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70화 (170/284)
  • 172화

    50. 영구혁명론(3)

    조선 독립 당시 혁명막부는 영국의 불도저 개항에 숟가락 얹어 청과 무역을 튼 바 있다.

    현재 삼화부와 천진은 그 가까운 거리 때문에 빠르고 안정적인 항로가 구축된 상태였다.

    전쟁과 상관없이, 아니, 오히려 전쟁 때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했던 양계 사람들은 호피며 인삼이며 아편이며 있는 대로 싹싹 긁어서 청에 내다 팔았다.

    그리고 시준의 서상은 그때 기랑의 백발백중회와 손잡고 해수구제사업을 벌이며 호표피 수출 사업에 투자했다.

    따라서 시준 역시 중국에 서신 하나 전하는 게 어려울 리는 없었다.

    시준이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서신은 북경에서 암약하고 있던 임청에게 전해졌다.

    여기에는 예전 임청과 무기 밀무역을 하였으며 이후로도 그와의 은밀한 선을 유지하던 윌리엄 자딘이 큰 도움을 주었다.

    임청이나 정시준이라는 이름은 물론 명시적인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와 요즘의 개항을 언급하며 다시 장사 터보지 않겠냐는 투의 평범한 편지였다.

    그러나 임청은 알 수 있었다. 윌리엄 자딘에게 귀띔을 들은 다음에 다시 읽은 그 편지는 임청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의미는, 이를테면 예전 지유가 김유근에게 속삭였던 말과 비슷했다.

    ‘우리, 같이 혁명할래?’

    만약 임청이 후대의 의화단과 비슷한 부류였다면 결코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임청은 시준과 영국의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서신의 발신지로 봐서 시준이 영국과 모종의 끈이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천리교는 부청멸양(扶淸滅洋) 따위 관심 없었다. 임청 자신도 영국에게 무기를 수입했지 않는가.

    그렇다고 영국인이 좋다는 건 아니다(임청도 인간이다). 무림인이라고 해서 꼭 의협 한 길로만 직진하는 멍청이는 결코 아니며 때로는 책략을 쓸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영국과 손까진 안 잡아도, 영국에게 청이 두드려 맞는 틈을 타 무생부모의 진리를 민중에게 가르치고 함께 봉기하여 타락한 여진족 정부를 타도한다는 계획은 충분히 현실성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일전의 500 결사대 북경성 습격보다는 말이다.

    그저 반란군 도적 떼인 줄 알았던 홍건적의 정체와, 그들의 현재 위상을 대강 듣고 난 임칙서는 크게 놀랐다.

    그 빌어먹을 약조 때문에 조선에 신경 못 쓰는 동안 동쪽에서는 아주 천지가 뒤집힌 모양이었다.

    임칙서는 성실한 조정 관리로서 청의 동방 정책을 우려하는 대신, 제일번국 조선마저 그 꼴이 났으니 이제 청의 천명이 유통기한을 다 한 것인가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그런 심경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사람을 흔드는 게 사이비 교주의 필수 자질이다.

    임칙서의 표정만 관찰하던 임청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그 흔적을 잡았다.

    그러고는 은근하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말이 맞지. 이 땅은 광대하여 한 사람이 전단할 바 못 되며, 천하는 천하 인민의 것이지 어찌 한 사람의 것이겠는가. 조선은 인민의 나라가 된 후로 중국을 떨쳐내고 홀로 섰다 하는데, 우리도 인민의 나라를 우선 만들면 장차 영길리국을 내쫓고 도덕을 오롯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크게 호통치고 임청의 뺨을 치지 않은 순간 이미 임칙서는 반역자였다.

    그리고 임칙서는 그것에 거부감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

    시준은 몰랐으나,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곧 국제 혁명을 말한다. 지유가 평양에서 포고한 격문보다는 이쪽이 더 ‘영구혁명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외국이 청나라 하나뿐만은 아니다.

    남대문으로 출진하는 혁명군을 격려하고 평양에 돌아간 시준은 – 성벽에 걸려 있는 자기 초상화를 멀리서 보고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 후에 – 조선, 중국, 영국, 프랑스 중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닌 사람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조슈 번의 간첩, 아니 외교관 모리 후사아키는 이제 시준은 거의 잊어버린 정중한 동작으로 절을 올렸다.

    “금번의 대승을 삼가 경하드리는 바입니다.”

    시준은 사실 그를 보기가 좀 찜찜했다.

    저번에 정약전이 야심 차게 추진한 조슈 번 뜯어먹자 계략은 당시 변경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되었다.

    조슈 번과 도쿠가와 막부를 이간질한 다음 영국과 손잡고 일본 시장에 입성하여 조선의 무기 수출을 좀 뚫어 보려 했는데, 영국을 너무 호구로 본 게 실수였다.

    영국 해군은 같이 무역하러 가는 대신 인상적인 무력시위를 시도했다.

    그들은 홍기방을 초토화시키면서 타이완 섬을 ‘그냥 점거’했다. 그런데 타이완 섬에서 섬 몇 개만 건너면 류큐고 거기서 섬 몇 개 건너면 사쓰마다.

    그리고 현재는 류큐에 슬금슬금 드나들면서, ‘사쓰마 번이 (한 2백 년 전에) 저지른 류큐 왕국에 대한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군사 침략’을 성토하며 사쓰마인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암허스트 남작은 사쓰마의 의기 있는 사무라이가 제발 영국 해군에게 칼 한 번만 휘둘러 주기를 고대하는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위협이 되기는 되었는데, 이제 영국의 미친놈들이 일본인의 호의를 얻기는 요원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수 잘못 두면 혁명막부도 같은 패거리로 몰린다. 영국과 친구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시준은 전생의 업무 자료를 잠깐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영국은 21세기에도 북한과 친한 몇 안 되는 서방국 중 하나였지. 주자가 벗은 곧 같은 무리[朋同類也]라고 했던가?’

    게다가 당시에 혁명막부 혼자 함대 끌고 가서 일본과 무역하고 간첩 심고 마약 팔기에는 뒷감당이 어려웠다.

    도쿠가와 막부의 경계, 조슈 내부의 반발 등을 무마하려면 대신 오만가지 악명을 저 혼자 뒤집어써 줄 – 별로 억울한 누명은 아닐 것이다 – 영국이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박애와 혁명의 일본 무역 사절단은 보류되었다.

    그래서 잔뜩 기대하던 모리 후사아키는 크게 실망했고, 자기 혼자라도 가겠다고 나섰지만 정치국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럴 만했다. 후사아키는 자기가 항로 안내를 한다며 나섰는데, 애당초 후사아키가 왜 여기로 오게 되었는가. 배 타고 오다 침몰해서 흑산도에 표류했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의 항로를 믿느니 그냥 무역 안 하고 만다.

    그런저런 사유로, 전쟁 중의 혁명해군은 행주산성에 갔던 일부를 제외하면 남쪽에서 일종의 탐험 활동에 매진했다. 문순득을 중심으로 하여 호남 조운로를 터는 김에 흑산도에서 제주도까지를 어정거리며 물길을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시준이 평양에 돌아와서 보고받은 바로는 이제 후사아키도 시준에게 할 말이 생겼다.

    “으음……. 제주도 남조선혁명당이 도와줄 수 있겠구려.”

    진짜 뜬금없이 제주도가 굴러들어왔기 때문이다. 경상도 정복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조슈까지의 쓸만한 기항지가 생겼다는 소리다.

    보고가 누락된 것은 아니다. 극히 최근의 일인 데다 전쟁이 너무 급격하게 진행되어, 미처 주석에게 보고될 자료가 정리되기도 전에 시준이 한성부를 떨어뜨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모리 후사아키는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번에야말로 조슈와 조선의 우의 통교에 이 한 몸 불사를 각오입니다. 제발 보내주십시오, 주석 동지!”

    시준은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것인가 하며 옆의 보고서를 다시 들었다.

    ***

    정치국은 지금처럼 보급 불안정한 환경에서 멀리 돌아가 제주도를 칠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하긴 해도 그건 일본이나 남중국으로 나갈 사람들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혁명막부는 우선 조선 내륙이나 잘 처리해야 마땅했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고 물이 적으며 비바람이 사납게 널뛰는 제주는 본래 삶 자체가 하루하루 자연과의 투쟁이다. 막부 기둥뿌리를 뽑아 장거리 해상 원정을 감행해도 그에 걸맞은 보상이 없는 것이다.

    해상 원정은 육상과 차원이 다른 비용이 든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국조차 여진족의 파멸, 쓰시마의 악몽인 공포군주 세종 이도 시절 딱 한 번 한 게 해상 원정이다.

    그렇다고 점령은 쉬운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제주는 사실상 조선 개국 이후에야 한반도 사람들과 같은 정치체제를 공유했으며, ‘육지 놈들’의 방문 자체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

    태종이 탐라성주의 인장을 반납 받아 복속시킨 이후에도 제주도의 독립성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그래도 고려보다는 나아서 목사와 행정관들을 제대로 파견하기는 했지만, 실무에서는 조선 왕실보다 훨씬 오래된 고대 호족들의 입김이 여전히 강력했다.

    이 호족이라 함은 제주도의 3개 거대 씨족인 양씨, 고씨, 부씨다.

    이들은 본래 말 그대로 신화적 가문으로서 언제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옛날부터 제주도의 통치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종의 중간 관리자가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가혹한 봉건 통치 치하에서 백성과 영주 사이의 조율을 맡은 중간 유력 계층과 비슷했다. 일본의 세율은 앙시앵 레짐 따위 자기희생적 통치로까지 보일 정도라 그렇게 가운데에서 타협을 맡아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물론 조선은 그런 어디의 조폭국가와 다르게 도덕국가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은혜로운 세율만 보면 조선은 정말 군자의 나라라는 칭송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그 세율로 국가를 어떻게 운영했는지가 궁금하다면, 한층 더 통 크게 세금을 아예 없애 버린 북한을 보면 된다. 두 나라는 대충 비슷하게 돌아갔다. 애초에 이름이 괜히 같은 게 아니다.

    그러나 국가는 이렇게 군자일지라도 신민까지 전부 군자일 수는 없는 법. 제주 목사 중에 탐학하지 않은 자는 드물었다.

    중앙과 멀어서 뇌물을 뜯기 쉽고, 그 뇌물 중에서는 우황(牛黃)이라든가 전복 등 육지로 가져가면 큰돈을 벌거나 위에 잘 보여 출세할 귀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 목사 자리는 의외로 꽤 인기가 있었다.

    부임하는 길이 뱃길이라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한데, 원래 거는 게 커야 얻는 것도 큰 법이며 모든 조선 사나이들은 천성적 도박꾼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백성들은 자기 고혈을 판돈으로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백성과 목사 사이를 관리해야 하는 중간관리직 호족들도 불만이 많았다.

    그중 독보적인 자가 바로 풍헌(風憲, 지방의 기강규찰을 맡는 향소의 직무) 양제해(梁濟海)였다.

    이 사람은 성만 봐도 알 수 있듯 제주의 토착 호족이고, 원 역사에서도 홍경래의 난을 보고 조선의 명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여 역시 난을 일으킨다. 그것도 딱 올해다.

    TV가 없어서 정보 전달이 섬까지 가기는 너무 느렸던 게 문제였다. 홍경래의 난이 끝나고도 반년이나 뒤에 난을 준비한 양제해는 제주 목사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잡혀 죽는다.

    그리고 지금도 양제해는 똑같은 시점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양제해가 고무된 대상은 홍경래가 아닌 정시준이었다는 점이다.

    주석 정시준이 이끄는 혁명막부의 행보는 양제해가 그동안 상상해 오던 반란 계획의 이데아 같은 것이었다.

    양제해는 역사대로 제주의 교통 차단 계획을 세웠다.

    제주는 거기에 아주 적합하다. 차단은 너무나 쉽고 소통이 오히려 어렵다. 조선 정부에서 이상 징후를 눈치 챘을 시점에는 이미 제주 사람들이 반란 뒤풀이까지 다 끝낸 후일 것이다.

    정시준 또한 반란을 준비하는 동안 의주대로를 차단하여 목적을 모호하게 했다. 양제해는 시준을 참고했다.

    그래서 양제해는 제주와 육지의 주요 교통을 맡아보던 송상들에게 접촉했다.

    송상은 조선 초부터 제주의 말총 등을 수입하고 농기구나 곡식을 내다 파는 무역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다른 상인이 비슷한 무역로를 뚫으려 하면 바다에 묻었다).

    이때 송상 전부를 시준이 장악한 것은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양제해의 호소에도 시큰둥한 반응뿐이었다.

    양제해가 이렇게 된 이상 다음 계획, 그러니까 이번에 온 송상을 전부 어디 올레길에 묻어 살인멸구하고 배를 탈취할까 하는 계획을 막 실행하려 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양제해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양제해의 기대보다 훨씬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양제해는 숨을 들이켰다.

    “남조선혁명당이라고!”

    “그렇소. 풍헌 나리께서 뜻이 높아 보이니 일러주는데, 이미 남조선혁명당은 수령의 탐학을 응징하고 남조선 전역 일제 봉기로써 정 진인을 맞이할 준비 만반이외다.”

    “나, 나도. 아니, 우리도 혁명당 하겠소. 그게 대체 뭐요?”

    그 수상한 남자는 주석 동지의 초상화와 선전선동국의 여러 혁명 교본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양제해는 남조선혁명당 제주지부장이 되어 혁명 전사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이름 바꾼다고 원래 역사와 같은 병력 열세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놔두면 틀림없이 밀고했을 배반자 윤광종(尹光宗)은 새로 정립된 혁명당 사상검증의 엄격한 기준에 걸려 미리 숙청되었지만, 그래도 힘의 차이는 여전했다.

    양제해의 난 당시 제주 목사 김수기(金守基)는 제주의 병력만으로 양제해를 진압했고 지금도 그럴 수 있었다. 어차피 조선 정부가 바다 건너 원군 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여기서 양제해를 도와준 것이 마침 조슈로 가는 길 탐방하러 나온 혁명해군이었다.

    윤광종의 숙청 이후 내부 단속에 골몰하던 양제해는 어부와 해녀(특히 수탈 많이 당하던 계층이다) 중에 있던 동지들에게서 바다에 이상한 놈들이 보인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후는 혁명의 파도가 제주에 몰아치는 일만 남았다.

    그때 혁명해군 분함대를 이끌고 있던 사람은 현재 조선 최고의 외양항해 전문가 문순득이었다. 돌아가서 허락받고 올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문순득은 다소 빠르지만 제주를 인민의 품으로 되찾아오기로 결심하고 적기를 높이 올렸다. 요즘 혁명해군이 구호로 밀고 있는 외침이 남해에 높이 울려 퍼졌다.

    “전 대해(大海) 동시 혁명 만세!”

    혁명은 오로지 속도전. 영길리인 분장조차 벗고 지울 시간이 없었다. 혁명해군 수병들은 하던 대로 영길리 말 지껄이며 맨발로 바닷가에 뛰어들었다.

    애초에 탐사 목적이라 수병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 김수기는 원 역사에서도 그 경솔한 성격 때문에 반란 뒤처리를 잘못하다 파직된 사람이다.

    영길리 놈들이 상륙해서 양총 들고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자 김수기는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제주 목사는 그대로 달아나다가 잡혀 죽었다. 마침 서울이 떨어졌을 무렵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인민의 승리에 감격하여 눈물 흘렸다. 그러고는 제주 인민위원회를 꾸려 그 명단을 인민의 대표 중앙인민회의 앞에 엄숙히 제출했다.

    ***

    처음에 시준은 이 보고가 뭔가의 오류인 줄 알았다. 아무리 혁명에 말 되는 부분이 없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그러나 제주 인민위원회 명단과 같이 올라온 확고한 증거, 그러니까 제주 목사 김수기 이하 현감과 아전들의 모가지를 앞에 두고도 부정하는 것은 건전한 회의론자가 아니라 망상벽 고집쟁이에 불과하다.

    시준은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정 그러면 제주 혁명당에 대해 원조가 있어야 하니 곡식과 무기를 좀 실어 보내고, 거기에서 일부를 갈라 조슈 번주에게 보내는 예물로써 무역을 한다면…….”

    “너무나 신묘한 하교이십니다, 주석 동지!”

    그냥 상식적인 말인데도 계속 주석의 예술영도를 찬양하며 머리로 바닥을 격파하려 드는 후사아키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시준은 이때까지 딱히 혁명정부 소속도 아닌 후사아키가 아까부터 ‘주석 동지’ 운운하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너무 많이 듣는 말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시준은 후사아키의 뜻을 약간 오해하고 물었다.

    “그렇게 고향에 가고 싶은 거요?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우리로서는 계속하여 오갈 사람이 더 긴요한데…….”

    고향 갔다가 좋아라고 튀어 버리면 시준이 갖고 있는 조슈 간첩질의 증거가 에도의 쇼군에게 제출될 거라는 암시였다. 허나 후사아키는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주석 동지. 저는 몇 년간 조선에서 지내면서 주석 동지의 영도와 그것을 따르는 혁명군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민(四民)이 모두 평등하다는 수평론은 일본의 인민들도 누구나 이마를 치도록 제가 잘 기록해 두었으니, 반드시 조슈에 가서 전하도록 하겠소이다.”

    시준은 어리둥절했다.

    ‘왜? 가서 배 가르고 싶어서?’

    150년 뒤의 적군파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의 일본인이 수평도에 느낄 것은 거부감이지 감동이 아니다. 게다가 후사아키는 사족이다.

    후사아키가 배 타려고 있는 아부 없는 아부 다 지어내는 게 아닌지 격하게 의심되었다.

    후사아키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시준은 문득 어릴 때 보았던 만화책을 떠올렸다(일본에 대한 시준의 지식 습득 통로가 그것뿐이다).

    메이지 이신 이후를 배경으로, 과거 동란기에 사람 좀 썰고 다니던 칼잡이 살인마의 이야기였다. 서른 넘은 홀아비가 사시미질 재주 하나로 띠동갑 어린 여자를 만나 잘 먹고 잘산다는 스토리였던 것 같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거기에 종종 나오던 말로 방금 후사아키가 말한 ‘사민평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민평등은 유신 세력, 그러니까 조슈와 사쓰마 번이 구 기득권을 물리치기 위해 주장한 것이었다.

    천황도 있고 귀족도 있고 관리와 순사, 병사도 다 너희보다 높으며 집안과 마을의 봉건적 질서는 유신 이후에도 막부 시절에서 하나도 변한 게 없지만 어쨌든 사민평등의 기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니 지금의 조슈에서도 꽤나 써먹을 만했다.

    ‘아니, 이건 좀 비약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말이 안 된다. 갑자기 굴러떨어진 제주도만큼이나 시준에게 편의주의적 상황이다.

    허나 시준에게는 밑져야 본전이다. 후사아키의 말은 보나 마나 그냥 시준 듣기 좋으라고 지껄인 거짓말일 테지만, 적어도 후사아키는 조선의 주도권이 시준에게 넘어왔다는 점 하나는 가장 잘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역은 일단 틀 수 있다. 그리고 무역만 트면 그다음은 자신 있다.

    평안도 약재와 영국의 무기는 둘 모두 한번 쓰면 또 사지 않고는 못 배길 터. 개항만 하면 그다음은 상인답게 정직한 품질로 승부한다. 그때 가서는 후사아키가 뱃가죽에 검술을 시험하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시준은 마지막 안전장치를 덧붙였다.

    “정치국에서 승인한다면 나도 찬성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그 안전장치는 다음 날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산산이 박살 났다.

    “수평도가 만국에 퍼진다면 그야말로 만국 인민 동시 혁명! 실로 혁명적이오!”

    “이거 청국에도 비슷한 사업을 벌여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만나는 애들은 다 약 처먹고 제정신이 아니라서…… 내 한번 알아보겠소.”

    그렇게 혁명해군 1함대 제독대리 문순득이 표류자 모리 후사아키를  쇄환하는 형식으로 하백을 이끌고 제주에 들렀다가 조슈에 갔다 오기로 했다.

    시준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사는 게 힘들었다. 빨리 일 끝내고 지유가 보고 싶었다.

    그는 미쳐버린 것 같은 주위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당면 현안, 그러니까 조선 국내로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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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의외로 임청이 한 말, <이 땅은 광대하여 한 사람이 전단할 바 못되며, 천하는 천하 인민의 것이지 어찌 한 사람의 것이겠는가>는 혁명적 선언이라기보다 당대 선비들이 몰래몰래 하던 소리였습니다. 이때는 청 정부의 빡센 문화검열 때문에 선비들이 울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발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지어내서 그 나라가 청 황제에게 보내는 외교문서를 가짜로 만든 다음 거기에다가 아무말이나 쓰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말이 자극적이고 재미있기 때문에 이걸 북경에 와서 외교동향 수집하는 각국 사신에게(중요한 임무로, 현대 외교관의 주요 업무이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돌아가면 이거 정리해서 보고해야 했습니다) '기밀'이라며 팔아먹기도 했는데요. 조선 사신도 꽤 많이 당합니다.

    박지원이 갔을 때는 '나약국' 왕이 저 말로 천자를 위협하면서 맞설테면 맞서보자 하는 서신을 역관이 급보라며 황급히 사갖고 오고, 박지원이 그를 보고 그런 설정놀음 국가에 속느냐며 바보라고 타박 줍니다(유람으로 따라갔으면서 정사가 자기 팔촌 형이라고 일에 막 끼어드니 나중에 뒤에서 욕 좀 먹었을 거 같긴 합니다). 어쨌든 그 나약국 왕의 표문;;;에 바로 저 문구가 나옵니다.

    2. 고려 때도 형식적으로는 탐라에 군현을 설치했습니다. 엄연히 영토이지, 제후국이나 속국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지배력이 별로 미치지 않았을 뿐이죠.

    3. 제주도 자체는 가난했지만 다른 곳에서 안 나는 특산물이 나서 착취는 엄청나게 당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복 따는 해녀라거나, 소라거나(제주도 소에서 우황이 많이 났다고 합니다), 목장이라거나... 양제해에 관련된 서술은 반란이 성공했다는 것만 빼고 역사와 거의 같습니다. 올레길은 작은 골목의 제주 방언입니다.

    4. 사쓰마는 작중 서술대로 2세기 전 류큐를 침공합니다. 류큐는 분위기 자체가 목가적이고 평화적인 나라라 전쟁 대비가 잘 안 되어 있었고(화약 무기 이런 거 이전에 '참수'라는 개념도 없어서 사람 모가지를 베는 왜구들에게 크게 기세가 꺾입니다), 그대로 해적 손아귀에 나라가 떨어지죠.

    그 이후는 계속해서 착취당했습니다. 특히 설탕 농장이 주가 되고, 이게 사쓰마가 조슈와 함께 메이지 이신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니까 작중 서술 초점과 달리, 영국 해군이 사쓰마를 침공한다 해도 암허스트 입장에서는 충분히 도덕적 명분이 있는 전쟁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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