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46. 국왕 친정(3)
혁명군은 원래 관군보다 더한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무엇보다 귀중한 경험적 자산이다. 여태 이기는 전투만 해 온 혁명군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그 용맹은 앞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내민 총구로 표현되었다.
옆 사람도 나와 같은 동작을 취한다는 사실은, 모든 군인과 마찬가지로 혁명군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그 시점에서 병마절도사 조기는 정신을 차렸다.
아직 조총은 닿지 않는 거리다. 그러나 화기의 사거리가 몇 보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이라고 판단된 이론상의 평균치이다.
백 보 떨어져 있는 상대에게 조총이 쓸모 있는 전쟁무기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 보 떨어져 있으니 안심하고 너한테 총 쏴도 되지?’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생명 경시가 치러야 할 준엄한 물리적 대가를 감당하게 될 것이다.
‘저들은 총알이 닿건 말건 쏘아댈 생각이다!’
조기는 확신했다. 그는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대완구, 불랑기포! 모조리 쏴! 사부(射夫, 궁수)도 편전이건 뭐건 되는 대로 당겨! 조총도 일단 쏘라고 해라!”
“너, 너무 멉니다. 병사 영감!”
“상관없어! 빨리!”
그 판단의 전제는 정확했다. 혁명군은 그 자리에서 총을 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판단의 시점과 과정이 문제였다.
조기는 너무 늦게 지시를 내렸으며, 동시에 혁명군에 대해 한 가지를 오판했다.
혁명군의 총은 그 지점에서 충분히 관군에게 닿았다.
다른 것 차치하고 사거리만 본다면 지금 혁명군의 총은 영국군보다도 우월했다.
조총을 영길리총 비슷하게 개조한 조악품도 많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수는 진품 브라운 배스 머스킷이나 복제품에 강선을 판 ‘조선 패턴 브라운 배스’였다.
강선총에 전장식으로 총탄을 장전하는 일은 지난하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그런 건 사냥에나 쓸모 있을 거라 조언했으나, 혁명군에게는 주석의 혁명적 지혜로 제정된 ‘주석탄(미니에 탄)’이 있었다.
방아쇠는 부싯돌을 튕겨내고 부싯돌은 불꽃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알갱이처럼 정제된 흑색화약이 폭발했다.
그 압력은 단단함을 자랑하던 금속 탄환을 형편없이 휘저어 벌려놓았다. 자신을 뒤에서 찌르는 압박감에 탄환은 그만 굴복하고 퍼져 버렸다.
그렇게 된 탄은 총신과 그 안에 파인 홈에 붙잡혔다. 강선은 탄을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연속되는 격심한 자극에 자신을 잊어버릴 지경이 된 탄환은 그저 곧게, 멀리 나아갔다.
“으아아악!”
화승을 후후 불던 관군의 전열이 우수수 쓰러졌다. 일부 관군이 마치 곡사포처럼 들고 발사한 조총에 정말 재수 없게도 맞아버린 혁명군 몇 명도 다쳤으나, 비교해 보자면 거의 일방적으로 때리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총과 포를 한꺼번에 쏴야 위력이 극대화된다는 생각은 관군만 한 게 아니다.
관군이 진격해서 거리를 좁힌 다음 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6파운드 야포 포탄이 날아들었다.
이 중 몇 문은 삼화 공창에서 새로 복제 제조한 포였다. 원래 사들였던 포는 그간 꽤 써서 폐기 처분한 게 많아 다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시준은 영국의 오리지널에 비해 성능이 심히 떨어질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렇게 크게 표시가 나지는 않았다.
조선의 장인들이 우월하다기보다, 이때는 영국이라고 하여 공장에 무슨 CNC를 갖다 놓고 무기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금 전 세계가 사용하는 가장 범용적인 시스템은 장구한 세월 꾸준히 개선되어 성능을 입증한 생체 비선형 컴퓨터, 그러니까 사람이다.
대충 감으로 뚝딱거리는 경험과 요령만으로도 인간은 만 년간 충분히 먹고 살았다. 약소국 조선과 강대국 영국 역시 그 점에서는 아직 같다.
현대의 빈부격차가 프랑스 혁명 당시의 빈부격차 따윈 공산 사회로 보일 만큼 큰 것처럼, 전근대에는 문명 차이가 나 봤자 현대만큼 크게 벌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사람도 그 생체 컴퓨터 다루는 법은 알았다.
자바에서는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조선의 신비로운 영약이 그야말로 신비로운 장부 누락과 함께 삼화부 공창에 공급되었다.
그러자 동인도 회사에서 고용한 영국 기술자들은 범인류적 동포애에 기반하여 조선인에게 비법을 전수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 아름다운 우정의 결과는 평산에서 꽃을 피웠다.
하늘에서 꽂히는 게 아니라 땅에서 폭발하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쇳덩어리가 사람을 찢고 군마를 쓰러뜨렸다. 정말 대박이 터져 화약 상자를 직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마사 조기는 간신히 저들의 전열 양익에 전개한 포를 알아챘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포를 쏘는 놈들은 조선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정방산성의 함락 과정에서 도주한 병사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놈들이 서양 귀신을 부려 대포를 쏘는구나!”
물론 조선군도 쏘고는 있었다. 불랑기포는 장전 속도만 따지자면 영국 6파운드 야포보다도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조선 대포가 혁명군 세 명을 쓰러뜨리면, 영국 야포는 그 열 배의 관군을 폭발사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혁명군과 마찬가지로 양 날개에 배치되어 있던 조선군 포대는 그 지점을 찔러 들어오는 2영대 기병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은 혁명군의 전위대 2영대 중에서도 전위. 선봉 중의 선봉인 혁명군 기병대였다.
과거 평안도 별무사를 기초로 한 이 기병대는 예전 왕비를 사로잡는 데에 공을 세웠던 별무군관 매경은이 이끌고 있었다.
원래 돈 때문에 혁명군에 붙었던 매경은이었으나,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법. 많은 돈뿐만 아니라 많은 명예도 먹은 매경은은 가장 열렬한 혁명의 전위대가 되었다.
“반동 놈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대포를 지키고 있던 조선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야포가 기병 앞에 노출될 경우의 대책은 현대에서 견인포대에 전차가 들이닥쳤을 때와 같다. 한마디로 말해 방법이 전무하다.
그래서 원래 호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관군 보병은, 지금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혁명군의 전열 사격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대로 무너지지 않은 것만 해도 병마사 조기의 놀라운 지휘력을 칭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 관군 전열의 뒤쪽에서는 대놓고 도망치는 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믿었던 대포 몇 문까지 망그러지자 조기는 침통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애초에 승산이 높을 거라 생각한 전투는 아니었다.
그러나 장렬하게 싸워 적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산화한 것도 아니고 이토록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병법에 말하기를 한 사람이 목숨을 내던지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틀린 인용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말은 지형을 잘 선택하여 좁은 곳에서 소수로 다수를 막으라는 소리지 무슨 근성으로 초능력을 발휘해서 일기당천을 현실로 만들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주위의 군교들이 그런 취지로 발언하여 병마사의 해석 오류를 바로잡기도 전에, 조기는 말 위에서 깃발을 휘둘러 들었다.
“나는 옛사람 관창(官昌)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죽으리라. 나를 따라 절의를 보일 자들은 모두 나서라!”
말은 장하지만, 그건 어차피 여기서 살아나도 의미가 없는 병마절도사라서 할 수 있는 선택이다. 군관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이 천 명 맡을 수 있다면 세 명만 더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기는 더 비참해지기 전에 말배를 걷어차고 먼저 돌격했다.
정말 하나만, 하나만이라도 그를 따라갔더라면 황해도 조선군 최후의 용맹한 돌격과 산화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기는 그저 홀로 깃대와 그 끝의 창날을 앞세우고 돌진할 뿐이었다.
망원경으로 전장을 보고 있던 시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항복 사절인가?’
시준은 그것에 대해 물으려고 남공철을 불렀다가, 다시 씁쓸한 표정과 함께 망원경을 내렸다.
그런 질문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사이 벌써 혁명군의 총탄이 그 이상한 기수를 산산조각 내었으니까.
시준은 곳곳에서 꿇어 엎드리는 조선군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뒤 혁명군은 경기도 경계를 거침없이 돌파했다.
한편 서울에서는, 김조순이 조선의 군세를 총괄하는 영중추부사답게 국왕 친정군에 따르는 여러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군량 횡령, 무기 훼손, 유언비어 등 조선군에게 익숙한 사보타주를 일삼던 이품과 풍양 조문의 ‘협련군’ 중 20여 명이 훈련도감에 의해 체포되었다. 김조순은 별 고민 없이 그들의 사지를 찢어 성벽에 내걸었다.
조선에서 사형은 반드시 왕의 재가가 필요하다거나, 사형에는 교형과 참형만이 규정되어 있다거나, 협련군은 아무리 급히 모은 잡배들이라도 엄연히 왕인(王人)이라는 사실 따위는 김조순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품 역시 조용히 출정하는 게 낫다고 여기게 되었다. 김좌근도 누나에게 보여주었지만, 조선의 관념상 이품의 아랫사람을 멋대로 처분했다는 얘기는 상전에게도 똑같이 해 줄 수 있다는 협박이다.
이품은 굴욕 속에서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환기하려 애썼다.
어쨌든 협련군이 이만큼 있는 이상 김조순이 태연하게 들어와 영채에서 자신을 끌어내어 묶는 따위의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 당장 혁명군의 코앞에서 그런 내전을 일으키기는 힘들다.
바로 그 갈피를 타고 이품 자신의 절묘한 정략이 발휘되는 것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만 했다.
훈련도감이 싸우고 있을 때 혁명군과 내통하여 전세를 뒤집는다.
만약 혁명군이 지나치게 시건방진 요구조건을 내밀거나, 역량이 영 못 써먹을 것 같거든 그대로 격파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자의 명예라도 가져가면 된다.
아무리 김조순이라도 설마 왕의 친정에서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인다. 사실 강철군주 이공도 홍경래를 끌어들이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의 ‘책략’을 끼워 맞춤으로써 자기 합리화를 통한 안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공의 심계와 거의 비슷했다.
이품은 어느새 자신이 조카와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중요하다. 날이 2월로 접어들 무렵에는, 안색이 한층 밝아진 왕과 그 정예 친위군이 위엄차게 서대문을 나섰다. 김조순 역시 물론 훈련도감을 지휘하여 ‘뒤를 따랐다’.
***
엄청난 양의 조총과(조선군은 무기 비축량 자체는 많은 군대였다) 화약, 그리고 각종 포로를 노획한 혁명군은 개성에 도달했다.
개성이라고 하면 유서 깊은 전조 고려의 수도이며, 그 고려국의 잔당인 송상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남조선혁명당이 만들어지기도 전, 송상은 천안 삼거리 사건으로써 혁명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말하자면 송상은 남조선혁명당의 선배이자 시초 격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송상의 불온한 움직임은 지금까지 혹독한 탄압을 겪었다. 혁명막부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고 조직은 와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개성 유수도 개성에 뿌리내린 송상의 본거지만은 뽑아내지 못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이 개성은 부민 전체가 송상에 직간접적으로 소속되어 있거나 그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도시 자체를 지워 버리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다.
남조선혁명당 개성지부는 다른 고장에 비해 다소 특별한 혁명의 방법론을 택했다.
송상 대방이자 남조선혁명당 개성지부장이며 중앙인민회의 외무위원회 대외연락담당초빙위원인 박광유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육칠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모았다.
그러고는 개성 유수 윤서동 앞에 나아갔다.
“천하의 흉패한 대역도 정시준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의민(義民)을 데려왔소이다. 바라건대 유수께서는 우리를 한 팔로 써 주십시오.”
일전 영길리 함대를 맞이해야 했던 강화 유수 윤서동은 하필 이 시기에 개성 유수로 임관한 상태였다. 관운이 이렇게 없기도 쉽지 않다.
불운한 남자 윤서동은 뻔뻔한 얼굴의 박광유를 마주하고 어처구니가 날아갔다.
조정이 박살 나다시피 한 처지에서 개성 부민을 모조리 적대할 수 없어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지, 송상이 혁명막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쯤이야 그도 안다.
게다가 박광유의 무리는 조정의 관군보다도 많은 조총과 염초, 곡식을 쌓아 두고 있었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박득출의 서울 오죽당이었다.
경기도의 혁명당 지부에 나눠 도망쳤던 그들은 정치국 지시를 받고 다시 슬그머니 합세했다. 그러고는 김유근이 김조순 이름 팔아 빼돌린 치중을 다시 개성으로 집결시켰다.
윤서동이 그 내막까지는 몰라도, 수상한 보부상 무리가 떼거지로 뭔가를 짊어지고 개성으로 몰려온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억세고 손 날랜 보부상은 그 자체로 병력이다. 국초에 조선이 보부상을 우대한 것, 고종이 그들을 정치깡패로 활용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쯤 되자 윤서동은 박광유의 의도를 깨달았다.
대역적 정시준이 보낸 황해 병마사의 찢어진 깃발이 배달된 지금, 저자들이 정말 혁명군과 싸우자고 왔을 리가 없다(윤서동은 그 생각이 맞는다고 확신했다. 절대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박광유는 지금 윤서동에게 명예로운 후퇴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강화도에서 동인도 회사 배를 만났을 때처럼, 윤서동은 전진이면 모를까 후퇴라면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수틀리면 뒷일이고 뭐고 달려들어 자기 모가지를 딸 ‘의로운 백성’들이 관아 주변에 몰려와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흠. 이토록 용맹한 의병이 있으니 개성부는 걱정할 것이 없도다. 마침 주상 전하께서 위엄을 떨쳐 출진하신다는 파발이 왔으므로 나는 관헌으로써 마땅히 군왕을 수행하러 병사를 이끌고 가겠다.”
“과연 사또의 명철한 지혜와 드높은 충성은 타인의 미칠 바가 아니올시다.”
윤서동이 아무리 싸움을 싫어한다지만, 사실 개성은 그렇게 버려도 되는 도시가 아니다.
여진족 따위 맞설 테면 맞서보자 외치던 전쟁군주 인조가 유사시 친정할 전진기지로서 채택된 도시가 개성이다.
정말로 ‘북쪽으로의’ 친정 계획이 있었다. 인조는 저 추악한 북방 이종족과 정면 대결하는 조선의 방패를 천명했다.
실제 전쟁 시에 인조가 개성 대신 남쪽으로 친정해 버린 것은 전장의 변화무쌍함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파악해야 하지, 용맹왕 이종이 겁을 먹었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유명한 박연 폭포 근처의 대흥산성부터 임진강을 수비하는 덕진산성(德津山城)까지, 개성 일대의 강력한 방어선은 사실상 조선 수도 최후의 북방 보루였다.
허나 그 방어선도 결국 뒤를 받쳐주는 배후 도시가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개성이 돌아선 이상 주위의 산성 연결망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판단한 윤서동은 기민한 자원 보존을 택했다.
윤서동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가 격파당하지 말고 유리한 곳에 모여 적을 막아내기 위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물러났다.
박광유는 싱글벙글하며 병사가 빠진 개성 주변의 요새들을 장악했다. 어쩌면 혁명군을 도성 코앞에서 돈좌시켰을지도 모르는 경기 북부 방어선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
개성에 입성한 시준은 일단 박광유에 대해서 크게 치하했다.
그 공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그 업무를 마쳐야 방금 보고된 이상한 소식에 대해 논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주산성으로 왕이 친정한다고?”
“그렇소이다. 주석 동지.”
시준은 당황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조선 국왕은 이렇게 용맹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혹시 김조순이 새로 앉혔다는 국왕 이품이 역사의 그늘에 묻혔던 전사왕인 것일까?’
이품이 고종의 생물학적 증조부라는 사실을 시준이 알았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일찍 교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준은 진지하게 의심해 보았다. 그는 남공철을 보고 물었다.
“행주산성의 대비는 어떻습니까? 필시 성채는 단단하고 화포는 많겠지요?”
역사에 관심 없는 시준까지 알 정도의 성이다. 행주 대첩과 행주치마는 공교육을 이수한 사람이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는 일화였다.
따라서 시준의 생각에 행주산성은 그 전공에 어울리는 최강 요새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어야 했다. 유적지가 아니라 현역 전투성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이번에도 시준을 배신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도 거기는 유적지가 맞았다.
남공철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석 동지. 행주산성은 왜란 이후 특별히 크게 수리하거나 많은 병사를 둔 적이 없소이다.”
“예?”
“아, 그야 주석 동지의 말씀대로 여러 차례 논의되기는 했었지요. 장신(將臣)이며 지방관도 많이 품의하였고요. 그런데…….”
남공철이 말을 흐리자 시준도 이제 20년 넘는 조선 짬밥으로 대강 알 만했다.
‘또 돈이 없었구나.’
조선은 왜란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행주산성을 특별히 증개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삼국 시대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괄목할 만한 발전은 많지 않다는 얘기다. 권율은 행주대첩에서 고대 유적을 진지로 삼고 싸운 셈이다.
이후로는 이 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중신들이 몇 차례 수리를 건의했으나 끝끝내 불발되었다. 물론 시준의 생각대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돈이 없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투입할 우선순위가 낮다는 뜻이지 정말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행주산성의 수리가 정말로 다급한 문제였으면 조선 조정도 공사는 해 봤을 것이다.
행주산성은 그럴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권율에겐 고대의 성채로도 충분했다.
파주 남조선혁명당의 도움을 받아, 있는 대로 긁어모은 나룻배며 뗏목을 타고 임진강을 건넌 시준은 얼마 가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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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윤서동 오래간만에 나왔군요. 동인도 회사 배가 처음 왔을 때 강화 유수 하고 있던 그 사람이지요. 황해 병마사 조기처럼 윤서동 역시 이 시기에 실제로 개성 유수를 했습니다. 강화 유수에서 파직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유수를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조선에서 파직이 그다지 커리어에 장애가 되는 조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현대 북한처럼 정해진 인재풀에서 사람을 돌려 썼기에 해고/귀양 이후에도 금방 다시 불러 썼습니다. 북한도 남한 언론에서 '숙청'되었다고 보도하는 사람 대부분은 (정치범이 아니면) 그냥 잠깐 잘렸다가 다시 복직하는 경우인 사례가 많습니다.
심지어 사대부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하는 조치로 취급되는 삭탈관직을 당한 사람조차 나중에 멀쩡히 다시 벼슬 하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초반 나왔던 평안 감사 이서구가 그 예시. 윤서동 역시 작중에서는 좀 무능하게 나왔지만 이 이후 이조와 사간원에서 중책을 계속하여 역임하는 인사/감사 관련 전문가이기도 하고요.
2. 조선은 산성에 방어책을 주로 의존했지만, 새로 쌓은 산성은 거의 없습니다. 재정 문제도 있는데.... 다음화에 나오겠지만 그럴 필요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미 삼국 시대에 쓸만한 산성 후보지는 모조리 발굴되어 이미 성이 있었으니까요. 굳이 필요하다면 수리하거나 석성을 덧붙이는 정도. 여태까지 작중에 나온 산성 전부가 그렇습니다. 대흥산성이나 정방산성은 고려 때 처음 지어진 것인데(여기가 고려의 수도권이었으니까요) 이 둘은 조선에 와서 꽤 크게 수리하거나 개축한 편에 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