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64. 싹 틔우는 씨앗(1)
본래 김조순은 가문의 모든 사람과 함께 표표히 죽을 생각이었다(이럴 경우 가문의 찬성은 딱히 필요 없는 게 조선 가장의 좋은 점이다). 정시준이 떠드는 하찮은 요설에는 관심도 없었다.
패배자는 죽을 뿐이고, 정시준도 언젠가는 패배자가 될 터. 그것이 천하가 순환하는 이치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시준은 김조순으로 하여금 그 순환의 고리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품의 말대로 그의 ‘논변’이었다.
***
며칠 전의 이품은 선구자적 면모를 보였다.
혁명작두 앞에 끌려 나온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적극적 변호를 실시한 것이다. 시준은 어째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모든 것은 (이미 죽은) 노론 신하들의 강압이며, 자신은 아버지가 왕위 억지로 떠넘긴 송나라 흠종과 같은 처지였을 뿐이라고 강변했을 때 김조순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김조순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을 것, 죄가 몇 개쯤 더 덧붙여진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멋대로 떠들어 봐라. 내 목이 여러 개나 된다는 말이냐? 결국 네가 칠 수 있는 내 목은 하나뿐이다.’
대충 그런 정도의 배짱이었다.
그러나 이품은 그렇게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긍정과 도전 정신이 바로 신하와 왕의 차이다.
이품은 당시 그를 지켜보던 토마스 반스도 감탄할 정도의 열정을 발휘했다.
이품은 행주산성에서 김조순의 뒤를 쳐서 혁명군에게 결정적 승리의 기회를 제공한 자신의 공을 역설했다.
또한 자기는 혁명군과 직접 싸울 뜻이 없었으며, 행주산성에서 ‘뜻과 소식이 미처 닿지 않아’ 생긴 불가피한 오해로 잠깐 저항했을 뿐 곧 항복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의 특기인 현란한 지모가 먹힌 것이다.
판관들의 토론은 분분했지만, 결과는 대충 이품의 예상대로였다.
“이품의 죄는 이공에 비해 무겁지 않다. 죄가 다르면 벌이 달라야 하는 법. 반동 김조순이 사람을 이끌고 와 겁박하여 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는 호소를 인정한다. 또한 이품이 뜻한 바는 아니나, 행주산성에서 전 조선 인민 해방전쟁에 보탬이 된 바도 분명히 있다. 마땅히 사죄에서 일등(一等)을 감한다.”
시준으로서는 변호와 감형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재판의 기본 틀을 만들고 싶었다. 그 목적에 걸맞은 자가 바로 이품이었다.
이공과 달리 이품은 어리석다는 것 빼고는 이렇다 할 큰 죄가 없고 세력도 없다. 따라서 살려두기도 덜 부담스러웠다.
의외로 인민들은 어느 정도 납득한 분위기였다.
행주산성에서의 투항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이품이 삼궤구고두례와 십분지일형으로 동서양의 굴욕을 글로벌하게 체험하는 동안, 혁명군은 왕 뒤통수도 때려 보고 엉덩이도 걷어차 보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품에게 관대해질 수 있도록 했다. 아무래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친절하기 쉬운 법이다. 조선 사람들이 또 정에 약해서 안면 있는 자에게 함부로 굴기 꺼려하는 것도 한몫한다.
이품은 위대한 6대조인 전쟁군주 이종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모두 그의 주저 없는 허리놀림을 적극적으로 본받은 덕이었다.
조선왕에게는 백만 대군도 다 쓸 데가 없다. 척추 하나면 강대한 여진족이 물러나고 미친 반란군도 손을 못 대는데 그런 게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병기는 군자가 가질 바 못 된다는 노자의 말이 여기서 빛났다.
덕이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넘쳐 주위도 감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품의 덕에 긍정적 영향을 받은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시준은 이품이 혁명재판 최초의 ‘변호’를 달성한 분위기를 몰아쳐서, 좀 덜 피비린내나는 쪽으로 일을 마무리짓고자 했다.
“그리고 김조순의 경우 반동의 수괴로서 마땅히 인민의 뜻에 따라 극형에 처해야 하겠으나, 혁명 열사를 우대하는 것이 또한 인민의 뜻인바 열사 김유근의 가족이라는 점도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단전성의 계룡산혁명열사릉(鷄龍山革命烈士陵)에 잠든 김유근 동지는, 동지들에게 유언으로 전 조선의 혁명 완수를 당부하면서 비밀히 가족을 부탁한 바 있다.”
김유근의 유언을 들은 유일한 사람인 기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시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 삼엄한 한성부에서 붉은 깃발을 처음 들어 올린 위대한 혁명 열사 김유근의 추억에 젖어 들었다.
오직 혁명 외길만을 걷는 것 같았던 열사 김유근의 인간적인 면모는 마음 따뜻한 공화국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시준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김조순을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지들, 우리가 원한을 우선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우리 동지를 우선해야 하겠는가?”
사람들은 시준이 만들고 요즘 상조농장에서 밀고 있는 구호를 입 모아 외쳤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one for all, all for one]!”
“동지는 절대로 버릴 수 없소!”
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만들어낸 북한 캐치프레이즈는 많았지만, 지금이 유일하게 쓸모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 다소 무리한 주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시준이 김조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현재 조선 왕실의 후손 중 가장 정당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의 그 효명세자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미 푸셰의 양자가 되어 있다.
어차피 이공과 이품, 그리고 이경춘은 그다지 존경스러운 왕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공화국의 남은 반란분자들은 이씨 왕실엔 더 기대를 걸지 않을 것이며, 지금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은 노론 잔존 세력, 즉 김조순의 인맥이다.
그러므로 김조순은 살려 두는 편이 여러모로 낫다. 그는 훌륭한 미끼가 되어 줄 것이다.
“따라서 그도 죄 일등을 감한다. 이품과 김조순은 둘 모두 종신토록 교화형(敎化形)에 처하며, 나머지 가솔 역시 무조건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죄에 따라 형을 정해야 마땅하리라. 이것이 혁명의 인의다.”
김조순까지 감형되었다는 것은 다소 불만이었지만, 이품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목숨 건진 게 어딘가.
명석한 지략이란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품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과연 정략군주의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처벌도 관대하기 그지없었다. 이품은 교화형이라는 말을 듣고 어디 조용한 데에서 책이나 읽고 살라는 형벌이리라 짐작했다.
교화는 성인의 일이고, 성인을 본받는다면 독서 외의 다른 것이 없지 않은가. 조선에서 선비의 형벌이란 게 거의 그랬으니 이품의 판단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군중 중에서 사소한 범죄로 이 형벌, 그러니까 노동교화형을 당해 본 몇몇 사람들만이 측은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나머지 안동 김문의 가솔도 대개 비슷한 처분을 받았다.
대부분은 김좌근처럼 전쟁 중 죽었기에 다른 사람은 사정 잘 모르는 종범(從犯)에 가까웠다.
시준은 아예 비관계자인 것 같은 사람은 방면해주려고 애썼지만, 이 엄정한 혁명재판소의 기강을 뚫고 관철시키기는 어려웠다. 가장 관대한 형이 10년의 노동교화였다.
먹고살기 바쁜 공화국 사정상 체계적인 감옥이라는 게 아직 없기도 했다.
시준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형벌의 ‘기간을 정한다’라는 근대적 발상 정도였다.
물론 그 전까지 조선의 귀양 연한이 사실상 ‘왕 기분 내킬 때까지’였던 것을 감안하면 훨씬 혁명적이었다. 시준이 없었으면 정약용도 원래 역사처럼 순조가 통째로 잊어버려서 두 자리 햇수 이후에나 풀려났을 터였다.
조선국의 최후 권신이어서 도저히 혁명작두를 면할 수 없는 옛 전라 감사 김희순은 안타깝게도 그런 혁명적 사법 개정의 수혜를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종신이라도 좋으니 교화형을 갈망했으나 될 리가 없었다. 겨우겨우 팔이 붙자마자 이번엔 다른 뼈가 잘리게 된 김희순은 억울함에 통곡했다.
“나는 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칼을 들고 협박하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이오! 김조순도 사는데 나는 왜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김희순의 변론은 독창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반민특위에 끌려 나간 친일파의 변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당시 한국 국민들에겐 그게 통했기 때문에 친일파들이 대대로 잘 먹고 잘살았지만 고려의 인민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억울하면 아들 중 하나를 혁명 열사로 키웠어야 했다.
다른 것 다 제쳐놓고라도, 그자를 살려두기에는 호남 혁명당의 분노가 너무 짙었다.
전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맹억이 옛 호남 빨치산부대의 대표로 나왔다.
김희순의 목이 날아가자 김맹억은 주저하는 기색 하나 없이 김희순의 피를 마시고 살을 씹었다.
“정 진인의 영도 아래, 용맹한 혁명 동지들이 그대들의 복수를 해 주었소. 오늘 반혁명의 최고 악질분자가 응당한 피를 쏟았으니, 이를 흠향하고 모두 편히 눈을 감으시오!”
그 흉흉한 기세를 말리지 못한 시준은 그저 영국 기자의 눈치를 보았다.
저놈이 돌아가서 뭐라고 쓸지 몰라서였다.
그의 전생 근무 경력 중에는 대변인실도 있었다. 그런 시준의 경험상 기자는 일종의 초능력자였다.
‘소설 쓰고 있네’라는 진부한 수사로는 그 능력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옆자리의 여학생이 건네준 지우개 하나가 손에 닿자마자 한순간에 가족계획까지 그려내는, 17살 남학생의 사이코메트리 정도는 되어야 기자의 폭주하는 창조 능력에 비견할 것이다.
그 초능력을 봉인하려면 금지된 지식이 필요하다. 어두컴컴한 금단의 지하 주점에서 비싼 양주로 마법진을 그려서 방어술식을 펼치지 않으면 반드시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그리고 이게 보통 홍보·소통 돌림자 붙는 부서의 주 업무다).
관청이 비싼 광고를 줄 수 있었다면 공무원들도 턱 끝으로 기자를 부렸겠지만, 원래 국가 예산에서 홍보비는 항상 부족한 법이다. 양주와 광고는 그 가격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시준이 반스에게 오늘 아편이라도 한 숟갈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시준은 고려인민공화국이 식인귀의 나라로 알려질까 봐 두려웠다.
허나 기우였다. 사형수의 시체를 사람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쯤이야 토마스 반스에게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시준이 모를 뿐 유럽에서도 사형수의 시체나 그 부산물이 약으로 거래된다. 루이의 처형 때도 많은 사람들이 기념품, 주술, 식용 등등으로 그 시체를 탐냈다.
따라서 반스 역시 딱히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종이에다가 ‘조선인들은 의외로 유럽식 사법과 그것을 문화의 일부로 즐기는 방법에 익숙하다’라고 적고 있었다. 조선의 서구화를 꿈꾸던 강철군주도 저승 가는 길에 돌아서서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푸셰 역시 사람들이 사형수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현실주의자이고, 현실주의자는 죽은 자에게 쏟는 정열을 낭비라고 여긴다.
현실주의자 푸셰의 선택은 휴정 때마다 재판정을 오가며 어떻게든 왕비 김씨를 구명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 그녀는 외국과 밀통하지도 않았고, 재상을 베갯머리에서 갈아치우지도 않았잖소? 김유근의 누이이기도 하니 자비를 보여 인심을 얻읍시다.”
푸셰는 자기를 판관에 포함시키지 않은 시준의 선택을 원망하며 그렇게 열변했다.
허나 조선의 아름다운 전통은 부부일심동체라. 남편의 옆에서 인민의 고혈을 빨았다는 고발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목숨은 구했지만 그녀 역시 상조농장에 끌려가게 되었다. 시준으로서도 차라리 그 편이 푸셰의 마수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 판결에 찬성했다.
***
종합하자면, 이날 혁명재판소의 첫 재판에서 대략 삼분지 일 정도는 혁명작두의 제물이 되었고 나머지는 10년에서 종신까지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모가지가 너무 적었다.
좋아한 곳은 국무당 공장영선부(工匠營繕部)나 중앙인민회의 갱사위원회 정도다. 전국 각지에서 인민도로와 천리마 봉화를 만들고 광산을 파야 해서 일손이 많이 부족했으니까.
다른 인민들은 예상보다 적은 피에 실망했다. 특히 멀리서 살림을 전부 여비로 바꾸어 구경 온 몇몇 호사가들은 특히 그랬다.
시준은 도저히 이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인민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바로 공화국이다.
실망한 인민들을 달래는 역할은, 지금 시준이나 다른 누구보다 공화국 인민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경험자인 조제프 푸셰와 선전선동부에 주어졌다.
푸셰가 반스에게 말한 ‘바쁜 일’이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선전선동부는 사사로운 원한에 얽매이지 않는 주석 동지의 놀라운 공명정대함을 널리 알렸다.
이 시대의 선전 매체란 게 책과 그림 이외에는 선택지도 별로 없다. 푸셰에게 끌려나온 시준은 선전선동부 관할 ‘인민창작공사(人民創作公社)’에서 내키지 않는 연설을 해야 했다.
“모든 인민으로 하여금 혁명이 좋음을 알게 하여야만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스스로의 주인 되는 수평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의 위대함을 만방에 떨칠 이 문예 사업에 힘을 넣어 앞장세워야 하겠습니다.”
평양 사람들에게는 언제 들어도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의 주석 동지의 연설이었다. 나와 있던 공사 직원과 심부름꾼 모두는 열렬한 갈채를 보내었다.
과거 시준의 용돈을 벌어다 주던 서상 소유의 출판 시설은 조선 인민 해방전쟁을 전후하여 월간 대혁명 등 공화국의 필요를 충당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공화국 국무당이 외주를 주는 형식이었다(물론 소설도 여전히 찍었다). 상인의 지분이 큰 혁명이라, 농업을 제외한 공화국의 경제는 여러 상계(商契)에서 맡고 있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원시적 공공기업 체제로 이전 중이었다.
인민창작공사의 실무적 보완에는 현직 언론인인 토마스 반스가 많은 역할을 했다.
참관 자격으로 시준의 현지지도에 같이 나간 반스는 신문의 부수 책정, 배포 방식, 제책과 인쇄 기술 등에 대해 조언했다.
“공화국의 신문이 유럽과 가장 차별화되어야 할 점은 가격입니다. 유럽의 신문은 정부가 과도하게 부과하는 세금 때문에 불가피하게 높은 가격을 유지하죠. 하지만 공화국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윤전기가 발명되어 신문 한 부에 1페니로 떨어지는 20여 년 뒤까지, 신문은 노동자의 주급을 통째로 줘야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반스의 말대로 영국에서는 문제가 안 됐다. 가난한 사람은 투표권이 없고, 따라서 당시 신문의 주요 컨텐츠 중 하나인 정치적 비난 공방 따위를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공화국은 그렇지 않다. 유럽인의 눈에는 굉장히 특이하게도, 고려인민공화국은 사람이라면 전부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반스는 이 점을 흥미롭게 연구했으며 그래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아 빈부격차가 적어서 그런 것이겠군. 어쨌든 영국이 참고할 방안은 아냐. 무식하고 난폭한 하층민까지 참정권을 가져서야 나라꼴이 더 루커리(The Rookery, 런던의 대표적 빈민가 중 하나) 뒷골목처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원시 사회에서는 오히려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
국민 대부분이 하나의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만 있다면 – 그런 나라는 문명국 중에선 없겠지만 – 당연히 숫자는 그만큼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반스는 그렇게 이해했다.
따라서 시준의 정부가 여론을 움직이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선전물을 배포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격의 하락이 필수적이다.
각지 인민위원회에 배포되는 신문이나 월간 대혁명은 여전히 글 아는 사람이 읽어 주는 형식으로 전파되고 있었지만 그런 건 오보나 왜곡의 한계가 있다.
“우선 중구난방으로 여기저기서 필사하거나 찍어내는 공공 출판물을 이 ‘공사’에서 일원화시키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딱히 인지세나 종이세는 없으니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점은 대량 인쇄로군요. 돌아가거든 그 무역상, 자딘 박사와 협조하여 인쇄기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주선해 드리지요.”
인쇄기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다. 윤전기도 없는 현재 유럽의 인쇄술은 구텐베르크 시절에서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사소한 개량이나 규모의 확대만을 적용했을 뿐이었다.
조선도 세종 시절에서 그다지 괄목할 발전까지는 없으니, 인류 인쇄술은 이 시대까지 마지막 정체기를 맞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준이 서상 시절 동인도 회사를 통해 들여온 인쇄기도, 이제 반스가 (아마도 자기 연줄을 통해 커미션 받고) 판매할 인쇄기도 조선 사람에게 그다지 큰 혁신까지는 아니다. 단지 싼 물건이라니까 좋은 정도였다.
하지만 시준은 초보적인 사회생활의 기술을 발휘했다. 별것 아닌 일에 상대방 대신 생색을 내 주는 일이 그것이다.
“매우 좋은 일이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우리 공화국은 더 타임스에 독점 취재를 약속하지.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행이 필요하다면 역시 안내해 드리겠소.”
시준의 말은 고려인민공화국의 외교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반스는 암허스트가 있는 중국이라면 몰라도 일본까지 취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시준이 할 정도의 사교 기술을 영국 신사인 토마스 반스가 못할 리 없다.
반스 역시 한두 달 정도 아시아에 있다 보니 이곳에서 ‘외국과의 일상적 선박 항행’이 얼마나 튀는 일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감사를 표했다.
“먼 극동까지 왔으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돌아가야겠지요. 각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도 최신 증기기관의 도입이나 철광석 수입 경로 탐색 등 여러 장기적 사안이 오갔다. 반스는 런던의 유력자들에게 타전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자 시준은 기존에 조선도 거래하던 개항장인 상하이에 배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약속대로의 중국 취재를 위해서였다.
토마스 반스를 우대한다는 핑계로 국무당의 최고 간부인 외사통호부장 정약용이 그 책임을 맡았다.
물론 시준도 사람인데 영국인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우호의 정을 느낄 리가 없다.
이는 로드 암허스트에게 보내는 경고다.
런던에 너 말고도 다른 끈이 있다는 것을 요란하게 광고해서 여기가 변방이라고 괜히 멋대로 “영국”하지 말라는 뜻을 전달하는 게 일차 목적이다. 암허스트 정도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일이 잘 풀려서 암허스트가 여론의 뭇매를 못 이기고 소환된다면 가장 좋지만, 영국 여론은 영국인이 만드는 거라 윤리 방면에서 큰 기대는 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2차 목적은 시준이 예전부터 중국에 심었던 씨앗의 확인이었다.
시준이 전쟁하는 동안 임청의 천리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북경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뻗친 것은 물론, 청 정부에 불만이 많은 강남에는 더욱 세를 확장했다.
그것을 위해 시준이 치른 대가는 크다. 단지 천리교에 알음알음 지원한 마약과 저렴한 최저 옵션 무기뿐만이 아니다.
시준은 임청이 ‘조선의 도인 정시준과 자신은 각각 북두와 남두의 별을 타고났으며, 태상노군에게서 동문수학한 사형제 사이’라고 선전하는 것도 감수했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해야 월간 대혁명을 배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제 시준이 마음의 한계선으로 설정해 놓은 1815년이 코앞이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인도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영국은 목마른 중독자 주사기 찾듯 또 전쟁을 찾을 터. 영국이 “영국”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만들어 줘야 했다.
걸레짝이 될 청나라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지금 공화국이 청나라 생각해 주는 것은 쥐가 고양이 생각한다는 표현도 아깝다.
청은 여전히 세계 제일의 부국이며 인구 대국이고 동아시아 최강의 육군 강국이다(왜 최강의 ‘군사 강국’이 아니냐면, 영국 해군도 격퇴시킨 베트남의 무적함대가 있기 때문이다).
요 몇 년간 좀 체면에 먹칠을 하기는 했으나, 그건 다 가경제가 일개 인간을 상대로 자신의 진정한 힘을 개방하기 꺼려해서다.
청은 그러한 잠재력의 국가다. 황제가 왼팔의 붕대를 풀어 무한의 대금고를 다시 한번 열어젖히기만 하면 하찮은 오랑캐는 모두 흑염룡에 삼켜지고 만다.
그 사실은 얼마 안 가서 곧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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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라는 말은 북한이 원조가 아니라 집단주의, 전체주의 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다만 아직까지 그 고대의 멸망한 이념을 간직하는 데가 북한 정도라 요즘은 거기서 많이 씁니다.
2. 창작이라는 말은 조선에서, 현대어로 말하자면 “꾸며내다”와 비슷한 뉘앙스로 쓰였습니다. 부정적인 면모가 있었죠. 유명한 ‘술이부작’의 영향으로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성인이나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창작하다가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인 것은 왕에게 쓸 때 정도입니다. 작중 인민창작공사는 그런 맥락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이제 왕이 없으니까 모두가 그런 말을 쓸 수 있다는 거지요. 절대로 그쪽 공화국의 만수대창작사나 인민군창작사 같은 게 아닙니다.
3. 윤전기의 발명은 1830년대입니다. 윤전기의 획기적인 점은 한 번에 여러 부수를 인쇄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다만 시준은 전생에서도 일반인이고, 서바이벌 기술과도 별 관계가 없는 부분이라 그가 이걸 먼저 발명할 일은 없겠군요.
4. 북두와 남두, 태상노군은 모두 도교의 신입니다. 천리교의 교리는 불교와 도교의 혼합이며, 임청의 저 말도 신 사이의 관계나 전통 교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엉망진창에 가깝습니다.
5. 사이코메트리는.. 한국에서는 <미스터리 에지>라는 제목으로 발매된 일본 만화로 아마 익숙하실 텐데,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접촉하여 거기에 남은 잔류사념(?)과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이걸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았다 주장하는 사례도 있었지만 신뢰성은 다우징과 비슷합니다. 한 마디로 0%죠.
6. 더 루커리는 세인트 자일 루커리라고도 하며, 원래 구호소가 있던 웨스트엔드의 빈민가입니다. 주로 런던 배경 범죄물에 등장하는 이스트엔드는 19세기 정도 가야 악명을 떨치고, 아직은 그 정체성을 가지고 형성될 때는 아닙니다.
7. 이때까지의 영국에는 투표권의 명시적 규정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대충 유지나 귀족, 지주들이 모여서 정치하는 방식이었지요. 1830년대쯤 가서 정치 참여 운동으로 1차 선거법이 제정되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노동자 등 빈자는 제외했기 때문에 유명한 ‘차티스트 운동’이 시작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