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49. 낡은 것과 새로운 것(1)
한성 판윤 김이익은 북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쪽에서는 아까 김시택이 피워 놓은 불이 여전히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김이익은 심장 발작이 염려될 만큼 격노했다. 노인의 목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내가 이런 얕은수에 속아 넘어가다니!”
남대문에는 어떤 간민도 없었다. 이미 김이익이 오기 전부터 그들은 시전에 온통 불을 지르고 사라졌다.
가뭄 막는다고 남대문으로 시장을 옮겨 놓았던 강철군주 이공 때문에 시준이 이를 갈았던 때를 생각하면, 남조선혁명당 서울지부는 주석 동지의 바람을 잘 실천한 셈이다.
김이익은 무익한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냉철하고 빠르게 판단했다.
“저 방향은 의정부와 육조거리다. 지금 있는 군사의 반을 갈라라! 서둘러 뛰어!”
초관 한 명이 머뭇대며 되물었다.
“대감. 아까 지키던 가마로 되돌아가는 게 아닙니까?”
“그곳은 영중추부사의 아들이 있고 군사도 남아 있다. 무엇보다 재물 따윈 지금 중한 게 아니야. 각사(各司, 경각사. 서울의 실무 관청 총칭)의 문서와 장부가 날아가면 이대로 서울을 나가 봐야 산적 떼밖에 할 게 없다! 바삐 명을 실행하지 못하겠는가!”
김이익은 군사들이 알아듣기 쉬운 논리를 내어주었고 초관 역시 납득하여 명을 받들었다. 어차피 훈련도감 또한 내명부가 별로 가치 없다는 사실까지는 알고 있다.
김이익은 차라리 폭도들이 재물을 노리고 내명부의 가마를 먼저 습격해 주길 바랐다. 정부 중추가 파괴되어 호남에서의 재기에 막대한 타격을 주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그 아이는 꽤 똘똘해 보이던데……. 폭도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고 혼자 탈출해 주는 게 가장 좋지만 그렇게까지 기민하게 처신할 수 있으려나?’
대비고, 왕대비고 전 왕비고 전부 폭도의 손에 살해당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 편이 좋다. 원자의 법적 보호자가 김조순밖에 남지 않으니 말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 혁명군 기병은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김이익은 아직 그것을 몰랐다. 창덕궁 쪽에서 연기가 없으니 거기는 무사하리라 짐작하는 정도였다.
그런 김이익으로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허나 그 명은 실행되지 못했다. 북쪽에서 몇 기의 말 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김이익이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김좌근과 그 아랫사람들이었다.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김좌근은 단숨에 쥐어짜듯 외쳤다.
“도성이 떨어졌습니다! 어서 나가야 합니다!”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한 김이익 역시 다급하게 물었다.
“원자는?”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된다. 그러나 원자가 없다면 김회연과 협상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경상도 근왕군과 일시 동맹을 맺어야 하는 김조순 세력에게 다른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원자다. 그래서 원자는 김조순이 데리고 있었다.
김좌근은 노인들의 느린 생각에 답답해했다.
원자를 빼낼 수 있었다면 자기가 장판파의 조자룡처럼 가슴에 안고 달려오기라도 했을 것이다.
김조순도 없이 혼자 온 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척 보고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김좌근은 원로대신이자 집안 어른에 대한 예의도 잊고 빽 외쳤다.
“당장 경각에 달린 목숨과, 이루어질지 알 수도 없는 장구지계 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허나 거기까지 말하는 것은 한성의 염라태수 김이익을 너무 깔본 처사다.
김이익은 앞길 창창한 김좌근과 달리 이제 삶에 미련이 있을 나이도 아니었거니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산적 두목으로 영락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원자도 없고 김조순도 없다면 지금 이 남대문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수십 명 규모의 도적 떼일 뿐이다. 김이익은 허공을 향해 한 번 괴로운 듯이 탄식하다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김좌근은 갑자기 자신에게 던져지는 작은 보따리에 당황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한성 판윤의 인수와 부절이며 문서, 그리고 옥새다. 옥새가 이 처지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금붙이니까 정 안 되면 노자라도 하게.”
평양군 이공이 옥새를 들고 튀었기에 조정에서는 그간 새 옥새를 제작해 두었다. 왠지 모르게 조용한 청나라에게서 독립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 이미 독립했으니 헛짓이었지만 – 꽤나 공을 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김조순은 만일의 대비와 김이익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는 두 가지 사유에서 그것을 한성 판윤에게 맡겨 두었다.
“예? 그게 무슨…….”
김좌근은 그것을 감히 펼쳐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들고 있었다. 펼쳤다가는 마력의 금속 황금에 혹한 병사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현명한 판단이기는 했다.
“급히 성문을 나가게. 나갈 때는 문 앞에 뭐든 걸어 두고. 잠시나마 때를 벌어 줄 거야.”
김좌근은 김이익의 각오를 눈치챘다. 그가 반사적으로 부정하려 할 때 김이익은 엄하게 말했다.
“군주가 부끄러우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 사직을 패망케 한 늙은이가 추하게 잔명을 보전하여 무엇 하리. 어서 가게!”
이제 한성부 곳곳에서 솟구치는 불길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김좌근은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말 위에서 양손을 부딪쳐 김이익에게 거세게 읍했다.
그러고는 남은 도감군을 자연스럽게 인솔하여 성문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김이익에게는 병사가 필요하지 않다.
“세 명 중 한 명은 총과 창을 내어 성문 바깥에 빗장처럼 걸고 남쪽으로 따라와라! 저들 반역도당은 이미 비변사를 들이쳤으니 제 뜻이 이루어졌다 여길 터. 급하게 이쪽으로 오지는 않아! 명심해! 너희들은 이제 투항해 보아야 반드시 저 미친 도적놈들에게 죽임당한다! 지금 나를 따르는 것만이 살길이다!”
김좌근은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다. 그는 남은 병사들이 자기 명을 준행하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말배를 걷어찼다.
특별히 김좌근을 잡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정약전은 도성의 주요 인물이나 특히 재물이 빠져나가기 전에 사대문을 봉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희궁과 김조순 집으로 갔다가 허탕친 두 개 단대를 각각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보냈다. 북서에서 내려오는 혁명군에게서 달아난다면 그 두 곳일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김좌근의 말마따나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래서 비변사 쪽 ‘무공’이 끝나자 다시 2단대와 합류하여 달려간 매경은은 문을 가로막듯 꿇어앉아 있는 늙은이 한 명을 보게 되었다.
혁명군 중 서울 오죽당 출신 한 명이 그를 손가락질했다.
“저자가 우리 동지를 많이 죽인 한성 판윤 김이익이다!”
그렇다면 바로 반동 중에서도 특급 반동이다. 매경은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김이익은 단도 하나만을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채로 꿇어앉은 그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기세가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나. 도적놈들이 나라의 관헌에게 무엄하게 삿대질인가!”
매경은은 여기에서 단박에 흥분하여 김이익을 죽여 버릴 정도로 생각 없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조용히 김이익을 사로잡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김이익의 단도에 유의했다. 그들은 김이익이 그것을 잡고 자결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래서 김이익은 혁명군을 꾸짖을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소위 혁명을 주창하는 효경(梟獍, 부모를 잡아먹는 짐승. 은혜의 배반자)의 무리들아. 너희가 정말 명을 밝힌다[革命]는 것이 무엇인 줄 알기나 할까!”
혁명에 통달했다 자부하는 혁명군 기병대는 격분했다. 김이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는 아래를 가르치며 아래는 위를 섬긴다. 화합은 각자가 제자리를 지키면서 조화되는 것이지,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면 그건 그저 흐릿한 잡탕이다. 반고(盤古)가 알을 깨고 나오기 전의 가없는 혼돈이다!
그것을 밝히는 바가 예(禮)고 예를 바로 세우는 일이 혁명이다. 이런 미친 폭동이 아니란 말이다! 대관절 너희가 도(道)를 아느냐? 충효와 인의를 들어보았느냐? 너희가 무엇이기에 수천 년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금수의 미망(迷妄)을 면하게 하여 준 도리를 이토록 업신여기느냐. 그래, 이 나라 천만 인민을 무지와 완악(頑惡)의 어둠에 빠뜨려서 속이 시원한가!”
혁명군 대부분은 그 말이 뭔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이게 당장 달려들어 때려죽여야 할 소리인지, 아니면 좀 더 들어봐야 할 소리인지 그들이 생각하는 동안 조금 늦게 정약전이 남대문에 도착했다.
김이익의 목소리가 워낙 카랑카랑하다 보니 정약전도 오면서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숨을 그렇게 가쁘게 쉬면서도 기어코 궐련을 피워 물고 대답했다.
“틀렸소.”
김이익은 그 세월만큼 사대부계에서 다양한 교류가 있었고 그래서 정약전의 얼굴도 알았다. 김이익이 저 배신자 사학죄인을 소리 높여 성토하려 할 때 정약전은 그 말을 잡아챘다.
“인민을 깔보지 마시오. 우리는 금수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손에 미망을 면하여야만 몽매를 깨우칠 것이 없소. 무지는 그대들이 사람의 재지를 잘 몰랐던 것이요, 완악함은 그러고도 수천 년이나 사람들을 하민의 웅덩이에 가두어 둔 사대부의 소치이지. 우린 이제 경애하는 주석 동지가 깨어버린 알껍질을 밟고 전진해, 수평한 물처럼 모든 곳에 퍼져 두 번 다시는 가둘 수 없게 할 것이외다.”
사실 매경은을 비롯한 혁명군 기병대에게 이해 안 되기는 그것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정약전의 말마따나 그들을 깔봐서는 안 된다. 무학계층도 나름대로의 판별 기준을 가지고 있다.
혁명군은 주석 동지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어쨌든 정약전의 말이 혁명을 고취시키는 바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정확했다.
반면 김이익은 차게 웃었다.
“그것은 이미 태고에 한번 해 본 일이다. 세상에 태초부터 임금과 사족이 있었겠는가. 허나 그것이 네 말대로 옳았다면, 어찌하여 군주와 조정이 생기고 치도가 생겨나 긴 세월을 이어왔겠느냐? 당장 너희부터 처자가 부친에게 멋대로 명령하며 가사를 전단한다면 어디 그것을 보아 넘기겠는가? 정시준은 부하들이 자기와 같은 열에 앉아서 명을 가로채는 일을 용납하는가?”
현시대를 사는 사람이 혁명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러나 정약전은 혁명의 중달이다. 혓바닥으로 그와 겨뤄 볼 수 있는 자는 선전선동국장 조제프 푸셰뿐. 정약용도 있지만 그는 동생이니까 까불지 못한다. 수평도라도 이건 어쩔 수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정약전은 속으로 실소했다. 그러한 모순은 바로 지금 김이익이 지적한 바다.
허나 이에 대해 정약전은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말하지 마시오.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팔자소관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자기가 따를 바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바로 수평도요. 부부는 서로 다를[別] 뿐 누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만 화합할 뿐이고,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므로 지혜를 가르치고 배울 뿐이지요.”
“멋대로 지껄여라. 너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허나 진승, 오광 이래 너희는 결코 처음이 아니었고, 또 마지막도 아니리라. 성자필쇠의 이치가 너희만 비껴갈 줄 아느냐. 단지 이 나라 조종이 너희보다 먼저 쇠했을 따름이다.”
그 말이 유언이라는 것은 그 시점에서 정약전만이 알아챘다. 그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전부 달려들어 덮쳐눌러라!”
두 늙은이의 고담준론 때문에 거의 최면에 걸릴 것 같았던 혁명군 병사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땅을 박차기 위해 다리를 굽힌 그 짧은 순간, 김이익은 비수를 손에 단단히 쥐었다.
“나는 죽어서 나라의 귀신이 되어 천하에 옳은 도리가 있음을 지켜보리라!”
김이익을 막 붙잡을 뻔했던 매경은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
“순교자를 남겨둘 수는 없지.”
시준은 이제 주인이 죄다 끌려 나간 비변사에서 보고를 받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어진 주석의 지시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김이익을 비롯하여, 마지막까지 패악을 부리다 자결한 반동 놈들이 행여 순절하였다거나 하는 반혁명적 언사가 나와서는 아니 되오. 그들은 전부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거요. 아시겠소?”
그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태 좀 소외되어 있었던 혁명무력국장 차형기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지금까지 전쟁을 끌어왔던 엘리트 인텔리들과 달리 차형기가 전문가다.
“어김없이 시행하겠소이다. 주석 동지.”
한강은 옛날 만상이 경쟁자를 실종 처리하던 압록강보다 훨씬 크다. 빠뜨리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차형기는 즉시 큰 독과 ‘쎄맨’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조제프 푸셰는 예전 강철군주 시절 왕의 치안 조언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가 그때 끌어모았던 자료는 바로 이 전쟁에서 빛을 발했다.
서울 점령 후의 치안 유지를 위해 푸셰는 혁명군의 출진 전 서울에서 확보해야 하는 인사나 중요한 문서, 시설 등의 목록을 정리했다.
정치 지형이 그사이 급변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조선의 인재풀이란 게 거기서 거기고, 시간 자체는 많이 안 지났기 때문에 여전히 그 목록은 유효했다.
지금 밖에서 종로를 혁명걸음으로 행진하며 한성 부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는 혁명군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동안, 나머지 군사들과 남조선혁명당 한성지부는 기민하게 흩어졌다.
그들은 도성의 재산, 특히 그중에서도 곡식을 취합하고 재분배할 것이다. 김조순의 의도가 하나는 옳았는데, 혁명군은 한양도성에서 당장 뭔가를 얻기는커녕 시급히 복지를 실시해야 할 처지였다.
그나마 김조순이 남쪽으로 도망가기 위해 쌓아 둔 군량은 큰 도움이 되었다. 시준은 만약 김조순을 제때 잡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고 소름이 끼쳤다.
그 외에는 신기하게도 유념할 만한 폭동이나 습격이 없었다.
혁명군이 정의의 군대라서는 아니다. 시준도 그렇게 착각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 반발할 힘이 있는 자는 이미 김조순과 김이익에 의해 정리된 지 오래일 테니까.’
한성 부민들은 점령군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한성의 도감군은 대부분 옛 동료의 설득에 투항했지만, 또 적지 않은 수는 연기처럼 잠적했다.
김조순 치하에서 이요헌이 이미 했던 일이다. 전통적 권력의 대표인 김조순마저 피할 수 없었던 상황이니 시준은 이런 종류의 저항에 더 취약하다.
그레테 자작은 만약 조제프 푸셰가 오기만 하면 금세 잡아낼 수 있을 거라 장담했고 시준도 그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시준이 걱정한 것은 그들이 사라질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이었다. 반발할 힘은 없을지라도 반발할 의지는 아직 누군가에게 남아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지금은 겉으로나마 선량한 해방군인 척 해야지.’
그리고 한성 부민 역시 그런 연극에 동참해 줄 모양이었다.
한성 사람들은 오랫동안 정치의 곁에 있어서 눈치가 빠르다. 이미 혁명당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혁명군을 환영했다.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뒤주에 꽁꽁 쟁여 놓았던 붉은 치마까지 꺼내와 지팡이에 매달고 흔드는 광경은 이들이 훌륭한 정치적 주체라는 증거다. 권리가 없는 자는 아첨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래도 상황이 그렇게 정시준식 인간 불신으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혁명군을 못마땅히 여기는 자가 있는 만큼, 혁명군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김시택이 대표하는 중인 계층과 서리들은 한성 통제 과정의 실무 사항을 맡음과 동시에, 한성 부민과 혁명군 사이의 가교 역할도 해 주었다.
그들의 조언으로 혁명군은 더 늦기 전에 한강의 각 나루로 병사를 보내 그간 서상에 비협조적이었던 강상 도고들을 전부 체포할 수 있었다.
전쟁 전 숙청이 결정된 강상이었지만 지금은 서울을 점령해 버린 충격 탓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기억할 만한 엘리트 선비들은 혁명군 손에 떨어진 김조순과 고위 사대부들 때문에 잊어버렸고 나머지는 그냥 싸우기 바빴다.
강상들은 비협조적이긴 하여도 혁명군에 적대까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원래 계획을 실행했다.
“우리는 김조순의 도당이 아니오이다. 그저 말 듣지 않으면 죽인다기에 억지로 따랐을 뿐입니다. 평양 장군(시준을 말한다)께서도 원래 장사하던 분이라 들었는데 다 아실만한 분께서 동류를 핍박하시면, 아, 아니, 결코 장사치라 깔본 것은 아닙지요. 그 뭐더라, 시장에서 이야기꾼이 얘기 푸는 걸 옛날에 들었는데. 덕쇠 자네도 같이 들었잖아. 그 돗자리……. 뭐? 아, 그래. 현덕인가 하는 사람도 돗자리 장수 하다가 천하를 쥐었다지 않소이까. 그런 뜻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게 시작한 강상 도고들의 애원은, 수도를 유지하기 위한 한강 수운의 통제자로서 자신들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로 이어졌다.
그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확실히 강상 대부분을 없애고 그들이 가진 인맥과 상업망을 파괴하는 일은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가성비 따져 가며 타협할 만큼 이성적인 사람들이었으면 혁명 같은 건 시작하지도 않았다.
한강에 좀 투기할 게 있어 거기 나가 있던 혁명무력국장 차형기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정치국 결정은 번복할 수 없다. 동지들, 독이 몇십 개쯤 더 필요할 것 같다!”
실제적인 이유도 있기는 했다.
몇몇 서상 소속 중앙인민회의 대의원은 이전부터 물질이 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약전이 삼화부 인민위원으로서 진행하던 고기잡이와 해운 사업이 꽤 잘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자산어보가 그냥 나온 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전쟁에 이겼을 경우 슬쩍 강상의 위치를 주워 먹으려는 시도 중이었다.
그러한 시도는 중앙인민회의 평준위원장이자 상임위원회 위원인 김창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만약 전쟁 전 이에 대한 시준의 내락이 없었으면, 아무리 조선 인민 해방전쟁이라도 ‘만장일치’로 승인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어질 독점 상인인 경강상인은 그냥 숙청되었다. 강상에게 빚으로 묶여서 노예처럼 뱃일하던 조졸들은 ‘인민의 이름하에 해방’되었다.
그런데 당연하지만 모든 강상이 다 매장된 것은 아니다.
혁명군에게 협조한 강상도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숙청된 동료 강상의 나루터 지분이 대가로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중이었다.
자연스러운 희망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이미 그건 시준이 평안도의 도고들에게 넘겨버리기로 한 지 오래라는 점이 문제였다.
시준으로서도 전쟁에 대한 적극 협조가 필요했고, 겸사겸사 더 안면 있는 평안도 상인을 통해 서울을 장악하는 수단도 되니 당시에는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고, 혁명군에게 한강 세력 개편에 대해 조심스럽게 문의한 강상들은 기가 막힌 대답을 듣게 되었다.
혁명군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재산인 목숨을 줬으니 충분하지 않느냐는 태도를 취했다.
차형기는 시멘트에 구속당한 채 대독에서 머리만 내밀고 비명 지르는 다른 상인들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일 뿐이었다.
천지간에 이런 더러운 깡패놈들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그들 강상이 당장 분노하며 돌아서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러한 행위에 중요한 동조자가 되어 주어야 할 나머지 강상들이 죄 한강 밑바닥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래서 단결은 항상 중요하다.
두 번째는 더 정치적인 이유였다.
강상의 존재 가치는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점령 후 며칠간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던 강상들은 서로 수상하다는 시선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아무래도 혁명군은 이 나라의 수도 입지에 대해 일반적 인식과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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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중국 신화에서 태초의 세계를 만든 거인 반고는 혼돈 속에 알 상태로 있었으며, 반고가 알을 깨고 나오자 무거운 것이 아래로, 가벼운 것이 위로 감으로써 천지조화가 성립되었다고 합니다.
2. 미망은 깨우치지 못한 몽매한 상태를 말하고, 완악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우며 악한 것을 이릅니다.
3. 경기도 광주군(현재 광주시)은 넓을 광(廣) 자를 쓰는데, 실제로 넓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원래 광주군은 현재 광주시+서울 서초, 송파, 강남, 강동구의 대부분+성남시+하남시를 포괄하는 매우 광대한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서울 동남을 거의 둘러싸다시피한 고을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