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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69화 (169/284)
  • 171화

    50. 영구혁명론(2)

    현재의 베이징은 예전 건륭 치세처럼 아름답고도 기율 있던 제국의 수도가 아니다.

    운석이 부딪쳤을 때 공룡이 멸종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듯이, 영국인이 들어왔는데 질서와 도덕이 멸종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위대한 지배 파충류가 양념 튀김으로 전락한 것처럼 중국의 위엄도 형편없이 추락해 버렸다.

    조선과 달리 중국 상대로는 로드 암허스트도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불쾌한 차별의 이유를 묻는다면 조선과는 전쟁을 안 했고, 중국과는 했다는 차이 때문이다.

    암허스트는 정치와 외교의 기초를 잘 숙지한 사람이었다. 일관성은 어디에서나 중요하다.

    그는 이제 와서 조선에 야료 부려 새로 원한을 사는 것과, 이제 와서 중국에 관대하게 나가 호구 평판을 사는 것 모두 어리석은 짓이란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수병들은 마음껏 행패를 부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녀자가 끌려가고 뒷골목에서 사람이 맞아 죽었다. 그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자 영국 동인도 회사의 마약과 무기 밀매를 막을 자가 없었다.

    백성과 지역 유지들이 호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어떤 정부든 별로 보호하지 않았던 하층민과 약자를 노렸다.

    현대 시민국가에서는 아무리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이라도 투표권 하나는 있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다(19세기라서가 아니고 중국이라서 그렇다. 21세기에도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이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

    영국인들 역시 그것을 잘 안다. 이 시점에서는 영국도 똑같았으니까.

    런던 빈민가의 생활은 야생동물보다 딱 한 가지 점에서 나았다.  귀족의 게임 요리(사냥하여 잡는 요리)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다.

    물론 청은 영국과 달리 도덕이 뭔지 아는 나라다. 그래서 원래 역사에서도 영국의 양민 살해에 꽤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편전쟁에서 얻어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 얼굴 퉁퉁 부은 청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자식들이 영국이란 재앙에 비명을 지를 때 고개 돌리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따라서 ‘주중 영국 공사관’에서 적당히 뇌물이나 협박을 바르면 현재 천진과 북경에서 만연하는 범죄 따윈 없던 일이 되고 만다.

    물론 로드 암허스트 역시 수병들의 사기 진작이나 중국에 대한 화풀이 때문에 범죄 뒷설거지 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 중국 정부 내에 영국의 영향력을 음양으로 침투시킬 수 있다.

    원래 부정부패도 장사의 일종이라 거래처 뚫는 데 시간이 걸린다. 대뜸 돈 들고 가서 청탁하는 뇌물은 성공 확률이 낮다. 암허스트의 친구, 혁명정부 의장 정시준은 이에 대해 잘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행패를 단호하게 틀어막으려면 청의 수많은 실무자가 영국인보다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황제나 그에 준하는 대리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열하의 가경제는 제 아비 건륭제처럼 태상황 자리 노리는 기세로 면녕에게 모든 일을 떠넘겼다.

    북경의 지친왕은 효도를 강조하며 아들이 감히 국사를 전단할 수 없다 운운했다.

    둘 다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었다.

    로드 암허스트 역시 잘 도와주었다. 그는 ‘군주의 권위는 침범하지 않을 것이니 백성이나 빨아먹게 해 다오’라는 제스처를 일관되게 보냈다.

    안으로는 충효가 빛나고 밖으로는 교린이 아름다우니 조화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가경제는 무엇보다 자기 돈 더 쓰기가 싫었다. 전쟁하고 남은 돈으로도 옆의 조선 같은 나라라면 100년을 가뿐히 지탱한다.

    굳이 돈 쓴다면 제국 하나 새로 세워서 떠나는 편이 낫지, 피곤하고 위험한 싸움을 왜 하는가. 그리고 지친왕은 아버지의 뜻을 잘 받드는 효자였다.

    지금 왕조의 명운을 걸고 군대를 일으키면 물론 영길리는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산업혁명 후기 시대도 아닌 영국이 벌써 와서 압도해보겠다고 하기엔 아직 대청국의 힘이 그렇게 약하지 않다.

    그러나 끔찍한 유혈과 혼란, 덤으로 지방 반란의 가속화는 피할 수 없으며, 결정적으로 청 황실은 왜 백성을 위해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군주의 책임을 모르는 이기적인 태도라고 말한다면 가경제와 지친왕은 솔직히 억울했다.

    절대다수 한족 백성들은, 청이 개창한 이후 일관되게 여진족 정부를 경멸했다.

    매일 불평불만을 쑥덕대고 불온서적을 퍼뜨리며 달포마다 소란이고 일 년마다 반란이다.

    되놈의 통치는 못 받겠다면서, 영길리국이 무서우니 이제 와서 만주인 황제가 나서라는 것도 뻔뻔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사소한 소란’은 모두 묵살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부정하겠지만, 강철군주 이공과 혁명주석 정시준이 대청 전략에서 내건 슬로건은 비슷하다.

    ‘사악한 영길리 놈들이 쳐들어오는데 도와주지 않는 종주국이 주군으로서 섬길 가치가 있는가?’

    동생이 맞고 왔는데 나가서 그놈을 패주지 않는 형은 집안에서 더 이상 동생에게 존경받지 못한다.

    다른 학교 깡패가 와서 우리 학교 애들을 갈취했는데 야구 배트나 사시미칼 들고 나서지 않는 일진은 학교 카스트에서 하락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청은 ‘서양국에게 짓밟히는 조선’을 외면했듯이 마찬가지로 백성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과 같은 생각을 청나라 백성도 할 수 있는 것이다.

    ***

    북경은 발달된 대도시이며, 도시라는 것은 분업화가 진행되었다는 의미다.

    자기가 벼 키우고 술 빚을 시간 없는 지식인과 노동자가 많았기에 북경에는 식당과 술집이 성업 중이었다.

    그 술집 중 하나에 진사(進士)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거칠게 들어와서 앉았다.

    얼굴은 희고 눈이 유순하며 손마디가 가느다란 것이 이런 데 드나들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허나 본래 얌전한 사람이 성나면 앞뒤가 없어지는 법. 그냥 씩씩대며 저잣거리를 헤매다가 홧술이나 할까 하고 아무 데나 박차고 들어온 것 같았다.

    과연 그는 매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거나 적당히 내오게!”

    아무리 메뉴판이 없는 시대라도 이런 식의 주문은 좀 난감하다. 허나 그의 차림을 훑어본 주인은 별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며 엉뚱한 곳에 느끼한 시선을 보냈다.

    언어로 번역해 본다면 ‘놓치기에 아까운 고기다’ 정도일 것이다.

    그 시선을 알아챈 술집 구석의 깡패와 부랑배들은 각자 행동을 개시했다.

    누군가는 관심 없는 척하며 누가 또 들어오지 않는지 문을 쳐다보고, 누군가는 청년을 보고 실실 웃으며, 누군가는 자기 쟁반을 들고 와서 청년의 근처 자리에 앉았다.

    몽고인, 위구르인, 만주인, 한인 등 오만가지 인종이 뒤섞여 있었지만 뒷세계는 본래 양지의 구별에 관대하다. 그들은 일사불란한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 청년이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술집 전체에게 포위당한 뒤였다.

    현대에도 ‘들어가면 안 되는 주점’이 있듯이 이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 이 청년은 옛날 건륭 연간 북경에 왔던 연암 박지원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도 박지원은 외국인이고 무엇보다 건륭제가 특히 총애한 조선의 사신단 일행이라 청의 뒷골목 백성들이 건드리기 어려웠거니와, 박지원에게는 숨겨둔 한 수도 있었다.

    연암은 당시 실수로 들어간 어둠의 주점에서 사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어 위기를 모면한다.

    청나라 하남자들의 ‘은행 깍지만 한 술잔’ 따윈 시원하게 담뱃대로 쓸어 깨뜨려 버리고 큰 사발을 가져오라 외친 뒤, 술을 콸콸 담아 들이켠 것이다.

    박지원이 이때 이미 노인이었음을 감안하면 보통이 아니다.

    과연 청인들은 범람하는 요하처럼 뿜어져 나오는 연암의 허세력을 버틸 수 없었는지 끝내 술을 내어 존경을 표했다.

    마침 조선 사람을 해코지하기도 뒷감당이 두렵고, 그냥 모른 척하기도 체면 깎였던 차에 잘된 일이었다.

    허나 지금 이 청년, 임칙서(林則徐)에게는 박지원의 주량도, 외국인의 신분도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높은 기개뿐이었다. 임칙서는 호통을 쳤다.

    “너희가 하찮은 저잣거리 패당으로서 지금 감히 한림원 학사를 위협하는가!”

    깡패들은 벌쭉 웃었다.

    “아니, 우리가 뭘 어쨌다고 그러시오? 남이 들을까 두렵네.”

    “사람을 이리 공연히 악한으로 몰아가시는 노릇이 과연 책에서 가르치는 교화요?”

    “진사 나리라 잘나셨다 이거지. 하찮은 패거리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카악, 퉤!”

    임칙서는 깡패들이 원한 대로 행동했다. 왈칵 화를 내며 젓가락을 집어 던진 것이다. 젓가락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털투성이 위구르인의 가슴에 맞고 떨어졌다.

    그리고 임칙서는 자신이 젓가락에 내공이라도 담아서 발사했는지 의문을 느꼈다. 그 위구르인이 갑자기 죽는소리를 하며 데굴데굴 굴렀기 때문이다.

    “아이고! 아이고! 갈비가 부러졌다! 선량한 양민을 때려 다치게 하다니 이게 지금 선비가 할 짓인가!”

    무협(武俠)이란 말처럼 협기는 폭력으로 지탱된다. 원래 서로 도우며 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가 깡패들인 만큼, 현대에나 19세기나 그들의 동아리 의식은 매우 끈끈하다.

    여기의 대협들 역시 당연히 동료가 당한 부당한 폭행에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벌떡벌떡 일어나서 임칙서에게 다가왔다.

    임칙서는 멱살이 틀어잡히고 나서야 자기가 뭘 실수했는지 깨달았다.

    “이놈, 장차 권귀(權貴)로 나아갈 자랍시고 큰소리치는 모양이다만 오늘 여기의 호걸 어르신들에게는 잘못 걸렸다. 영웅은 공부 따윈 안 하는 법[英雄不會讀詩書]이라 우린 그런 것 알지 못하느니라. 네 각을 떠서 소금에 절여 갖고 팔아버리면 네가 상삼기 고관이라 할지라도 누가 알까!”

    임칙서가 조금만 이런 세계에 익숙했다면, 지금 납작 엎드려서 가진 돈 다 바치고 옷도 벗어 준 다음 도망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호걸 어르신’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칙서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은 양산박 양아치들처럼 독보적 재료의 수제 만두를 생산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잡아먹힐 위기에 몰린 임칙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는 밥그릇을 들어 멱살 잡은 녀석의 얼굴에 꽂아 넣은 뒤 상을 둘러엎었다.

    “이, 이놈 보게!”

    시준이라면 잘 알겠지만 깡패들은 위협해서 돈 버는 게 본업이지 싸우는 것 자체는 본업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도 당황했다.

    하지만 또 수많은 무협지가 증명하는바 주점의 싸움에서 물러나면 대협 칭호 달고 다닐 수가 없다. 숫자도 압도적이었기에 피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변발 사나이들의 격투가 시작되었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20세기 말 홍콩 영화계에서 귀하게 채용할 만한 장면이었다.

    아쉽게도 임칙서는 무예는 그다지 단련하지 못했다. 중국 과거는 조선 과거와 비교를 불허하는 경쟁률. 문사철만 평생 파도 될까 말까인데 예체능까지 신경 썼다가는 절대 합격할 수 없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임칙서는 아까 분명히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하던 위구르인에게 깔린 채 헐떡였다.

    방금 전 임칙서에게 밥그릇으로 얻어맞은 녀석이 그 앞에서 코를 풀어 피딱지를 땅에 내팽개쳤다.

    “이 새끼, 이젠 진짜 죽여 버려야겠어.”

    한림원 학사에게 맞았다고 하면 어디 가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 얼굴에 밥풀 묻힌 그 남자는 흉흉한 기세로 식칼을 들었다.

    대륙의 식칼은 그 위용이 중병기에 필적한다. 본래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에 개탄하여 홧술이나 퍼부을 예정이었던 임칙서는 눈을 부릅떴다.

    ‘이 나라 인민에게 길을 찾아 주겠다는 청운의 꿈이 이따위로 허망하게 끝나는가!’

    그러나 이런 상황이 항상 그렇듯, 깡패들도 솔직히 임칙서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주인이 황제인지 영길리인인지 헷갈리긴 해도 여기는 황도 북경이다. 뒷감당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북경 시민들에게 정부가 너무 인심을 잃어서 관리에 대한 적대감도 있었고, 치도가 망가지다 보니 살림도 어려워져서 이렇게 시비 걸어 술값이나 좀 뜯어볼까 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폭행과 살인은 차원이 다르다(만두소 제작은 말할 나위도 없다).

    뒷골목에서 주먹잡이들에게 망신당한 정도라면 괜찮다. 임칙서는 깡패들도 얼굴 익힌 진짜 고관이 아니고 말단이다.

    임칙서가 어사나 판관에게 달려간다 해도 그 아래 선에서 ‘거 밤길은 조심하지 그러셨소.’ 정도로 정리될 게 분명하다. 본래 관부와 무림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러나 한림원 학사가 ‘살해당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무협지와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무림이 관부를 어떻게 해 볼 힘이 없다. 그 역만 가능하다.

    평소에도 오가는 뇌물 속에 따뜻한 인정을 공유하던 치안 관리들은 어떤 놈이 관부무림불가침의 고매한 선을 넘었는지 단숨에 알 수 있다. 그 후에는 조직 초토화만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놈은 식칼로 애꿎은 바닥이나 퍽 찍었다. 위협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실질적으로는 깡패가 임칙서에게 애걸하는 상황이다. 제발 이쯤에서 끝내고 돈만 내어놓고 꺼지라고 말이다.

    그런데 임칙서가 워낙 모범적 학생이라 그 비언어적 표현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임칙서는 기왕 죽을 거 맑은 이름이나 남길 생각인지 깡패들에게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상황은 양쪽 모두에게 악화일로였다. 그러나 다행히 구원자가 나타났다.

    “형제들. 그쯤 하여 두게. 큰일을 앞둘 판에 피를 보는 것은 길하지 못해.”

    깡패들은 물론이고, 깔린 임칙서도 힘겹게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키에 볼품없는 생김인데, 거기서 또 뭘 더 망가뜨릴 게 있었는지 얼굴에는 옻을 발라 훼손시켰다. 협객 예양(豫讓)을 흉내 내려 한 듯하지만 아파서 반절 정도밖에 하지 못한 듯했다.

    짧게 흉내만 낸 변발 주위에는 머리를 민 흔적이 없다. 원래 대머리라는 얘기. 부스럼을 보아하니 독한 성병이라도 앓은 모양이었다.

    전근대에는 외모가 곧 능력이다. 임칙서는 대체 저자가 아까의 그 중후한 대사를 한 인간이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깡패들은 한 수 접어 주는 모양이었다. 임칙서를 일으킨 그 남자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물었다(임칙서는 추잡한 씰룩거림이라 생각했다).

    임칙서가 성명을 대자 그 사람은 크게 기뻐했다.

    “저런, 나와 동성(同姓)이었군! 나도 속세의 성을 임가로 썼네. 지금은 이미 도를 깨달아 그 이름을 버렸지만.”

    임칙서는 최근 천진에서 온 사람들에게 얻어들은 말이 생각났다.

    조선에서 무슨 장각 비슷한 놈이 도술로써 사람을 모아 홍건적(紅巾賊)을 다시 일으켰다는 소문이었다. 조선은 이미 붉은 물결로 뒤덮여, 왕통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믿기 힘든 말도 함께였다.

    유능한 중국 관리 지망생으로서 임칙서는 그러한 종교 민중봉기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와 원나라가 모두 그렇게 망했고 미래에는 청도 그것으로 사실상 멸망한다. 21세기 중화인민공화국이 파룬궁에 아나필락시스 쇼크를 일으키며 발작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 당장만 봐도 청에는 그런 자들이 훨씬 거대한 악폐로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북경에서 끔찍한 반란을 일으키고도 아직 완전히 토벌되지 않은 천리교 잔당처럼 말이다.

    임칙서는 뭔가 사고의 가닥을 붙잡을 듯한 느낌을 받았다가 놓쳤다. 눈앞에 있는 임가라는 자는 임칙서에게 살갑게 굴면서 먼지를 털어 주더니 어서 한 상 잘 차려오라 호령했다.

    ***

    천리교 후천조사 임청은, 당연하지만 임칙서 앞에서 자기 본명을 밝히지는 않았다.

    아무리 매독으로 뇌가 맛이 갔어도 그 정도 분별조차 없었으면 벌써 잡혀 죽었을 터였다.

    “그래. 책 많이 읽은 분이 군자대로행이라는 말을 모를 리는 없고, 왜 이런 후미진 데까지 와서 욕을 자처하셨는가?”

    임칙서는 역시 그냥 학생이었다. 임청과 불량배들이 정중한 사과에, 푸짐한 술상에, 안 보이는 아부까지 곁들이면서 친한 척하자 단 하룻밤 만에 녹아내렸다.

    미래에는 양광을 누비는 도광제의 흠차대신, 영국이라는 인류의 수치를 단호히 심판하는 정의 집행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임칙서이지만 그때가 오려면 지금까지 산 만큼 더 살아야 한다.

    지금의 임칙서는 이제 막 헐떡대며 과거 합격해 한림원에서 첫 경력을 시작한 애송이다. 아직 관록이 부족한 것이다.

    잔뜩 취한 임칙서는 객기를 부렸다.

    “영길리국 해적도배의 흉악한 기세가 성하여, 이적(夷狄)이 도성에 활개 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소. 그러나 내전(자금성, 즉 청 황제)은 돌아오지 않으며 한 나라에 두 임금을 두었으니 대체 무얼 믿고 따라야 한다는 말이오? 나라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잠시 분별을 놓았소만, 그래도 그 덕에 이리 호호탕탕한 사람들을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인가 보오이다.”

    분별은 아까보다는 지금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임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십 년간 정부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동지를 모으고, 끝내 반란이 실패하고도 목숨과 조직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임청의 사람 보는 눈은 꽤 정확했던 것이다.

    임청은 임칙서의 분노를 슬쩍 떠보았다.

    “허어, 과연. 그렇다면 배운 선비로서 필히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도를 실천할 수밖에 없겠구먼?”

    임칙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람은 원래 술에 취하면 자신을 잘 속이지 못한다.

    그는 지금 백성을 내버리다시피 한 만주족 정부가 과연 존왕해야 할 천자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 조선 왕은 홍건적 떼에 맞서 의기를 떨쳐 친히 군병을 거느리고 출진했다가 지금 생사도 모른다지 않는가.’

    그 행동의 합리성은 둘째치더라도, 임칙서로서는 자기 나라 황제가 도대체 제후만한 용기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에 있는 강철군주 이공과 정략군주 이품이 들었으면, 대국에는 역시 도덕을 아는 선비가 있다며 숙질이 쌍으로 눈물 흘렸을 것이다.

    임칙서는 말없이 술을 한 잔 더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임청은 그 반응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만 그는 여기에서 즉각 우리와 손잡고 청 정부를 엎어보자는 술 확 깰 얘긴 하지 않았다. 임청도 실패에서 얻은 교훈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청은 짐짓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랑캐라고 하니까 말인데, 혹시 조선 홍건적 얘기 들어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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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작중 나온 박지원의 일화는 열하일기 '태학유관록(태학관에 머문 기록)'에 나옵니다. 들어갔더니 불량배가 우글우글해 아차 싶었던 박지원은 짐짓 그들을 위압하기 위해 식탁 위의 술잔을 담뱃대로 쓸어서 던져 깨뜨려 버리고(안 그럴 것 같지만, 이 시대 사람들의 제스처가 좀 다이나믹했습니다. 깃털만 스쳐도 고소할 수 있는 현대가 아니다 보니 보통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갑니다) 큰 잔에 따라서 마십니다.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이는 '용기가 아니라 겁이었다' 라고 솔직히 인정하죠.

    청나라 사람들도 박지원이 덩치도 크고 한 인상 하기 때문에 약간 놀랐을 겁니다. 명백히 조선 옷차림을 하고 있는 박지원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줄초상 날 것도 걱정되었을 거고요. 작중 초반에 잠깐 설명되었지만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이 돈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박지원은 의주 상인이 훔친 걸로 추정) 경로상에 있는 청나라 백성 집 몇 개를 가혹하게 심문하여 물고내 버린 적도 있을 만큼 조선 사신단에 꽤 신경을 썼습니다. 물론 박지원은 18세기 사람인 만큼 이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다들 내일 생각하고 사는 게 아니라는 점도 잘 알았을 테고,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2. 임칙서는 이때 진사로서 한림원에서 공부했습니다(아직 정식 벼슬아치라고 보긴 무리가 있죠). 세간에 유명한 광동 흠차대신 임칙서는 2~30년쯤 후, 여러 경력을 쌓고 난 뒤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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