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54. 군웅할거(2)
일반적으로 독 무기는 정규군의 전면전에 쓰기 어렵다.
모든 군 지휘관의 꿈인 ‘절대 사고 안 나는 군대’는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다. 이것은 훈련도로 완전히 극복하기 힘들다.
독병기를 원하는 지휘관은 적 이전에 아군의 희생에 더 골치를 앓아야 한다. 게다가 높은 가격이나 대량생산의 어려움도 한몫한다.
무엇보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희한해서, 자기가 들고 있는 총이며 운전하는 전차는 살인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단단히 밀봉되어 보관된 겨자 가스탄에는 꺼림칙함을 느낀다.
관우가 청룡언월도에 독을 발라 갖고 나가 백전백승하였다면 후세에 과연 관왕묘가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런 무기가 국민들에게 환영받으려면 국민 전체가 악의와 증오에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보통 그런 나라는 문명국이 되기 어렵다.
극명한 사례로는 영국이 있다. 크림 전쟁 당시, 영국군에는 시안화카코딜 포탄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세계 최초의 독가스 탄 사용국이 영국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정녕 놀라운 것은, 지휘관들이 ‘명예롭지 못한’ 독병기 사용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국인이었는데도!
이처럼 영국인조차 거부감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독병기 사용이다.
그러나 남조선혁명당은 정규군이 아니고, 이것은 전면전도 아니다.
또 혁명이란 전사의 엄숙한 결투와는 거리가 멀다. 짓밟히는 약자가 비명과 함께 휘두르는 처절한 반항이다. 수단 방법 가릴 처지가 못 된다.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시준은 ‘다 아니까 숨기지 말고 백린 좀 내놓으라’며 영국 밀매꾼들을 갈구고 있었지만 윌리엄 자딘도 진짜 그건 억울했다. 박사의 학식을 가진 그조차도 백린이 뭔지는 잘 몰랐다.
그래서 시준은 일단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서바이벌 기술과 사냥 노하우를 정찰총국에 전수했다.
다만 시준의 지식은 이론이고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실전이다. 그래서 이것과 가장 비슷한 지식을 생업에 활용하는 사람들도 파견했다.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혁명군에 입대한 백발백중회 간부 길명이는 그렇게 남쪽으로 떠난 포수 중 한 명이었다.
“거기 잘 덮으시오. 저번처럼 지나가다가 우리 허방다리에 우리가 걸리는 바보짓은 하지 말고. 대나무를 날카롭게 갈아 세우고 똥을 발라 뒀으니 찔리기라도 하면 살아남기 어려워. 아니, 거기 머저리 동지! 나뭇가지로 덮으랬더니 참나무 숲에서 관솔을 가져와 덮으면 어떡해? 멧돼지도 그런 것에는 안 속겠네! 젠장. 평생 논에서 농사만 지었소? 뭐? 농사만 지었다고?”
길명이는 빨치산부대의 부비트랩 자문역을 맡고, 그들을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길로 인도했다. 동시에 이 혁명열의 말고 다른 건 별로 가지지 못한 동지들에게 화내느라 오랜만에 활기찬 나날을 보냈다.
빨치산부대는 고의적으로 관군이 자기들을 추적하기 쉽게 만들고 그 경로에 함정을 설치했다.
물론 김좌근의 말마따나 사람의 지능은 짐승보다 훨씬 높다. 함정 중에는 발각되어 해체되는 것도 많았다.
허나 그러려면 관군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전진해야 한다. 이를테면 김좌근의 경우는 그 신경줄로 사람을 찔러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혁명군 쪽도 인간의 지능을 갖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여서 함정에는 모두 성의 있는 위장이 들어갔다.
부주의한 동료가 독화살에 맞거나, 말뚝에 꿰뚫리거나, 터져나가는 화약 상자의 폭풍에 휩쓸려 날아가자 관군은 벌써 반 이상이 도망쳐 버렸다.
길명이는 서초 대신 어디서 삘기를 하나 뽑아와 질겅질겅 씹었다. 연기를 피우기 곤란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조선군’의 사기를 꺾으면, 곧 공화국 혁명군이 옥구현(군산)에서부터 남진하여 인민을 해방시킬 것이외다. 그러면 곧 인민위원회 선거를 거쳐 모두가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오. 소작이 아니라 정말 자기 땅 말이오.”
국무당 정치국은 만만찮은 영호남을 평정하기 위해 토지 개혁을 약속했다.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기준으로 할 때, 자영농 비율은 정약용 같은 당대 학자들의 분석으로 약 25% 정도다.
양란 전에는 7할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소빙하기와 전쟁이 얼마나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사회에 불만 많았던 실학자들의 평가이니만큼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지금 주석보필국장(기능상 정부부처라 하기 어려워 여전히 국을 유지했다) 서유구 같은 사람은, 임원경제지를 저술할 때 조선에서 바늘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새빨간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어쨌든 현대에 논란이 되는 것은 자영농과 소작농의 비율 정도고, 지주의 숫자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치국 역시 그 사실에 유의했다. 그들의 지주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았다.
‘없어도 되지 않을까?’
여태까지의 모든 군주는 5%의 편을 들었다. 그들이 가진 재산과 토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은 70%의 편을 든다. 그들이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죽창은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이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하나씩 가질 수 있다. 보통 선거의 투표권은 죽창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다른 복잡한 것 필요 없이 숫자가 곧 힘이고 명분이다.
자영농 계층을 건드려 불필요한 반발을 얻을 필요도 없다. 평안도에서의 경험으로 볼 때, 궁방전 등 왕토(王土)에다가 관의 둔전 및 지주의 토지까지 모조리 빼앗는다면 소작농에게 충분히 땅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영(自營)이라고 말은 하지만 생계를 지탱할 만큼의 소득은 나오지 않고, 또 향촌 사회의 여러 보이지 않는 불문율 때문에 더러워도 지주에게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던 자영농들 또한 이득이다.
5% 정도만 없는 셈 치면 70%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이 시대에서 소작농과 지주의 관계가 20세기처럼 철로 대화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에게 떨어질 땅과 재수 없는 지주 목숨 사이에서 고민할 만큼 돈독한 것도 아니다.
토지 개혁의 선전선동은 비단 빨치산부대뿐만 아니라 혁명해군, 유랑민, 보부상 등 오만가지 경로로 퍼졌다.
길명이는 혁명 정신을 전파하는 말미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때 전문위원회 선거도 할 것인데 그때는 꼭 우리의 정리를 잊지 말고 백발백중회에 한 표를 부탁드리겠소.”
백발백중회 회장이자 급양과장인 기랑의 ‘최측근’으로서 백발백중회의 영향력 확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혁명당 사람들도 기꺼이 찬성해 주었다.
“아암. 인민위원회야 지금까지 고생한 우리 고을 간부 동지들에게 패쪽을 던져야겠지만, 전문위원회는 어차피 전국에서 뽑는 사람들이니 못 해줄 게 무엇인가. 이렇게 먼 데까지 내려와 힘써 도움을 주는 평안도 포수들을 저버릴 수는 없지.”
길명이도 그간 평양에 어정거리면서 야학에도 기웃거렸고, 그래서 학문을 약간 얻어들었다.
듣기로 충무공 이순신 또한 어리석은 군주의 시기를 받아 백의종군하였지만, 끝내는 왜적을 통쾌하게 깨뜨리고 가문 대대로의 영광을 얻었다 한다.
길명이는 물고 있던 삘기를 움켜쥐었다. 아직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호남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된 곳이니 표심도 굉장할 터. 여기에서 대공을 세운다면 백발백중회는 다시 한번 크게 도약할 수 있다.
그러면 과거 이순신이 온갖 음해에도 불구하고 영웅으로 굴기하였듯이, 회장 또한 자신을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길명이는 반드시 이곳에서의 혁명을 성공시키리라 다짐했다.
***
지리산에 퍼지고 있는 토지 개혁은 헛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국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혁명 세력이 양계 바깥으로 진출하면서 그들은 토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양계는 자영농이 얼마 되지 않고, 지주와 왕족 등 반동의 토지는 전부 몰수했다. 게다가 평안도의 혁명에서는 농민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기에 토지 일괄 무상분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시준은 고부가가치 화훼 재배를 위해 땅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양계의 토지는 상조농장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경기, 황해, 충청도는 경작지도 넓고 농민 비율도 훨씬 높다. 시준은 처음에 대체 이 구조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시준이 밤새서 만들어 온 평화적이고, 타협적이며, 보수적인 토지 개혁안은 정치국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거부되었다’.
시준은 아득하게 흩어지려는 넋을 붙잡으며 호소하듯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지주를 다 죽이고 나눠주기라도 하자는 거요?”
정치국 위원들은 모두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표정이 되었다.
“예?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석 동지.”
“우리의 혁명 정신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핫핫.”
“아니, 뭐 죽일 것까지는 없나? 본 위원의 생각으로는 탄광에 한 삼 년 정도 처박으면 충분히 교화될 것 같기는 하오.”
“아, 함경도 경흥부 아오지성(阿吾地城)쪽에 괜찮은 데가 있다고 하던데.”
정치국 위원들이 보기에는 시준 쪽이 더 이상했다.
이미 남조선혁명당은 양남만 빼고 임진강 남쪽에서 지주의 태반을 죽였다. 나머지 반을 까닭 없이 살려둬서 얻는 게 무엇인가? 인민의 불신 이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 하지만 그것도 엄연히 그들이 노력해서 모은 재산인데, 만약 우리가 그 모두를 무력으로 빼앗고 죽인다면 사람들이 필시 자기도 그렇게 뺏길까 봐 힘써 일하지 않을 것이오.”
시준은 공산주의의 실패 원인으로 잘 알려진 그 이유를 대며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제가 틀렸다.
21세기 사람들은 정당한 노력이 부자를 만든다는 견고한 신앙을 – 그리고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자기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신앙을 –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총괄서결부장 정약전이 대답했다.
“대단히 송구하오나 직언을 드리자면 반동의 축재(蓄財)에 노고는 없고, 반동의 권세에 도덕은 없습니다. 주석 동지.”
“예?”
시준은 잠시 멍해졌다. 정약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주들이 남들 쟁기질 한 번 할 때 천 번을 했기 때문에 남의 천 배에 달하는 땅이 있는 것이 아니오이다. 반동의 폭군이 신하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책을 더 읽어서 백관 모두보다 귀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부조에게 물려받은 것이며, 그 부조 또한 다른 사람의 것을 획책이나 창칼로 빼앗았을 따름입니다. 어찌 그러한 재산과 목숨이 당권(當權)이라 하겠습니까?”
공산주의의 원조 조제프 푸셰가 발언했다.
“재산은 곧 힘이고, 힘은 곧 억압입니다. 대토지 소유자는 다른 폭군의 후보자일 뿐입니다. 본인도 그 대의를 위해 리옹에서 반동들을 쇠사슬에 묶어 대포로 쏘아 처형할 수밖에 없었소이다.”
그 앞선 서양국의 문물을 시급히 도입해야 하겠다는 환장할 논의가 잠시 오갔다. 시준은 청각에 신경을 끄고 정약전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축재에 노고는 없다라…….’
자본주의적 교육이 주는 거부감을 내려놓고 생각해 본다면 그 말이 맞다.
부유함과 노력은 선행과 천국 정도의 관계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사이의 연관관계는 사실보다 믿음의 지분이 더 크다는 얘기다.
물론 모든 부자가 상속과 범죄로만 부를 이루었다고 말한다면 다소 지나친 소리다(많이 지나치지는 않다).
허나 ‘부자의 자식 중 부자가 되는 사람’과 ‘서민의 자식 중 부자가 되는 사람’의 비율을 비교해 본다면 결론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것은 ‘축재’한 상인이 대부분인 정치국에서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다. 당장 시준 역시 ‘획책과 창칼’로 지켜내거나 빼앗은 재산이 엄청나다.
그러나 시준은 곧 협잡꾼 두 사람의 의도를 눈치챘다.
정약전은 ‘반동의 축재’라고 했지 ‘모든 축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푸셰는 그 말을 받아 ‘대토지 소유자’로 적대감을 한정시켰다.
재산이 억압을 부른다는 논리는 푸셰가 리옹에서 2세기 앞선 고사포 처형을 선보이며 주창했던 공산주의 선언이지만, 조선에 와서 되풀이한 그 주장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달랐다.
‘그러니까 너희는 지금 우리 손해 볼 거 없는 토지에 한해서만 공산주의 하자는 거지?’
두 사람의 의도는 그 둘조차 대놓고는 말 못하고 이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해야 할 만큼 뻔뻔했다.
그러나 뻔뻔한 만큼 합리적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그간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상인들의 지위도 ‘지주와 달리 정당한 축재를 한 자’로서 확정할 수 있게 된다.
하긴 그 말도 맞다. 아무리 19세기 상인이 깡패나 다름없다고 하더라도 지주보다는 정당하게 재산을 축적했다.
21세기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돈으로 이루어진 협박은 정당하고 칼로 이루어진 협박은 부당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으나, 전 시대의 보편 도덕으로 보면 그게 그거다. 그렇다면 상속 같은 거 안 받은 시준 쪽이 조금 더 정당하다.
시준도 이 혁명을 통해 주도 세력인 상인의 지위가 올라갈 것은 전부터 예상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선은 돈만 믿고 설치는 놈이 있을 경우 충효인의로 무장한 관에서 사농공상의 쓴맛을 보여줬다.
그리고 고려인민공화국은 땅만 믿고 설치는 놈이 있을 경우 수평도로 무장한 인민들이 혁명의 쓴맛을 보여줄 예정인 것이다.
시준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대로라면 현재 혁명군의 점령지 전역에서 대학살이 벌어진다.
호남과 영남에만 토지개혁 한다고 하면 양계 이남의 4도에서 왜 자기는 땅 안 주느냐고 들고 일어날 게 뻔했다.
정치국에서도 후방을 안정시키고 싶을 테니, 전선에서 혁명군이 진격하는 동안 경기, 충청, 강원, 황해도에서 먼저 지주 대숙청이 이루어질 것은 자명하다.
살육의 광기를 막으려면 견고한 법이라도 있어야 할 테지만, 전쟁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제대로 된 형법 체계가 마련됐을 리 없다.
시준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봐 노력은 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중앙인민회의에 나폴레옹 법전을 떠넘겼다. 너무 바빠서 시준이 혼자 그것을 읽고 재구성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고는 대의원들에게 형법 빨리 만들어내라고 닦달 중이었다. 뻔뻔함이라는 면에서는 정치국 모두가 혁명으로 대동단결이었다.
하지만 본래 입법부의 임무는 행정부와의 대립과 견제인 법. 중앙인민회의 대의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두근두근 가챠 인민재판은 현재 고려인민공화국의 최고 인기 컨텐츠 중 하나다.
선거로 뽑히는 대의원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은 모를지언정 민주주의의 본질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인민의 표심을 절대 외면할 수 없었다.
사법에도 마땅히 인민이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형벌 수평론이 인기를 얻으면서 근대 사법 제정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결국 시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피하기 위해 고려를 꺼내왔을 때처럼 또다시 미봉책을 사용했다.
“일단 이 논의는 나중에 하겠소. 먼저 양남의 반동이 억압하고 있는 인민을 해방시킨 뒤에 논해 볼 사안이오.
다만 남조선혁명당 동지들의 희생과 노고에 보답이 없을 수 없으므로, 대동강 남쪽에서는 우선 정죄(定罪)된 반동의 땅만 혁명당원에게 나눠줄 준비를 하시오. 호남과 영남에도 그렇게 전하여 사기를 높이는 것이 옳겠소이다.”
말하자면 전면 몰수 및 재분배가 아니라 제한적 몰수와 제한적 분배였다.
그래서 길명이는 호남 혁명당에게 토지를 약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준이 물었다.
“지금 혁명군의 준비는 어떻소?”
혁명무력부장 차형기가 일어났다. 이때만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일전 정령 225호에서 지시된 6, 7, 8, 9영대의 창설에 더해, 혁명군 10, 11, 12영대의 창설도 천리마의 말발굽처럼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인민의 뜨거운 성원이 있어 초모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뜨겁기는 했다. 그동안 집도 불타고 논밭도 불타고 아무튼 뜨거웠던 동네가 많아서 그간 많은 유민이 발생했고, 그들은 세끼 밥은 꼬박꼬박 준다는 혁명군에 몰려들었다.
허나 그들이 모두 혁명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슷한 미끼로 모집하거나, 그도 안 되면 그냥 후려쳐서 끌고 오는 옆의 영국군을 보면 이해가 쉽다.
시준의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짐작한 조제프 푸셰가 그 걱정을 해소해 주었다.
“급거 모병된 사람들의 사기를 걱정하지는 마시오. 주석 동지.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건국 직후,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소식이 전달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되자 오트란토 공 조제프 푸셰는 한 가지 사실을 감지했다.
나폴레옹의 영압이 사라졌다.
그러자 푸셰는 갑자기 머나먼 조선 혁명에 몸 바친 동아시아의 체 게바라로 변신했다.
그는 여태까지의 초연한 태도를 전부 버렸다. 조선 사람을 양자로 들이려고 물색하는가 하면 오만가지 수단을 동원해 조선에서의 지역적 영향력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그중 하나는 지금 시준이 받아든, 오합지졸 혁명군의 기강 단련에 대한 보고서였다.
시준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이거 정치장교 아니오?”
정약전이 참으로 좋은 이름 같다고 칭찬하는 순간 시준도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막아내고 미터법을 사수한 대업적 이후로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이었다.
괴로워하는 시준 앞에서 푸셰는 그것에 대해 설명했다.
조제프 푸셰는 정감록파와 손잡았다. ‘혁명적 사상으로 무장한 장교’들을 뽑아, 각 복대(중대)마다 열흘에 한 번씩 야학 교육을 빙자한 혁명 훈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비단 혁명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무학자가 대부분인 혁명군에게 기초적인 산술과 문자 교육도 병행하여 인민의 교양을 높이는 선전선동부 사업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승인해 주십시오, 주석 동지.”
시준은 급하면 항상 공무원적 본능을 발휘한다. 그는 면피를 하려 했다.
“승인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정치국…….”
“다 아시면서 또 그러시는군. 주석 동지만 찬성해 주시면 나머지 위원들의 뜻은 이미 혁명 외길이오이다. 안 그렇소, 동지들!”
“선전선동부장 동지의 말씀이 맞소!”
“정치국의 지시를 받드는 정치장교라. 군의 말단까지 모두 장악지도할 수 있으니 이런 치도는 지금까지 없었소이다.”
“정시준! 결사옹위!”
결국 시준은 토지 개혁에서 위원들의 관심이 멀어진 것에나 감사해하며 또 명패를 들어 올렸다.
사실 병사의 교양이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바로 옆 동네에서 술 마시고 있는 영국 수병도 교양으로 따지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점만이 짐승보다 유일하게 낫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현실적 여건뿐만이 아니다. 그 정도의 군대로도 전쟁을 수행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군대는 가성비의 집단이고,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최저가를 추구한다.
공부도 잘 하고 싸움도 잘 하며 명예까지 아는 정예 인적 자원은 차라리 다른 일에 쓰는 게 낫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혁명군의 재훈련은 낭비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준은 한 가지 면을 간과할 수 없었다. 미래에 축소될 혁명군은 어차피 고려인민공화국의 국민이 되어야 한다.
본래는 공립교육을 거친 국민을 국민군으로 만들어야 하나, 여기에서는 거꾸로 되는 셈이다.
하지만 거꾸로라고 해서 효과가 저하되지는 않았다. 자부심과 그것을 뒷받침할 교양을 선사받은 혁명군은 조선군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탈영과 군수물자 도적질이 조선군 기준으로는 0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드물어지고, 민간인 약탈과 범죄도 처벌이 가능한 숫자 정도만이 저질렀다.
이것은 우주 태초의 신비보다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고려인민공화국 혁명력 3년 6월, 옥구현(군산) 근방에 5천에 달하는 붉은 옷의 군대가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좌근 역시 도저히 혁명군을 오합지졸이라 비웃을 수 없었다.
========================
작가의 말
1. 삘기는 사투리로 삐비라고도 불리는 풀입니다. 줄기를 씹으면 껌 같이 씹히고 약간 달달해서 아이들 간식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20세기 농촌 태생이신 분들은 거의 아실 겁니다.
2. 조선 왕조는 병역과 세수 확보를 위해 치세 내내 자영농 육성에 힘쓴 편이었습니다. 지주의 수탈에 대한 제한도 엄격했죠. 그런데 양란과 흉년으로 다 말아먹어서... 물론 근근이 유지되던 자영농 계층을 완전히 끝장낸 것은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입니다.
3. 프랑스 혁명은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한 혁명으로도 유명한데, 워낙 많은 주장과 사상이 뒤엉키다 보니 꼭 그런 한 길로 나간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 나왔지만 조제프 푸셰는 최초의 공산주의 선언을 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죠. 리옹에서 반혁명분자들을 학살할 때 푸셰는 재산의 차이가 권력의 차이를 부르고 권력의 차이는 억압을 만들 것이라는 논리를 펼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는 막대한 치부를 하지요.
4.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해서 영압이 사라졌을 뿐, 아직 저항 중입니다. 엘바로 유배 가는 것은 작중 시점에서 다음 해인 1814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