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50. 영구혁명론(1)
서울 함락의 낭보는 김유근의 사망과 비슷한 시점에 이미 황주까지 올라갔다.
원래부터 인민의 것일 수밖에 없는 의주대로와 역참 위로, 마패 대신 붉은 종이를 지참한 역마가 달렸다. 마패 만들 쇠 있으면 창검과 총알 만들어야 했다.
황주 앞의 천리마 봉화(텔레그래프)가 평양으로 소식을 보냈을 때와 실제 보고서가 정치국에 도착했을 때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황주와 평양이 가깝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만큼 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대한 주석 동지의 대승을 전달받은 평양은 축제 분위기였다.
일부 신중함으로 개성을 표현해 보고 싶은 사람이 한성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패퇴한 이괄의 난을 언급하였지만 큰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혁명전쟁은 이괄 반란의 아류 같은 것이 아니다. 이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러하다.
이 땅에서 기록된 기나긴 전쟁사에 비추어 봐도 시준의 업적은 전무후무라는 이름이 붙어 마땅한 것이었다.
백 년 동란이 배출한 명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조선 최후의 전격전 지휘관 이괄도, 중화의 파괴자 홍 타이지도 도성 단계에서 조선 정부를 붙잡지는 못했다.
그 세 명 모두가 속도에서는 세계 전쟁사에 이름을 새길 만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혈통의 근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이괄은 고성 이씨다).
전주이가 가전의 경공술에 비하면 인간계의 스피드 정도는 하품이 나올 뿐. 허탈하게 빈 한양을 점령한 그들은 ‘어딜 보시는 겁니까,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하고 비웃는 조선왕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기분을 느끼며 격노했다.
그러나 정시준은 그것을 해냈다. 왕실은 그들의 최강 분야인 속도에서 패배했다.
혁명이란, 이렇게 저 오만한 반동 놈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에서 정면으로 꺾어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평양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주석 동지의 절개였다.
주석은 서울을 점거했다고 해서 치사하게 한양의 능구렁이 같은 토착 기득권과 야합하지 않았다. 신왕조를 개창하여 수평도를 배반하지도 않았다.
한양의 고대광실을 정복한 시준은 그 모든 유혹을 거부했다.
반동의 재화에 심취하지 않음은 한고조와 같았고 적개를 불태워 그것을 불사름은 초패왕과 같았다. 두 인기인의 장점만 취한 셈이었다.
그 혁명적 단호함은 반동의 귀신 소굴인 종묘를 철저하게 까부수는 정시준 주석의 위엄찬 그림과 함께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주석 동지는 혁명의 심장 평양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평양성 성루에는 거의 평양성 성문만한 시준의 초상화가 내걸렸다. 평소에는 시준이 초상화 꺼내는 것을 싫어해서 몰래 만들던 물건이지만 주석은 한양 갔으니 이제야말로 마음껏 존경을 표현할 수 있었다.
“혁명 만세!”
“반동의 소혈은 무너졌다!”
‘승리의 날’을 여기저기에서 선언하는 미륵사 사람들 역시 보였지만, 정치국은 아직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서울 함락은 혁명전쟁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정치국은 때 이른 축포를 터뜨리기보다 더욱 바빠져야 했다.
특별정령 225호에서 명시한 4개 영대 창설조차 아직 2개밖에 못 했다.
거기에 서울에 대규모로 집결한 ‘혁명 의용군’에게 대어줄 보급 마련, 영국과 청에 대한 정보 방해 공작, 내부 불순분자 색출 등 승리 전보다 숨 가쁜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대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마련이고, 최고 수뇌부가 이 경천동지할 소식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흥분은 단숨에 불안으로 바뀐다.
이 시점에서 나선 것은, 시준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의외의 사람이었다.
시준이 자리 비운 사이 집에는 병문안 겸 정치적 영향력 확대 겸 해서 부녀회 회원이 몇몇 드나들었다.
시준이 있었다면 가료를 위해 결사적으로 막았겠지만, 지유를 포함해 모든 조선 사람은 시준이 평소 너무 유난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집주인은 지유다. 몸은 피곤해졌어도 사람 만나다 보니 정신적으로는 꽤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주위의 눈에는 더 건강해진 것 같아서 그다지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부녀회장 김부용과 잠깐 얘기를 나눈 지유는, 요즘 평양의 민심이 승리에 흥분하면서도 수뇌부의 부재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짐 싸서 한양 가는 사람도 있고, 이제 대사는 다 끝난 것처럼 굴며 남조선의 반동에게 거둬 올 곡식 수레에서 자기 몫이 얼마나 될는지 세는 사람도 있더군요. 정치국에서 사람들을 다시 한번 단속해 주면 좋으련만 지금 정치국 위원들의 태반이 떠나 있어서 그나마 어려운 모양이외다.”
“그거 매우 큰일이오. 이를 어쩐다?”
주석이 없으면 무너지는 혁명이라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편이 낫다.
시준이 자주 얘기하던 조기 은퇴 계획(지유는 헛된 꿈을 꾸는 남편을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에 꼭 따라 나오던 얘기였다.
시준이 천년만년 살 수도 없으니 영웅적 지도자 없이도 돌아가는 나라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지유도 납득했다.
이제야말로 다른 사람, 그러니까 자기가 행동할 때였다. 혁명사업 좀 하려고 하면 건강 문제로 잔소리하는 남편도 없다.
지유는 곧 김부용과 함께 학식 있는 야학 출신 여인들을 모았다.
그러고는 함께 사람들을 안심시킬 여러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지유가 가내에서 남편이 없는 동안 집안을 전단하니, 마찬가지로 주석이 없는 동안 안을 보살피는 큰 대강을 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혁명이라는 면에서는 합격점이 될 수 없는 의견이지만 그 의도 자체는 지유에게 전달되었다.
현재 조선에서 현대인의 일대일 수업을 가장 많이 들은 자는 다름 아닌 지유다. 게다가 지유는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책을 읽을 시간도 많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무학자가 아니었다.
혁명부녀(革命婦女)라고 자처하며 가내에서의 수평도를 주장하는 야학 출신 양계 여인들의 정신적 지주이고 자랑스러운 대표자였다.
지유는 세필을 들고 첫머리에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전까지 동아시아의 모든 격문은 부르는 사람의 계급을 각각 따로 호칭해야 했다.
공사천민과 부로자제를 말한 홍경래부터 왕후장상과 제후 공경과 백성 인민을 따로 불러야 하는 중국 황제까지 그것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은 오로지 수평한 인민 하나이기 때문에.
<온 세상의 자랑스러운 혁명 동지들!>
그렇게 시작한 지유의 붓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올해는 사람의 정사(政事)에서 태고 이래 없었던 새로운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부녀가 입에 올리기 난폭하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것은 싸움, 그러니까 투쟁의 기틀이라 할 것입니다.
작년까지 우리는 인민의 상조(相助)로써 곡식을 나누어 굶주림과 맞서 싸웠고, 황무지를 갈고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 흉년에 맞서 싸웠으며, 무엇보다 우리를 다시 그들의 종 삼으려 눈이 벌게진 반동의 무리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겁고 격렬한 투쟁은 바로 모든 동지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모든 인민의 총의를 대표하여 뽑힌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승인 아래, 경애하는 주석 동지와 용맹한 혁명군은 예부터 군인의 명예라는 정월의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공전절후의 혁명적 대전을 수행할 열의에 차 넘친 혁명군의 붉은 깃발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정방산성은 붉은 깃발의 노래에 무너지고, 행주산성에서는 왕이 제 조상처럼 아홉 번 고개를 조아렸으며, 한양도성은 분노한 인민의 손에 뒤집혀 함락되었다 합니다.
가내에 들어앉아 있는 부녀자인 저에게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혁명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아직 남조선은 평정되지 않았습니다. 반동은 그간 인민에게 갈취한 재산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들은 호시탐탐 인민들을 다시 채찍질할 날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전선에 나간 혁명군의 싸움만이 싸움은 아닙니다. 우리가 북쪽에서 보내 주는 옷과 총과 화약과 붕대와 곡식이며 마소는 모두 혁명군의 치중이고 반동에 대한 단호한 결의를 뒷바라지하는 투쟁입니다.
주릴 때마다 우리의 뱃속을 가득 채울 혁명정신을 떠올리고, 추울 때마다 우리를 불타오르는 열의로 감싸줄 적기를 떠올리십시오.
힘들더라도 상조농장에서 땀 한 방울을 더 흘리고, 공창에서 쇠질 한 번을 더 하며, 혁명모자 하나를 더 꿰매어 잇는다면 그 모든 사람이 혁명의 전위대인 것입니다.
저 또한 주석의 아내가 아니라, 한 사람 혁명에 몸 바친 인민으로서 사소한 병은 치열한 신심으로 털고 대바늘과 양털이나마 잡고자 합니다.
……
동지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이 승리를 소리 드높이 축하하며, 그 함성을 앞으로의 싸움을 위한 힘으로 바꿔 나갑시다. 주석 동지께서 연설하신 전 조선 동시 인민 혁명의 완성은 끝없는 싸움으로만 다다를 수 있습니다.>
‘주석의 부인’은 지유의 개인적 위치이지 공식 직함이 아니므로, ‘평안도 부녀회 부회장의 서신’이라는 겸손한 제목이 붙었다.
이것을 정서한 사람은, 예전 남공철의 가짜 연행사에 어리둥절 끌려왔다가 그대로 울며 눌러앉아 대서소 비슷한 노릇을 하고 있던 김정희였다.
평양 인민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시준도 환영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 혁명 열의에 학문이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지를 무식하다 폄하하는 모욕은 당치도 않다. 모든 것은 교활하게도 인민에게 면학의 기회를 수탈한 반동의 탓이다.
그래서 문서 업무를 봐야 하는 여러 중간관리직들은 김정희에게 감자나 옥수수 좀 찔러주고 대필을 부탁하곤 했다.
현대 사무보고서의 성공적 결재 가능성에 폰트가 큰 영향을 미치듯, 이때도 글씨의 미추(美醜)는 문서 업무에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김정희는 곧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슨 간부라고까지 하기는 어려웠던 처지다. 김정희는 이 기회에 주석 부인과 끈을 만들어 안정적 지위를 보장받을 생각으로 그 명필의 붓에 영혼을 담았다.
그 유려한 필체와 절절한 내용은 이강회가 임시 주재한 정치국 회의에서 발표되어 모든 위원을 감동시켰다.
인쇄본을 읽게 된 많은 평양 부민도 혁명의 열의를 새로이 다졌다.
그렇다. 승리는 한 번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다.
혁명은 계속해서 싸워 계속해서 승리할 것이다.
이틀도 안 되어, 평양의 모든 생산 활동에 ‘투쟁’의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이제 곧 만춘이라 사람들의 활기도 넘쳤다. 씨뿌리기 투쟁, 꼴베기 투쟁, 고기잡이 투쟁, 굴파기 투쟁 등 아무튼 일 대신 투쟁이라고 이름 붙이면 힘이 났다.
사람들은 광산에서 계획된 양을 다 캐낼 때마다, 혹은 작정해 놓은 너비의 논밭을 다 갈 때마다 ‘전투에서 승리’ 했다며 적기 아래 모여 자축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투쟁 중의 투쟁에 나선 혁명군의 귀중한 병참이 될 것이었다.
그야말로 모두가 혁명군이었다. 전 인민의 무장화는 우선 사상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
주석 정시준은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지만 평양 인민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평양에서 부인이 주창했다는 <영구혁명론(永久革命論)>은 시준에게도 재빠르게 전달되었다.
환생 이후로 현실이라는 것의 범위를 상당히 폭넓게 해석하게 된 시준은, 혹시 지유에게 트로츠키가 빙의했나 하는(환생도 했는데 빙의가 안 될 까닭은 뭐란 말인가) 망상에 잠깐 사로잡혔다가 깨어났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사실 지유가 말한 것과는 별 관계 없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시준은 트로츠키에 대해 키워드나 몇 개 아는 수준이다.
시준이 생각한 바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시준은 자기가 숨겨진 이면의 상황을 현대인다운 통찰력으로 꿰뚫어 보았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부인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지유가 내 말을 잘 들었다면 그런 일을 하러 나설 리가 없는데……. 아마 기랑이 때처럼 주변 사람들이 순진한 지유를 꼬드겨서 명의만 갖다 쓴 거겠지?’
시준은 보궐선거 선포 때문에 돌아갈 예정이었으면서도, 서울에서 워낙 일이 많아 남은 날짜를 하루하루 잘라먹으며 업무에 파묻혀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 집어치우고 한시라도 빨리 평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낯설고 두려운 사람들 틈에서 정치적 요구를 받고 있을 지유를 지켜 줘야 했다.
물론 그러려면 최소한 혁명군의 남진 재개에 대한 구체적 지시는 내려놓고 가야 한다.
시준은 급히 서둘렀다. 그가 가장 먼저 마무리한 것은 한양의 위치를 확실하게 정해 놓는 일이었다.
시준은 김조순과 원자를 포함해서 한양에 갇힌 모든 주요 포로를 자신이 평양 돌아가는 길에 함께 압송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육로가 아니라 혁명해군을 동원해 배에 태워, 중간 탈출 따위는 꿈도 못 꾸게 만들었다.
전주이가의 말예가 둘이나 있어 방심할 수 없었다. 한 명이 어린아이라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시준은 종묘와 같은 방식으로 인달방의 사직단(社稷壇)까지 밀어버렸다. 현대에는 조그마한 건물만 있지만 원래 주변의 넓은 숲까지 포괄하는 큰 시설이라, 땔감만이 아니라 훌륭한 목재 자체도 짭짤하게 수급했다.
선비들은 한번 망설여 보지도 않는 시준에게 경악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 시준은 창덕궁과 경희궁의 모든 목재가 인민에게 부여된 땔감이라 선언했다.
이미 익숙해진 한성 부민들 역시 궁궐은 안 뜯나 하고 기웃대던 상황이라(이번에는 가장 먼저 대포에 불붙여 보겠다는 야망 가진 사람이 꽤 많았다) 복잡한 연극 할 것도 없이 호응이 이루어졌다.
문화재 보존에 대한 염려는 시준도 했다. 딱 한 번만. 그러고는 폐기했다.
어차피 문화재라는 것은 정치적 문제다.
탈레반이 집권하자 바미얀 석굴은 문화유산에서 이교도의 불경한 우상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지 않았다면 조선총독부 건물도 버르장머리 고치는 데 소모되는 대신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혁명막부가 탈레반이 될지, 대한민국이 될지는 역사가 판단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놓아들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같다.
미래의 관광자원은 미래가 있어야 논할 수 있는 법. 혁명막부는 조선 전제 군주제의 잔재를 말소하지 않고서는 존속도 장담하기 어렵다.
‘문화재는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메시지지.’
시준에게 권력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각인시켜 줘야 한다.
그래야 시준도 조만간 찾아올 즐거운 은퇴 생활 때 갓 찌그러진 선비가 국왕 전하 만세를 외치며 폭탄 들고 달려드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시준은 만상 생활로 잘 알았다. 어설프게 밟아 놓으면 기어오른다.
시준은 미래 옆 나라 호색한이 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는지 알 것 같았다(시준은 모르지만 대형 초상화가 성벽에 걸려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시준은 초췌해진 남공철 앞에서 무심코 말했다.
“아무튼 빨리 끝낼수록 좋아.”
남공철이 얼른 받았다.
“그렇지요. 주석 동지. 청국과 영길리국의 동태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든 힘을 모아 남벌(南伐)을 완수하고 즉시 군을 다시 복귀시켜야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이다.”
아까까지 딴생각하던 시준은 남공철의 말을 좀 늦게 알아들었다.
그래서 시준이 조금 후에야 대답했을 때, 사람들은 주석 동지가 깊은 심찰 끝에 신중한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 말씀이 옳소. 부국장 동지. 기왕에 한성부를 인민의 품으로 탈환하여 기세는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으니, 모든 혁명군은 지체 없이 다시 남으로 깃발을 돌려야 할 것이오.”
그러려면 후방을 맡아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혁명군은 군대를 조선 전역에 차근차근 주둔시키면서 점령할 시간, 인력, 자금이 모두 부족하다.
그래서 그동안 모은 민병을 얼기설기 짜 맞추어 서울 방어와 보급로 유지에 충당할 준비를 하고 있던 정약전은 그냥 평양에 남아 있을 걸 하고 후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총괄서결국장 동지께서 조금만 더 수고해 주십시오.”
정약전은 피로한 표정으로 궐련을 물었다.
“외사통호국장 동지로 하여금 제 일을 돕게 하여 주신다면 함께 분골쇄신하겠소이다.”
정약용은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정약용은 시준이 없어지면 통제 풀린 혁명군이 왕릉을 파헤치거나 실록을 불태울까 봐 한성부에 남기를 청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시준 역시 인건비 낭비는 용서치 않는 19세기의 잔혹한 자본가다. 그래서 시준도 정약전의 말을 기쁘게 받았다.
“외사통호국장 동지는 마침 한성부에서 때를 기다릴 일이 있을 테니, 그동안은 총괄서결국장 동지를 힘써 조력해 주시구려.”
‘기다릴 일’이란 것은 이제 정약용도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반박도 못 하고 형의 물귀신 작전에 끌려들어 갔다.
로드 암허스트의 편지로 보아 영국은 이미 나폴레옹의 패배 소식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시준은 짐작했다.
그러면 그 탐욕스러운 영국의 고삐를 그나마 죄고 있던 가장 강력한 손아귀가 사라지는 셈이다.
‘기왕 역사가 바뀌었으니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복귀한 뒤 워털루에서 화려하게 영국군을 압살해 주면 당분간 괜찮아지려나?’
그러나 유럽의 역사를 그렇게 대규모로 바꾸기에는 시준이 딱히 유럽에 관여한 게 없다.
굳이 꼽자면 조제프 푸셰의 부재 정도인데, 푸셰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게 나폴레옹의 전쟁에 특별히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거기까지 소식 오가는 시간이 있으니 현대처럼 즉시 정책이 변하고 군대가 증강되거나 하지는 못할 테지. 적어도 1815년, 워털루 전투와 그 직후…… 빈 체제였던가? 유럽 개편이 완료될 때까지는 괜찮아. 암허스트 독단이라면 몰라도 영국 본국이 그 전에 조선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
그러면 때맞춰 로드 암허스트만 좀 바쁘게 만들어 주면 된다.
친구 하나 만나서 밥 먹으려면 이틀은 각오해야 하는 시대다. 1815년에 효과를 기대하려면 지금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시준은 정약용에게 별도 지시를 내리고 서울에 대기시켰다.
영국인이 어떤 놈들인데 시준의 정부가 안정되고 충분히 논의해 회신을 주기까지 얌전히 기다릴 턱이 없다. 보나 마나 곧 개항 개항 하고 울면서 기어들어 올 것이다.
물론 조선도 거기에 대항할 특기가 있다. 시간 끌기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왕국과 공화국 둘 모두에서 증명된 사실이지만, 중국은 ‘조선’에 불이 붙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나라였다. 어쨌든 같이 타죽을 수는 없으니까.
시준은 중국이 이번에도 조선을 돕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여진족이어선 안 된다. 여진족은 중국일지언정 중화일 수 없다. 200여 년 전 조선을 도와준 중화는 여진족이 아니었다.
황제나 지친왕이 아니라, 먼 서쪽에 있는 시준의 옛 친우를 찾아보라는 것이 시준이 막부의 외교 책임자에게 내린 지시의 대강이었다.
========================
작가의 말
1. 작중에서는 평안도에서 기르는 종자의 경우 영국을 통해 새로 들여왔긴 하지만, 옥수수 자체는 그 훨씬 전부터 주로 포르투갈->명나라 루트를 통해 조선과 일본에 전래되었습니다. 한자로는 촉(薥)이라 하며, 옥(玉) 같은 촉서(蜀黍, 수수)라 하여 옥촉서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옥수수와 옥촉서는 같은 단어죠.
2. 이괄은 기민한 회피 기동과 재빠른 진군, 기습의 적극적 활용으로 명분과 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양을 일시 점거하는 성과를 올립니다. 단지 인조가 더 빨랐을 뿐입니다.
이괄과 내통'할지도 모르는' 북인 인사 수십 명의 목을 단칼에 치고 공주로 튀어버리죠. 병자호란 때도 그 폼을 유지했다면 안 잡혔을지도 모릅니다. 이괄은 관군에 정면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전력인지라 뒤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인조를 잡지 못한 순간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3. 영구혁명론은 연속혁명론이라고도 하며, 아주 간략히 말하면 연속적, 국제적으로 전 세계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상을 말합니다.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러시아부터 혁명을 완성하여 사회주의의 다음 단계인 공산주의로 나가자)와 대비되어 계속해서 다른 나라와 연대하여 동시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상이지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공산화는 확고하게 전 인류의 것이며, 국가나 민족, 종교 같은 '억압 도구'는 보통은 말살 대상이고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부차적, 임시적이어서 최종적으로는 폐지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인터내셔널가'가 그래서 혁명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원론적으로는 트로츠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허나 어쨌든 트로츠키는 졌죠.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은 단지 이 두 가지 사상의 대립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로는 스탈린의 수단과 사상이 더 현실적이었기에 승리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작중 표현된 것처럼 지유의 격문과 트로츠키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판사님도 아시겠지만 작중의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과는 거리가 있기도 하고요.
4. 사직단은 인왕산 산자락 바로 밑, 그러니까 경복궁에서 서대문 가는 길에 있습니다. 지난화에 종묘사직 설명 부분에서 '좌묘우사'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래서 남면하는 왕 기준으로 좌측(동쪽)에는 종묘가 있고 우측(서쪽)에는 사직단이 있는 것이지요. 기준점은 경복궁으로, 종묘와 거의 붙어 있는 창덕궁이 경복궁 동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