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86화 (186/284)

188화

58.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조선국 좌의정 겸 대사헌 김희순의 얼굴은 이제 반쪽이 되어 있었다. 팔이 부러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희순은 이경춘의 관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일단은 왕이기도 하고, 시신이 다 썩어버리면 곤란한 사정이 있었기에 설빙(設冰, 국장에서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관 주위에 얼음을 설치하던 일)까지 해두어 나름대로 왕의 관이라는 분위기는 났다.

그러나 김희순은 거기에서 참혹할 정도로 어이없는 농담의 기운만을 느꼈다.

일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던 조선 정부가 고창현이라는 작은 고을 하나로 줄어들기까지 단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선 사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따져 봐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영토를 잃은 군주는 없었다. 스피드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최고인 선조 이연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선조와 달리 이경춘은 이 영토를 회복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관 속에 누워서는 하기 힘든 일 중 하나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지금의 일을 헤쳐 나가야 했다.

김희순은 여염집 장례 하듯 옆에 참석한 신라의 칙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희순이 이경춘을 죽였다는 것은 절대 비밀이다. 칙사는 운 나쁘게도 나라가 망하려니 왕이 갑자기 돌연사한 것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주에 와 있던 신라 사신단도 같이 도망쳤다가 지금 이 시늉뿐인 국장에 합류한 것이다.

칙사는 혹시 지금 김희순이 신라에 항복하겠다고 할까 봐 움찔했다.

물론 칙사도 애당초 그것을 권유하러 온 것은 맞다. 허나 이 짧은 시간 만에 사세는 크게 바뀌었다.

이제는 조선이 신라의 품으로 들어와 봤자 그들이 호남을 제공할 수 없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고려에게 명분을 주어 기세를 올려 주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게 아니라도 서라벌(경주)에 들어온 옛 조선의 구신들을 견제하느라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게 된다.

솔직히 신라도 여유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 정치적 문제 이전에 이자들이 세 끼 처먹는 조나 보리도 아까웠다(쌀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칙사는 먼저 서둘러 입을 열기로 했다.

“참으로 애통한 때를 당하여…….”

그러나 급한 것은 김희순 쪽이 더하다. 그는 예법도 무시하고 칙사의 말을 끊었다.

“세자께서 보령 유충하여 이 몸이 고명대신으로서 원상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니 이 자리에서 말하겠소. 우리는 대신라국 황제 폐하께서 내린 칙명을 엎드려 받들겠소이다.”

신라에 항복하겠다는 소리다. 칙사가 뭐라고 대답하려 하자마자 김희순은 다시 한번 그의 말을 가로챘다.

“예물은 벌써 준비되었소. 보시다시피 사정이 극도로 곤란하여 물목이 초라함은 칙사께서 폐하께 잘 아뢰어 해량하여 주시기 바라오.”

칙사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대화에 당황했다. 예물 그만두라는 소리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해답은 김희순이 알아서 철회하는 방법뿐인데 김희순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이것이 천자국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워낙 대신라국의 영광에 깊이 경도되어 칙사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2년 전만 해도 이 땅 전체가 조선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의 쌍검 ‘사대’와 ‘조공’은 항상 중국을 푹푹 찌르며 천자를 괴롭혀 왔다.

아무리 그래도 약자의 입장이니만큼 조선이 명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고 하면 과장이다. 명의 시조가 도적 출신임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명나라 역시 만만찮게 골치를 앓았다.

원래 조선의 조공은 귀금속과 (여진족에게 사 와서 남겨먹고 파는) 군마를 제외하면 대단하지 않다.

그나마 금은 같은 것은 조선이 손해라서 금방 폐지하거나 잠시 중단한 경우가 많았다.

벌써 춘추전국시대에 관중이 ‘그냥 걔네 거 팔아 줘야 쓸데없이 약탈하러 안 오니까 싸구려라도 좋게 쳐 줘라’ 했기 때문에 그 말을 옳게 여긴 명나라도 받았을 뿐이다.

회귀군주 정통제가 왜 잡혀가서 전무후무한 2회차 황제를 했는가. 오이라트가 조공 바치겠다는데 거부해서 그렇다.

조선의 경우 절대 힘이 없어서는 아니고 도덕국가를 표방하는 만큼 군대 몰고 명에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저런 별 필요 없는 물건들을 조공이랍시고 갖고 와서 ‘돈 줘’를 시전하는 꼴은 오이라트보다 더했다.

오이라트는 값이 폭리였어도 어쨌든 전략자원인 군마였기나 했지, 돗자리 들고 와서 비단 내놓으라니 손님 맞을래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먹고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국방은 (명나라 기준에서) 내다 버리고 있다가 왜적이 쳐들어오니까 ‘군대 줘’ ‘밥 줘’까지 거리낌 없이 남발했다.

여기에서 뽑기 잘못해서 호구군주 만력제 같은 거 나오면 그대로 나라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은 실제로 그렇게 망했다.

그런 조선의 마지막 유신 김희순의 사대 스킬은 절륜했다.

돈과 군대를 넘어서 이제 ‘나라 줘’의 단계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들을 받아들이면 신라는 당장의 전술적 유리함보다 조선의 국체 회복 쪽으로 전략의 가닥을 잡아야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명목상으로나마 그렇게 발표해야 하며, 이 괴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또 자원이 들어간다.

그러고도 고려를 이길 수 있다면 모르겠는데 지금으로 봐서는 어려울 것 같았다.

칙사는 이 시대 동아시아 외교관들의 필살기를 한꺼번에 전탄발사했다.

“재상의 말씀은 내가 잘 들었소. 그러나 아무래도 이런 의논은 고귀한 제후의 빈전에서 갖춰야 할 예법에 맞지 않거니와, 이는 내가 돌아가서 황제께 품의를 올리고 칙허를 받아 와야 하는 중대사외다. 모든 일에 순서가 있으니, 우선은 국상을 잘 마치도록 하시오.”

김희순은 칙사에게 동의했다. 칙사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난 김희순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가슴을 쓸며 물러났다.

그러고는 서둘러 짐을 쌌다.

칙사는 당장 전쟁터가 될 게 뻔한 이 고창현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돌아가서 황제께 품의를 올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대국의 사신이 하는 말은 하나하나가 천금같이 무거운 법이니 어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건 김희순을 너무 깔본 처사였다. 김조순의 명석함이나 김좌근의 검술은 없지만 그도 장동 김문의 일족이다.

김희순은 예물에 한 가지를 더 얹어서 협상에 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동시에, 예물 수레의 방향도 바꾸기로 결정했다.

고창현의 민가 하나를 비운 칙사의 숙소에 그날 밤 스무남은 명의 병사들이 잠입했다.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숙소를 에워싼 병사들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사신단을 체포했다.

김희순이 허락한 대로 병사들은 신라 칙사와 보좌하는 관리들의 비단옷을 벗겨 나눠 가졌다. 삽시간에 상놈 꼴이 된 사신단은 분통을 터뜨리며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희순은 미리 닦아 두었던 글을 혁명군에게 보냈다. 어차피 혁명군이 남북으로 고창을 둘러싸고 있어 편지의 송달은 매우 손쉬웠다.

***

호남까지 길어진 혁명군의 보급선이나 그에 따른 사기 문제도 있고, ‘두 전위의 도시’를 수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정감록파의 압력도 있어서 시준은 이때 계룡산에 내려와 있었다.

4백 년 전 아기바토르가 만들어 놓은 주춧돌이며 터, 제방을 기초로 ‘혁명의 단전’을 건설하기 위한 조사 및 ‘현지지도’도 겸사겸사 수행했다.

원래 여기에 난립하던 절이며 도관, 무당집은 벌써 사세를 다 파악했다.

그들은 십승지에서 개념을 따 와, 혁명을 이루는 열 개의 칼날이라는 뜻으로 십인지맹(十刃之盟)을 결성했다. 그러고는 공화국 국무당을 상대로 협상을 타전했다.

현대어로 하자면 국책사업 토지 수용가 협상이다.

도성이란 게 들어서면 종교 시설은 다 밖으로 내쫓기는 게 상식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이 당연한 행동을 못 하게 한 400년의 억압이 풀리자 조선인들은 시준도 놀랄 정도로 현대인처럼 조직되었다. 자생적 시민의식 발전에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시준은 그 토지보상 다 해 줄 돈이 없었다.

정확히는 공화국에 돈이 없었다. 전쟁이란 게 그리 만만한 사업이 아니다.

시준이 모은 막대한 사재를 털면 안 될 것도 없겠지만 건전한 공무원이라면 사재와 국고를 항상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진상 민원인을 주먹으로 패는 공무원은 잘리지 않지만(민형사 소송은 별개의 얘기다) 소위 “In my pocket”, 그러니까 횡령은 누구도 커버를 못 쳐주는 게 그 바닥 생리다.

시준이 사재를 써서 국가사업을 수행하면 횡령이 아니라 칭찬받을 모범인데 무슨 문제냐고 묻는다면, 관계란 건 항상 상호적이라는 오래된 금언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

사재를 국고에 쓰는 자는 언젠가 국고를 사재에 쓰게 된다. 이건 작용 반작용의 물리법칙 같은 것이라 개인의 의지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다.

거의 모든 공무를 담당자에게 네가 알아서 사재로 처리하라고 강요했던 조선의 말로를 예시로 들 수 있다. 조선 왕국과 공화국 둘 다 그랬고, 모두 개판을 면하지 못했다.

하여튼 시준이 3년 뒤 은퇴하고 막대한 재산으로 한 살림 차릴 노후자금 때문에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시준은 홍총각에게 조령을 맡기고 돌아온 십인지맹 맹주 이제초 – 시준은 이 시점에서 언젠가는 공무원 겸직 금지규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외 정감록파 인사들을 둘러보았다.

“계룡산에 전위의 도시를 정한 뜻은 영험과 신이를 소중히 하는 인민의 뜻을 이루는 데에 있소이다. 어찌 다 헐어버리고 땅을 사들일 수 있겠소. 사찰과 암자는 모두 그대로 새 성벽 안에 민가와 함께 들일 것이오.”

마치 사려면 땅을 살 수 있지만 너희들을 존중해 주겠다는 것처럼 지껄이는 소리에 계룡산의 모든 종교인들은 감동했다.

한참 전부터 그들은 출신이 불교이건 무속이건 다 한가지로 정감록 교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수백 년간 사이한 도참이라 매도되었던 정감록. 그 예언서가 바로 지금 한 치의 엇나감 없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정 진인은 바다 섬인 장자도에서 해도정출하여, 이씨 왕조를 깨부수고 계룡산에 도읍을 정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주위 사람들이 괜히 떠받들어 퍼뜨리는 헛소문이 아니다. 정 진인은 그들 앞에서 직접 계룡산 신앙을 인정했다.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21세기에 누군가가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주장한다면 그냥 캡처해다가 SNS에서 잠깐 낄낄대고 잊어버리겠지만, 그자가 정말 죽었다가 의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흘 뒤 부활한다면 꽤 많은 사람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이다.

이 땅에서는 이제, 압도적인 전도력을 자랑하는 서양의 사제와 목사들이 전부 입항한다 하더라도 절대 정감록을 이길 수 없다.

정감록은 진짜로 실현되었지만 요한의 묵시록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화국 시민은 서양인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라는 자는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는 바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 정 진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그러면서 벌써 계룡산 아름드리 나무 두 그루 사이에 걸린 시준의 초상화를 가리킬 것이 틀림없다.

시준은 안타깝게도 그런 종교적 통합의 움직임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러기에 시준은 전생에서 종교 및 역사적 소양이 부족했고, 관심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지금 너무 바빴다.

미래에 닥칠 재앙을 알지 못하는 시준은 토지 수용 대금 아낀 자신의 결정에 스스로 찬사를 보낼 뿐이었다.

물론 십인지맹 사람들도 동의했다. 그들이라고 무조건 종교적 열정만으로 시준을 따르는 건 아니다.

시준의 제안은 단지 지금 영업장 밀지 않는다는 것 외에도 큰 이득이 있었다.

조선 왕조 시대와 달리 도회 안에 종교시설을 세울 수 있으면 접근성이 상승하고 자연히 수입이 상승한다. 붕어빵 장사 자리다툼과 똑같다(세금 안 내는 것도 똑같다).

그래서 왕씨 고려의 대형 사찰은 조선과 달리 성내에 있었고, 기독교 사회인 유럽에서 교회가 대개 거주지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21세기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에 엄밀하게 나와 있듯 원래 그 바닥은 의주 시절 시준의 만상 체제처럼 상납금을 빼돌리면 즉시 살해당한다.

베드로는 명색이 초대 교황인 만큼 단검으로 몰래 찌르는 만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래도 그러라고 준 게 아닌 것 같은 신통력을 써서 단번에 몰살이다. 조직의 배반자에게 용서는 없다.

그래서 교회는 수입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목숨이 걸렸다는데 이해해 줘야지 어쩌겠는가.

역시 만상이 상납금 바치는 상인 보호해 주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다 면죄해 주실 것이므로 오만가지 불법을 동원해도 상관없다.

지자체를 ‘설득’해서 지하철 입구는 무조건 교회 가까이, 가능하면 안으로 뚫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돈 들고 오기 편하다.

종교시설의 입지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지금 계룡산에 교회는 없지만 이 땅은 질 대신 양이다. 한 상 안 차려주면 해코지하겠다는 귀신들이 너무 많아서 돈이 꽤 든다.

그래도 이리저리 말 꾸며 돌려대지 않고 밥 한 그릇에 술 한 잔만 주면 물러가겠다고 당당히 밝히니 이 또한 동방예의지국의 검소함이다.

그리고 시준은 전위의 도시가 될 계룡산 아래 단전성(丹田城)에서 – 일전 정치국 회의 때문에 자꾸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 이 이름으로 못을 박았다 – 가장 장사 잘 될 위치를 보장해 주었다.

이쯤 되면 시준이 천지창조 하느라 어깨가 좀 뻐근하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그러시냐며 달려와서 주물러 줄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 이 땅에서 한 번도 없었던 종교 통일의 위업을 이루고 있는 시준은 곧 전령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김희순이 보냈다는 전갈이었다.

***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거리가 가깝다 보니 김희순의 편지는 시준에게 빠르게 배달될 수 있었다.

이제초를 조령으로 돌려보내고 난 시준은 야외에 그대로 선 채 김희순의 편지를 삐뚜름하게 쳐다보았다.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지유와 멀리 떨어져서인지 그 편지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수려한 문장이 아름다운 글씨로 적혀 있었지만 시준은 그것을 구겨버리듯이 요약했다.

“국왕 이경춘의 목도 신라 사신단도 다 주겠다, 살려만 다오?”

이제 혁명에 참여한 세월이 길어진 동료들은 그런 호쾌한 요약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 계룡산행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정치국에서도 많이 따라왔다. 그중 하나인 총괄서결부장 정약전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렇소이다. 주석 동지.”

시준은 정약전을 시험하기 위해 물어보았다.

“어떻소, 부장 동지의 생각은?”

후사아키 건 이후로 이제 평안도류 사고방식을 잘 알게 된 정약전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대저 상담(商談)을 나눌 때에는 서로 없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을 바꾸는 법입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장사하여 주고받을 필요가 없소이다. 어디에서 감히 흥정을 한다는 말입니까?”

“내 생각도 그와 같소.”

지금 김희순의 항복 의사 따위는 상관없다. 항복은 상대를 도저히 무력으로 함락시킬 수 없을 때, 혹은 그러려면 엄청난 자원과 인력이 들어갈 때 의미가 있다.

김희순은 고려가 하루빨리 조선을 접수하고 신라를 상대해야 할 테니 항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그건 사실이지만 애석하게도 자의식 과잉에서 비롯된 오해가 좀 있다.

이 전쟁은 3차 삼국시대 통일전쟁이 아니다. 전 조선 인민 해방전쟁이다.

김희순은 고창현의 자기들을 쳐야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시준과 정치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경춘이건 김희순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호남의 인민과 곡식이지 그런 반동 몇 놈 따위가 아니다.

어차피 신라를 칠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고창현의 방비는 튼튼하기는 하지만 장기간을 버틸 요새라고 할 수는 없다.

혁명군의 희생을 굳이 많이 내지 않아도, 공화국이 호남을 장악하는 동안 남북에서 둘러싸고만 있으면 곧 군량이 다한다.

도무지 이따위 얘기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저편에서 내가 왕년에 수원 화성을 쌓았다며 이것저것 참견하고 있던 정약용이 돌아와 말했다.

“서한에서 계사를 보존해 달라고 애걸하고 있으니 이는 저 반동의 수괴 김조순과 그 가솔들 역시 방면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미 공화국이 영호남의 지주를 척결하고 토지를 나눠 준다 공언한 마당에 잘못 관대함을 보이면, 수령이며 사대부 역시 기회를 틈탈 것이고 인민들은 동요할 것이외다.”

이강회도 덧붙였다.

“선전선동부장 동지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반동이 무죄라면 오히려 인민이 유죄가 됩니다. 우리가 나라를 뒤집은 것에는 이치가 있기[造反有理] 때문인바, 언제나 혁명은 무죄[革命無罪]한 것! 그 대의는 조선 인민을 모두 해방시킨 후 반동을 하나 남김없이 정죄함으로써 완성될 것인데, 이제 와서 옛 나라의 큰 병폐였던 권신의 일족을 살려둬선 아니 되오이다.”

선비들처럼 유려한 말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나머지 정치국 위원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시준은 옆에서 이강회가 말한 ‘조반유리 혁명무죄’를 받아 적고 있던 조제프 푸셰를 돌아보았다.

의외로 붓글씨가 이제 꽤 훌륭했다. 더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정치국은 김희순이 보낸 ‘조촐한 예물(진짜 조촐했다)’만 먹고 입을 싹 씻었다. 어떤 답변도 없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김희순은 추석이 되고 나서야 혁명군의 의도를 깨달았다.

명절이라고 고깃국과 기름칠한 나물 차려놓고 눈앞에서 처먹고 있는 저 고려군 포위부대는 조선에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다.

김희순이 굶주린 조신들을 이끌고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혁명군은 그들을 힐끗 보고 이빨 쑤신 다음 트림까지 시원하게 하고 나서야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그들을 체포했다.

그렇게 조선 왕조는 공식적으로 완전 멸망했다. 굳이 따져보면 422년 만이었다.

하지만 망국의 비감을 노래할 만큼 조선에 관심이 깊은 자는 별로 없었다.

이미 서울 함락으로 한 번 분위기 몰이도 끝냈고 해서, 시준은 계룡산에만 집중했다.

월간 대혁명을 만드는 선전선동부 사람들도 우려먹기 기사 따윈 단호히 거부했다.

이제 일본, 중국 등 이웃 나라에도 대량 수출되는 동아시아 국제잡지 월간 대혁명은 좀 더 확 시선을 잡아끄는 컨텐츠를 내야만 했다.

그래서 선전선동부는 고창현 대신 호남 각지로 흩어졌다.

현재 수많은 읍성과 도회에서 고려인민공화국 최고 인기 행사가 우후죽순 빗발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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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민간의 빙고 설치 허가는 숙종 때부터입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얼음 전문 도매상인 빙도고도 존재하는 등, 얼음이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조선 초처럼 도성의 빙고에서 왕이나 꺼내먹을 수 있는 그런 물건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지방의 경우, 대체로 이 얼음은 진상품(생선 같은)의 품질을 유지하는 데에 많이 쓰였습니다.(김진백, 2018, <우리나라 빙장선 도입 시기에 관한 소고> 참조)

2. 조공책봉 질서에서 조선이 유럽식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조선이 명을 호구 뜯듯 조공무역으로 이득 봤다는 얘기도 사실 애매합니다. 아무리 명목상이라고 한들 신하는 신하지요.

명은 조선에서 금은이나 군마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공품뿐만 아니라 해동청, 공녀, 요리사, 두부 기술자, 사리(그 사람 몸의 사리 맞습니다)까지 아주 이를 악물고 박박 긁어갔습니다. 이방원도 이때 개인적으로 보유하던 사리 400여 개를 뺏기고... 이는 외교적 견제 의미도 있어서 정통제 이후에는 좀 평탄화되기는 합니다.

한편 그 이후 조선은 금은 같은 걸 줄이고, 말은 여진족에게 사서 이득 취하고 파는 등 여러 방안으로 대응합니다. 그 중 하나가 귀한 조공품은 줄이고, 사실상 노동력만 있으면 되는 돗자리로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화문석(안동과 강화도가 유명)을 비롯해 무슨무슨석이라고 붙은 것은 다 돗자리입니다.

중국에서 귀물로 대우받았다는 기록도 있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금은이나 군마에 비할 바는 아니었을 겁니다. 애초에 재료가 아무데나 지천으로 널려 있는 왕골이고 왕골 돗자리는 기예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노동력이 심각하게 많이 드는 편도 아니라서... (이 바닥 넘버원 럭셔리 상품인 카슈미르 융단 같은 것과 비교하자면 말이지요)

3. 조선을 군사강국이라 믿던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에 와서 그 개판에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정이 베푸는 연회에서 명 장군들은 "이게 나라냐? 이게 군대야?" 하며 시를 지어 조롱하기도 합니다. 조선도 나름대로 없는 살림에는 열심히 군사 확충했고 일본의 침공도 인지는 했으므로 꽤 준비를 했었는데, 당대 국제 기준에서 많이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죠.

4. '이 사람을 보라'는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하기 전 유대인 앞에서 가시 면류관을 쓴 그를 내보이며 한 말입니다.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많은 예술 작품에 쓰였죠.

5. 사도행전 얘기는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얘기입니다. 당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기부로 유지되는 교회 공동체에 두 사람은 (예수가 말한 대로) 소유를 팔아 기부하러 오나, 아무래도 뒤의 살림이 걱정되었던지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 내놓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말 한 마디로 두 부부를 살해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로부터 그가 받은 권능이라고 하지요). 원문 묘사 기준으로는 D&D의 파워 워드 킬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두 부부에게 자녀가 있다는 얘긴 안 나오는데, 있다면 애는 무슨 죄인가 싶기도 합니다.

다만 작중 서술은 교계의 통설적 해석과는 다르다는 점을 밝힙니다. 그에 따른다면, 돈을 안 내서 죽인 게 아니고 안 냈는데 냈다고 감추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합니다. 소유를 다 팔아서 기부한 자의 신망은 신망대로 얻고 이득은 이득대로 취하려 했다는 거죠.

6. 조선 시대 귀신 설화를 들어보면 이상하게 밥 달라는 귀신이 많습니다. 이전 황해도에서 정방산성 점령할 때 귀신 분장한 프랑스군의 대사도 그것을 반영한 것이죠.

7. 조반유리, 혁명무죄는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격려하기 위해 보낸 말입니다. 홍위병에게 주어진 이 면죄부는 당대의 혼란을 더욱 가속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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