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156화 (156/284)

156화

46. 행주 대첩(2)

그레테 자작은 수염을 손으로 슬쩍 꼬았다.

“영국 놈들이야 야만적인 전쟁 무기만 그악스럽게 만들어댈 뿐이고, 모든 과학을 선도하는 대프랑스 제국의 문명은 하늘에도 미치지요. 파리 프리메이슨의 두 형제인 몽골피에(Montgolfier)가(家)의 발명가들이 파리에서 열기구를 날려 보낸 것이 벌써 30년 전입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전쟁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시준은 비행기를 기대했던 자신이 어리석었구나 싶어서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그런데 군인들이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습니까?”

“결국 요체는 튼튼한 천을 야무지게 매어서 불을 피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지공이나 방직공 출신 병사들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겁니다.”

하긴 지금은 이론보다 실전의 19세기. ‘어떻게든 하는’ 게 이 시대다.

과학이 어쩌고 하는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 몽골피에 형제 역시 기구나 비행보다는 제지와 섬유 쪽이 본업이고 최초의 열기구도 무슨 엄밀한 과학적 계산 끝에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서도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시준 혼자뿐이었다. 시준은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비단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망설였지만(비싸니까) 그레테 자작은 가볍고 튼튼한 옷감이면 다 된다고 말해 주었다.

연료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판 가스 같은 것을 어디서 구하나 생각했던 현대인 시준의 걱정을 전근대인들은 호쾌하게 해결했다.

그레테 자작은 다음과 같이 보증했다.

“그냥 불타는 물건이면 다 되오. 내가 듣기로는 악취가 심할수록 좋다고 하던데.”

그래서 혁명군은 오만가지 쓰레기를 기구에 집어넣고 태웠다. 하기야 공기가 따뜻하게 데워지면 되는 문제고, 기구에 사람을 태울 것도 아니라서 어쨌든 떠올랐다. 반 정도는 추락하긴 했지만.

역시 대포 배달 올 때까지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수는 없다. 여기에 혼란을 줄 수 있는 폭발물을 실어서 방어선을 약화시킨 다음 혁명해군과 합세하여 찔러 보자는 것이 혁명군의 계획이었다.

기구가 작은 데다 적이 고지대에 있어 충분히 총이나 활로(조선인의 활이다) 쏘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어차피 이것은 실제적 타격보다는 심리전 효과를 노리는 전술이기도 해서, 조선 최초의 기구는 밤에 띄우기로 결정되었다.

도화선을 응용하여 간단한 시한장치가 기구마다 설치되었다. 밤하늘에서 주석불을 태우며 그 열기로 하늘을 날던 기구에서 곧 하나둘씩 풍선과 바구니를 매단 줄이 끊어졌다.

그 불덩어리는 그야말로 유성처럼 행주산성으로 추락했다.

당연하지만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을 뿐 별다른 피해는 없다. 병사 1명이 진짜 운 나쁘게도 주석불에 직격당해 죽은 것 정도가 유일한 피해였다.

하지만 평화주의자 조선인의 예민한 정신은 이 흉측한 사고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

다음 날부터 당장 수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금에 없었던 재변이니, 바로 하늘의 견고(譴告)다.”

“김조순이 신하 된 자로서 도리를 넘어섰기 때문에 음양의 기운이 크게 흔들린 것이다!”

“참창(攙搶, 혜성)이 나타나면 마땅히 난신을 죽이고 어진 사람을 기용하여 사람의 일을 하늘에 감응하게 하는 것이 예부터의 전례였다.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는가?”

김조순은 어이가 없었다.

신하들이 왕에게 불평하고 싶을 때 재이설 핑계는 간간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우회적인 은유로서의 간언이었고 군신이 다 알면서 양해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미 불타버린 바구니며 깨진 도자기의 잔해가 나와 저것이 역도가 쓰는 무기의 일종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데도 그런 소문은 진실 따위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퍼져갔다.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김조순은 소문의 진원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훈련도감의 실질적 지휘자 이득제가 열심히 알아보고 보고했을 때는 짜증만 났다.

“소위 협련군이라는 자들이 그런 말을 옮기는 모양입니다.”

김조순은 옛날 후한 시절 황제의 귀비를 때려죽인 조조의 심정을 대충 알 것 같았다.

권력을 농단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조조가 사방의 난리를 평정하고 백성과 국가를 편안하게 한 공적은 전대의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었다. 어쨌든 조조는 그렇게 선언했다.

전쟁 중인 것보다야 낫고, 동탁과 그 부하들의 산적 독재체제보다야 낫지 않았는가. 조맹덕이 원래 효렴(孝廉, 효행 있고 청렴한 사람을 추천하던 한나라의 관리발탁 제도) 출신이라 효심이 좀 지극하다 보니 일어난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 정도만 제외하면 꽤 괜찮았다.

그런데 효헌황제는 기껏 도망자 신세 벗어나서 배부르고 등 따뜻해지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정이 되었다.

수단도 졸렬했다. 군주씩이나 되어서 치사하게 범죄자 사발통문 돌리듯이 밀조니 뭐니 내려 중신을 툭하면 암살하려 든 것이다.

거기다 들키면 군주라는 핑계로 부하들만 내어주고 자기 목숨은 보호했다는 사실이 더 괘씸했다. 하긴 계속 실패해도 조조가 어쩔 수 없이 살려주니 이보다 편한 도박이 어디 있겠는가.

김시택이 보았다면 어느 정도 통쾌했을 것이다. 그가 느꼈던 신분의 불공평함을 김조순은 더 음험한 방식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얼 위해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사건건 방해나 하다니!’

끓어오르는 심화를 다스리던 김조순은 어느새 한 가지 의문에 도달했다.

‘방해만 되는 왕이 과연 필요가 있을까?’

더 직접적인 말로 하자면, ‘왕 같은 거 없이도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정도가 될 것이다.

요 몇 년간 조선은 사실상 김조순 혼자 다스렸다.

경험은 무엇보다 강력한 증거다. 그리고 그 증거는 전제 군주제 외의 다른 제도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김조순의 뇌리를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김조순이 나서지 않았다면 조선은 끝장났을 것이다. 조선 파멸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 같은 이공이나 이품이 이 나라를 붙들 수 있었을까? 우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외손주는? 그럴 리가 없다.

김조순은 이품을 없애고 자기 외손주를 왕위에 올리려던 계획을 다시 검토했다. 정확히는, 그 계획의 전반부는 변함이 없었지만 후반부에 의구심이 들었다.

‘왕을 꼭 다시 즉위시켜야 하나?’

어차피 원자의 어머니, 그러니까 김조순의 딸은 그를 죽이려 했다.

그녀를 살려 뒀다간 언젠가 반드시 아들을 부추겨 반기를 들 터요, 죽였다가는 아들이 나중에 모친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원자 또한 김조순에게는 위험이 따르는 선택이다. 김조순으로서는 왕이 아예 없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김조순은 신왕조 개창 같은 구닥다리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아는 개념이 아니었기에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만 떠돌고 있었지만, 김조순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정시준의 출현 이전, 어쩌면 이후에도 조선 사람 대부분이 떠올리지 못했던 개념이었다.

이득제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김조순의 눈치를 보았다. 더 기다리기 힘들다고 생각한 이득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할까요? 자발없이 떠들고 다니는 것들을 한 여남은 명쯤 효수하여 그 뒤의 놈들에게 혼돌림을 해 놓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 뒤의 놈들’ 이라 함은 물론 왕을 말한다. 김조순도 희미하게 떠오른 공화국의 단초를 지우고 당면 과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난언을 말하는 자 곧 요군(妖軍). 그리하도록 하게. 병사들이 난리를 일으키지 않는지만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적도가 굶주리기를 기다리실 셈입니까?”

김조순은 이득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득제는 실수하기 싫다는 듯이 신중하게 말했다.

“주상 전하의 말씀이 아주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충분히 저 역도를 파할 수 있습니다. 패역자들이 기고만장하여 있으나, 훈련도감은 저들이 여태까지 깨뜨렸던 오합지졸이 아니오이다. 어찌하여 출정을 망설이십니까?”

이득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수를 했다. 그리고 김조순에게는 실수를 처벌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그는 습관적인 동작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거기에는 벼루가 없었다.

이득제가 흠칫하자 김조순은 성난 목소리로 낮게 쉭쉭거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래. 이대로 산을 달려 내려가 정시준과 자웅을 결해 보고 싶은가? 필부의 용맹밖에 없는 위인 같으니라고. 자네 말대로 이기긴 이길 거야. 허나 그다음에는 꺾이고 다친 우리 군사를 왕의 근시들이 때려잡을 테지. 이런 것까지 내가 말해 줘야 하는가?”

이득제는 그제야 김조순이 왜 회전을 회피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왜 혁명군이 말라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훈련도감의 우월한 전력은 저 역적을 베는 데에 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생각에 골몰할 시간 있으면 한강으로 오는 조졸(漕卒, 여기서는 경강상인)의 배나 잘 보고 있게. 우리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긴 하지만 치중의 다급함은 멀리 나온 저들이 훨씬 긴절할 거야. 우리는 날라 오는 곡식이나 먹으면서 때를 노리면 돼.”

김조순은 경강상인 중 정시준의 편이 아닌 자를 면밀히 골라 이 행주산성으로의 보급을 맡겼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김조순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휘하 심복 장수라는 사람이 그걸 여태 몰랐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이득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물러났다.

그리고 닷새쯤 후, 김조순은 이득제의 말이 옳지 않았나 고민하게 되었다.

***

개성에서 대국적 결단을 내렸던 개성 유수 윤서동은 그때 서쪽으로 크게 물러나 있었다.

그곳은 윤서동의 전임지인 강화도와 가깝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자기들을 앞질러 진군해버린 혁명군을 발견해서였다. 윤서동은 병법의 기본인 척후를 충실하게 지키는 장수였다.

그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은 주변 성에서 긁어모은 병사 수백 명 정도뿐이다.

그렇다곤 해도 지금의 사세에선 판세를 뒤집을 수도 있는 변수다. 김조순이 이 일을 알았다면 혁명군의 후방을 휘저을 유격군으로 그들을 적극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서동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겁나서가 아니라,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는 일은 병법에서 특히 금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정석에 충실한 장수 윤서동은 그런 무모한 짓을 삼갔다.

그래서 윤서동은 혁명군이 버려둔 배와 뗏목을 타고 임진강을 내려왔다. 이쪽을 통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면 격전지를 모조리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관측은 옳았다. 지리를 통달했으니 가히 명장이라고 불러 줄 만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임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의 한강은 실질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바다와 별반 구분이 가지 않는다.

한강의 강바람은 엄청난 수준이고, 거룻배 정도는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알량한 쪽배 믿고 이따위 위험한 짓을 하느니 육지에서 때를 노리는 게 나아 보인다.

하지만 윤서동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원래 조선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싸움을 두려워할 뿐이다.

어쨌든 그래서 윤서동은 중간중간 강가에 정박해 가며 내려왔다.

혁명군이 싹 불태워 놓은 오두산성 인근까지 왔을 때는 윤서동도 이제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여기서 남으로 가면 바로 한강에 합류할 수 있다.

윤서동은 병사들을 격려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한강이다. 양화나루쯤에서는 쉬게 해 주마. 거기만 가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느니라. 병사들은 지위고하를 가릴 것 없이 번갈아 삿대를 잡아라!”

그러고는 유수 윤서동 역시 친히 노를 쥐었다. 판관(判官)을 비롯한 여러 이속들이 옆에서 크게 놀랐다.

“여, 영감께서 친히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윤서동은 마음껏 덕을 뽐냈다.

“하우(夏禹)와 같은 성인조차 군주의 몸으로 9년 동안 몸소 흙을 나르며 삽을 뜨면서 손이 다 검게 얼크러졌는데, 어찌 내가 감히 고된 일이라고 피할 수 있겠는가?”

유수가 노 쥐었으니 자기도 안 쥘 수는 없는 이속들의 얼굴은 일그러졌으나, 병사들은 유수의 덕을 찬양했다. 물론 윤서동 역시 감동적인 격려를 다시 돌려주었다.

아래위가 서로 다투어 쌓아대는 애정과 감격 때문에 배가 다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하늘마저 감복하였는지 여기에서 으레 불기 마련인 거센 서풍도 약간은 잠잠해진 듯했다.

그런 훈훈한 선상 유람이 얼마나 지났을까. 앞장서 가던 군교 하나가 소식을 보내 왔다.

“세곡을 나르는 상자(商子)들이 마침 근처에 있는 듯합니다.”

“오호, 그것참 잘 되었구나!”

경강상인은 자체적인 함선 제조 기술과 목재 공급책을 가지고 있다. 그 함대의 규모는 조선 수군에 비교해 봐도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세곡 운송은 나라의 일을 경상에게 맡겨둔 것. 윤서동 정도 되는 고위 관리라면 그 위임을 잠시 환수하고 자신이 ‘안전하게 세곡을 인솔해’ 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들이 패잔병이 아니라는 변명을 열심히 준비하던 윤서동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호남과 호서에서 ‘영길리 해적’이 날뛰는 바람에 곡식 한 톨이 아쉬운 도성에서는 그의 공을 무시하지 못할 터였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앞에서 보고했던 경강상인의 큰 선단이 나타났다. 윤서동은 있는 힘을 다해 깃발을 흔들고 피리를 불며 그쪽으로 노를 저으라 명했다.

***

이 선단을 인솔하는 자는 옛날 김모지리에게 협박당해 오죽당 독점 공급 도장 찍고, 그 대가로 당원패 하나 받았던 한양의 식자재상 강씨였다.

조선의 상계 질서를 생각했을 때 원래 강상(경강상인) 소속 도고도 아닌 강씨가 이 선단을 이끌고 있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강상은 송상과 달리 아직 시준의 휘하라기보다 우호 집단에 가깝다. 게다가 평안도 소금 때문에 전통적으로 소금을 독점하던 강상의 대상부고 중 몇몇은 불편한 시선마저 보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시준이라도 서울의 포구주인이나 여객주인, 선상을 제멋대로 갈아치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같은 상인이 보았다면 당장에 뭔가 수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선비가 냄새나는 동전 만지는 일을 언제 해 봤으랴. 강화 유수 윤서동은 의심 없이 강씨의 배에 올라 한껏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하민들이 무릎을 꿇지 않는 게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그런 동작이 쉽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 깨어 있는 선비 윤서동은 그런 사정을 다 이해했다.

“이는 어디의 세곡이냐?”

강씨는 벌쭉 웃었다.

“호서에서 날라 오는 곡식입죠. 나리.”

옆에 있던 판관이 신경질적으로 이 분은 유수 영감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윤서동이 직접 말하기에는 체면이 깎이니, 원래 그게 부관 노릇 하는 자의 역할이다.

강씨는 겸연쩍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윤서동은 자비롭게 판관을 제지하고 다시 물었다.

“영길리 해적이 날뛰는데 요행히도 봉적(逢賊, 도둑을 만남)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그 충심이 장하다. 이제부터는 본관과 용맹한 경기도 군대가 인솔할 터이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강씨는 ‘지금 그게 인솔자 탑승이었냐? 난 표류객 구조인 줄 알았는데.’라는 복잡한 말을 단지 얼굴 근육만으로 표현하는 놀라운 재주를 보였다.

자비로운 목민관 윤서동의 얼굴마저 굳어지고 말았다. 판관이 유수를 대신해서 화를 벌컥 내려 할 때, 강씨는 여상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 유수 영감께서 하신 말씀 중에 옳지 않은 게 있습니다요.”

“뭐라고?”

“저희는 오다가 봉적하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 도적인 영길리 해적을 만났지 뭡니까.”

윤서동은 혹시 영길리 놈들이 이 배를 뒤따라오기라도 했다는 듯이 두려운 눈으로 배 뒤쪽을 훔쳐보았다.

“그, 그러냐? 그런데 어떻게 용케 도망쳤구나.”

“아닙니다요.”

“무슨 영문 모를 소리냐, 아니라니? 싸워서 이기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강씨는 다시 눈꼬리를 길게 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조선 사람이 이토록 자주 웃는다는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다. 윤서동은 이때부터 뭔가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이 선단 모두는 그 천인공노할 영길리 해적 놈들이 탈취했습지요. 그러니 뭐, 딱히 영감께서 인솔하느라 수고로우실 필요가 없소이다. 이미 나라의 배가 아니거든요.”

윤서동이 그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을 때, 아래 칸 선창에서 ‘영길리 해적 놈들’이 쏟아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평생 들어 본 적도 없는 야만족의 언어가 한강 위로 흩어졌다.

“Mighty fine morning!”

“If you ask me! I‘m Waldo!”

여태까지 양호(충청, 전라) 조운선의 공포로써 악명을 떨쳤던 혁명해군 1함대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대외적으로 영길리 해적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얼마 전 첫 출항 때처럼 ‘감쪽같은 영길리인 분장’을 하고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인 혁명해군 수병들은 능수능란한 영길리 말을 구사했다.

“Aye, Aye, Sir!”

“Suck my ass!”

영국인을 엉성하게 모사하여 놓은 듯한 옷차림이며 볏짚을 묶은 머리, 분 바른 얼굴은 차마 쳐다보기도 끔찍했다.

주위의 군교며 서리들은 그 야만스러운 외모에 압도되었다. 그러고는 곧 불문곡직 휘두르는 칼과 몽둥이에 맞아 쓰러졌다.

윤서동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너, 너희들이……!”

강씨는 대답 대신 유수의 복부를 발로 호쾌하게 걷어찼다.

경기도 관찰사보다도 높은 개성 유수가 형편없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강씨는 발끝에 느껴지는 감각에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장사치 인생 어디에서 종이품 영감을 두들겨 패 보겠는가. 그와 영감의 차이는 개와 사람의 차이보다 크다. 발길질은커녕 시선조차 꽂을 수 없다.

강씨는 뭔가 신성하고 위대한 것을 엉망진창으로 범하는 배덕적 만족감마저 느꼈다. 역시 혁명은 해 볼 만한 일이었다.

격통과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 윤서동의 의식은 멀어져 갔다. 강씨가 주위에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윤서동의 귀에 울렸다.

“이건 우리 추가 공적이다! 단단히 묶어서 싣도록 해! 잘 되었구먼. 이걸로 나도 혁명무력국에 한자리 얻을 수 있겠어!”

***

그리고 다음 날, 김조순은 고대하던 보급 함대를 보게 되었다.

틀림없이 강상의 곡식을 실은 함대였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곡식 자루를 가득 실은 선단이 행주산성 서편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 함대 곳곳에 커다란 붉은 깃발이 날리는 것만 제외하면, 거기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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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몽골피에 형제는 처음에 냄새나는 물건을 태울수록 기구의 부양력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체의 팽창과 부피에 관련된 샤를-게이뤼삭의 법칙이 공식 발표된 것은 기구 실험 이후 꽤 지난 1800년대 초반입니다. 그 형제가 프리메이슨 파리 롯지 소속이었던 것도 맞는데, 익히 아시다시피 프리메이슨은 음모론적 기관이 아니며 그냥 사교계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정도입니다. 비슷한 시대 혁명에 깊이 관계되었던 오를레앙 공도 프리메이슨이었죠.

2. 김조순의 '난언을 말하는 자 요군' 이라는 것은 한신이 세웠던 17개조 금법을 말합니다. '혼돌림' 이라는 말은 단단히 야단치거나 혼쭐을 내서 정신을 쏙 빼놓고 위압하는 일을 뜻합니다.

3. 우왕은 본문대로 너무나 열심히 일해서 손이 검고 딱딱하게 변할 지경이었다 합니다. 그냥 왕도 막노동을 해야 할 정도로 당시 국가가 원시적이었다고 보시면 대강 맞습니다.

4. 예전 혁명해군이 영국인으로 변장하고 조운선을 털었던 일화를 기억하시나요? 다시 반복되었군요. 왈도는 영국에 실존하는 인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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