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74화 (174/284)
  • 176화

    53. 건국(2)

    외사통호국장 정약용이 자신의 임무를 방기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틀림없이 자기 임무를 처리하고 뒤따라왔다.

    정약용은 보고 자료를 펼치며 안경을 꺼내 썼다. 그도 요새 눈이 좀 나빠진 모양이었다.

    물론 강철군주가 보증한 삼성가노 시준은 스승의 노화에 가슴 아프다거나 하는 장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이 노괴(老怪)들은 그저 치가 떨렸다.

    그런 시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약용은 느긋하게 말했다.

    “전선에서 지휘하는 혁명무력국 부국장 남공철 동지 외 혁명군 간부들을 제하면, 총괄서결국장 동지나 다른 정치국 위원들도 곧 평양에 뒤따라 돌아올 것이오이다. 저는 이 일 때문에 영길리 배를 얻어 타서 더 빠르게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이지, 혁명 과업을 내팽개치려던 게 아니었음을 알아주십시오.”

    시준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사람으로 보입니까? 제물포 건이나 말씀해 보시지요.”

    정약용이 여기서 마주 빙퉁그러진다면 그가 시준보다 두 배 이상 나이를 먹은 보람이 없다. 정약용은 그저 껄껄 웃었다.

    ***

    정약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서울에서 군대 개편에 몰두하는 대신 강화도로 떠났다.

    과연 강화도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이양선이 오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시준은 저들이 제물포를 노리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말했다. 시준은 물론 근대 조선의 처절한 개항사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지만, 제물포 개항이라는 말은 들어 봤으며 따라서 영국이 ‘역사대로’ 제물포를 노리러 왔다고 생각했다(이건 아무리 영국이라도 억울하다. 그건 일본이 했다).

    그리고 정약용은 시준과 달리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해보라는 심정이었다.

    정약용은 로드 암허스트의 위임장을 가지고 온 동인도 회사의 존 레디 소령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외무장관 각하.”

    “나도 만나서 반갑소.”

    이제 정약용의 영어는 시준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다. 19세기 영어라면 정약용이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했다.

    정약용이 말했다.

    “우리 혁명정부의 중의는 그동안 깊은 우호를 보여준 영국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는 입장이오. ‘수도’의 외항을 이렇게 열어버린 전례가 이전 400년간 없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소.”

    정약용은 ‘Capital’에 매우 힘을 주어 발음했다. 레디 소령은 사기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모자를 벗어 존경을 표했다.

    “물론입니다. 제게 권한을 임시 위임한 주중 영국 공사 윌리엄 암허스트는 우리 국왕을 대리하며, 따라서 영국을 대리합니다. 영국은 조선 사람들의 후의를 깊이 명심하고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약용은 일부러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한양도성까지 갔다.

    레디 소령은 왁자지껄한 한양도성을 보고 감탄했다.

    “과연 재건축이 활발하군요.”

    정확히는 재건축이 아니라 재파괴라고 해야 한다.

    궁궐과 관청이 알뜰하게 재활용되고 성벽은 돌을 빼어다가 혁명군 막사나 성벽의 요새화 보수에 사용되고 있었다. 도성에서 거들먹대던 부자 반동 놈들의 저택 또한 당연히 땔감으로 뜯겼다.

    그런데 현대에도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이 대충 쓱 보면 철거 현장인지 건설 현장인지 구분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조선의 건축을 잘 모르는 존 레디 소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허허. 그야 ‘수도’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전쟁으로 파괴된 성벽이며 가옥도 곧 복구될 거요.”

    뻔뻔한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섭섭하다. 정약용은 유학의 궁극적 이치를 엿본 깊은 학문의 선비로서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아직 혁명막부나 중앙인민회의에서는 수도 이전 같은 것을 발표한 바 없다. 혁명의 사타구니 건으로 시준의 정신력 수치가 깎였을 뿐이다.

    종묘를 불태우고 사직을 밀어버렸지만 어쨌든 한양이 수도가 아니라고 선언한 적도 없다.

    그리고 나중에 영국이 시비 걸기도 힘들다. 영국은 제물포의 개항을 요구했지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의 개항을 요구한 게 아니니 말이다. 논리적으로 조선은 흠잡을 데가 없다.

    다만 상대는 영국인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의 ‘논리’는 보편 인류와 많이 다르다.

    대전제-소전제-함포 발사로 이어지는 영국의 유서 깊은 삼단논법은 많은 사람을 파격적으로 감동시켜 왔다. 방심할 수 없으므로 주의 깊은 조절은 필요하다.

    다행히 정약용은 조선 왕국에서는 예조 참판, 혁명막부에서도 외사통호국장이다. 이미 능숙한 외교 관료인 그는 그런 조절에도 능숙했다.

    정약용은 알게 모르게 여러 정서적 부채를 쌓아두며 제물포로 존 레디를 이끌었다.

    양측의 수행원이 우글우글하고, 대부분 마차로 가는 것이라 레디 소령이 중간 어디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얻어듣거나 할 염려가 없었다.

    정약용은 그사이 레디 소령과 사교적 우의를 증진시켰다. 완벽하게 쓸데없는 얘기로 레디 소령이 딴생각 못 하도록 정신을 흩어 놨다는 뜻이다.

    레디 소령은 시준과도 인연이 깊지만 공식적으로 처음 접촉한 사람은 정약용이며,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자주 만나 안면이 깊었다.

    그래서 정약용도 유럽식 사교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조선의 드문 공업 특산품인 발화철(라이터)을 주자 레디 소령도 금 담뱃갑이며 파이프로 답례했다.

    그러나 그 훈훈한 신사들의 우정이 끝장날 순간도 머지않았다.

    다시 남서로 방향을 틀어 제물포에 도착하고 나자, 레디와 그 일행의 표정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로 차례차례 바뀌기 시작했다.

    “여긴 항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정.

    “이 망할 사탄의 똥 같은 진흙탕은 뭐야! 측량자료 좀 꺼내 봐. 이런 썅, 자릿수 하나 잘못 적은 거 아냐? 밀물이 왜 이래!”

    분노.

    “장난치지 마시고 진짜 제물포로 좀 안내를…….”

    협상.

    “여기에 항만 시설을 만들려면 30년 안에는 본전을 못 뽑겠는데……? 인도 꼴 나는 거 아냐, 이거?”

    우울.

    “아니, 그런데 로드 암허스트가 공식적으로 제물포를 명시했으니 우리로선 다른 방법이 없잖아.”

    수용까지 완벽했다.

    제물포는 아무리 관대하게 봐도 19세기 후반의 기술이 없이는 근대적 항구로 쓸 수 없는 곳이다. 그 전에 여기로 들어오려 했던 열강은 일상적 입항이라기보다 적전 상륙에 가까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왜 포구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저기에는 왜 고기잡이 쪽배가 드문드문 오가며 여기가 항구라는 정약용의 헛소리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가?

    그건 유럽 열강의 하남자들과 달리 조선의 상남자들은 바다와 육지가 맞닿기만 하면 대충 다 배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항구가 불가능하지 전근대적 항구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안전한 등대와 엄격한 수신호에 따라, 시멘트로 잘 마감된 나루에 배를 대고 튼튼한 밧줄로 묶은 다음 여유 있게 계단으로 배에서 내리는 사치 따윈 왕도 감히 말 못 꺼낸다.

    어림짐작으로 배가 좌초하겠다 싶은 데까지 몰아간 뒤 맨발로 뛰어내려 짐 질질 끌고 육지로 가면 되지 않는가.

    좌초해도 별로 상관없다. 그까짓 거룻배 따위 밀물 들어오면 떠오른다. 원래 물질이란 게 그런 거다.

    정약용은 매우 놀랐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물었다.

    “아니, 당신들이 제물포를 지정했지 않소. 여기가 뭐 어디가 어때서?”

    이게 정약용이 가진 자신감의 이유였다.

    정약용도 근대적 항구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지식은 없어도 된다.

    영국인들이 왜 항구를 원하는가. 장사를 위해서다. 그리고 몇 년 전 시준과 첫 상경 때 논한 것처럼 서양인의 상리란 그 거대함에서 나오는 것. 엄청난 대박과 거기 실을 엄청난 화물, 그리고 그것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항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암허스트가 삼화부에 비해 월등한 물동량 진입을 노리고 있는 ‘조선의 수도 외항’ 제물포는 평안도 삼화부를 훨씬 초월하는 대공사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동인도 회사가 파산할 것 같았다.

    정약용은 수도권 출신이며 조정 생활도 했다. 더하여 조선의 요해지 방어를 총망라해서 정리한 경력도 있다.

    따라서 평안도 촌놈인 시준보다 훨씬 한양도성 주변과 서해의 지리를 잘 안다.

    반면 로드 암허스트는 그렇지 못했다.

    제물포의 좀 느린 쓰나미 같은 규모의 조수간만이나, 코끼리도 빠져 죽을 악랄한 뻘밭을 지적할 사람이 북경에는 없었다.

    영국인들이 멍청해서 모른 것은 아니다. 요 몇 년간 영국인들이 황해 일대를 오가며 세세한 측량 자료를 만들기는 했다.

    그러나 어차피 결정하는 것은 로드 암허스트고, 그는 제물포에 가 본 적이 없다.

    서류 수치상으로는 어차피 황해 바닷가의 대부분이 조수가 매우 심하다. 조건이 비슷하다면 수도 가까운 곳을 노려야 한다.

    로드 암허스트가 시준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상식인의 입장에서 그다지 비난할 수도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제물포라고 했지. ‘포’라는 것은 중국 글자로 항구라는 뜻이다. 그러면 항만 시설이 있거나, 없어도 최소한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입지라는 의미야. 다른 곳은 조선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약간 불편하긴 하겠지만 여기로 하자.’

    말하자면 이 정도의 근거였다. 그리고 그 근거를 따라 개항장 개척하러 온 레디 소령은 절망했다.

    자기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자식놈이 ‘아, 엄마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 거지 같은 자취방을 당당하게 계약해 왔을 때 부모가 느낄 감정을 지금 레디 소령은 절감했다.

    ‘그냥 강화도가 낫겠는데.’

    강화도도 배를 대기엔 좋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제물포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물론 그건 푸념일 뿐이고, 내륙 가기 위해 한 번 더 배를 타야 하는 강화도는 무역항으로 고려할 가치가 없다. 그저 그 정도로 짜증 난다는 의미다. 동인도 회사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해야 하게 생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국인은 장사에 뛰어나 손해를 보지 않는다. 영국의 든든한 보험인 포탄과 총알은 항상 흑자를 보장한다.

    허나 자연을 대상으로는 먹히지 않는 해법이라는 게 문제였다. 자연과는 조약을 맺을 수 없으니까.

    대포 쏜다고 이 신도 버린 땅이 브리스톨 항으로 탈바꿈할 리가 없지 않는가. 엘프 조선의 자연친화적 전술은 바로 여기서 발휘되었다.

    결국 존 레디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이 주변 지형만 조사하고 페킹으로 복귀해 의논해 보겠습니다.”

    “그러시오. 천천히 하시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좋다. 존 레디 소령은 차마 항구 바꿔 달라는 소리는 못 하고 정약용을 정중히 삼화부까지 모셔다 준 다음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이 호의가 정시준에게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정약용은 지금 상세한 보고로써 그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었다.

    ***

    이야기를 다 들은 시준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약간 시간을 벌었겠습니다.”

    정약용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약간이라니요? 제물포를 삼화부 항구 정도로 만들려면 적어도 10년이 필요할 겝니다.”

    시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호구일 리가 있습니까. 저들은 모양만 왕이니 인민회의(의회)니 모셔 놓고 있는 해적 패거리입니다. 이제 제물포는 글러먹었으니, 보나 마나 또 다른 곳도 열라는 핑계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그 전에 우리는 조선의 혁명 과업을 완수하고 단결하여 저들에게 항거해야겠지요.”

    정약용도 영국인을 도덕적으로 옹호하는 반인륜적인 짓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신음을 흘렸다.

    “그 말씀이 옳소이다. 주석 동지. 일각이라도 빠르게 서둘러야 하겠군요. 그 첫걸음은 아까의 나라를 만드는 일이고요.”

    “예. 마침 잘 오셨습니다. 국호 얘기는 아까 상임위원회에서 했지만, 나랏일에는 그것 말고도 따라붙는 게 많지요. 아까 말씀하신 달력도 그렇고 척도(尺度), 평준(平準, 물가나 화폐) 같은 다소 사소한 일은 다 상임위원회에서 만들 수 없어 정치국에서 일차 안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정약용은 시준을 바라보았다. 시준은 복수의 쾌감을 느끼며 정약용의 불길한 예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도 일 끝나자마자 미안하지만 바로 정치국에 와 주셔야겠습니다.”

    정약용의 표정은 참으로 볼 만하게 바뀌었다. 간신히 정약전에게 탈출해 평양으로 돌아왔더니 또 외교와 무관한 일을 떠맡게 생겼다.

    안경으로 은근슬쩍 자신의 노화를 암시한 정약용의 작전은 솔직히 살짝 반동적이었다.

    혁명의 주석 정시준 정도 되면 그런 것은 알면서도 무시해야 마땅했다.

    게다가 시준은 정약용의 시선을 돌려놓은 채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방금 전의 국호 논쟁은, 어거지로 마무리하긴 했어도 시준의 판정패나 다름없다.

    영국인이 제물포 뻘밭에서 구두를 잃어버리건 수백 년 후에 미라로 발견되건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 두 안만 상정하면 볼 것도 없이 시준의 패배다. 전원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밑밥을 더 깔아 놓아야 했다.

    시준은 스승에게 선전포고했다.

    “선생님의 학문이 깊으시기는 하지만, 국호와 같은 중차대한 사안에 관해서는 저도 생각이 있으니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정약용은 왠지 분위기가 달라진 옛 제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국호를 포함하여, 새 국가의 제도를 창조하는 일이 며칠 만에 끝날 수는 없다.

    특히 정약용 스스로가 비판했던 달력 체계의 경우 지금 혁명막부에서 그것을 시도하는 짓은 완전한 삽질이다.

    정치국에서 하는 일은, 그 제도를 실무적으로 세세히 만들어갈 때의 윤곽을 잡는 정도였다.

    허나 그것만 해도 시간이 너무 없어서 죄다 선 채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정치국 회의를 정식으로 소집하지도 못하고 주석당에서 동료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시준은 으르렁대며 빠르게 안건을 정리했다.

    “달력은 연호만 바꿔서 부르기로 하고…… 아, 이건 뭐요? 내 생년이 왜 연호가 됩니까? 당연히 총선거가 기원년(紀元年)이지! 뭐? 주체연호? 그거 누가 말했소? 이제초? 아니, 김창시라고? 내 그럴 줄 알았지! 집어치워!”

    대충 그런 주먹구구식이었다.

    화폐 문제도 스페인 달러 은화와 영국 파운드, 청나라 마제은이 마구잡이로 유통되는 조선 상황에서 단숨에 상황을 정리할 방안 자체가 없었다. 혁명화폐 제작은 일단 ‘장기 계획’ 칸으로 밀려났다.

    푸셰의 입김도 있고, 시준도 영국 돈 막 쓰다가 경제가 잠식되는 미래를 원하지 않아 먼저 청나라 은을 많이 빨아오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물론 빨대는 품질 보증된 ‘조선의 신묘한 약재’다.

    후사아키가 조슈 쪽 관문을 잘 터주면 일본 쪽에서도 귀금속을 벌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띌 정도로 거래하면 바로 제재당할 테니 적당히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런 폭풍 같은 일정 속에, 급양과장 기랑이 오늘의 여덟 번째 커피를 들고 주석당에 들어왔다.

    대충 색깔도 비슷하고 조리법도 비슷하고 해서 조선 사람들은 대개 커피를 약탕기에 끓였다. 기랑은 무거운 탕기를 얼른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랑은 혹시 주석당이 대포를 맞은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벽이나 창에는 별다른 파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은 딱 포격의 폭풍에 휩쓸린 꼴이었다.

    심지어 언제나 여유로웠던 조제프 푸셰마저 얼굴에 뭔가 책자 같은 것을 걸쳐 둔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아마 잠든 것 같았다.

    기랑은 이걸 어째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그때 평준위원장 김창시가 외사통호국 부국장 임상옥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아니, 급양과장 동지. 이게 무슨 일인가?”

    기랑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창시도 급양과장이 과묵하단 사실은 알았기에 그냥 “허어.” 하는 소리와 함께 주석당을 둘러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자, 김창시는 거의 기랑에게 얘기하듯이 말했다.

    “내가 학문은 짧지만 그래도 옛글을 약간은 읽었지. 무릇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우려면 먼저 음악과 의관과 예법과 자[尺]를 제정하는 법. 평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척도에 관해 긴히 진언할 게 있어 왔는데 이래서야 어렵겠구먼.”

    그때 서안에 엎어져 자던 시준이 시체가 부활하듯 일어났다.

    “그, 안 그래도 할 일 많던 참에 잘, 잘 됐소이다. 안건에 문제만 없으면 바로 채택, 채택하도록…….”

    단위계는 아직 손도 못 대던 처지다. 내일까지 제출할 자료가 10개쯤 있는데 그중 2개를 옆 사람이 마침 만들었다며 건네줄 때의 그 심정이었다.

    시준은 김창시가 주체연호인지 뭔지 하는 헛소리를 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망각했다.

    그러나 전생이 어느 공화국의 공민이 아니었을까 의심되는 김창시는 역시 현대적 시민과는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셔서 다행이오이다. 주석 동지. 대단한 것은 아니고, 여기 외사통호국 부국장 동지(임상옥)가 영길리 사람들과 오래 통했다 보니 참고할 만한 게 많았소이다.”

    시준은 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나올 때보다 더 불길한 무언가를 느꼈다.

    임상옥이 자랑스럽게 나서서 말했다.

    “영길리 사람들은 조선 사람과 비슷한 자를 쓰는데, 이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수평하게 만들면 필시 양국의 통호와 장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오이다. 돈과 무게와 길이와 너비를 다는 데에 그 쓰는 저울이 같다면 그 얼마나 편리하겠소이까?”

    “뭐라고요?”

    임상옥은 안타깝게도 시준의 반문을 더 자세히 설명해 보라는 요청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이것을 좀 보십시오. 소위 인치(inch)라 하는 것은 손가락 마디로써 제정된 것이라 한 치와 같고, 피트(feet)라 함은 발이라는 뜻인데 대강 한 척과 비슷하며, 야드(yard)는 마당이라는 뜻으로 얼추 한 보와 맞소이다.

    게다가 무게로는 파운드(pound)가 있어 곧 돈을 세는 말이기도 한데, 이 한 파운드는 한 근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큰 수고 없이 약간만 손보면 바로 우리의 혁명적 제도가 마련될 수 있는…….”

    시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로가 아니라 분노 탓이다.

    그러나 시준이 여기에서 고함을 지를 필요는 없었다.

    저기서 얼굴에 책 덮어놓은 채 자고 있던 조제프 푸셰가 갑자기 의분으로써 각성했기 때문이다.

    푸셰는 책을 잡아 뜯어내듯이 움켜잡으며 튕겨나듯 일어났다.

    몇 년만 있으면 환갑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동작이었다.

    김창시는 침을 삼켰다. 많이 봐서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핏줄이 불뚝불뚝 일어설 것 같은 양귀자의 분노한 안면은 새삼 공포스러웠다.

    조제프 푸셰는 인류 문명을 대표하여 포효했다.

    “이 불경한 자가!”

    임상옥은 푸셰의 손에 들린 책이 자기 얼굴을 내리쳐 으스러뜨리는 환상을 목도했다.

    ========================

    작가의 말

    1. 제물포는 적어도 19세기 후반 기술을 동원한 대형 토목공사로 통째로 지형을 바꾸기 전까지는 대형 항구로는 부적합했습니다. 작중에서는 암허스트도, 시준도 정확히 몰랐고 정약용은 알고 있었던 상황이죠.

    뭐 그래도 워낙 서울과 가까운 입지는 무시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열강도 쓰기는 했습니다. 먼 바다에서 모선 세워 놓고 보트 타고 입항하면 되기도 하는데 그래서야 상업이 번창한다거나 하긴 어렵겠죠. 원 역사에서 제물포를 최초 개항시킨 나라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일본입니다.

    2. capital 은 라틴어 caput(머리)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이 말의 번역어가 수도, 그러니까 머리의(首) 도읍(都)인 것입니다.

    3. 북한은 김일성의 생년을 기준으로 한 주체연호를 씁니다. 이게 기본이고 서력 연도는 괄호로 표기하죠. 일본과 같습니다. 이를테면 2023년은 <주체 113(2023)년> 이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냥 덴노 연호 자체로만도 많이 쓰는 일본과 달리, 아무래도 더욱 근본없는 연호라 실생활에서 감이 얼른 안 오는지 북한의 언론 매체에서도 주체연호'만' 따로 쓴 표기는 자주 찾아보기 힘듭니다.

    4. 임상옥이 비슷하다고 한 단위는 말 그대로 '얼추'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일례로 한 근의 경우 고기를 잴 때 / 나물이며 푸성귀나 곡식을 잴 때가 좀 다른데, 후자라면 한 근이 600이 아니라 400그램이니(전통 재래시장 같은 데에선 아직 이 방식을 쓸 겁니다) 대강... 한 파운드와 맞긴 하는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