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57화 (157/284)

157화

46. 행주 대첩(3)

송상이 광범위한 면적을 아우르는 상인 집합체라면, 강상은 이를테면 대기업 클러스터에 비유할 수 있다.

소금과 쌀 등의 독점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여객주인, 선상(船商) 등을 휘하에 두거나 겸업하여 복잡한 네트워크를 유지한다.

이 강상, 그러니까 경강상인은 서울을 무대로 활동하는 특성상 권력자와의 유착이 가장 심했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사는, 굳이 분류해 보자면 조선 정부가 유지되었으면 좋겠다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시준은 이들을 가능하면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으나, 강상은 송상처럼 정부에 의해 몰린 상황도 아니었고 혁명막부가 이들에게 지울 만한 빚도 없었다.

그래서 강상 중 서상과 손을 잡은 것은 오죽당과 깊이 연계된 자들 정도였다.

적지 않은 대고는 계속 간을 보며 혁명막부와 연락만 유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

김조순과 김이익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강상은 당장 모두 숙청해버리지 않은 것이다. 또한 김이익이 단행한 인질 작전도 많은 강상을 조정 편으로 기울어지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혁명막부가 전쟁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던, 그리고 봉달이 같은 젓갈 장사꾼의 귀중한 수입원이 되었던 평안도 소금은 이 면에서 보면 하책이었다.

강상은 오로지 독점으로 먹고사는 집단이다. 빠르게 나서서 높은 값으로 매점매석한다는 순진한 발상이 아니다. 송상도 그랬지만 강상 역시 자신들의 독점 계획에 협조하지 않는 싸전이나 미곡 판매자들에게는 잔혹한 응징을 가했다.

그런 강상의 눈에 시준이 곱게 보일 리 없다. 일부 도고들은 서상을 오히려 적대하기 시작했다.

도고의 저택뿐만 아니라 음침한 주막과 후미진 포구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은 회동 끝에 대강 논의가 완성되었다.

“그 어린아이가 멋대로 날뛰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가?”

“이제는 역심을 숨기지도 않는다고 하던데.”

“차제에 관군에게 외상으로 쌀과 포목을 대주어 그 혁명군인지 뭔지를 토벌하는 것은 어떻소?”

“아서게. 사족들은 나중에 싹 입 씻고 우리에게 더 뜯어내려 들걸.”

“그만한 대가를 받으면 되지.”

“이 흉년에 무얼 남길 게 있어서? 게다가 왕이 오늘 바뀌고 내일 바뀌는 판국에 함부로 손 들이밀었다가는 손모가지부터 잘려나가지. 우선은 지켜보세.”

강상은 일단 지금까지의 현상을 유지하되 기회를 봐서 유리한 쪽에 붙는다는 상투적 계획을 세웠다.

정시준인가 뭔가 하는 어린아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강상은 자신이 우위에 선 협상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에서 누가 정권을 잡건 나라의 도읍이 한성이고 한성 남쪽에 한강이 흐르는 이상 강상을 무시할 수 있는 정부는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혁명의 심장은 한성이 아니라 평양이었다.

***

강상이 서상에 빚진 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양 사람도 서울에 그다지 아쉬울 게 없다. 정치국은 전쟁과 동시에 태도를 확고히 했다.

사세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소위 조정을 도와 곡식을 나르고 인민이 뽑지 않은 권력에 아부한다면 그것은 곧 반동이다.

그리고 총괄서결국장 정약전이 언명한 것처럼 반동은 인민이 아니었다. 쌀창고일 뿐이다.

정치국은 그때까지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던 강상 중, 확고하게 휘하로 들어오지 않은 자들에 대한 일대 숙청을 결정했다.

그 후로는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행주산성에 대한 보급을 수로로 하리라는 것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 혁명군에 대한 보급과 함께, 행주산성에 대한 강상의 보급을 무력으로 차단하는 것이 바로 혁명해군 1함대의 임무였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 범선이 들어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축선에서 수많은 대변선(그간 호남에서 뺏은 것이다)을 내보내어 척후 활동을 하던 이강회는 금세 강상의 함대를 발견했다.

아쉽게도 그 강상은 표식을 보건대 서상과 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김조순도 생각이 있으니 확실하게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 온 모양이었다.

이강회는 즉각 숙청을 선언했다.

“반동의 쌀을 인민의 품으로 되찾아오자!”

“우와아아아!”

강상도 송상이나 서상처럼 훌륭한 신디케이트다. 게다가 최근 정세가 영 흉흉하여 기초적인 무장은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건 도적 정도를 막을 수 있을 뿐 혁명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머리에 볏짚을 묶고 괴상한 야만 주문을 외우는 ‘영길리 해적’이 순식간에 도선하자 강상 대부분은 물에 뛰어들거나 항복했다.

그리고 원래 서울 상인 출신이라 이쪽 바닥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인 강씨가 실무적 상황을 수습하고, 왠지 뜬금없이 나타난 개성 유수를 상대하여 대표로 나섰던 것이다.

윤서동은 혁명해군 1함대의 임무 완수에 덤으로 얹힌 전공이 되어,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행주산성 코앞까지 끌려오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수의 덕을 찬양하던 병졸들이 이제는 유수의 밝지 못함을 원망하며 같이 끌려왔다.

시준은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한 혁명해군 1함대에게 훈장을 주었다.

이미 그들은 예전의 공으로 혁명영웅의 칭호를 한 번 받았으므로, 이번에 다시 한번 수여하면서 중앙인민회의 최초의 영광된 ‘2중혁명영웅(二重革命英雄)’ 깃발을 소유하게 되었다. 모든 혁명군이 그 위업을 질투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성과를 이루어 주셨소. 농상진흥국장……. 아니, 함대제독 동지!”

시준은 사제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강회 또한 겸손하게 웃었다.

“모두가 혁명으로 일심 전진하는 마음뿐이니 어찌 실기할 수 있겠습니까. 주석 동지. 다만 총괄서결국장 동지가 아니 계셨다면 때를 맞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의 작전 자체는 이강회가 모두 맡아 할 수 있다. 정약전이 도와준 것은 그 준비를 빠르게 마치기 위한 행정의 효율화였다.

막부의 총괄서결국장으로서 막부의 살림을 모두 관리하는 정약전은 월권에 가까운 자금과 인력 동원으로 이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정약전이 조금만 늦었다면 행주산성은 한 차례 보급을 받고 말았을 것이다. 시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혁명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 정약전에게 사백부로서의 존경을 담아 물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오시다니……. 평양은 별일이 없습니까?”

정약전은 피식 웃었다.

“주석 동지가 아니 계시니 내 동생이 얼마나 활개를 치며 잔소리를 해 대던지. 그 꼴을 보기 싫어 서둘러 왔을 뿐이외다.”

시준은 형에게서마저 외면당한 정약용을 동정했다.

분명히 외사통호국장으로서 막부의 중책을 맡은 정치국 위원이고 존경할 만한 학식과 인품을 갖추었지만, 쓸데없이 여기저기 끼어들어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그 성격 때문에 같이 현학적 얘기 하기 좋아하는 푸셰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정약용을 슬슬 피하고 있었다.

‘돌아갈 때 뭐 선물이라도 갖고 가야겠다.’

사제의 정이 실로 지극하다 할 수 있겠으나 현재는 당면의 과제가 급했다.

대충 해후가 마무리되자, 시준은 우선 뜻밖의 수확인 개성 유수 윤서동을 비롯한 포로들의 처우를 결정했다.

반동 놈들을 행주산성 앞에서 처형하여 적의 예기를 꺾고 새 깃발을 많이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시준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그 안을 기각했다.

군의에 참여한 정약전이 계책을 내었다.

“풀어주어 성으로 들여보내지요.”

여태 혁명군의 독보적 참모 역할을 하던 남공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정약전을 쳐다보았다. 정약전이 말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에는 우리도 그리 양곡이 넉넉하지 않소이다. 차라리 인의로 저들을 방면하여 관대함을 보이고, 김조순의 쌀을 축내게 하는 편이 낫소.”

정약전의 사악한 계책은 모든 사람의 열렬한 찬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시준은 동생이 혁명의 장량이니 형은 혁명의 중달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혁명해군 1함대가 날라 온 두 문의 16리브르 함포를 설비함과 동시에, 윤서동과 경기도 잔존군 수백 명은 상당히 어색한 걸음으로 행주산성을 향해 출발했다. 그 뒤에서 혁명군이 총을 겨누고 있으니 어디 다른 데 달아날 수도 없었다.

***

머리에 수건 대고 누워 있던 김조순은 더 이상 자기를 통제하기 힘들었다.

김조순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그 무능한 놈들의 각을 전부 떠서 고기와 창자를 소금에 절여, 병사들 군량으로나 써라.”

도저히 그 말까지는 찬성할 수 없었던 이득제는 지금 소금도 별로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웅얼대며 물러났다.

김조순의 반응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보급은 털린 데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주둥이만 늘어났다. 혁명군 쪽은 원래 평양에서 싣고 온 보급에 더해 강상에게 빼앗은 곡식까지 더해졌으며, 조선 관군은 이제 혁명군을 말려 죽이기보다 거꾸로 자기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득제는 김조순을 여러 차례 말려, 다행히 윤서동 이하 수백 명이 보존식품으로 가공되는 신세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 추운 날씨에 홑옷만 입고 병영에 갇히는 신세까지 면할 수는 없었다.

이제 다 죽었다고 생각한 병사들은 유수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당장 윤서동이 몰매를 맞지 않은 것은 다른 병사들도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감인지 땡감인지 때문에 아무 죄도 없이 다 죽게 생겼구먼!”

“내 죽어도 그냥은 죽나 봐라. 반드시 귀신이 되어 자손 삼대를 주살할 것이니!”

윤서동은 뭐라고 대거리할 기운도 없어 그냥 머리를 떨구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병사들의 고함과 욕설이 확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윤서동이 고개를 들자, 그들이 갇힌 공터에 못 보던 사람이 와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건대 선전관인 듯했다.

윤서동은 혹시 처형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인가 해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선전관은 그런 윤서동에게 신경 쓰지 않은 채 허리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유서 깊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주상 전하의 밀지(密旨)를 전하겠소이다. 조용히 듣기만 하시오.”

***

김조순의 지구전 전략을 어떻게 깨버릴까 고민하던 사람은 시준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정략군주 이품이었다.

혁명군이 밤마다 떨어뜨리는 정체불명의 불덩어리로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한계였다. 김조순은 얼마 전 그 선전선동의 역할을 맡았던 환관마저 잡아 처형했다. 왕이고 뭐고 정말 눈에 안 보인다는 태도였다.

그것은 이품에게 효헌황제가 가졌던 것과 비슷한 위기감을 불러왔다.

어떻게든 행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그 와중 굴러들어와서 김조순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 윤서동과 부하들은 이품에게 있어 하늘의 도움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 누락이 좀 있었지만 대충 사오백 명쯤 되는 군세이니, 이품의 협련군과 합하면 어찌어찌 천오백 명에 달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김조순의 훈련도감에 비해 숫자는 절반. 그리고 정예함은 그 이하다.

허나 이품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있었다.

바로 협련군의 물리적 위치였다.

이품은 여기까지 따라와 있던 조만영을 불러 비밀스럽게 교시했다.

“아무리 억센 짐승이라도 뱃속은 부드러운 법. 안에서 일제히 불을 지르고 고함을 질러 아래위가 서로 잇대지 못하도록 만든 뒤, 번개같이 김조순과 이득제 등 반역도당을 친다. 그러면 다 끝나는 게야.”

조만영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조순의 역심이 이제 눈 아래 사람이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진실로 그 방법밖에 없겠습니다.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리고 조만영은 아직까지 왕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선전관들을 동원해 윤서동과 경기도 잔존군을 회유했다.

김조순이 그들을 절인 고기로 만들라 지시했다는 소리는 한 점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다. 진실만이 가진 강력한 힘에 의해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넘어왔다.

윤서동은 굳이 분류하자면 김조순의 계파 쪽에 가까웠으나 그 김조순이 자기를 담가버린다는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윤서동 역시 왕명을 엎드려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역시 전쟁군주 인조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항상 전장을 빈틈없이 살펴 두던 이품의 하교가 이어졌다.

“내가 그 평안도 사람들이 큰 포를 설비하는 광경을 보았다. 필시 조만간 쏘아댈 것이야. 그것 때문에 군이 몰려다닐 때가 바로 기회다. 이미 서울에서부터 밀지를 내렸으므로 정시준도 알아서 호응하리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조만영이 물러나자 이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대한 계획과 꼼꼼한 심찰을 거쳐 그의 정략은 거의 완성되었다.

김조순은 처벌되고, 훈련도감이 이품의 손아귀에 들어오면 혁명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왕법 아래 투항할 것이다.

그리고 이품은 그들을 써서 이 나라의 뿌리 깊은 병폐인 노론의 썩은 선비를 정리한다.

‘더벅머리 선비놈들이 왕실을 업신여긴 지가 오래되었다. 내 이 기회에 구태를 깨끗하게 정돈하리라.’

이품의 마음속에서 호적상의 아버지에 대한 뒤틀린 효심이 빛을 발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처넣고 죽이는 일을 ‘사주했을’ 때부터 노론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과연 김조순이 이제 역심을 드러내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다 하겠는가?

***

추가 보급이 왔다 해도, 혁명군은 여전히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

남조선혁명당의 봉기는 폭발적이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수그러들 것이 자명하며, 경상도의 김회연도 어찌 움직일지 알 수 없다.

관군의 군량 고갈을 기다리다가 다른 곳에서 근왕병이라도 몰려오면 곤란해진다.

조선에 아직도 병사가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면, 쌍소멸과 쌍생성을 자유로이 오가는 조선군의 물리학적 특성을 재차 상기하여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조선군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듯이 언제든지 생겨날 수도 있다.

차라리 지금 작전 성공의 기세를 살려 몰아치는 게 낫다. 그래서 시준은 이품의 생각대로 다음 날 공격을 개시했다.

16리브르 함포는 물론이고, 남은 기구도 이번에는 심리전이 아니라 정규전 용도로써 대거 띄워 볼 생각이었다.

정약전이 다시 한번 책략을 올렸다.

“한강은 거의 항상 서풍이 붑니다. 이번에 새로 온 혁명해군 수병과 개성에서 따라온 의병을 산성 서쪽에 두어, 그들로 하여금 불을 지르게 하면 화염과 연기 때문에 적은 놀라고 당황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산이라는 게 현대 산림청 기준에서 보면 민둥산에 가깝다. 땔감이나 자재 조달로 무자비한 남벌이 오랫동안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불로 행주산성을 함락하는 일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다(그렇게 숲이 빽빽했으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먼저 시도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로 시야를 가려 기구에 대한 격추를 어렵게 하는 일은 해볼 만하다.

이제 불 지르는 일에 맛 들인 것 같은 혁명군은 흩어져 주석불을 던지고 횃불을 지져대기 시작했다. 황해도 방화광 김덕춘이 이끄는 사람들은 특히 여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몇 년에 걸친 가뭄으로 바짝 마른 산은, 드문드문 남은 나무와 삭정이마저 파괴하는 인간의 잔악함을 거창한 탄소 배출로써 고발했다.

그리고 그 위로 수십 개의 급조 기구가 둥실둥실 떠 갔다.

시준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결국 정면에서 공격해야 하는군요.”

남공철이 그런 시준을 다잡았다.

“어차피 격립특자(그레테 자작)의 말마따나 사람이 안 죽는 전쟁은 없습니다. 주석 동지. 오히려 지금까지 요행히 큰 싸움을 피해 왔다 해야겠지요.”

“왕이 적당한 시기에 김조순을 치고 혁명군에 호응하겠다 한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나 보오.”

그간 조씨 형제가 무수히 전했던 서신은 시준의 손에 잘 배달되었다.

혁명군 수뇌부는 왕의 ‘너그러운 자비’ 운운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결론 내렸으나, 적어도 안에서 김조순을 치겠다는 그 제안 자체는 쓸모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포위한 채 기구 등으로 신호를 주었는데도 이품은 별 행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혁명군의 희생을 많이 내기 싫었던 시준은 끝까지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보던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기다릴 시간이 없다.

옆에 있던 정약전이 말했다.

“쉽지는 않을 겝니다. 제가 보기에 어리석은 왕은 김조순에게 대적할 깜냥이 못 됩니다. 결국 우리 힘으로 혁명 과업을 완수해야겠지요.”

그리고 그 편이 더 혁명막부에도 도움이 된다. 시준은 정약전이 하지 않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괜히 왕을 받아들여서 어설프게 진중에 두었다간, 사람들은 주석을 따라야 할지 왕을 따라야 할지 망설일 것이다.

이미 조선 왕국을 버리고 혁명막부에 인생을 건 정약전이나 남공철, 기타 간부들은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은 차라리 김조순이 이미 왕을 죽인 뒤였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남공철은 시준이 다시 왕 어떻게든 살려 써먹자는 얘기 꺼내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불랑국 대포(16리브르 함포)의 준비가 다 끝납니다. 주석 동지의 호령만 있으면 우레 같은 포성과 동시에 혁명군이 용맹하게 진격할 것입니다.”

이제 프랑스인 없이도 쏠 수 있는 16리브르 포가 완비되고, 골짜기 진입로의 크기를 면밀히 관찰한 남공철이 혁명군을 4열 종대로 정렬시켰다.

시준은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이야 기세 드높아 보이는 혁명군이지만 그거야 항상 유리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이기는 싸움에선 누구나 용감하다.

시준은 혁명군이 훈련도감의 집중 포화를 맞이하고도 군기를 유지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시준은 간절하게 빌었다.

‘이대로 무력하게 김조순에게 당하고 찌그러질 거냐! 넌 조선의 왕이잖아. 뭐라도 해 봐라! 사내다움을 보여라, 국왕 이품!’

시준은 적이 제발 영용한 자이기를 바라는 우스꽝스러운 기원을 해야만 했다.

물론, 이품은 시준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백 년 뒤의 기민한 전략가 고종의 증조부다.

이품은 그만의 현명 무비한 계획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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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작중의 2중혁명영웅은 북한의 (훈장은 아니지만) 모범 단위에 수여되는 깃발 서훈 제도를 따온 것입니다.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으로 하나만 들자면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을 잘 수행했다고 표현되는 단위(학교, 공장, 농장 작업반 등등)에 '3대혁명붉은기'를 수여하는데, 이 3대혁명붉은기는 중복해서 받을 수 있고 두 번째 받을 때는 2중3대혁명붉은기, 3번 받을 때에는 3중3대혁명붉은기가 됩니다. 통상 3중까지 주는 듯 합니다. 그 외에도 대영예의붉은기 등등 비슷한 게 많습니다.

모두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주말이라 연휴가 아닌 것이 아쉽군요.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오늘은 연참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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