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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58화 (158/284)
  • 158화

    46. 행주 대첩(4)

    요란한 포성과 함께 연기가 치솟자 김조순도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군세를 정돈했다. 김조순은 주위를 둘러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무식한 도발이 의미하는 바는 뻔하다. 이제 곧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혁명군의 사정을 잘 모르는 김조순 입장에서는 약간 의아한 움직임이었다.

    ‘예상보다 빠른데. 그 무용지물 수백 명을 들여보냈다면 관군의 치중 고갈을 노리면서 기다려야 마땅하지 않는가.’

    김조순은 사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저 찢어 죽일 역적도당은 이편의 군량을 빼앗아서 기세가 오른 모양이다.

    김조순은 이 시점에서 다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운기조식에 힘써야 했다. 그는 주화입마를 피하기 위해 눈앞의 현실에만 집중했다.

    이유야 어쨌건 지금 혁명군이 접근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김조순은 그것 외에는 당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저놈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건 등에 날개가 돋지 않은 이상에야 앞의 골짜기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포수와 사수를 몰아넣어라. 녹각에 닿기도 전에 다 쏘아 죽여!”

    이득제와 훈련도감 군관들이 뛰어다니며 채찍과 몽둥이로써 조선군을 ‘관측’하자 훈련도감 대부분은 정위치를 찾게 되었다.

    그래도 역시 조선 최정예군의 이름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 각 초는 그런대로 일사불란하게 군용을 갖추었다.

    훈련도감은 여태까지 혁명군이 상대했던 그저 그런 오합지졸이 아니다.

    무엇보다 총융, 수어, 어영의 3개 청과 달리 훈련도감은 인조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금위영도 인조가 창설한 부대는 아니지만 그건 훈련도감의 별도 부대에서 출발했다).

    한마디로 근본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총융청이 북한산성을 방위하고 수어청이 남한산성을 지키며, 어영청과 금위영이 왕을 호위하는 것처럼 훈련도감 역시 독립적인 창설 목적을 가진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 류성룡에 의해 설치된 부대. 그 존재 목적은 왜군의 격멸에 있다.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상정될 수 있는 군사작전 중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행주산성은 위대한 도원수 권율이 4만 왜군을 여지없이 격파한 바로 그 사적지이며, 훈련도감은 그 절체절명의 전투 때와 같이 도적놈들로부터 이 도성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

    게다가 그때보다 제반 사정은 훨씬 유리하다. 따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성은 함락되어서는 안 된다. 훈련도감은 행주 대첩을 이 자리에서 재현할 준비 만반이었다.

    영길리군 같은 인외의 존재는 어쩔 수 없다 하여도, 조선 안에서라면 맞상대할 부대가 없다.

    그 점을 믿어 의심치 않던 김조순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애석하게도 그 예감은 매우 정확했다.

    꽝!

    김조순의 20보쯤 뒤에서 다양한 사무를 챙기며 따라오던 군졸 서너 명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튕겨 날아갔다.

    담대함과 굳건한 정신으로 말하자면 따를 자가 없는 김조순이었지만, 잠시 후 땅에 순차적으로 떨어지는 팔, 다리, 머리며 창자와 손발을 목도했을 때에는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서양의 대포인가!”

    금위영을 단 2회 사격으로 괴멸시킨 16리브르 함포 2문이 불을 뿜은 것이다. 왜군은 이런 것 가지고 오지 않았다. 행주산성은 지금껏 맞이한 적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

    전함 아우스터리츠 최후의 잔해인 이 두 문의 대포는 사실 사격 횟수 자체로 보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표류하여 좌초한 반년 동안 소금기를 너무 많이 맞았다. 그 이후에도 평양성 앞, 그러니까 대동강 가에 배치되어 습기에 노출되었으며 관리도 잘 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인들은 지금 포강 청소가 뭔지 모르겠다는 기세로 위험천만한 속사를 시도했다. 아마 저건 이 전쟁만 치르면 더 이상 대포라고 부르기 힘든 물건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레타 자작은 그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는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건조하게 말했다.

    “장약 더 줄이라고 전해. 멍청한 조선 놈들. 저 첨단 함포를 마치 부지깽이 다루듯 하는군! 그렇게 막 쏘면 안 된단 말이야!”

    지금 평양에 있는 조제프 푸셰라면 ‘전함 아우스터리츠의 마지막 유산이 이국에서도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해 빛을 발하고 있다!’는 둥 떠들었겠지만, 모범적 해군 장교인 그레테 자작의 입장에서는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영국 야포와 로켓은 어떻게 되었나?”

    “혁명군 지휘부의 전언으로는 어차피 지금은 쏘아 봐야 별로 효과도 없으니, 조선 정부군이 마주쳐 내려올 때까지 일단 대기시켜 놓는다고…….”

    “정말 전쟁을 할 생각이 있는 건가. 내 부하였으면 바로 채찍질을 백 번은 했을 거다!”

    그레테 자작은 그렇게 괜히 욕을 했으나 어차피 지금 프랑스군은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행주산성 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한 남공철 이하 지휘부가 황해도 때와 다르게 어떤 중화기도 프랑스인에게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혁명은 조선인의 손으로 쟁취되어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관전무관 비슷한 위치에서 이 전투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프랑스 수병들은 그레테 자작이 끊임없이 늘어놓는 훈수를 혁명군에게 또 가서 전해야 하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마디 할 때마다 조선인들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였다.

    전쟁터처럼 사람이 흥분하기 쉬운 곳은 없다. 프랑스인들 중 이 먼 이국땅에서 우리 편 칼 맞고 죽기를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부하들의 고충을 잘 모르는 그레테 자작은 열정적인 태도로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프랑스군은 아무래도 전장의 포화에서 좀 빗겨나 있는지라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관군 쪽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한 것은 그레테 자작이었다. 그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저게…… 뭐지?”

    ***

    김조순에게 여러 차례 야단맞긴 했어도 이득제 역시 장수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행주산성에 몇 차례 포격이 가해지고 나자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잘해 봐야 일각에 두세 발 쏠 뿐이올시다. 진천뢰 같은 것도 아니어서 상하는 인마의 수효는 대단치 않습니다! 제가 군세를 다잡겠습니다.”

    그 말은 옳았다. 대포도, 지금 여기저기 떨어지고 있는 불덩어리도 행주산성에 있는 조선군에게 치명타를 줄 수는 없었다. 김조순도 겨우 침착을 되찾았다.

    “내가 어전에 갔다 오겠다. 그 협련군인지 뭔지 하는 자들은 도통 쓸데가 없으니 전위로 내세워 화살과 총탄을 받아내게 해야지.”

    김조순은 훈련도감 군세를 조금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슨 수를 쓰든 왕을 협박하여 협련군을 수성전에 동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조순이 한발 늦었다.

    그가 막 왕의 유막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혁명군이 아직 한 발짝도 들여놓았을 리가 없는 산성 내부 곳곳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외침이 울리기 시작했다.

    “역적 김조순을 주살하라!”

    깃대가 쓰러지고 피리와 북과 징이 어떤 체계도 없이 어지러이 울렸다. 훈련도감 군사들은 갑자기 등을 푹 찌르는 협련군의 칼날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비적 정시준과 잠통모반한 자가 바로 김조순이다!”

    “훈국 군사들은 항복하면 목숨을 건지리라!”

    김조순은 눈을 부릅떴다. 놀랄 일까지는 아니었다. 김조순도 언젠가 이품이 헌제류의 발악을 시도할 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씨름판이 있어야 씨름을 하듯이, 조정이 존재해야 정쟁도 하는 법이다.

    김조순이 예측한 이품의 발악은 이 전투를 이긴 후의 논공행상 과정에서 자기 지분을 주장하며 각을 세우다가 일어나는 서울의 정치 투쟁이었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적행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조순은 아예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이품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품이 한 박자 더 빨랐던 셈이다. 그는 조카와 공통점이 있었다(어쩌면 왕 자리 올라가면 생기는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이품은 언제나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정략을 좋아했다.

    김조순은 안쪽 영채에서 쏟아져 나오는 협련군 가운데에서 말을 탄 채 목소리를 높이는 이품을 보고 눈을 비비고 싶었다.

    “군사들은 의심하지 말라! 군왕이 여기에 있다! 왕법 앞에 엎드리는 자는 목숨을 부지하리라!”

    이품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약속받은 협련군은 기세가 올라 힘껏 악썼다.

    “지존의 깃발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할까!”

    우스워 보이지만 진짜로 훈련도감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행주산성에 모인 자들은 이를테면 보수파. 그들에게 왕의 이름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전왕 이공이나 현왕 이품은 확실히 현재 존경받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왕’이라는 직위 자체는 그렇지 않다.

    이 둘은 약간 다른 개념이다.

    위나라의 황제 조모는 길 가는 사람도 다 아는[路人皆知] 허수아비였지만 그를 푹 찔러 죽인 성제, 성쉬 형제는 일족의 절멸을 면하지 못했다. 사회에서 경원시되는 인간 부랑배가 있다고 해서 개가 그 인간을 물어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김조순의 사병쯤으로 여겨지던 훈련도감 군사들조차 왕이 있는 곳에 ‘하민인 자기가’ 총질을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격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어어 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맥없이 협련군에게 당하고 말았다. 개중에는 전사(戰史)에 통달했는지, 쌍령의 일을 재현하려 횃불을 화약 상자에 던져 대폭발을 일으키는 놈도 있었다.

    특히 필사적인 것은 가만있다가는 김조순에게 목이 날아갈 위기였던 윤서동 이하 경기도 장병들이었다.

    변변한 무기도 없는 그들은 꺾어 든 목책이나 어디서 주워 온 쇠꼬챙이, 그도 없으면 돌멩이를 들고 훈련도감 군사를 후려갈겼다. 어떻게 보면 백의종군의 모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었다.

    김조순은 앞장서서 용맹하게 창을 휘두르는 개성 유수 윤서동을 알아보고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적도가 개성에 쳐내려왔을 때 그렇게 용감히 싸워 보지 그랬냐!’

    이득제가 다급하게 외쳤다.

    “군세의 반을 뒤로 돌려 왕을 막아야 하오이다!”

    김조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득제는 그것을 보자마자 말을 탄 채 뛰쳐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몇몇 역당의 간자가 소란을 일으키는 것뿐이다! 성내에 있는 모든 초(哨)는 뒤돌아서서 싸워라! 훈국 군사가 아닌 자는 모두 적이다!”

    몇몇이라고 했다가 모두 적이라고 했다가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명령이었지만 어쨌든 훈련도감 군사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자기 보호 본능에 의거한 분노를 피워 올렸다.

    다행히 지금 혁명군을 막기 위해 나가 있는 초는 대부분 포수다. 살수는 백병전에 대비해 성내에 대기 중이었고, 그래서 이런 마구잡이 전투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훈련도감 살수들은 창검을 꼬나쥐고 노호했다. 협련군에게 왕의 명분이 있다면 훈련도감에게는 힘 그 자체가 있었다. 곧 행주산성에서 혁명군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난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

    여기에서 이득제 다음으로 높은 군관으로서, 전방의 포수들을 통솔하고 있던 좌별장(左別將) 김처한(金處漢)은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훈련도감 포수는 대부분 밀려오는 반역도당을 막기 위해 골짜기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뒤쪽 성내에서 들려오는 소란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지만 확인할 틈은 없었다. 당장 뒤보다는 앞에서의 소란이 더욱 거창했기 때문이다.

    혁명군은 여진족이 즐겨 썼던 바퀴 달린 나무 방패를 밀며 다가오고 있었다.

    웬만큼 가까이 오기 전에는 조총만으로 뚫을 수 없는 방어책이다. 종대 대형이라 전면은 그럭저럭 방어가 되어 보였다.

    김처한은 일단 재빠르게 하명했다.

    “완구와 총통, 그리고 화차를 준비하라!”

    행주산성의 전투에서 변이중화차(邊以中火車)가 빠질 수는 없다. 승자총통 여러 발이 묶여 단단한 목판에 보호받는 조선판 장갑차가 위엄찬 모습을 드러냈다.

    임진왜란 때처럼 국가 총력전이 아니라서 수십 대씩이나 동원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로도 저 알량한 방패를 부수는 데에는 충분하다.

    전진하는 혁명군도 물론 조선군이 포를 끌어대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사거리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번에도 우렁찬 군가를 발자국에 맞추어 불러댔다. 조선군이 생각하는 것처럼 광신 때문이라기보다는 공포심을 잊기 위한 쪽에 가까웠다.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면서! 찬란한 사명감에 적기를 편다!”

    “동지여! 그대들은! 내가 지킨다!”

    “혁명의 횃불아래 목숨을 건다!”

    김처한은 그 기괴한 광경에 기죽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다잡았다. 저들이 외치는 노래처럼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게 해 줄 차례였다.

    “방포하라!”

    그러나 혁명군 지휘부는 제대로 된 전통도, 경험도 없는 혁명군을 포화 전면에 노출시켜 붕괴시킬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관군이 미처 포를 쏘기도 전, 갈대피리 부는 소리와 함께 진입로 전체에 엄청난 연기가 치솟았다.

    아껴 두었던 콩그리브 로켓이 일제 발사된 것이다.

    물론 로켓 무기의 참담한 명중률은 혁명군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관군을 맞추어 격멸한다던가 하는 황당한 발상은 하지 않았다.

    혁명군 포대가 노린 것은 연막 효과였다. 대신기전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엄청난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다.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곳곳에서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조준하고 쏴도 잘 안 맞는 게 이 시대의 화약 무기인데 이래서야 허공에 삽질하는 셈이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는 화차며 총통, 그리고 조총에 재기 위한 엄청난 화약이 쌓여 있다. 유폭이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방어선이 붕괴될지도 모른다.

    “뭣들 하느냐, 일단 우리도 쏘고 보아라!”

    김처한은 그렇게 외쳤지만 첫 사격은 혁명군 쪽이 빨랐다.

    조선 관군이 주로 쓰는 조준 사격과 달리 혁명군은 철저한 면대면 제압 사격을 훈련받았다(어차피 조준해서 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명중률에 개의치 않는 무식한 총격의 사거리는 조총보다 명백히 길었다. 관군은 일단 잽싸게 머리를 숙이기 바빴다.

    그래도 훈련도감이니만큼 곧 대응 사격이 이루어졌다. 조총이야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나, 용케 발사된 총통 몇 문은 기어코 혁명군의 나무 방패를 깨버렸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혁명군의 전열이 멈추었다. 일반적인 백성 반란군이라면 이쯤에서 기세가 꺾여야 한다.

    그러나 이 돌격의 선봉에 선 것은 혁명의 전위대 2영대였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대장은 혁명 무력의 상징인 홍총각 그 사람이었다.

    홍총각은 이 시점에서 본영과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그레테 자작의 보고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본영에서 다급하다는 듯이 울려 대는 전진의 북소리는 똑똑히 들었다.

    지금 백병전을 맡아 줄 훈련도감 살수들이 뭔가 혼란에 빠진 것으로 보이니, 때를 놓치지 말고 돌진하라는 구체적 사항은 물론 전달할 도리가 없다. 시준은 안타까움에 손톱을 깨물며 전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준의 코드인사는 그때 다시 빛을 발했다.

    홍총각은 지휘부를 믿었다. 정확히는 그의 오랜 친우인 정시준을 믿었다. 주석 동지가 허락했다면 무언가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만 살아왔던 지난 인생에는 실수가 없었다. 만상 깡패 홍총각이가 어느새 영대장 동지가 되어 떵떵거리며 혁명의 전위대장을 자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모두 그 똑똑한 서장관 꼬마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홍총각은 기다란 총검이 꽂힌 영길리총을 치켜들었다.

    “자랑스러운 혁명 동지들이여! 모두 본 영대장의 뒤를 따르라! 후퇴는 없다. 전진, 또 전진! 신심 드높이!”

    처음으로 당해 보는 제대로 된 공격에 주눅 들어 있던 혁명군은 홍총각의 포효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전진, 또 전진! 용기백배해!”

    구호와 노래가 극한 상황에서 애용되는 이유는, 편리하게 정신과 육체를 통제하는 트리거가 되기 때문이다. 2영대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일제히 화답하며 다시 땅을 박찼다.

    연기에 당황해 있는 총포를 한 번에 쏴 버린 것이 김처한의 실수였다. 홍총각은 조총과 화포의 재장전 시간을 노리고 망설임 없이 연기에 뛰어들었다.

    김처한은 병사들의 손이 5개쯤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연기를 향해 기원했다.

    ‘제발 잠시만 거기서 헤매 다오!’

    그러나 혁명의 길에 지체는 없다.

    지나치게 빨리 달려온 것 같은 홍총각의 전위대는 연막 안에서 불쑥 뛰쳐나왔다. 그 흉흉한 기세에 놀란 훈련도감 포수들은 손에 들었던 화승을 떨어뜨리거나 입에 물었던 총알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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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훈련도감은 실제로 대(對)일본군 작전에 중점을 두었고, 군사 훈련 시에 가상 적군으로 왜군 역할을 하는 부대를 두고 훈련에 임했습니다.

    2. 쌍령의 일이란 건 쌍령 전투 시 우병사 민영의 부대에서 화약이 폭발하여 군중에 혼란이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원한을 품은 자가 불을 던졌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다만 쌍령 전투는 그런 우발적 사고와 <300명 기병 돌격>으로 몇만 명이 붕괴한 그런 황당하고 일방적인 전투까진 아니었습니다. 졸전인 거야 맞지만...

    3. 김처한은 과거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원 역사 홍경래의 난 당시 순무군의 총괄 인솔자로 임명된 신뢰받는 무관이었습니다. 근데 전쟁 나가기가 무서웠는지 병을 핑계로 임무를 거부하는 바람에 효수당할 위기에 처하고 의금부에 하옥됩니다. 그때 최종적으로 순무사가 된 사람이 이요헌이죠. 그리고 김처한은 어떻게 되었냐면... 아들 김우중이 아비의 죄를 씻겠다고 전쟁에 나가 8명을 베어 죽이고 24명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유배로 감형됩니다.

    4. 작중 나온 나무 방패는 현대 대테러부대도 쓰는 바퀴 달린 바디벙커를 생각하시면 되는데, 누르하치 때도 썼고 건륭제의 원정 때도 썼으며 나선정벌 때도 썼습니다. 청만 쓴 것은 아닙니다만... 총격에 대해 상당한 방호력을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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