 지방으로부터 말도 못 할 멸시와 차별을 받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