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46. 국왕 친정(2)
김씨는 절벽 나무뿌리에 매달리듯 정신을 차렸다.
침착하지 못하면 죽는다.
“보면 모르느냐? 약을 달이고 있었지.”
김좌근은 피식 웃었다.
“원기를 보하는 약은 대추를 넣고 달이지만[補元氣以大棗, 『동의보감』], 아무리 봐도 대추는 아니고……. 그 외에 약 달이면서 넣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요?”
김씨는 재빨리 약 이름을 지어내려 했다. 그러나 쓸데없이 의서를 외우고 있는 듯한 남동생의 눈에 걸리지 않을 만한 처방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김좌근은 휘적휘적 걸어왔다.
“보약이라 하면, 일단 누님부터 한 사발 잡숴 보시오.”
“뭐라고?”
“부친께 올릴 탕약을 자손이 먼저 맛보는 것은 당연하지요.”
김씨는 가빠오는 숨을 진정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못한 채 남동생을 노려보았다.
김좌근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끓고 있는 탕기를 한가롭게 쳐다보던 김좌근은 곧 뒤를 돌아보았다.
“그년을 끌고 와라!”
김씨는 하인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그년’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신창이가 된 나인 현완이 건장한 하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오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김씨는 현완이 당한 무시무시한 고문의 흔적을 잘 볼 수 있었다. 의식은 이미 없고, 전신에 타거나 베어지거나 깨지거나 터지지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김씨가 그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이유는 현완에게 걸친 옷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관점에서, 신분 낮지 않은 여자를 알몸으로 끌고 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현완을 사람이 아니라 시체의 일종으로 취급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아마 김씨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김씨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너와 같은 어린아이에게 누가 이리 집안의 일을 전단하라 허락하였느냐? 윗사람의 종복을 함부로 학대하고도 네가 도리를 안다 할 수 있겠느냐!”
반박은 전혀 안 되고, 시간을 번다는 측면에서도 무의미한 발언이다. 오래 끈다고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김씨는 일단 밀려드는 공포를 틀어막는 선택밖에 할 수가 없었다. 곧 처형당할 죄수가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원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김좌근은 발악이 겨우 그것뿐이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께서 워낙 국사에 분주하시니, 가내외의 일로써 어머님이 미처 살피지 못하시는 부분을 제가 맡게 되었소이다. 불효불충한 장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둘째 형님(김원근)은 이미 조정에서 아버님을 돕고 계시니까요.”
김씨는 더 할 말이 없어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김좌근은 그런 누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 아버님께서는 누님을 죽이시지는 않을 겁니다. 폐주의 아랫사람으로서 옛 영화를 잊지 못한 나인 하나가 멋대로 벌인 일일 뿐, 어찌 감히 딸이 아비를 죽이려 하였겠습니까?”
조선에서 귀족에게 직접적인 처벌이 가해지기는 힘들다.
딱히 그 사람이 권세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21세기에도 권력과 수사 강도는 반비례하지만 이 경우는 권력의 차이가 아니라 종족의 차이 때문이다. 개가 사람을 물면 대개 도살되지만 사람이 사람을 물면 대개 벌금 정도로 끝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형벌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보복의 대리이고,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조선에서 귀족에 대한 처벌은 보통 그 하인이나 노복을 족치는 것이었다.
물론 양반은 범죄도 아랫사람 시켜서 하는 일이 잦았다. 직접 저지른 실행범을 잡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럭저럭 이해가 된다.
허나 정말 하인들은 아무것도 안 한 경우에도 이러한 처분은 자주 쓰였는데, 그건 이 시대의 신분제 개념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사용인의 위치는 현대로 치면 전화기나 컴퓨터, 자동차 같은 도구였다. 딱히 적극적으로 멸시한 게 아니라 그냥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 자체를 잘 못 했다.
사서에는 역모가 종놈의 귀에 들어가 망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도 안 듣는다’의 ‘아무도’에는 천것들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하인들에 대한 처벌은 말하자면 현대의 벌금형이나 가압류와 비슷하다. 재산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겸사겸사 기세를 꺾고 추가적인 영향력을 차단시킨다.
그러나 조선 최고 최악의 죄인 강상죄는 그러한 통념에서 제외된다.
이건 하인 선에서는 해결이 안 된다. 순전히 법대로만 하면 김조순의 집은 헐어 연못으로 만들고, 한성 판윤이 파면되며 한성부가 한성현쯤으로 강등되어야 한다.
하지만 김좌근은 지금 나인 선에서 네 범죄를 처리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김씨의 눈이 마지막 양심의 흔들림을 담은 채 자기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현완을 향했다.
저런 고문을 당했을 정도면 정말 지독히도 오랫동안 자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거기서 현완이 한마디만 했으면 김씨도 굳게 절개를 지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완은 이미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김씨에게 어떤 종류의 변명거리를 선사했다.
그 변명은 김씨의 양심에 작은 흠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그때를 놓치지 않은 김좌근의 악마 같은 속삭임이 가차 없이 그 틈을 파고들어 벌렸다.
“지금 당장은 왕이 비호하고 있어 어쩔 수 없다 하여도, 풍양 조문 역시 곧 저자와 같은 꼴이 날 겝니다. 그러나 제 외조카를 보아서라도 아버님께서 누님을 함부로 해치시지는 않을 거예요.”
김좌근은 고개를 숙여 누이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저 가만히, 죽은 사람처럼 계시면 됩니다. 왜 횡액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십니까?”
새장 안의 새처럼 얌전히 있어라. 살아 있으려는 노력은 하지 마라. 그건 너의 것이 아니니까.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고, 또한 박탈될 것이다.
김씨는 그것을 거절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종복은 주인을 위해서 죽었으나, 주인은 종복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김씨의 눈이 순간적으로 약탕기에 가 닿았다. 그 시선을 따라간 김좌근은 씩 웃었다.
그러고는 탕기를 발로 내리쳐서 부숴 버렸다.
그릇이 깨어지고 약이 흩어졌다. 김좌근은 싸늘하게 말했다.
“누님 마음대로 부모가 주신 목숨을 버리실 수는 없습니다.”
김좌근, 그리고 그가 대리하는 부친의 의지는 지금 그녀에게 생명을 강제로 주었다. 환원적인 의미에서 이는 죽이는 것과 동일했다.
망연히 서 있던 김씨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참으려고 했으나, 일국의 왕비였던 사람은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남동생의 앞에서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김조순은 딸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말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아들도 (아마) 자기를 배신했는데 딸은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김조순은 인생을 포기한 듯한 고소를 머금었을 뿐이다.
김씨는 가장 엄중하게 유폐되었다. 김좌근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하인도 김씨의 수발을 들거나 할 수 없었다.
김씨가 그간 스스로 길렀던 원자도 강제로 어미에게서 떼어냈다. 이제 말도 곧잘 하는 원자는 울고불고 난리 치며 버텼지만 그는 지금 원자가 아니라 일가의 외손주일 뿐이다.
김조순은 김좌근에게 쓴맛 나는 치하를 내렸다.
“내가 앞으로 의지할 사람은 너뿐이구나.”
“과찬이십니다, 아버님.”
나인 한 사람의 범죄로 처리하겠다는 김좌근의 말은 단지 김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풍양 조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아무리 김조순이라도 지금 혁명군이 황해도를 돌파한 상황에서 이품의 마지막 발악을 감수하며 조씨 형제를 처벌하기는 쉽지 않았다.
김좌근은 그렇기 때문에 누나를 살려 준 것이다. 김씨를 강상죄로 엮게 되면 당연히 풍양 조문도 끌려들어 가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김조순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김조순이 고른 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멍청했다. 김조순도 이 기회에 권력 문턱에서 기웃대는 조문을 쓸어내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나, 그러면 왕이 무슨 발악을 할지 모른다.
다른 때라면 그런 자의 발악 따위 웃으면서 짓눌렀을 터.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너무 바쁘다.
김조순은 자기의 처지를 잘 헤아린 아들 김좌근의 일처리를 존중했다.
김조순은 이 사건을 물밑에서만 다루기로 했다. 지지부진한 친정 추진에 속도를 줄 만한 패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결과를 전달받은 조만영과 조인영, 그리고 이품은 이 사건과 자신들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애초에 김씨는 버리는 패다. 나인 현완부터 자기들에게 이어지는 선은 전부 끊어 놓은 상태. 결백에는 자신이 있었다.
‘자백했다고 하나, 그건 김조순의 집안에서나 일어난 일이 아닌가? 그것이 허언이 아니라고 어떻게 증거하겠는가?’
그러나 김조순이 ‘더 뻗대면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훈련도감 군사를 동원해 한양에서 풍양 조씨의 씨를 말려버린 다음 증거를 찾겠다’는 암시를 주자 결국 협상은 타결되었다.
양쪽은 자기 의도를 숨긴 채 일단 김조순이 보좌하는 국왕의 친정에 합의했다.
양측은 서로의 궤계를 이 친정에서 달성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김조순의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명백하다. 혁명군을 행주산성에서 깨뜨린 다음 여세를 몰아 이품의 ‘전사’를 연출할 계획이었다.
그에 항거하는 이품 또한 조인영의 동분서주로 천 명가량의 오합지졸을 모았다. 협련군으로 편성된 이들은 훈련도감 군세에 맞서듯 왕을 둘러쌀 것이다.
이품은 이들을 바탕으로 김조순의 흉계에 저항하며, 동시에 혁명군을 무혈 투항시켜 그들과 합세한 다음 김조순을 처리하자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려면 혁명군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야 했다. 다급해진 조만영, 조인영 형제는 이제 대놓고 이적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훈련도감의 출진 소식과 그 군용, 진세 등을 상세히 적어 경강상인 중 믿을 만한 자에게 쥐여 주었다.
박득출의 서울 오죽당은 이미 남조선혁명당의 일제 봉기 전부터 싹 도망쳤다. 김조순이 격하게 분노하면서도 정시준과 관련된 자를 다 잡아 죽이지 못한 이유다.
그래서 지금 도성 안팎을 오갈 수 있는 자들은 도성의 세곡을 나르는 경강상인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적지 않은 수가 오죽당을 통해 시준과 연계가 있다.
김조순도 안다. 허나 그렇다고 그들까지 모조리 없애 버리면 앉아서 굶어 죽는 꼴밖에 안 되기에 일단은 건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풍양 조문은 그 점을 활용했다.
조선사에 길이 남을 국왕 친정, 그러나 관계자 대부분이 싸울 생각보다는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는 친정군은 조선치고 이례적인 속도로 준비를 마쳤다. 1월도 거의 저물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는 평산까지 다다른 시준과 혁명군도 최초의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황해도 병마절도사 조기(趙岐)의 깃발이 남공철의 망원경에 들어왔다. 그는 지형과 상황을 빠르게 분석한 뒤 주석에게 간단하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싸워야 하겠소이다. 주석 동지.”
시준은 한숨을 쉬었다.
***
황해 병마사 조기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대로 적을 멀거니 통과시켜 줬다간 본인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문이 통째로 날아간다.
황해도 관군이 거의 영남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변명이 못 된다.
충무공 이순신 이후로 조선 조정은 군대에 지원 따위 없어도 장수가 지혜로우면 대충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다는 경험칙을 체득한 상태였다.
군이 엉망이라면 그건 체계나 재원의 문제가 아니라 장수가 무능해서다. 충신이라면 조정에 예산 요청하기 전에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한다.
영조 때 박문수를 비롯하여, 많은 군사 책임자들은 ‘이순신은 돈 없어도 잘했는데 왜 넌 못하니?’라는 열성조의 질책을 들을 때마다 분루만 삼켜야 했다. ‘요순우탕은 잘했는데 왜 넌 나라를 이 꼴로 두었니?’라고 대꾸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조기는 조정에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는 황해도의 사실상 마지막 도시 평산을 결전지로 정했다.
황해도에는 길이 여러 개 있으나 어느 길로 가든 경기도로 진입하려면 평산을 지나야 한다. 그곳을 틀어막고 승부를 보자는 조기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승부라고 생각한 것은 절도사 혼자뿐이었다.
병사들은 자살하려면 너 혼자 하라는 심정으로 백팔 가지 예술적 탈영법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시준의 앞을 가로막은 병력은 약 천 명 정도였다.
그러나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현재 상황을 감안했을 때 조기는 이순신의 발밑 정도에는 비벼볼 만한 위업을 이루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미 보고가 없는 것에서 대충 짐작했으나, 시준은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평산의 남조선혁명당은?”
차형기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진압당했소이다. 간신히 탈출한 동지들은 혁명군에서 구완하고 있고요.”
하긴 남조선혁명당이라고 백전백승하리라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런 민란이 곳곳에서 성공한 게 기적이다.
“천 명밖에 안 되는 군세로 우리에게 대항하려면 산이나 성에 들어가야 할 터인데.”
“주석 동지의 말씀대로 평산은 트인 곳이라 대군을 막기 어렵소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물러나면 금천을 지나 개성부나 대흥산성(大興山城)까지 밀리는데 그러면 이긴다 해도 황해 병마사의 목은 보전하기 어렵겠지요.”
관할이란 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공철은 그러면서 영 마땅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라서 적은 우리를 죽기 살기로 막을 것이오이다. 곧바로 싸우면 인마가 많이 상할 듯합니다.”
듣고 있던 그레테 자작이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아무도 안 죽는 전쟁이 있던가? 걱정 마시오. 대프랑스 병사들의 훈련을 받은 혁명군은 진격만으로 저들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력! 오직 그것만이 승리를 보장하오.”
시준은 자기가 지금 프랑스군 장교와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어딘가의 황군 장교와 이야기하는지 헷갈렸다.
이자들이 정녕 100여 년 뒤에 선조 이연과 자웅을 겨뤄 볼 만한 속도로 수도를 털려버린 자들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남공철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는 그레테 자작의 결론 자체에는 동의했다.
“그렇소. 언젠가는 싸워야겠지. 여기에서는 지형이 유리하므로 될 수 있는 대로 기세를 살려, 총포의 수효로 결판을 내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석 동지?”
시준은 마치 자기가 전술에 대해 잘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부국장 동지의 계책이 옳아 보이니 그것으로 하겠소.”
남공철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모여 있던 영대장(연대장)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주석 동지 명의지하(名義之下). 이 사람이 잠시 군령을 대리하겠소. 전위 2영대는 3영대와 줄을 맞추어 옆으로 벌려 서도록 하시오! 모든 군사는 일자진(一字陣)을 엄정히 갖추고 총탄을 잰 채 ‘혁명걸음’으로 나아가도록. 군령이 떨어지거든 지체하지 말고 방포하시오!”
“예에!”
혁명걸음이란 단어를 다시 듣게 된 시준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는 허핍하게 웃으면서 영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황해 병마절도사 조기는 망원경이 없었다.
그래서 저편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혁명군의 이상한 걸음걸이를 한참 뒤에야 눈치챘다.
“왼발, 왼발, 왼발, 왼발!”
구령에 따라 다리를 교대로 내밀지만, 상체와 두 팔에 받쳐 든 길쭉한 영길리총은 미동도 없다.
그레테 자작은 시간이 없던 혁명군에게 산개 전투나 고급 탄도학, 복잡한 장비 사용법의 교육은 전부 포기했다. 그의 훈련은 극히 나폴레옹적인 것이었다.
오직 제식. 그거면 충분하다. 전열을 이루어 포화를 주고받는 현대 보병에게 ‘제식은 곧 전투력이다’.
지금껏 제대로 된 전투가 없어 그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다는 듯, 혁명군은 일부러 발소리를 쾅쾅 울리며 나아갔다.
혁명군에게는 자장가만큼이나 익숙한 박자다. 곳곳에서 장교 역할을 하고 있는 정감록파 군교들이 거기에 능숙하게 구호를 섞었다.
“왼발, 왼발! 혁명의! 중앙! 인민회의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제복과 군홧발 소리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듯한 프로이센의 군대 변태들이 만들어낸 ‘찌르기 걸음(Stechschritt)’은 이때 유럽에서 꽤나 유행 중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에게 오염된 혁명군의 관절을 뒤늦게 알아채고 걱정한 시준은 최대한 순화하여 각도를 낮추었다.
건강 문제도 있지만 우선 어느 나라 열병식이 생각나서 보기가 싫었다.
하지만 그 정도도 조선군에게는 기괴한 공포였다.
“저, 저 기괴한 짓거리는 뭔가? 무얼 할 작정이야?”
“도사의 요참에 미혹된 군이라더니 저것이 바로 방사들이 말하는 우보(禹步, 도교의 퇴마 보법)인가?”
그들이 한 발 한 발 다가들며 외치는 정시준 결사옹위의 구호는 조선군에게 종교적 농민봉기 집단의 주문처럼 들렸다.
하긴 기원을 따졌을 때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는 하다.
물론 병마절도사쯤 되는 사람이 그런 되도 않는 헛소리에 휩쓸려서는 곤란하다. 조기는 이를 악물었다.
“나오는 대로 난언을 지껄여 군심을 흐트러뜨리는 자는 참한다! 총포를 일제히 퍼부으려면 얼마나 걸리겠는가?”
“완구나 불랑기포(佛郞機砲)라면 어찌 해보겠소이다만 총은 아직 닿지 않소이다.”
얼마 있지도 않은 대포를 깔짝깔짝 쏴 봐야 큰 의미가 없다. 조기는 혁명군이 조선군 화기의 사거리 내에 들어올 때까지 참기로 했다.
당연하지만 혁명군이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었다.
곧 본영부터 파도처럼 적기가 올라가고, 넓게 퍼져 있던 2천 명의 전열 곳곳에서 복대장(중대장), 단대장(소대장), 방대장(분대장)들의 외침이 차례대로 하늘을 찔렀다.
“제자리에-섯!”
척! 하는 소리가 관군의 귀에 들리는 것처럼 착각될 지경이었다.
병마절도사를 위시한 조선 관군은 침을 삼키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동작에 소요된 것은 초 단위로 세기도 민망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차라리 그 시간이라도 아껴 도망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조총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2천 개의 머스킷이 일제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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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나인 현완은 꽤 한참 전에 나왔었죠. 풍양 조문과 김씨를 연결해 주던 가상 인물입니다. 순조 이공의 나인이었다는 설정입니다.
2. 박문수는 영조에게 황해 수군의 강화를 위한 전함 건조 예산을 신청했다가 이순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며 혼납니다. 이순신의 선례가 무시무시했던 탓도 있기는 한데... 이때는 신료가 국왕에게 그런 세세한 돈 얘기를 건의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이건 회사에서 높은 의사결정자에게 보고하면 혼나는 '기술적 사항'에 속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내 메신저를 구축한다고 할 때 그 소스코드를 상무나 전무에게 보고서로 갖다 주며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는 맥락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옆에서 '황해도에서는 이러이러한 재원이 있으니 이순신보다도 훨씬 사정이 낫죠!' 하며 영조를 거드는 척하던(그러면서 좀 황해도 재정 좀 다시 살펴달라고 은근히 암시하던) 형조 참판 이주진도 '지금 임금 앞에서 너희들이 감히 돈 얘기를 해?(진짜 이렇게 말함)' 하며 같이 추고(공식적 질책) 해 버립니다. 영조가 원래 좀 자기 예민하면 주변 전부에 땡깡부리는 타입이긴 했습니다.
3. '찌르기 걸음'은 구스 스텝이라고 알려진, 그 북한 열병식 하면 생각나는 다리 한참 들어서 내려찍는 그 보법이 맞습니다. 원래 프로이센에서 발명된 것입니다. 관절과 몸에 엄청나게 나쁩니다.
이 때문에 열병식 연습하는 이북 병사들은 불구자도 많이 나올 정도로 고생을 하지요.
게다가 정치적 이유로 열병식을 자주 하는 해에는 더 지옥인데, 예를 들어 9.9절(건국절)에 열병식을 하고 다음 해 초에 당대회라도 또 한다고 치면(2021년 연초에 8차 당대회가 있었죠) 간신히 수개월이나 걸려 몸 다 망가뜨리고 열병식 했더니 내년 2월에 또 한다며 다시 반년 가까이를 연습으로 붙잡아 놓는 식입니다. 쓰러져서 죽거나 후송되는 사람도 많고요.