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52. 조선의 반격(1)
한양 점령 후, 혁명군은 대표적 사치 병종인 기병을 쉽게 늘릴 수 있었다.
한성부 주둔 정부군에 군마가 풍족했다는 얘긴 아니다. 조선군의 장비 중 병사들이 풍족하게 쓸 만큼 많았던 것은 수도권 5군영에만 5만여 정에 달하던 총기뿐이다(화약이 풍부하단 얘기는 아니다).
전시 긴급 소집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조선군은 기병에게 말을 지급하진 않는다.
사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전근대 국가가 그렇다.
그런데 조선은 쓸데없이 고도의 행정이 발달한 나라라 점호만 빡셌다.
무관으로서 실제 일을 시작하려면 말이 있다는 점고를 받아야만 했는데, 그건 조선이 다 그렇듯 ‘알아서’ 구해 와야 했다.
그렇다 보니 조선 기병 중엔 말을 그때만 잠깐 세내서 타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무장들이 말을 세냈다는 얘기는 뒤집어 말하면 빌려주는 자가 있었다는 얘기다.
꼭 군대만 말을 쓰는 건 아니다. 나라에 큰 공사가 있거나 할 때 부호들은 시준도 경험해 본 ‘충성자금’으로 말을 수백 마리씩 세내어 노동력에 보탰다.
실록에는 충심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관이 정말 후대의 평가대로 진솔한 자들이었다면 생존 의지를 보였다고 기록해야 한다.
이처럼 놀랍고도 굉장한 조선식 사회주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는 한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이러한 약탈, 아니 애국은 대량으로 말을 기르는 직업적 임대사업자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임대차 구조에는 탐욕의 독버섯이 기생하기 쉽다. 따라서 혁명의 시선에서 보기에 심히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두 인민의 품으로 회수되었다.
군마뿐만이 아니다. 서울이 아무리 피폐해졌어도 그건 백성 얘기고, 김조순 일당이 축적한 자산은 꽤 많았다.
전쟁이란 게 보통 돈 들어가는 일이 아니니 그럴 만도 했다. 이는 서울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오느라 거의 공세종말점에 다다랐던 혁명군을 추스르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혁명군은 오히려 전쟁 전보다 세가 커졌다.
그중에서도 1개 복대(중대) 규모였던 혁명군 기병은 훈련도감 잔병을 통합시켜 5개 복대로 늘어났다.
시준은 원래 일개 병졸로 백의종군했던 이제초를 일전 조선 종교개혁의 보상 차원에서 복대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이제초는 3갈래로 나누어 남진하는 혁명군의 진로 중 하나, 그 선봉을 맡아 혁명적 진군을 개시했다.
이제초가 이끄는 미륵사 출신 병사들의 차림은 가관이었다.
부적을 무슨 갑옷 비늘처럼 주렁주렁 붙인 것은 물론이고, 등에 멘 깃발에서는 방울이 쉴 새 없이 딸랑거렸다.
임칙서가 조선 홍건적 어쩌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허나 혁명군 중 그것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는 전혀 없었다.
경기도 일원은 윤서동의 삽질로 속오군이 거의 전멸한 데다 남양의 이옥과 용인의 유희 등 남조선혁명당 꿈나무의 활약까지 있어 거의 무혈 편입되었지만, 충청도부터는 아직 혼돈의 상태다.
이제초는 땅을 두드리며 질주하는 마군의 선봉에 서서 몸소 적기를 휘두르며 외쳤다.
“영산 계룡산을 인민의 품으로 되찾아온다! 계룡산, 아니, 십승지 전부를 되찾고 진인의 영압이 온 나라를 뒤덮을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오오!”
지금까지는 중앙인민회의에서 그다지 주도권을 못 쥐던 정감록파였으나,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제초는 종묘에서 주석의 영압을 빌려 이씨 귀신을 한껏 내리눌렀다.
한성부는 이제 그 체면을 형편없이 깎이고, 곧 서울이라는 이름을 반납해야 할 처지였다.
그렇다면 다음의 수도는 어디인가? 혁명군 간부들은 당연히 평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야말로 혁명과 어울리지 않는 안일하고 수동적이며 반동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새 도읍은 이 땅 인민들이 임과 같이 애타게 그리던 땅, 계룡산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인이 그곳에 강림하여 천년 도읍을 정하는 순간, 진인은 계룡산의 지맥과 융합해 초월자가 되는 것이다.
정감록은 애초에 학문 체계적으로 정립된 신앙이 아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도 빈약하고(그래서 종묘 귀신을 부담 없이 쫓아냈다) 선악의 가르침도 없다.
다시 말해 정감록은 빈자리가 많은 신앙이다. 이것이 시준이 정감록 지지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얻은 이유다.
그러나 정감록은 단순한 만큼 절실했다.
여기가 힘드니 저기로 가자. 어디가 좋다더라. 그것이 정감록의 핵심 키워드였으며, 많은 것 안 바라고 그저 내일도 살고 싶었던 민중의 서러운 호소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모든 정감록에 항상 등장하는 그 이름, 계룡산을 향해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이제초는 말이 영원히 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모두를 다시 한번 격려했다.
“계룡산이 무엇인가? 언제나 그리운 이름이다. 우리들의 가슴이다. 우리가 사모하고 눈물 흘리며 오랜 세월을 목말라해 온 이름이다! 그것은 바로 정 진인께서 세우실 혁명의 낙원을 말하는 것이다, 동지 여러분!”
“정말 위대합니다, 동지!”
“우와아아아!”
충청도가 결코 사람 적은 고을이 아니건만, 그 누구 한 사람도 의기로써 길을 가로막고 “개소리 집어쳐!”라는 일갈 한 번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충청도 백성들은 정상인이었기 때문이다. 대충 보니 다종다양한 미친놈들 중에서도 가장 안 좋게 돌아버린 부류 같은데 상종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광기의 행군을 보자마자 얼른 집에 숨었다. 송상이 잡고 있던 천안 등지에서 남조선혁명당이 나와 맞이했을 뿐이다.
***
지금 혁명군이 뭔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날카로운 기억력의 소유자라 할 만하다.
사실 충청도에도 엄연히 감사가 있고 병마절도사가 있다. 나라가 워낙 개판이라 다들 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김조순 정부가 붕괴해 버린 지금 왜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이 시대 조선군 양자역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전설적 무신 이방성(李邦城)이 현재 병마절도사라면 더욱 그렇다.
이방성은 도무지 위치와 운동량을 특정 불가능한 자였다. 조선군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이방성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낭중지추라 하였던가. 옛날 영조 때부터 그의 재능은 이미 드러났다.
임금이 친히 화살 쏘러 나갔는데, 당시 이방성은 훈련원 정(訓鍊院正)이었다. 그리고 왕이 드나들 때 도감군이 문을 열면 징과 북이 울리고, 앞에 훈련원정이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허나 영조가 본 것은 텅 빈 중일청(中日廳) 문 앞이었다. 그냥 안 온 것이다.
의전 위반은 현대 공무원에게도 최고로 중대한 사태다. 양자역학 잘 모르는 다른 왕도 아니고, 슈뢰딩거의 왕세자 실험을 친히 집전한 과학군주 영조에게 그 짓을 했으니 무사히 넘어갈 리가 없다.
머나먼 해남으로 충군(充軍) 유배형을 받았지만, 또 무슨 신묘한 이중 슬릿을 통과했는지 이방성에게 내린 형벌은 곧 취소된다.
꼭 없어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손자 정조의 경우 주강에 무신 들어오라 했더니 뜬금없이 이방성만 계속 관측되어 매우 짜증 낸 기록이 있다.
원 역사에서 그의 활약은 좀 더 이어진다. 바로 이 충청도 병마절도사 자리를 받은 후에 또 그냥 집에서 안 움직이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원래는 그때 파직당하고 다른 사람이 가지만, 지금은 파직할 강철군주가 없고 김조순이 직접 관측하였기에 부임한 처지였다.
그리고 그 이방성은, 혁명군이 충청도로 짓쳐들어오는 현재 홀연히 확률 구름의 세계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여기 남은 최고 군사 책임자는 – 누구에게 책임진다는 건지도 애매모호하지만 – 감사 서유문(徐有聞)이었다.
이름을 보면 짐작할 수 있지만 지금 주석보필국장 하고 있는 서유구와 동렬 형제이고, 한성 감옥에 갇혀 있는 서영보와도 친족이 된다.
한반도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장의 영화를 누린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서씨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해졌다 할 것이나, 그래도 고귀한 혈통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허나 지금은 그에 어울리는 체통을 챙길 수가 없었다.
“병마절도사는 아직도 못 찾았나! 이방성이 이 새끼, 적이 목전까지 치달았는데 갑자기 없어져! 원균도 저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내가 설사 저 역도들은 못 잡아도 네놈은 잡아서 산 채로 회를 쳐 주겠다!”
서유문은 펄펄 뛰다가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조령에 있다던 영남순무사(박기풍)는 왜 여기로 안 오는 것인가! 뭐? 전라도로 잠시 물러나서 정비한다고 지껄였다고? 그걸 지금 고하면 어찌하느냐? 그게 어딜 봐서 잠시 물러나는 거야! 도망간 거지! 튀려면 데리고 간 충청도 군사라도 돌려놓고 튀어야 할 거 아니냐!”
박기풍은 보급 문제로 와해된 군사를 끌어모았지만 충청도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충청도가 김조순 대신 보급을 감당할 수도 없고, 지금 충청도에 있다가는 혁명군과 김회연 사이에 끼어서 가루가 되리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차피 김희순에게 의탁할 거라면 손에 쥔 병사가 많을수록 대접받는다는 이치 역시 자명하다. 병마절도사와 지방군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마술을 경험한 서유문은 그 경악스러움에 영혼이 산산이 쪼개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나라가 이러니 망하지! 망해도 싸다! 망하지 않고 배기겠느냐 말이다!”
한참 거품을 물던 서유문은 조금 후 현실을 인정했다.
혁명군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두 살 차이 나는 족제 서유구가 주석 정시준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서유문 정도 되면 백성들에게 힘써 모범을 보여야 했다. 선비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몸소 체현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며, 이것이 바로 유학 수신의 정수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그러한 책임의 꼭대기에 있는 명문 귀족으로서 골육상쟁 같은 유교적으로 상당히 추한 짓을 벌일 수는 없었다. 서유문은 대국적으로 결심했다.
곧 그는 위엄 있게 감사의 인수를 챙겨 병졸 스무남은 명과 함께(더 병사가 없었다) 나왔다. 그들은 혁명군이 몰려오는 천안으로부터 감영이 있는 청주에 들어오는 길목으로 걸어 나갔다.
그 병사들은 지금까지 감영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머릿수 채우는 것 외에 다른 쓸모가 없는 자들이었다.
서유문은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을 참으면서 겨우겨우 위엄을 유지했다.
혁명군이 오면 위엄 있게 감사의 인수를 건네고, 자신의 풍모에 압도당한 혁명군을 잘 달래 노략질을 막으며 덤으로 동생의 안부도 좀 묻는다.
그것이 대강 서유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저편에서 딱 봐도 홍건적 같은 무리가 말 타고 질주해 오는 것을 보자 서유문은 하마터면 그 계획을 다 잊어버릴 뻔했다. 사람의 대화가 통할 정상인 같지가 않았다.
그 짧은 생각을 하는 사이, 이제초의 기병대는 방울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서유문은 왜 저들이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지 불안했지만 애써 참으며 한 발짝 내디뎠다.
“거기 멈추어라! 본관은……!”
“네가 과연 따라올 수 있겠느냐? 반동이 없는 혁명의 재빠름을!”
뜻 모를 개소리를 외치는 그 기병대는 진짜로 멈추지 않은 채 덮쳐들었다.
특별히 창을 들어 찌르거나 칼을 휘두르진 않았지만, 그 숫자와 중량은 그냥 그 자체로 무기다.
불쌍한 서유문은 진짜로 말에 치여 날아가 굴렀다. 나머지 병사들 역시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기적적이게도 서유문은 죽지 않았을뿐더러 중상을 입지도 않았다. 과연 고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권문세족의 피가 어딘가 다르긴 달랐다.
서유문은 멍청히 일어나 앉은 채, 충청도 감영 최후의 부대를 귀찮은 거스러미처럼 밀어버리고 지나간 반역도당을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실제로 그 부대, 그러니까 이제초의 선봉대는 충청 감영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천안에서 남쪽은 청주,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계룡산이다. 십승지 제일의 영산, 성지가 눈앞인데 신앙으로 가득한 미륵사 사람들의 눈에 뵈는 게 있을 리가 없다.
나라의 일각을 담당하는 금백(錦伯, 충청도 관찰사)의 지위는 근본도 모르는 도참 광신도에게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이 이상의 비참함은 있을 수 없었다. 서유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시준은 전 세계 동시 인민혁명의 광기에 휩싸인 정치국 위원들을 진정시키고, 충청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 시점에 이제초의 승리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으나, 그건 이번에 시준을 따라 복귀한 혁명무력국장 차형기도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위 영남순무사 박기풍이 병사를 다 끌고 조령에 갔으니 아직 모르긴 몰라도 어차피 청주에 병사가 많진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계룡산까지는 우리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그때 외사통호국장 정약용을 대리하여 참석한 부국장 임상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는 정치국 위원이 아니라 후보위원이라 주재자인 시준이 발언을 허가해 줘야 했다.
“전역(戰域)과 관계한 이야기는 아니오이다만, 계룡산이라고 하시니 이 사람이 꼭 정치국에 아뢸 말씀이 있소이다.”
“무엇이오, 부국장 동지?”
“일전 선전선동국장 동지와 말씀 나누었습니다만—”
임상옥은 그렇게 푸셰를 바라보았지만 푸셰는 임상옥을 도와주지 않았다. 임상옥은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인민 해방전쟁의 와중 보궐선거의 포고를 해야 하는데, 새 인민의 나라가 도읍을 어디로 정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소이다. 포고는 내릴 때 내리더라도 미리 정치국에서 언질이 있어야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준도 이해했다. 정말 사람들이 불안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미리 어느 정도는 확정해 둬야 쓸데없는 파벌 다툼으로 인한 시간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중앙인민회의와 혁명막부가 있는 정치 중심지는 당연히 평양이다. 그러나 그게 당연하기만 하다면 임상옥이 굳이 발언했을 리 없다.
임상옥이 푸셰와 대화할 때 나왔던 서울파 사대부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시준은 방금까지 어디의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 내었다.
‘계룡산이라.’
정감록 신앙은 이제 웃기는 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시준 자신이 서울의 수도 지위를 박탈하는 데에, 그리고 조선판 혁명 이론의 기틀을 쌓는 데에 그것을 적극 이용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시준이 계룡산 따윈 도읍으로 생각도 안 해봤다는 투로 나가면, 정감록파는 실망 그 이상의 반발을 하게 될 것이다(실제로 한 번 생각하기도 했다).
당장 좋다고 후과를 생각하지 않은 채 아무거나 사용했다가는 이런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실용주의자의 말로라고 부르면 딱 적절할 것이다.
이제초의 선봉대가 계룡산을 정말로 점령한다면, 그에 걸맞은 지위를 정감록파와 계룡산에 부여해야 했다.
다행히 여기에 대해서는 시준도 생각해 둔 게 있었다. 한양에서 자신이 정말 사이비 교주인지 추궁하는 남공철과 정약전에 맞서 변명하다가 자연스럽게 의논된 아이디어였다.
정약전은 좋은 생각이라고 평했고 남공철은 말장난 아니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어쨌든 안 된다는 소리는 둘 모두 안 했으니, 시준은 유력한 간부 둘의 찬성을 얻었다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시준은 분위기를 잡고 무겁게 말했다.
“이론의 여지 없이, 혁명의 심장은 평양이오.”
시준이 자기 암시를 못 알아들은 줄 알았던 임상옥은 급히 뭔가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시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화려하게 지도를 가리켰다.
“보시오. 이 조선 팔도에서, 사람으로 치면 가슴에 평양이 있지 않소? 그러나 심장만 가지고서야 사람이 어찌 살 수 있으리.”
시준은 그러면서 계룡산을 막대기로 쿡 찍었다.
이제 ‘혁명의 유산’으로서 평양에 가져오게 된 김유근의 깃대였다. 좀 길었지만, 지도도 그만큼 컸기에 적당했다.
“인민들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승리의 땅, 계룡산은 오래전 저 이씨 귀신의 시조조차 탐내던 곳이오. 그 영험과 지리(地利)가 큰 것이야 어찌 두 번 말할 필요가 있겠소? 이제 이 사람이 말하였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고대하고 있었으리라 믿소.”
정치국 회의에 방청으로 자리하던 여러 정감록파 간부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몇몇은 아예 일어나서 외치려 했다. 그러나 시준은 눈으로 그들의 돌출 행동을 막았다.
“도읍(都邑)이라 함은 우두머리[都]가 되는 마을[邑]이라는 뜻. 그러나 인민이 수평한데 마을은 어찌 수평하지 않을 수 있으리. 나는 평양이 혁명의 심장이라고 했지, 혁명의 도읍이라고 하지 않았음을 유념하시오.”
정치국에는 이제 파리 날아다니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시준은 긴장한 위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평양은 육신의 요충으로서 가슴에 있으니 심장이오.”
그러면서 시준은 깃대로 평양을 툭 쳤다. 실제로 평양은 조선 지도에서 대충 가슴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그렇기도 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계룡산은 혼백의 요충으로서 이곳에 있소.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지혜로운 정치국 위원 모두가 아시리라 믿소.”
그러고는 다시 계룡산을 가리켰다. 조선 지도에서 ‘아래쪽 가운데’를 지시하는 그 붉은 깃대를 정치국 위원들은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주석 동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던 정치국 위원들은 다급하게 생각했다.
욕속부달이라 했다. 성급함은 최악의 결론을 부르고 말았다.
시준은 위원들의 얼굴이 고심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경멸로 변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간신히 표정을 바꾸고 말한 자는 임상옥이었다.
“그, 주석 동지. 내리신 교시가 혁명적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이건 주석 동지와 중앙인민회의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시준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다시 한번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시준은 깨달았다.
그 표정은, ‘혁명의 사타구니는 좀 아니잖냐’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시준은 깃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열사 김유근의 유지’가 시준을 떠받치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내가! 존경하는! 정치국 위원들께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혁명의 단전(丹田)이오!”
사람들은 곧바로 임상옥을 배신했다. 가장 먼저 배신한 자는 역시 배신의 동의어 조제프 푸셰였다.
“과연, 역시 그러했군요! 이 사람은 서양국 출신이라 단전이라는 말을 잘 몰라서 침묵했던 것뿐이오이다. 하지만 그런 좋은 말일 줄 이미 알고 있었지요! 평등한 두 수도, 아니, 두 전위의 도시[les villes d‘avant-garde]라. 매우 혁명적입니다!”
푸셰처럼 유럽인이라는 핑계도 댈 수 없는 다른 사람들 역시 다투어 떠들었다.
“바로 이거요! 피가 모이는 심장이 육신의 요충이라면, 기경팔맥이 모이는 단전이야말로 혼백의 요충!”
“음양조화의 대체가 이토록 오묘한 예는 여태 듣지 못했소이다!”
“도읍을 정하는 데에도 수평도의 극치를 보이는 주석 동지의 신묘함을 우러르니 새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시준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팔을 늘어뜨렸다.
이 혼란 때문에 ‘왜 평양이 독점적 수도가 아닌가’ 하는 골치 아픈 반발은 지금 당장 없었다.
이 행운은 컸다. 하지만 시준에게는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제 이다음으로는 어떻게 호남을 무혈 합병하여 김회연으로 하여금 제 발로 항복하게 하느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 기운이 단전에서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정치국 위원들의 폭풍 같은 환호가 사그라졌을 시점 – 한참 뒤였다 – 에는, 병사 몇 명만을 이끌고 있는 소년 하나가 전주부에 도착했다.
초췌하고 지저분한 데다 귀기라고 표현해야 할 피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지만, 그 소년의 눈은 형형했다.
그의 이름은 김좌근. 철인 김조순의 의지를 이어받은 사람 중 유일하게 시준의 손아귀를 벗어나 있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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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조선은 군마 산출에 대해 매우 장기간 노력했습니다만 성과가 썩 좋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한 문제는 아마 독자분들도 대개 아실 것이라 생각되어 생략했습니다.
2. 정감록은 사실 기준이 되는 무언가가 없는지라, 이용자의 상황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입니다. 신앙이라곤 해도 초월적 존재를 가정하고 섬긴다기보다 풍수지리의 변형이 더 주요 내용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시준이 멋대로 쓰다가 이번에 수도 문제로 호된 맛을 본 거죠. 아무리 중구난방 정감록 신앙이라도 '지리'는 정감록의 핵심이라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거든요.
3. 이천 서씨(대구 서씨는 이 이천 서씨의 분파),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는 고려 때의 대표적인 문벌 귀족-권문세족 가문들입니다. 어째 조선에서도 벼슬 많이 한 가문들이 보이시죠? 기득권은 나라가 망해도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신진사대부가 권문세족을 쓸어내고 조선을 건국했다... 라는 것은 미시적으로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죠.
4. 푸셰의 대사에서 전위의 도시는 '레 빌 드 아방가르드'쯤으로 읽습니다. 아방가르드는 곧 뱅가드, 그러니까 전위라는 뜻이죠. 주로 예술 사조에서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5. 작중에서는 일관되게 충청도로 호칭했으나, 이 시대(순조 초기) 충청도는 '공충도'가 맞습니다. 순조 초에 이름이 바뀌었거든요.
그러나 그건 공문서상의 원칙이라, 작중 상황에서는 그냥 사람들이 부르던 익숙한 명칭으로 사용해도 무방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작품 외적으로 독자분들이 혼란스러우실까봐 충청도라고 적었습니다.
패륜형 중범죄자가 나오면 행정구역을 격하하던 조선 전통 때문에, 유수부나 군이 현으로 떨어지면 (원래 그 이름을 땄던) 도의 이름도 바뀌어야 했지요. 충청도 역시 조선 왕조 내내 20여 차례나 간판 바꿔 다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공충도, 공청도, 청홍도, 충공도, 공홍도.... 하여간 대충 조합은 다 나왔다는 느낌입니다.
충청도와 함경도(함길도)가 자주 변경되었다는 인상이 강한데, 다른 도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이름을 못 바꿔서(예를 들어 평안도는 평양을 현으로 떨어뜨릴 수가 없어서 유지) 만만한 곳만 이름 툭하면 바뀐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전라도는 전광도, 광남도 등으로 3~4차례만 바뀌었을 뿐이고(조선 왕조의 본향이라서 우대받은 면이 있음) 경상도는 실록상 바뀐 적이 없습니다(이쪽은 사림 학통도 강했고, 전근대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천년 왕조의 본거지여서가 아닐까... 하고 추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