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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59화 (159/284)

159화

46. 행주 대첩(5)

혁명군은 종대 대형을 이루고 있어서 피해를 입거나 이미 총을 쏴버린 자들은 전방의 소수였다. 홍총각이 직접 이끌고 나온 병사들은 아직 탄환을 소모하지 않은 상태였다.

홍총각이 효시처럼 관군을 겨누고 먼저 한 발 발사하자, 모든 병사들이 뒤따라 그곳으로 총을 쏘았다. 그나마 장전을 막 마쳤던 훈련도감 군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지금 약간의 거리를 둔 조선 관군과 혁명군은 둘 다 장전된 총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두 부대 사이에는 단 하나의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혁명군은 빈총만 갖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총검이 달려 있으니까.

홍총각은 자신의 머스킷을 한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어깨 위까지 들어 올렸다. 조선 옷에 비해 소매가 좁은 혁명군복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양군은 그 순간 같은 심정이었다.

‘그게 되겠냐?’

그러나 홍총각은 혁명의 전위대장이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남자였다. 일전 주석기 씨름대회에서 증명되었지만, 주석을 제외하면 조선 양계에서 그보다 강한 사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홍총각은 팔을 뒤로 크게 당기며 괴성을 내질렀다.

“혁명이다!”

그 혁명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직선을 그리며 포탄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그러고는 홍총각과 가장 가까이 있던 조선 관군의 배를 여지없이 꿰뚫었다. 병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하고 쓰러졌다.

관군은 오래된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몽골 팔기가 총병을 상대할 때 썼던 투창과 비슷하다. 강인한 몽골병은 말 위에서 창을 던져 조선 조총수를 꿰뚫곤 했었다.

그러나 브라운 배스 머스킷은 투창보다 훨씬 무겁다. 게다가 투척용으로 설계된 물건이 아니기에 그것을 저렇게 곧게 던지려면 단순히 같은 무게의 투창을 던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이 필요하다.

관군이 순간적으로 멈춰선 아주 잠깐의 시간이면 혁명군에게 충분했다. 혁명군은 곧 간단한 우위를 깨달았다. 저들의 손에는 당장 칼이 없고, 우리에겐 있다.

“우와아아아!”

홍총각처럼 총을 집어던지지는 못했으나 혁명군은 각자 총검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홍총각 또한 전위대의 깃발을 창 삼아 세워들고 선봉에 섰다.

당황한 관군은 조총을 몽둥이처럼 휘두르거나 다섯 명에 하나쯤 차고 있는 환도를 뽑아 저항했다.

그러나 몽둥이와 짧은 칼은 모두 총검, 그러니까 창에 대항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 무기다.

바로 이럴 때를 위해 살수가 있는 것이지만 그 살수들은 왜인지 몰라도 즉시 증원되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군을 화망에 가둘 예정이었던 관군의 한쪽 사면이 둑 터진 것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처한은 모진 결심을 했다.

“적의 예리함을 꺾어야 한다! 저곳으로 포와 총을 어지러이 쏘아라!”

혁명군과 훈련도감군이 뒤엉켜 싸우는 곳에 대포를 갈기라는 명이었다.

“그, 그렇게 되면 우리편까지 맞을 수가 있소이다!”

김처한은 반론하는 초관 한 명을 호되게 꾸짖었다.

“쏘지 않으면 패퇴를 면할 수 없다. 감히 군령을 지체하여 적을 이롭게 할 셈인가. 바로 군문효수에 해당하는 죄다!”

그 초관, 방우정은 입술을 깨물고 물러나왔다.

북한산성 전투에 참여했던 방우정은 지금 그의 포수 초를 이끌고 여기 와 있었다.

그리고 방우정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독특한 이력 또한 있었는데, 지금 혁명군 정찰총국장을 하고 있는 방우준의 형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동생은 당시에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만 말해 주었을 뿐 특별히 형을 노골적으로 회유하려 들지는 않았다.

조제프 푸셰가 전수한 사기꾼의 기본이었다. 원래 아무리 급해도 사기 치려는 자는 자기 목적을 처음부터 밝혀서는 안 된다.

그래서 21세기 종로의 인간 사냥꾼들도 먼저 따뜻한 말부터 건네는 것이다. 당시 방우준이 형과 같이 서초 나눠 피우며 한 얘기라는 것도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같이 공부해 보지 않으시겠어요?” 수준의 말이었다.

그때 방우준이 자기 근황 풀어놓는 척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심어 놓은 씨앗은 방우정의 가슴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좌병사 김처한이 다시 소리쳤다.

“우리 뒤에는 주상 전하의 거가가 계신다. 너희들은 죽는다 하더라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느니라!”

방우정뿐만 아니라 모든 초관의 심경이 일그러졌다. 김조순이 왕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훈련도감 모두가 알고 있다.

김처한의 지금 말은 단지 서서 죽으라는 것 때문에 불쾌한 것이 아니다.

조직의 단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비도덕적 비밀의 공유’를 방금 김처한은 어겼다.

방우정은 아까 흔들리던 씨앗에서 싹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훈련도감을 명운을 함께하는 식구가 아니라 필요할 때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외부인’으로 여기는 김조순과 장수들을, 우리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가?

그들이 한 짓은 어리석은 전왕과 현왕의 소치와 다를 게 무엇인가?

아마 그때 급하게 뒤에서 달려온 전령의 보고가 없었다면, 방우정 이하 초관들은 일제히 항명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뒤쪽 성채에서 이변이 일어났소이다! 협련군이 작당하여 변을 일으켜, 훈국 군사들이 서쪽 성벽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

엄밀히 말하자면 성내에 있던 도감군은 ‘밀려난’ 것이 아니었다.

김조순과 이득제는 전투 시작 후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여기에서 협련군을 이긴다 한들, 그때는 저 앞에서 혁명군이 살수의 지원을 못 받는 포수들을 무너뜨리고 밀려들 것이다.

어차피 왕이 이따위 짓을 한 이상 행주산성을 지켜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

중요한 것은 이편의 힘을 보존하는 일이다.

김조순이 결단하고, 이득제가 실행했다.

살수들은 우선 사나운 공격으로 오합지졸 협련군을 잠시 주춤하게 했다. 그러고는 급속히 전달된 명령에 따라 서쪽을 향해 조금씩 물러났다.

행주산성 서쪽에는, 심각한 부주의나 불운만 없다면 그럭저럭 사람이 넘나들 수 있는 경사면이 있다.

물론 수비군이 없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임란 때의 왜군은 이쪽으로도 찔러 보려다가 조선 과학의 막강한 힘을 맛보고 석회에 눈이 멀어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그래서 어차피 복잡한 전술 구사하기 힘든 혁명군은 여기로는 공성하지 않았다. 포위망 자체야 있었지만 그러느라 있었던 병사들도 방금 전 서쪽 사면 일대에 성대하게 지른 불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살수들은 그쪽으로 천천히 물러나다가 성벽을 하나둘 넘어 서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불도 거의 꺼진 마당이라 그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휘부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시준과 남공철, 정약전은 김조순이 의도한 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안 보이지만……. 저들이 서쪽으로 병사를 내려보내고 있소이다. 아무래도 우리 군의 옆을 치려 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두 가지 의견이 대립했다. 한쪽은 남공철을 위시한 강경파, 다른 쪽은 정약전이 대표하는 신중파였다.

“안의 혼란을 보니 변고가 생기기는 한 것이 틀림없소이다. 어찌되었건 성 안에서 훈국 군사가 많이 빠진 것은 분명. 적이 무슨 수를 쓸지는 모르지만 여기에는 1영대와 주석결사옹위대가 있으니 방비는 걱정이 없지요. 싸움에 임한 이상 물러남은 없는 법[臨戰無退]. 이미 나간 2영대는 물론, 포위하고 있는 3영대와 유군(遊軍, 예비대)으로 기다리는 4영대까지 일제히 호령하여 들이쳐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빛나는 군공이 많을수록 입지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남공철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리고 혁명막부의 내정 총책으로서 수성을 중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정약전의 반응 또한 자연스러웠다.

“교병필패라. 적의 심계를 모르는 와중 급하게 전군을 휘몰아 나아가는 것은 위험하오이다. 주석 동지.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원정을 거행할 힘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일이 자칫 잘못되어 혁명군을 잃었다간 모든 대사가 끝장입니다. 깊이 살피고 멀리 염려하십시오[深謀遠慮]. 지금은 오히려 2영대를 퇴각시켜 성을 에워싸는 일을 굳혀야 합니다.”

지금은 ‘그것이 인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혁명의 수령이 되어 있는 시준이지만 그의 취향은 본래 보수적 안정주의자다. 그는 정약전의 헌책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남공철의 안은 실패하면 뒤가 없다. 그러나 정약전의 안은 설사 그게 잘못된 판단이라 할지라도 제2책, 그러니까 행주산성을 다시 포위하고 버티는 작전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다.

만약 염려하던 대로 근왕군이 몰려와도 최대한 군세를 보존해서 퇴각하면 황해도까지 권역에 둔 채로 재차 남침을 노릴 수도 있었다.

‘성공할지도 모른다’ 정도의 전망에 그가 걸머진 수많은 목숨을 다 걸어볼 만한 무모함이 시준에게는 없었다. 영웅의 자질은 갖지 못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영웅이 아니다.

시준은 무섭게 고민하다가 결국 퇴각을 결정했다.

“군호를 보내시오.”

남공철이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진언하려 하였으나 시준은 듣지 않았다.

혁명군도 기초적 군호는 조선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거운 징 소리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행주산성 성내에까지 들렸다.

그 순간, 김조순은 안도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이득제는 훈련도감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훈련도감의 주력이며 대부분의 수효를 차지하는 병종은 지금 나가 있는 총병이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가장 강력한 망치가 조총수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물론 조선군은 총기를 대단히 중시하며, 또한 시대 변화에 따른 군제 변화에 유연한 편이었다.

조선의 지배 계급은 유학자이며 유학자에게 병(兵)은 세상의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통치의 도구일 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다.

화기 전술을 접하자마자 대량 복제해서 군대 자체를 총병 위주로 바꾼 조선의 변화는 현대인이 보기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부드럽게 성공한 정규 국가는 의외로 많지 않다.

허나 조선을 위협한 것은 왜군만이 아니다. 왜군의 조총은 최속군주 선조를 잡지 못했지만, 여진의 기병은 전쟁군주 인조를 무릎 꿇렸다.

조선은 이 전훈도 합리적으로 참고했다. 그래서 후기로 갈수록 많아진 건 총병일지라도, 후기로 갈수록 강화된 것은 기병이다.

훈련도감 마군은 현재 전 조선 최강의 단위 부대였다.

따라서 방금 큰 칼로 관군 한 명을 베어 가르고서야 퇴각 신호를 들은 홍총각은, 미처 그 의미를 헤아리기도 전에 산성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마군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혁명군은 사면을 포위하고 화망을 구성하던 관군과 싸우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돌격 대형은 서너 방향으로 갈라져 있다.

길이 좁다 해도 도저히 기병을 막을 수 있는 군용이 아니다. 현재의 혁명군에게 일부 부대만이 따로 반전하여 기병을 막아서는 전술적 기민함과 순간적 용맹함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훈련도감은 바로 그 틈을 노렸다.

“이 건방진 천것들이, 길을 열지 못할까!”

몸소 앞으로 나서 편곤을 휘두르는 이득제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정복자라는 그 위명을 제대로 발휘하는 중이었다. 총검을 서툴게 내밀던 혁명군 한 명의 머리가 여지없이 깨져나갔다.

기병은 달릴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것을 잘 아는 훈련도감 마군은 멈춰 서서 혁명군과 싸우는 대신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김처한은 자신이 그 돌격의 진의를 알았다고 생각했다.

“저기 영중추부사 대감(김조순)과 훈련대장(이득제)이 말을 타고 나온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남은 전군을 휘몰아 저 반역도당의 본영을 바로 칠 계략인 것이다! 전군은 일제히 본관을 따라라. 우리 용맹한 마군의 뒤를 쫓아가 받쳐 주도록 한다!”

판단의 옳고 그름은 둘째 치더라도 속도 하나는 알아줄 만했다. 과연 병마절도사까지 한 사람다운 기민한 판단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 생각을 재빨리 떠올리는 것은 진실로 쉽지 않다.

그러나 방우정은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훈련대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장수도 아닌 풍고 대감이 왜?’

김조순이 말을 탈 수 없는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문신이 돌격에 참여하는 일은 굉장히 어색한 것이었다.

그 어색함은 방우정에게 다른 종류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득제와 김조순의 의도야 어쨌건 지금은 김처한의 방안이 옳았다.

지금 살수는 성벽을 넘어 멀찍이 후퇴. 그리고 마군은 지금 그들의 눈앞을 돌파하고 있다.

포수들만 덩그러니 여기 남아 있어 봐야 뭘 한다는 말인가. 지금 그들의 뒤에는 별로 지키고 싶지 않은, 아니, 그걸 넘어서 자신들의 뒤에 칼을 꽂았을지도 모르는 왕과 그 근시밖에 없다.

방우정도 곧 결정했다. 나머지 초관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원래 산 중턱에서 행주산성을 방어했어야 할 훈련도감 조총수들은 죽을힘을 다해 혁명군 본대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혁명군은 그들까지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붉은 물결과 검푸른 물결이 이번에는 공수가 바뀐 채 거칠게 부딪쳤다. 비명을 타고 날아오른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혁명군도 퇴각 신호를 받은 처지다. 그들 역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라 적극적으로 도감군을 가로막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조선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던 부대는 많아도 조선군의 도주를 막을 수 있었던 부대는 없었다.

그 절대법칙은 도주 방향이 전방일 때도 적용되었다. 용맹한 전위대장 홍총각조차 이 좁은 길에서 군세를 정돈하는 틈으로 유수처럼 빠져나가는 조선군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완전히 틀어막지는 못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묘리라 함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거의 전력을 온존한 훈련도감 마군과 그 뒤를 따르는 지쳐 빠진 조총수들은 한순간 2영대를 거슬러 올라가 혁명군 본대 앞에 출현하게 되었다.

***

남공철은 자신의 식견이 틀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만약 그의 의견대로 병사를 일거 투입했다면 저 마군에게 거꾸로 기습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남공철의 역량이 모자라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봐야 한다.

조선군의 전법에 익숙한 남공철은 저런 미친 것 같은 역습 작전을 관군이 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는 의표를 찔렸다. 그러나 긴장감보다 큰 의문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준은 혁명의 영도자답게 모두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저 짓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소?”

주석의 표정이 좀 얼빠진 것 같았다는 점은 역사에서 삭제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약전과 남공철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직 본부 1영대와 예비 4영대가 건재한 상황. 몇백 기 마군의 자살 돌격만으로 뒤집을 수 있는 판세가 아니다.

김조순이 자포자기한 것일까? 김조순과 여러 가지 의미로 교우가 깊은 시준은 김조순이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니면 최후의 승부인가? 그러나 그러려면 전군을 휘몰아 내려왔어야 마땅하다.

주석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남공철 이하 수뇌부는 자기 할 일을 했다. 즉시 6파운드 야포가 준비되고 병사들이 프랑스식의 중대별 대형을 이루어 대기병 방진을 쳤다.

그러나 김조순은 장렬한 산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바란 것은 병사들이 진을 치느라 기병 앞으로 집중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득제가 동개궁을 꺼내 들었다.

“전군은 본관의 명적(鳴鏑)을 따라라!”

구슬프게 호곡하는 우는살을 신호로 말 위에서라면 아직 총보다 우월한 조선군의 자존심, 기마 사격이 펼쳐졌다.

활이 닿을 리 없는 곳에서 쏘는 거리였지만, 그건 활 앞에 있는 병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사람은 그렇게 냉정할 수 없다. 혁명군은 놀라서 명령도 없이 마구잡이 사격으로 대응했다.

훈련도감 마군도 몇 명이 땅에 처박혔지만 피해는 대단치 않았다. 이제 한 차례 탄환을 소모한 혁명군은 최소한 일제 사격으로 기병을 막을 수는 없다.

바로 그 순간, 훈련도감 마군은 크게 대형을 뒤틀어 동북쪽, 그러니까 시준의 입장에서 봐서 좌측의 얇은 포위진으로 돌진했다. 어떻게 보자면 뒤로 돌아 본영을 후려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런! 복대장(중대장)들은 급히 좌측면으로 집결하라!”

이 자리에서 가장 군사 전문가인 남공철조차 본격 실전은 이 혁명전쟁이 처음이다. 혁명군이 모두 경애하는 주석 동지를 결사 옹위하러 크게 움츠러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김조순과 수백 명의 마군은 그 조치를 응원했다.

김조순은 애초에 혁명군 본영을 칠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무게 중심이 한순간 뒤바뀌며 대열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훈련도감 마군은 포위를 돌파하여 본영의 뒤나 옆을 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직진하여 똑바로 전장을 이탈했다.

“……뭐지?”

시준이 우두커니 중얼거린 그 물음은 순식간에 계속해서 재생되며 혁명군 전체에 퍼졌다. 뭐지? 뭔데? 쟤네 뭐야? 메아리처럼 답 없는 물음이 파도처럼 번져 갔다.

가장 먼저 상황을 깨달은 자는 남공철이었다.

“이런, 달아났군!”

과연 훈련도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들은 한다하는 준재인 혁명군 간부들의 사고 속도보다도 빠르게 도주했다.

최속군주 선조가 친히 내공을 담아 빚어낸 훈련도감은 불민한 후손 인조의 노둔함을 본받지 않았다.

그들은 2백여 년 전 실전된 줄 알았던 고강한 경공술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래서 뭐든 근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혁명군 기병대장 매경은조차도 조선의 군마가 저토록 빨랐던가 하는 의심 속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표정을 본 남공철은 추격 명령을 포기했다. 어차피 쫓아가 봐야 매경은의 기병대는 훈련도감 마군의 상대가 안 된다.

그래서 혁명군은 할 수 없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마군을 따라가지 못해, 혁명군 전위 2영대와 본대 사이에 끼어버린 훈련도감 포군 천여 명이 어색하게 그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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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훈련도감의 핵심 병종이 총병이었고, 갈수록 총병의 숫자가 많아진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결정적인 타격군의 역할은 기병에 많이 주어졌으며, 이괄의 난에서 야전 기병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조선군 기병이 편곤을 즐겨 쓰게 된 결정적 계기입니다. 관군이 편곤을 써서 이겼기 때문이 아니고 이괄군이 편곤을 써서 관군에게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두 차례의 호란 이후 더욱 강화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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