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61. Bigger Than the Whole Sky
혁명군 1만여 명이 허겁지겁 달려온 이춘영의 본대 약 4천 명을 박살 낸 과정은 특기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심상하게 이루어졌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 뒤였다.
삼국지연의를 19세기에 펼치고 있는 진정한 시간여행자 홍총각은 이번에도 난전 중 단칼에 이춘영을 베어 버렸다.
이춘영의 수급은 한양 공략 당시의 류효원처럼 굵은 깃대에 매달렸다.
과거 서대문에서의 전투에서 그러했듯, 그 깃발은 이번에도 천자총통에 재어져 허공을 날았다.
이번이 두 번째였기에 혁명군 포병은 숙련자다운 재주를 더해 기예를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 좀 많은 행운이 더해지자 믿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었다.
기가 막히게도 대구읍성 성루 기둥에 꽂혀버린 창과 그 아래에서 흔들리는 사람 모가지는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 듯한 꼴이었다.
성루를 지키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김회연은 체념하고 완벽한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김회연은 잠시 후 경주가 떨어졌다는 비보가 도착했을 때도 ‘그래서?’ 하는 표정만 되돌려주었다.
“그 얘기는 밖에 나가서 하라. 저들은 틀림없이 기뻐하며 그대에게 포상을 내릴 것이니.”
그 냉소적 태도는 이 자리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신들은 이제 옆에서 김회연이 자살하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대장군 이춘영과 황제의 목을 나란히 들고 가서 우리는 그저 이 두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죽지 못해 따랐다고 애원하면 역사와 전통에 따라 목숨을 건질 수 있다.
비루하다고 욕먹어도 할 수 없다. 아득한 태고부터 당당하게 적 앞에 선 전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개의 지사는 항상 일찍 죽었고, 따라서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용감하고 고결한 청년은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나라를 지키러 나가서 죽거나, 고을을 위해 맹수를 사냥하러 나갔다가 실종된다. 그의 바람직한 유전자는 오래 계승되기 어렵다.
자손을 남기는 자는 누구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마을에 남아 있다가 용감한 청년이 자리 비운 사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그 애인을 겁탈하는 자들이다.
후대로 갈수록 인류는 대부분 그런 자들의 자손들로 채워진다. 만 년 동안 그 과정을 충실하게 밟은 현재의 인류는 대개 그러했다.
한 반세기쯤 뒤에는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자연 선택이 바로 이것이다.
영길리 오랑캐도 아는 이치를 과학적인 조선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무후(無後)는 최악의 불효인데 어찌 저지를 수 있겠는가. 이건 유교만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도덕이다.
하지만 그건 다윈 자신이 말했듯 자연계, 그러니까 짐승의 도이다.
그런데 혁명은 인간의 것이다.
김회연은 신하들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물론 경명황제가 진화론을 알 리는 없지만 그가 보기에도 신하들은 그야말로 오늘만 사는 짐승이었다. 김회연은 혀를 찼다.
‘망국의 유신이 살아남기를 바라다니, 어찌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 있는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강한 자에게 굴종하며 그 사이에서 약자의 틈을 노린다. 그럴 거면 왜 사대부고 무엇이 귀족인가. 백성이 주는 밥을 받아먹기만 하고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건 개나 말과 다를 게 없다.
김회연은 고귀한 신분의 모범적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대신라국 제창과 황제의 기치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치열한 1년은 이제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야 할 처지였다.
김회연은 서북을 돌아보았다.
‘저들의 이름이 고려라 했던가.’
고려라고 하니 그 태조의 유언이 생각났다. 김회연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浮生自古然矣]. 정시준. 네가 무엇을 이루려고 그 파천황(破天荒)의 패도를 타고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끝내는 너도 이 모든 일이 허무했음을 알게 되리라.”
가장 가까이 있던 태대각간 신서가 물었다.
“송구하오나 옥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김회연은 얼굴을 바꾸고 대답했다.
“군기와 화약을 모두 성문에 모아라. 조령에서 화랑부대가 화약을 바치고 살아서 항복했다고 들었다. 궁핍한 저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리라.”
조선인의 충효에 대한 소양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는, 충효가 훼손되었을 때 얼마나 구슬프게 울부짖을 수 있느냐다.
이를 위해 곡비(哭婢, 장례 때 대신 곡해주는 사람)라는 직업까지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대신라국의 유신쯤 되면 유교적 소양이 충만하니 그런 하청까지는 필요 없다.
신하들은 능란하게 통곡하며 김회연을 따라가 성문 바로 안쪽에 도열했다.
대충 분위기 파악한 고려군도 공격을 멈춘 채 밖에 대기 중이니 이제 문만 열면 된다.
김회연은 짧은 칼을 찬 채 북서쪽, 그러니까 같은 일문인 옛 대비 청풍 김씨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했다.
누가 봐도 저거 끝나면 자기 목을 찌를 자세라서 신하들은 차게 비웃으면서도 그것을 내버려 두었다.
과연 김회연은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내 재주가 모자라고 하늘이 돕지 않아 끝내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너희의 뜻대로 되지는 않으리라!”
글로만 써 놓는다면 그 말은 마치 정시준에게 지르는 발악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옆에 도열한 신하들은 더 불길하고 직접적인 낌새를 느꼈다.
저건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다. 사세가 기울자 대마도에서의 최후 항전도 거부하고, 단 한 명도 황제를 따라 죽겠다고 나서지 않은 자기들에게 발하는 저주다.
김회연은 품속에 손을 확 집어넣어 묵직해 뵈는 쇠뭉치를 꺼냈다.
이제 현대인들이 중화기라고 착각하지는 않을 정도로 소형화된 발화철(라이터)이었다.
태대각간 신서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는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잡아!”
하지만 그런 대사가 다 그렇듯 이미 늦었다.
김회연은 합리적인 인간이고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가 칼을 찬 것은 자기 목을 찌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황제와 가까이 있던 한두 명이 그대로 찔려 쓰러졌다.
항복의 자리에 무기를 차고 나온 자가 달리 없었기에 아무도 달려들지 못했다. 맨손으로도 황제를 제압하려 들 만큼 용기 있는 자라면 애초에 항복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빨리 도망이라도 가야 하겠지만 아직 멀리 있는 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그대로 서 있는 상태였다.
성문 뒤에서는 거대한 소란과 지체가 일어났다. 밀치고 쓰러지며, 그 화급한 사이에도 앞을 가로막은 자에게 노성과 욕설을 퍼붓는 희극이 초고속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김회연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불붙은 발화철을 화약 상자에 던져 넣을 수 있었다.
***
시준도 대구에서 전국 통일이 결정지어질 것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치국 간부 대부분과 함께 대구성 앞에 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시준은 괜히 전쟁터에 온다고 했나 하는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적군이 곧 항복할 테니 주석 동지는 위엄 있게 앉아 계시라는 보고를 받은 게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어진 풍경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아무리 시준이 고전에 별로 밝지 못하다지만, 성문이 산산조각나 날아갈 정도의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하는 항복이라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얼마나 폭발이 강했던지 돌쩌귀가 내려앉고 해자로 돌이 우르르 떨어졌다. 성문 근처를 어정거리던 혁명군 몇 명이 그대로 나동그라지거나 날아오는 나뭇조각에 맞고 다칠 정도였다.
시준의 옆에 있던 조제프 푸셰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면서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오, 오……. 혁명, 실로 혁명적이로다!”
치켜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벌린 입에서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조금 있으면 침까지 흘릴 것 같았다.
시준은 푸셰처럼 성적으로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입을 딱 벌리고 성을 쳐다보기는 마찬가지였다. 푸셰는 곧 자세를 바로하고 말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로 따진다면 이것은 ‘나의’ 경주 함락보다 훨씬 우위로군. 그러나 아무래도 유혈은 적은 편이 좋겠지요. 주석 동지. ‘나의 방법’은 훨씬 신사적인…….”
“그건 나중에 들어 줄 테니 입 좀 다무시오! 전군, 어서 성으로 들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
경주를 사실상 무혈 함락한 일등 공신인 푸셰는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령했다. 혁명군은 허겁지겁 대구성으로 달려 들어갔다.
***
혁명군은 전 부대가 모여 이춘영을 상대했기 때문에 경주 우회 함락에 차출할 병력이 없었다.
여기에서 활약한 것은 두 사람, 조제프 푸셰와 기랑이었다.
신라군이 모조리 대구 주변에 모인 틈을 타, 울진 북쪽에서 기회만 엿보던 고려총포사연결회 충청도 및 강원도 지부 포수들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것이다.
경주를 함락시킬 전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푸셰가 며칠간 벌인 암살과 테러, 협박 공작이 꽤 많은 기여를 했다.
원격 지휘라는 점은 푸셰가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선전선동부와 정찰총국 요원들에게 큰 장애가 안 됐다. 유럽 귀족이 수천 년간 쌓아 온 지저분한 위협 수단이 시시각각 엄습했다.
길거리에서 칼로 찌르거나 술병에 독을 넣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손녀의 옷을 훔쳐다가 보내거나 부모의 묘에 말뚝을 박아놓는 등 조선 사람의 민감한 점을 예리하게 찌르는 양아치 짓도 과연 푸셰다웠다.
영국군에서 도입하여 요즘 혁명군에서 연구되고 있는 수류탄도 실험 겸해서 적극 쓰였다. 천년 고도 경주는 삽시간에 공포와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 때문에 태대각간 신서를 비롯하여 많은 중신이 경주를 떠나 안전한 대구로 온 것이다.
황제가 다 같이 폭사하자고 불을 던지는 바람에 오히려 지옥에 뛰어든 꼴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렇다 보니 김회연 세력이 자리를 비운 경주는 금세 황조 개창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차형기의 지적대로 신라는 옛 조선의 고관들이 유지하던 나라이지, 정말 경상도 사람들이 신라를 그리워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다.
의지할 데 없이 모여 있던 경주 사람들은 바깥에 수백 명의 총 든 군사 – 어쨌든 시뻘겠으니 혁명군처럼 보였다 – 가 나타나자 뭘 더 해 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 버렸다.
테러 하다가 잡혀서 죽은 몇 명의 선전선동부 요원을 제외하고는 희생이 거의 없었으니 푸셰의 말대로 자랑할 만도 하다. 너무나 임팩트 있는 김회연의 항복에 묻힐까 봐 초조했던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시준은 아쉽게도 그런 것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다 죽었다고?”
혁명군 모두가 한마디씩 떠드는 듯한 중구난방의 보고를 정리하느라 시준이 결과를 듣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 노고를 떠맡은 정찰총국장 방우준이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주석 동지.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도필리들을 제한다면 중신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자칭 황제 김회연은 시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방우준은 그러면서 불타고 남은 것 같은 삼베 쪼가리를 내밀었다. 김회연이 걸치고 있던 옷이라는 것 같았다(칼은 이미 누군가가 정찰총국장도 모르게 챙겼다. 조선은 금속이 귀한 나라다).
시준은 그것을 보면서 김회연의 불타는 호연지기에 대한 존경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준은 공무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입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과장과 한판 드잡이질 거하게 하고 타부처로 전출 간 직원의 업무를 이어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흔한 일이다).
그 사람은 아무 인계도 해주지 않은 채 컴퓨터 비밀번호만 주고 갔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PC를 열어 본 시준은 태초의 상태가 되어 있는 컴퓨터를 발견하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공문은 전자문서 서버에 있고 종이문서는 캐비닛에 있으니까 법대로 하면 문제없잖아요? 이제 전 그쪽 직원 아니니까 전화하지 마세요.”
실제로 컴퓨터에 있는 실무적이고 비공식적인 자료는 공식이 아니므로 마음대로 삭제한다 해도 처벌은 어렵다.
물론 이건 ‘공식’의 해석 차이에 따라 달라지기에 위에서 이 악물고 작심하면 못 할 건 없다.
그러나 공무원에게 공무는 남의 일이며, 남의 일에 그렇게 열성적으로 악의를 발휘할 사람도 많지 않다.
그 직원과 싸운 과장조차도 뭐 어쩌겠냐며 잘 해보라고 말할 뿐이었다. 시준은 그 후 반년 정도 정말 죽을 고생을 해야 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 굳이 숨기려고 해서라기보다 사람의 뇌 안에서만 합리적으로 연결되는 정보라서 문서화할 수 없는 것. 설사 문서화했다 해도 서버에 공유할 수 없는 것 등의 자투리 자료와 스프레드시트 장부는 모든 공식 문서의 원천이다.
사실 공식 문서라는 것은 보고용이나 홍보용으로 예쁘게 싼 껍데기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행간에 있으며, 행간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일을 하던 사람이다. 맨파워가 중요한 것은 21세기 한국이나 조선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그게 김회연의 자폭 한 방에 깨끗이 소멸했다.
신라의 주요 인사와 재화는 어디에 있는지, 김회연이 그동안 해 놓은 일과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당장 신경 써야 할 현안은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조사하고 시작해야 했다.
게다가 신라는 최후까지 혁명에 저항한 땅이라 당연히 반동의 피난처가 되었을 터. 다른 지방에 비해 더 격한 반발이 많을 것이다.
핍박받던 인민이라고 전부 혁명을 지지하는 건 아니라서, 지주나 전 사대부들에게 부화뇌동한 농민의 대규모 소요가 다른 고장에서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더 물러날 곳도 없는 기득권층은 정당한 가챠가 아니라 어뷰징을 통해 5성 카드 뽑아 보려는 시도를 더 필사적으로 전개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해결하려면 김회연이 가진 정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필요했는데 지금 전부 날아갔다.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덮쳐오자 시준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한양 감옥에서 김조순과 논쟁할 때도 완전히 깨지지는 않았던 시준의 정신은 곧 몰아칠 격무의 쓰나미에 와장창 박살 났다.
그 순간 시준은 공화국의 주석 동지가 아니라 20대 시절의 7급 주무관으로 돌아갔다. 그것도 저녁때 호프집에서 한 잔 거하게 한 말단 서무 주무관으로 말이다.
시준은 방우준이 가져온 삼베 걸레짝을 들어 갈기갈기 찢었다.
“이, 개자식이! 있는 대로 똥을 싸놓고 황천으로 튀면 다냐!”
방우준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주석 동지의 분노에 흠칫했다. 평소 온화하던 주석 동지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주석의 측근으로서 방우준은 기민하게 행동했다. 그는 이미 김회연이 대구의 공식 문서도 대부분 불태워 버렸다는 사실은 한 열흘 뒤쯤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시준은 방우준이 그대로 도망치도록 놔두지 않았다. 시준은 격하게 분노를 토해내며 말했다.
“정찰총국장 동지!”
방우준은 재빨리 부동자세를 취했다.
“예! 주석 동지! 하명하십시오!”
“아직 살아 있다는 도필리와, 소위 신라국 조정 중신의 가솔을 모조리 체포하시오! 절대 하나라도 더 죽어선 안 되오. 그들은 이제 인민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소!”
“명을 받들겠습니다!”
방우준이 혁명적 속도로 뛰쳐나가자 시준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 있던 총괄서결부장 정약전과 선전선동부장 조제프 푸셰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동지들, 이제 사실상 반동이 모두 평정되고 전 조선 인민 해방전쟁이 완수되었으니, 나는 평양으로 돌아가겠소이다. 뒷일을 잘 부탁하오!”
정약전이 아연실색하는 사이 조제프 푸셰가 선수를 쳤다.
“오, 나 원래 프랑스 사람. 중국어(한자) 잘 못 읽소. 도움 안 될 것 같다. 일단 나도 같이 평양에…….”
정약전은 갑자기 프랑스어 억양이 과하게 들어간 조선말로 어눌하게 지껄이는 푸셰를 한 대 패고 싶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인내심은 혁명가의 자질이 아니다. 만약 그 순간 밖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리지 않았다면 다음 달 월간 대혁명 마지막 장쯤에는 총괄서결부장과 선전선동부장의 노인 격투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 물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명확한 고함이 유막을 뚫고 들어왔다.
“인민이 승리하였도다! 주석 동지 만세!”
시준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야 그 목소리가 경상도 빨치산부대 대장 최옥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수복한 최옥은 감동에 벅차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밖에 엄청나게 모여 있는 것 같은 혁명군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고려인민공화국 만세!”
“오오, 인민의 나라 만세!”
“해도정출 정 진인의 도가 드디어 이루어졌다!”
황급히 유막을 걷고 나간 시준과 동료들은 아까까지 일 안 하겠다고 부리던 개수작을 다 잊어버렸다.
이성적으로 여기에는 1만 이상의 혁명군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그 몇 배의 인간이 여기 있다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조제프 푸셰 같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한순간 쿠데타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갈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대구성에 있던 신라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런 합리는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사람 하나하나가 이전보다 한층 더 커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백성 무리가 쌀알 한 줌이라면, 지금 모인 사람들은 쌀알과 같은 개수의 감자 더미에 비유할 수 있었다.
더 커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시준이 이끌고 함께하던 동료들은 그렇게 스스로의 가치를 높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손에 의해, 그들은 저 하늘보다 높아졌다.
그렇기에 지금 이들의 함성은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그 어떤 위대한 황제의 칙령보다 거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전 조선 인민 해방전쟁 승리 만세!”
경주에 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슬그머니 시준의 뒤편에 나타나 있던 기랑이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 전쟁 끝난 거지? 서울에서 못 먹은 ‘돈까스’ 오늘 해 먹자. 돼지 구해놨어.”
시준은 그만 웃어버렸다.
뒤풀이라고 하면 이 전쟁에서 쓰러져간 자들에게 무례한 모욕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군주의 야망을 위해서, 종교적 열정을 위해서, 자본가들의 탐욕을 위해서, 이름만 바꾼 왕이 되고 싶었던 이념가들을 위해서 싸운 게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전쟁은 말 그대로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모내기 끝낸 기분으로 맛있는 것 좀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시준은 웃는 표정 그대로 기랑을 마주 보았다.
“그래,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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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여기서 끝이라는 느낌이군요. 하지만 혁명은 계속될 것입니다.
1. 소제목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혁명과는 관계없는 노래입니다).
2. 이 시대의 수류탄은 약 1.5킬로그램 정도의 쇳덩이입니다. 현대에 발굴되었을 때 처음엔 포탄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비슷했죠. 이것을 던지기 위해서는 건장하고 힘이 세어야 했으며, 그를 위해서 배치된 '척탄병'은 따라서 정예병일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