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92화 (192/284)

193화

60. 낙동강 전투(2)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서 혁명군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승리한 것은 선산(구미) 방면을 공략한 2영대와 계룡산 영대뿐이었다.

강이 자연 방어선으로써 흔히 거론되는 이유는 그만큼 강을 건너 공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장군 이춘영의 본대를 붙잡아두고 신라 조정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낙동강 남북 곳곳에서 조공을 감행한 다른 5개 영대는 예상대로 패퇴했다.

그러나 ‘예상대로’라는 점이 중요했다.

고령과 합천 인근에서 이춘영의 본대와 맞붙은 3, 4영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분루를 삼켰지만 나머지 영대는 큰 희생까지는 내지 않고 퇴각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김회연은 격심한 갈등 속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지금 돌출된 혁명군 2개 영대를 막으려면 낙동강 여기저기 흩어진 신라군을 전부 끌어모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외의 다른 모든 지점에서 혁명군이 강을 건널 것이다.

결국 오래된 전쟁의 진리가 증명되었을 뿐이다. 숫자가 곧 힘. 숫자가 많은 편은 단지 단일 전장의 전투력에서만 우월할 뿐 아니라, 전역 전체에서 싸움의 시각과 장소를 결정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주도권이라고도 한다. 주도권을 빼앗긴, 아니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김회연은 고심했다.

이대로 정시준이 마련한 판 안에서 계속해서 수를 둬 나간다면 뭐가 됐건 적의 승리로 끝날 뿐이다. 정시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방을 안겨줘야 했다.

‘정시준의 뒤를 칠 수 없을까?’

물론 일찍이 청해진 제독 오재광과 검토한 대로 신라 수군이 인천 상륙작전 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낙동강이 뚫리자, 김회연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어떻게든 다시 엮어 봐야 할 처지가 되었다.

비슷한 처지에서는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김회연의 사고가 달리는 궤적은 140년 뒤의 대한민국, 그리고 연합군과 흡사했다.

확실히 신라 수군은 대규모 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의 대한민국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인천 상륙작전은 한국군이 한 게 아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요헌이 직접 보았듯, 김회연은 서상 외에는 조선 최초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고 영길리 깃발 그려진 배를 이용해 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는 등 서구의 문물에 관심이 있었다.

김회연은 신하 모두를 군관처럼 대구의 유막에 모아 놓았다.

코앞에 닥친 혁명군 때문에 불안해하는 신하들을 다잡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김회연은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조신들을 죽 둘러보았다.

“천하의 공의를 모은다. 영길리국도 비록 오랑캐라 하나 군주가 있고 부모가 있으니, 설마 충과 효를 모르지는 않으리라.”

당시 영국과 친해 보려던 강철군주 이공의 간섭 때문에, 정약용이 영학해설에 영국인의 역사를 자세히 써놓지 못한 게 이 실수의 발단이었다.

초고에는 시준에게 들은 영국의 역사가 있었지만 이걸 공표했다가는 영국과 통교하는 자신이 만세토록 욕을 먹으리라는 것 정도야 이공에게도 명확했다.

그래서 김회연은 어차피 다 같은 사람이니 영국인에게도 도덕과 윤리라는 게 존재하리라는 식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다. 시준이 있었다면 적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저 임금도 부모도 필요 없다는 도적들에게 맞서지 않는다면 곧 자기네 나라에도 독이 퍼질까 염려하고 있을 터! 그들의 힘을 빌려 보도록 하자.”

시준에게 공화국 시민권 받고 싶었던 푸셰가 경주에서 일으키고 있는 여러 암살 작전 때문에, 태대각간 신서는 황제와 군영이 있는 대구로 도피한 상태였다.

그는 물론 영국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인류 공통 무의식이 경고하는 위험은 태대각간으로 하여금 나서서 진언하게 했다.

“영길리인은 장사치 모리배의 족속이라 들었습니다. 그자들이 자기들과 친한 정시준을 배반케 하려면 필시 많은 재물이나 토지를 헐어내어야 할 것인바, 폐하의 용단을 감히 미리 알기 바랍니다.”

경명황제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황제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대동강 이북은 정시준의 독에 깊이 물들어, 차지한다 해도 신민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을 준다면 영길리 사람들도 기꺼이 평양을 치려 하리라.”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김회연은 다른 반응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말을 잡아챘다.

“우리는 신라의 국체를 회복하려 몸을 일으켰다. 대신라국의 열성조들이 어째서 대동강 이북은 오랑캐의 땅으로 남겨두었는가? 이번에 드러났듯이 양계는 완악하고 음란한 도적의 굴혈이지, 애초에 온후한 신민들이 살 곳은 아니었다. 인민을 곤고하게 하고 국고를 탕진시켜 가며 척박한 땅을 애써 지킬 까닭은 없는 것이다. 백관은 모두 짐의 뜻을 상고하도록 하라.”

완벽한 논리였다. 고조선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환제국을 만들지 않았으며, 한나라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로마를 정복하지 않았고, 지구인은 21세기에도 같은 이유로 화성을 개척하지 않았다. 시대를 관통하는 정언명령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신하들은 모두 황제의 위대한 비전에 감복했다. 황제는 의심할 수 없는 (정신)승리의 길을 제시했다.

경명황제는 친히 영국에 보낼 글을 닦았다. 영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게 김회연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이 협상이 통하려면, 최소한 흑산도에 편지가 가 닿을 때까지는 신라가 버텨 줘야 한다.

김회연은 김희순이 망하고 나서 신라로 도망친 옛 영남순무사 박기풍을 비롯해 여러 구 조선군 출신 투항병도 거느리고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부대가 아니어서 지금까지는 그저 주둔시킨 채 감시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다.

박기풍 휘하의 군대는 총 한 자루 제대로 없이 대충 깎은 창만 든 채 인간 방패로 투입되었다.

뒤에서 신라군이 총을 겨누고 있으니 도망칠 데도 없었거니와 신라군 역시 옛 조선군이다. 조선군의 필살기 양자화는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낙동강 곳곳에서 피에 젖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

김회연은 극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냥 배 한 척만 서쪽으로 보내봐야 이요헌 때처럼 잡히고 끝날 게 뻔했다.

그래서 김회연은 일종의 세탁을 시도했다. 그가 처음 접촉한 곳은 대마도였다.

공화국이 조슈 번과 우의를 다지는 동안 신라라고 해서 놀고 있던 것은 아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 그간 교류가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리고 쓰시마 번으로서도 신라와 통해 볼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김회연과 쓰시마 번주 소 요시타카[宗義質]는 이미 구면이었다.

쓰시마 번은 이번 혁명으로 피해와 이득을 동시에 본 처지였다.

강철군주가 최후의 조선 통신사를 보내지 못했으니 가난한 대마도 인민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요시카타 역시 올해 봄과 여름에 걸쳐 조선에 보냈어야 할 자신의 가독 승계 보고도 생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아랫사람들이 좋아할 일이고, 요시타카 입장에서는 불안과 초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역 때문은 아니다. 옛날과 달리 현재 쓰시마의 대조선 무역 자체는 대단하지 않다. 규모가 작아졌다기보다는 의존도가 작아졌다.

인삼과 면포는 이미 일본에서 국산화가 진행되는 중이고, 지금의 일본국은 조선보다 월등한 경제 규모와 인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번과 오가는 게 더 편하고 많이 남는다는 얘기다.

텐메이 기근의 상흔이 치유되지 않아 살림이 팍팍하기는 하여도, 어차피 요새 동아시아는 흉년이 기본이니 특별한 일도 못 되었다.

쓰시마 번 또한 예전 공포군주에게 섬이 불살라질 때와는 다르다. 그들은 대마도 하나만 붙들고 있는 거지 해적이 아니라 본토의 여러 나라도 보유한 큰 번이다.

아마 이대로 갔으면 요시타카도 조선에 미련을 끊고 영국 같은 서양 세력과 접촉해 보았을 것이다.

세력은 남부럽지 않지만 아직 중세 봉건제의 향취가 진하게 남아 있는 쓰시마 번으로서는 개혁의 필요성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 새로 세워졌다는 고려라는 나라는 갑자기 조슈 번과 적극 접촉하고 있었다.

쓰시마 번은 조슈의 바로 코앞이다. 공화국의 눈 가리고 아웅 식 밀무역이 이웃 나라에 새어나가지 않을 리는 없다. 조슈가 거품 물고 멱살 잡는 게 귀찮아서 아무도 막부 차원의 공론화를 하지 않을 뿐이다.

쓰시마 번의 존경받는 가로들은, 여기에서 무기가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했다.

‘조선인들이 우리를 버리고 조슈와 통하다니, 장차 대마도를 적대하거나 도모할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피해망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한쪽은 한때 서일본 전체를 제패했던 오우치의 후계이고(요시타카는 옛날 무역 때문에 오우치 놈들이 되는 대로 주워섬겼던 백제 후손설을 조선인들이 정말 믿었는지 의심했다) 한쪽은 더 말이 필요 없는 대마도의 악몽이다.

조선이 조슈와 죠죠동맹을 맺고 앞뒤에서 대마도를 친다면 버틸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 쓰시마는 요동치는 포탄에 불타버릴 만큼 뜨거워질지도 모른다.

지금이 무슨 센고쿠 시대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되냐는 상식적인 반박이 당연히 나왔지만, 그것은 즉시 재반박되었다.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 대마도 정벌] 이전에도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분로쿠게이죠노에키(임진왜란, 정유재란) 때도 마찬가지다. 조선은 부산 앞바다에 고니시의 대군이 나타날 때까지 출병 예고를 믿지 않았다.

천하태평의 시대에 막부가 가만히 있겠느냐고? 지금 사쓰마를 곶감 빼먹듯 털고 있는 이기리스 해적을 보라. 막부는 세 원숭이[三猿]처럼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있지 않느냐!’

희만 선생도 감탄할 역사적 고증에 요시타카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요시타카는 마침 ‘조선 땅에 새로운 천명을 개창’ 했다는 대신라국 사신이 오자 그들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 전차로, 김좌근이 매경은과의 비무에서 혁명 제2초식에 석패를 당할 무렵쯤에는 대마도와 신라의 관계도 제법 훈훈했다.

고려 따위의 도적은 금세 진멸될 것이라는 그들의 허풍을 믿은 건 아니지만 대마도에 사절을 보내고 황제를 칭할 정도면 고려에 대한 방패 정도는 되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역시 일방적인 관계는 없는 모양이다. 쓰시마는 자기 이득을 얻어내기도 전에 신라의 외상 청구서를 먼저 마주해야 했다.

신라의 사신은 ‘우리가 영길리국에게 조칙을 내려 고려를 토벌할 것’이라며 편지 배달을 요청하면서, ‘이제 일본국도 영길리국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 되도 않는 주접을 마주한 시점에서 요시타카는 일이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신라국의 칙사에게 묻겠소. 영길리국과 신라는 원래 우애가 있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이전부터 선박에 영길리국의 깃발을 달아 통교하실 정도로 서양에 해박하고 서양인들이 경모하는 위엄을 갖추셨습니다.”

어쨌든 사실 자체는 틀린 게 없기에 칙사의 말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요시타카는 서양인들이 경모 어쩌고 하는 말은 무시했지만, 일단 김회연이 영국과 아무 끈도 없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요시타카는 칙사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다만 아무 대가 없이 봉사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는 신라와의 소소한 교역에서 값을 많이 후려치기로 약속함과 동시에, 보내는 편지의 우선순위를 약간 조정했다.

흑산도에 자신의 친서를 보내고 인근 영국군의 동태도 살피며, 가능하다면 말도 좀 터 본다.

그런저런 일을 다 마치고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간 김에 경명황제의 ‘칙서’도 부수적으로 갖다 주는 것이다.

임무를 완수한 칙사는 당당히 본국 신라에 낭보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쓰시마는 전형적인 어선으로 꾸민 배를 흑산도에 보냈다. 물론 칙사도 자기 옷을 소중히 개어 놓은 채 탑승해야 했다.

혁명해군은 신라 수군의 동태에만 촉각을 곤두세웠기 때문에, 남해의 혁명해군 경계 범위를 빙 돌아 흑산도로 ‘표류한’ 쓰시마 어부들 따위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현재 흑산도가 공화국의 관할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원래 호남 해안에는 중국 및 일본 어부의 표류가 잦다. 시준이 옛날 영국을 조선에 끌어들일 때 잘 써먹었던 표류 핑계를 그대로 당한 셈이다.

그런데 흑산도에 도착한 ‘쓰시마 어부’들은, 아무래도 영국군이 자기들을 ‘구휼’ 해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홍총각이 클레이모어로 반동 장작패기를 하고 있을 때, 시준은 상주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대로 평양에 돌아가자니 전선이 걱정되고, 여기 남아 있자니 자신의 미래인적 심모원려를 몰라 주는 동료들이 너무 야속했다.

“몇 번을 말해야 하오. 지금 김회연은 승산이 없습니다! 반드시 사세를 단숨에 역전시킬 한 방을 노릴 것이오! 그건 삼화부나 제물포 상륙 말고는 없고!”

시준은 뒤늦게야 정찰총국을 통해 서해의 방비가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것이다.

뒤늦게라고는 해도 며칠 만에 주석 동지에게 그러한 내사결과를 바쳐 올린 정찰총국장 방우준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서해의 해군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농상진흥부장 이강회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로 얼마 전 군사 작전에 대해 아는 척하면서 지리산 등반을 주장했다가 망신당한 일을 상기해 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무례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강회는 다른 방법으로 주석을 설득했다.

“전라도에 혁명해군과 공화국 해병대가 있는 한 절대로 신라국 수군은 넘어올 수 없습니다. 모두 명량의 왜군 꼴이 될 뿐이지요.

게다가 지금 서쪽 바다의 배는 그저 놀고 있는 게 아니라 고기잡이도 하고 쌀도 나르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해군 동지들을 집결시켜 삼화나 제물포를 지키는 일이라면 적군의 동태가 밝혀진 뒤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반박 논리를 찾던 시준은 그 순간 김회연과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김회연과 군사적으로 비슷한 처지에 몰렸던 것은 대한민국 정부다. 그러나 그 난국을 타개할 인천 상륙작전을 수행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일부 부대가 참여는 했지만 작전을 기획, 주도, 성공시킨 것은 연합군. 그중에서도 미국이다.

다만 현재의 아메리카 노예국은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만도 못한 삼류 국가다. 앞으로 반세기 뒤나 되어야 열강의 말석에나마 기웃거릴 수 있게 된다.

그사이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따로 있었다.

시준은 비명처럼 외쳤다.

“영국!”

“예?”

“김회연은 반드시 흑산도의 영길리 해군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오. 아마 양계를 떼어준다느니 하는 흥정을 걸었겠지. 혁명 이전 영길리국이 평안도를 사들이려 했던 일이 있지 않소!”

이강회는 설마 영길리인들이 오랜 우의가 있는 공화국을 그리 단칼에 배신하겠느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강회도 영국인을 오래 만나 봤다. 영국 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 그건 주석 동지의 염려가 타당하오이다. 영길리인들은 돈만 주면 부모도 팔아먹을 놈들이니……. 그러하시다면 삼화부나 한양군에 빠른 파발을 보내어, 아니, 제가 가지요. 그 우두머리 아묵사특이 천진에 있을 테니, 가서 영길리인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겠습니다.”

시준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다. 김회연은 필사적일 테니 바로 흑산도에서 출병을 요구할 것이며, 이 시대의 재량권으로 볼 때 흑산도 사령관 헨리 호프는 일단 배를 출항시킨 후에 암허스트에게 사후 재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문제는 암허스트가 쾌히 사후 재가를 내어줄 것 같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이 바라마지 않던 상황 중 하나다.

신라는 설사 고려를 무너뜨린다 해도 조선 인민의 인심을 얻기 어렵다. 이미 인민들은 공화국의 수평도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지속적으로 불안할 것이며, 영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양계를 떼어주는 것도 신라 입장에서는 솔직히 남는 장사다.

중국을 털어먹기 위해 조선을 발판 삼느라 암허스트도 그동안 공화국에 적대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자기들이 알아서 나라를 들어 바치는 기회가 온다면 아예 속국으로 접수하는 편이 영국에게도 압도적으로 편하다.

한 가지 걸림돌이 되는 것은 국제적 신의인데, 영국에겐 해당이 없다. 영국인에게 국제 윤리를 찾느니 핵폭탄 폭심지에서 생존자를 찾는 편이 단연코 합리적이다. 후자는 사례가 있지만 전자는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이나 대충 어디 우가우가 부족민 1, 2, 3쯤으로 생각하는 암허스트는 더하다. 시준은 암허스트가 이 제안을 받아들자마자 쾌속 허락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이강회를 보내 협상하는 안도 마땅찮다. 시간 문제만이 아니라, 암허스트가 협상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공화국이 다급하게 매달릴 경우 암허스트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그럼 신라를 치는 일에 협조할 테니 거꾸로 너희가 다른 땅을 내놓으라고 지껄일 게 뻔하다.

“그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 되오. 아무래도 흑산도를 바로 도모해야겠소.”

이강회는 펄쩍 뛰었다.

“예? 안 됩니다! 공화국 해군을 전부 밀어 넣는다 해도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을 뿐입니다. 주석 동지!”

옛 조선의 전라우수사 서유봉이 느꼈던 것처럼 헨리 호프는 요사이 흑산도의 군대를 크게 강화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주석이 그 소리를 하니 이강회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요새 조금 모자란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시준이 괜히 공화국 인민의 주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준은 만상 시절의 미소를 지었다. 이강회가 움찔하는 동안 시준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흑산도는 섬이지. 물이 나온다고는 하나 요즘 군세가 크게 늘어난 흑산도는 항상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할 거요. 어찌 우리가 ‘물’과 곡식을 가져다주지 않을 수 있으리?”

“예? 그렇기는 합니다. 여태까지는 평안도에서, 얼마 전부터는 전라도에서 대어 주고 있지요. 하지만 그 일을 갑자기 끊으면 난폭한 영길리 해적은 틀림없이 난리를 일으킬 텐데요.”

“내 말을 무엇으로 들은 거요. 나는 더 주겠다고 했지 끊겠다고 하지 않았소.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게 순천부의 공화국 해병대지요? 그들을 준비시키시오. 그리고 근방에 이러한 고장이 있는지 급히 수배하시오.”

시준은 ‘이러한 고장’의 조건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강회는, 평생 그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영길리 사람들을 동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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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인천 상륙작전에는 한국 해병대도 참여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같이 피를 흘려 체면을 세웠다는 정도고, 선봉과 주력군은 미군이었지요. 지휘도 맥아더가 했고. 한국엔 맥아더 장군신을 모시는 무속인도 있습니다.

2. UN이란 곧 2차 대전의 연합군 회의체가 모태입니다. 공식 번역(유엔 공식 언어 중 하나인 중국어 기준. 한국어 공식 명칭은 유엔이 맞습니다)도 연합국이고요. 그래서 작중에서는 연합군으로 표현했습니다.

여담으로 '국제 연합' 이라는 예전 표기는 일본에서 유래한 표기입니다. 이 표기를 처음 쓴 건 2차대전 중인데, 전쟁 끝나고 일본이 유엔 가입할 때도 공식 명칭인 연합국이나 유엔으로 변경하지 않은 걸 보면 추축국 전범 출신인 게 켕기긴 했나 봅니다. 한국도 계속해서 국제 연합으로 불러 오다가 최근 변경했지요.

3. 인삼과 면포의 일본 국산화는 이 시기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문제로 여전히 수입은 했습니다.

4. 명나라 사신이 오는 게 조선에서 부담이었듯이, 조선 통신사가 오는 것도 쓰시마에서 상당히 부담이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지도 제작자 이노 타다타카가 딱 이때쯤 해서 쓰시마에도 측량을 위해 오는데 쓰시마 번에서는 '우리 지금 재작년 온 조선 통신사 때문에 살림 궁함' 이라며 우리가 만들어 놓은 지도 보내 줄 테니 오지 말라고(이노 타다타카는 막부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기에 공무였고, 번에서 대접해야 했습니다) 할 정도였죠. 순조 시기 최후의 조선 통신사는 일본의 요구로 쓰시마까지만 오고 컷당했으니;; 거기 오래 체류했던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작 측량사 일행 못 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쓰시마 번이 단계적 봉건제를 여전히 강력히 유지하던 번이었다고는 해도 정치가 후졌지 경제가 후지지는 않았거든요. 본토에 넓은 영지도 갖고 있었고요. 아마 다른 불만이 있었던 듯 합니다.

5. 흑산도는 조선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섬입니다. 목포를 기준으로 했을 때 부산과 대마도보다도 멉니다. 그래서 작중과 같은 일이 가능했던 거지요.

6. 히로시마에서 원자탄이 터졌을 때, 폭심지 근처 근대식 건물 지하에 있던 노무라 에이조라는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당연히 여러 후유증은 있었지만 이 사람은 80살이 넘도록 장수했지요. 핵폭탄이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지어진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일격에 파괴하는 일은 힘듭니다. 일반 무기로는 말할 것도 없고...시가전이 지옥이라고 하는 이유 중에서는 이것도 한 몫이 들어갑니다.

7. 정언명령은 칸트가 말한 개념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상황과 시대, 사회 등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도덕률과 대비되어 그 어느 시대와 상황, 그 어느 누구에게 대응하더라도 반드시 옳은 윤리적 명제입니다. 절대적 이성의 기준을 세우려는 시도 중 하나였지요. (극히 축약된 설명이니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시준이가 읽었던 전범국의 저작을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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