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75화 (175/284)

177화

53. 건국(3)

현실적으로는 임상옥의 말이 맞다.

야드파운드법에 각종 진법(進法)이 기괴하게 뒤섞여 혼돈스럽다 하지만, 그거야 척관법도 마찬가지다.

둘 모두 자나 저울이 안 맞으면 정정당당하게 주먹으로 승부해서 이긴 놈이 잰 게 맞는 시대의 단위라서 그렇다.

그러나 혁명은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다. 조제프 푸셰는 거품을 물었다.

“당장 집어쳐! 당장 집어치우란 말이야! 이 완벽한 자연의 척도, 지구 자오선의 1천만분의 1! 이 창세 이래 절대 불변할 기준을 놔두고 무엇이 어쩌고 어째! 그 사특하기 짝이 없는 척도를 어떻게 혁명의 심장에서 입에 담을 수 있는가! 그런 누더기 같은 단위는 지저분한 영국 수병 놈들이 제 똥구멍에 붓는 럼주 다는 데에나 쓰라고 해! 끄어어어…….”

푸셰는 당장 대동강 냉수를 10분의 1미터짜리 입방체에 담아, 이 자리에서 1그라브(킬로그램)를 정의하여 미터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다며 날뛰다가 –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걸 네놈에게 덮어씌워 주겠다고 춤을 추다가 – 분노와 피로 때문에 졸도해 버렸다.

양귀자의 광태를 한동안 침묵하며 지켜보던 임상옥은 시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석 동지의 의중은 어떠하신지요. 복공은 아무래도 서양국 사람이라, 그가 말하는 불랑국의 척관은 조선 사람들에게 낯설 것이오이다. 우리에게는 또 우리식 혁명이 걸맞은 것 아니겠소이까?”

그 말도 아주 틀리지는 않다. 21세기 지구인이 합의한 1미터는 빛이 진공 속에서 299,792,458분의 1초 동안 나아간 거리. 숫자가 척 봐도 더럽기 짝이 없다.

그러니 딱 3억 분의 1초로 재정의하면 어떤가? 미래는 자명하다. 엄청난 반발과 혼란을 내리누르고 성공해 보았자 전 지구의 산업은 단 24시간 내로 오만가지 축차 사고를 터뜨리며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산업은 규모, 속도, 정교함 모두 21세기 지구에 비하면 0과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시준은 깍지를 낀 채 팔꿈치를 서안에 괴었다. 그러고는 손에 입술을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미터법.”

임상옥이 다급하게 호소했다.

“아니, 동지. 재고해 주십시오. 당장에 영길리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울과 길이 때문에 싸움 나는 것만 줄여도 삼화부의 무역은…….”

“미터법.”

평준위원회 위원장 김창시도 옆에서 거들었다.

“애초에 그 미터라는 말도 인민 중 아무도 들어보지 못하였으며, 평준위원회가 여태 만든 서류들도 전부 물거품이 되오이다. 이 문제만은 전원회의에서 논의를 하는 게……”

“미터법.”

김창시는 임상옥의 어깨를 툭 치고 눈을 찡긋했다(그 동작은 또 서양인들에게 배워온 모양이었다). 주석이 피곤해서 심기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 다음에 얘기하자는 뜻은 임상옥도 알아들었다.

임상옥은 한숨을 쉬고 김창시와 함께 주석당을 나섰다.

주석당이 조용해지자 시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기절했거나 잠든 그 광경은 시준에게도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시준은 기랑에게 말했다.

“고마워. 가져온 건 거기 두고 가. 난 좀 이따가 일어날 테니…….”

기랑이 약탕기를 들고 왔을 무렵에는 이미 시준이 잠들어 있었다.

시준은 약탕기가 책상에 얹히는 묵직한 소리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기랑은 시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시대에서는 얼굴만 척 보고도 신분을 알아야 한다.

못 알아본 아랫것은 물론 호된 꼴을 당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윗분도 체면이 깎인다.

따라서 높으신 분에게도 나름대로 의무가 있다. 항상 상전의 영압을 뿜어내어 주위에서 쉽게 알아모실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그렇다 보니 전근대 사람들은 그냥 겉보기로도 신분이 드러나도록 많은 액세서리를 발달시켰다. 갓은 물론 옥동곳이나 관자, 상투 싸매는 망건의 품질 같은 것도 모두 신분을 가르는 척도다.

그리고 그것은 반혁명적이었다.

시준은 머리칼을 자르느니 모가지를 자르겠다고 드러눕는 사람들 나올까 봐 단발령 같은 것을 내리지 않았지만, 가장 혁명에 가깝다 자부하는 평안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상투를 잘라버린 사람이 많았다(다만 머리를 자주 감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서 혁명모자는 여전히 잘 쓰고 다녔다).

시준도 그에 편승해 은근슬쩍 현대적 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머리칼은 시준의 지친 옆얼굴을 따라 몇 가닥 흘러내려 있었다.

현대인이라면 드라마에서 곤히 잠든 채 베개에 얼굴 박고 있는 남주인공에게 많이 본 구도다.

기랑은 드라마를 본 적이 없지만, 대신 어쩌다 얻어 본 시준의 소설 표지를 떠올렸다. 시준의 본판이 좀 잘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이 보기에 깔끔하다고 해 줄 수는 없는 상태다.

대충 현대인이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모양새라고 생각하면 얼추 인상이 비슷하다.

현대에 미인의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로 통하는 긴 생머리도 조선 사람에게는 매력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없다.

십중팔구는 부모상을 당한 것도 아닌데 왜 재수 없게 산발을 하고 나왔느냐며 낯을 찌푸릴 것이다.

그것을 보던 기랑의 시선이 책상 뒤의 깃대에 가 닿았다.

혁명 열사를 잊지 않는다는 표시로써 시준이 들고 다니며 지휘봉, 지팡이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던 김유근의 깃대였다.

그리고 기랑의 머릿속에는 그 깃대 전(前) 주인의 유언이 메아리쳤다.

‘서북의 풍속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면 사랑하기를 그만두느냐?’

기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졸도한 조제프 푸셰를 포함해 정치국의 주요 인원들은 다 어딘가 나자빠진 채 절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기랑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에게 소스라쳤다. 그녀는 딱히 무슨 큰일 날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랑은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삯 받은 만큼 일은 해야 하니까…….’

기랑의 직무는 주석당에서 주석과 손님들의 사소한 편의를 책임지는 급양과장이다.

거기에는 주석의 의관 정제 등 몸단장도 당연히 들어갈 것이다.

기랑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기랑의 떨리는 손끝이 시준의 볼을 스쳤다. 시준의 머리칼이 기랑의 손에 의해 제자리를 찾아갔다.

***

잠시 후, 시준은 왠지 따뜻한 것 같은 볼을 어루만지며 일어났다.

기랑이 두고 간 듯한 커피를 한 잔 들이켠 시준은 동료들을 깨워 나머지 안건을 진행했다(조제프 푸셰는 입을 벌리고 식은 커피를 들이부었더니 일어났다).

순조롭다고는 할 수 없으나 빠르게는 이루어진 우당탕탕 회의 끝에, 결국 어떻게든 3월 3일에 중앙인민회의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거기에서 건국을 선포할 준비가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정치국 위원들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합의했다는 의미다. 어차피 당장 모레라 뭘 더 할 수도 없다.

시준은 나머지 시간을 국호 문제에 집중했다.

***

중앙인민회의 대의원의 전원 소집은 총선거 이후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평안 감영의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확장한 회의장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대의원은 물론, 막부의 간부들과 여러 단체의 대표자까지 모인 평양은 총체적 혼돈이었다.

평양과 계룡산의 이중 수도 논의가 벌써 퍼졌는지, 몇몇 고을에서는 ‘혁명의 눈 의주’ ‘혁명의 간(肝) 곡산’ 등의 깃발을 달고 나타났다.

건국 이전에 건국 ‘행사’만 해도 산적한 과제가 끝이 없었지만, 대표적인 것은 보급 문제였다. 시준은 사람이 왜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을 가졌다.

거의 원정군을 구성하는 만큼의 노력 끝에 다들 감자 하나씩은 우물우물 씹을 수 있게 되었다. 시준은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런 사람들 앞에 서서 보고했다.

“올해 정월, 인민의 대표 중앙인민회의의 승인 아래 혁명의 열의에 차 넘쳐 출진한 혁명군의 사업이 일차 완수되었음을 인민 앞에 고하게 되어 본 위원장은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시준은 서울과 계룡산 함락을 비롯한 여러 전과를 간략히 보고했다.

이미 여기 모인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감격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화답해 주었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함성 때문에 건물이 흔들린다는 착각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들을 진정시킨 시준의 목소리가 회의장 곳곳에 설치된 목재 전성관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호남에는 반동의 씨앗이 똬리를 틀었고, 강원도 인민들은 영남 김회연 반동의 크나큰 위협 앞에 떨고 있습니다.

지금 남쪽의 반동 무리는 아직도 그 발아래 인민을 짓밟으며, 그 무슨 ‘종묘사직’이니 ‘왕통’이니 하며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허언을 지껄이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의 키보드 배틀 솜씨는 세계 최고다. 하기야 원래 그러라고 만든 조직이기는 하다.

그것을 참조하여 평안도식으로 맞춰 온 시준의 연설은 과연 사람들을 진감시켰다.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반동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종묘사직 때려 부순 일에 대해 은근슬쩍 아무도 항의할 수 없게 만든 시준은 의도된 차분함으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혁명은 부닥친 난국을 견뎌내고 생명을 보존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길입니다. 가둔 물이 썩는 길입니다. 당장은 삼한 땅을 모두 인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여야 할 것이나, 앞으로도 물은 영구히 흐를 것입니다.

물길은 계속해서 구불구불 모습을 바꾸며, 사람이 처음 나타난 뒤로 없었던 새 시대의 변화는 거대한 파도로써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표범이 모습을 바꾸듯[豹變] 계속하여 도전에 물결에 응전하는 것만이 혁명을 완수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랑스러운 혁명 동지들. 우리는 지금껏 그러한 응전을 훌륭하게 해내었습니다. 그러나 대동강은 천 년을 흘러 그치지 않고, 계룡산은 만 년을 버티어 닳지 않는 법. 우리는 앞으로 천만 년을 장구히 이어질 혁명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저 반동의 시조들이 항상 제 아들이나 손자를 위해 교묘히 말하던 왕조나 종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다스리던 저 고려가 어찌 되었으며, 또 한 사람이 다스리던 저 조선은 어찌 되었습니까? 많은 인민의 뜻을 업신여기고 제 집안의 뜻대로만 전단하는 나라는 결국 그런 꼴이 나는 것입니다.”

시준은 그 말로써 또 슬쩍 대한민국을 위한 포석을 깔았다. 조선이란 나라는 반동의 나라인 것이며, 그들이 정복해야 할 땅은 연설처럼 ‘삼한 땅’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교묘한 암시보다는 대동강과 계룡산을 언급함으로써 두 전위의 도시를 명시한 주석의 결단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것도 모른 채 시준은 열심히 연설했다.

“바로 인민의 국가! 인민의 뜻을 기둥과 서까래 삼아 지은 집! 오직 그것으로써만 무너지지 않는 튼튼함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오로지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나라는 영구히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본 위원장은 중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에도 의탁하지 않고 오로지 생지당권을 가진 우리 인민들에 의해서만 주재되는 나라, 바로 인민독재국(人民獨裁國)을 세워야 한다고 엄숙히 말씀 올립니다!”

국제 혁명론의 영향 때문에 혁명이 국가주의와 친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지만, 그건 사회주의 혁명 얘기고 칼 마르크스 이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식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에 맞서는 시민들은 그들의 주체로서 ‘국가’와 ‘애국’을 중점적으로 내세웠다.

그러므로 총선거 후 2년이 지난 지금의 국가 설립은 오히려 약간 늦은 감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늦은 만큼 극적이라는 점에서 위안을 찾을 수는 있을 터였다.

시준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 조선이라는 이름은, 그 사백 년 반동의 역사에 끝을 내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 인민의 손으로!”

시준으로서는 드물게 격정적인 연설이었다.

그러나 지금 광란을 일으키고 있는 대의원과 군중들에 비하면 시준은 비정상적으로 침착하게까지 보였다.

“국가 만세! 혁명 만세!”

“인민독재 만세!”

“오오, 이것은 바로 정 진인의 천년 왕도가 아닐 수 없소이다!”

뭔가 이상한 말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시준은 듣지 못하고 내려왔다.

이다음에는 막부 – 이 칭호도 곧 폐지될 것이다 – 정치국과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올린 국호며 여러 가지 제도가 논의될 차례다.

상임위원회에서 두 가지 안을 올리기는 하였지만, 아마 입 가진 자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의견을 내어놓을 것이다.

허나 이 정도로 ‘조선’이란 이름의 종언을 확실하게 선포했으니, 시준의 반격은 절반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시준은 곧바로 다음 작전에 들어갔다.

***

사실 중앙인민회의 전원회의에 상정된 여러 제도를 가결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국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위계였다.

중앙인민회의의 기반이 되는 상인들은 통일된 단위계는 환영했지만 그것이 원래 쓰던 것보다 크게 어긋난 단위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정시준의 모두연설이 끝나고 대의원들이 분과별로 흩어진 뒤, 그중 하나인 평준위원회에서는 천인공노할 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 새로운 혁명척(革命尺) 제정은 좋은 일이지만…… 대관절 미터라는 게 뭔가?”

“석 자하고도 좀 더 되는 모양인데, 아이고, 머리야. 이걸 언제 다 바꿔? 그러면 우리 창고며 농장에 있는 곡식도 전부 그 뭐? 리따? 인지 뭔지로 다시 재자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그냥 놔두는 것도 반동적이긴 하이. 척관이란 왕이 제정했다는 것이니까 혁파한다는 말은 찬성이네. 허나 평준위원회 위원장(김창시)의 말대로 영길리 사람들 것을 새로 가져다 쓰는 게 장사에도 편할 것 같은데…….”

여기에서 야드파운드가 인류에게 끼칠 해악을 아는 두 사람, 그러니까 환생자라서 아는 정시준과 선견지명이 있어서 아는 조제프 푸셰는 그 반혁명적 작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시준은 원래 중앙인민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푸셰를 슬쩍 들어오게 하여 준 다음 열심히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시준은 예상하던 기류를 감지했다.

시준은 12배가 되었다가 20배가 되었다가 하는 영국의 개떡 같은 화폐 제도에 대해 저편에서 역설하고 있던 조제프 푸셰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잠깐. 선전선동국장 동지.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음?”

담배 태우자는 핑계로 밖에 나간 시준은 푸셰와 논의했다.

“지금 보아하니 사람들은 미터법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허나 동지와 내가 열심히 떠드니까 굳이 면전에서 반박은 안 하는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보나 마나 부결될 겁니다.”

푸셰는 펄쩍 뛰었다. 둘만 있는 자리라 그도 외국인 친구 신분으로 돌아가 흥분했다.

“그 무슨! 조선의 인민을 암흑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네!”

“이제까지 중 가장 당신에게 공감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평준위원회 위원장 김창시를 포섭해서 어떻게든 통과시켜야 해요.”

“그 사람은 저번에 왔던 불경한 자 임상옥과 뜻이 같은 것처럼 보이던데. 쉽지 않을 걸세.”

시준은 조선 후기의 이 거상을 다룬 어떤 매체에서도 표현되지 않았던 별명으로 지칭되는 임상옥을 잠깐 동정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말했다.

“그래도 말이나 해봅시다.”

두 사람은 어렵잖게 김창시를 찾아냈다. 김창시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를 대며 야드파운드파인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고, 조제프 푸셰가 침을 튀기며 맞섰지만 소용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열 명이 채 안 되며, 그중 자오선이 뭔지 아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적었다. 그리고 김창시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푸셰의 과학적 설명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으나 김창시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주석 동지께서도 원래 상고(商賈)이셨으니 아실 겁니다. 갑자기 척관을 바꾸자고 하면 장사꾼들이 낯설고 손해 볼 게 얼마나 많은데요.”

시준도 그쯤은 안다. 시준의 가장 중요한 지지층인 상인들이 이탈할 수 있다는 김창시의 경고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도 야드파운드는 안 된다. 그리고 시준은 이 갈등을 해결할 패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서 도와주신다면, 평준위원장 동지가 원하는 안건 하나를 무엇이든 내가 힘써 도와 통과시켜 보겠소. 다 인민들 잘되라고 하는 일이 아니오?”

김창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도 원래 초보 선비 겸 장사꾼이니만큼 시준의 흥정 제안에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전에 상임위원회에서 논의했던 국호 문제에 대해 주석 동지께서도 상임위원회의 중의에 찬성해 주시지요. 그러면 평준위원회는 제가 설득하겠소이다.”

‘국호 문제’를 이미 들어 알던 조제프 푸셰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그것쯤은 어렵지 않지! 그렇지 않소, 주석 동지? 정치국이 제안한 미터법이 부결되면 이것은 정치국의 체면에 관계된 일이지만, 국호는 애초에 상임위원회에서 두 가지 안을 상정하였으니만큼 그렇지도 않소. 나도 이전부터 그 뭐냐…… 아무튼 그 위엄찬 이름이야말로 새 나라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대로라면 시준은 조선에 야드파운드를 도입한 지도자가 되어 만세토록 욕을 먹을 것이냐,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어 그 자신에게 평생토록 욕을 먹을 것이냐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허나 김창시의 제안도, 미래를 모르는 푸셰가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도 시준의 예상 범위 내였다.

‘그렇게 나오셔야 하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똑같은 패턴으로 계속 당할 줄 알았냐?’

시준이 정약용에게 선전포고한 뒤 기회를 보며 노려왔던 시점이 바로 지금이었다.

김창시와 임상옥이 야드파운드법 쓰자고 찾아왔던 일은 시준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다.

단위계 문제도 해결하면서, 동시에 국호 사안에서 시준의 독단으로 ‘상임위원회의 중의’를 묵살했다는 비난 또한 피할 수 있는 묘계가 펼쳐졌다.

“으음……. 내 평준위원장 동지의 생각은 잘 알겠소. 우리가 인민의 수평도로써 모였으니, 적어도 동지가 원하는 인민 두 글자는 반드시 들어가도록 하겠소.”

“정말입니까, 주석 동지?”

김창시는 크게 반가워하며 자기가 책임지고 평준위원회로 하여금 미터법을 받아들이게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시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직후에 상임위원회 위원이자 송상 출신인 박광유를 찾아갔을 뿐이다.

외무위원회에서 박광유를 불러낸 시준은 은근하게 수작을 붙였다.

“우리끼리니까 터놓고 말하자면, 송상과 남조선혁명당은 평양에 터잡은 다른 위원들에 비해 목소리가 크다고 할 수는 없지 않소?”

바로 이때를 위해 시준은 전원회의를 준비하는 틈틈이 박광유를 만났다.

그 전에도 인연은 있었지만, 요 며칠 주석과 더욱 많은 친밀감을 쌓은 박광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주석 동지께서 역시 우리의 고충을 알아주시는군요. 아닌 말로 남조선혁명당이야말로 이번 혁명에서 가장 고생한…….”

“바로 그렇소.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국호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꼭 상임위원회가 제안한 안 두 개만이 제일이라는 법은 없소. 인민의 중의가 일치한다면 다른 방안도 있는 것이오.”

박광유는 어리둥절하여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시준을 바라보았다.

시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동지는 외무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이니, 여기에 대해 충분히 대표로 발의할 자격이 있소. 이 기회에 개성 사람들의 구원을 풀어 주는 것이 어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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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1킬로그램의 원래 이름은 1그라브입니다. 사방이 10센티미터인 입방체의 부피를 1리터, 거기에 담긴 물 1리터를 1킬로그램으로 정의했지요. 처음에는 얼음물로 하다가 곧 4도의 물(물의 밀도가 가장 높은 온도입니다)로 바뀝니다. 킬로그램 원기는 아직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여담이지만 최초에 만들어진 40개의 킬로그램 원기 중 하나는 개항기 조선에 도입되었다가 그 후 혼란을 거치면서 험한 수난을 겪지요. 현재는 국가기술표준원에 역사 유물로써 보관되어 있습니다.

2. 이제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신체발부수지부모를 내세운 것은 일종의 대외적 캐치프레이즈에 가깝습니다. 조선 사람도 필요하면 머리도 자르고 수염도 다듬고 다 했습니다. 단발령에 대한 반발은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와 제국주의 침탈에 따른 반발이 더 중요한 이유지요.

3. 독재라는 말은 추후의 파시즘, 그리고 2차대전 후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난립하던 군부독재 탓에 인식이 안 좋습니다만 조선에서는 (주로 왕이)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통치한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4. 북한에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다양한 언론 매체가 있습니다만, 모든 매체는 당 선전선동부의 관할 하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당 선전선동부가 관할하는 것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노동신문'이고, 주로 외부에 인용되는 보도는 대외용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시다시피 그냥 제목만 다른 신문들이죠.

어떤 의미로는 한국어 수사법의 한 극치라고 할 만한 그 예술적 욕설 솜씨도 충동적으로 휘갈긴 게 아니라 당의 철저한 검열과 검수를 거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 매체를 학술적/정치적으로 분석하려면 그 단어 하나하나가 이전과 어떻게 다르게 쓰였는지까지 봐야 진짜 '얘네가 하고 싶은 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의미라도 그 전과 다른 단어를 쓴다면 북한 정부가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요.

6. 작중에 직접적인 방식으로 날짜가 잘 안 나왔는데, 오늘화 기준으로 현재는 1813년 3월(음력)입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총선거 때부터 2년밖에 안 지났죠. 프랑스 혁명 당시에 날마다 천지가 뒤집히던 때도 그렇고, 원래 혁명기란 게 상당히 바쁘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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