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73화 (173/284)
  • 175화

    53. 건국(1)

    건국의 필요성은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중앙인민회의는 말 그대로 일종의 회의체이고, 통칭 혁명막부라고 불리는 정부기구와 혁명군은 그 집행부일 뿐이다. 그 모두를 포괄하는 국가 체제는 상징적 의미 이상으로 필수적이다.

    간혹 푸셰의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천하 인민의 수평함이 모두 같으니 국가는 필요하지 않다는 이상적 국제 연대를 들고 나온 축도 있었다.

    주로 온 천하를 정 진인의 영압으로 압살해야 한다는 정감록파가 그랬다.

    그것도 이해할 만하다.

    애초에 대프랑스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아아— 신민(臣民)들은  모르는 건가. 왕 같은 것은 본래 필요가 없다.”라는 프랑스인의 선언에 유럽의 열왕이 크게 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만국의’ 노동자에게 단결하라고 외친 마르크스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한 세기쯤 일찍 태어나 공산당 선언을 집필했더라도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선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도 아닌 데다가, 조선인의 고아한 전통으로 봤을 때는 항상 사람이 먼저다.

    마르크스처럼 사치에 환장하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부인상 당한 친구 앞에서 돈이나 달라 지껄이는 비루한 인간의 말 따윈 듣지 않는다. 모든 조선인은 ‘계급 해방?(웃음) 그래서 하녀를 겁간했느냐?’라고 비웃을 것이다.

    허나 그런 막장 인생의 글이라도 정교한 이론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아직 없다 보니 평안도의 트로츠키 꿈나무들은 이론적 근거가 부족했다. 어차피 이 흐름의 원인인 조제프 푸셰 자신도 이론적 공산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고 말이다.

    현실적으로도 지금 조선은 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커녕 그 역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엄정한 논리에 따라 우선 집안을 다스려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첫 번째 전제조건은, 간과하기 쉽지만 우선 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國家)라는 집이 그것이다.

    ***

    “혁명은 흥정하지 않는 엄격함을 그 근본으로 하오. 인민의 총의를 모으는 선거는 오직 총선거 한 번이었소. 반동들의 음해책동으로 미처 실시하지 못한 보궐선거는 이를테면 조정의 전차(塡差, 공석이 된 직임을 보충함)와 같은 것이지.”

    3월 3일을 위해 먼저 소집된 상임위원회에서 시준이 발언했다.

    “보궐선거로써 조선 땅 전 인민의 의견을 빠짐없이 모은다면 가장 좋겠으나, 우선 총선거가 한 번 이루어진 이상 중앙인민회의는 이론의 여지 없이 인민의 총의를 대표합니다.”

    따라서 먼저 국체를 중앙인민회의가 승인하고, 그다음 보궐선거를 그 국가의 사무로서 진행하자는 말이었다.

    어차피 생각보다 진짜 총선거처럼 투표를 진행해야 할 곳이 많지는 않다. 총선거 때도 기존에 인민위원장을 뽑았던 곳은 선거를 생략했다.

    시준이 일전에 생각한 대로 무장봉기가 곧 선거. 수확해온 반동의 모가지가 곧 투표권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 혁명과업을 지도한 현지 유력자들이 대표로 뽑힐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궐선거는 사실상 정복사업과 동치의 단어였다.

    시준은 인민 앞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마감 일자인 3월 3일에 맞춰 영호남 진군의 대 호령을 발할 생각인 것이다.

    3월 3일에 보궐선거를 진행한다. 혁명적 진군으로써.

    다만 3월 3일에 보궐선거를 끝낸다고는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야 당일 선거 종료가 원칙이지만 여긴 좀 다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불필요해 보이는 지적 낭비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평등국가’는 현재 지구에 전례가 없다(현재 미국은 노예제 국가다). 완전한 미답지에는 주의 깊은 행보가 필요하다.

    이 위태로운 개척에서 ‘말이라도 납득되게’ 하지 않는다면 그 발걸음은 첫발부터 무너진다.

    이것은 논리의 정교함보다는 성의의 문제다.

    인민들도 현실적인 문제는 다 안다. 하지만 그것을 정부가 인민에게 설명하려고 애쓰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단지 기분 문제일 뿐이지 실질적 문제가 아니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좋아하고 싶은 것을 좋아하지, 논리가 정교해서 신뢰한다거나 이득이 되어서 선호하는 생물이 아니다.

    그런 건 다 뒤에 갖다 붙이는 부차적 장식물이다. 그리고 어차피 혁명은 실용주의에서 가장 먼 행위다.

    지금 시준과 이야기하고 있는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들 또한 그만한 이치를 모를 사람들은 아니다.

    평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상임위원회 위원인 김창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드디어 이날이 오다니 본 위원은 매우 감개무량하여 탄식을 금할 수 없소이다. 결정이야 중앙인민회의 전원회의에서 되겠지만 먼저 우리 상임위원회에서 전원회의 앞에 제출할 안건을 마련해야겠지요. 저 고대의 제왕들 역시 그 앞에 고개 숙일 만한 명철로써 인민국(人民國)의 국호와 제도를 정해야 하오.”

    은근슬쩍 인민 집어넣는 김창시에게 다른 사람들도 지지 않았다.

    “혁명이라는 말도 들어가야 하오!”

    “적기(赤旗) 역시 꼭 넣어야 하지 않겠소?”

    “정 진인께서 주석으로 계신데 어찌 승리라는 자구가 빠질 수 있으리!”

    평소라면 치솟는 혈압을 이기지 못하였겠지만, 시준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에서 시준도 교훈을 얻었다. 지금까지 시준이 이름 짓는 데에 항상 실패하고 계속 어딘가의 공화국 같은 이름만 채택되었던 것은 전부 그 자리에 정약용이나 푸셰, 정약전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셋은 모두 막부 정치국 위원일 뿐 중앙인민회의 대의원이 아니다.

    따라서 상임위원회 위원도 아니다. 푸셰를 제외하면 두 형제는 지금 한성부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시준이 국호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계획대로야.’

    시준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절대로 자기가 평양에 ‘그 나라’를 다시, 아니, 먼저 세울 수는 없었다.

    이 자리의 상임위원회 위원은 다들 자기와 같은 하민 출신이라 정약용처럼 기괴한 고증을 끌어댈 학식이 없거나, 사대부라 할지라도 시준의 의견에 반박할 수 있는 입지가 안 된다.

    시준은 독재자의 쾌감을 맛보며 말했다.

    “국호에 우리의 뜻한 바를 다 집어넣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부르기도 번거롭고 낭비도 심하겠지요. 역시 국호는 모든 인민이 공히 한 번 듣고 기억할 만큼 짧고 명쾌한 것이 가장 좋소이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위원들은 그저 시준을 바라보았다. 시준은 어디서 족자를 꺼내어 좍 펼쳤다.

    김창시가 그 글자를 읽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그 낯선 이름에 상임위원회 위원들은 당황했다.

    외무위원회의 객원 위원이었지만, 최근 위원장이 병사하여 그 자리에 뽑히는 바람에 상임위원회에 참석한 송상 박광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째 반동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름 같은데…….”

    “어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일단 들어보시오.”

    시준은 준비해 온 논리를 펼쳤다.

    “일단 우리는 중국의 신하가 아니므로 대(大)라는 이름을 씁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이름은 조선이라고 하나, 그것은 저 폭군의 시조 아기바토르가 중국에서 얻어온 이름일 뿐이오. 혁명에는 마땅히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면서도 인민에게 친숙해야 함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조선만큼이나 오래된 나라인 삼한(三韓)에서 따 왔소.”

    그러고는 김창시 쪽을 바라보았다.

    “평준위원장께서 말씀하신 인민국은 백성의 나라라. 민국이라는 칭호는 바로 그것과 통하오. 단 네 글자이니 사람들이 외우기도 쉽지. 이 아름다운 글씨를 보시오! 실로 혁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소?”

    시준이 김정희를 갈궈서 써 온 글씨니까 아름답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한참 멍하니 있던 상임위원들은 곧 하나둘 반박을 내놓았다.

    “아니, 하지만 그래도 혁명이 빠진다는 것은…….”

    “혁명은 우리가 항상 하는 일이고 의심할 바 없이 고귀한 사업이나, 그것을 이름으로 쓴다는 것도 곤란하오. 그런 식이면 농사도 들어가고 고기잡이도 들어가야지. 국호란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말해주는 것이오.”

    “승리의 붉은 깃발은…….”

    “겹치는 것은 낭비요. 적기는 인민들이 가는 곳 어디에나 휘날릴 것이니, 그 옆에 나란히 대한민국의 국호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그 둘을 한꺼번에 보게 되오. 그것이면 충분하오이다. 게다가 잊으신 모양인데, 다음 총선거 때는 본 위원장이 아니라 다른 인망 있는 분이 주석이 될 수 있소. 어찌 진인 얘기를 국호로써 영구히 써놓을 수 있겠소?”

    “한이라는 말은 난생처음 들어보는데…….”

    “동지께서는 가서 책 좀 읽으시오! 이미 여러 사서에 밝게 나와 있거늘, 이 땅의 근본으로 일어선 그 나라를 모른단 말이오? 옛날 신라, 백제, 가야가 모두 삼한에서 비롯되었소이다!”

    시준은 달려드는 반대 의견을 하나하나 격파했다. 상임위원회 위원들은 시준의 무자비한 주둥이 앞에 하나둘 쓰러져갔다.

    단지 그 쓸데없이 똑똑한 형제와 프랑스 놈 때문에 휘둘렸던 것이지 자기는 결코 멍청한 게 아니었다. 시준은 그 사실을 실감하며 자존감을 한껏 충족시켰다.

    정약용이 없는 지금 그는 이 상임위원회의 여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시준은 비장군 여포조차 조조를 만나서는 끝내 백문루에 목이 매달렸음을 기억해야 했다.

    “어흠!”

    조선에는 노크라는 관습이 없다. 장지문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보통 이렇게 인기척을 한다.

    그리고 시준은 하얗게 질렸다.

    저건 틀림없이 한양에 있어야 할 정약용의 목소리였다.

    ***

    시준의 청력은 복지 혜택 덕에 좋은 편이었다. 그는 예상대로 모습을 드러낸 정약용에게 절망적으로 말했다.

    “지, 지금 상임위원회에서 논의하고 있으니 나중에 제가…….”

    정약용은 손을 내저었다.

    “물론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이 아닌 제가 불쑥 찾아든 것은 무례인 줄 잘 알고 있소이다. 위원장 동지. 그러나 먼저 이 패지(牌旨, 위임장)를 보아 주시지요.”

    그것은 개천군 인민위원장으로서 중앙인민회의 대의원이며, 정감록 신앙인의 대표로서 상임위원회 위원도 겸하고 있는 이제초의 위임장이었다.

    “이제초 동지는 군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기 전, 보궐선거 시에 상임위원회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필사의 각오를 하였소이다. 그리하여 불초한 내게 그의 패쪽을 위임한 것이지요.”

    모든 상임위원은 이제초의 공평무사함과 사람 보는 안목을 칭찬했다. 실제로도 정약용 정도 되는 인망의 선비라면 상임위원회에 참가하기 부족함이 없다.

    좀 다르게 말하면, 상임위원들은 정약용이 있어야 시준의 이상한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약용은 성큼성큼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상임위원들은 모두 그쪽으로 몰려가 담배를 내와라, 방석을 가져와라 수선을 떨었다.

    세상에 시준의 편은 하나도 없었다.

    “밖에서 옷매무새를 좀 가다듬는 사이 논의를 조금 들었소이다.”

    “그걸 엿들으셨습니까……?”

    정약용은 시준의 꿍얼거림을 무시했다.

    “본 위원 대리가 발언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위원장 동지의 안이 실로 혁명적이긴 하나, 새롭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겠소. 불랑국의 혁명에서 잘하고 잘못한 사적을 참조하지 않은 소치가 약간 있는 듯싶소이다.”

    ‘야, 과거인. 네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뭘 알아?’ 라고는 할 수 없다. 푸셰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정약용은 이제 시준보다 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잘 안다.

    “불랑국의 혁명이 성공하고 왕의 목을 쳤을 때 인민의 기세는 드높았소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로이 하고자 했지요. 국명, 교의(敎義), 복식, 달력, 예법 모두를 말이오.”

    정약용은 앞에 누군가 갖다 놓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시준은 직감했다. 이제야말로 정약용의 주특기인 기나긴 논변이 시작된다.

    “그러나 일례로 달력을 보자면, 책력은 오랜 세월 정밀히 천문을 보아 황도(黃道)와 각성(角星)을 음양조화에 맞추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달이며 날마다 이름 붙이기에만 골몰하고 전래의 가르침은 모두 구습이라 하여 쳐내니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하고 불편하게 여겼소.

    허나 책력이란 곧 농사의 근거이고 농사는 인민의 생명인데, 이러한 일에까지 어찌 마구 들이댈 수 있겠소이까? 위원장 동지께서 종묘를 불사르고 사직을 파하신 일은 혁명적이나, 그건 인민의 생업과 관계없는 반동만의 찌꺼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국명도 같습니다. 인민의 나라, 그 국호란 위원장 동지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인민 모두가 공히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것이오이다. 이름에 담긴 뜻이 아름답다 한들, 사람들이 처음 듣고 우리나라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면 그 높은 뜻도 심히 훼손되지 않을 수 없소.”

    시준은 정약용이 아직도 종묘사직 빠갠 일에 삐쳐 있는지 고민했다. 정약용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까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선이 저 이가(李家)의 선조가 명에 청해 받아온 것이기 때문에 쓸 수 없다 하셨소.

    하지만 그것은 말씀하신 삼한과 같은 때에 여기 있던 고대의 나라에서 유래한 이름이거니와, 그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반동이 갈아놓은 땅과 거둔 곡식, 반동이 지어놓은 성, 반동이 제작한 총칼이며 쇠붙이도 모두 쓸 수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소이다.”

    시준은 모든 상임위원들의 얼굴이 해맑게 피는 것을 보기가 싫었다. 정약용은 거침없이 선언했다.

    “우리는 반동이 두려워서 피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면으로 맞서 빼앗을 뿐. 모든 사람이 아는 이 땅 조선의 이름을, 우리는, 생지당권과 함께 탈환한 것이오!”

    시준은 반박할 수 없었다. 정약용의 논리에 동감해서라기보단 모든 상임위원이 환호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역시 희만 선생이야!’ ‘학문 확실하구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준은 거품을 물고 싶었다. 역시 선동으로 흥한 자 선동으로 망하는 법이다.

    이 자리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정약용이 말했다.

    “조선이라는 말을 머리에 놓고 보면, 그 다음은 위원장 동지의 말씀도 합당하오이다. 민국(民國)만큼 수평도를 잘 드러내 주는 이름도 없겠지요. 허나 이건 글자를 놓고 그 숨겨진 뜻을 고심해야 하는데, 수평한 모든 인민에게 바로 깨닫게 하려면 다소 길더라도 명쾌히 설명하는 것이 불가피하오이다.”

    시준은 조선민국쯤에서 타협할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여 정약용의 다음 말을 막지 못했다.

    “위원장 동지의 당당한 선언대로 우리는 홀로 오롯한 나라. 첫머리는 대조선(大朝鮮)이 마땅하오. 그리고 일전 비변사에서 선전선동국장 동지가 제게 주었던 가르침에 ‘민주’가 있었소.”

    시준은 그때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고 침을 삼켰다.

    그러나 지금 정약용의 입을 강압으로 막았다간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위원들에게 폭행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았다. 그래서 시준은 가만히 있었다.

    “대조선은, 민주(民主) 두 글자의 의리를 주장[主義]하는 인민(人民)들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일컬어 민국이라고만 한다면, 중국이나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깔볼 수가 있습니다.”

    “예? 어째서요?”

    시준조차 전혀 생각하지 못한 취지의 반박이었다.

    “왕국(王國)은 황제의 제후 중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그 법식과 지위는 중국의 육부(六部)나 변경의 도사(都司)와 같이 합니다. 이름을 보자면 여기서 ‘왕’자를 떼고 ‘민’자를 붙인 것인데, 남의 흠 잡기 좋아하는 더벅머리 선비들은 ‘저것들은 왕에서 스무 계단을 굴러떨어져 하민의 나라가 되었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반드시 주(主) 자를 덧붙여서 인민이 주인임을 인민이 주장하는 나라라고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런 반동의 말을 우리가 무에 신경 쓸 게 있겠습니까?”

    시준의 다급한 대꾸에 정약용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물론 실지로는 그 뜻이 아니고, 우리 또한 까마귀와 쥐의 쑥덕거림에는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허나, 기왕이면 우리의 혁명이 반동의 종놈들보다 월등하다는 자랑스러움을 삼아도 되지 않겠소이까. 여기에서는 새로운 것만 찾을 일이 못 되며, 마땅히 고아한 기풍을 참조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헛된 배움으로 반혁명적 논설을 일삼는 선비들도 조용히 시킬 수 있겠지요.”

    정약용은 그러면서 손가락을 꼽듯이 탁자를 툭툭 쳤다.

    “그런 뜻에서 고전을 살피자면…… 주(周)의 려(麗, 려왕)가 오만무례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쫓아내고 왕 없이 서로 의논하여 다스렸던바 이를 함께[共] 화합하다[和] 하여 공화라 합니다. 이보다 우리의 혁명에 어울리는 말은 없습니다.”

    듣고 보니 왕을 사로잡은 그들의 혁명에 안성맞춤이다. 물론 조선 혁명은 (후보생까지 해서) 왕을 3명 사로잡았으므로 공화 시대보다 3배쯤 우월하다.

    사람들은 전부 희만 선생의 시그니처인 그 엄밀한 고증에 감탄했다. 시준만 빼고. 시준은 앉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잠깐……!”

    그러나 혁명의 대표 중앙인민회의 중에서도 수뇌부인 상임위원회 위원들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들은 잠깐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라 이름은 대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시준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

    시준은 필사적으로 자리를 수습했다. 시준은 아직 평안도 사람이 대부분인 상임위원회를 너무 얕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며 긴급 전략을 동원했다.

    그 전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지금은 어디까지나 중앙인민회의 전원회의에 제출할 상임위원회의 ‘안’을 만드는 자리지 국호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시준은 국호를 이 자리에서 확정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못박았다.

    그러고는 대한민국과 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안을 모두 제출한다는 타협점으로 회피했다.

    상임위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경애하는 주석 동지의 체면을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 일단 전원회의에 둘 다 상정하는 것으로 그 논의는 끝났다.

    육체적으로는 딱히 한 것도 없지만 정신의 소모는 육체에도 연결된다. 폭풍처럼 헐떡대던 시준은 흩어져 나가는 정약용을 붙잡았다.

    “그, 그런데 선생님. 아니, 외사통호국장 동지. 영길리국의, 일은, 어쩌고 벌써 올라오셨습니까?”

    정약용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석 동지. 영길리 사람들은 이틀 전 제물포에 왔다가 곧바로 떠났소이다. 그 후 저도 삼월 삼짇날에 맞추기 위해 그 배를 타고 삼화부에 내려서 온 것이지요.”

    시준의 예상대로 영국 놈들은 약속된 항구를 내놓으라며 쳐들어온 것 같았다. 하긴 순수한 악은 순수한 선과 마찬가지로 예측이 쉽다.

    시준은 지친 와중에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허, 영길리인의 배를 타고 오셨다면 얘기가 잘 되셨나 봅니다?”

    “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이다. 먼저 냉수라도 한 잔 드시고 계시면 곧 저도 의관을 다시 정제하고 돌아와 천천히 보고 말씀 올리겠소이다.”

    정약용이라면 지금의 준비 기간에 국호의 대강이 논의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았을 터. 시준이 또 ‘엷은 학문’으로 이상한 짓 할까 봐 진짜 어지간히 급하게 온 모양이다.

    시준은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정약용이 제물포 건에 대해 휘갈긴 두툼한 공책 책권을 들고 돌아올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

    작가의 말

    1. 마르크스는 굉장히 (남의 돈으로) 낭비벽이 심해서 경제학자인데 전혀 경제적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기적인 인격파탄자이기까지 했죠. 여러 전설적인 일화를 보면 정신병리학적인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건 나중에 망명으로 곤궁해지고 나서야 좀 완화됩니다. 마르크스의 런던 생활이 매우 비참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건 그 전의 돈지랄 인생에 비해 그렇다는 거지 소득의 절대량 자체는 그냥저냥한 서민 정도는 되었습니다.

    2. 프랑스 혁명 당시는 정치 체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혁명이 이루어져, 현대 기준으로 봐도 급진적인 사회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혁명달력인데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실제 적용하기는 좀 난감한 면이 많아 금방 폐지됩니다. 윤년도 없었고.. 작중 몇 번 나온 '테르미도르의 반동'에서 테르미도르는 혁명력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서 브뤼메르는 혁명력 2월입니다. 그러나 미터법이 대성공해서 만회할 만하죠.

    3. 정약용의 대사 중 '스무 계단이 떨어졌다' 라는 말은 진나라 때 처음 제정된 이십등작을 말합니다. 왕과 서민은 모두 이 등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왕에서 20개 하락하면 서민인 거죠.

    한나라 때도 대체로 이어받아 썼습니다.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이란 것이 실제로는 계급 서열로서 존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쪽이 '고대 중국의 신분계급제'에 더 가깝습니다.

    4. 이때 '공국'이나 '제국' 이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지만(현대의 용법은 서구 용어의 일본 번역어입니다) '왕국'은 조선에서 자신의 지위를 규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위치는 작중 설명된 대로 요동 도사, 조정 육부와 동급이었습니다.

    5. '주의'는 현대에 '-ISM'의 번역어라든가에 쓰여 예술사조나 정치이념을 뜻하는 데 주로 사용되지만, 조선에서 주의라고 하면 말 그대로 <의리를 주장한다>는 뜻입니다(이 시절의 '의리'는 현대의 용법과는 달라서 그냥 '옳은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약용의 말도 그런 맥락이죠. 따라서 작중의 '민주주의'는 이념으로서의 데모크라시와 동치는 아닙니다.

    6.  작중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가진 정보의 한계로 해석이 이상하게 나온 거고, 사실 민국과 공화국은 같은 말입니다. 청나라 번역어냐, 일본 번역어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7. 공화의 어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중 나온 함께 조화롭다는 뜻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 지방의 백작 화가 이 봉기와 통치를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전자는 사마천의 사기, 후자는 죽서기년에 기재된 이야기인데 작중 시점 19세기 초에는 아직 왕국유가 죽서기년을 모아 정리하기 전이라(20세기입니다) 정약용도 전통적인 사기의 기술을 인용했습니다.

    8. 각성이란 동양의 별자리 이십팔수에서 일종의 기준 별이 되는 천체입니다. 현대 천문용어로는 목동자리 알파별 아크투르스를 말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