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67화 (167/284)

169화

50. 신은 죽었다(2)

붉은 용사들은 차형기의 인도하에 안으로 들어갔다.

종묘 기둥을 도끼로 찍으면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을까 하며 주저하던 시민들은, 곧 눈치 빠른 몇 명이 재빠르게 톱질을 하거나 장지문을 뜯어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나머지 사람들도 상황을 깨달았다.

차형기의 ‘명부’는 무한한 것이 아니며, 쌀 역시 그렇다.

지게로 힘껏 져가는 사람부터 선착순이라 하니, 끝까지 망설이면 종묘가 사라지거나 쌀이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다.

곧 사람들은 광분하며 종묘에 달려들었다.

“너 임마, 좀 보고 휘둘러라! 대가리 날아갈 뻔했잖아!”

“으아악! 내 손가락!”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먼저 봤단 말이다!”

“이런 쥐알봉수 같은 작자가. 잡은 사람이 임자지 어찌 본 사람이 임자인가! 어디 하늘의 해도 네가 먼저 봤으니 임자라고 하지 그래!”

조선에서 귀한 물건인 금속기는 다행히 혁명군이 이미 입경 첫날에 약탈했기에 차형기는 그것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개중에는 기운이 모자라서 다른 방식의 채취를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라. 자네 그 궤짝은 뭔가?”

“안에 있던데?”

“쇠징과 경첩이 박히고 칠보로 꾸며진 것을 보니 필시 귀한 물건일 터. 그건 혹시 옛날 왕자가 안에 갇혀서 여드레를 몸부림치다가 죽었다는 그 뒤주가 아닌가?”

“헉! 그, 그게 정말인가? 하, 하지만 아까 정 진인의 영압인지 뭔지로 원혼이 달아나지 않았을까?”

“세상에 가장 독한 게 굶어 죽은 원귀일세. 자네 자식이 넷인데 동티라도 나면 어쩌려는가. 내 아는 무당이 있으니, 그 불길한 물건은 내게 넘기고 다른 거 찾아보게.”

완력과 혓바닥이 뒤엉키는 난장판 끝에 종묘는 실시간으로 해체되었다.

신민은 그들의 군주와 그 선조를 엉망진창으로 능욕했다.

이제 그들은 복벽을 바랄 수 없다. 그랬다간 당장 자기들부터 사지가 찢겨 젓갈 신세로 전락할 테니 말이다.

여전히 뭔가 방언을 중얼대고 있는 이제초를 남겨둔 채, 시준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종묘 담을 넘었다. 그는 진인답게 ‘연기처럼’ 사라져야 했다.

***

정약용과 푸셰는 종묘를 까부수는 폭도를 두 사람이 멈출 수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푸셰는 멈출 생각도 없었다).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은 늙은이 둘은 우두머리를 잡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나가는 혁명군을 붙잡고 물어 비변사로 직행했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인상적인 시민 참여 행사였지만 시준이 그것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시준은 종묘에서 나오자마자 호위로 기다리던 기랑과 함께 비변사에 돌아갔다. 그래서 정약용과 푸셰는 의외로 금방 시준을 만났다.

현재 혁명군 간부들은 서울 여러 군데에 흩어져 일하고 있어서 비변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약용은 주석 동지고 뭐고 내팽개치고 시준에게 다가들었다.

“종묘를 불태우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화들짝 놀란 시준은 현대인에서 조선인으로의 전환 스위치를 넣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언성을…… 그렇게 언성을 높이지 마십시오. 선생님.”

“언성을 낮추게 생겼느냐!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로구나!”

부끄러웠다. 다만 이유는 좀 달랐다. 시준은 속으로 이제초를 욕하면서 정약용의 소매를 잡았다.

“선생님, 일단 고정하시지요.”

푸셰는 흥미롭다는 듯 시준을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시준이 정약용을 일컬어 ‘외사통호국장 동지’라고 강하게 발음하여 호칭했다면 그건 상당히 거칠고 조악한 위계 정리 방법이다.

그리고 그 통쾌함 때문에 젊은이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준은 정약용의 분노를 물 흐르듯 흘려버림으로써 정약용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만들었다.

사람은 자기도 알 수 있는 것을 남이 강압적으로 가르칠 때 큰 불쾌감을 느끼며, 그것은 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연 정약용은 시준의 겸손한 호칭을 듣고 간신히 진정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무례를 범했소. 주석 동지.”

푸셰는 생각했다.

‘스무 살짜리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재능 있는 청년이라면 푸셰도 많이 봤다. 프랑스 혁명기는 서툰 젊은이들의 마구 내뱉은 호언장담이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지던 꿈의 – 악몽일지, 환상적인 꿈일지는 입장에 따라 다르다 – 시대였다.

위대한 바보들의 시간.

청년들의 열정은 혁명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머저리 같은 실수와 끔찍한 실패, 쓸데없는 원한도 동시에 우글우글 불러왔다. 젊은이의 정력과 열정은 그에 뒤지지 않는 등신짓이 있기에 가능한 추동력이다.

그건 분명히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비효율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푸셰는 강철군주 이공을 꽤 좋아했다.

그런데 시준에게는 그게 없었다.

시준은 필요한 경우 늙은이의 인내심과 젊은이의 폭발력을 둘 다 발휘했다. 호인의 유쾌함과 악한의 잔인함도 도구처럼 자유자재로 나누어 썼다.

시준의 영민함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감정의 통제가 푸셰에게는 더욱 신기했다. 인간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하지만, 그러면 오래 못 버틸 텐데. 이성은 타인을 만족시키는 데 쓸지라도 감정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 써야 한다.’

푸셰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시준은 정약용의 사과를 사양했다.

“제자이자 아들에게 어찌 무례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먼 길 시장하셔서 기운이 흐트러진 듯합니다.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우선 저와 같이 한 끼 잡숫도록 하시지요.”

그렇게 정약용의 의분을 그저 배고파서 생긴 짜증으로 은근슬쩍 격하시킨 시준은 기랑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급양과장답게 오늘 시준의 저녁거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아까 종묘에서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새끼돼지가 그것이었다.

밖에서 진짜 대포를 쏴 갈기는 상황에서, 그 엄숙한 종묘 정전에 들어앉아(종묘는 외삼문에서 일직선 구조가 아니라서 대포에 맞진 않는다) 태연히 돼지 멱을 딸 수 있는 인간은 시준이 아는 한 기랑 정도뿐이다.

만상 시절 중국에서 들여온 돼지는 이제 평안도에서 꽤 흔하게 치는 가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슨 고기든 가성비 제일의 요리는 물과 함께 푹푹 끓이는 것이어서, 시준의 솜씨를 자주 맛볼 수 있는 지유를 제외하면 다들 돼지국밥 정도가 한계였다.

그래서 시준에게 나도 지유처럼 ‘돈까스’인지 뭔지를 해 달라고 조르려던 기랑은 정약용과 푸셰를 보고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기랑은 허리에 매달아 놓은 작은 기름병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애처로운 얼굴로 시준을 돌아보았다.

“입이 늘었는데?”

시준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정약용과 푸셰는 헛기침을 하며 자기들은 늙은이라 원래 소식을 한다고 해명해야 했다(더러워서 안 먹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

시준이 종묘에 방화를 했다는 명제는 엄밀히 말해서 틀렸다. 방화는 했지만, 불 지른 시점에 그것은 종묘가 아니었다.

종묘 자체는 해가 지기도 전에 군중의 손 아래 사라졌고, 정약용과 푸셰가 본 연기는 쓸만한 거 다 가져가고 남은 잔해, 이를테면 위패 같은 것을 태운 연기다(겸사겸사 노동으로 배고픈 사람들 저녁도 지었다). 규모가 크다 보니 방화로 착각되었을 뿐이다.

정약용은 석쇠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돼지고기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기랑도 한숨을 푹 쉬었다. 기름이 모자라서 돈까스 대신 한국식(조선식이 아니다) 돼지목살 생고기 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제프 푸셰만이 정신없이 고기를 집어 먹을 뿐이었다. 소금만 뿌려 구운 심플한 요리지만, 고기만 좋다면 요리법은 복잡할수록 낭비다.

냉동 따위 거치지 않은,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생고기. 게다가 야들야들한 새끼돼지의 육질이다. 이것은 프랑스 미식가 푸셰도 높이 평가했다.

정약용은 입맛 없다는 표정으로 고기를 쳐다보다가 눈앞에 있던 술만 한 잔 죽 들이켰다.

시준은 종묘의 신위 모욕에 대해 여러 가지 변명을 준비해 놓았다. 그 중에는 당신 형도 즐겁게 같이 위패 태웠다는 증언 또한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영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모두를 다 함께 패륜의 길로 끌어들여 패륜 아니한 자가 오히려 패륜자 되는 세상을 만드려는 게냐.”

시준의 의도를 명백히 꿰뚫어 본 말이었다. 시준이 대답하기 전 푸셰가 수염에 묻은 기름을 닦고 입을 열었다.

“민중의 그릇은 견고하지만 크기는 크지 않소. 혁명을 집어넣으려면 다른 것을 빼어야 하지.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세월 인민을 착취하던 교회를 배척했소이다.”

푸셰의 첫 경력이 가톨릭 사제, 그것도 수도원에서 후학을 길러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타향이라고 못 하는 소리가 없다 할 것이다.

“인민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며, 신이 인민을 구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오. 프랑스 국내에만 그친 게 아니지. 뇌샤텔 대공 루이알렉상드르(Louis-Alexandre, 나폴레옹의 원수(元帥) 베르티에(Berthier) 장군을 말한다)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교황을 체포했소이다. 실로 그것은 혁명적이었소. 조선으로 치면 혁명군이 중국 황제를 사로잡아 온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오.”

시준은 교권만 가진 교황과 속권까지 가진 중국 황제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푸셰가 떠드는 동안 시준은 정약용과 대거리하는 대신 고기를 집어 먹을 수 있으니까.

정약용도 지금 조선의 신앙 파괴와 프랑스의 신앙 파괴를 비교하며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시스티나 대성당에 군홧발로 쳐들어온 베르티에의 혁명군에 의해 교황이 발랑스(Valence)로 끌려가 옥사한 15년 전의 굴욕은 시작일 뿐. 프랑스의 가톨릭 박해는 통령 정부 이후로도 현재 진행형이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엔 교황령을 간신히 회복하여 좀 나으려나 했지만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카노사의 굴욕 이후 유럽의 모든 왕이 갈망하던 바로 그 권리, 주교 임명권을 교황에게 얻어냈다.

열왕의 위에 올라선 나폴레옹의 다음 수순은 당연히 황제. 교황은 대관식도 해 줬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이 나폴레옹을 위한 딸랑이로 착각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황제관 받아 쓴 것으로 교황에게 볼일은 끝났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교황령을 통째로 없애버린 뒤 교황을 다시 감금했다.

정약용이 서양의 초패왕이라 평가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다만 나폴레옹 역시 동양인에 비해 조금 하남자일 수밖에 없는 유럽인이었던지라 교황을 초 의제처럼 강물에 던지지는 못했다는 점이 다르다.

현재는 참다 참다 폭발한 교황이 나폴레옹을 파문하려다 – 달력을 천 년 정도 잘못 본 게 분명하다 – 파문빔 발사기가 작동 오류를 일으키는 바람에 다 쓰지도 못한 문서가 유출되고 퐁텐블로에 끌려가 구속된 상태다.

그래도 오랜 조직의 힘 자체는 쉬이 사라지지 않아서 아시아에서는 가톨릭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황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정약용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원래 고대 ‘중국인’은 선조[宗]를 사당[廟]에서 제사하던 조상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은나라는 조상신 제(帝)를 모시고, 주나라는 천(天) 개념의 최고신을 설정하는 등 세부적인 부분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선조는 존숭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주 왕실은 원래 은나라의 서쪽을 방위하는 변경백, 말하자면 서부대공 같은 위치였다(쾌활한 금발 미남이라는 기록은 특별히 없다).

이들이 변경의 ‘야만인’과 싸우고 후에 중화 개념을 확장하면서 주변 이민족의 이교(異敎)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땅의 신[社]과 오곡의 신[稷], 다시 말해 농경신이 그것이다. 이를 조상 신앙과 병렬하는 식으로 민족 화합을 꾀했던 주나라는 조상신을 왼쪽에, 농경신을 오른쪽에[左廟右社] 두었다.

이를 통틀어 종묘사직이라 한다. 그리고 이후 수천 년간 동아시아의 모든 백성들은 이 두 신을 섬겨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럽의 왕을 축복하였다면 종묘와 사직은 좌우에서 조선의 왕을 수호한다.

정약용은 현대인인 시준처럼 서구 기독교도적 신앙[religion]을 기준하여 종교와 학문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익숙한 ‘가르침[敎]’을 기초로 서양 신앙을 파악했다.

비교에 약간 무리는 있지만, 정약용은 이를테면 유학의 여러 학파와 같은 선상에서 서양의 종교사를 보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가톨릭을 없애야 했던 혁명가와 조선에서 종묘사직을 없애야 했던 시준의 처지를 동치시킬 수 있었다.

가톨릭의 장녀 프랑스 왕가는 인민의 적이다. 그렇다면 그 애비도 인민의 적이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은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요. 선전선동국장 동지. 이 혁명은 무왕이 은을 쳤던 혁명조차 혁명하는 것. 전에 없던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것. 인민[民]이 스스로 주인[主] 된다 하는 말은 그 위에 군왕과 귀족뿐만 아니라 어떤 주인도, 천지신명과 일월성신이며 부로 선조까지 정녕코 어떤 주인도 없다는 뜻이었군요.

하늘이 천명 내렸다 하는 군주를 없애려면 하늘부터 없애야 하는 법.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또 인민을 억압하는 다른 아들을 낳겠지요. 이 사람은 오늘에야 혁명의 진의, 바로 민주(民主)라 이름해야 할 바를 새로이 알게 된 것 같소이다.”

회귀자 의심리스트 1위인 김창시가 이상한 영감을 받을까 봐 민주라는 말을 한 적 없던 시준은 약간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푸셰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소! 고대 중국의 황제(탕왕을 말한다)는 날로 새롭게 한다[日新又日新]는 말을 그릇에 새겼다지. 지금 조선인들이 섬기고 있는 고대의 신앙도 그때는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소. 이제 우리가 만들 차례요.”

그러고 나서 능숙하게 젓가락을 집어 든 푸셰는 고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정약용이 자신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가장 큰 조각을 입에 집어넣어 우물거렸다.

정약용은 고기에는 관심 없고 푸셰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푸셰는 뭔가 더 할 말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고기를 삼키고 나서야 자신이 서대문에서 독일어로 감탄했던 일을 떠올렸다.

“아직 젊긴 하지만, 뷔르템베르크 사람 프리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은 보기 드문 지성을 갖추고 있지. 그는 내가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쯤 해서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을 탈고하였던바 나도 구하여 배에 싣고 왔소. 감동적이더군. 주석 동지께도 선물하였으니 읽었을 거요.”

안 읽은 시준은 찔끔했다. 애초에 독일어도 모른다.

게다가 시준은 대학생 때 강의 때문에 어거지로 『순수이성비판』을 완독한 적이 있다.

시준의 결론은, 독일 놈들이 앉아서 이런 생각만 하니까 미쳐가지고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그 후 시준은 전범국의 사특한 학문을 끊었다.

다행히 푸셰는 시준에게 책 내용을 말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말하고 싶으니까.

“그는 저서에서 신은 죽었다[Gott gestorben ist]며 자기 확신에 찬 오만자의 파멸을 비통하게 드러냈지요.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소.

그것은 뒤에 다른 말이 덧붙여짐으로써 가능할 듯하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의 신살자(神殺者)이다[Und wir sindseine mörder]. 외로움에 떠는 어린아이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마침내 구속자를 타파했다는 승리의 함성이오.”

‘헤겔이야? 그거 니체 아니었어?’ 하는 의문이 떠올랐으나 시준은 굳이 잘 모르는 분야에서 싸움을 걸 생각이 없었다.

정약용은 깊은 인상을 받은 얼굴이었다.

“신을 만나면 신을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殺佛殺祖]. 그래야만 어떤 것에도 얽매임 없이 해방될 것이니[不與物拘]……그 이치를 서양에서도 말한 사람이 있었구려.”

당나라 선승 임제(臨濟)와 독일 철학자 두 프리드리히가 사이좋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달려올 엉망진창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오늘 그들은 신을 죽였다.

시준이 데려왔던 화원들은 그 신살의 현장을 틀림없이 그렸다. 평안도 화가들은 자신들의 속화술(速畵術, 스케치)을 따라오지 못하는 서울 화가들을 놀렸다.

조제프 푸셰는 참으로 잘 했다고 칭찬하며, 거리낌 없이 규장각과 교서관(校書館)의 출판 시설을 탈취했다. 그러고는 월간 대혁명 한양 특별판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급하니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그림과 간단한 설명이 있는 한 장짜리 선전물이었다.

그것은 곧 도성 곳곳에 나붙어 종묘사직의 종말을 알렸다.

정약용이 말한 대로,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 하나만의 끝이 아니었다.

종묘사직은 왕조와 국체에 상관없이 요순우탕부터 이어지던 천하 만민의 신이다.

엄밀히 말해 이쪽이 본체고, 왕조는 그 페르소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본체가 죽었다.

그리고 이전 몇 번의 유사한 파괴와 달리, 그 본체는 소생할 수 없을 것이다.

***

아무래도 3월 3일에 보궐선거를 실제로 치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김희순과 김회연이 지금 당장 인수 싸 들고 항복한다 해도 어렵다.

남은 시간은 열흘 남짓. 영호남을 그냥 걷기만 해도 그것보단 더 걸린다. 최속군주 선조가 목릉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모를까 보통 사람으로선 무리다.

그래서 시준은, 많은 관계자들에게 예견되었던 것처럼 3월 3일에 ‘보궐선거 공고’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말장난 같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위해 시준은 이 보궐선거에 다른 한 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혁명막부는 특별정령 수행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보궐선거는 틀림없이 공지된다.

다만 아직 인민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은 호남과 영남의 경우, ‘선거 방식이 약간 다를’ 수는 있다.

‘어쨌든 붉은 패쪽을 상자에 넣는 것이 우리 선거 아닌가? 그렇다면 반동의 피로 목패를 물들이는 게 바로 선거다.’

영호남의 선거 참여는 곧 남조선혁명당의 2차 봉기가 될 것이다. 시준은 조선 사람들이 정말 좋아할 발상을 해냈다고 자신에게 찬사를 보냈다.

결론적으로 시준은 평양에 돌아가서 후방을 재정비하고, 전선 전체를 일차 점검하며 한숨 돌릴 필요가 있다.

영호남의 인적, 물적 자원은 다른 모든 지방을 합친 것만큼이나 강하다. 김희순은 몰라도 김회연은 그 자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대로 기세만 타고 진격하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다. 충청도까지는 어찌 되더라도, 혹시 김회연이나 김희순에게 대패하기라도 한다면 그간 ‘해방한’ 지역 전역에서 왕당파 반란이 일어나는 꼴을 목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시준은 평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준의 지지층을 안심시킨다는 의미에서도 주석이 계속 한성부에 머무르는 것은 좋지 않았다. 혁명의 심장은 평양이었다.

그리고 시준조차 몰랐지만, 그 심장은 시준과 주요 간부들이 한양 가서 없을 때도 여전히 맥동하는 중이었다.

혁명이란 모든 인민이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1. 외삼문은 종묘의 가장 바깥쪽 문입니다. 이 안에 정전과 영녕전 등이 있고 등급을 나누어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지요. 공신의 경우 같이 배향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조선 왕실건축의 정점은 궁궐이 아니라 종묘와 비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둘 다 관람에 좀 절차가 필요한데(종묘는 요새 비공개인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꼭 구경해 보시면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2. 뇌샤텔 대공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이위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로서 나폴레옹이 최고로 신뢰하는 천재적 전략/전술가였습니다. 다만 시스티나 대성당에서 교황이 기념 행사 하는 도중 쳐들어가 그를 체포한 일은 나폴레옹의 수하가 아니라 혁명정부 휘하의 장군일 때 행한 일입니다. 이 다음해의 쿠데타에서 나폴레옹을 지지합니다.

작중 시점에서는 러시아 원정 패배 후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지만 그건 솔직히 나폴레옹 잘못이고;; 딱 그때 빼고는 거의 완벽한 장군이자 참모관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외교관으로도 활동했죠.

조금 후, 나폴레옹이 엘바 유배 갔던 중 창문에서 떨어져서 의문사합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현대에도 모릅니다. 후에 나폴레옹이 복귀해서 벌인 워털루 전투에서 그만 살아 있었더라도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폴레옹은 자주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이 1차 몰락하자 바로 은퇴해서 조용히 살려 했던 것을 보면 열렬한 나폴레옹 충성파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3. 신은 죽었다는 말은 자아 확신에 대한 변증법적 결과로서 이미 19세기 초에도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많이 공유되던 표현이었습니다. 현대에는 니체가 유명하나, 시기상 니체의 언명은 (최초가 아니라) 그간 이 명제에 대해 축적된 사상을 모두 감안한 일종의 후대 인용에 가깝습니다. 니체는 작중 기준 30년 뒤에나 태어나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그 신을 죽인 자들이다' 라는 말은 니체의 말이 맞으나, 푸셰의 해석은 작중의 독단적인 것이고, 니체 역시 '밝은 낮에도 횃불을 들고 나와 통곡해야 할 만큼' 절대 목적을 잃고 어둠에 빠졌다는 맥락에서 이야기합니다.

다만 니체 역시 그 후에 그 빈자리를 메울 '의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보면(위버맨쉬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푸셰처럼 해석하는 것도 어찌저찌 비슷하다고는 할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더 철학이 발달한 후일의 니체와 달리, 푸셰는 당대 지배적 사상이었던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말한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