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54. 군웅할거(1)
유명한 신라 금관의 존재는, 역사에 별로 밝지 못해 정약용으로 하여금 옛 제자의 학문 미천함에 항상 한탄하게 만드는 시준조차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일제 강점기 때에야 처음 실물로 출토되어 명백히 알려진 것이다.
그 전에는 마땅한 기록조차 없었다. 발굴 후에도 실물 연구가 주로 된지라 21세기까지도 ‘이건 왕관이 아니라 사자(死者)를 위한 가면이다’ ‘고대 시베리아 샤먼의 아티팩트이다’ 등등 별의별 주장이 다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 금관을 전근대에 만들어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학문적 난관을 먼저 돌파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허나 무지는 모른다는 것을 알 때 근심이 되는 것이지, 모른다는 것도 모르면 아예 고려 사항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김회연은 정약용처럼 고증에 골몰하지는 않았다.
신라의 왕은 당연히 옛 당나라의 법식을 본받았을 것이고, 당송의 기풍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복두(幞頭)에 단령(團領)이면 이 영남 땅 천 년 사직의 후예가 갖출 의복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김회연이 더욱 신경 쓴 고증은 그런 번쩍거리는 보물 따위가 아니었다. 설사 김회연이 신라 금관의 존재를 알았고, 또 그것을 두드려낼 금이 있다 해도 김회연이라면 군비에 보탰을 것이다.
김회연이 여러 문헌을 상고하여 준비한 단막극의 ‘큐 사인’은 시준이 고려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떨어졌다.
좌우의 사람들이 일제히 김회연에게 ‘경상도의 민심’을 상언하며 ‘옛 경순왕과 경애왕의 한을 풀어 줄 것’을 청했다.
중앙인민회의 전원회의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그래도 대구 감영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꽤 되어서 분위기는 남부럽지 않았다.
그러자 김회연은 능숙하게 사양하여 말했다.
“신라의 왕가는 옛날에 박씨와 석씨가 있었고, 이후에 김알지(金閼智)의 후손 미추(味鄒)가 왕위에 올라 대를 이었다. 나도 비록 성을 같이 쓴다 하나 나의 본관은 청풍이라 그 가문의 세보(世譜)가 다르다. 마땅히 경주의 후손들이 있을진대, 옛 계림(鷄林, 신라) 사람을 위해 사업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중 어진 자를 찾아 추대하지 않겠는가?”
현대인의 모임이라면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대답이겠으나 여기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나설 수 있는 것이 19세기 사람이다.
김회연이 굳이 ‘김알지’를 언급한 이유를 모른다면 조선에서 출세하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원래 경주 부윤을 했던 고관이고, 그래서 김회연이 일찍부터 가장 먼저 포섭한 사람 중 하나였던 신서(申溆)가 즉각 대답했다.
“가만히 헤아려 본 바 공(公)의 가문은 오히려 신라의 왕가에 가장 가깝습니다. 경순왕의 아들 중 넷째의 이름은 은열(殷設)인데, 이 은열의 아들이 정구(正矩)요, 또 여기서 16세손이 고려조에 대장군을 맡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대유(金大猷)입니다.”
신서 역시 청요의 요직을 고루 역임할 만큼 학문으로 이름 드높은 선비다. 그래서 그런지 김회연의 가문을 고증하는 데에 전혀 막힘이 없었다.
김회연과 짠 뒤 미리 외워 놓고 말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무례한 자는 부산포 앞바다에 끌려가 요즘 유행한다는 평안도 식으로 수장될 것이다. 여기는 조상을 존숭하는 동방예의지국이니까.
마치 삼국지연의에서 헌제가 유비 족보 밝히듯이 풀어놓는 신서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그리고 이 청성부원군이 바로 공의 조상으로서 청풍 김문의 시조가 됩니다. 그러니 어찌 옛 천년 왕가가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천명 받은 자에게 하늘이 베푸는 공덕은 비단 그 자신만이 아니라 자손에게까지 이어지는 법입니다.
달이 차면 기우나, 또다시 보름이 지나면 가득 차는 것이 세상의 돌고 도는 이치. 지금이야말로 천년의 사직이 다시 천년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는 때인 것입니다.”
조제프 푸셰나 정약용이 여기 있었다면, 평양에서 진보의 가치를 역설하던 시준의 연설과 지금 순환의 고아함을 표현하는 신서의 주장을 비교하며 지적 흥미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혁명 열사들은 여기에 없고, 여기 있는 것은 모두 반동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느끼는 것은 천년 왕국이 이 땅에 부활하는 순간의 감격뿐이었다.
고풍스러운 예절에 따라 김회연은 아홉 번 사양하고, 신서와 다른 사람들은 연거푸 아홉 번을 다시 권했다.
시준이 보았다면 논쟁한다고 여겼을 법하다. 허나 여기에서는 아무도 김회연과 사람들이 의견 대립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례는 아니고 후대의 일이지만, 지금 평양 감옥에 있는 이병원의 증손자도 이렇게 아홉 번을 사양하고 나서야 대한제국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
그렇게 혈통도 완벽하고 예법도 완벽하고 의복 제도도 완벽하게 갖추어지자 사람들은 드디어 다음 식순을 진행했다. 그들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신라국왕(新羅國王) 만세!”
비록 주고받는 수작은 천 년 전의 것이지만, 어쨌든 이들은 엄연히 19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보니 이제 한물간 제후 작위의 엄한 규율은 부담 없이 깨버리는 혁명적 모습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지금 이 땅에 흩어진 군주를 세려면 한 손에 가득 채워야 하는 지경이 되었는데, 청나라가 아무 말도 없이 외면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일등번국이고 백구지국이고 다 끝장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껏 만세를 외쳤다.
만세 축수에 황제가 아닌 게 좀 이상하지만, 일에는 다 순서가 있다.
어진 자가 보위에 오르기 전에는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게 마련. 무슨 사건이 벌어지려면 복선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인으로 하여금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하니 말이다.
만세 축수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김회연의 정책 방향을 시사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정도만 해도 조선 사람들은 다 잘 알아듣는다. 곧 황제의 조정에서 벼슬 하고 싶은 누군가가 ‘신라 황제’를 위한 기획서를 써 올 것이다.
김회연의 신하들 역시 협조적이었다. 그들은 좀 특이하게 생긴 사슴을 누가 끌고 오면 기린이라고 해 줄 준비 만반이었다.
과연 얼마 안 가 경주 인근 곳곳에서 ‘상서로운 징조’가 우후죽순 출몰했다.
민가 앞 우물에서 빛줄기가 뻗쳐오르고 마을 뒷산에서 구리 닭이 발굴되었다. 봉황이 까치보다 많이 날아다니며 용이 뱀보다 자주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준이 만약 그 취합되는 보고를 볼 수 있었다면, 판타지아 월드가 경상도와 위상 융합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현대에도 땅만 파면 문화재청을 불러야 한다는 천년 왕도는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하늘의 명이 이토록 준엄하니 어쩌겠는가. 김회연은 탄식하고 눈물 흘리면서 경주 남쪽에 나가 천지에 제사 지냈다.
남교의 제사까지 거행했는데 이제 와서 여진족 연호 사용하는 것은 어불성설. 신서가 바치고 김회연이 수락한 연호는 경명(更命)이었다.
이는 천명이 천 년의 세월을 거쳐 다시 순환하여 갱신되었음을 잘 나타내었다.
북쪽의 뭔지도 모르겠는 도적 떼 놈들이나, 서쪽에서 왕을 막사발 찍어내듯 양산하는 김조순 잔당들은 도무지 이 위엄을 당할 수가 없다.
선비들은 다투어 역사적 공론을 내놓았다.
“북방의 천민 떼거지와 서쪽의 망조(亡朝) 간신들은 모두 근본이 없으니 한가지로 패망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이번에야말로 다시 태어난 계림이 어찌 천 년 전의 통쾌한 앙갚음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 년의 역사는 그 자체로 명분. 하늘이 가장 긴 수명을 허락한 신라 외에 대체 어느 나라가 이 땅에서 진정한 하늘의 적자를 주장하겠는가?
즉위의 일등 공신으로서 태대각간(太大角干) 자리 받은 신서는 기세가 올랐다.
그는 이쯤에서 사방의 만국과 아홉 오랑캐에게 칙서를 내려 건국을 선포해야 한다 역설했다.
허나 김회연은 그것만은 진짜로 거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를 이공이나 이품 수준과 같이 보면 곤란하다.
김회연은 필요에 따라 보위에 오른 것이지 황제 하고 싶어서 오른 게 아니다. 외국에 불필요하고 부정적인 이목을 끌 필요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김회연은 북쪽에서 정시준이 ‘고려’라는 이름을 쓴 것에 주의했다.
‘왕씨의 고려가 아니야. 고씨의 고려다. 정시준이 내게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다. 당장 남진할 뜻이 없고, 북쪽을 지키겠다는 소리. 아무리 비적 떼로 운 좋게 북방을 거머쥐었다 해도 안쪽은 혼란스러울 테니 그야 당연하겠지.’
김회연은 그렇게 정시준을 고종급의 능란한 외교군주로 만드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자신도 무리한 북진으로 정시준과 굳이 충돌하기보다는 더 취약한 호남을 획득하고 내실을 다지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예부터 군주가 붕어하는 등 나라의 큰일이 있으면 조공도 막았다. 교린하여 이웃 나라를 어루만지는 것도 중대한 일이나, 우선은 집안이 다스려져야 한다. 북쪽의 비적과 서쪽의 역적을 모두 평정한 연후에야 경이 말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라의 용맹한 자제와 병사들을 뽑아 화랑(花郞)을 새로 만들자는 제안에는 김회연도 찬성했다.
기왕 새 나라를 세운 이상 기존 조선의 관군 체계를 재정립하여 확고하게 자기 통제하로 넣을 필요는 있었다.
다만 화랑이라고 하니까 과거 성호 이익이 지적했던 근심이 하나 따라오긴 하는데, 지금 경상도에까지 돌고 있는 북변의 음란한 소설 따위는 확고한 기풍으로 금해야 할 것이었다. 김회연 휘하의 관군 중에는 솔직히 미남도 별로 없다.
내친김에 삼도수군통제영의 이름도 청해진(淸海鎭)으로 바꾸었다. 갈 데가 딱히 없어 아직도 김회연의 수하에 머물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사 오재광은 ‘이거 지금 김회연이 나를 암살하겠다는 뜻인가?’ 하며 고뇌했지만 결국 장보고의 직임을 받아들였다.
대신라국(大新羅國)의 백관은 계림(鷄林)의 전통을 충실히 본받아 닭의 꼬리깃을 두건에 꽂고 황제에게 하례했다.
옛날 김조순이 쏘아올린 작은 닭다리는, 이 동남에서 화려하게 닭으로 부활하여 고고성을 터뜨렸다.
***
김희순과 김좌근, 그리고 새 조선 국왕 이경춘은 나름대로 정상인이었다. 최소한 이 미쳐버린 시대에서는 정상인으로 보였다.
그래서 북쪽에서는 고려 인민공화국이 깃발을 올리고 동쪽에서는 대신라국이 북을 치는 이 사세에서 심각한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도 백제를 선포한다거나, 견훤과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거나 하는 광태에 같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전신에 똥칠한 놈이 같이 씨름하자고 덤비면 도망치는 게 정상이지, 질 수 없다고 맞대거리하다가는 똑같은 놈이 될 뿐이다.
그래서 호남의 무력은 여전히 조선 관군이었고, 호국도원수 김좌근도 관군을 이끌고 정상적인 관군의 업무를 수행하러 나왔다.
지리산으로 숨어든 반역자의 토벌이 그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상인에게는 좀 힘겨운 임무였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최대 면적의 육상 국립공원이다.
험하기도 험하지만, 토벌군의 입장에서는 그 광대함이 더 난관이었다.
그 때문에 존귀한 호국도원수 김좌근은 벌써 하루 종일 산을 타야 했다.
내공심법의 묘리를 활용하여 짜증과 피로를 잘 제어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는 못 갔다.
잿더미 약간과 지저분한 잡동사니들만 흩어져 있는 초막 자리를 본 순간 김좌근은 끝내 분노를 터뜨렸다.
아무리 절륜한 무공을 닦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제 열일곱 살이다.
“여기에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초관 손태영은 나이 어린 소년이 자기를 마구 하대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았다.
조선은 말할 것도 없이 현대보다 장유의 서열 구분이 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신분일 때 얘기다. 예외가 되는 것은 초고령자 정도다.
호국도원수 겸 영중추부사 김좌근은 나이를 초월하여 손태영보다 높은 사람이다.
손태영도 그러한 관점에 그다지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김좌근이 박기풍에 비해 모시기 까다로운 상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공손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벌써 달아난 것 같소이다. 도원수 대감.”
아무런 정보값이 없는 뻔한 소리에 김좌근은 더 광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 같지도 않은 왕에 조정 같지도 않은 조정 받들고 있는 관군은 모두 그런 김좌근을 모른 척했다.
그 모습에 의욕이라고는 개미 뒷다리만큼도 없었다.
조령에서 패배하고 김희순에게 흡수되는 과정에서 고향 갈 사람은 다 갔다.
물론 김희순과 김좌근은 보내주고 싶지 않았지만, 조선군을 현실계에 붙잡는 일은 반물질을 가속기에서 유지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지금 여기 있는 자들은 손태영처럼 홀로 난세에 떨어지면 목숨이 위험한 간부급이거나 딱히 갈 데가 없는 자들이다.
김좌근은 그들에게서 없는 쓸모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흩어져서 찾아라! 한 놈이라도 잡아서 돌아가야 한다! 이 천것들이 개골창의 쥐새끼처럼 또 밤에 슬금슬금 기어 나와 현청이며 논밭에 불을 지르기 전에 소굴을 알아내어 소탕한다!”
김좌근은 마지못해 주춤주춤 나아가는 관군을 보고 이를 갈았다.
***
지금의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난관 같은 것이 아니다.
조선군은 자기가 산에 올라앉아 적군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많이 해 봤지만 그 반대는 경험이 별로 없다.
설사 조선 왕국 정부가 멀쩡했더라도 지리산에 작정하고 숨어든 반란군을 빠른 시일 내에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군은커녕 20세기 한국군조차 상당한 난항을 겪은 곳이 지리산이다.
조선군 입장에서 더욱 곤란한 것은, 워낙 이곳이 넓기 때문에 단순히 험지만 있는 게 아니라 청학동처럼 사람 살 만한 곳도 꽤 많다는 사실이다.
이 오래된 명산의 산줄기에는 곳곳에 사찰이며 암자, 가끔은 화전민의 읍락이 들어서 있다.
정치국의 위임을 받은 이제초의 지도에 따라, 남조선혁명당 빨치산부대는 그러한 근거지를 주기적으로 순회했다.
개천군 사람으로서 지리산에는 와 본 적도 없는 이제초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느냐는 질문은 미륵사를 너무 깔보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전근대의 많은 유사 학문이 그렇듯 자연 현상을 우회적으로나마 설명해 보기 위한 체계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좌청룡 우백호니 배산임수니 하는 말은 현대어로 번역했을 때 ‘베란다 있는 정남향 역세권’과 비슷한 소리였단 얘기다.
풍수사가 지목하는 명당은 실제로도 대부분 생활에, 특히 농업에 적절한 곳이다. 그늘이라든가 바닥에 물차는 곳에는 무덤만 못 쓰는 게 아니라 집 짓고 살기도 난감하다.
그리고 풍수지리는 정감록 신앙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제초와 그 휘하 동지들은 모두 지맥을 읽는 데 정통했다. 지금 감옥에서 한 팔로 칼 뜯어내려 애쓰고 있는 가짜 풍수쟁이 홍경래와는 격이 달랐다.
그들이 ‘정 진인의 영험을 빌려’ 읽어낸 산세를 따라가면 반드시 인가가 있거나, 없더라도 잠시 초막 얽고 쉴 만한 곳이 있었다.
아무리 영호남이 고향인 빨치산부대일지언정 지리산 깊은 곳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보통 사람은 평생 지도 구경조차 못 하는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큰 도움이었다.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숨 고르며 일격을 준비하는 혁명군은 부지런히 보부상들을 파견하여 지원했다.
그것은 다만 무기나 물자만은 아니었다. 시준이 복지 혜택으로 받았던 생존의 기술 중에는 인류가 그동안 축적한 수렵의 지혜도 있다.
그리고 사람도 인류가 엄청나게 사냥해 온 대형 포유류의 한 종류에 속한다.
“으아아악!”
김좌근은 소름 끼치는 비명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별생각 없이 걷던 관군 병사 하나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은 채 아픔에 못 이겨 뒹굴고 있었다.
“궁수가 있었나! 찾아라! 숲에서 쏘았다면 멀리 있지 않을 거다!”
그러나 사수를 찾으려는 노력은 더 많은 희생을 불러왔다.
급히 내달리는 관군은 활 든 반역자를 찾는 대신 얇은 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삭정이에 교묘히 가려져 있던 줄이 풀리면서 장력에서 해방된 화살이 다시 날아왔다.
“더, 덫입니다! 이놈들, 이 주위에 덫을 깔아놓았소이다!”
“창으로 앞을 더듬으면서 나가라! 이 건방진 놈들, 짐승이나 걸리는 물건으로 요행수를 바라는구나!”
그렇게 외치는 김좌근에게 손태영이 달려와서 보고했다.
“도원수 대감. 화살에 맞은 병사들의 용태가 이상하오이다!”
“그럼 화살에 맞았는데 잘도 멀쩡하겠다! 당연하지! 일단 눕혀 두고 놈들을 쫓아!”
“그, 그런 게 아니라…….”
짜증스럽게 손태영을 노려보던 김좌근은 곧 손태영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화살의 고통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확실히 병사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손발이 굳어 바들바들 떨거나, 구토를 하다가 혀와 입이 굳어버리는 바람에 토해내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막히는 자도 있었다.
시준이 자바와 중국(그리고 곧 일본)에서 절찬리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조선은 약재의 대국이다.
그건 대고려인민공화국이건, 대신라국이건, 조선국(잔당)이건 마찬가지다.
김좌근 또한 과거 아버지를 독살하려 시도하는 누이를 잡아냈을 정도로 독에 일가견이 있다.
김좌근은 당장 그 증상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부자(附子, 투구꽃 뿌리)로구나! 이 간악한 놈들!”
========================
작가의 말
1. 신라 금관의 용도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습니다마는, 이게 머리에 쓰는 모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얼굴에 씌우는 마스크였다는 주장은 꽤 흥미롭죠. 무덤에서 발굴된 금관이 시신의 얼굴 부분에 걸쳐 있었고, 금관의 장식이 사자와의 소통을 위한 시베리아 샤먼의 토템 요소가 들어 있다는 등의 근거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념적인 지지까지는 받고 있지 못합니다. 문헌적 근거도 별달리 없거니와, '무거워서 도저히 머리에 쓸 수 없었다'는 얘기도 1. 금관의 두께는 생각보다 얇았고 2. 의례용이라면 그보다 훨씬 비상식적인 무게의 무기나 의복도 인간은 근성으로 태연히 썼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다소 설득력이 약한 편이죠.
2. 복두는 당나라 복식 하면 떠오르실 그 모자입니다. 계단처럼 생겼고 양쪽에 날개 같은 것이 달린 모양이죠. 단령도 당나라 때의 옷입니다. 둘 모두 형태가 조금씩 바뀌었을 뿐 조선 시대에도 계승되었습니다.
3. 작중 언급된 것처럼 청풍 김씨는 경주 김씨의 분파이며, 최후의 왕 경순왕의 후손입니다. 다만 장자 직계후손은 아니지요. 그래도 작중 조선에 할거하는 삼국 중 가장 혈통적 정당성이 있다 할 수 있겠군요.
4. 更은 '경'으로도, '갱'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새롭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의 발음으로는 '갑오경장', 뒤의 발음으로는 '갱신' 등의 용례가 있습니다.
5.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화랑을 미남으로 뽑고 화장을 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남색설을 주장했지만(왜 미남 얘기 하니 남색부터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별다른 역사적 근거는 없는 상황입니다.
현대에는 이쪽의 근거로서 화랑세기가 알려져 있는데... 한국과 핀란드의 초고대 대서사시를 그린 어떤 서적처럼 거의 근현대의 위서로 확정된 분위기죠. 다만 화랑세기라는 책 자체는 타 사서에 언급되는 실존 서적이고(내용은 실전됨), 위서라고 하는 것은 20세기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 입니다.
6. 장보고는 익히 아시는 대로 해상에서 강력한 세력을 키워 경주 중앙정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기존 신라 골품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주체가 문성왕인지, 귀족들인지는 애매모호하지만 결국 그는 중앙에 의해 암살됩니다.
7. 삼국 시대에는 두건에 새 깃털 장식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새 중에서도 닭을 숭상했죠. 알영 설화, 김알지 설화 등 여러 군데에서 관찰할 수 있고 아예 나라의 별칭도 계림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사람이 닭을 숭배하여 그 깃털로써 장식하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8. 조선 시대에는 (종법 질서상의 문제가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끼리 현대 한국처럼 한두 살 가지고 계급을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나이가 확실히 많은 사람에 대한 존경은 신분을 초월하여 존재했습니다. 초고령자는 국가에서 특별히 식량과 옷을 하사하고 천민은 면천, 양인은 벼슬을 주어 우대했지요.
9. 부자는 초오, 바곳이라고도 불리는 투구꽃으로서 독한 한약재로 알려져 있지요.(다만 부자는 한약재로 가공한 것이지 생풀 그 자체를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뿌리로 만드는 독은 투구꽃의 자생지라면 거의 어디나 고대부터 사냥, 살인 등에 활용되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투구꽃 독화살 또한 여러 수렵부족이 사용하던 지혜입니다. 약효도 금방 나타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