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57. 최후의 왕(2)
김희순은 그래도 서울의 김조순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전주의 재물과 인사를 수습해 남서쪽 고창현으로 도망치는 데에 최속군주의 재주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때 혁명군은 금강을 뚫고 전라도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근대군이었다면 김희순도 잡혔겠지만 그 4개 영대는 북부의 신병인 데다가 현재의 혁명군에게 전술적 역량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대 조선 전선의 총지휘를 맡은 혁명무력부 부부장 남공철이 김희순의 도망 사실을 접수한 것은 이미 선봉 7영대가 전주부에 진입한 후였다.
오매불망 혁명군의 도착만 기다리던 김맹억과 길명이, 그리고 빨치산부대는 덕유산에서 굴러 내려오듯 뛰쳐나왔다.
원래 전주부의 부호인 김맹억은 이 지역에 인맥이 많았다. 따라서 각지 인민의 목격담을 수집하는 것쯤은 쉬웠다.
남공철은 조선국 조정이 바리바리 짐 싸갖고 고창으로 이어했다는 – 왕은 없었지만 그것까진 아무도 몰랐다 – 보고를 받고 근심에 잠겼다.
“고창은 육수군 모두의 요충으로서 봉수대와 튼튼한 성이 있다. 쉬이 함락하기는 어려울 텐데.”
“그리고 고창을 거치지 않으면 나주와 광주목(光州牧) 같은 큰 고을로 들어가기 힘듭니다.”
대답한 사람은 7영대장 김개동이었다.
시준이 한창 돈 벌던 시절, 평안도 광산에서 사기당해 빚지는 바람에 구사대에 묶였던 그 해주의 개똥이가 맞다.
총선거 당시 오죽당의 소대장으로서, 당시 강철군주를 버리고 도망 나온 정약용을 처음 평양성에 맞아들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 후로는 대동강 전투에 참전한 공으로 승진을 거듭해 지금은 자그마치 영대장이 되었다. 혁명 이전이라면 꿈도 못 꾸었던 출세다.
폭증하는 혁명군의 규모 탓도 있고, 기존 군사 엘리트 계층을 믿기 어려운 국무당의 사정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광산 노무자 출신 유민 깡패가 몇 년 만에 1,400여 명을 거느리는 대장이 되니 실로 혁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처럼 입지전적인 인물인 만큼 개똥이는 군공을 양보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 전라도 남부는 이미 혁명해군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 나주와 광주도 조선령이라 하기 어렵지만, 공식적으로 관아에 붉은 깃발을 꽂는 일은 혁명육군의 몫이어야 했다.
부서 간의 알력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전한 조직이라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부서 간의 업무 분장과 영역이 구분되어 있으며, 성과에 따른 차등적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이것은 조직 구성에 있어서 기초 중의 기초다.
이 짧은 기간에 이 정도 풍토가 자리 잡게 한 데에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나라의 공무원 재직 경력 10년인 주석 동지 역할이 컸다.
그래서 7영대장 김개동 역시 다소 서둘렀다.
“우리 7영대는 혁명의 신심 드높이 저 반동의 고지를 점령할 준비 만반입니다. 부부장 동지께서 주석 동지와 인민의 뜻을 대리하여 명해 주신다면 전주부에서 하루도 쉴 필요 없이 바로 고창을 들이치겠습니다.”
7영대원들이 이 막말을 들었다면, 김개동과 자신들 역시 혁명의 대의에 따라 수평하니 영대장 동지를 두들겨 패서 묶어 놓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남공철은 조금 더 대국적으로 판단했다.
“그러면 인민의 귀한 피가 흐르게 되네. 땅을 적셔 거름이 되는 것은 반동의 피뿐! 고창에서 저들이 뛰쳐나와 뒤를 끊을 위험 때문에 군대가 돌아 나아가기는 저어되더라도, 사람이 아예 못 오가는 것은 아니니 남쪽으로 전령을 보내게. 혁명해군과 남북에서 고창현을 둘러싼다.”
김개동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남공철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절대 다시 남쪽으로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되네. 이판사판으로 배 타고 왜국이나 중국, 남만 등지로 도주한다면 잡기 어려워져. 이미 200년 전에 전례가 있네.”
이경춘이 이씨 왕가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그는 최속군주의 직계자손도 아닌 데다가 이미 죽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직 모르는 남공철으로서는 타당한 우려였다.
김개동 역시 그처럼 타당한 추측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빠른 기마를 골라 남쪽으로 파견했다.
남공철이 한 생각은 문순득 역시 했다. 혁명군이 폭풍처럼 남진한다면 조선 조정에게는 사백 년 전래의 특기인 도주 외에 선택지가 없다.
그리고 그 방향은 당연히 남쪽. 그런데 호남의 남쪽에서 더 가면 바다가 있다.
보통의 조선 사람은 여기에서 길이 막혔다고 생각하겠지만, 뱃사람인 문순득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하게 트인 도주로였다(아무리 그래도 필리핀으로 튈 수 있다는 생각은 거기 갔다 와 본 문순득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순득은 목포 인근에서 전라우수영의 함대를 붙잡아놓으려 시도함과 동시에 육지에 내린 혁명해군 동지 일부에게 특별한 임무를 하달했다.
상륙 후 육지로 빙 돌아 해남(海南)까지 먼 길을 걸어온 그들은 이제 임무 달성을 목전에 남겨두고 있었다.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반쯤 돌아버린 조선 뱃사람 중에서도 특히 무모하고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혁명해군 2함대가 아껴둔 비장의 전력, 공화국해병대(共和國海兵隊)의 영광된 이름이 바로 이들을 지칭한다.
이름 앞에 공화국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고려인민공화국 해병대는 혁명군 휘하에서 혁명육군이나 해군과 명목상 분리되어 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배를 타야 하니까 혁명해군의 통제를 받지만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공화국 혁명군의 총사령인 주석 동지의 직속 부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준이 21세기 대한민국 해병대 출신이라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안 가면 감옥 간다니까 군대는 갔다 왔을 뿐 밀리터리에 별 관심 없던 시준은 한국이나 미국의 해병대가 해군의 휘하인 줄 몰랐다. 통상 뉴스 같은 곳에서 따로 언급되기에 해병대가 독립된 군인 줄 아는 오해는 생각보다 흔하다.
게다가 급거 조직된 공화국 해병대 1기 대원들의 출신 때문에, 본래 순박한 어부였던 문순득이 다 통제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어 정찰총국의 직접 감시를 받는다는 경계를 심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배려는, 용맹한 해병대원들에게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여졌다.
“주석 동지께서 친히 이름을 내려주신 우리 해병대는 주석 동지의 으뜸가는 기대를 받는 정예군이다. 따라서 이는 인민의 으뜸가는 기대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지들은 이 말을 알아듣겠는가?”
해병대원 앞에서 나직하게 말하는 자는, 예전 시준이 황주를 점거했을 때 내응하여 항복한 황해도 수적 김덕춘이었다.
원래 그의 부하들 대부분을 포함한 해병대원들은 여기에서 눈치 없이 고함을 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바로 지척에 전라우수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밤중에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가는 우수영 마루 밑 구렁이까지 다 놀라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대원들은 낮고 강하게 대답했다.
“예, 대장 동지!”
“좋아. 절대 실수해선 안 된다. 머나먼 타향이지만, 호남이라고 다를 것 있겠느냐. 우리가 고향에서 놀던 가락을 보여주자. 다음 달 월간 대혁명 표지는 바로 우리다!”
***
전라우수영은 해남현에서 죽 뻗어 나온 육교(陸橋)를 사이에 두고 본토와 이어진, 반쯤 섬 같은 반도 지형에 위치해 있다.
우수영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자는 반드시 그 육교를 지나야 한다. 물론 그 길목은 원문(轅門)이 가로막고 있으며 원문 뒤에는 우수영의 둥근 성채가 자리한다.
이 기막힌 위치 선정은 여기로 우수영을 이전한 세종의 업적이다.
묘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세종은 언제나 전쟁에 진심이었다. 북쪽의 여진과 남쪽의 왜인이 모두 그 궁극적 공포에 떨었다.
그래서 지금도 지형적으로 보면 거의 난공불락의 요해였다.
여기에 대해 공화국 해병대는 ‘그럼 육지로 안 가면 되지’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현재 전라우수영 함대가 모조리 문순득을 막으러 북쪽으로 몰려갔기에 가능한 책략이었다. 전라우수영에는 잡일을 위한 나룻배 몇 척뿐, 있는 전선이라고는 물이 새거나 판자가 썩거나 해서 출동하지 못하는 디스플레이용 정도뿐이었다.
전부 몰려가는 게 말이 되나 싶겠지만, 지금은 가용한 전력을 투입해 빨리 혁명해군을 물리치는 쪽이 현명하다.
전라우수영에는 어차피 다른 적도 주변에 없다. 흑산도에 뻔뻔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영국 해군은 적이 아니다. 어차피 싸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역할을 하고 싶었던 헨리 호프는 그간 이곳을 거점으로 류큐와 중국을 오가는 영국 함대 중 일부를 떼어내 붙잡아 두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대체로는 멀쩡한 중대를 부상자로 위장해 흑산도에 요양차 두고 떠나게 만든다는 문서 장난이었다.
본래 군대란 곳은 열심히 뺑이 치는 놈이 등신이다. 병사들도 조용한 섬에서 쉬는 것은 좋은 일이라 적극 협조했다.
셰익스피어도 눈물을 흘릴 본토 영국판 부상자 연기가 펼쳐졌다. 함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가득 찼다. 총기와 대포는 왜 휴양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일은 그렇게 처리됐다.
다만 원래 헨리 호프의 직위는 부함장이다. 현재 ‘영국 극동함대’에서도 최고위 반열이라고는 말하기 곤란하다. 지금은 조금 격상되었다 해도 주둔군 대장 정도의 위치에서 군함을 빼돌릴 수야 없다.
허나 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알뜰살뜰 모으면 훌륭한 살림이 되는 법. (원래 있던) 영국 프리깃과 슬루프함 3척이 한가롭게 배회하는 흑산도는 이제 그럴싸한 성채와 포대, 꽤 많은 병사가 지키는 해적 소굴, 아니 요해지가 되어 있었다.
전라우수영이 덤빌 상대가 아니었다. 순천부에 있는 조선 최대의 함대 전라좌수영이 합류한다 해도 영국 해군이 조금 더 귀찮아진다는 것 말고는 더 얻어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영국인은 흑산도에서 근 2년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능동적 적이라기보다는 자연물 같은 위치였다.
하긴 자연재해라서 그렇지 자연은 자연이다. 그래서 전라 우수사 서유봉은 좀 말이 되는 상대를 찾자마자 흑산도를 무시하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용맹함은 항상 신중하고 냉철한 계산 위에서 최대로 발휘되는 법. 서유봉의 지략은 면밀했다.
그는 격에 맞는 상대를 찾아야 한다는 전사혼만으로 불타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 고려인민공화국에는 같은 항렬의 형제들인 전 충청 감사 서유문과 주석보필국장 서유구가 있다(서유문은 이제초의 스피드에 치인 이후 터덜터덜 북쪽으로 걸어가 항복했다). 단연코 그쪽의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
따라서 해병대원들은 텅 빈 우수영 주위로 쉽게 배를 댈 수 있었다.
그 쪽배에는 대담하게도 주체신기전이 가득 실려 있었다. 잘못하여 배가 통째로 불탈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무모함이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해병대원들은 서로 시시덕거렸다.
“내 평생 수적질하면서 꼭 한 번은 수영을 불태워 보고 싶었지!”
“어허, 수적이라니,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혁명일세!”
“주석 동지, 오늘 하루만 정의로운 도적이 되게 해 주십시오!”
콩그리브 로켓의 참담한 명중률은 공화국에서 자체 생산하면서 더 낮아졌다. 그래서 그들은 아예 사람이 뛰어들 수도 있을 정도로 배를 가까이 대야 했다.
조선 왕조가 멀쩡히 돌아갈 때라면 당연히 수직 서는 병사가 있겠지만, 우수사도 없고 군관도 대부분 없으니 그게 될 리가 없다. 우수영은 전 군의 원균화를 보여주며 나태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공화국 해병대는 관군의 생리를 잘 아는 수적 출신. 그들 역시 병사에게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았다.
곧 원문 쪽에서 우수영의 시선을 끌기 위한 화전이 길게 꼬리를 끌며 발사되었다. 그것은 신호이기도 했다.
다음 순간, 공화국 해병대는 주석불 높이 들고 신기전 휘두르며 전라우수영을 덮쳤다. 일곱 가지 빛깔의 동그라미 불꽃이 성벽과 영채를 수놓았다.
아마도 김희순 조정의 탈출로가 되었을지도 몰랐던 우수영은 그렇게 돌파당했다.
비명은 많이 들리지 않았다. 정예 조선 수군이라면 그런 쓸데없는 짓 하는 시간에 한 보라도 발을 더 놀려 반대쪽으로 뛸 테니까.
***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김덕춘은 승리의 고함을 질렀다.
“혁명의 단전 계룡산은 물론, 혁명의 심장 평양에서도 잘 보이도록 한껏 불을 지펴라!”
그러려면 공화국에 정찰위성이 있어야 할 테지만, (정치장교를 통해) 귀신같이 범법자를 적발해 내는 정 진인이 천리안을 가졌다는 소문은 이미 혁명군 사이에 파다하다.
어차피 기세 한껏 오른 해병대에게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제 조용히 할 필요가 없게 되자 해병대는 목청 높여 노래 불렀다. 나무가 불타느라 따닥거리는 소리가 이 무반주 괴성의 박자를 넣어 주었다.
황해도에서 민가 3백 채를 불태운 희대의 방화광 김덕춘의 능력은 이제야 갈 자리를 찾았다.
문순득 함대를 타격하러 몰려가느라 텅 비어버린 전라우수영은 아닌 밤중에 주석불과 주체신기전 폭격을 얻어맞게 되었다.
김덕춘의 지휘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른다면 혁명의 화염술사라 할 수 없다. 김덕춘은 태우지 말아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덕춘은 우수영의 본영과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가장 쓸데없는 것들만을 골라 태웠다. 천성이 도적인지라 김덕춘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군자창과 무기고를 골라낼 수 있었다.
“저것은 바로 인민에게 균등히 분배[均配]해야 할 물건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말이지!”
“대장 동지는 역시 대장답게 수평도를 익숙히 하셨소이다!”
해병대원들은 신속했다. 그들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우수영 함대를 잊어버린다거나 하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정도로 어리석었다면 이미 한참 전 황해도에서 강철군주의 손에 짓밟혔을 것이다. 김덕춘과 해병대는 가장 비싸고 가장 가벼운 것부터 서둘러 쪽배에 옮겨 실었다.
그때쯤 해서는 불꽃을 본 원문 쪽 양동부대 역시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작업은 더욱 빨라졌다.
허생은 변산의 도적이 애초에 다 지고 가지도 못할 것을 알고 호기롭게 돈과 쌀을 부려놓았지만, 그건 저자가 별로 험한 일 안 해본 박지원이라 그렇다. 만약 그 대상이 이 황해도 수적, 아니 공화국 해병대였으면 허생도 알거지가 되었을 터였다.
우수영을 폐허로 만들어 놓은 해병대는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배가 다 차자, 그들은 다시 육지로 철수했다. 마침 군량이 다 떨어져 가던 전라도 남부의 혁명해군 유격대에게 이 군량미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일 것이었다.
***
문순득의 혁명해군 2함대와 서유봉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한 가지 점에서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문순득의 경우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의 망조를 대충 파악하고 있던 서유봉 역시 형제들이 다 공화국에 있는 상황이라 마지막 탈출로는 열어 두고 싶었다.
그래서 양편은 대충 쫓는 시늉과 쫓기는 시늉만 하다가 서로 암묵적 합의하에 물러났다.
그리고 우수영으로 돌아온 서유봉은 원래 영채였던 불탄 장작더미를 보게 되었다.
군관들은 당황하며 이 사태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고려인민공화국과 주석 정시준에 대한 끔찍한 욕설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서유봉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주에서는 전갈이 왔느냐.”
“그, 그것이. 아직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곧 사람을 보내 보겠소이다.”
보낼 필요도 없이 알 수 있다. 조선은 끝났다.
이들은 필경 육지에서 왔을 것이다. 아무리 서유봉이 일을 대충 했어도 혁명해군 2함대가 이만한 군대를 배에 실어 남쪽으로 보냈을 리는 없다.
우수영의 포위망이 신묘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은 원래 하기 어렵다. 시준도 이제는 느끼고 있는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 함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기습 특공대로 보낸다는 일은 솔직히 게임에서나 가능한 짓이다.
무전기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혁명해군은 전라우수영 함선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천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가소로운 특공 함대는 당장 우수영의 손에 걸려 전멸했을 터였다.
이는 여기를 습격한 군세가 육지를 통해 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무리 관대하게 생각해 줘도 고창현 이남, 현대의 전라남도 일대는 이미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다면 고창현 북쪽은 무사할까? 서유봉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김좌근의 징집에서 해남이라고 예외가 될 리는 없었기 때문에 서유봉은 그 군대가 그리 오래갈 리가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서유봉은 단호한 몸짓으로 뒤돌아섰다. 바닷바람이 그의 소매를 흔들었다.
“다시 배를 띄운다.”
“예?”
“여기 있어 봐야 무엇 하겠느냐. 남은 거라도 수습해 싣고 격군이며 타공을 도로 모아라. 다시 북쪽으로 간다.”
모든 우수영 장졸들은 우수사가 저 폭도를 상대로 장렬한 산화를 결심했다고 믿고 감동했다.
그 감동은 사흘 뒤 서유봉이 전라우수영의 모든 전력을 고스란히 혁명해군에 갖다 바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서유봉은 대국적 결단으로 장졸들의 목숨을 살렸으며, 따라서 감동적이라는 게 중요하지 감동의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순천부에 있는 전라좌수영도 더 쓸 데가 없다.
좌수영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밥이 없다면 그 강력함은 단 한나절 만에 사라진다.
그리고 김좌근의 프로이센식 징집과 빨치산부대 때문에 육로가 영 불안해진 그들의 보급로를 책임지던 것은 우수영이었다.
그렇게 되자 아직까지 눈치 보던 호남 각 고을의 수령도 우르르 항복하기 시작했다.
이제, 조선 최후의 왕(시체)을 모시고 있는 김희순 역시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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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이번화에는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나왔군요. 오죽당 소대장으로 마지막 출연했던 김개동, 전라 우수사 서유봉, 황주 읍성에서 항복했던 김덕춘 등...
2. 해병대는 북한에서는 해상저격병이라고 합니다. 해병대와는 약간 개념이 다르기는 합니다. 사실 저격 전문 부대도 아닙니다.
3. 전라 우수영 자리는 현대에는 저런 지형이 아닙니다. 반도를 둘러싼 좁은 바다가 전부 간척으로 메워졌기 때문이죠.
4. 전라 좌수영은 현재의 여수시에 있습니다. 다만 이때 여수는 순천에 속한 한 면으로서,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순천부로 나왔습니다.
영정조 시기에 여수를 순천과 분리하느냐 통합하느냐를 두고 지역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만약 여수가 순천부에 통합되게 되면 여수는 좌수영의 운영비와 순천부의 운영비를 이중으로 뜯기게 되어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조선의 국가 경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 현지 징발이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순천부의 입장에서는 굴러들어온 떡을 놓칠 리 없고;;; 결국 기득권층의 주장으로 통합됩니다. 여수에서는 동네 선비가 왕에게 직소하러 올라오기도 했을 정도고, 자기 귀찮게 했다고 빡친 영조에게 종중감처(할 수 있는 한 가장 높은 죄로 처벌함) 당할 정도로 시끄러웠지요. 영조는 당시 "야, 국정 논의는 좀 폼나는 걸로 해야지 이딴 하찮은 사안만 계속 얘기하고 있으면 후대에 날 무슨 왕이라고 보겠냐?" 라고 합니다.
이 싸움은 정조 대까지 이어지는데, 진짜 절박했던 여수 사람들은 여기저기 선도 넣어 보고 직소도 하며 매달리지만, 정조도 인격 파탄으로는 할아버지 못지 않은 인간이었습니다. 하긴 아버지가 그 꼴을 당했는데 정신이 멀쩡하면 그것도 이상하긴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건 워딩이 진짜 정조 같아서 실록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앞으로 다시 여수에 관한 일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대간에게 알리거나 행차하는 곁에서 번거롭게 호소하는 자가 있다면, 나타나는 대로 (중략) 특별히 엄한 벌을 주게 함으로써 간교한 백성들이 무엄하게 구는 버릇을 없애버리겠다."
그러고 나서 여수현의 분리 문제는 전라 감사에게 위임할 테니 알아서 해결하라고 짬처리하죠. 하지만 감사가 무슨 배짱으로 '그럼 분리할게요' 하겠습니까. 여수가 다시 분리된 것은 1897년, 고종 때입니다. 작중에 한 번 언급된 대로 고종이 행정구역 설정놀음을 좀 좋아해서 다시 다 판 짜는 김에 분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