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47. 너는 듣고 있는가(2)
김유근이 한성에 들어온 것은 혁명군이 행주산성에 도달하기도 전이었다.
본래 그의 임무는 아버지 이름 팔아 양주 인근의 부대에게 물자를 후려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임무가 훌륭하게 성공하자, 정찰총국에서는 김유근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정찰총국의 건의로 시준도 김유근을 서울에 잠입시키는 안을 승인했다.
그때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이었다. 그쯤 해서 경기도 일대에 김유근 경계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더 활동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김유근은 본전 이상의 일을 해 주었다.
그는 훈련도감의 출진 과정에서 서울로 운송되던 세곡 우마차를 탈취하여 뻔뻔스레 도성에 입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찰총국원을 지휘해서 전부 지하로 암약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아버지 뒷배가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그도 원 역사에서 평안 감사에 예조, 병조 판서까지 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서울에서 정대운이 힘겹게 모으고 있던 사람 중에서는 김유근보다 나은 인간이 없었다.
사랑의 힘일지, 혈통의 힘일지, 교육의 힘일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셋 모두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한 길을 걸으며 어느새 치기 어린 청년에서 원숙한 사내가 된 김유근은 나직이 말했다.
“혁명군은 아직 한창 진을 펴고 군세를 정돈하는 중이오. 경기 일대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든 탓에 그건 시일이 걸릴 거요. 혁명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소.”
이 경우 혁명군의 폭증은 고무적인 소식이 아니었다.
꾸물대다가는 김조순이 도성을 빈껍데기만 남겨놓고 탈출해 버릴 것이다. 어쩌면 동탁처럼 사상 최악의 한성 대방화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김유근은 품속에서 뜬금없는 대바늘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상투에 비녀처럼 꽂아 넣었다.
“탐오한 자들을 처단할 심판의 날은 목전이오.”
김시택은 자신이 김유근을 의심했던 사실도 잊은 채 홀린 듯한 집중력으로 김유근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성, 반동의 성벽보다 높은 혁명의 녹각을 우리가 올려야 하오!”
모든 사람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종이 뭉치를, 누군가는 총과 칼을, 누군가는 돈꿰미를 들고 조용하게 흩어졌다.
***
한성 부민의 인심은 김조순의 대약탈이 있기 전부터 좋지 않았다.
김조순은 최대한 행주산성의 도주를 전략적 후퇴로 바꿔 보려 애썼지만, 도망친 훈련도감 마군은 변명의 여지 없는 패주병이었고 그 뒤이어 들이닥친 혁명군의 모습은 어떤 해명도 소용없게 만들었다.
도성에서 승전보를 기다리던 2천 훈국군 사이에도 패배주의가 가득 퍼졌다. 군대가 이럴 정도니 부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김조순이 이렇게 막나간 데에는 그런 인심을 파악했다는 이유도 한몫 했다.
어차피 이제 김조순은 한양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권력자라면 시도할 만한 선택이다.
의욕 다 잃은 훈련도감 군사는 김조순이 명한 약탈을 그래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충실했다.
김조순은 훈련도감 군사의 일부가 그 재물을 그대로 들고 달아나버렸다는 보고를 듣자 격분했지만 지금 체계를 다듬거나 효과적인 단속책을 내놓을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부족한 만큼 더 그악스럽게 징발하는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차츰 한성 이십만 부민의 눈에 위험한 빛이 떠돌기 시작했다.
김좌근은 도성 귀환 이후 사흘 만에 처음 집에 들어온 아버지를 보고 그간 있었던 일을 대충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아버님. 아무래도 형님(김유근)이 도성에 들어온 듯합니다. 영중추부사의 아들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눈에 띄는 즉시 죽여라.”
김조순의 대답은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튀어나왔다. 김좌근은 그러리라 생각했기에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
김조순은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한 듯 김좌근에게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
“경희궁과 창덕궁에서 모든 사람과 재물을 빼내 한 번에 이어할 것이다. 대비와 혜경궁을 뒤에, 그리고 네 누이를 앞에 세워라. 비변사는 지금 훈국 군사에 대한 치중과 나머지 군량, 조정의 긴요한 문서를 정리하고 있어 그런 일을 할 새가 없구나.”
여차하면 방패로 쓰겠단 의도 외에도, 애초에 그녀들의 피신 자체가 후순위의 과업이라는 점에서 김조순이 이미 내명부 따윈 여염집의 아낙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김조순에게 그녀들의 가치는 오로지 만일을 위한 정략 도구 정도였다. 아직은 왕의 이름에 경복하는 멍청이들이 많이 남아 있을 테니까.
김조순의 세 아들 중 가장 아버지와 비슷한 김좌근은 그 비윤리적 지시에 반발하지 않았다.
다만 김좌근은 아버지가 그 일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김조순이 직접 말한 것처럼 내명부의 피신은 후순위다. 그러나 밖에서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약관조차 되지 않은 김좌근이 가장 중요한 임무를 홀로 맡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결국 다음 대의 가독을 김좌근에게 넘길 것이라는 암시다.
장동 김문의 수령쯤 되면 이미 가내에 한정되는 직위가 아니다. 외부의 사대부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려면 이 일보다 적당한 것도 달리 없다.
통상 김유근이 사라지면 다음 차례일 둘째 김원근도 그럭저럭 밥값은 하고 있기는 한데, 지금과 같은 가시밭길에서는 ‘그럭저럭’으로는 안 된다. 특출나야 한다.
물론 김조순이 실질적으로는 후순위의 일을 맡긴 것에서 알 수 있듯, 김조순은 아직 김좌근의 재주가 다 여물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김좌근 역시 그런 평가에는 불만이 없었다. 그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평가의 대상이 된 것만도 엄청난 지위 상승이다.
우선은 이 일을 문제없이 성공시킨다. 거기에 더해 이러한 급박한 사세에서 반드시 일어날 여러 변화에 적절히 응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다.
그러면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조선에서의 새로운 최고 권력자의 길 역시 김좌근의 것이다.
김조순은 이공, 이품, 정시준이라는 세 마리 괴수와 상대하다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괴물의 의미가 각각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김조순의 위치는 권력과 의지 양면에서 그야말로 괴수적이다.
신하를 그만두고 왕을 초월해 버린 자 김조순. 그것을 이어받는 일은 어린 김좌근에게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조선에 없던 개념이기에 그게 무엇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시시한 권세가나 국왕보다 더욱 격렬하고 웅장한 ‘어떤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김좌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좌근은 일어나서 아비에게 절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건만, 그간 지나온 시간이 너무 가혹하여 왕비 시절 따위 다 잊어버릴 지경이 된 김씨는 지금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생각했다.
그녀는 곁에 없는 아들을 동정했다.
이제 네 살배기 원자는 경쟁자가 모조리 사라진 왕좌에 오를 터였다. 그러고는 평생토록 외할아버지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김씨는 아마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게 틀림없다. 그녀가 아들과 동맹하여 외조부를 역습하도록 놔둘 만큼 김조순이 만만한 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대혁명시대를 맞이한 모든 지배층이 한 번씩 해 본 실수를 김씨 역시 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김씨에게 최악이 아니라 최선의 미래 중 하나다. 현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김좌근의 강요 때문에 다 포기하고 궁을 떠나는 행렬에 얌전히 합류했을 때까지만 해도 김씨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성부의 여론은 최악이었다.
19세기에 무슨 여론이 중요한가 싶겠지만 기원후 19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지배는 항상 피지배자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행위였다. 투표처럼 눈에 보이는 의식적 행사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 기초적 제왕학을 망각한 두 왕은 하나같이 끝이 좋지 못했다.
강철군주 이공은 신묘한 책략으로 도성을 버리고 튀었다. 그리고 김조순의 증언에 따르면 정략군주 이품마저 사직을 버리고 반군에게 도망쳤다.
다른 나라처럼 이 시대 조선의 도읍도 한정된 사람만이 거주하며, 그 목적은 대부분 국가에 대한 봉사에 있다. 대부분 나라가 내게 뭘 해줘야 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소리다.
따라서 한성부 사람들은 격노했다.
백성이 무슨 똥거름 쓰레기인가? 도성이 비울 때 된 요강인가? 제 편할 때 책임을 멋대로 던져 버리는 두 왕의 행동은 수도 시민의 자존감을 크게 모욕했다.
그건 김조순에 대한 지지 동력도 되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많은 사대부와 훈련도감이 왕실 대신 김조순에게 걸었던 기대를 김조순 역시 배신했다.
그 또한 도성을 버리려 하고 있었다.
화급히 백성을 약탈하여 짐을 꾸리고 도주를 준비하는 궁의 부산스러움은 별로 은밀하지도, 존귀하지도 않았다.
“아이고, 아이고!”
“다시 저희를 버리고 어디를 가십니까!”
백성들은 가마가 지나는 길가에 몰려와서 통곡했다. 쌀 한 톨에 한 대씩 패서 사람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혁명군의 소문은 이미 파다했다. 모든 사람이 혁명군의 도성 육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장 가마에 달려들지 않은 이유는 그 주위를 훈련도감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도감은 내명부가 귀해서가 아니라 그녀들과 함께 궁에서 끌어낸 여러 재화와 문서가 귀하기 때문에 행렬을 호위하는 중이었다.
허나 훈련도감도 그다지 의욕 충만해 보이진 않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들은 현명한 동료처럼 재물 빼돌려 달아날 기회를 잡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것뿐이다. 아마 백성들이 다가들었더라도 그리 열정적으로 호위의 사명을 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위임으로 이 행사를 총감독하는 김좌근은 그런 병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조해진 김좌근은 자꾸 곡식 수레 쪽을 쳐다보는 군사들이 무슨 사달을 내기 전에 일거리를 주기로 했다.
“귀인의 행차에 이리 소란스러운 경우가 있는가! 주변의 잡인을 엄히 다스려 훤화(喧譁, 소란)를 금하고 길을 트렷다!”
병사들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미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김조순과 그 일가 말고 달리 의지할 데도 없다.
결국 그들은 어기적대며 나아가 총으로 사람들을 쿡쿡 쑤셔 밀어내었다. 성의 없는 발길질과 무관심한 채찍질이 반복되자 백성들은 침 뱉고 욕하며 길을 열어 주었다.
말은 귀하신 분의 행차 어쩌고 했으나, 김조순과 김좌근 둘 다 내명부 식구들을 전혀 귀하신 분이라 생각하지 않다 보니 백성들이 비켜섰더라도 행렬은 여러 가지로 잡음이 많이 일어났다.
뜬금없이 쓰러지는 인간, 무엇이 없어졌네 하고 소리 지르는 인간, 서로 싸우는 인간까지 김좌근이 도저히 다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사고가 실시간으로 빈발하고 있었다.
집 바깥의 본격적 실무를 처음 맡아 본 김좌근은 예상보다 발휘되지 않는 자기 능력에 골머리를 앓았다.
하긴 이제 막 명문대 졸업한 21세기 청년들 역시 마찬가지다.
회사 들어가기만 하면 ‘연공서열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꼰대’들을 ‘젊고 유능한 자신’이 압살하리라 여겼던 희망과 달리, 자기도 흔한 멍청이 신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김좌근은 자기반성이 빠른 편이었다. 남대문에서 한 무리의 간민이 성문을 들이치고 불을 지른다는 급보가 들어오자 즉시 자기 옆의 군사 전문가에게 문의하는 행보를 보였으니 말이다.
김좌근의 질문을 받은 자는 한성 판윤, 그리고 전 병조 판서 김이익이었다. 그는 김좌근의 조언자 겸 젊은이가 놓친 부분을 챙기는 현명한 노인 역할로 따라와 있었다.
허나 김이익도 별 방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병사들을 갈라 보내야겠네.”
“그러면 이곳이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병사를 보내지 않으면 더욱 위험해. 우리는 남대문으로 나가야 하니까. 서대문 밖의 반역도당 때문에 어디서 더 사람을 빼 올 수는 없고……. 우선 여기가 당장 위험해 보이지는 않으니 잠시만 가마를 멈춘 다음 성문을 빨리 정돈하세. 내가 가지.”
훈련도감 대부분은 아직 김조순이 성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서대문 인근에서 위협적으로 주둔 중이다. 이쪽으로 빼낼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김좌근도 곧 김이익의 조언을 따랐다. 곧 가마를 호위하던 병사의 7할 정도가 김이익의 인솔 하에 남쪽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갑자기 빠져나가서 그런지 몰라도 행렬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썰렁하다고 표현해야 할 느낌이 김좌근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때, 김좌근은 부족한 경험 대신 천부적인 정치가로서의 감각이 경고하는 위험을 느꼈다.
김좌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성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병사는 여전히 게을렀지만, 김좌근은 어째 그 모든 풍경이 한꺼번에 옅어진 느낌을 받았다.
시준이었다면 ‘주위의 음량이 모두 낮아진 것 같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기운,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퍼지는 맹독과 같은 무언가가 파도에 비견할 속도로 소리 없이 주위를 휩쓰는 것 같았다.
그저 직감에 불과했던 김좌근의 불안은, 다음 순간 저편에서 삿갓 쓴 남자가 낮고 강하게 부르는 노래 한 마디로써 현실이 되었다.
“너는 듣고 있는가[Do you hear]…….”
듣고 있었다. 들을 수 있었다. 김좌근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그 노랫소리가 똑똑히 귀에 박힌다는 불가사의한 사실에 전율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할 틈이 없었다. 곧 그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합창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는 듣고 있는가. 성난 인민의 노래.”
방금 전까진 몰려서 있던 백성이었던 자들 가운데,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표정을 바꾸고 섬뜩한 노래를 불러댔다.
둔갑한 채 사람 사이에 들어앉아 있던 괴물이 인두겁을 찢고 하나둘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김좌근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전부 칼 뽑아!”
그 처절한 고함은 억눌린 솥뚜껑이 뒤집히듯 터져 버린 노랫소리에 묻혀 버렸다. 거대한 함성이 솟구쳤다.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
혁명군을 지원하러 달려온 남조선혁명당과 기타 세력 중에는 멀리 남양에서 달려온 이옥의 부대도 있었다.
이옥은 역사의 물굽이가 꺾어지는 지점에 입회하고 있어야 역사에 남을 영광이든 파멸이든 이룰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선비였다.
당연히 거기 포함되어 있던 젓갈장수 봉달이는 조총을 힘있게 쥐었다. 그는 부인 덕개에게 속삭였다.
“거 보오. 결국 정 진인께서 모든 반동 무리를 까부수고 서울까지 내려왔지 않아. 임자는 나만 탁 믿고 있으라구. 이번에 크게 공을 세우게 되면 서울에서 쌀밥에 고깃국 먹도록 하여 줄 테니.”
마찬가지로 조총 쥔 덕개는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편의 소매를 끌었다.
“군세가 장하기는 하지만 다 백성들 아니오? 그러지 말고 조용히 다른 사람 뒤따라가서 아랫자리 차고앉아 떨어지는 물림상이나 얻어먹읍시다. 부귀공명도 총 맞고 죽어서야 다 무슨 소용이겠소.”
“어허. 이 사람이 아직도 수평도를 익숙히 하지 못했소? 내가 누군데 감히 누가 내게 상을 물려준다느니 만다느니 한다는 거야.”
어차피 지금 당장 성벽을 넘어 쳐들어가기에는 버티고 있는 훈련도감이 만만찮다.
혁명군은 도성의 자세한 정보를 입수하고, 또 김조순이 그간 혁명해군에 대항해 마련해 놓은 곡식 운송 육로를 끊을 때까지 겸사겸사 서대문에서 세력을 개편했다.
모여든 사람들을 각자 능력에 맞게 분배하고 사기를 고무시키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덕개는 곧 임시 설치된 혁명군 부녀회에 가 봐야 했다.
남자를 죄다 전투에 동원해야 하는 혁명군은 뒤에서 여러 중요한 후방 업무를 맡아 줄 사람이 하나라도 아쉬웠다.
덕개처럼 드물게 남조선혁명당에 섞여 온 여인들은 크게 환영받았다. 밥을 하건 붕대를 이어붙이건 혁명군에는 모두 귀중한 도움이다. 이들은 급양과장 기랑이 임시로 통괄하도록 되어 있었다.
덕개는 무리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남편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러고도 얼른 가지 못해 머뭇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지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소?”
“주위가 모두 시장통 같은데 뭐가 또 들린다는 거요? 신소리 그만하고 어서 가 보오. 순서 늦으면 알짜배기 사업 기회를 뺏길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덕개는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동쪽 한양도성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슨 노랫소리가 들렸는데…….”
“노래?”
전투를 앞둔 긴장 때문에 말은 퉁명스러워도, 봉달이는 기본적으로 혁명 동지인 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덕개의 말을 따라 귀를 기울여 보았다.
봉달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
김좌근과 병사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동안, 김유근은 번개같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사실 붉은 천이 감긴 지팡이처럼 보였던 그 물건은 바로 혁명의 적기였다.
김유근은 눈앞에 있는 우마차에 뛰어올라 그것을 치켜들었다.
파라라락! 깃발이 시원하게 펼쳐지며 주위에 혁명의 빛을 뿌렸다.
김유근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지유가 가르쳐 준 이 노래가 저 먼 북쪽 평양까지 들리길 바라면서.
“가슴 떨려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은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이제 그들의 노래는 낮은 울림이 아니었다.
거대하게 폭발하여 지축을 뒤흔드는 선언이었다.
병사들은 갑자기 달려드는 주위의 모든 사람 때문에 누굴 먼저 찌르거나 때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병사들의 위로 펄럭이는 적기가 드리워졌다.
조선 전국의 남조선혁명당 중 가장 마지막, 그리고 가장 치열한 봉기가 개시되었다.
최근 급거 결성된 남조선혁명당 한성지부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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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이번 편에서는 익히 아시는 <레 미제라블>, 그중에서도 2012년 뮤지컬 영화의 장면이 변형, 인용되었습니다.
우선 초반에 김유근이 하는 말은 중반부의 "Before we cut the fat ones down to size? Before the barricades arise?"의 변형입니다. 번역하자면 "살찐 돼지들을 우리가 썰어버리기까지, 바리케이드가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가)" 정도 되겠군요. (김유근이 그 장면을 아는 건 물론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하하.
2. 노래 가사에서, (노비가 아니라) "노예"라는 말은 현대에는 주로 slave의(그러니까 비 동양권 예속인의) 번역어 뉘앙스로 쓰입니다만 조선에서도 쓰던 한자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