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53. 건국(4)
사흘 뒤, 중앙인민회의 전원회의는 막을 내렸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새롭게 시작되는 혁명 열의를 다졌다. 그간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던 주석도 폐막을 선언할 때는 조금 후련해 보였다.
곧이어 새 나라의 대강을 간략하게 알리는 천리마 봉화가 말 그대로 천리마처럼 내달렸다.
헌법이라고까지는 못 해도, 국호나 대강의 체제 등 이 새로운 ‘인민독재국’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스려질 것인지 만방에 선포하는 행사였다.
텔레그라프의 나무 팔이 삐걱삐걱 움직이며 그려내는 첫 마디는 물론 새 나라의 국호였다.
정약용은 처음으로 맛본 패배에 탄식했고, 김창시는 뭔가 속은 기분에 찜찜해했다.
그러나 박광유를 비롯한 송상 계열 남조선혁명당 사람들과 대부분의 양계인들은 기뻐했다.
“이 나라가 드디어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았소!”
“그것도 인민의 손으로 말이오!”
“그 말이 옳네. 이것은 혁명의 심장 평양을 존중하는 이름일 뿐 아니라 그간 피 많이 흘린 남조선혁명당도 헤아렸음이니 주석 동지의 바다와 같은 관대함이라 아니할 수 없지!”
시준은 의도적으로 국호 논의를 전원회의 마지막 순서로 배치해 놓았다.
거기에서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 박광유의 이름으로 급하게 제출된 제3의 국호는 주석 정시준의 전폭적 찬성 연설 아래 통과되었다.
그 비결은 간단히 말하면 포퓰리즘에 있다.
시준은 정약용의 주장에서 불리한 곳을 찔렀다.
일단 ‘민주주의’ 부분은 종묘의 잿더미 옆에서 도란도란 얘기 나눈 정약용과 푸셰 정도만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다.
게다가 ‘주의’라는 말은 현대에는 접미사 비슷한 것이지만 이때는 동사에 가깝다. 21세기 식으로 말하자면 ‘경제를 발전시키는 대한민국’ 같은 느낌이라 국호로는 부자연스러운 면이 분명히 있었다.
거기에 시준이 연설한 조선의 종언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유럽과 달리 새 나라를 개창하면 이름부터 바꿔 달던 게 동아시아의 전통이다.
반동에게서 탈환했다는 희만 선생의 변설은 멋지지만, 그러려면 호남의 김희순으로 하여금 조선이라는 이름을 포기하게끔 만들었어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는 못했다.
많은 대의원들은 밖에 나갔는데 자기랑 똑같은 옷 입은 사람을 발견한 21세기인과 비슷한 종류의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한 시준과 송상 연합은 – 대한민국은 그 시점에서 시준조차 포기했다 – 혁명정부를 이루는 대표적 세력들이 원하는 단어를 하나씩 집어넣었다.
상인 대표 김창시가 원하는 ‘인민’은 약속대로 들어가고, 정약용을 은근히 지지하는 사대부파를 위해 ‘공화국’까지도 남겨두었다.
정감록파는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계룡산에 원정 가 있는 데다 그것까지 헤아려 주기에는 시준의 사정도 다급했다. ‘승리’는 어디 넣기도 애매해서 앞에 대(大)자 빠트리지 않는 정도에서 끝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상과 남조선혁명당의 고생을 참작한다는 명분으로 정해진 국명이 결정적이었다.
“고려는 고씨와 왕씨를 합해 천이백 년을 이어 온 이 북방의 이름. 평양을 심장으로 하는 혁명에 이보다 더 적합한 명자는 없소!”
시준으로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립적 이름이 없을까 하다가 현대에서도 제안된 적 있는 이름을 떠올리고, 고려에 미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송상에게 곧바로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송상이 왕씨 왕조를 그리워한다는 말은 아니다. 북한이 이씨 왕조가 좋아서 나라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건 아니니까.
다만 개성을 도읍 삼은 고려와 평양을 도읍 삼은 다른 고려(고구려)를 모두 아우르는 이름으로써 혁명의 대통합을 호소하는 박광유의 발의는 꽤 잘 먹혔다(계룡산 근처에 백제 도읍이 있었다며 숟가락 얹으려던 정감록파 일부 인사는 반동 김좌근과의 친밀 의혹을 받고 퇴장했다).
남조선혁명당은 혁명 계파 중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낸 세력이다.
공을 다투는 꼴이다 보니 누구도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대의원은 남조선혁명당을 사실상 대표하는 송상에게 정당한 보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시준의 작전은 거의 처음으로 훌륭하게 성공했다.
비록 지금은 우당탕탕 급조되었으나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을 이름, 대고려인민공화국(大高麗人民共和國)이 사방에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옛 조선 땅의 일각을 각자 차지하고 있는 군웅들은 – 거기에 이씨는 없었다 – 이 명칭에 담긴 의미를 각자 나름대로 추론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
혁명력(革命曆) 3년(1813년) 3월 10일, 이제 조선이 아닌 나라의 주석 시준은 정치국 회의에 임했다.
국내에서는 혁명막부, 국외에서는 조선 혁명정부라는 임시 통칭으로 불리던 중앙인민회의의 집행부는 이제 정식으로 ‘대고려인민공화국 국무당(國務堂)’의 이름을 달았다.
‘정부’가 아닌 이유는 조선 시대에 정부란 곧 삼정승이 모인 의정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 왕조의 유산은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영길리 등 서양국에서 내각 노릇을 한다는 cabinet의 번역에 대해 희만 선생이 또 언어학적 고증을 펼쳤다.
이는 불랑국 말로 작은 방(cabine)에서 유래한 말이므로, 국사를[國務] 논의하는 집[堂]이라는 이름이 꽤 적합해 보였다.
그 정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여전히 각 부서의 간부들이 모인 위원회인 정치국이었다.
국무당 정치국이라는 말이 약간 길어서 사람들은 그냥 기존대로 정치국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당(堂) 정치국이라고 불렀다.
시준은 이번에도 스승의 체면을 꺾을 수는 없어 일부러 외면했다. 어차피 비공식적 통칭이니까.
나라 세웠다는 소식에 바람같이 돌아온 총괄서결부장(總括書訣部長) 정약전의 환장할 서두에도 마찬가지였다.
국무당 휘하 여러 부서는 기존의 국(局)에서 조선 사람들이 아는 최고위 부서 분류인 부(部)로 승격되었다.
조선 사람들이었던 고려 인민들에겐 이 자리가 육조 판서에 대응하는 지위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약전은 혁명의 열의에 한층 넘쳐 있었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보낼 치중의 사무는 대강 얼개를 잡았소이다. 공화국 혁명군은 금번 중앙인민회의 전원회의에서 새롭게 승인된 당 정치국의 결정을 높이 받들고 혁명의 신심 드높이 남진할 준비에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어딘가에서 들어 본 어투였다. 시준의 머릿속에 분홍색 한복을 즐겨 입는 패기 넘치는 모습의 장년 여성이 떠올랐다.
시준은 근거 없는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얘네 혹시 다 알면서 트루먼 쇼 하며 나 놀리는 거 아냐?’
하지만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게 안 좋을 리는 없다. 시준은 한숨을 쉬며 보고서를 팔랑거렸다.
“그러나 호남과 영남의 남조선혁명당이 너무 큰 타격을 입었소. 우선은 동지들을 도울 방안을 찾아봐야 합니다.”
호남의 경우 김맹억의 대패로 혁명당의 기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김좌근은 아예 은밀히 충청도에까지 사람을 보내 근왕의 대의를 설유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려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영남은 사정이 더 안 좋았다.
어쨌든 대패를 했다는 말은 큰 전투라도 해 봤다는 뜻인데, 영남은 그것조차 없었다. 김회연이 워낙 땅을 잘 다져놨기 때문이다.
남조선혁명당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은 간첩 활동 정도다. 군사 봉기나 요인 암살 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영남 남조선혁명당이 전해 준 소식에 따르면 경주, 김해 등 유서 깊은 고을에서 갑자기 괴이한 얘기가 돌고 있었다.
‘옛 신라의 유민과 삼왕가(三王家, 여기서는 박, 석, 김씨를 말한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소리가 그것이었다.
선전선동에 조예가 깊은 시준은 거기까지만 들어도 짐작할 만했다.
지금 지구에 한 천 년 단위의 복고풍이 유행인 모양이었다. 유럽에선 교황이 근대제국의 군주 나폴레옹을 파문으로 어째 보려다 실패하더니 여기도 질 수 없다는 듯했다.
선전선동부장 조제프 푸셰도 마찬가지로 김회연의 의도를 짐작했다. 이제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꽤 깊이 이해한 푸셰는 인상을 찌푸렸다.
“김회연은 아예 신왕조를 세우려 하는 모양이외다. 우리가 혁명으로 나아가는 동안 그들은 오히려 천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고 있구려. 그야말로 반동의 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조선 왕국에서 이전의 군왕들을 위해 지었던 여덟 개의 전 중 혁명군의 세력 하에 있는 전은 벌써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고려의 4개가 그것이다. 고려를 국호로 정했어도 그게 옛 고구려나 고려 왕국을 계승한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상도에 있는 나머지 4개 전, 그러니까 신라 삼왕가와 가야의 전은 남아 있다.
김회연은 그것을 기반으로 신라의 왕통 여론을 조심스럽게 만듦과 동시에, 정시준이 제사를 끊어 이 나라의 정신적 전통을 말살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평으로는 멀쩡하고 유능한 관료였던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회연이 정녕 이 정도의 또라이가 되어 있다면 강원도 산맥으로 화랑부대 대진군의 호령을 발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시준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혁명군은 원주에 입성했겠지요?”
기가 막히게도 이때 강원도 관찰사를 하고 있던 조홍진은(의주 인민위원장 조흥진과는 다른 사람이지만 풍양 조문의 동렬 형제이긴 하다) 국가 선포에 딱 맞추어 항복 서신을 보내 왔다.
그리고 그 서신을 들고 온 자는 조홍진 자신이었다.
옛날 시준이 막 사업 시작할 때 광산 카르텔 형성에도 협조했고, 정약용이 강철군주의 소환을 받을 때 잘해 준 것도 있고 해서 시준은 그를 직접 만났다.
조홍진은 일찍 달려와 합류하지 않은 죄를 청하노라고 말했다. 조선 사람다운 수사인 셈이지만, 역시 조선 사람인 시준은 그 뒤의 이면도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자식, 김회연이 무서워서 튀었군!’
그 생각대로였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시준의 처지. 시준은 좋은 말로 조홍진을 위로하고 평양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 다음, 사제 백윤구가 전쟁 기간 동안 함경도에서 죽자 사자 끌어모은 혁명군 7영대를 소환했다.
신규 7영대는 진군이라기보다 몰려간다고 해야 할 꼴로 급하게 안변부(安邊府)를 넘어 강원도에 진입했다.
또한 경기도 광주부에서 사세를 보고 있던 홍총각 휘하 혁명군 2영대에게도 그대로 동진해 원주로 들어가라는 영이 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서울에서 사세를 조율하던 정약전은 그 군령이 실행되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주석 동지. 당분간 경상도에서 대군이 북상할 낌새는 없습니다.”
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혁명군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희생이 클 것이오. 다들 아시겠지만 영남과 호남의 호구와 곡식은 나머지 여섯 개 도 전부를 합친 것만큼이라 말해도 과히 지나치지는 않소. 게다가 충청도는 인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말이오. 차근차근 나아가야 하오이다.”
“그렇다면 역시 호남을 먼저 치고, 그다음이 영남이겠군요.”
김좌근이 노력은 하고 있으나 호남은 영남보다 여러모로 더 취약한 상태다.
김회연처럼 오래 기반을 다지지도 못했고, 흑산도에는 아직도 영국 해군이 도사리고 있는 데다 시준의 ‘영길리인 부대’에게도 꽤 익숙한 동네다. 오랫동안 해적질을 했으니까.
흑산도의 영국 해군이 생각난 시준은 아쉬운 김에 말해 보았다.
“그리해야 하겠지요. 흑산도에 주둔하는 영길리 해군이 전라도를 들이친다면 열흘도 안 되어 감영이 끝장나겠지만…….”
그런 일은 (현재 실시간으로 해체되고 있는) 대프랑스 제국의 이름으로 조제프 푸셰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그거야말로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올시다.”
시준은 한숨을 쉬었다. 푸셰의 의도야 뻔하다.
허나 틀린 말도 아니라는 사실이 시준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영국인은 프랑스인에게만 무서운 게 아니다. 인류 전체에게 무서운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흑산도에는 새나가지 않게 하시오. 궁여지책으로 먼저 영호남 전부에 걸쳐 빨치산의 전술을 써야 하겠소.”
시준은 침묵하는 위원들을 둘러보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하마터면 여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들 뻔한 그의 동료들은 빨치산이라고 해 주면 대번에 자지러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호응이 시원치 않았다.
빨치산을 ‘빨치山’ 정도로 생각하여 – 하긴 주로 산에서 활동하긴 한다 – 조선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준에 의해 일어난 참사였다.
정치국 위원 모두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는 동안, 절대 조선에 영국군을 끌어들여선 안 되는 푸셰가 다급하게 지식을 끼워 맞춰 해설해 주었다.
“파르티잔(partisan, 군벌)을 말씀하시는 것 같소. 이베리아의 ‘작은 전쟁[guerrilla]’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고을마다 군벌을 이루어 프랑스 육군에 항거했지. 정말 지긋지긋한 기억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전략이기도 하오.”
시준도 그때서야 그게 조선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 너무 흥분해서 프랑스어가 나왔네요’라는 태도를 강철같이 유지했다. 시준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호남은 바다로, 영남은 산으로 동지들을 보내어 급한 물건부터 전하되, 우선은 산으로 숨어들라 지도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동지들의 귀한 목숨은 우선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소.”
푸셰가 다시 한번 다급하게 덧붙였다.
“선전선동부장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매우 적합한 판단으로 사료되오이다. 파르티잔은 본래 강인하고 끈질긴 정예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임무. 그 칭호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동지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나머지 위원들도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곧 영호남의 잔존 혁명당을 그 사이의 산지에 모아 창설할 ‘빨치산부대’의 대강이 만들어졌다.
아직 소백산맥이란 이름은 없는 그 너른 산지와, 옛날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에 영호남 통합 남조선혁명당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
계룡산에 깃발 꽂은 채 거창한 치성 기도를 드리고 있던 이제초의 선봉대는 정치국의 연락을 받고 행동을 개시했다.
혁명군 중 강건한 보부상들이 소백산을 지나 나아갔다. 그들은 부피가 적고 곡식으로 빨리 바꿀 수 있는 평안도 담배 등을 군자금으로 전달했다.
다만 정치국에서는 현장 판단을 믿고 ‘지리산 일대의 산지 중 적당한 곳’으로만 지정했기 때문에, 중간에 있던 이제초에 의해 약간의 각색이 들어가기는 했다.
“지리산에는 옛적 최치원(崔致遠)이 푸른 학[靑鶴]을 타고 노닐었다던 청학동(靑鶴洞)이 있다. 정 진인께서는 나이 3백 살이라고 전해지나, 그분은 현세에 인민을 구원하기 위해 강림한 미륵의 현신으로서 과거의 도통한 선인들이 환생한 몸이니 천 년 전의 최치원 또한 어찌 그 윤회의 굴레 안에 들어 있지 않겠는가?
정치국에서 지리산을 지시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청학동은 혁명의 단전 계룡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양기가 모여 혁명으로써 터져 나올 만한 곳인바, 그곳에 터 잡음이 장차 크게 이로울 것이다.”
그 헛소리에서 옳은 말은 딱 하나, 시준이 환생했다는 것밖에 없었다. 최치원은 아니지만.
이제초의 혁명군과 문순득의 혁명해군은, 중간에 사망자도 적지 않게 나오긴 했지만 결국 주석의 깃발 또한 무사히 전달했다.
붉은 바탕에 검은색 궁서체로 ‘혁명의 빨치산부대’라고 적힌 그 깃발은 조제프 푸셰의 장담대로 효과가 있었다.
호남 혁명당의 영수 김맹억과, 영남 혁명당의 최후 지휘관인 경주 사람 최옥(崔鋈, 최제우의 부친)는 천신만고 끝에 지리산 동쪽 청학동에 모여 두 깃발을 교차시켜 놓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초의 헛소리는 한 가지 점에서 결과적으로 옳았다. 청학동은 조선 시대에도 꽤 인기 있는 유람지였던지라 길 아는 사람도 많고 모이기도 쉬웠다는 점이다.
김맹억과 최옥 두 사람은 서로의 손바닥을 칼로 그어 피를 내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힘 있게 마주 쥐었다.
시준이 봤다면 애써 건진 목숨 패혈증으로 버릴 거냐며 기절했겠지만 그 정도를 무서워하면 혁명 같은 짓 못 한다. 두 사람은 불타는 눈으로 맹세했다.
“우리는 어떤 간난을 겪더라도 결코 혁명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두 사람과 그들을 따르는 지친 양남(兩南) 혁명당원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 이유는 혁명이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왕국도 다른 나라처럼 숱한 반란을 겪었다. 시준의 사례는 크게 성공했다는 것만 빼면 다른 반란에 비해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반란이란 항상 열세에서 시작하게 마련이라 여유가 부족하다. 약간 궁지에 몰렸다 싶으면 어제의 동료도 이용하고 버리거나 동료가 그 전에 배신하는 것이 일상이다.
이제 전략적 의미가 별로 없는 양남의 남조선혁명당도 그렇게 폐기 처분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중앙인민회의와 고려인민공화국 국무당, 그리고 주석 정시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간자들의 염탐로가 들킬 위험까지 무릅쓰고 실용적으로는 별 쓸 데도 없는 깃발과 위로를 전해 주었다.
합리적으로 보자면 이보다 멍청한 짓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바보짓도 장대하게 하면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이다.
지금까지 이런 반란은 없었다. 바로 그렇기에 이것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동지라면 설사 땅끝에 있어도 외면하지 않는다는 혁명당의 구호는 제주도와 지리산에서 공히 증명되었다.
정치국의 깃발 말고도 남조선혁명당에는 붉은 깃발이 당연히 많았다.
중상을 입은 채 여기까지 도망치다 끝내 목숨이 다한 동지들의 시신이 그 깃발에 감싸여 정중히 모셔졌다.
누가 처음이랄 것도 없이 흐느낌 섞인 목청이 터져 나왔다.
“인민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정 진인이 천지조화를 발휘하여 거대한 성곽을 무너뜨렸다고 전해지는 그 노래였다.
“온기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
노래는 점점 더 커졌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곳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 테면 가라! 우리는 붉은기를 지키리라!”
지리산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관군에 대한 걱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봄이 되어 어슬렁어슬렁 먹을 것 찾아 내려왔다가, 자기 영토의 낯선 냄새에 분개하여 코를 치켜들고 걷는 지리산 반달곰 한 마리의 귀에도 그 함성이 꽂혔다.
짐승들은 현명하다. 열세일 때는 물론이고, 우세일지라도 조금이나마 자기가 다칠 것 같으면 바로 물러난다.
그래서 짐승은 혁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반달곰은 그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곰은 그대로 방향을 바꿔 동쪽 산줄기 아래로 터덜터덜 걸었다. 저놈들하고는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젊은 반달곰의 바람이 평온이라면, 굴에서 조금만 더 자고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 반달곰이 향하는 동쪽, 그러니까 경상도에서도 지금 이곳에 못지않을 만큼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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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21세기 저쪽 공화국의 '당 정치국'은 당(黨, Party) 정치국이고, 여기의 당 정치국은 당(堂, house) 정치국입니다.
2. 현대적인 유격전 부대 파르티잔(빨치산)은 어원이 러시아어입니다만, 그 전의 '군벌'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은 프랑스어입니다. '게릴라'도 이 시대에는 최신 신조어에 속하죠.
3. 청학동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치원 설을 채택했습니다. 일단 조선 시대에는 현재의 청학동과 비슷한 위치에(현재의 청학동마을은 한국전쟁 이후에 형성) 산수 구경하는 유람지가 꽤 유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학 상인' 이라는 도인의 전설도 있는데.. 이쪽은 지리산이 아니라 서울 남산 청학동입니다.
4. 덕유산은 대낮에도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던 곳이고, 지리산도 실제 역사의 빨치산이 활동을 했을 정도로 험지의 이점이 있습니다. 바다로 나가는 게 아닌 이상, 촘촘한 사회 감시망이 있는 대한민국에서 산 채로 '완전 실종'되려면 지리산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농담도 있었죠. 물론 스마트폰이 있는 요즘은 그렇게까지 위험한 곳은 아닙니다. 반달곰 같은 건 논외로 하더라도..
5. 곰 얘기 하니까 말인데, 곰은 사람이 자기 사는 산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하지요. 사람은 이것저것 화학적인 것을 많이 걸치고 발랐다 보니 동물 기준에서 꽤나 냄새가 심한 축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