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46. 행주 대첩(1)
세상에는 이미 벌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되도록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다.
지금 시준과 혁명군에게는 행주산성의 결전이 그중 하나였다.
시준은 마치 하소연하듯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병법에서 강을 뒤에 두는 것은 금기하는 일이지 않소?”
남공철이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듯이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소이다, 주석 동지. 어차피 뒤에 강이 있건 없건 성을 지키는 군사는 물러날 데가 없으니까요. 물러나서도 아니 되고요.”
행주산성은 삼국 시대에도,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성가시고 강력한 요새였다.
그것은 성곽이 높고 해자가 깊으며 성문이 튼튼해서가 아니었다. 행주치마로 대표되는 민간인의 의기분발이나 권율의 놀라운 지휘력도 한 요인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핵심이라고 하기는 힘들다(애초에 행주치마는 후대의 창작이다).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권율이 이긴 이유는 지극히 전술적인 것이었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완벽했다.
마름모꼴 모양의 지형에서 서남과 동남은 한강과 그 지류요, 서북과 동북은 대부분이 돌출된 산악 지대라 접근할 수 있는 경로는 오직 정면의 좁은 골짜기뿐이다. 당연히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집중 포화를 받게 된다.
조선에 보방식 요새의 축성 기법은 없었지만, 조선 사람들에겐 엘프의 기상이 있다. 공해와 파괴를 즐기는 양인들과 달리 검소한 데다 지혜롭기까지 한 조선인은 그냥 자연에 있는 보방 요새를 활용했다.
행주 대첩 당시의 일본군처럼 무식하게 대군을 밀어 넣는 전략을 그대로 썼다가는, 현실을 깨달은 혁명군의 와해만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연행로에서 서쪽으로 나가 행주산성을 관찰하고 온 척후들은 선전선동국에서 스케치 기법을 잘 배워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장의 모식적 지도뿐만 아니라 상세한 전경화(全景畵, 파노라마)도 그려 가져왔다.
그것을 받아 본 시준으로서는 한숨밖에 나오는 게 없었다.
시준의 일천한 전략적 안목으로 보기에도 여기는 침공해서는 안 됐다. 오히려 왜군이 이겼으면 이상할 전장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시준과 혁명군의 경우 그때의 왜군보다 사정이 나쁘다. 보급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잘 안 풀린다고 후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숫자가 당시 왜군의 10분지 1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이 없지는 않다. 남공철이 그 희망의 불씨를 살리듯이 말했다.
“그나마 혁명군의 빠른 남진 덕에 월롱산(月籠山)과 오두산(烏頭山)의 산성은 그냥 지나치고 군세를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지요.”
그건 그렇다. 오두산성은 그렇다 치고 월롱산성은 연행로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만약 거기에 대군이 있었다면 혁명군은 더 곤란했을 것이다.
병사가 다 도망쳤다는 것을 확인한 혁명군은 그 두 산성에 성대하게 불을 지르고 다시 남쪽으로 달려왔다. 함락시키거나 주둔시킬 병력의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김조순은 혁명군이 행주산성까지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김조순은 3천 군세의 거의 전부를 행주산성에 집중시키고 연행로를 아예 비워 두었다. 서울로 갈 테면 가보라는 태도였다. 진군하는 혁명군의 뒤를 치겠다는 노골적 의도가 잘 보였다.
거기에 왕이 있건 없건 혁명군은 반드시 행주산성을 함락시키고 가야 했다.
시준은 자기가 전생에서 보았던 여러 이세계 스토리와 달리 기술적인 면에서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 서양인들을 떠올렸다.
프랑스인들의 인상적인 활약은 정방산성에서 갈리아 나체 전사의 고대 전통을 되살린 것뿐이었다. 대체 19세기 유럽의 그 숱한 첨단 기술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시준은 까닭 없고 염치도 없는 억하심정이 들었다.
그래서 시준은 압박적인 눈빛으로 그레테 자작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밥값 하라는 그 시선에 그레테 자작은 굉장히 내키지 않는 투로 대답했다.
“정석적인 전술이 있긴 하오.”
“그게 무엇입니까?”
“해군이 16리브르 함포를 실어올 때까지 요새를 포위하고 기다리는 것이지요. 조악하기는 해도 그 정도의 화력 지원조차 없으면 안정적 진격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총괄서결국장 정약전과 혁명해군 1함대제독 이강회는 지금쯤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추가 군량과 지원군을 마련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평양성 앞 함포 두 문의 이동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다.
강철군주의 정신과 다리를 부숴 놓았던 그 두 문의 함포라면 조선군의 사기를 꺾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을 터. 확실히 그것은 정석적이었다.
그러나 시준은 그 정도로 이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을 거라고 보기 어려웠다.
하백과 같은 혁명군 전함은 원래 영국산 범선이라 한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는 없고, 그래서 행주산성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도 없다.
천상 대포를 육지에 끌어다 놓고 쏴야 하는데 그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성과는 ‘성을 명중시킨다’ 정도다.
그 정도로는 말 그대로 사기 저하가 한계. 실질적인 전술적 효과는 미미할 터였다. 남공철도 한숨을 쉬었다.
“저도 그 수 말고는 떠오르지 않소이다. 하늘을 날아서 들어갈 방도가 없고서야 어떻게…….”
시준의 눈에서 미래인의 안광이 번뜩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 왜, 서양에는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기계가 있지 않소?”
그러나 시준은 다음 순간 아차 싶었다. 전신 사건 때 알았지만 유럽의 ‘기술 발전’은 시준의 생각보다 훨씬 느렸다. 지금 비행기가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그레테 자작은 손뼉을 딱 쳤다.
“그렇지! 맞아. 그것이 있었소!”
“예?”
시준은 희망을 숨기지 않고 그레테 자작을 바라보았다. 자작은 의기양양하게 일어섰다.
***
강철군주의 파천 이후로 서울 시전은 그야말로 절멸 상태였다.
지방에서 들어오는 송상의 물류가 끊어져서 장사할 건덕지도 없었거니와, 김조순 역시 이공처럼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상인들을 가혹하게 쥐어짰기 때문에 대부분이 못 견디고 달아나 버렸다.
서울 오죽당이 완전 철수한 지금은 더하다. 조선 4백 년간 온갖 상인들이 서로 이권을 다투었던 시전은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썰렁할 뿐이었다.
개중 아직도 상행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두 종류였다.
첫 번째는 김조순도 세곡 운송 때문에 여태 봐줄 수밖에 없었던 경강 상인이다. 김조순이 떠나고 나자 한성 판윤 김이익은 이들의 이반을 예방하고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쉬운 방법을 택했다.
경강 상인의 가족을 대거 인질로 잡아들인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실리적이다. 유교 국가의 대원칙 따위는 필요성 앞에서 사라졌다.
대신 김이익은 상당히 급진적인 행보를 취했다. 그는 경상에게 서울 세곡 운송의 (암묵적이 아닌) 합법적 독점권을 약속하고 아예 김조순의 편으로 완전히 들어오라며 꼬드기는 중이었다.
장사치는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이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김이익은 깨어 있는 선비에 속했다.
김이익은 당연히 경강 상인들이 나라의 은혜에 감격해 따를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루이 16세도 단두대에 서기 전까지는 자신이 과감한 개혁과 귀족 특권계층의 견제를 통해 서민의 지지를 얻었다고 확신했으니 역시 사회 지도층은 신념도 남다른 법이기는 하다.
아무튼 김이익은 김조순이 남기고 간 훈련도감 군세를 활용하여 최소한 겉으로는 경강 상인의 불만이 표출되지 않게 잘 내리눌렀다. 여기에는 과거 이요헌을 상대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고, 한성 부민들은 다시 공포 정치에 떨어야 했다.
또 하나는 과거 시준이 서울에서 사업 확장할 당시 협약을 맺었던 잡철장 야장이었다. 이들은 김조순의 군대에 요구되는 막대한 무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조정과 막대한 독점 계약을 맺었으니 이제 그 대장장이들에게 혁명막부는 별로 친해질 가치가 없어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 조선 정부는 21세기 대한민국 정부와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21세기의 민간 사업자들에게 정부 상대 거래는 괜찮은 사업이다. 생각보다 대금도 짠 편이고 복잡한 요구도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업들이 온갖 비리와 청탁을 뿌려가며 입찰에 참여하는 이유가 있다.
(윗선의 특별한 지시가 없다면) 공무원은 대금을 떼어먹지 않는다.
국고의 100억 따위, 내 계좌의 10원만큼의 가치도 없다. 독촉 전화 받기 귀찮으니 빨리 줘버리고 일 끝내는 게 최고다. 자영업자가 제때 대금 받는 일이 굉장히 희귀한 것임을 감안할 때 대정부 거래는 탐날 수밖에 없는 떡이다.
그런데 19세기 정부는 다르다.
요약하자면, 이때는 국고와 내 창고가 잘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성 판윤 김이익은 서울 상인들에게 특혜를 하사한다는 ‘급진적’ 생각을 할 만큼 깨어 있는 선비인지 몰라도 조정 구실아치들 모두가 그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근성의 칠전팔기 격쟁으로 정조에게 통공을 얻어내어 서울 잡철장의 좌장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사람이며, 과거 시준에게서 검계패 덕순을 건네받고 동맹을 맺은 전설적 대장장이 정대운은 곰방대를 뻑뻑 빨았다.
“이번에도 못 준다 했다고?”
엉망으로 얻어맞은 대장장이 한 명이 거의 울 듯하며 하소연했다.
“예. 곡식을 주기는커녕, 어딜 감히 딱쇠 놈들이 관부에 와서 빚 독촉하듯 야료를 부리느냐며 늘씬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저 혼자만 그나마 걸을 수 있어서 어르신을 찾아뵌 겁니다. 이거 앉아서 일만 하다가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요.”
19세기 정부의 관급용역도 자기 돈 아닌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이 당시의 공무원들은 21세기 사람들처럼 획일적인 교육만 받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창의적이었다.
상인에게 가는 대금을 자기가 반 정도 떼거나 홀랑 다 먹으면 자기 돈 아니었던 것이 자기 것이 된다. 상인에게는 이미 물건을 받았으므로 조정에서도 말썽이 일어날 리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니 이보다 완벽한 행정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분통 터질 상인들이 일으키는 말썽은 지엄한 사농공상의 법도에 따라 몽둥이와 총칼로 다스리면 된다. 원래 장인이란 역을 바치는 자이지 조정과 거래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회한 정대운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장인들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조정이 4백 년간 장인에게 일 시키고 대가를 치렀던 것은 대등한 거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충성스러운 신민’에 대한 ‘은혜의 하사’였다.
거래는 자기 사정 안 좋다고 떼먹어서는 안 되지만, 은사는 상황의 변화나 심경의 변덕으로도 쉽게 취소될 수 있다.
이것이 복공의 격문이 말했던 바였다. 군주의 너른 자비는 그 자체로 오만. 인덕에 대한 감사는 그 자체로 굴종이다.
두서없는 외침이 터져 나오기 직전, 정대운은 많이 남지 않은 이빨로 곰방대 물부리를 훑어 깨물었다.
까드득!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정대운을 바라보았다. 정대운은 품에서 평안도 손담배(궐련) 하나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역관과 거래하던 침장(針匠) 애들 좀 모아라. 그쪽에 연통을 넣어 봐야겠다.”
***
역관 김시택은 과거 시준과 함께 영학해설을 편찬한 그 사람이다.
아직도 생각하면 뒤통수가 뜨끈한 폭행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는 등 한성에서 남부럽지 않은 모험 활극을 찍기도 했다.
비록 효행 좀 해보려다가 찍혀서 고생깨나 했지만, 그의 인생은 시준을 만난 이후로 바뀌었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김시택은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위로는 조정의 유일하다시피 한 영어 능력자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래로는 이강회와 정시준이 연결해 준 침장과 거래하여 바늘 장사로 많은 이득을 쥐었다.
그러나 왕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후에는 상당히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조순이 김시택을 숙청해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와 같은 중인 역관은 주체적인 인격체라기보다는 유용한 도구의 일종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이 쓰던 칼을 빼앗았으면 보통 그것을 쓰지, 굳이 일부러 부러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것은 여전했다. 김조순과 김이익은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 아래의 이속들은 김시택을 알고 있는 자가 많았고, 툭하면 찾아와 위협하며 재물을 요구했다.
김시택은 자기 재산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꼴을 보며 피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김조순의 하인이 왕의 근시보다 높은 형편이라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런 김시택이었기에, 그날도 집에서 홧술이나 들이키다가 누가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염병할 놈들이 또……!’
그러나 김시택은 그 말을 입 밖에 경솔하게 꺼내어 놓지는 않았다. 그것은 김시택처럼 아래위의 눈치를 동시에 살펴야 하는 중인들이 체화하다시피 한 규칙이다. 대학과 중용에서 말하는 어떤 침묵과 수신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다.
김시택은 그 사실에 새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사람이 다소 깊지 못하기는 하여도, 역관 김시택이 걸어온 길은 정도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역관이 영길리 말 배워 공 세우려 한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게다가 그것으로 누군가를 압제하려 한 적도 없다.
장사에 뛰어든 건 조선 시대 기준으로 좀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역관에게 불문율로써 허락되던 바늘 수입 장사를 확대한 것뿐이다.
반면 지금 임금을 업신여기고 농단하는 김조순이나, 그 권신 한 명에게 휘둘리는 주제에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창의적인 친족 살해밖에 없는 이 나라 사백 년 조종은 뻔뻔하게도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
김시택이 왕실이나 김조순과 비슷한 짓을 시도했다면 다음 날로 조리돌림 후에 목이 몸에서 분리되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김시택이 평양군 이공의 총신이었기에 이 괴롭힘을 받는다면, 평양군의 장인인 김조순은 왜 무사한가?
그들은 죄를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더욱 날뛰고 있다. 이 부당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술기운의 도움을 받아, 김시택은 그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좀 오래되었던 모양이다. 하인이 머뭇거리며 질문했다.
“어떻게 할깝쇼?”
김시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 하던 생각은 현실적 본능 앞에 까맣게 잊어버린 뒤였다.
그래서 김시택은 우선 누가 왔는지 들어 보려 했다. 그 사람의 신분을 알아야 ‘집에 없다’고 해도 될 자인지, 아니면 버선발로 달려나가서 무릎부터 꿇어야 할 자인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방문객은 둘 다 아니었다. 김시택은 최근 거래가 끊겼던 침장들이 다시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김시택의 생각과 달리 행주산성에 와 있던 김조순도 그리 팔자가 좋지는 않았다.
그는 꽤 피곤했다. 정략군주 이품이 그의 정치력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품은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동시에 한시도 민폐와 사고를 멈추지 않는 그의 ‘협련군’에 둘러싸인 채 김조순에게 연일 질책을 내렸다.
“지세가 유리하고 군세도 비등하며, 더하여 저런 백성 무리와는 비할 수 없는 정예 강군이 있음에도 나가 싸우지 않는 영중추부사와 평난도원수의 저의는 무엇인가? 이대로 적도가 서울로 향하게 내버려 둘 생각인가?”
평난도원수 이득제의 경우 처음에는 이품에게 별 불만이 없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정벌 시에 이품은 이득제를 적극 지원했고, 도원수 관직도 이품에게서 나온 것이다. 대우만 잘 해준다면 충성을 못 바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도 이품의 바보짓에 질려 가는 참이었다. 이득제는 김조순 쪽에 슬쩍 눈길을 보냈다.
진중이다 보니 주요 조신은 평시의 예를 생략하고 왕의 앞에 모여 있었다. 김조순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차근차근 설명했다.
“역도들은 결코 서울로 가지 못합니다. 이미 세자(이병원의 장자 이도중(李䆃重)을 말한다)께서 궁을 보위하고 남겨둔 훈국 군사들이 충심으로 보좌할 터이니 반역패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해 보아야 앞뒤로 공격당해 궤멸할 뿐입니다. 이대로 기다리다 저들의 치중이 다하면 그때 굶주린 군사를 들이쳐서 모두 사로잡으면 대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품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는 비아냥과 동시에 네 아들도 사실상 내 손아귀에 있다는 협박이었다.
이품 또한 높은 정치력에 걸맞게 그 정도 암시는 알아들었다. 그는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씨근거렸으나, 지금 이품의 힘은 김조순의 습격을 막는 정도지 김조순보다 우월하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결국 그렇게 또 사흘이 지나갔다. 정예한 훈국 병사들도 이제 자신의 소임을 깨달았다. 적어도 당장은 전투할 일이 없는 것이다.
물리적 관측으로서 간섭하지 않으면 조선군의 운동량과 위치는 확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병사들이 조선군의 장기를 발휘하여 하나둘 양자 확률 구름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마쳤을 때쯤이었다.
아직 찬 날씨에 덜덜 떨며 수직 서던 병사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왜 밤하늘을 쳐다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딱히 댈 것이 없다. ‘무심코’라고 말하면 적절할 듯한 정도의 동기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병사는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몇 번 눈을 비비다가 자신의 뺨을 쳤다. 그러나 신통한 변화는 없었다.
결국 그는 옆에서 대놓고 졸고 있던 다른 병사를 흔들어 깨웠다.
“어이, 일어나 봐! 저, 저거 보이나?”
그 병사는 수면을 방해받은 불쾌함을 가득 담아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미간에 힘을 잔뜩 준 덕에, 그 역시 금세 하늘의 이변을 알아챌 수 있었다.
두 병사는 서로를 쳐다보고 서로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곧 두 사람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고함쳤다.
“하늘에 불덩어리가 떴다!”
“유성(流星)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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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보방식 요새는 별모양으로 생긴 대 총병, 대 포병용 근대 요새입니다. 돌출부와 만곡부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진격로를 제한시키고 화기의 집중 포화를 받게 하죠. 성벽은 낮고 두껍게 만들어 포격에 대비했으며, 성 바깥에도 촘촘한 참호와 지형 변경으로 포의 곡사 각도를 방해했습니다. 공군이 없으면 정석적으로 함락시키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물론 한 번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여러 차례의 발전을 거듭한 결과 생긴 지혜죠. 낮고 두꺼운 성벽 같은 경우 수원 화성에도 적용된 지식입니다. 산성은 이러한 진격로 강요를 자연의 지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곳에 주로 건설되었습니다.
2. 그레테 자작이 말하는 함포는 예전에 평양성 앞에서 프랑스군이 쏴서 이공의 다리를 분질렀던 그 함포입니다.
3. 정대운과 김시택 둘 다 오랜만에 나왔군요. 모두 과거 시준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났던 사람들이지요. 둘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4. 이병원(작중 이품)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장자가 이도중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병원의 3남인 남연군 이구(원래 이름 이채중)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지라, 이도중도 대원군의 백부가 되어 나중에 관직도 좋은 거 받고 잘 삽니다. 그 외엔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