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62화 (162/284)

164화

48. 기립하시오, 그대도.

다른 곳의 남조선혁명당 지부가 주로 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처럼 한성지부도 비슷했다.

그러나 한성지부만의 차이점이 있다면, 김시택을 비롯한 조정의 하급 관리 역시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조순은 분조 세우러 가면서 실무자를 거의 데리고 가지 않았던 이공의 실수를 반복할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김조순과 그를 돕는 노론 신하들은 층층시하의 위계를 따라 하급 관원들 역시 그 일에 참여시켰다.

허나 그건 이사 할 때 가재도구를 꼼꼼히 챙기는 자의 헤아림이었을 뿐이다. 김조순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전국 각지에서 과거를 통해 모여드는 조정 문무반과 달리 경아전이나 녹사, 서리 등 행정의 바닥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서울이 연고지이며 이해관계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더 아래의 액례, 금례라던가 그 외 관청의 딱히 직책명도 없는 자잘한 심부름꾼과 하인 역시 보통은 서울 사람이다.

사극에서는 흔히 낮은 신분에 있는 자가 사투리를 쓰고 양반들이 서울말을 쓰나 실제로는 반대여야 한다.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때 강원도 사투리로 열변을 토해서 선조가 못 알아들었다는 야사는 신빙성이 거의 없지만, 그 야사에서 취할 것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김조순은 이 ‘서울 토호’들에게 낯선 호남에서의 어떤 비전도 약속해 주지 못했다.

고위 관리들처럼 명분과 권력이나 군대를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원래 무슨 생계를 보장받던 직업도 아니다. 부유한 호남의 강력한 토호나 향임은 둘째치더라도 당장 가서 먹고살 방법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서울에 남아 있을 것인가? 혁명군이 텅 빈 수도에 입경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반동의 끄나풀’을 숙청하는 대학살일 터. 바보가 아닌 이상 김조순을 도운 자들을 살려둘 리가 없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서는 혁명당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을 바꾸려면 그에 걸맞은 공을 갖다 바쳐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인물은 ‘주석 동지와의 각별한 친분’을 과시하는 역관 김시택이었다.

하긴 사전도 같이 만들고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도 함께했으며 사업 파트너이기도 하니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게 김시택이 남조선혁명당에서 중요한 후원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렇게 사람들을 규합하여 온 김시택은, 경희궁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을 감지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계교대로요. 이제 남대문에도 병사가 몰려갔을 테지. 육조거리에는 아무도 없어! 날 따라오시오. 동지들!”

그 말대로 육조 관청에는 병사가 없었다.

비변사가 여기 있었던 시절이라면 김조순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군사가 적지 않았겠으나 비변사는 왜란 이후 창덕궁 앞으로 자리를 이전했다. 왕이 창덕궁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급작스럽게 떨어진 명령에 허둥지둥하며 야반도주 짐 챙기는 하급 관리들이 오가고 있을 뿐이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그들의 시선은 갑자기 나타난 남조선혁명당에게 집중되었다.

용도가 의심되는 술병을 하나씩 들고 몰려드는 무리는 말 그대로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머릿수건이나 저고리, 바지 중 하나 이상은 시뻘건 색인지라 어디서든 주목을 끌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네. 네놈들은 뭐냐!”

김시택은 모든 직장인의 꿈을 실현했다.

“던져!”

주석불이 어지러이 날아갔다. 관리들은 당연히 사방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옮겨붙은 불덩어리는 조선 왕조가 자랑하는 충실한 사무 기록을 그 건물과 함께 불살라 버렸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문서 만지는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천륜에 의거하여 격노할 끔찍한 만행이다.

이제 김조순은 도망길에 열심히 그러모을 왕실과 정부의 지방 재산, 각 군영의 비축량과 인사 기록 등 앞으로 분조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처음부터 조사해서 만들어야 한다.

전부 태울 필요도 없다. 원래 장부라는 건 대개 일부만 사라져도 전체가 쓸모없어진다. 문서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합계’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밤의 화공보다는 덜 인상적이긴 하지만 낮이라고 해서 불이 안 붙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낮의 화공에는 또 특별한 장점이 있다.

조선의 중심은 한성이다. 그리고 정부로서의 조선을 논할 때, 한성부의 중심은 경희궁이나 창덕궁이 아니다.

다름 아닌 중앙 행정청이 모여 있는 육조거리다. 요 몇 년간 드러났듯 왕은 딱히 없어도 되지만 육조와 의정부가 없으면 조선은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육조거리에서 미친 듯이 솟구치는 연기는 한성 부민 전부에게 국가 파멸의 봉화로 인식되기 충분했다.

***

창덕궁과 육조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다. 따라서 김조순도 금세 화급한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김조순은 진절머리를 내며 빨리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라 지시했다. 어떤 면에서 그 지시는 상황 해결이 아니라 상황 인식에 가깝다.

지금은 그 지시가 이행될지도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아래에서 부드럽게 업무를 진행시켜 줄 도필리들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김조순은 서울에서 무사히 ‘도망친’ 최속군주 선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차라리 전투가 더 쉬울 것처럼 여겨질 지경이었다.

사실상 국가 최후의 전력이 탄금대에서 소멸하자마자(몰살은 아니다. 적지 않은 수는 날래게 튀었다. 배수진 따위로 조선군의 도주를 막을 수는 없다), 선조 이연은 ‘빠른 손절’을 결정한다.

이는 결코 조롱당할 일이 아니다. 아마 선조가 현대에 환생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재테크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닥치기 전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손해를 자신에 대한 처벌로써 겸허히 감수한 채 끊어낸다. 이것은 현대에도 모든 투자 감각의 기본이며 그래서 가장 어렵다.

남에게 조언하기는 쉽지만 본인이 하기는 절대 쉽지 않은 행동이다.

바로 이것을 못 하는 바람에 이번 회차 인생은 포기하고 회귀 뽑기운이 좋기를 기대하며 한강 다리에서 서성대야 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당시 처음 파천이 논의된 때로부터 최종적으로 선조가 궐문을 통과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약 48시간. 현대 국가 기준으로도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 속도다.

신속한 결단은 정당한 보답을 받았다. 아무도 그를 승리의 군주로 인식하지는 않지만, 선조는 엄연히 전쟁에서 이겼다.

전쟁 상대방인 일본은 목표였던 조선, 명, 인도의 정복 중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명백한 승전이다.

그러나 그에 비해 김조순은 너무 늦었다.

김조순이 패배를 인정한 행주산성은 탄금대보다 도성에서 한참 가깝다. 급박한 시일은 안 그래도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쉬운 파천길을 더욱 치열한 개판으로 만들었다.

김조순은 속도를 지배함으로써 시간을 지배하는 제왕 선조 이연의 그림자에서 신음해야 했다.

김조순은 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 사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김조순은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런데 폭도가 왜 육조거리를 노렸지? 그곳은 창고도, 무기고도 아닌데.’

무심코 튀어나온 자문이었다. 그러나 그 자문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본 순간, 김조순은 자기들이 예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큰 위기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김조순도 소요 자체는 예상했다. 수도 시민을 그렇게 무작스럽게 털어댔는데 그들이 얌전히 복종하리라 예상하는 건 강철군주 이공이나 정략군주 이품 수준의 지능이지 김조순의 지능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김조순은 죽는 사람을 쓸모 순위가 낮은 내명부에 집중시키기 위해 일부러 경희궁 앞 행렬에 재물을 모아 두었다.

김좌근 정도라면 자기 한 몸은 빼낼 수 있을 것이요, 원자는 김씨의 생각과 달리 그 행렬에 포함되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그 폭도는 그들의 목적일 것이 분명한 곡식과 돈을 털러 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번 소요가 굶주림이나 반항심에 의해 일어선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굶주림에는 곡식이, 반항심에는 인간의 피가 필요한데 육조거리는 둘 다 만족시키기 어려운 곳이다.

털어 봐야 이득 될 것이 없는 곳을 노렸다는 이야기는 곧 전략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이 폭도는 그저 성난 백성 떼거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통제되는 집단이라는 말이 된다.

김조순의 등을 따라 소름이 쭉 끼쳤다.

김조순은 당장 말을 끌어오라고 외치려 했다. 아직 임진강 남쪽 전부가 남조선혁명당에게 장악된 건 아니다. 돈이며 사람 같은 것은 전라도로 내려가며 얼마든지 끌어모을 수 있다.

이 소요도 정시준에 의해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면 이미 서울은 함락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몇몇 중요한 인물과 가솔, 원자 정도만 확보해서 뛰쳐나가야 했다.

그러나 김조순의 생각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가 관소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마자 곧 주위의 병사들이 비명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기 연희방 쪽에서도 연기가 올라옵니다!”

“저기는 황화방 같은데……. 저곳도 화재가 난 것 같소이다!”

“저 대로 건넛집에 붉은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그 뒷집도……. 뭔가 이상하오이다!”

한양도성 곳곳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김조순 단신으로 빠져나갔다간 어느 눈먼 칼에 맞아 죽을지 모른다. 실제로는 그냥 허세일 뿐 반란분자 자체는 몇 되지 않겠으나, 김조순도 그런 확률에 목숨을 거는 도박사는 아니었다.

김조순은 이를 갈며 사람을 보냈다.

그가 가진 최후의 부대, 훈련도감 마군은 서대문에 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다.

서대문의 전투를 오래 끌기보다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날 시점이었다.

그 판단은 옳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시점이 문제였다. 선조 이연이 보았으면 혀를 찼을 것이다.

천품은 영민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씨 왕실의 피가 없어서 그런지, 김조순은 ‘속도’를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

이때 서대문 방어의 책임자는 원 역사에서 홍경래 토벌군의 중군을 맡았던 류효원(柳孝源)이었다.

훈련대장 이득제가 가장 피해가 격심할 게 뻔한 서대문 방어를 회피하고 가산이나 챙기기 시작한 지금, 그는 조선군에 남은 유일한 용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훈련도감 소속 초관 같은 게 아니다. 아버지와 본인이 모두 삼도수군통제사를 한 명문가요, 선전관까지 할 정도로 고위직이었다.

또한 류효원은 본래 타협을 모르는 강경한 맹장이기도 했다.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2천 명을 가차 없이 전원 참수해 버린 자가 바로 이 류효원이다.

눈앞의 역적도당은 2천 명의 4배 정도 되어 보였지만, 류효원의 각오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저놈들을 친히 다 목 베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저놈들이 포를 끌어대고 있습니다!”

류효원은 당장 응사하라 명하고 싶었다. 수원 화성이나 강화도 돈대처럼 대포를 설비하는 용도의 총안구는 여기 없으나, 어찌어찌 총통이나 홍이포 몇 문을 성벽으로 끌어와 ‘놓아두기는’ 했다.

그러나 그 포대는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포탄이 날아오나 싶은 거리에서 발사된 16리브르 함포와 영국 6파운드 야포에 박살 났다.

세 번째 포격에 이미 포군은 다 달아났다. 그리고 열일곱 번째 시도쯤 해서 혁명군은 기어코 포대의 화약을 유폭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포격전은 진작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들어온 보고, 그러니까 혁명군이 대포를 끌어오고 있다는 보고는 그들의 눈에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포가 설비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것은 혁명군이 즐겨 쓰던 서양 대포가 아니라, 조선군의 눈에도 익숙한 천자총통이었다.

군의 경량화가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조선군에서는 이제 잘 안 쓰는 물건이었다. 류효원은 머뭇머뭇 그 포를 만지는 자들이 바로 훈련도감 병사라는 것을 알아보고 분노에 미쳐버렸다.

“저 배반자 놈들이!”

류효원이 일단 편전이라도 쏴 보라고 닦달하는 동안 옛 도감군, 아니, 지금은 혁명군이 된 사람들은 거기에 마치 대장군전(大將軍箭) 같은 길쭉한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대포로도 화살을 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활을 사랑하는 엘프, 아니, 조선군에게 익숙한 공격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한양도성이 허접해도 저것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기는 곤란하다.

류효원은 긴장 속에 혁명군의 공격 수단을 추측해 보았다.

류효원은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혁명군의 방식을 잘 알지 못했다.

혁명군은 성벽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성벽을 지키는 자들의 마음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뻥! 천자총통에 불을 댕기자 거기에 들어갔던 물건이 화들짝 뛰쳐나왔다.

그것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성벽 위쪽을 때리고 데굴데굴 굴렀다.

이게 무슨 놀음인가 하던 류효원은 곧 그쪽으로 가보고 나서야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훼손된, 국왕의 교룡기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들이 여태까지의 흔한 반란군과 다르다는 점이 도감군을 전율하게 했다.

이들은 ‘지금 왕’에 칼을 겨누고 쳐들어온 게 아니다.

교룡기는 이품이나 이공이 아니라 왕의 상징. ‘왕’ 자체를 이 깃발처럼 파괴할 셈이었다.

류효원은 병사들이 동요하기 전에 재빨리 호령을 발했다.

“지금부터 자발없이 주둥아리를 놀리는 자는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선 채로 참한다! 적도가 조종을 능욕하는 흉계가 매우 괘씸하니, 지금이야말로 선비가 분발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칠 때! 어서 총을 재고 활을 준비하지 못할까!”

그런데 군사들은 대부분 선비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류효원이 그 명예롭지 못한 광경에 다시 화를 내려 할 때, 김조순의 사절이 도착했다.

“마군은 성벽을 지키는 데에 요긴하지 못하니, 즉시 창덕궁으로 회군하여 만일을 대비하라는 영중추부사의 분부요!”

헛소리다. 요긴하지 않을 리가 없다.

끔찍한 공성전에서 지친 혁명군의 기세가 꺾였을 때 바로 훈련도감 마군이 나아가 그들을 타격해야 한다. 행주산성에서 유일하게 혁명군에게 잠시의 승리 비슷한 것이라도 거둔 부대는 이들뿐이다.

마군만 자기 있는 창덕궁 부근으로 돌리는 속셈도 뻔하다.

김조순의 친위군인 훈련도감이 그의 몽진 계획을 피상적으로나마 모를 리 없다.

적당히 때가 되면 그들도 빠질 수 있게 안배했으리라 믿었을 뿐이다.

김조순이 워낙 급하다 보니 한 실수였다. 훈련도감 군사들은 조선 최고 정예군의 지능을 원숭이로 취급하는 김조순의 작태에 분노했다.

마침 혁명군의 기세가 너무 살기등등했기에 싸우기도 싫었던 차였다. 그래서 그 분노는 아주 쓸모 있는 도구가 되었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관군을 풀잎 베듯 밀어버린 저 미친 역적도당과 싸우는 것보다야 상관에게 반항하는 쪽이 더 쉽다.

“조정이 우리를 버리려는 것인가!”

“영중추부사가 홀로 도망치려 한다!”

류효원은 이 상황에서 어어 하며 당황하다가 끝장나는 유형의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벽력처럼 외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아까 무어라고 했느냐!”

류효원은 즉시 가장 호들갑 떠는 병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태 병사들이 류효원의 곤장이며 채찍을 맞아 준 것은 그들이 류효원의 부하였기 때문이지 류효원보다 힘이 약해서는 아니다.

계급장 떼고 본다면 훈련도감은 모두가 무예를 익힌 정예다. 그 병사는 거꾸로 왈칵 성내며 들고 있던 환도로 그 검을 쳐냈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굴 개 좆으로 보나!”

류효원은 확실히 용맹하지만 나이는 이미 환갑을 넘겼다. 병사는 두정갑을 입은 자에게 칼이 별 소용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그래서 류효원을 걷어찼다.

갑옷의 무게 때문에 균형을 잃은 류효원은 땅에 나동그라져야 했다. 류효원이 끙끙대는 동안 훈련도감 군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하극상의 죄를 면하려면 주인을 바꾸는 게 가장 좋다. 그리고 가져가는 선물이 클수록 새 주인은 좋은 대우를 해 줄 것이다.

잠시 후, 정약전은 성벽 아래로 내던져진 류효원의 목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성문이 열리고 혁명군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을 때쯤에는 이미 오도 가도 못하던 훈련도감 마군이 전부 흩어져 도망간 뒤였다. 그들은 마침 마군에 소속되어 있던 자기 처지에 감사했다. 빨리 도망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대신 한양도성의 대로를 주파하는 것은 붉은 깃발을 앞세운 매경은의 혁명군 기병대였다.

기병대는 가운데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주석 동지와 혁명군 간부들을 에워싸듯 옹위하며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들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2단대(소대)는 김조순의 집으로! 3단대는 경희궁으로 가라. 그리고 1단대는 주석 동지와 본관을 따라 창덕궁으로 간다. 비변사의 반동들이 쥐새끼처럼 달아나기 전에 들이쳐 모두 사로잡는다!”

매경은의 판단은 정확했다. 만약을 위해 두 소대를 나눠 둔 것이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던 것은 매경은이 ‘경애하는 주석 동지 앞에서 무용을 친히 뽐낼’ 수 있는 1단대의 경로에 있었다.

비변사에서 이런저런 잡심부름 하던 아랫사람들은 잽싸게 달아났다.

그래서 혁명군 기병 수십 기가 비변사의 문을 짓부수고 말발굽으로 그 파편을 짓밟았을 때 안에 있던 자는 김조순, 김재찬, 이시수를 위시한 비변사 당상 정도였다.

사실상 지금 조선 최고의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부분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은 ‘마군이 오기는 왔는데 좀 분위기가 다르다?’ 정도였다.

어미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오랜 불안 증세를 보이던 원자는 아예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울음은 비변사 당상들에게 현실을 인정케 하는 강력한 신호가 되었다.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일어난들 손에 쇠토막 하나 없는 늙은이들이 무얼 해 보겠느냐만, 사람의 자기 보호 본능은 그런 논리 따져 가며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아직까지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철인 김조순만이 자리에 앉은 채 두 눈을 불태우며 시준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격렬한 질주로 인해 흐트러진 호흡을 잠시 가누던 시준도 곧 위엄을 회복했다.

시준은 말을 탄 채 김조순의 앞으로 나아갔다.

시준의 이름 없는 말은 주석의 군마답게 혁명적이었다. 그래서 사람 사는 방 안에 짐승이 발 들여놓는 일이 무엄하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말은커녕 대부분의 인간조차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이 비변사 관소에 주저 없는 말발굽 자국이 찍혔다. 김조순은 수염을 떨었다.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이겼다며 자만하고 있겠지. 그러나 도성이 반적에 의해 떨어진 적이 없었던 줄로 아느냐! 곧 삼남의 충용한 백성들이 일어서서……!”

시준은 김조순의 말을 무시했다.

“기립하시오.”

이미 기립해 있던 당상들은 일제히 김조순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혼자만 앉아 있었으니까.

허나 김조순은 여전히 이를 앙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들의 생각대로 시준은 김조순에게 말한 것이었다.

시준은 손수 들고 있던 적기를 내려 김조순을 가리켰다. 적기 끝의 창날이 김조순을 마주했다.

“그대도.”

김조순의 호흡이 가빠지며 그의 시야가 시준의 창날로 축소되었다.

시준의 목소리는 마치 그 창이 김조순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이것은 천하의 공의[天下公議, L'Internationale]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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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율곡 이이의 사투리 썰은 유명하죠. 강릉에서 십만양병설 건의문의 강릉사투리 복원 등으로 재미있게 재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다면 다음의 이유로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습니다.

일단 십만양병설을 율곡이 '열변'했는지에 대해서인데, 십만이라는 구체적 얘기는 나중에 제자가 기록한 이이의 행장이 출처고 병조판서 하던 시절 군사양성 계획을 올린 적은 있습니다. 근데 이건 '선조의 명령으로' 올린 거거든요. 그러니까 평화에 찌든 선조를 율곡이 열변으로 설득하는 구도는 아니었다는 거죠. 앞뒤 맥락을 보면 걍 하기 싫은데 왕 명령이라서 기획서 쓴다는 뉘앙스마저 엿보입니다.

그리고 선조를 섬겨 벼슬길에 나갈 당시의 이이는 서울에 꽤 오래 산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 작중에서도 종종 드러납니다만, 왕에게 올리는 정책적 품의는 현대에도 그렇듯이 글로 써서 올리지 구두로 말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경연에서 구두 논의를 한다고 하지만 결국 중요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보고서로 만들죠.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조선 각지에서 모여든 고관들이 사용하는 사투리가 정부 내 의사소통에 장애를 줄 정도로 심각해서 어떻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정도는 실제 종종 나오던 얘기가 맞습니다. 당시는 매스 미디어나 통일된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현대보다 훨씬 사투리가 심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난민이 제주도 사람과 말이 안 통해서 일본어로 대화했다는 일화가 있죠.

2. 인터내셔널은 사전적으로는 그냥 '국제적'이라는 뜻입니다만 혁명적 맥락에서는 '국제주의'로 흔히 번역되지요. 국경을 초월하는 범국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그대로 노래 제목이 된 거죠. 그리고 봉제공 엠마의 유명한 이야기는, 사실 그냥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3. 류효원이 유능한 무장이었던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만, 홍경래의 난 이후의 관운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작중 나온 대로 2천 명을 그냥 참수해 버렸다가 나중에 그 죄로 공이 다 깎이고 잘리게 되죠. 2천 명이면 당시 조선에서 어지간한 도시 하나의 인구입니다.

당시 개념으로 반역자는 (수사권이나 처벌권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가서 죽여도 상관이 없었습니다마는 2천 명이 다 반역자인지 따져보지도 않았다는 과실도 있고... 그냥 당시 조정에서 꼬리 자르기 한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도 죽고 난 뒤에는 병조 판서로 추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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