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95화 (195/284)

196화

62. 하나의 나라, 하나의 지도자(1)

육종이 안 된 이 시대의 고기는 현대보다 대체로 질기다. 물론 그만큼 사람들의 인내심과 턱힘도 발달되어 있어 그다지 큰 문제는 안 된다.

칼로 잘 두드려 준 돼지고기에 후추와 소금으로 밑간을 한다. 잡내를 빼려면 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런 재료나 시간 모두 지금 구하기는 어렵다.

시준은 옆에 있는 그릇에서 밀가루를 찍어 맛을 보았다.

그래도 주석이 먹을 거라고 기랑이 말을 잘 해서인지, 영국 놈들도 평소 공급하는 것처럼 반이 뼛가루인(사람 뼈도 좀 있다) 밀가루를 주지는 않은 모양이다.

기랑이 시준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계룡산 오기 전에 삼화부 가서 좋은 걸로 얻어왔어.”

“진짜네? 잘 했어.”

기랑은 헤헤 하고 웃었다. 포수들 끌고 가서 대독과 시멘트 보여주면서, 또 횟가루 섞인 거 주면 원 없이 석회 먹여주겠다고 협박하기를 잘 한 것 같았다.

영국인들은 자기들도 그거 먹고 잘 컸다고 강변했다. 그들은 정말이지 밀가루의 품질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의장이 관련되어 있다면 동인도 회사도 그들을 보호해 주기 힘들다.

결국 영국인들은 쓸데없이 까다로운 조선 권력자의 입맛을 비난하며 좋은 밀가루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지금 시준의 앞에 있는 물건은 대충 먹어도 건강에 심각하게 나쁘지는 않은 물질로 이루어진, 이 시대 기준에서 최상품에 속하는 밀가루였다.

게다가 거기에는 현재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시준만 알고 있을 비밀 레시피가 들어가 있었다. 먹고 남은 마른 빵을 잘게 부숴 넣어 둔 가루, 그러니까 빵가루다.

밀가루를 묻히고, 다시 옆에 풀어 놓은 계란(지금 여기 있는 재료 중에 그나마 가장 싸다. 신라는 닭을 많이 길렀다)에 담갔다.

그러고는 다시 빵가루를 묻힌다. 밀가루와 계란물이 합세하여 빵가루를 고기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지금 기랑은 돈까스 튀기는 것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와 비슷했다.

입맛 돌게 끈적이는 노른자에 고소해 뵈는 가루가 풍성하게 묻어난다. 이 광경은 그 자체로 상상력을 고문한다. 그녀는 튀기기도 전에 집어먹고 싶다는 듯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홀린 듯 바라보는 기랑의 눈길은 이미 그 눈빛으로 고기를 움직일 듯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옆에서 끓고 있는 기름솥이다.

맛과 칼로리는 같은 단어이며, 그 구성 성분은 지방과 당분이다. 이 두 성분의 함량은 곧 맛에 비례한다.

인간이 언젠가 은하계를 멸절시킬 일곱 개의 반지 모양 거주지를 만들거나 분자 재조합 장치를 상용화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맛있고 살 안 찌는 음식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기 위해 눈을 감고 코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기랑의 표정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 하나인 줄 알고 있던 기랑의 주변 사람들은 상상도 못 했을 얼굴이었다.

조선인은 밥상에 가위나 칼을 올리는 야만스러운 오랑캐의 습속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준은 다 튀긴 돼지고기를 썰어서 놋쇠 접시 위에 솜씨 있게 플레이팅했다.

우스터셔 소스는 아직 영국에서도 낯설다. 시준은 간장과 조청, 소주를 베이스로 오리지널 소스를 만들어냈다.

전생에서 여자친구 이벤트 해준답시고 어디 동영상에서 보고 공부한 기억밖에 없어서 상당 부분의 정보가 훼손된 레시피지만, 워낙 손재주가 있다 보니 그냥저냥 잘 어울렸다.

게다가 기랑은 소스 따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행복하게 고기를 씹었다. 그러면서 남은 돈까스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마치 돈까스가 실시간으로 증발할까 봐 아쉬워하는 듯했다.

그런 기랑을 물끄러미 보던 시준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이제 내일부터는 나도 바쁘니까, 너 혼자 해 먹어라. 옆에서 봤으니 할 수 있지?”

“으응? 왜? 어애 읕나 거 아이어어?”

기랑은 고기를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준은 피식 웃었다.

“전쟁 끝난 거 맞아.”

시준은 기랑이 다시 입에 뭐 문 채로 “그런데 왜?”라고 묻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봄이잖아. 영호남의 보궐선거는 빨치산부대 동지들이 잘 해 주겠지만 결국 모두 모아서 살피려면 평양에 돌아가야 해.”

지금까지의 싸움은 혁명전쟁임과 동시에 중앙인민회의가 명령한 제1기 보궐선거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것이 시준이 내세운 첫 번째 귀환 이유였다.

그 외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다.

바깥의 일만 돌아봐도 끝이 없다. 수도 스와핑 사기를 당한 로드 암허스트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제 안정을 찾기 시작한 중국이 공화국에 어떤 외교를 취하느냐, 신라와 잠시 동맹을 맺었던 쓰시마 번을 어떻게 협박하여 쏠쏠하게 국물 우려내느냐 등등.

영남에서 전쟁 뒤처리하기 싫다며 정치국 위원들과 싸운 것은 크게 보면 일종의 농담이다.

영남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게 시준이 게을러서는 아니다. 그 정도의 인간이었다면 여태까지 주석 노릇도 못 했다.

시준의 위치로 봤을 때 그는 중앙에서 더 넓은 범위의 일을 조율해야 한다. 물론 정치국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영남 빨치산부대 대장 최옥의 지휘하에 영남의 인민들이 스스로 자치회를 꾸릴 것이다.

수평한 공화국에 상하는 없어도 분별은 있으며,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효율의 문제다.

시준이 하나라 우왕처럼 모든 일에 직접 삽질하고 다녔다가는 공화국도 하나라 같은 원시 고대국가 꼴이 될 뿐이다. 그 수준밖에 안 되니까 인신공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준은 그러한 사정을 모두 기랑 앞에서 줄줄 읊지는 않았다.

기랑이 못 알아들을까 봐서는 아니다. 기랑은 이미 국무당의 간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충분한 소양을 가지고 있다.

단지 시준 역시 전생에서 밥 먹을 때 일 얘기하는 상사 때문에 체한 경험이 있어서다.

그래서 시준은 조선인에게 일상에 속하는 이유만 간단히 말했다.

“그리고 내년 농사 차비도 해야지.”

현대인은 공장의 굴뚝 연기를 논밭의 거름 냄새보다 높이 치는 경향이 있으나, 기계 없이 농사를 짓는 것은 가능해도 밥 굶고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영국 자본가들이 앞으로 그 위업에 최초 도전해 보기는 한다).

여전히 조선에서 농사는 곧 경제와 동의어이며, 상업이니 공업이니 광업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계절을 타고 흐르는 농업의 박자를 따라가야 할 종속 산업이다.

그러나 노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 대강 이 시대의 인터넷 검색이라고 보면 된다 – 지난겨울의 날씨를 보건대 올해도 글러먹었다는 모양이었다.

농사차비라고 했지만 사실 생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시준은 돈까스를 집어 들어 표정을 감추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임기 끝날 때까지 흉년이면 체면이 말이 아닌데. 아냐. 차라리 흉년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니 내 덕이 부족한 모양이라고 하고 사임할까?’

그 생각을 하던 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정약전이나 푸셰 같은 사람부터 콧방귀를 뀔 일이거니와, 그의 안락한 삶 하나와 바꾸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생각이 씨가 되는 바람에 내년쯤 어디에서 화산이라도 터져 한여름에 냉해라도 덮치면 어쩌란 말인가.

전생에서야 오뉴월 서리라는 소리가 교과서에나 나올 관용구였지만, 조선에서 20년 산 시준에게 그 말은 더할 나위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시준은 재수 없는 생각 그만하자고 고개를 흔든 다음 고기를 마저 삼켰다.

“어쨌든 남은 건 내일부터 너 다 먹어라. 심심하면 소질개나 데려다가 같이 먹고 가르쳐줘도 좋다. 걔도 벌써 혼처 찾는 모양이라 객주 자리 하나 떼어주려 하는데, 닭이나 돼지 튀겨 팔면 잘 팔릴 게다.”

기랑의 표정이 뚱해졌다. 시준은 자기가 그 이유를 알았다고 생각하고 잽싸게 덧붙였다.

“너도 하고 싶으면 평양에 목 좋은 자리 내어 줄게.”

기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은 고기를 전부 먹을 때까지 그랬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기랑은 그릇을 챙겨 나갔다. 시준은 기랑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시준이 머무르는 곳은 옛 김회연의 행궁이라 괜찮은 수라간이 있었다. 기랑은 그곳에서 큰 대야에 물을 담고 비누를 풀었다(주석이 깐깐해서 그릇은 이렇게 씻어야 했다).

따로 놋쇠 그릇을 닦기 위해 잿가루와 사금파리까지 준비한 기랑은 그것을 집어 드는 대신 손으로 턱을 받쳤다.

기랑의 입에서 한숨처럼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나쁜 놈. 그까짓 돼지튀김 할 줄 몰라서 같이 먹자고 한 게 아닌데.”

***

시준은 마지막으로 현지 정치국 확대회의(擴大回議)를 주재한 다음 경상도를 떠났다.

수뇌부가 사라진 경상도의 권력 재편과, 무엇보다 영호남에 약속한 토지 개혁 지침이 정치국의 이름으로 포고되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을 그 대강으로 삼은 토지 개혁의 세세한 방안을 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인민의 뜻이란 물처럼 흐르므로 항상 변덕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공정과 상식에 기반하여 행해진다고 할 수 있었다.

“이봐. 김씨. 당신네 가족이 여섯이잖아. 사내는 넷이고. 그러면 한 철 일해서 저어기 세 마지기 무논 정도면 딱 되겠구먼. 나머지는 원래 거기 갈던 사람들이 갈아 먹으면 되는 것이고.”

푸셰가 정치장교를 세우면서 천명했듯 혁명군에서 이미 기초적인 산술을 가르치기 때문에, 빨간 옷 입은 장정 아무나 가도 이 정도 계산은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김씨네에게 토지 개혁안을 설명하고 있는 옛 빨치산부대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벼슬은 딱히 안 했지만 대대로 동네 사람들에게 마님 소리 들어가며 헛기침했던 지주 김씨는 기가 막혔다.

“이, 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 수백 마지기를 하루아침에 다 빼앗아가겠다고!”

“어허, 그 대대로 내려왔다는 사정을 볼작시면 어떤가. 자네 조부가 저기 좌수 노릇 한 거야 온 동네 사람이 다 알지. 환곡 대신이라며 가져오고, 이자 붙여서 후려치고, 흉년에 굶주린 자들에게 헐값으로 빼앗은 땅 아냐? 그리고 자손들은 집에서 뒹굴며 계집질이나 일삼다가 고스란히 그 땅 물려받았고.”

김씨는 작년까지만 해도 자기 앞에서 굽실대던 이 소작농들에게 말본새가 그게 뭐냐며 호통조차 칠 수 없었다.

방금 그러려던 그의 아들이 생사불명의 걸레짝이 되어 옆에 길게 누워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소작인들 대상으로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 그러니까 대등한 논리적 토론을 시도했다.

이건 보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중년 남자들 중, 자신의 구역 밖에서는 다른 사람과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을 21세기에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어리석거나 세대 차이가 나서가 아니다.

단지 자기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하급자나 자기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상급자 이외의 사람들과 대화해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렇다.

그 나이쯤 되면 하나씩 심혈관 질환으로 떠나는 친구들과 만나는 일도 줄어든다.

대등한 사람과의 대화를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잘 보면 그들이 ‘설명하는 법’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건 김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절박한 생명의 위협은 김씨로 하여금 수평도를 깨닫게 했다. 김씨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럼 그때 땅 가져오면서 조부께서 대신 갚아 준 환곡이나, 땅 대신 면해준 이자라던가, 헐값이라지만 분명히 밝게 치른 땅값은 다 뭐란 말인가? 그건 다 없는 돈인가? 우리 집안이 지금처럼 누굴 두드려 패고 땅을 뺏기라도 하였어!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때 헐한 값으로나마 곡식 내어주거나 소작이라도 부쳐 먹게 하여 주지 않았으면 굶어 죽을 사람이 한둘이었는가!”

3년 전 같았으면 조선 민중은 물론 21세기 사람조차 설득되었을 완벽한 논리였다.

21세기에도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월급은 줄여야 하지만 회장님이 외제차는 타고 골프는 치셔야 영업도 되고 그래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말이 잘 통한다.

이득은 회장님이 노력하신 것이므로 가져가야 하지만 고통은 회사 전체가 똘똘 뭉쳐 주인 의식을 가지고 분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 시민은 낙수 효과처럼 진인단물만도 못한(그건 효과라도 있다) 종교적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는다.

맨 위에 놓인 부자들의 그릇은 물을 넘치게 해 밑으로 흐르게 해 주는 게 아니라, 물을 부을수록 끝없이 커지기만 할 뿐이다.

정치국은 이미 수없이 대응 논리를 역설했다.

그 물은 ‘아랫사람’들이 일해서 붓는 것인데 왜 물이 처음 부어지는 그릇은 내 것이 아니고 저놈 것인가?

애당초 그릇에 대체 왜 상하가 있는가? 층층이 쌓여 있는 그릇 따위 전부 팔 휘둘러 엎어버리고 새로 배치하자는 것이 혁명이다.

지리산에서 겪은 그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주석의 훈화 복습을 빼먹지 않은 빨치산부대 대원들은 김씨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 새끼 이거 지껄이는 솜씨 보게. 그래, 화적질한 재산 한 가마니를 갈라 원래 주인에게 한 됫박 돌려주면 그게 잘한 일이라더냐?”

“저 섬섬옥수 한번 보라지. 마치 반가 처녀의 손 같구먼! 가시 한 번 안 박혀 봤겠지! 작인들은 소처럼 일해서 또 새 땅 살 돈 갖다 바치는데 말야!”

김씨의 주위를 둘러싼 혁명군은 위협적으로 한마디씩 했다. 김씨는 전술을 바꿔 사람의 정에 호소해 보았다.

“아, 아니. 꼭 쟁기를 잡아야만 농사란 말인가. 내가 자네들에게 뭘 그리 서운하게 했는가. 흉년엔 수조도 많이 탕감해 주고 그러지 않았는가.”

“누굴 거지로 알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먼. 네가 뭔데 탕감을 해 주니 마니 한다는 말이냐? 원래 우리 것인데!”

혁명군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혁명이라고 해서 가진 자나 배운 자가 모두 그 꼴을 당하는 건 아니었다.

김씨 부자가 나란히 논두렁에 드러누워 죽음이나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려는 순간, 한 줄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동지들, 멈추시오! 정시준 주석의 뜻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때린다는 말이오?”

혁명군은 몽둥이를 멈췄다. 저편에서 오고 있는 사람의 숫자가 이쪽의 대여섯 배는 족히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앞장에 선 사람은 김씨도 잘 아는 자였다. 이 고을 예안(禮安)의 유학(幼學)이며 저 대학자 퇴계의 자손이라는 이야순(李野淳)이 황급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높은 학문과 곧은 절개로 과거를 그만두고 학문에 매진하여, 강철군주가 직접 특임하기도 했을 정도다(가지는 않았다). 경상도에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라 여기 출신인 빨치산부대 대원들도 일단 그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몽둥이찜질을 면한 김씨는 이야순 앞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 김씨를 부축한 이야순은 사람들을 시켜 그 아들을 구완하게 했다.

눈물을 닦은 김씨가 그제야 인사를 차렸다.

“진사 어른. 구해주셔서 이 은혜 백골난망이오이다. 정말이지 이제 논밭 마지기나 가지고 있다는 자들은 다 죽게 생겼소이다!”

‘저 천벌 받을 혁명군인지 하는 놈들 때문에’라는 말은 김씨의 입에서 생략되었다. 이야순을 따라온 자들도 각자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순은 다정하게 말했다.

“난생처음 보는 도가 이 땅에 급작스레 위세를 떨쳐 응변하기 어렵게는 되었으나, 어찌 또 살길이 없겠는가. 자네도 이 틈에 어서 가산을 정리하여 나와 같은 길을 가세.”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야순은 자신의 지혜를 전수해 주었다. 그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저 대학자 이퇴계의 후손이다.

퇴계가 어떤 사람인가. 그 평가만으로 책이 몇 권은 나오겠지만, 일단 공식 기록인 선조수정실록에는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득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일반적 진리가 도출된다. 원래 사람이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퇴계 이황은 검박과 청빈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것을 동경했다.

부자 많다는 영남에서도 손꼽을 만한 대토지 소유자. 세종이 노비종모법을 만든 뜻을 깊이 숙지한 인간 브리더. 현재 아메리카 노예국의 농장주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재테크 천재가 바로 퇴계 이황이다. 음양조화의 대체를 배우신 분이 역시 뭔가 다르긴 다르다.

그는 노비를 체계적으로 양인과 결혼시켜 ‘번식’시키고 시세 차익을 잘 노려 토지를 축적했다. 선비로서 어찌 더러운 장사치 노릇 하여 구린내 나는 동전을 만질 수 있겠는가. 천하의 근본인 땅과 사람만 악착같이 긁어모았을 뿐이다.

선조의 지혜를 이어받아 후손을 번창시키는 것이 조선의 미풍양속. 후손들도 불민하나마 대학자를 본받은 바가 컸다.

이야순 역시 마찬가지다.

이야순이 과장까지 갔다가 그 개판을 보고 그냥 발길을 돌릴 수 있었던 이유는, 공무원 따위 안 해도 먹고살 만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예안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야순은 휘하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공화국 정부의 규정에 따른 위원회 직원들은 아니고 원래 그가 거느리던 사람들이다.

이야순은 신라가 망하기도 전 미래를 내다보고 땅을 전부 처분하여 특별히 곤욕을 치르지도 않았다. 또한 그 재물로 사들인 노비들은 그를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당선시켜 주었다.

노비라서 생각 없이 따른 건 아니다. 이야순이 두둑한 정착 자금과 함께 노비 문서를 불태워 주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담배쌈지가 오가는 현재 고려의 총선거 수준을 감안하면 청렴하기 그지없는 선거 방식이다.

이야순은 과감하게 재산 대부분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새 시대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공화국 정부도 지역 유력자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이야순이 마음만 먹으면 ‘마음씨 좋은 동네 어르신’을 따르는 농민들을 휘몰아 사달을 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비슷한 몇몇 소요에서 증명되었듯, 사대부나 지주라고 해서 꼭 하민이나 소작농과 원수지간인 것만은 아니다.

방데 학살을 공화국에서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얼마간의 타협도 필요했다.

조제프 푸셰의 조언을 들은 국무당은 이야순이 재산과 맞바꿔 혁명정부 내에 인맥을 쌓거나 새 정치기반을 구축하는 사실도 어느 정도 모른 척해주었다.

혁명이라고 해서 지주와 사대부는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소작농과 노비만 만만세인 세상은 아닌 것이다.

시준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지만, 기득권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스러지지 않는다.

이야순은 김씨의 손을 쥐었다.

“새 나라에서는 또 새 사업이 있는 법이지. 옛날 조선 열성조의 명문가들이 다 어차피 뿌리는 고려의 세족 아니었는가. 바람에 거스르는 나무는 뽑히지만, 눕는 풀은 다시 일어서는 법. 우리 민초(民草)가 다시 한번 빛 볼 날이 올 걸세. 며칠 뒤에 내가 부를 테니 한번 오게. 농상위원회 부위원장 자리가 하나 비었거든. 내가 도와주면 어렵잖게 뽑힐 게야.”

민초라는 말이 이렇게 쓰인다는 것을 알면 시준은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시준이 그 말을 들을 리는 없다.

경상도를 떠나 쾌속 북상한 시준은 이미 평양까지 가 있었기 때문이다.

***

기랑에게 말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시준이 지나치게 오래 평양을 비워 둘 수는 없었다. 돌아가서 통일 국가로서의 고려인민공화국을 다시 다져야 했다.

조선 인민 해방전쟁으로 삼한은 다시 통일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뒤엉킨 욕망까지 통일시키려면 아직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해방’ 자체는 분명했다. 정시준과 조선 사람들은 수천 년의 질서를 깨고 인민을 압제로부터 해방시켰다. 사소한 난점이나 혁명에 뒤따르는 여러 부작용 때문에 그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는 시준의 마차가 마치 천자의 순행처럼 보인 것도 부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다.

공정하게 말한다면, 거의 약탈 행렬이나 다름없었던 전통적 천자의 행렬보다도 더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천자보다도 높다면 논리적으로 그건 천자의 애비인 하늘, 그러니까 신이다.

평양에 도착한 시준은 – 제발 저 자금성 남문이 생각나는 초상화 좀 성에서 치우라는 시준의 명령은 정치국의 의결로 거부되었다 – 정 진인의 옷깃을 만져 신유(神癒)를 얻으려는 평양 사람들의 장사진에 당황해야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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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후추는 의외로 어느 정도 시대가 지나면 유럽에서 그렇게까지 귀한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보다야 비쌌지만 서민들도 그럭저럭 맛은 볼 수 있었지요. 본격 대항해시대 이전 15세기의 의서에도 "후추는 시골뜨기에게나 어울리는 양념" 이라고 했을 정도. 물론 사프란이나 정향, 육두구 같은 고급 향신료는 여전히 비쌌습니다.

조선에서는 후추와 관련된 징비록의 기록이 유명합니다만(일본 사신이 후추를 던지자 자리에 있던 고관대작부터 기생까지 모두 그걸 주우러 다니느라 바빴고, 이로써 일본 사신이 조선에 기강이 없음을 알았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조선이 국제 교역망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 큽니다.

그리고 전근대에 정복이 없는 교류는 대개 파는 사람 마음입니다. 조선 왕들은 후추를 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 후추를 파는 인도 상인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 그들이 유통하는 후추는 모두 '삶은 후추'였지요. 싹이 날 리가 없는... 성종은 싹 나는 후추 씨앗을 구해 오면 너네가 그렇게 갈망하는 팔만대장경(맥락상 경전이 아니라 경판인 것 같기는 합니다)을 주겠다고 일본과 딜을 하지만 일본 상인도 그건 실패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할 수 없었지만, 유일한 해법은 군함을 끌고 가는 것.

2. 산업혁명기 영국 공장 노동자의 비참한 삶은 잘 알려져 있지요. 실제 역사에서의 인터뷰 증언을 인용하자면, 6살부터 일을 시작해서 하루 16시간 이상 반복 중노동에 시달립니다. 고용주들은 남녀 어린아이들의 노동이 마음에 안 들면 쇠사슬로 묶어 끌고 다니거나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끝내 다리가 휘어지고 복사뼈가 내려앉는 기형을 안고, 다 클 때쯤에는 더 움직일 수도 없어서 내쫓겨 빈민가 구호소에서 짐승처럼 죽어가는 자가 많았지요.

3. 마지기는 한 말의 곡식을 파종할 수 있는 논밭입니다. 짐작되시겠지만 면적은 지역, 상황, 어른의 사정 등등에 따라 극단적일 정도로 들쭉날쭉해서 뭐라고 일률적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허나 대강 두 사람 정도가 일하고, 그 소출로 먹고 살 정도라고 보면 크게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4. 이황이 가진 수십만 평의 논밭과 거의 한 고을 규모의 노비들(400명 내외)을 보면 어디가 검박이고 어디가 청빈인지 모르겠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노비가 아니라 소작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물론 이황이 자손들에게 내린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키면 노비가 복사가 된다고!" 지침을 보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싶습니다.

다만, 서울에 올라와 관직 생활할 때 '땔나무도 없이 가난하다'라는 보고가 다른 사람에 의해 임금에게 올라간 일은 있습니다. 이를 보면 재산 자체는 많이 모았지만 굳이 돈으로 바꿔서 쓸 만큼 자신에 대한 사치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인에게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 게, 지금도 종로 5가 같은데 가 보면 유광잠바 입고 새벽에 허름하게 나다니는 중장년 아저씨들 중에서 그 동네 건물주가 꽤 있습니다. 취향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5. 자금성 남문의 이름은 천안문입니다. 그리고 사금파리란 깨진 사기그릇 조각으로, 유기그릇은 전통적으로 이것과 볏짚과 잿가루를 써서 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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