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84화 (184/284)

186화

57. 최후의 왕(1)

경기도 남양 혁명당 지부장 이옥은 현재 남양도호부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덧붙이자면 봉달이는 보부상 경력을 살려 평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덕개는 부녀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감투는 그럴싸해도 생업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감투가 돈 벌어다 주는 것은 반동뿐이니까. 봉달이는 여전히 이옥에게 굴 얻어와서 젓갈 담가 팔았고 덕개도 들병장수 노릇을 계속했다.

정치국에서 혁명당원에게 농지를 나눠준다고는 했지만 아직 행정 정리가 다 되지 않았다. 그거 기다리다가는 굶어 죽을 판이었다. 어차피 덕개나 봉달이나 농사 경험은 짧다.

그래도 이제 그들을 천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주먹질과 욕설 그만두고 제값에 물건을 산다는 당연한 일이 두 사람에게는 급격한 신분 상승이었다.

맛좋은 굴젓에 취하고 소주에 취하고 수평도에 취한 덕개와 봉달이는 여전히 꼭 붙어 지게 메고 산과 들을 넘어 다녔다.

그러니 이옥 역시 평소의 취미인 화훼 재배를 끊지는 않았다.

이옥은 여러 가지 기화요초와 조수(鳥獸), 인개(鱗介), 충치(蟲豸) 등 동식물 전반에 조예가 깊었다(그와 교우가 있던 유득공 역시 비둘기를 참 좋아했다).

그 선비다운 청풍명월의 취미 중에서도 저작으로 남은 업적을 꼽자면 『연경(烟經)』의 저술이다.

이름 그대로 담배의 경전이었다. 담뱃잎의 재배 및 품질 평가와 먹는 방법의 세세한 분류부터 시작해서 부속 도구의 안내 등 담배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총망라한 책이다.

현대였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파견된 자객이 야밤에 뒤통수를 후려쳐서 묻어버릴 저서겠지만 이때는 담배가 약의 일종이었다. 시준도 어렸을 적 횟배 앓을 때 담뱃재 탄 물을 먹고 회귀의 진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전문성은 정치국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양도호부는 임진강 남쪽에서 첫 번째 상조농장이 건설되는 영광된 혁명의 개척지가 되었다.

이것은 옛 도읍이었던 한양도성, 아니, 현재 명칭 한양군(漢陽郡)도 가지지 못한 명예였다. 이옥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남양도호부 인민들의 생활도 돌볼 겸해서 자신의 취미를 업무로 전환했다.

그래서 그렇게 남양에서 출하된 ‘삼베잎 담배’는 약재의 대국 조선 땅에 서초 말고도 좋은 담배가 많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로 조슈 가는 배에 실렸다.

***

시준은 ‘우리는 모리 후사아키의 유세에 깊이 탄복했으며 따라서 조슈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음’이라는 표시로 국무당의 간부급을 파견했다.

외사통호부 부부장 임상옥은 조선 사람들에게도 통신사의 사행로로 익숙한 적간관(赤間關, 아카마가세키. 현대의 시모노세키)에 입항했다.

통신사와 다른 점은 이들이 부산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김회연의 대장군 이춘영이 조령에서 일차 분루를 삼키며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경상도는 신라국의 영향하에 있었다.

허나 모리 가문에게는 임상옥이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제주에서 직항으로 조슈까지 왔다는 쪽이 더 의미가 컸다. 이는 전통적으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던 쓰시마의 지위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웅대한 천하경영의 전략을 짜기에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임상옥 또한 여기에서는 공화국의 무역 대표가 아니라 서상에서 정시준의 사인(대리인)으로 임명되어 온 사람이다.

임상옥은 그 목적에 맞게 장사 얘기만 했다.

“가지고 온 영길리총 80자루 중 특히 좋은 2자루를 예물로 올리고, 나머지도 장주국의 관군에게 주었으니 점(點, 여기서는 수량 등의 확인)하여 보시오.”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옆에 입회해 있던 모리 후사아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받았습니다. 이제 ‘장사꾼’들의 차례로군요.”

“그렇소이다. 되도록 관병들은 이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물론이오. 나와 몇몇 사람만 남아 있을 거요.”

모리 후사아키도 조슈가 믿고 보낼 만큼의 인재다. 이쯤 되자 그도 공화국의 의도를 깨달았다.

일단 이건 공무역이 아니다. 예물이란 이름의 세금을 바치는 ‘정식 밀무역’이다. 조선 종이라든가 인삼, 영길리포, ‘담배’가 주 수출품이고 주로 곡식이나 금은, 그 외에는 아카마가세키의 특산품인 벼루 같은 것을 사 간다.

여기까지라면 평범하다. 공화국은 거기에서 한 꺼풀 더 숨긴 ‘진짜 밀무역’을 진행할 셈이다.

그런데 지금 이를 적발해서 축제 분위기인 야마구치에 찬물 끼얹을 수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영주 모리 나리히로는 영길리 무기(사실 메이드 인 조선이라 열화판이다)를 수입하고 조선 및 서양과 관계를 쌓아, 매해 정월 초하루마다 찌질하게 가신과만 중얼거리던 도쿠가와 토벌의 기초를 마련할 생각에 흥분해 있었다.

원래도 일문가로로서 지위가 낮지 않았던 모리 후사아키는 삽시간에 저 역이기나 소진 장의도 따라오지 못할 세객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깟 세금 좀 뜯자고 밀무역을 적발해서 잔치판 다 박살 내면 후사아키의 머리통도 같이 박살 난다. 후사아키는 대범하게 눈감아 주기로 했다.

“무기가 더 없는 것은 틀림없이 내가 보았으니 문제는 없소. 어흠! 나는 이제 오랜 항해로 속이 뒤집혀서 한 잔 술로 가라앉혀야겠구먼. 부부장…… 아니, 대방께서도 나와 같이 가지 않으시려오? 나머지 일이야 아랫사람들이 봉공(奉公, 임금노동자) 시켜서 잘 하겠지요.”

“가로의 초청을 어찌 거절하겠소이까.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즐거이 술 마시러 갔다.

그리고 그사이, 임상옥 휘하의 상인인 양시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아카마가세키의 뒷골목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일본어는 후사아키가 평안도 있는 동안 몇 마디 배운 기초 회화가 전부다. 그러나 혁명해군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시대 사람들은 외국인에게도 자신 있게 아무 말이나 떠든다.

그 확신에 찬 표정에다가 손짓 발짓이 합쳐지면 대충 의미는 통한다.

“요새 사는 게 좆같지? 걸친 꼬라지만 봐도 알겠네그려. 이거 영길리 담배인데, 아니, 이파리같이 안 생겼지만 담배라니까. 한번 피워 보면 근심 걱정이 싹 날아가는데.”

“저런, 품삯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싸게 해 줌세. 이 담뱃대도 끼워 줄게. 진짜 어디 가서 못 구하는 거야. 누구한테 말해서 장사 끝장내면 다음엔 주고 싶어도 없는 거 알지?”

백 년 뒤의 일본은 아시아 시절의 흑역사를 지우고 우린 원래부터 명예 아리아인이었다며 화려한 열강 데뷔를 시도하지만, 결국 옛날 친구들은 찌질했던 시절을 다 알게 마련이다.

현재 일본 노동자의 임금은 명목상으로 봐 줘도 유럽은커녕 청나라 대도시를 간신히 따라가는 수준이었고 복지비율(welfare ratio) 개념으로 보면 연구에 따라서는 오히려 중국보다 못했다.

이 시기 참근교대와 상인 계층의 성장으로 시장경제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후대의 개략적 평가가 틀린 건 아니다. 허나 국가의 부와 국민의 부는 필연적 상관관계까지 갖고 있지는 않다는 한 실례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적간관의 임노동자들 역시 조선 사람들 말마따나 사는 게 참 성기 같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사람들도 아편이 뭔지는 알고 있다. 양귀비를 인간이 환각제와 치료제로 이용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다.

그러나 그 ‘해악을 인식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인류가 마약을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대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영국 놈들 때문, 그러니까 아편 전쟁 이후부터다.

일본에서도 약으로 쓰는데 애초에 절멸이란 개념이 불가능했다. 오랜 세월 사용된 모르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제대로 된 의사의 도움만 있으면 ‘한입에 즉시 폐인’ 정도까지는 아니며, 이때는 왕에게도 처방되는 물건이 아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슨 공공이 권장하는 물건이라 하기에도 꺼림칙하다. 보건 문제 이전에 무역 적자 때문에 군주들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단속을 피하는 성의만 보여 주면 된다.

약장사가 다 그렇지만 공화국 상인들도 ‘체험판’ 아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게 팔았다. 인삼도 옆에서 파는 바람에 모든 일본인은 약재의 대국 조선의 브랜드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고려의 약은 알아주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시준은 굳이 그런 지시를 하지 않았지만, 조제프 푸셰의 참견으로 그 아편에는 혁명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월간 대혁명』이 같이 증정품으로 포함되게 되었다.

임노동자들은 자신의 험악한 처지를 한탄하며 아편을 피우다가, 곧 아편 살 돈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할 것이다.

그리고 월간 대혁명은 그런 자들에게 좋은 지식을 제공한다.

돈은 부자들이 갖고 있으니 죽이고 뺏어오면 돈이 내 것이 된다는 리빙 포인트는 불행한 일본 하층민들의 눈앞이 한순간에 밝아지는 꿀팁이었다.

“이건 요새 고려에서 한 집에 한 권은 다 가진 책인데, 공화국 사람들과 친하고 우리와 장사 트려면 이 책을 꼭 보는 편이 좋을 것이네.”

어쩌고 하는 사탕발림까지 곁들여지니 일본 사람들은 이 책을 열심히 해독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배 왔을 때 이 책의 구절을 읊으며 아는 척해 주면 아편 싸게 줄지 누가 아는가. 이것은 이 시기 서로 다른 나라 선비들의 주요 교우 방법이기도 했다.

한문본이기는 한데, 일본도 동네에 한둘쯤은 글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공화국의 배가 왔다 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적간관 주변에서 조그마한 사숙(私塾)이라도 있다 하는 곳에는 갑자기 배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로써 조슈 번 사민 모두의 교양과 지식 발전은 그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

금강에 배치되어 있던 군은 김좌근의 거의 모든 전력이었다.

그리고 현재 조선에 김좌근 외에 병사를 가진 자는 없다고 봐도 좋다.

여력도 없었거니와, 김좌근과 김희순이 절대로 군권을 남에게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경명황제 김회연의 예측대로 별다른 지방 연고도 없는 두 사람이 병권까지 내놓는 짓은 쓸데없는 행정적 낭비다. 그러느니 깔끔하게 목을 매는 게 빠르니까.

그래서 혁명군은 그 어떤 전투도 치르지 않고 남진하다가 방향을 동쪽으로 틀었다.

목표는 당연히 전주. 이 반동 가문의 시작이며, 동시에 끝이 될 고장이었다.

혁명군 4개 영대가 전주를 향해 똑바로 진격하는 동안 조선국의 조신들은 참으로 하기 싫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대체 저 북쪽의 무군무부한 반적에게 항복해야 하는지, 아니면 동쪽의 복고풍 미치광이들에게 항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극단적 미래와 극단적 과거가 양쪽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며 조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난 죽음을 택하겠다는 충신열사는 소원대로 이미 한성부에서 다 죽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무조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중국 가자는 말은 아무도 못 했다. 변발이 수치스러워서가 아니라 가는 길에 있는 영길리 함대가 무서워서다.

이때, 대신라국 경명황제가 조선국의 귀순을 권유하러 보냈던 칙사는 아직 사정 모르고 전주에 체류하는 상태였다.

그들은 자기를 자꾸 힐끔힐끔 보는 조선국 백관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가서 물었다(다소의 사투리만 극복하면 통역관이 필요 없다는 게 삼국 시대의 좋은 점이다).

“거, 무슨 일 있소?”

“아뇨. 그, 음. 뭐…….”

칙사는 머뭇대는 ‘조선국 예조 참의’ - 본래는 나주부의 그냥 좌수(座首)였다 – 에게 답답함을 다 풀어내듯 열변을 토했다.

“나라가 위아래로 술렁이는데, 어서 조선 국왕 전하께서 마음을 정하셔야 만사가 평온해질 것이오. 저 고려구의 침범에 맞서 우리 황제 폐하께서 약간의 천병을 보내셨으니 이제 도적들은 순식간에 평정될 것이외다. 공이란 어려울 때 함께해야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 대세가 기울고 나서 투항한다면 어찌 귀하다 할 수 있겠소?”

과연 경명황제가 칙사로 임명해 보낼 만한 말재주였다. 하지만 예조 참판은 자꾸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음. 예. 맞는 말씀입죠. 아, 저는 이만 바쁜 일이 있어서.”

‘저 눈치도 없는 놈들’에 대한 보고는 곧 김희순에게 올라갔다. 김좌근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김희순은 곧 정신을 차렸다.

이제 진짜로 선택해야 했다. 김희순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병사를 모아라.”

고려에게 항복할 것이라면 신라의 칙사를 잡아 묶어야 한다.

신라에게 항복할 것이라면 칙사를 호위해서 진도나 순천부(順天府) 방향으로 가서 배를 띄워야 한다(빨치산부대가 횡행하는 지리산은 어느 덫에 비명횡사할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병사는 필요했다.

그리고 그 병사는 모이자마자 출발했다. 아직 향방은 결정되지 않았으나, 어느 쪽으로 결정되건 간에 공통적으로 잡아야 하는 자가 있었다.

조선국 25대 국왕, 이경춘은 전주부 관아에 깃발이며 현판 좀 바꿔 급히 만들어 놓은 시어소(時御所, 왕의 임시 거처)에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서울을 떠나 이 남쪽까지 내려왔건만, 역시 하늘은 이 왕조를 곱게 보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경춘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명했다.

“전례를 본받아, 경기전(慶基殿)에 둔 사초(史草)를 내장산으로 옮겨라. 얼마 되지 않으니 한두 명이 쉬이 들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돌아올 필요 없이 거기서 수직(守直)하며 살길을 찾거라. 와도 좋은 꼴은 못 볼 것이야. 곡식이나 돈이 필요하거들랑 얼마든지 갖고 나가라.”

경기전은 유명한 전주 사고가 있는 곳이다.

원래 거기 있던 실록이나 어진이야 이미 왜란 때 내장산으로 피신시킨 이후 근성의 대장정 끝에 평안도와 강화도 등지에 보관하고 있으니 벌써 예전에 조선의 손을 떠난 것이고, 지금은 왕실 흉내라도 내려고 사초를 거기 두고 있었다.

이경춘의 어진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조선국 상황상 화공 불러다 그 짓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이경춘은 그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명을 받은 ‘근시’들은 – 원래 동네 사람이거나 하인들이었다 – 예의상 통곡하기 시작했다.

“전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십니까. 곧 충용한 장병과 지혜로운 대신들이…….”

“나가 보라. 곧 그 ‘충용한 장병과 지혜로운 대신’들이 들이닥칠 것이니.”

희미한 유머 감각을 발휘한 이경춘은 사람들을 보내고 위엄 있게 좌정했다.

원래는 그냥 농사짓는 선비였지만, 왕으로 지낸 짧은 세월은 그에게 혈통에 잠재된 고귀함을 깨어나게 한 것 같았다.

선조의 자손이 아니었기에, 이경춘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신묘한 속도로 도망칠 수 없었다.

인조의 자손이 아니었기에, 이경춘은 엎드려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릴 수 없었다.

이경춘은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근본을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집안의 평지풍파가 다사다난했지만, 모두 적절하게 극복했던 가정군주 태종 이방원이 바로 그의 조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집을 다스리는 일. 지금의 상황에서 본받을 만한 사적은 아니었다.

이방원을 본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년까지만 해도 전주 이씨 왕실과 완전히 다른 가문에 가까웠던 이경춘의 역사 지식이 그리 깊은 편은 아니었다. 요 며칠 이경춘은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시어소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마지막 충성으로 남아 있던 ‘근시’들의 비명이 들렸다.

이경춘은 방 한구석에 있던 뒤주를 열었다. 도무지 왕의 방에 있을 물건이 아니지만 격식을 갖추기에는 여러모로 사정이 안 좋았다.

거기에는 쌀도, 이경춘의 아들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경춘은 영조의 자손 역시 아니다.

거기 있는 것은 철퇴였다.

그렇다. 바깥일에 있어 태종을 본받는다면 오직 이것뿐이다.

부친을 가두고 처가를 몰살하며 아들을 폐위한 외로운 가장 이방원의 가장 신뢰하는 친구였다. 마침 이름도 같은 저 고려의 위협에 맞서, 태종은 과감하게 철퇴를 들었다. 고려는 망조의 도읍 개성의 선죽교에서 끝장났다.

그리고 이경춘도 이씨 최초이자 최후의 왕도(王都) 전주에서 그렇게 했다.

아직 농사일로 단련된 근력은 쇠하지 않아 철퇴는 그의 손에 단단히 잡혔다.

대충 왕이 서까래에 비단 끈 매려고 머뭇대는 풍경을 예상하고 장지문을 깨버린 김희순의 병사들은 조금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곤룡포 입은 왕이 아예 익선관은 벗어버리고 한 손에 철퇴를 쥔 채 그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병사들을 이끌던 조선국 좌의정 겸 대사헌 김희순은 한참 말문이 막혔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전하. 적도의 위협이 코앞에 닥쳤기로,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자 급히 달려왔습니다. 워낙 사세가 급해 만 번 죽어도 모자랄 망극한 불궤를 범했사옵니다.”

“그래서 지금 이것을 들고 나오려던 참이외다. 나는 검을 쓰지 못하니 말이오. 허나 아무래도 인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구려. 마침 군사들이 있으니 무에 이런 흉한 물건이 필요할까. 경이 와서 이걸 좀 받아가 주시오.”

김희순은 잠깐 침묵하다가, 성큼성큼 걸어 섬돌 아래까지 다가온 뒤 읍하는 것처럼 고개를 약간 숙였다.

왕의 권력을 처음으로 자기 원하는 곳에 활용해 본 이경춘은 피식 웃었다.

“만 번 죽어도 모자라다고?”

김희순은 고개를 들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경춘을 바라보았다.

그 태도, 왕 앞에서 무릎을 꿇지도 않고 네 처지를 알라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 자체가 아까의 말에 한 점 진실도 없다는 완벽한 방증이었다.

그래서 이경춘도 더 말씨름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철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마치 정몽주 앞의 조영규(趙英珪)처럼 고함을 질렀다.

“그럼 지금 우선 한 번 죽어라!”

빡! 하마터면 김희순은 그대로 머리가 날아갈 뻔했다. 그가 왕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기에 김희순은 철퇴를 막은 팔이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날 수 있었다.

아무리 무근본한 왕이라도 곤룡포 걸친 채 직접 철퇴를 휘두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바로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던 기습이었다. 옷차림이란 중요한 것이다.

김희순은 바닥을 데굴데굴 뒹굴었다. 그 나이에 뼈 부러지면 잘 붙지도 않는다.

“으아아악! 이, 이자가 미쳤구나! 주, 죽여라! 아, 아니다. 흠씬 두들겨 패서 묶어라! 크으으윽!”

이경춘은 눈에서 불을 뿜어낼 듯이 하며 외쳤다.

“이 나라 성조 사백 년의 끝이 너희처럼 하찮은 배반자들의 손에 맺어질 줄 알았더냐! 김조순의 잔당, 그중에서도 또 잔당이라. 이 저잣거리 광대패만도 못한 놈들. 내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에게 끌려가지는 않을 셈이다!”

병사들은 탈문의 변 당시의 명나라 군사처럼 왕의 호령에 감복하여 돌아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을 정도로 낭만적인 15세기 사람과 달리 돈 주는 사람이 누군지 명확하게 아는 19세기 사람이다.

그리고 이경춘 역시 병사들이 자기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예상대로 병사들이 창칼을 치켜들며 노호하자, 이경춘은 철퇴를 들고 곤룡포를 펄럭이며 몸을 날렸다.

조선 왕조의 최후는, 적어도 비장미라는 면에서는 썩 나쁘지 않았다.

========================

작가의 말

1. 조수, 인개, 충치는 전근대 동양의 동물 분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수는 말 그대로 새와 길짐승, '인'은 물고기, '개'는 조개류, '충'은 다리 있는 벌레, '치'는 다리 없는 벌레(지렁이, 뱀 등. 이때는 뱀과 개구리도 벌레의 한 종류였습니다)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치(豸)가 기어다니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는데도 이 글자를 부수로 갖춘 짐승은 대부분 기동성도 좋고 무서운 종류라는 점이지요. 표범[豹], 승냥이[豺]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2.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는 조선 통신사가 일본 본토에 입항하는 첫 번째 관문임과 동시에 조슈 번이 영국 함대와 맞서 싸웠던 곳이기도 합니다. 번영한 무역항이었지요.

작중 나온 대로 좋은 벼루가 나는데, 이 벼루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지요.

실학자로 유명한 유득공은 친우인 이정구(작중 초반에 나온 평안 감사 이서구에게도 동명의 사촌 동생이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입니다)가 거기 갔다가 고급 벼루를 사 오자 그게 매우 갖고 싶었습니다. 유득공은 담배책을 저술한 담배 덕후 이옥처럼 일종의 벼루 매니아였습니다.

유득공은 이정구를 좀 떠 보다가 도저히 자기 줄 것 같지 않자 그냥 그 자리에서 냅다 벼루를 낚아채고 도망쳐 버립니다. 나중에 사과한다고 시를 한 수 써서 보내 주지만 벼루는 안 돌려 줍니다.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소동파도 갖고 싶은 벼루에 침을 뱉어 뺏어왔는데 나도 그런 거 좀 할 수 있지 않겠냐? 적간관이라더니 벼루 색깔도 붉어 참 귀해 보인다”입니다. 21세기 같으면 티배깅 혐의로 부조 3대의 안부를 물어도 합법일 것 같습니다.

일전에 작가의 말에서 박제가와 이덕무가 서로 카스텔라 뺏어 먹고 뒤끝 장난 아니었다는 얘기를 한 적 있었죠. 왜 그런지 몰라도 실학자들에게 이런 일화가 꽤 있습니다.

3. 일본 노동자의 임금에 대한 수치는 R.C. ALLEN 를 참조했습니다.

다만 하층민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이후 조슈, 사쓰마가 자체적으로 근대 군함까지 건조하는 데에는 그 전 내부적 역량의 성장이 필수적 요소였겠죠.

4. 탈문의 변은 명나라 6대 황제인 정통제가 관련된 정변입니다.

그는 오이라트와의 전쟁에 친정했다가 포로가 되는데(토목의 변), 명나라 사람들이 ‘응 황제 다시 세우면 그만이야~’ 해서 가치가 없어지는 바람에 풀려납니다. 와보니 동생 경태제가 즉위해 있었고, 당연히 지금 황제는 동생이니 태상황이 되죠(유폐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경태제의 태자가 죽고 경태제도 앓아눕자 일부 정통제 지지파들이 정통제가 유폐된 궁을 습격해 그를 꺼내와 옹립합니다.

이 과정에서 황궁의 수비병들이 정통제 일행을 가로막자 (그걸 무력으로 뚫을 수 없었던) 정통제는 “짐이 태상황이다!” 라고 외치고, 수비병들은 만세를 부르며 문을 열어줍니다. 작중의 언급은 그런 맥락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