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55. 삼국쟁패(1)
혁명해군은 본래 혁명군 휘하의 해적선단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애초에 시준이 해군을 창설한 이유가 무엇인가. 조운선을 털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고려인민공화국의 깃발을 올린 이상 그런 인식은 용납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해군은 정규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기존에 그냥 혁명군이라 불리던 기보군(騎步軍) 또한 해군과 양립하는 혁명육군(革命陸軍)의 명칭을 받았다.
그 혁명육군 총수의 거의 3할에 해당하는 4개 영대는 지금 옥구현이 금강(錦江) 너머 바로 바라다 보이는 충청도 땅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호남의 약점은 조선군이 자랑하는 산성 전술을 펼치기 힘들다는 점이다.
만약 금강을 건넌 혁명육군이 김좌근의 군세를 깨뜨린다면 저 남쪽의 군사 요충지인 고창현(高敞縣)까지 산이라고 불러줄 만한 게 사실상 없다.
그리고 고창현까지 적군이 진격한다면 그건 호남의 절반을 빼앗기고 전주마저 상실했다는 의미. 그다음에는 진짜 강철군주처럼 중국으로 망명하여 변발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호국도원수 김좌근은 여기에 영혼을 쏟아부었다.
“찌르는 것은 칼끝이면 충분하지만 막는 자는 전신에 갑옷을 둘러야 하는 법이다. 금강은 흐름이 잔잔하고 건너의 땅이 평탄하여 어디로든 적도가 짓쳐들 수 있으니, 5천을 막으려면 그 몇 배는 있어야 사직을 지켜낼 수 있다!”
다행히 자칭 고려인민공화국 혁명육군이라는 저 홍건적의 무리는 당장 강을 건너오지 않았다.
그저 배 타고 왔다 갔다 하다가, 헉헉대며 달려온 관군 앞에서 이상한 노래나 열창할 뿐이었다.
당장에 화포와 궁시를 날려 어육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혁명군의 화력은 조선군보다 훨씬 우월했다.
고려인민공화국은 이제 영국 6파운드 야포, 아니, ‘3킬로그램포’를 양산하는 수준에 접어들어 있었다.
지금의 고려 수준에서 유럽의 무기체계를 모두 베낄 수 없다는 정치국의 판단은 적절했다. 공화국은 모든 기술과 장인을 집중해 분야별로 딱 하나만 죽자고 만들어냈다.
보병용 총으로는 브라운 배스 머스킷이고, 육전용 화포로는 영국 육군의 6파운드 야포가 선정되었다. 사실 더 좋은 무기도 많지만 조선에서의 실적이 있으니 어쩔 수는 없다.
물론 성능은 원판보다 한참 떨어지고, 가끔 바퀴가 우그러지거나 포신이 폭발하거나 포환이 안 들어가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사소한 문제는 조선인들에게 별 고민거리가 안 됐다. 조선 화포도 똑같으니까.
게다가 대포는 그 꼴이더라도 로켓 무기는 조선인들이 썩 잘 베꼈다. 동인도 회사가 아편과 교환해 주는 초석을 아낌없이 써서 콩그리브 로켓의 열화판이 꽤 많이 생산되었다.
다른 점은 미륵사 특제 부적만 공정에 추가해서, 예전 이제초가 ‘인민의 주체적 무력’ 운운하던 말에서 유래된 주체신기전(主體神機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정도였다.
그러니 다 썩어가는 총통 몇 문이나 끌고 나온 조선군은 머리를 감싸 쥐고 달아나야 했다.
김좌근은 무익한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이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기로 했다.
도원수 김좌근의 지휘에 따라, 과거 왜란 때 왕조의 성지 전주를 지켜낸 기상을 본받는 의병 모집의 명이 떨어졌다.
과연 호남 전역에서 종묘사직을 수호하기 위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 달려왔다.
김좌근이 갈라 보낸 관병이 아무 집이나 닥치는 대로 들어가, 가로막는 녀석 다 두들겨 패고 장정이란 장정은 모두 끌어왔다는 뜻이다.
물론 그러면서 그 집의 곡식이나 가축에 손대지 않을 리 없고, 방에 앉아 있다가 놀란 처녀라도 있으면 덮치지 않을 리 없다. 호남 전역은 옛날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보다 더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김좌근은 아버지 김조순이 왜 지방관의 횡포를 묵인하여 결과적으로 남조선혁명당의 봉기를 불러왔는지 이제 잘 알게 되었다.
다른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군대부터 모아야 했다.
그다지 불합리한 판단은 아니었다. 어차피 고상한 뜻을 지키다가 패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냥 혁명군 쳐들어오는 게 낫겠다는 여론 때문에 급히 김좌근을 만나러 온 김희순이 이에 대해 자제를 권고하자, 김좌근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기면 인군이요, 지면 도적[成者為王 敗者為寇]! 갈고리를 훔친 자는 목이 떨어지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되는[竊鉤者誅 竊國者爲諸侯, 『장자(莊子)』] 이치이니, 먼저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대업에만 매진하여야 합니다. 제가 국가의 위임을 받은 장군으로서 멸사봉공만이 있을 뿐. 어찌 아녀자의 어짊으로 망설이겠습니까?”
김좌근의 결단은 장엄하기는 했으나 특별하지는 않았다.
동서고금 어디든 정부가 있는 곳이라면 시니컬한 지식인들이 모두 한 번쯤 말한 문구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명언은 고전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기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호남에서 약탈당하고 있는 백성들은 그런 구국의 결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더 물러날 데도 없는 백성들은 곧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관군에게 들이받기 시작했다.
분명 군사가 모자라서 초모를 위해 파견되었던 관군이건만, 한 보름 정도가 지나자 초모 대상보다 몇 배는 많이 몰려가야 겨우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김좌근은 혁명군만 깨뜨리면 알아서 수그러들리라 기대하며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지리산의 빨치산부대는 이 민심의 혼란을 틈타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 진인이 다스리는 지상낙원으로의 이주, 혹은 이 십승지가 몰려 있는 남방의 해방을 내세우고 돌아다녔다.
밤중 수상한 무리가 나타났다는 고변에 관군이 달려가 보면, 이미 혁명가챠에서 5성 카드 뽑기에 실패한 지주나 부자, 향임들이 모두 죽창에 주렁주렁 꼬치가 되어 있고 도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범인을 알아내겠다며 남은 백성들을 족치는 일은 1950년대의 남한과 비슷하게 돌아갔다. 심지어 용감히 빨치산부대에 맞서 싸운 ‘진짜 의병’마저 무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특한 난신적자와 접촉해(전투도 접촉이다) 내통했다는 딱지가 붙어,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처형당했다. 당연하지만 진짜로 내통한 사람은 이번에도 잽싸게 뇌물 바쳐 살아남았다.
백성들은 정시준 일당이 쳐들어올 때는 자기를 지켜 주지도 못했던 관군이 뒤늦게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권세를 부리는 작태에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이것은 지난 옛일을 떠오르게 했다.
저 위대한 용맹왕 이종은 자신의 용맹을 폄하하는 일에 매우 민감했다. 자기는 남한산성에서 엎드려 살아났는데, 신하 김상용(金尙容)은 강화도에서 일어나 죽은 것이다.
전후, 신하들이 왕의 허리놀림에 대한 극찬은 일언반구도 없고 대신 장렬히 자폭한 김상용의 절개를 칭찬하자 장목대왕은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문(祭文)이 사실과 다르다느니, 사실은 (혐연가였던) 김상용이 자폭한 게 아니라 담배 피우다가 실수로 불낸 거라느니 하며 계속 포상을 미루었다. 자손들이 분통이 터져 상소할 정도였다.
가슴 졸이는 쿠데타부터 역사에 남을 대전쟁, 아들의 비명횡사 등 인생 모든 국면에서 극적이었던 쾌남 장목대왕은 뭘 해도 대충 넘기지 않는 남자다. 그래서 그때도 그런 식으로 찌질함의 극치가 무엇인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제 백성들은 생각했다.
‘우리의 충성은 보답 받았는가?’
그런 적은 없다. 백성들이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강철군주의 거룩한 교시에 따르면 충성은 그 자체로 보상이지 뭐가 있어서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착각이 깨어날 때의 분노는 큰 법이다. 지리산 빨치산부대는 갑자기 합류하러 오는 인민들을 크게 반겼다.
하지만 장동 김문 반세기 세도가 또 괜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김좌근은 그 모든 반발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러가며, 자신이 그 유지를 이어받은 옛 한성 판윤 김이익의 통치를 호남에 실행했다.
조금이라도 역적 정시준과의 연계가 의심되는 사람은 – 그리고 겸사겸사 장동 김문의 전횡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 사지가 분해되어 곳곳에 조리돌려졌다.
어쩌다 빨치산부대의 혁명당원을 붙잡으면 그 시신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격노할 만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지리산에 던져놓았다. 토벌은 포기했지만 보복성 경고 정도라면 할 수 있었다.
이제 이 나라가 조선인지 아니면 어디의 테러 단체인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애쓴 보람은 있었다. 김좌근은 한 달 뒤 기어코 1만 4천에 달하는 ‘의병’을 금강 남쪽에 모았다. 숫자로 보면 혁명군의 3배가 넘는 수였다.
김좌근은 이대로 굳게 지키다가 저 도적 떼가 풀어지는 모습을 보이면 들이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이것은 정교한 계략이지, 결코 지금 선제공격할 수단이 없어서는 아니다. 지금 ‘조선군’은 강 건너에 넓게 벌려서 있는 것에 불과한 만 사천 명의 그냥 사람이라는 점은 절대 비밀이다.
하지만 김좌근은 한 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지금 걱정해야 하는 것은 빨치산부대가 아니었다.
***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전쟁 기술의 발전이라는 면에서는 평화기보다 전란기가 더 호기인 것이 당연하다.
왕씨 고려와 이씨 조선은 일부 외침을 제외한 천 년의 평화기를 백성들에게 선사했다. 사람들은 전쟁을 잊었고 군대는 차원 위상의 갈피로 사라졌다.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그 전에는 이 땅도 세계 어느 곳보다 치열한 전쟁터였다.
삼국 시대와 후삼국 시대에 이미 완성된 전사학은 한반도의 모든 입지에 훌륭한 산성을 건설하게 했다.
조선 시대를 폭풍처럼 살다간 명 군주들도 모두 그 고대의 아티팩트를 활용했다. 전쟁군주 인조가 여진족을 물러가게 한 용맹왕 최후의 보루 남한산성이 대표적이다.
비단 성뿐만이 아니다. 천 년 전에는 정녕 이것이 한반도의 군대인가 싶을 정도로 활발한 투쟁이 이루어졌다.
그중 한 가지로 해군을 들 수 있다.
조선의 연안 수군은 분명 강력했지만 철저히 국지 방어 중심이었다.
외국은커녕 조선 전역 정도의 거리를 작전권에 넣고 활동한 적도 많지 않다. 이종족에게는 죽음뿐이라는 공포군주 세종 또한 해상 원정은 부산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 정도가 한계였다.
전쟁에는 능하지만 시간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던 인조가 강화도로의 차원 전송에 실패한 이후, 조선 수군은 전면전 전략을 거의 포기하고 해군이라기보다 해안 경비대로서의 고속 경량화를 거쳤다.
그래서 조선의 수군이 강력하다는 인식은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강한 것은 조선 수군이 아니라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의 한반도는 장절한 해전의 장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정도는 결혼을 너무 소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평가할 만한 정력군주 왕건은, 젊은 시절 태봉국의 장군으로서 수군 함대를 거느리고 서해를 빙 돌아 나주를 침공했다.
이 대담한 공격은 훌륭히 성공하여 장기간의 한반도 남서해안 점거로 이어진다.
그때의 병력은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만 최소 2,500명 이상. 말하자면 배수진이 디폴트인 지형에서 수천 명을 성공적으로 상륙시키고 보급했다는 뜻이다. 과연 29명의 부인을 먹여 살린 알파메일다운 생활력이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면, 21세기 북한도 지금 이 짓은 주둥이로밖에 못 한다.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서는 아니고 왕건에 비해 정력이 모자라서 그렇다.
어쨌든 중국과의 무역 경로이자 동시에 주요 곡창지대이며, 첫 번째 수도이기까지 한 최고 요충 나주와 인근 해안을 잃은 견훤은 수달이가 죽었다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년에는 아마도 해상제국이었던 것 같은 백제도 질 수 없다. 20년간 절치부심한 견훤은 해군을 키워 나주와 호남 남서해안을 탈환하고 거꾸로 북상하여 개성 인근 예성강 일대를 들이친다. 실로 근성의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조선에서는 웬만하면 없을 일이다. 국력이나 체제가 더 후퇴했다기보다는 그럴 만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시대였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합리적이다.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사나이의 로망은 그들의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혁명가라면 다르다. 그들에게 로망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옥구현에 나타난 혁명군 4개 영대(연대) 5천 명 때문에 ‘조선국’ 전체가 비상이 걸린 동안, 혁명해군 함대는 대규모 후방 침투를 감행하기 위해 조용히 남진했다.
‘조용히’인 이유는 흑산도의 영국 해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물론 로드 암허스트의 방침은 ‘아직까지’ 조선에 대한 불간섭이다. 그러나 암허스트 역시 혁명정부에 그것을 미리 통보하여 안심시켜 줄 의리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침묵 중이었다.
제물포에 항구 세우면 우리 망한다며 대놓고 반발하기 시작하는 동인도 회사를 달램과 동시에, 향후 ‘관대한 불간섭’을 항구 교환용 카드로 쓰려면 그럴 필요가 있었다. 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영국인에게는 안 때린다는 것도 관대하고 선한 제시 조건 중 하나다.
그래서 흑산도의 책임자 헨리 호프가 현장에서 어떻게 판단할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지방관과 찰방 등의 권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전화기가 없는 이 시대에는 현장 재량권이 현대인의 생각보다 매우 크다.
다행인 것은, 전공 세울 기회에서 탈락한 헨리 호프가 고요하고 목가적인 섬 생활에 질려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간다는 점이었다.
타이완 섬에서 한탕 한 동료들이 류큐에서도 뭔가 꾸미는 것 같아서 그도 몸이 근질거렸다. 호프 부함장의 관심은 이미 조선이 아니라 남양 바다에 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혁명해군 2함대는 정정당당하게 조선 사람들만의 일전을 치르게 되었다.
1함대가 아니라 2함대다. 영국 무장상선이 포함된 1함대는 아직 삼화부 근처에 있다.
삼화부의 영국 해군은 그들의 시선에 무슨 짐배 같은 갤리선 이십여 척이 남하하는 것에 일상적 사무 외의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문순득은 바람이 따라주지 않으면 조종이 어려운 범선과 달리 오래간만에 컨트롤 잘 되는 조선 전선이나 대변선 등을 몰아서(그동안 강탈한 게 꽤 많았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가 그간의 1함대 제독 대리에서 신규 창설된 2함대의 정식 제독으로 승진한 것도 그 유쾌함에 큰 지분을 차지한다.
시준의 시점에서는 뱃일에 익숙한 데다 호남의 물길을 잘 아는 문순득 말고는 인재가 없었지만, 그건 현대인의 생각이다.
문순득은 일종의 투항자에 가까운 데다 그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 이를테면 수군 군관 출신이라든가 하는 장점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가 눈치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승진을 총괄서결부장 정약전의 뒷배가 작용한 결과로 이해했다.
그리고 문순득 또한 그렇게 착각했다. 그는 역시 정약전이 흑산도에 있을 때 고기 자주 잡아다 갖다 준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순득은 쾌활하게 외쳤다.
“더 힘껏 저어라! 동지들! 혁명! 만세!”
“혁명! 만세!”
뜨거운 혁명 열의가 수병들의 땀을 증발시키며 그 힘을 추진력으로 바꾸었다.
말하자면 이게 혁명식 증기기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동양식 갤리선은 모든 조건이 쾌조일 경우 초보적 증기선을 위협할 만한 속도를 낼 수도 있다.
16세기에 최속군주 선조가 몸소 증명했고, 21세기에 록히드 마틴이 다시 인정했듯 ‘속도는 곧 스텔스다’. 문순득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장 빠르게 물살을 헤쳤다.
“좋아, 잠깐 멈춘다! 3단대(소대) 동지들은 선상으로 올라오도록 하라! 그리고 2단대 동지들이 다시 내려가라!”
공화국 혁명해군은 전통적 조선 수군과 달리 격군과 수병, 군관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반동의 소치일 뿐이었다.
그래서 화포를 다뤄야 하는 일부 병사나 소수 지휘관을 제외한 나머지 수병들은 거의 돌아가며 노를 저었다.
교대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니 전투시에는 비효율적이겠지만, 체력 안배가 잘 되어 기동시에는 꽤나 효율적이었다.
이미 혁명해군은 준비 만반. 그들은 항상 하던 대로 반쯤 영국인이 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열정적인 사람은 선두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전개불(全介不)이었다.
그는 과거 정조 독살설과 노론 척결의 기치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장시경(張時景)의 잔당이었다. 지금 감옥에 있는 이공의 즉위년에 일어난 일이니 10년도 더 되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아는 집 하인인데 막걸리 얻어먹으러 갔다가 반란에 참여한 축이다. 장시경의 반란군은 막걸리 한 사발로 모였다가 어리둥절 출발한 동네 노비들이 대부분이었다.
곡산에서도 그랬지만, 평소에는 자애로운 강철군주 역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에는 용서가 없다. 동료들은 거의 전부 붙잡혀 잔혹한 형문 끝에 죽고 난은 진압되었다.
역사에는 별로 중요하게 기록되지 않은 장시경의 막걸리 반란은 그걸로 끝났다.
그러나 개불이는 조선 조정이 놓친 몇 안 되는 반란자 중 하나였다.
그는 용케 10년 가까이 잡히지 않고 도망 다니던 중 기회를 잡았다. 막 시준이 서상을 만들었을 당시 치외법권지대에 가까웠던 평안도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과연 천명에 어긋난 노론이(노론이 뭔지는 모른다) 군주와 함께 몰락하자 기세가 올랐다.
그는 정약용이 남인이라는 소릴 어디서 얻어듣고(역시 남인이 뭔지는 모른다) 자기가 남인을 위해 원수 갚아 주려 했다며 여기저기 유세를 다녔다.
그러나 정작 정약용은 좀 시큰둥했다. 그는 주석 동지가 내린 ‘너, 내 정도전이 되어라!’ 임무 때문에 신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느라 과로사할 지경이었다.
혁명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남인이고 노론이고 이제 개똥만한 가치도 없었다. 개똥은 상조농장 거름으로 사용되는 귀하신 몸이라, 실적이 중요한 각 농장 사이에 주먹질을 동반한 쟁탈전이 벌어지는 실정이다.
그러니 개불이는 다급해졌다. 하루아침에 노비도 혁명 간부가 되는 이 사세에서 어찌 출세의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개불은 이번에 공을 세우러 전방을 자처한 것이다.
그렇다고 개불이가 무능한 기회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혁명해군에 오래 있었고 그래서 영길리국 사정에는 전문가였다. 모두가 영길리 말 능통하다고 자랑하는 혁명해군 중에서도 개불이는 특출했다.
그는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소리 높여 외쳤다.
“Nice to meet you! 반동의 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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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고창은 실제로 호남의 군사요충지 중 하나였습니다. 봉수대와 성곽도 쌓았죠.
2. 한국에서는 성즉군왕 패즉역적(成卽君王 敗卽逆賊)으로, 일본에서는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勝てば官軍, 負ければ賊軍)으로 알려져 있는 이 유명한 말은 중국에서는 작중대로 성자위왕 패자위구(成者為王 敗者為寇)입니다.
무엇이 원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활발히 사용되기는 했습니다. 충효의리를 부정하는 그 뉘앙스로 봐서(그리고 한국에서도 주로 개화기~일제강점기부터 간간이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고전은 아닌 듯하다는 게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일단 성자위왕 패자위구는 『원보원조씨고아(寃報寃趙氏孤兒)』 라는 원나라 시절 연극에 최초로 확인됩니다. 뒤의 갈고리 어쩌고는 '장자'가 출전입니다.
3. 김상용 건은 처음에는 인조도 관곽 내려주고 장례도 돌봐주었습니다만, 신하들이 줄기차게 상언하면서 태도가 확 바뀐 것을 보면 자기와 비교되어 뭔가 위기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사실 김상용이 담뱃불로 불 내었다는 의혹까지 은근히 밀어주어, 빡돈 자손들이 우리 아버지는 평생 담배를 싫어했다고 상소를 합니다.
결국 나중에 인조 죽고 지은 지문에는 김상용에게 표창하여 정려문 세워 줬다는 내용이 들어가는데, 진짜 인조의 명이었는지 아니면 글만 그렇게 쓴 건지가 효종 대에까지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사사로이 돈 모아 만든 사당 등은 이미 인조 생전에 세워졌고요.
그리고 이는 한 가지 중요한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데, 찌질한 왕에 맞서 김상용을 지지했던 신하들은 김상용의 가문에게도 호의를 보내게 되었고 이 가문은 (원래도 명문가 중 하나였지만)노론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성장하죠. 이 가문이 무엇이냐면 바로 안동 김문입니다.
4. 장시경의 난은 막걸리 얘기와 이방(사람 이름이 아니고 그 관아의 이방 맞습니다)의 용맹한 진압까지 포함하여 역사와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시준이 지유와 메뚜기 잡을 때쯤 일이니 당연하겠죠). 반란군은 일차로 동헌 문 지키던 문지기에게 가로막히고 기세가 꺾여 흩어지죠. 도망치던 반란군 중 하나를 사로잡는 이 충신 이방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듯 합니다.
전개불 역시 실존 인물이고 그때 안 잡힌 사람 중 하나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때는 순조 1년의 일이라 실제로 이들의 처벌을 결정한 자는 순조가 아니라 정순왕후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